본문 바로가기

강의/강좌

부족동맹에서 왕국으로

신학아카데미 탈/향 2009 가을 강좌 '역사로 읽는 성서II - 부족사회와 군주제사회 야훼신앙의 역사' 여섯 번째 마당 강의 원고


-------------------------------------



부족동맹에서 왕국으로

 

 

 

 

민족사의 시나리오

 

모세가 영도하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랑하다가 가나안 땅에 진입한 이후부터 다윗-솔로몬의 왕국이 건국하기 이전까지 팔레스티나에 형성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흔히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라고 부른다. 여호수아기〉 〈판관기〉 〈룻기〉 〈사무엘기상등이 내용상 이 시대를 이야기하는 제1성서의 텍스트들이다. 물론 이런 제1성서의 시나리오가 실제 역사와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역사적 문헌으로 처음 정착한 것은, 추정컨대, 요시아 왕실의 역사가들의 작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6-1] 이스라엘 지파동맹의 영역에 관한 제1성서의 시나리오


연대기로 보면 대략 기원전 13세기에서 11세기까지 약 2백년 정도의 기간을 말하고, 철기 문화가 가나안 지역에서 시작된 시기의 일련의 사회역사적 배경 하에서 벌어진 사건들 속에 이 역사적 공동체의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다.

여호수아기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진군하여 땅을 정복하고, 약속된 땅을 배분받는 이야기다. 한데 판관기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기가 여호수아기처럼 일사불란한 과정이 아니며, 끊임없이 위기로 점철된 역사임을 말한다. 이때 판관으로 묘사된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역의 부름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영웅으로 묘사된다. 룻기는 룻이라고 하는 여인이 대가 끊겨 몰락 위기에 놓인 한 가문을 되살리는 일종의 영웅담이고, 사무엘기상은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가 해체될 무렵 국가로의 길향해 치닫는 역사를 보여준다.

세세하게 보면 매우 다르지만 전체적인 골격에선 거대한 흐름을 이루는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에 관한 제1성서의 시나리오는, 모세 이야기와 연결되면서,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외부에서 이주해 들어온 하나의 종족으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야곱의 후손들이라는 민족사적 설화로 직조된다. 그리고 다윗 이야기야 결부되면서 민족사의 적통은 유다 왕국으로 계승되었음을 말한다.

 

[그림6-] 아마르나 토판문서


역사로서의 출애굽

 

장정만 60만 명에 달한다는 엄청난 탈주의 역사는 존재했는가? 현존하는 어떠한 문헌에도 그러한 대대적인 이주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주전 14세기 가나안의 봉신들이 제18왕조(신왕조)의 아멘호텝 3세와 4(=아케나텐)에게 보낸 토판으로 된 서신(350개가 출토됨)인 아마르나 문서(아카드어로 쓰임)[각주:1]에는 가나안 지역에서 활동하는 부랑자, 무법자, 용병 등을 가리키는 하비루[각주:2]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는 1성서히브리는 이들과 동일한 명칭의 변형태로 보인다. 즉 이스라엘의 뿌리는 이들 하비루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한데 그 중 한 문서에 따르면 이들은 상당수가 이집트에서 노역하다 도망하거나 난민으로 이주한 자들이며, 그 수가 몇십에서 몇백 명에 지나지 않은 소수의 집단으로 묘사된다. 이런 적은 규모의 집단이 벌이는 탈법적 행동을 가나안 성읍국가의 통치자가 감당하지 못하여 파라오에게 하소연하고 있다. 몇백 명도 그럴진대, 몇백만 명이나 되는 인구의 대대적인 이동이 있었다면 아마도 가나안 사회는 엄청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변동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암시하는 문헌은커녕 고고학적 발굴물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 이집트의 입장에서도 수백만이나 되는 엄청난 인구가 빠져나간다면 국가적으로 매우 심각한 위기상황을 맞았을 것이다. 아니 당시 이집트 인구 전체를 추산해도 그 정도에 미치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이집트에서도 이런 인구 이동에 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

게다가 고고학적으로 이 시기에 이스라엘이 정착한 지역인 가나안 중부 고원지대의 인구는 45천 명을 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수백만 명의 인구집단이 황량한 시나이 반도를 수십 년간 유랑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상이다. 요컨대 거대한 출애굽 집단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아마르나 문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수십, 수백의 탈주자들이 14세기 어간 지속적으로 이집트 국경을 넘어 가나안으로 왔다는 기록은 출애굽의 이야기가 전혀 사실무근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한 하비루의 기억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신화 속의 신앙으로 형성된 것이리라.

 

가나안 중부 산지의 역사의 이스라엘

 

가나안이 철기 시대에 들어설 무렵 중부 산지에 갑작스런 인구의 팽창이 있었다는 게 고고학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석회 방수설비가 된 종모양의 저수지가 건조되고 산지에 계단식 농지가 조성되면서 올리브와 포도 등의 재배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적인 요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시기에는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세력이 약화됨으로써 이들의 예속사회였던 가나안 지역에 거중조정자가 사라짐에 따라 종족간 국가간 분쟁 가능성이 한결 높아졌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해양족속의 폭력적인 이주로 말미암아 평야지대의 성읍국가 사회가 급속도로 혼란에 빠지게 된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왜 이 시기에 해양족속은 대대적인 동진을 감행했을까.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는 동부 지중해 지역에서 광범위한 파괴가 이루어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추정컨대 북방의 도리아 족속이 필로폰네소스 반도로 남하하여 그리스 사회 전역을 파괴하고 미케네 문명을 붕괴시키는 상황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남부의 많은 해양 족속이 도리아인을 피해 동진하면서 지중해 동부 전역에서 대대적인 사회적 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철제무기로 무장한 대대적인 해양 족속들의 폭력적인 이주의 물결이 이집트와 가나안 지역으로 거세게 몰아치게 되자, 가나안 저지대의 성읍국가들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난민이 되어 그 사회를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생존을 위해 결속하여 도적집단, 반란자, 용병 등 이른바 하비루 집단으로 전화되어 성읍국가 사회를 파괴하는 또 다른 주역이 된 것이다. 바로 이런 하비루를 포함해서, 난민화된 성읍국가 대중들이 산지로 이동하여 거기에서 정착촌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이주민들은 다양한 지역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혈연적으로도 다양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그들 중에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하비루도 있었다. ‘모세 집단이 존재했다면, 아마도 그들은 이들 이집트에서 탈주한 하비루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이집트 출신 하비루 가운데는 매우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장된 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 가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야훼신앙의 모체가 가나안에 유입된 것은 필경 이들에 의해서였을 것이며, 이들의 정치적 종교적 비전이 이스라엘 지파 동맹 사회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국가사회의 폭력을 체험한 이들 난민들의 사회는 모세 집단이 가져온 성찰적 난민의 신학을 느슨하게나마 수용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여러 토착 신앙들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가나안 평지 문화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이스라엘 사회는 다른 한편에서 독특한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필경 이 모세 집단에서 유래하고, 난민들의 사회에서 발전한 야훼종교 특유의 형성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평등공동체

 

이스라엘 지파동맹 사회를 의도적인 반왕조적 평등공동체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오늘날 이 가설은 너무 현대적인 이데올로기를 대입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아 기각되었지만, 그럼에도 많은 학자들은 초기 이스라엘 사회가 매우 평등한 사회였다는 점에 동의를 표한다. 그것은 평지에서 형성된 성읍국가 사회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결정적인 요소인데, 어떤 이유에서든, 가나안 중부 산지에서 출토된 유물이나 유적들은 매우 조야하고 사치품들이 거의 없다. 필경 이 사회를 지탱하는 평등공동체적 이상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한 이상의 실현을 둘러싼 사회적 투쟁과 갈등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얘기하고, 여기서는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상은 충분히 실행되지 않았다는 점만 확인해 두자.

