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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강좌

유다왕국과 예언자들 I

신학아카데미 탈/향 2009년 가을 강좌 '역사로 읽는 성서 II - 부족사회와 군주제 사회 야훼신앙의 역사'의 넷 째 마당(2009.11.12) 강의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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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왕국과 예언자들 I

 

 

 

 

미숙아의 걸음마르호보암에서 우찌야까지

 

다윗-솔로몬의 나라에 관한 성서의 서사와는 달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나라는 팔레스티나의 눈에 띄지 않는 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성서는 유다가 (리비아 계열로 이집트를 정복한 뒤 제22왕조를 창건한) 시삭(=셰숑크 1, 주전 935~914)의 호전적인 팽창주의에 시달려야 했다고 말한다(열왕기상14,25~28). 지난주에 보았듯이 테베의 부바스티스 현관에 새겨진 비문에는 자기에게 조공을 바친 이스라엘 왕국 지역의 여러 도시들이 열거되어 있지만, 유다 왕국 지역의 도시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가 추측한 것처럼, 여로보암의 나라는 시삭의 지배력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팔레스티나 중북부 농민의 독립운동의 결과일 수 있다. 아마도 제22왕조가 팔레스티나를 지배하던 시기에 그곳에서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등장했고, 여로보암의 이스라엘국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태동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바로 그 시기 남부 유다지역에는 다윗-솔로몬-르호보암이 지배하는 군사적 정치집단이 점점 왕국으로 발전하는 초기 단계를 거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르호보암의 왕위를 승계한 이는 아비야였다. 그러나 그의 재위기간은 단지 3년뿐이었다. 그의 나이어린 형제 또는 아들이었던 아사(910/09~873/72[870/69] BCE.)가 그를 이어 즉위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 탓에 정국은 암몬족 혈통의 대비인 마아가에 의해 주도되었다. 아마도 암몬의 예속국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얼마 후 성년이 된 아사는 (배후가 누구이며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아가를 축출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열왕기상15). 신명기적 역사가의 서사에서 그가 좋은 왕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의 이면에는 이러한 암몬계 왕실의 지배를 제거하는 정변의 주역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열왕기상22,47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었고, 유다의 왕이 임명한 대리자가 다스리고 있었다.”처럼 성서는 암몬을 유다의 속국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아사의 정변은 마아가의 지배력을 전제해야 하고, 마아가의 통치는 암몬 세력이 유다의 속국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고 보지 않고는 설명의 궁색함을 면할 수 없다.

그리고 아사는 처음으로 공동통치를 통해 여호사밧([873/724]870/69~854/53[848] BCE.)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의 통치에 관한 흥미로운 정보가 역대기하17,7~9에서 발견된다.

 

그는 왕이 된 지 삼 년째 되는 해에, 지도자들인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유다 여러 성읍에 보내어, 백성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들과 함께 레위 사람들, 곧 스마야와 느다냐와 스바댜와 아사헬과 스미라못과 여호나단과 아도니야와 도비야와 도바도니야, 이런 레위 사람들을 보내고, 또 그들과 함께 제사장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냈다. 그들은 주님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 전국을 돌면서 백성을 가르쳤다. 그들은 유다의 모든 성읍을 다 돌면서 백성을 가르쳤다.

 