룻기에서 보듯 자연재해 때문에 또 다시 몰락의 위기에서 이주자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을 것이고, 판관기에 묘사된 수많은 위기들처럼 외부 족속들의 공격을 잘 방어하지 않으면 또 다시 예속민으로서 치욕스럽고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상과 같은 외적 요인만이 아니라, 계층 분화 같은 내적 요인들이 적지 않은 이들을 몰락의 나락으로 몰아갔다. 입다나 다윗 이야기는 내적 요인들에 의해 몰락한 이들이 사회의 부랑자층을 형성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나안 중부 산지의 주민들은 점차 결속되어 갔다. ‘아비의 집에서 시작해서 씨족, 지파(=부족), 지파동맹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결속체는 이러한 내외적 요인들에 대응하여 위험(risks)을 완충하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여 형성된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의 형성원리는 어떠했을지 살펴보자.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의 형성원리

 

리더십

판관기에 의하면, 판관(shopet; 2,16), ‘추장(sar; 8,14; 9,30; 10,18), 장군(qasin; 11,6), ‘원로(rosh; 11,8) 등으로 묘사된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이 이름들이 각기 다른 함의를 지닌 지도자 형태를 가리키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후대의 편집자들에게서 일괄적으로 판관으로 이해된 이들 지도자들의 역할에서 그 유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을 뿐이다.

 

(a) 어떤 지도자들은 분쟁 조정자로서 혹은 규범의 수호자로서 재판관의 역할 혹은 신과의 중재자의 역할을 하였다(드보라, 사무엘, 엘리 등).

(b) 사병을 거느린 준전문적 군사지도자 유형이 있다(입다, 아비멜렉, 바락, 다윗 등).

(c) 의용군을 모집하여 침략자들과 대결을 하는 일시적인 군사지도자 유형도 나온다(에훗, 기드온, 드보라, 사울 등).

(d) 기타 돌라 야일 입산 엘론 압돈 사울처럼 자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 즉 부유하고 유력한 씨족의 우두머리도 지파 또는 지파연합의 지도자였음이 분명하다.

(e) 이중 (a)(d)가 상시적인 지도력을 행사하는 역할이었다면, (b)(c)는 일시적인 지도자 유형이었다. 하지만 기드온이나 사울처럼, 전쟁영웅 출신으로 일상적 지도력을 확보한 경우, 혹은 드보라나 사무엘, 엘리처럼 일상적 지도력을 행사하다가 전시에 일시적인 전쟁지도자가 된 경우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이들은 대체로 외적 위기에 대해 씨족이나 지파, 혹은 지파연합을 이끄는 전쟁영웅들이다. 아마도 일상의 경우엔 특별한 지도자가 등장하기보다는 통례적인 지도력이 중요했을 것이다..


[6-1] 판관들과 판관기본문

웃니엘

3,7~11

야일

10,3~5

에훗

3,12~20

입다

10,6~12,7

삼갈

3,31

입산

12,8~10

드보라

4~5

엘론

12,11~12

기드온

6~8

압돈

12,13~15

돌라

10,1~2

삼손

13~16


[그림6-] 지파들과 판관들



공동체의 내적 질서/원리

그렇다면 이 공동체가 수호하려 했던 내적인 원리들은 어떤 것들일까? 다음에서 우리는 네 가지 이상화된 소재를 통해 그 형성원리를 추적해보기로 하자.

 

야훼 신의 이미지

1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야훼신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텍스트의 하나로, 판관기54~5절의, 이른바 드보라의 노래를 들 수 있다.

 

야훼여, 당신이 세일에서 나오시고

에돔의 들판에서 큰 걸음으로 오셨을 때

땅이 흔들리고 하늘도 흠뻑 젖고 구름마저도 물로 가득찼었나이다.

산들이 야훼, 시나이의 그분 앞에서 떨었도다.

야훼 이스라엘의 하느님 앞에서.


여기서 야훼는 시나이의 그분으로 묘사된다. 시나이는 가상의 산으로 모세가 을 받은 산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집트 제국에서 탈출해서 약속된 땅으로 가는 여정 중에 있던 이야기로 묘사된다. 시나이는 국가 권력 의 장소다. 국가 권력에 상반되는 꿈과 열망이 응축된 공간인 것이다. 이것은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의 각각의 사람들이 과거에 겪었던 압제의 경험과 중첩된다. 그리고 시나이처럼 현재 이스라엘이 터 잡은 곳도 바로 산지였다. 그런데 이 산의 신 야훼는 당신의 백성을 으로부터 구원해 주신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야훼는 그들의 계속되는 공격을 물리치시는 분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전승이 시편68,8~9; 열상19장 등에도 나온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야훼는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이다. 이는 출애굽기20장의 십계명에서 다시 반추된다. 즉 야훼는 어떤 형상으로도 모사될 수 없다. 신상(神像)은 신을 가시적인 것으로 표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의 표상 방식은 신의 독점을 야기했다. 누군가가 신상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은 그 자신을 신격화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 신상을 거부하는 신앙을 발전시킨 이유다. 이 본문에 따르면 야훼는 형상으로 모사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으로부터의 구원으로 모사될 뿐이다. 물론 이스라엘 초기공동체의 현실은 이러한 반신상적 이데올로기가 충분히 관철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한 자는 종종 가문의 신상을 만들어 씨족 혹은 부족의 주도권을 장악하곤 했던 것이다(판관기8,27; 17~18). 그럼에도, 과장할 수는 없지만, 부족 나아가 부족연합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던 야훼신앙의 정신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권력의 집중에 대한 견제력을 일정하게 실행시켰다. 군주제를 도입하라는 요구에 대한 지도자 사무엘이 반응이나(사무엘기상8). 사울의 어정쩡한 권력자의 모습, 그리고 왕국이 건립된 이후 군주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려는 예언자들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신앙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사회조직

초기 이스라엘 사회는 생존을 위한 연대로 출현(emergence)하였으며, 특히 야훼신앙으로 무장하게 됨으로써 평지에 구축된 권력적 사회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맞대응하는 반권력적인 사회적 실체로서 형성(formation)되었다. 여기서 형성이란 말을 쓴 것은 이 사회 형태가 단순히 사회 구조의 파생체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과 결부되었다는 점을 시사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것이 순간적이라기보다는 과정적인, 장기간에 걸쳐 전개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1성서는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이스라엘 사회의 조직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용어로써 시사하고 있다: -아브; 미쓰파하; 쉐베트/맛테; 이스라엘.

 

-아브(bet ab)는 핵가족(판관기2,9)에서, 대가족(확대가족), 나아가 대가족 집단으로 형성된 혈통집단(lineage)을 가리키는 데까지 다양한 용례를 갖는다.

미쓰파하(mishpahah)씨족에 대응하는 말로, 혈통집단과, 혈통집단들의 지연적 연합체인 대혈통(maximal lineage) 등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대혈통과 지파는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1성서에서 미쓰파하는 부족(지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쉐베트(shēvet ), 또는 맛테(matteh)는 제1성서의 부족/지파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부족들/지파들의 연맹체를 말한다.

 

이것이 평지의 권력적 사회체제들인 성읍국가, 원시적 국가 유형의 사회조직화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성읍국가는 씨족 수준이나 약간의 씨족들의 연합 정도의 규모인데, 장로들 혹은 족장들의 인격적이고 가부장적인 통제와 관리에 의존하는 지파조직과는 달리 군사력에 의존하는 정치적 지도자에 의해 통제(체계적 통합, system integration)되는 사회다. 그러나 이 사회에도 가족이나 혈통조직, 부분적으로 지파조직이 정치군사적 지도자의 하위에 편입되어 공존하면서,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이 작동한다(사회적 통합, social integration). 여기서 체계적 통합체는 권력적 지배의 속성을 지니는 반면, 사회적 통합체는 권력적 지배체계의 하위기구 역할과 인격적 지배체계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러나 초기 이스라엘 사회는 장로회의에 의해 가부장적인 인격적 지배를 하는 부족과 느슨하나마 부족연합으로 국가조직을 대체한 사회라는 특성을 지닌다. 이 경우 사회조직 체계는 권력적 지배의 요소가 배제되는 경향을 갖는다. 즉 이스라엘 사회제도는 탈권력적 제도화라는 특성을 갖는다.

물론 이런 제도화가 이상처럼 효과적으로 유지되지는 않았다. 초기 이스라엘 사회가 지속되던 두 세기의 기간 동안 부족연합이 효과적으로 활동했던 때는 전혀 없었고, 심지어 지파간, 혈족간, 가족간, 나아가 한 가족끼리의 갈등과 반목이 끊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연합은 외부의 침공이 되풀이될수록, 그리고 그 강도가 세어질수록 점차 공동운명체적 성격을 강화시켜 갔고,[각주:3] 여기에 야훼 신앙이 느슨하나마 일정한 매개 역할을 하였다. 즉 그것의 매개가 단순히 사회적 정치적 군사적 생태학적 구조의 강박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지만 (종교-이데올로기적 요소인) 야훼 신앙의 역할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 요소가 구조에 대한 대응 전략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각주:4]

 

법률

고대근동사회나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법은 거의 언제나 국가의 법이다. 그리고 법의 제정자로서 왕이나 귀족이 등장한다.[각주:5] 그러나 이스라엘 부족동맹의 법은 국가에서 이탈하여 형성되었으며, 국가로 전화되기 이전의 배경을 갖는다. 또한 법의 제정자가 하느님이다. 따라서 여타 군주제 사회나 귀족사회의 국가법개념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법은 탈국가적이며 동시에 초국가적이다.

초기 이스라엘 사회에서 법은 성문법이 아니며, 법 심의 또는 중재 기구(성문 안에서의 장로재판부/궁중 서기관 학교) 같은 사법기관도, 법의 보증자인 권력자도 없었다. 초기 이스라엘의 법은 규범의 자명성에 호소하는 관습법이었다.[각주:6] 가문이나 혈통, 혹은 부족, 부족연합의 어른이 직접 관할할 수 없는 법적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스라엘은 피해자 측의 첫 번째 대응은 언제나 지원세력을 조직하는 일이었다.[각주:7] 그리고 이렇게 조직된 세력의 크기를 배경 삼아 협상을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물리적 힘의 크기에 좌우된다.

이렇게 확고하게 정식화되지 않은 채, 관습에 의존하거나 혹은 일시적으로 조직된 배후 집단에 의한 폭력의 법칙에 의존하여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군주시대와는 전혀 다른, 탈권력사회의 전형적 특성에 속한다.

 

모세의 이미지

1성서에 의하면 모세는 파라오와의 협상가, 기적행위자, 군사전략가, 야훼와 이스라엘 간의 계약 중개자, 입법자, 병참전문가, 재판관, 예언자 등등의 다의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것은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력의 다양한 기능을 신화적인 영웅 모세에게 투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세의 복합적인 권위 유형에서 의 특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의 여타 대표적 인물은 그 후손과 공속관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모세만은 예외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의 후손에 관한 언급이 있기는 하다(출애굽기2,22; 4,20; 18,2~6).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그의 이름으로 지칭되고 모세와 상호대표 관계에 있는 역사적-사회적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모세는 어느 특정 집단의 부상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것은 지파동맹의 담론에 등장하는 모세의 역할에 비추어볼 때, 이 사회집단의 탈권력적인 지향을 알 수 있다.

 

중간 점검

 

이상과 같이 이스라엘 초기 사회의 사회조직화나 담론 등은 권력에 대한 공고연한 저항의 에토스가 이 사회의 특성을 이루고 있고, 또 이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원리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국가 혹은 준국가적 유형의 사회에 비해 상대적인 평등성을 보장할 뿐, 현실에선 여전히 무수한 내외적 요인들에 의해 야기된 불평등의 양상을 충분히 억제하지 못했다. 특히 이나 세대’, 종족 등, 여전히 배제의 요소가 이 사회의 탈권력적 특성의 한계 영역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회를 지탱하는 원리들은 이 공동체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여타 ()국가 사회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현상인, 여성이 지도자로 활동한다거나(드보라, 미리암 등), 입다나 다윗 같이 하층민 출신이 엘리트로 충원될 여지가 더욱 많았다는 사실은 그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것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줄곧 해방적인 신탁이 메아리칠 수 있는 원류로서 기능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훼신앙의 핵은 반권력의 에토스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상이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지파동맹 사회는 끊임없이 이상을 거스르는 현실의 문제로 인해 내적 위기를 겪어야 했고, 그것은 결국 군주제 사회로의 이행을 낳는 한 요소가 되었다. 아래에서는 지파동맹 사회의 현실, 그 내적 위기에 초점을 두고 이 시대를 살피고자 한다.


지도자들

 

아래 [6-2]의 좌측 세 칸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를 지음으로써 외부 족속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이에 야훼를 향해 부르짖자 야훼가 구원자를 보내 해방을 주었다는 판관기(사사기) 특유의 역사해석의 틀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식의 서사 구성의 장본인은, 말할 것도 없이, 신명기적 역사가들이다. 그리고 저 구원자를 재판관을 뜻하는 판관(šōpet)으로 명명한 것도 편찬자들의 몫이다.[각주:8] 또 판관으로 명시된 지도자들의 수가 열두 명([6-1] 참조)인 것도 작위적이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신명기적 사가들의 손길에 의해 각색되지 않은 보다 오래된 역사적인 편린들이 담겨 있다. 가령 12명 판관들의 소속 지파가 작위적인 열두 지파에 하나씩 배치되어 있지 않고, 열둘에 속하지 않은 갈렙, 길르앗 족속 출신 지도자들이 언급되고 있다. 아마도 이들 판관들로 언급된 이들이나, 바락, 아비멜렉 같은 이들, 그리고 사무엘기에 나오는 엘리, 사무엘, 사울, 다윗 등은 아마도 대중 사이에서 떠돌던 전승들에서 유래한 초기 이스라엘 시대의 카리스마적 지도자 혹은 영웅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들을 카리스마적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이 비세습적/일시적 지도자였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지파동맹의 중심

 

한편 [6-2]에서 보듯이 이들 지도자들 가운데 다수가 에프라임/베냐민 지파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훗, 드보라, 압돈, 그리고 사무엘과 사울은 에프라임/베냐민 출신이고, 기드온은 에프라임/베냐민 지파의 영향권 아래 있던 중부지역 지파인 므나쎄 지파 출신이며, 돌라[각주:9]와 엘론[각주:10]도 에프라임/베냐민과 관련되어 있다. 야이르나 입다의 출신 지파인 길르앗은 트랜스요르단으로 이주한 에프라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지파로 보인다. 또 드보라의 연합군에는 에프라임 지파의 주도 하에 중부와 북부의 6개 지파가 참여 했다. 한편 4개 혹은 2개 지파의 연합군이 동원된 기드온 및 입다의 동맹군의 활동은 각각 에프라임 지파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이 때문에 이들은 에프라임 지파와 갈등을 빚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지파동맹은 에프라임과 베냐민이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추정된다. 특히 기드온 설화에 속하는 판관기8,1~3이나 입다 설화에 속하는 12,1 이하의 이야기에서 에프라임만이 지파동맹의 주도적인 세력인 듯이 묘사되고, 베냐민 지파가 지파동맹의 집단적인 공격을 당하는 20~21장의 이야기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두 지파 가운데 에프라임 지파가 지파동맹에서 더욱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장에서 다룰 내용이지만, 지파동맹 사회가 왕정 사회로 이행하는 데에서도 에프라임/베냐민 지역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왜냐면 이 지역이 다른 지역의 족속들에 비해 보다 선진적인 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타 지역을 통합시킬 만한 역량을 갖추었던 탓이다. 또 사울이 에프라임 지파 출신이 아니라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는 점도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에프라임은 지파동맹의 전통을 지탱하는 축이었던 반면, 이에 비견되는 능력을 갖추었으면서도 늘 에프라임에 눌려 있던 베냐민 족속이 변화에 대해 보다 적극적일 수 있었을 법하기 때문이다.


[6-2] 초기 이스라엘 사회(판관 시대)의 지도자들

이스라엘의 죄(우상숭배)

이스라엘의 침략자

/지배연수

야훼께 부르짖음

구원자(출신지파)

해당 지파

평화기

기타

바알 아세라 숭배

메소포타미아의 왕 구산리사다임/8

 

오드니엘(갈렙)

갈렙 지파

40

 

 

모압 왕 에글론

(모암+암몬+아말렉 연합군)/18

 

에훗(베냐민)

베냐민 지파

80

 

 

블레셋/?

 

삼갈(?)

 

?

 

 

하솔을 다스리는 가나안 왕 야빈(군대장관 시스라)/20

 

드보라(에프라임/베냐민)

이스라엘 연합군: 에프라임 베냐민 마길 즈블론 이싸갈 납달리

(이 연합에 참여치 않은 지파들: 루우벤, 길르앗, , 아셀)

40

 

 

미디안/7

 

기드온(므나쎄)

이스라엘 연합군: 므나쎄 아셀 즈불론 납달리

40

에프라임 지파와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벌임

 

 

 

돌라(이싸갈)

 

23

에프라임 구릉지대에서 활동

 

 

 

야이르(길르앗)

 

22

 

바알과, 아스다롯,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의 신들, 블레셋의 신들

암몬/18

 

입다(길르앗)

이스라엘 연합군: 길르앗 므나쎄

6

에프라임 지파와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벌임

길르앗은 트랜스요르단으로 이주한 에프라임 사람들인 듯.