과장된 설명을 감안하고 해석하면, 아마도 그의 시대에 지방에 대한 초기의 관료적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시사로 읽을 수 있을 법하다. 여기서 왕실 관료는 지방주재관이 아니라 순회하는 자이다. 즉 지방에 대한 왕실의 통치는 아직 지방의 토호들을 압도하지 못했다. 다만 우위의 위치에서 영향을 미치는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 지방순회통치는 레위인으로 묘사되는, 왕실에 충성하는 종교집단의 존재와 관련이 있었다. 또한 왕실의 중앙 제의가 지방제의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도 암시된다. 이 모든 것은 그의 통치가 군사적 시위 이상의 의미로 영역 내의 부족들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여호사밧의 유다는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의 속국이었다. 그의 아들 여호람에게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성서의 서사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보이는데, 유다의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854/53]848~841 BCE.)은 그의 아들 아하지야(841 BCE)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런데 그 시기 이스라엘 왕권은 아합이 그의 아들 아하지야(853~852 BCE.)에게 왕권을 승계하고, 아하지야의 동생 여호람(852~841 BCE.)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된다. 즉 여호람이라는 같은 이름의 통치자가 양국의 왕이 된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그 중 하나는 아하지야의 아들(유다)이고 다른 하나는 아하지야의 동생이다.(이스라엘. 열왕기하1,17: “이스라엘에서는 아하시야 왕이 죽었다. 그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동생 여호람이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때는 남왕국 유다에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즉위하여 다스린 지 이년이 되던 해였다.”) 즉 양국의 여호람은 아하지야라는 동명의 사람과 관련이 있다. 한데 유다의 여호람은 (오므리의 손녀이고 페니키아 출신이자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의 딸인) 아달리야의 남편이다. 요컨대 그는 이스라엘계 유다 왕인 셈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유다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지야는 이스라엘의 예후 정변 때에 이스라엘왕 여호람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유다 역사에서 이스라엘과 가장 깊게 엮이어 있던 시절, 통치기간이 겹치는 동명의 왕이 양국에서 각기 통치자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것은 두 명의 여호람이 아니라 동일인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양국이 이 시기에 거의 형제국과 같은 의미의 속국관계임을 의미한다.

아무튼 예후의 쿠데타로 유다왕 아하지야가 죽자 그의 모친이자 이세벨의 딸인 아달리야(841~835 BCE.)가 통치권을 장악한다. 그녀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틀어 유일한 여성 통치자였다. 필경 그녀는 페니키아-이스라엘계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녀의 권력은 보다 본격적인 중앙집중적 왕권을 유다에 도입하려는 움직임의 대표자였을 것이다. 그녀는 왕실학살극을 벌이면서 집권에 성공했는데, 역대기하21,4에 따르면 그녀의 남편 여호람도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형제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이것은 여호람-아달리야가 대표하는 오므리 식 개혁이 아직 부족사회의 티를 완전히 덜어내진 못한 유다 사회에 적지 않은 반발을 수반했다는 시사일 수 있다.

아무튼 아달리야가 왕실 학살극을 벌일 때 살아남은 유일한 왕손인 요아스는, 여호람의 딸이자(아마도 아달리야의 의붓딸인) 아하지야의 누이인 여호사브앗이라는 여인이 숨겨줌으로써 생존할 수 있었다. 이 여인은, 훗날 아달리야를 축출하는 궁중 쿠데타를 주도한 대사제 여호야다의 아내이다(역대기하22,11). 그녀는 요아스를 자신의 남편이 주관하는 성전에 은둔시켰다.

아무튼 아달리야의 쿠데타로 다윗 혈통에 의한 왕정은 일시 중단된다. 그러나 대사제 여호야다가 중심이 된 쿠데타가 일어나고 다시 다윗계인 요아스(835~797/96 BCE.)가 등국하게 됨으로써 유일한 비다윗계의 통치는 7년 만에 막을 내린다. 이 쿠데타는 다윗 가문에 절대충성하는 왕실 소속 야훼 사제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역시 왕실에 대한 충성파(근위대라는 점에서)인 가리 족속 외인부대가 동원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신명기사가는 이 쿠데타에 암하아레츠가 참여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열왕기하12,14). 이들은 소토지 보유 자작농을 가리키는 비전용적 표현이지만, 신명기사가는 이들을 친왕실적인 정치세력화한 지방농민집단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요시아 개혁의 1등공신의 하나로, 요시아 개혁의 민중적 성격은 바로 이들의 지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 즉 요시아 개혁의 산물로 등장한 서기관집단인 신명기사가의 암하아레츠는 민중적 개혁파 농민집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명기사가의 역사해석에 따르면 오므리식의 발전 전략을 추구하는 여호람-아달리야 계열의 왕실에 반대하는 세력이 요아스의 등극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요아스 당대를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다만 여호람과 아달리야의 궁중학살극과 요아스의 정변의 이면에는 군주국으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는 유다왕국과, 그러한 변화 과정에서 점차 예속농으로 전락하고 있는 유다 민중의 저항이 어떤 형태로는 게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는 있다.