 

 

 

입산(베들레헴?)

 

7

 

 

 

 

엘론(즈불론)

 

10

그의 매장지인 야알린은 남서부 베냐민 지역의 읍락

 

 

 

압돈(에프라임)

 

8

 

 

블레셋/40

 

삼손()

 

20

 

 

 

 

바락(납달리)

 

 

드보라의 동맹군에 참여

 

 

 

아비멜렉

 

3

기드온의 서자

 

 

 

엘리

 

 

실로 계열의 사제 가문 대표

 

 

 

사무엘(에프라임)

 

 

라마 지역의 사제 가문 대표

 

 

 

사울(베냐민)

 

 

 

 

 

 

다윗(유다)

 

 

 

 

해체의 징후: 내적 요인들

 

위의 [6-3]에서 보는 것처럼, 기드온 이전까지의 5명의 지도자들에 관한 정보와, 기드온부터 9명의 지도자들에 관한 정보는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두드러진 차이가 엿보인다. 즉 후자에서는 자식을 많이 거느린 지도자들에 관한 언급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각주:11] 예외 중 하나가 삼손인데, 그의 어머니는 불임의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랜 기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6-3] 판관기에 등장하는 초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개인 신상 정보(계층분화의 징후들)

오드니엘()

갈렙의 동생, 크나즈의 아들

에훗()

베냐민 지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삼갈()

아낫의 아들/ 소 모는 막대기로

드보라()

라삐돗의 아내 여예언자

바락

케데스의 아비노암의 아들

기드온()

아비에절의 후손, 오브라 읍락의 요아스의 아들/ “힘쎈 장사”/ “네 아비의 바알제단”/ 전리품으로 에봇(사제장의 의복)을 만들음<신탁의 독점>/ 정실들의 아들이 70

아비멜렉

여룹바알(기드온)의 첩실의 아들/ 세겜 출신/ 바알브릿 신전에서 각출한 돈으로 할 일 없는 건달패를 사서 졸개로 삼아

돌라()

이싸갈 지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에브라 산악지대의 사밀에 거류

야이르()

길르앗 출신/ “나귀를 타고 다니는 아들 삼십 명이 있었고 그들이 차지한 천막촌이 삼십개 있었다

입다()

길르앗 출신/ “굉장한 장사”/ 첩실의 자식/ “건달패를 모아 비적떼의 두목이

입산()

베들레헴 출신/ “아들과 딸이 각각 삼십 명씩 이었는다

엘론()

즈불론 출신

압돈()

바라돈 출신 힐렐의 아들/ “나귀를 타고 다니는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삼손()

단 지파 출신 마노아와 무명의 여인 사이에서 출생/ 어머니는 오랜 단산 끝에 삼손을 출산


이러한 순서는 신명기적 사관과는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어 보인다. 판관기에서 판관들의 순서가 신명기적 사가의 시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 보다 오래된 기억과 관련된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 아마도 이는 시간 순서에 따른 배열이라고 보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여기서 자녀가 많다는 것은 보다 큰 가문, 즉 자산상태가 풍족한 벧-아브(아비의 집)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지도자라는 신분적 위치와, 자산상태와 관련된 계급적 위치가 이전보다 더욱 긴밀히 연동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아비멜렉과 입다와 같은 서자 출신의 천대받는 신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체제 불만 세력이 되게 했다. 이것은 사무엘기상의 엘리의 아들들(사무엘기상2,11~17)과 사무엘의 아들들(사무엘기상8,1~9)의 권력 남용에서도 엿볼 수 있고, 다윗 주변에 모여든 몰락 농민 출신 비적들도 이 같은 현상에서 유래한다. 요컨대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는 점차적으로 종족 내부에서 계급적인 분화를 야기했고, 이것은 체제내적인 주된 위기의 계기였다는 것이다(체제적 통합의 위기).[각주:12]

한편 평등한 지파동맹 사회를 붕괴시킨 또 다른 내적인 위기를 이야기할 수 있다. 교통이나 통신은 근거리에서만 비교적 원활했다. 반면 지파동맹사회는 당시 이스라엘의 교통과 통신 능력이 소화할 수 있는 공간적 범위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6-2]에서 보듯이 지파간 연대의 주요 동기는 외부의 공격에 대한 공동의 방어와 관련되었고, 이런 연결망의 주요 매체인 야훼 신앙은 아직 사람들의 일상에 개입하는 데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야훼주의적 평등주의 이상은 개별 가문들 간의 일상적 관계까지는 거의 효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지파동맹에 포섭된 영역과 수는 이스라엘 초기 공동체가 잘 통합된 사회가 되기엔 너무 넓었다. 이것은 체제통합의 위기를 극복할 내적 응집력의 한계 조건이다.


해체의 장본인들

 

[그림6-] 에봇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초기 공동체가 붕괴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외부로부터 왔다. 즉 외부 세력의 침공은 지파동맹 체제의 계기이기도 했지만, 외부로부터의 도전이 거세어질수록 체제의 질적 전화를 향한 움직임이 점차 가시화되었던 것이다.

 

(1) 기드온과 아비멜렉

1성서에서 볼 수 있는 이런 경향의 첫 번째 사례로는 기드온을 들 수 있다. 그의 집안이 바알의 제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판관기6,25~32), 그의 가문이 씨족의 권력 중심부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강력한 전투력으로 무장한 유목족속인 미디안 족의 침략이 있자, 기드온이 네 개 지파의 동맹군을 이끌고 저들을 격파하였다.

이 사건은 기드온 가문을 일약 지파동맹의 유력한 가문으로 격상시킨 계기가 된다. 이에 부응하듯, 기드온은 자기 집안이 지역 신앙을 넘어서 지파동맹 수준의 신앙을 대표하는 가문임을 과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집안(-아브)의 가보이자 그의 가문이 속한 씨족(미쓰파하)의 상징적 중심이던 바알 제단을 무너뜨리고, 대신 야훼 사제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들었으며 가문의 신전을 오브라에 건립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가문이 지파동맹을 향한 야훼의 신탁을 위임받는 집안임을 대외에 천명하는 행동이다. 이는 필시 지파동맹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에프라임 지파의 장로들에게 우려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판관기8,1~3).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영향력은 씨족 범위를 넘어, 최소한 중부와 북부 이스라엘 동맹에까지 확대되었음이 분명하다. 판관기8,22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청하였다.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자자손손이 우리를 다스려 주십시오라는 구절은 더 이상 카리스마적 통치권이 아닌 세습적 통치권을 그에게 위임하려는 시도가 존재했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한, 이스라엘 사회에서 군주제를 향한 첫 번째 행보다. 권력의 세습과 이념적 통합 기재의 활용(에봇)은 왕정 국가의 가장 뚜렷한 징후이다.

판관기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요청을 기드온이 거절했다고 한다: “그대들을 다스리실 분은 야훼시오(24). 이 말이 기도인의 실제 반응을 담은 것인지 후대에 첨부된 것인지, 또 실제 반응을 함축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진의가 무엇인지는 불확실하다. 아무튼 동맹을 상징하는 신 야훼의 사제의 예복인 에봇을 만들었다는 것은 적어도 자신이 야훼신앙의 수호자임를 자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지파동맹의 종주권을 자신의 가문에게 집중시키려는 저의가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기드온의 거부의 태도가 실제적이든 사후적이든 간에, 24절은 그를 중심으로 하는 왕권화를 향한 의식무의식적인 모색이 실현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이 실패의 지점에서 아비멜렉이 등장한다. 그의 출생은 이미 이스라엘 사회의 내적 위기의 징후였다. 그는 정실 자식이 아니라 첩실 자식이다. 그는 상승욕구를 차단당한 계층의 등장을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체제의 중심부에 근접해 있으면서도 더 이상의 접근이 배제된 존재는 가장 강한 불만세력이 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즉 그와 같은 이들은 체제의 도전세력이자 대안체제의 주역이 될 수 있는 신분적 흔적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등장은 기드온의 70명의 정실 아들의 몰살과 관련이 있다. 판관기는 기드온의 아들들이 죽은 것을 그의 소행으로 돌린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소외된 집안 출신인 그가 부상한 시기는 기드온의 정실 아들간의 권력 암투를 틈탄 상황이 가장 적절하다. 그는 자기 고향인 세겜에서 바알브릿 신전을 장악하여 그 기금으로 용병을 고용함으로써 기드온의 권력을 승계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도는 전쟁에서의 그의 돌연한 전사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2) 입다

입다는 길르앗의 영웅이다. 그 역시 아비멜렉처럼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천대받던 전형적인 체제의 불만세력을 대표한다. 그런데 입다는 아비멜렉과 대비된다. 그는 아비의 집에서 자랐다. 이는 그가 자기가 자란 씨족의 후원을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 그는 고향을 떠나 배회하며 비적의 두목으로, 그리고 때로는 준전투화된 용병집단의 우두머리로 성장한다. 그에게 뜻밖에 행운을 가져다준 것은 그의 친족집단의 지지가 아니라 외부세력의 공격이었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고 부족의 의용군이 방어에 실패함으로써, 그에게 부족을 수호할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스라엘(아마도 길르앗)의 장로들이 그를 수령이자 사령관(로쉬)으로 모시게 되었다(11,11).

그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의 집권은 지파동맹에 위협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 같다. 적어도 에프라임 지파의 장로들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일시적인 지도자(콰신; 11,6장군으로 번역됨)가 아니라 상시적인 지도자를 뜻하는 로쉬로 부상했다는 것은 에프라임이 주도하는 지파동맹의 평등 이상을 거스르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체의 결정적 징후: 블레셋의 압박, 사울-사무엘 체제의 대두

 

그러나 기드온, 아비멜렉, 입다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동맹의 주변적 지파들에서 대안 체제를 지향하는 일련의 시도들이 있었고, 에프라임과 베냐민 지파 중심의 연맹체제는 동요했다. 그리고 이것은 외적 위기의 요소와 결합되면서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그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블레셋의 등장과 결부된다.

해양세력으로 지중해 동부지역으로 이주한 그들은 뛰어난 선박기술과 건축술로 유명하며, 무엇보다도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앞서서 철제 무기로 무장한 선진적 족속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제도적 수준에서도 가나안의 다른 사회들보다 한층 앞선 세력이었다. 이들은 다섯 개의 부족 연맹체로서 등장했던 것이다.[각주:13] 아마도 해양세력으로 집단이주를 거듭하는 긴박한 위기의 세월을 겪으면서 생존을 위해 보다 광범위한 결속이 필요했던 탓이리라.

잘 훈련된 철제무기로 무장한 상비군의 공격에 이스라엘은 대응하기에 여간 벅찬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지파동맹의 중심성소로 부상한 실로의 사제들(아마도 엘리)이 주축이 된 에프라임 연합군은 블레셋을 막아내는 데 실패했던 듯하다. 사무엘기상은 이 패배와 더불어 실로의 상징물인 법궤가 블레셋군에 의해 탈취됐음을 말한다(사무엘기상4,1~11).

비상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대신 등장한 존재가 바로 라마 지역의 사제 세력의 우두머리 사무엘과, 기브아 지역의 사울이다. 어쩌면 사무엘은 에프라임 지파 출신의 사제이지만 권력 집중에 보다 적극적인 종교세력을 대표하는 성소(라마)의 우두머리였을지도 모른다. 사무엘기상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사울과 다윗 모두에게 기름부음의 의식을 수행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그 이외의 다윗 설화에서 그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사무엘이 다윗을 기름부었다는 것은 신명기적 사가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고, 사울과 관련된 설화는 보다 오래된 전승과 연관된 듯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는 특정인을 지파동맹의 지도자로 부각시키기 위해 야훼의 재가를 상징하는 의식을 실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무엘기상의 사무엘 설화에서 그는 동시에 왕권제의 도입에 대해 수동적 태도를 보이는 인물로도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는 작위적인 냄새가 나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에프라임 사제라면 당연히 권력 집중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을 것 같고, 다만 위기 상황에서 지파동맹을 위해 기드온이나 입다가 가지려했던 것 같은 보다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관점을 사무엘이 대표하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게 역사적 개연성이 없는 무리한 해석은 아닐 듯하다.

사울은 기브아의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전쟁영웅이다. 이스라엘 동맹은 그의 지도력의 정당성에 대한 기억을 오랫동안 보존하고 있었고, 이것은 훗날 남부에서 다윗의 나라가 세워진 이후에도 계속적인 불씨로 남았다. 아마도 그의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은 에프라임과 베냐민 지파의 전 영역에 지속적으로 미쳤으며, 중부 지파들(에프라임, 베냐민을 포함, 므나쎄, 길르앗 등)과 북부의 지파들(아셀, 즈블론, 납달리, 이싸갈 등), 심지어 예루살렘 남부 구릉지대에 위치한 씨족들(유다, 갈렙, 고라, 그니스, 여라므엘, , 시므온 등)에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그림7] 참조)



사무엘기상에 따르면 이러한 그의 영향력의 확대는 점차 사무엘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이러한 묘사 속에는 신명기사가의 흔적이 농후하지만, 예언자 세력과 정치세력 간의 정치적 비전을 둘러싼 갈등을 상상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개연성을 지닐 수 있다. 사무엘의 입장에선, 전쟁지도자의 실용적 가치판단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 야훼적 전통을 지키는 것이 여전히 필요했을 것이고, 사울의 입장에선 만만치 않은 적과의 싸움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전통의 규약이 아니라 전투에서의 승리에 있었다고 이해해도 무리는 아니다. 사무엘기상은 이것이 표출된 사건을 두 가지로 들고 있다. 하나는 전투 직전, 승리의 제의를 집전할 사제의 도착이 지연되자 사울이 대신 제의를 수행한 데서 빚어진 갈등이다. 사무엘은 정치권력이 사제권을 점유하려는 것을 우려했고, 사울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우선시했던 것이다. 한편 또 다른 갈등은 전리품의 처리 문제였다. 사울측은 전리품을 재무장을 위한 군사비에 지출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사무엘측은 그것은 전쟁을 통한 부의 재분배를 추구하는 방법으로, 평등사회의 질서를 훼손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군주제 사회의 시각에서 보면 사울의 지도력은 여전히 국가와 부족사회 사이에 있다. 에프라임의 전통이 훨씬 약한 남부의 유다 지파 출신이자 그 사회에서조차 탈법적 집단 출신인 다윗과 대비해서 보면 이 차이는 보다 명료하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다룰 군주제 사회의 북부 전통 속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해체의 또 다른 흔적: 다윗 체제의 등장

 

사무엘기상에 따르면 다윗은 사울 휘하의 한 장군이었다. 어쩌면 사울 연합이 의사군주국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무렵 유다 지파 지역에서 군사집단인 그가 이 지역의 군벌세력으로 성장한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무튼 그는 유다 지파의 한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으로, 입다처럼 비적 두목이자 용병 대장으로 활동하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영웅으로 부상한 인물이다. 신명기적 사가들은 그가 곧 사울의 라이벌이 됐고, 사울의 질시 때문에 동맹에서 이탈하여 블레셋의 한 영주가 됐던 사정을 설명한다. 다윗 왕조의 역사가들이 이렇게 묘사한 것은 왕조의 건국 시조인 다윗이 사울 연합의 영향권 하에 유다 지파가 있던 시절에 활약한 인물이며 블레셋의 봉신 전력이 있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전승이 전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앞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다윗이 유다 지방에서 구축한 체제는 사울의 체제와는 여러모로 대조된다. 그것은 초기 이스라엘 지파동맹 사회 해체기에 나온 두 개의 대안을 시사한다. (그의 구체적인 활동상에 대한 논의는 다음 마당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이 두 대안에 집중하기로 하자.)

사울은 이스라엘 지파동맹의 수호자격인 에프라임 지파 출신이다. 반면 다윗은 지파동맹의 남부 변두리 족속인 유다 지파 출신이다. 따라서 이 둘은 지파동맹 전통에 대한 태도에 있어 상이할 수 있었다. 더욱이 사울(과 그의 지지세력)은 유력한 지파와 가문 출신으로 체제의 전통에 보다 긴밀히 연동된 이었다면, 다윗(과 그의 지지세력)은 소외된 씨족 출신이며 동시에 주로 도주자들로 이루어진 비적떼의 두목으로 기존의 체제 전통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 사울의 지도력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동의에 기초하고 있었다면,[각주:14] 다윗은 개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용병의 용맹스러움에 그 지도력의 기반을 두고 있었다.[각주:15] 이러한 사실은 다윗과 사울간의 갈등이 라이벌간의 힘의 원리라는 차원에서만 볼 수 없음을 시사한다. 앞에서 암시한 대로 사울은 이스라엘 지파동맹 전통의 수호를 우선시하면서 가능한 개혁을 모색하려는 시각을 대표한다면(물론 더욱 전통에 충실한 사무엘을 염두에 두더라도), 다윗은 전통으로부터의 일탈에 기반을 둔 집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과감하게 대안을 추구할 수 있는 혁명적 집단을 대표한다.

이 갈등 과정에서 불리한 여건의 다윗은 적성국인 블레셋에 투항한다. 그리고 사울은 길보아 산 전투에서 거의 전멸당하며 그 자신 또한 전사한다. 이로써 사울에 의해 최후로 지켜지던 이스라엘 지파연합의 전통은 사실상 붕괴한다. (물론 사울 사후에도 한동안 사울의 아들과 잔존세력에 의해 재건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미 몰락은 기정사실이었다.)

 

요약 및 정리

 

이스라엘 지파동맹 사회는 군주제 사회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부족사회의 호혜적인(reciprocal; 평등적인) 요소를 신앙 전통으로 발전시킨 체제였다. 그러므로 부족사회의 이상은 일정하게 군주제로의 이행 욕구를 견제하는 신앙적 기조로서 기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소 과장되지만 이 시기 (에프라임 지파가 대표하던) 야훼의 사회가 지향했던 호혜적인 부족동맹체는 구체적으로 군주제’, 권력의 집중화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전통으로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야훼의 사회가 해체되는 조짐은, 군주사회의 특징인 자원의 불균등한 재분배로 인한 권력화의 크기가 자원의 평등한 호혜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실행능력을 압도하는 상황의 발생과 관련되어 있다. 즉 어떠어떠한 이유로 언제부터인가 이 사회 내에 군주제를 도입하려는 경향이 커다란 지배적인 흐름으로 형성되어 갔는가의 문제가 바로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의 해체 과정에 대한 분석의 요체인 것이다.

이스라엘 지파동맹내에 왕과 군주제를 도입하려는 운동은 내외적 요인을 갖는다. 첫째로, 내적 요인으로는 부족/씨족 내의 계급분화를 들 수 있다. 이스라엘 부족과 씨족들 내의 호혜적인 조직화체계의 비효율성이 드러나면서, 박탈계층과 특권계층 간의 분화가 심화되고, 계급의 분파적 이해를 부족과 부족동맹의 보편적 관심보다 부각시킴으로 점차 갈등적 경향이 첨예화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부차적으로 여기에는 산간지역 영농이 가능해지게 됐던 여러 요인들로 인해 생산성에 비해 인구가 더 많음으로 인해 생긴 생산성의 압박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을 수 있다. 그 외에 부족동맹 전통의 수호자라 할 수 있는 주요 성소의 엘리트들의 카리스마적 권위의 상실도 그 한 계기로 들 수 있다(엘리의 아들들과 사무엘의 아들들의 부패상). 둘째, 역시 내적 요인으로 부족/씨족 단위의 사회적 통합능력의 한계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원시적인 교통 통신 능력으로는 느슨한 유형의 체제를 효과적으로 통합할 수 없는 한계와 관련된다. 셋째로 지적할 수 있는 위기의 요인은 외적인 것으로서, 특히 선진적인 전투력과 사회제도적 조직력을 갖춘 블레셋의 공세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끝내 지파동맹의 최후의 보루였던 에프라임/베냐민 지파에서초자 새로운 체제를 모색하는 대안을 구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상의 내외적 요인이 이스라엘 지파동맹 사회의 해체와 군주제 국가사회의 성립으로 전화되는 것은 필연적인 경로인가? 이에 대대 최근의 학자들 다수의 견해에 따르면, 구조의 강압, 즉 지리적 제한과 인구의 과도한 증가에 따른 환경적 상황 및 외부의 강력한 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려는 생존의 욕구가 결합하여, 지방분산적 사회체계보다는 중앙집권적 사회체계를 선호하는 조건을 창출하게 됐다고 설명한다(Coote & Whitelam; Hauer; Frick; Hopkins ).

그러나 환경에 관한 구조적 요인을 강주하는 신멜더스주의적 해결책들은 인간의 투쟁에 의한 구조변동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구조적 강압이 노정한 사회적 조건들은 변동의 무한한 가능성의 범역을 제한하는 조건이 되지만, 그 특정한 변동의 설명은 되지 못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다중적 행위자들의 전략적 선택들이 서로 접속되고 충돌하면서, 그리고 기타 여러 조건들과 만나면서 간섭작용을 일으킴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결과(the unintended consequences of social action)로의 이행(transition)이 이루어진다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구조적 강압 아래서 자원을 둘러싼 인간 행위자들의 투쟁 양상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는 이행의 문제가 적절하게 해명될 수 있으며, 여기서 주지한 대로 자원의 문제는 물질적 자원만이 아니라 권위적 자원도 고려돼야 하는 것이다.

사울과 다윗[각주:16]은 각기 반()블레셋 연합으로 형성된 이스라엘의 두 유형의 분파 운동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사울과 다윗의 체제가 모두 지배타인의 제재(sanction)를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전통에 보다 긴밀히 밀착되어 있던 사울은 강제보다는 권유에 의존하는 제재의 형태를 전략적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으며, 분파적 관심을 보편적 관심과 연루시켜서 발현시키려는 지배의 형태를 전략적으로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다윗은 분파적 집단 이익을 일방적으로 추구하는 착취적 지배를 수행했고, 강제를 통한 피통제자에 대한 제재를 실행했다(사무엘기상25: 아비가일 이야기). 사무엘기상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렇게 다윗과 사울로 표상되는 이스라엘 부족동맹 내부에서의 상이한 전략의 충돌과, 블레셋의 개입 및 그들을 이용할 수 있는 다윗 일파의 태도가 결합하여 국가로의 이행의 문제가 설명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보론/ 지파동맹사회의 해체과정에 관한 하나의 에피소드 상상하기: 쉬볼렛[각주:17]

악의 평범성에 관한 하나의 성서적 전거

 

 

길르앗 병사들은 강을 건너려는 사람에게 쉬볼렛을 발음하게 했다.

누가 시볼렛이라고 하면 병사들은 그를 요르단 강 나루터에서 쳐죽였다.

이렇게 하여 그때 죽은 에프라임 사람의 수는 사만 이천이나 되었다.

―〈판관기12,5~6

[보론1-1] 길르앗과 지파동맹

 

요르단 강과 그 지류인 얍복 강이 만나는 여울목에 살기등등한 길르앗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혹 한 명이라도 에프라임 족속 패잔병들이 살아 돌아갈까 하여 그들의 경비는 철통같다. 강을 건너려다 붙잡힌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길르앗 병사들에게 심문을 받는다. “‘쉬볼렛이라고 말해봐라.” ‘곡식 이삭을 뜻하기도 하고, ‘빠르게 흐르는 물결을 가리키기도 하는 이 단어를 에프라임 사람들은 시볼렛이라고 발음한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길르앗 식으로 말해보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익힌 몸에 밴 발성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어설픈 발음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을 뜻했다.

강물을 피로 물들인 이 살육전은 길르앗으로 쳐들어온 에프라임 병사들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하고서야 끝이 난다. 전사자가 42천 명에 달했다는 판관기(12,6)의 보도는 터무니없다. 현대의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서부 산간지대에 정착할 초기 인구를 다 합쳐도 45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성서 연구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처럼 이 에프라임-길르앗 전쟁이 판관 시대 말기라고 해도, 불과 2백 년도 채 못 되는 시기에 그 수가 그렇게 엄청나게 늘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급자족에 의존하던 이들의 생활양식에서 식량 생산 능력이 최소한 열 배는 향상되어야 가능한 일일 테니 말이다. 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억지로 엿본다면 아마도 에프라임 전 족속을 다 몰살하고도 남는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뜻이 아닐까. 그만큼 이 전투는 처절한 형제 족속 간의 동족상잔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됐고, 그 고통스런 기억의 한 가운데에 쉬볼렛/시볼렛이라는 생뚱맞은 단어가 휘말려들어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 처참한 전쟁의 기억에 쉬볼렛/시볼렛이라는 말의 뜻은 아무 관계도 없다. 이 단어엔 죽음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런데 역사 속의 한 사건은 당사자들이 기억할 수 있는 한 가장 처참한 살육의 악취를 풍기게 해버렸다. 단지 관습상의 차이에 불과했을 발성의 차이가 증오와 한이, 그리고 복수가 넘쳐나는 가장 흉물스런 단어로서 자자손손 대물림되는 기호가 된 것이다.

후대의 역사에서 에프라임도 길르앗도 요르단 강 하구 동서 지역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런 탓에 에프라임과 길르앗 사람들 사이에서 대물림되었을 법한 이 원한의 기억이 우리에게 보존되어 있지 못하다. 그 증오가 어떻게 표출되었으며 두고두고 사람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을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혹 어떤 화해의 사건이 쉬볼렛/시볼렛의 비극을 가로질렀을 수도 있고, 종족적 정체성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치 단위로 사람들이 자신의 귀속의식을 갖게 된 이후에도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어 남아 여전히 그들을 반목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몽고족의 침입에서 시작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두 족속간의 해묵은 갈등이 유고 연방에 의해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해소되고 평화스럽게 살아가는 듯 했지만, 연방이 해체된 이후, 알다시피, 처절한 살육전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천 년이나 지난 뒤에 말이다. 그 오래된 증오가 긴 세월의 부침 속에서도 삭아들지 않고 지속된 것은 교회를 통해 분노와 증오의 어휘들이, 그네들의 쉬볼렛/시볼렛에 얽힌 기억들이 생생하게 보존되어 왔던 탓이다. 그러니 어쩌면 에프라임과 길르앗 사이의 이 참혹한 사건도, 비록 에프라임이나 길르앗의 종족적 정체성이 사라진 뒤에도, 어떤 형태로든 대물림되어 기억되었을 법하지 않을까. 42천 이라는 숫자는 그 불길한 기억 가능성의 높은 강도를 시사하는 정보일 수도 있다.

참극을 낳은 수많은 다른 역사들을 통해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한 비극적 사건은 그 사건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도 오랫동안 비극의 잔영을 남긴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더욱 증폭되고 더욱 폭력적으로 서로를 증오하고 복수하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지난 과거의 극복은 너무나 힘들고 긴 인고의 여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한데 여기서 우리는 그 극복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건 배후의 역사를 통해 발생의 근저를, , 무엇이, 어떤 행위들이 그 비극의 원인이 되었는지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성서의 역사가 판관들의 시대라고 일컫던 때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대다. 그래서 혹자는 야훼신앙의 위대한 정신의 제도화라고 규정짓기도 한 시대다. 평등 이상으로 넘쳐나는 사회,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억제되는 사회, 고통을 겪는 자들에 대한 보호와 복권(復權)의 정신이 고무되는 사회라고. 이와 같이 왕국 시대 못지않게, 혹은 더욱 잘 짜인사회처럼 이 시대를 보려는 견해는 그리 타당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불평등의 제도화가 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왕국 시대보다는 좀 더 평등한 사회라고 보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와 그리 멀지 않다.

한데 이 전쟁 배후에는 그러한 사회의 이상과 현실 간의 불행한, 하지만 필연적인 동거가 가로놓여 있다. 사실 지배적인 이상은 그 사회를 조직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에 위배되는 현실 또한 그 이상이 더욱 지배적 가치로서 통용되게 하는 요소가 된다. ‘위악성이라는 것은 그것이 위악적이라고 보는 이들에게 그들이 공유하는 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때 이상과 동거하는 불미한 현실은 그리 추악한 것이 아니다. 평범한 것이고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추하다고 여겨지는 점에서 다른 보통의 행위들과 다를 뿐이다. 반면 평범함을 넘어선 악, 이른바 악의 축인 악은 동거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길르앗의 영웅 입다의 등장 배경에는 그 사회 속에, 그들의 이상과 동거하는 위악성이 도처에서 엿보인다.


[보론1-2] 집에서 쫓겨나는 입다

 

판관기11,1에 의하면 그는 길르앗이라는 남자가 매춘녀에게서 낳은 자식이라고 한다. 길르앗 족속의 한 남자 이름이 길르앗이라는 건 좀 어색하다. 아마도 이 길르앗은 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길르앗의 한 남자를 잘못 표기한 것 같다. 열두 지파 명단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길르앗 족속은 이스라엘의 기억에서 일찍이 사라졌으니, 시대를 넘어 기억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혼동이 일어난 것이겠다. 아무튼 이 남자의 본처 자식들은 아비가 죽자 창녀의 자식이 아비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게 하려고 그를 집에서 쫓아낸다. ()을 팔아 살아가야 했던 여자, 그리고 그를 거둔 아비의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라났고 끝내 추방당한 자식. 평등 이상을 추구한다던 사회의 위선은 여자와 그녀의 자식에게 던져진 고통의 발원지다. 물론 그 시대에도 또 다른 입다들’, 추방당한 천한 태생의 자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비극적 사태의 주인공 입다는 그 중의 단지 한 사람이다.

쫓겨난 입다가 정착한 곳은 북쪽의 이라는 고을이었다. 그 지명을 알아낼 길은 없으나, 아마도 척박한 버림받은땅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입다 주위에는 그 자신처럼 사회에서 버림받은힘깨나 쓰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운거하고 살아갈 곳이란 필경 그들 자신의 운명처럼 버림받은땅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들을 이끌고,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다른 자들로부터 그들의 안위를 지켜주는 대신 대가를 지불받는다. 초기의 다윗처럼 말이다. 그 사회의 폭력의 대상이 되어 추방당했던 이들이 폭력의 주체가 되어 그 사회 속에서 생존하는 비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 사회와 대항하는 방식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사회의 존재방식과 똑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살아간 것이다.

입다 패거리의 영향력은 날로 확대되었고, 길르앗 전체에서도 가장 유명한 폭력배가 된 듯하다. 동편의 암몬 왕국이아마도 원시적 왕권제 사회였던 듯한데쳐들어오자 길르앗의 유지들은 입다를 찾아와 자신들의 콰신(11,6, : “통치자”), 즉 군대 사령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상비군이 있던 시대가 아니니 이 용어는 당장의 위급한 상황을 군대 지휘관으로서 지켜달라는 뜻일 것이다. 용병 대장을 고용하는 방식이지만, 길르앗의 의용군을 이끌 권한까지 부여한 정도의 권력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승리하면 길르앗의 로쉬(11,11: “통치자와 지휘관”)가 되겠다고 계약을 한다. 전시 임시 사령관을 뜻하는 콰신과는 달리, 로쉬는 거의 왕과 유사한 상시 지도자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입다의 폭력이 그 사회의 존속을 위해 쓰일 때, 그 사회의 이상은 치명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입다가 승리했다. 이제 계약에 따라 길르앗 족속은 그를 로쉬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데, 길르앗 부족과 바로 북부의 므나세 부족, 그리고 서부의 에프라임과 베냐민 부족 등은 형제 부족처럼, 느슨하지만 일종의 부족간 연합체로 엮여 있다. 그밖에 아주 일찍부터 므나세 지파에 통합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마길 족속이나 야일 족속도 이 연합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민수기32,39~42). 좀 더 느슨하게 확대하면 므낫세 이북의 부족들(아세르, 즈불론, 이싸갈, 납달리 부족 등)과 베냐민 이남의 부족들(유다, 갈렙, 고라, 그니스, 여라므엘, , 시므온 지파 등)까지도 동지적 결속체로 묶일 수도 있다. 또 단, 르우벤, 갓 부족도 연합의 방계적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실체 불분명한 연합은 후대에 좀 더 과장되어 잘 조직된 것으로 기억되며, 그네들의 이상 또한 잘 짜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주로 에프라임 부족으로부터 유래한 신념이었다. 이 부족의 족장이나 성소의 사제들, 예언자들은 가장 적극적으로 부족들 간의 평등 이상을 지켜내려는 이들이었다. 훗날 왕국 시대에도 이곳 출신 사제-예언자들은 공히 평등 이상을 통해 왕국시대에 개입하려는 사람들이었다(예컨대 사울의 파트너인 사무엘과 엘리 집안, 다윗의 사제인 아비아달, 북왕국 이스라엘의 시조인 여로보암의 동지 아히야, 유다 왕국 말기의 예언자 예레미야 등). 더군다나 길르앗 족속에 대해서는 거의 종주권에 가까울 만큼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런데 입다가 로쉬가 된 것이다. 이 만만찮은 인물의 등장은 에프라임을 바짝 긴장하게 한다. 이참에 길르앗 족속을 단속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굴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위험스럽게도 이 지파는 상임통치자로 그를 위임한 것이다. 이것은 왕권제를 이들이 추구한다는 혐의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더 강해지기 전에 그 위험천만한 직위의 소유자를 내쫓아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입다와 같은 무뢰배를 떠받드는 부족은 응징을 받아 마땅하다고 보았기도 하겠다. 그래서 에프라임 인들은 강을 건너 출병한다. 한편으로는 부족동맹의 평등 이상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급 부족이 자기들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설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입다는 거들먹거리는 에프라임을 더 이상 용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매춘부의 자식으로 천대받고 추방당했던 그가 우여곡절 끝에 기어이 부족의 지도자가 될 기회를 얻었는데 이 방해꾼들은 그의 꿈을 가로 막아서려 하는 것이다. 외동딸을 죽이면서까지 부족 사람들에게 신망을 지키려 했던 그의 욕망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사건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며 참견하는 에프라임 인들의 소행을 못견뎌했던 길르앗 사람들의 바람과 맞물리게 되었다.

이렇게 전투는 시작되었고, 입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더 이상 적이 그를 가로막을 수 없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기 위해 모든 생존자를 처형하기로 맘먹었다. 쉬볼렛/시볼렛은 바로 그 살육을 위한 언어적 수단이 되었다.

흔히 폭력의 역사는 나쁜 이상에 의해 추동되는 사회의 산물인양 생각되곤 한다. ‘악의 축운운 하는 말은 나쁜 이상의 극한이 존재하며, 그 극한의 악은 우리를 오염시켜 우리 자신을 재앙에 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죽임의 문화를 낳는다. 예수의 죽임당함의 배후에도 바로 이러한 신념을 가진 유대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역사의 희생양들은 이 죽임의 악취를 풍기는 신념들이 휘두른 칼날에, 총질에 무참히 스러져가야 했다.

한데 쉬볼렛/시볼렛 비극은 그리 심각한 악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흔히 있는 폭력과 배제의 현장에서 비극의 싹은 자라난다. 특별한 악마의 장난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품는 욕구들로 인해 비극은 키워지고, 흔한 상처들로 인한 욕망을 자양분 삼아 자라난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함 속에서 이 잔혹한 폭력적 사건은 배태되었던 것이다.

또한 쉬볼렛/시볼렛 비극은 아름다운 이상들을 품은 이들의 신념 속에서 발생하였다. 나쁜 이상과 좋은 이상이 부딪혀 나타난 게 아니라, 좋은 이상과 명분을 위해 폭력과 대량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피비린내 나는 폭력 사태는 사악한 저주의 욕설만으로 자행된 것이 아니다. 아무런 의미상의 관련도 없는 언어들이 동원되었다. 어쩌면 아름다웠을 수도 있는, 혹은 행복한 꿈이나 추억을 간직하였을 수도 있는 쉬볼렛/시볼렛은, 그 평범한 말은 의도하지 않은 이 역사와 얽히면서 몸서리치는 잔혹함의 상징이 되어야 했다.

하여 쉬볼렛/시볼렛의 비극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평범한 언어들을 통해, 그리고 아름다운 이상을 위한다는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역사의 참극들을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교훈이다. 훗날 유대인이면서도 배타적 시오니즘에 대항한 위대한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에 대한 나치와 독일인의 학살은 특별한 악의 축에 의해 책동되어 자행된 것이 아니라 악의 평범성이 얼마나 참혹한 데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예수의 죽임당함을 기억하고 기리는 많은 이들은 수난절기를 맞아 절대악에 대한 증오를 촉발시키는 언어를 서슴치 않고 발설한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기독십자군들은 세계 각처에서 쉬볼렛/시볼렛의 비극의 주역이 되고 있다.

  1. 이 토판 문서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300㎞ 떨어진 ‘텔 엘 아마르나’(Tell el-Amarna) 지역에서 발굴되었으므로, 아마르나 문서라고 불린다. [본문으로]
  2. 아마르나 문서에 나오는 ‘하비루’(Habiru)는 아카드어로 된 쐐기문자에 나오는 하비루 또는 아피루(Apriu), 다른 이집트 문서에 등장하는 아피루,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어로 된 암호인 사가스(SA GAS) 등과 함께 비슷한 대중 현상을 다루는 용어로 보인다. [본문으로]
  3. 물론 사회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충분히 조직화된 것은 왕국시대에 이르러서다. 따라서 초기공동체 시대 부족간의 연결망을 너무 과장해서는 안 된다. [본문으로]
  4. 가나안 인근 지역에서 군장사회(chiefdom society)나 고대국가가 바로 이 시기에 이스라엘의 진화 과정과 인근 국가들의 진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이것은 성읍국가 수준을 넘어서는 규모의 사회조직화가 바로 이 시기에 제도화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이때 종교적 결속의 요소가 제도화의 추동 요인으로 작동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5.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들 사회의 국가법들도 사실은 상당부분 민간의 규범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사회의 민간 규범은 거의 확인할 수 없을 만큼 훼손, 변형되었다. [본문으로]
  6. “그와 같은 수치스러운 행위”: 〈판관기〉 19,23~24; “이스라엘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창세기〉 34,7; 〈사무엘기하〉 13,12. [본문으로]
  7. 라반이 ‘형제들’ 소집하여 추격함: 〈창세기〉 31,23;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림: 〈창세기〉 34,5~7; 미가가 이웃 사람을 불러 모아 단 지파의 강탈자들을 좇아감: 〈판관기〉 18,22; 레위인이 강간당해 죽은 아내의 일로 이스라엘 지파연합 회의를 소집하여 호소함: 〈판관기〉 19,30. [본문으로]
  8. 사실 판관으로 명기된 이들은 판관의 역할을 한 이들도 있지만 대개는 전쟁영웅들이다. [본문으로]
  9. 돌라는 〈판관기〉 10장 2절에 따르면 이싸갈 출신이지만 에프라임 산악지대에 있는 사밀에서 살고 있었다. [본문으로]
  10. 〈판관기〉 12장 12절에 의하면 엘론은 즈블론 땅의 아얄론에 묻혔다고 하는데, 이 아얄론은 실제로는 베냐민 지역에 속해 있는 땅이다. [본문으로]
  11. 기드온 야이르 입산 압돈 등. 이러한 현상은 기드온 앞의 판관들의 경우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본문으로]
  12. 한편 계급분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통합은 주로 씨족 단위로 여전히 견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행위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대안 선택에 미치는 주된 요인은 여전히 혈연적 귀속성에 절대적으로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예: 아비멜렉과 세겜 등). [본문으로]
  13. 가자, 아스돗, 에크론, 아스클론, 갓 등의 다섯 도시를 이끄는 세렌(seren)의 연합체. [본문으로]
  14. 그래서 그의 군대의 주력은 의용군이며, 상비군도 이스라엘의 자원금과 개인 가문의 재력으로 유지되었다. [본문으로]
  15. 그래서 다윗 군대는 ‘보호적 약탈’의 관계에서 취득한 재화에 의존한다. 이것은 그의 군대가 재화의 원천에 따라 싸워야할 적이 뒤바뀔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상대적으로 다윗 집단은 탈가치적이다. [본문으로]
  16. (헤브론의)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등장한 ‘의사군주’ 유형의 지도자인 군장으로서 규정할 수 있다면, 후기의 다윗은 이스라엘 지역의 ‘군장’인 동시에 예루살렘을 필두로 하는 비예루살렘 지역의 ‘초기군주’적 유형의 통치자였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17. 이 글은 〈판관기〉의 입다 이야기에 나오는 어구를 파울 첼란이 시어로 사용한 것에 착상을 얻어 쓴 글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