요아스는 일곱 살에 즉위했다. 당연히 정국은 한동안 여호야다의 수중에 장악된다. 그러나 그가 죽자, 요아스는 그의 아들 즈가리야를 처형함으로써 왕권을 되찾는다. 역대기는 이 갈등을 야훼를 떠난 악한 왕 요아스라는 주제 아래 다루고 있지만, 여기에서 여호야다와 왕실간의 권력 투쟁 이상의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예후의 쿠데타로 정국을 수습하는 데 여념이 없었기에, 유다왕 요아스는 자주적인 권력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람왕 하사엘의 팽창주의가 이 시대의 국제정세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였다. 열왕기는 그에게 뇌물을 바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는 반면(열왕기하12,17~18), 역대기는 요아스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는 정보를 준다(역대기하24,25). 아마도 이 둘은 동일한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일어난 두 정황일 것으로 보인다. 즉 전쟁에서 패배한 요아스는 공물을 바치고 봉신국 서약을 함으로써 겨우 왕조를 지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대기에 의하면 패배 이후, 요아스는 측근들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보도하면서, 이 비참한 최후는 즈가리야를 처형한 것에 대한 응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아마도 여호야다 파의 잔존세력이 왕권이 약화된 틈을 타서 요아스를 시해한 것을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요아스의 아들 아마지야(797/96~792/91[768/67] BCE.)는 등극 직후 바로 부왕의 살해자들을 처형한다(열왕기하〉〉12,21; 14,5). 그는 하사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다마스커스가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 의해 패배하여 무력해지고, 동시에 아닷니라리 3세도 내란에 시달리게 되면서 생긴 제국의 공백기에 잠시 부흥의 기회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스라엘에게도 부흥의 계기가 되는 때였다. 하여 예후의 아들 여호아스와의 대결은 불가피했다. 아무튼 아마지야는 이 전투에서 대패하고, 그 자신 포로로 잡힌다. 막대한 재화를 빼앗기고 왕자를 포함한 상당수의 왕족을 볼모로 잡혀가게 하고서야 그는 풀려났고, 그 이후 유다는 또 다시 이스라엘의 예속국으로 전락한다. 허약해진 왕권은 아마지야가 모반자들에 의해 피살되는 것으로 귀결된다(열왕기하14,19~21). 그를 이어 아들 우찌야([792/91]768/67~750[740/39] BCE.)가 왕이 된 내력은 알 수 없다. 반란은 어떻게 진압되었는지, 우찌야의 권력 기반은 어떤지 등,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역대기는 그의 시대가 대단한 번영을 이룩했고 강력한 군사력의 지닌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길게 얘기하고 있지만, 거의 개연성이 없다. 그의 시대를 반영하는 고고학적 유물은 거의 없고, 그의 시대 전후의 몇 안 되는 유물도 빈약한 국가상황을 보여줄 뿐이다. 그의 시대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치세기인데, 우찌야의 영토나 부에 관한 묘사 대부분은 여로보암의 것을 전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거의 봉신국에 다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국의 재앙아하즈에서 히즈키야까지

 

우찌야 말기 왕은 유폐되었고, 그이 아들 요담([750]740~735[732/31] BCE.)이 공동왕으로 통치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치세기 대부분 역시 이스라엘의 그늘 아래 있었다. 이스라엘의 베가 왕과 다마스커스 왕국의 르신 왕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서 다시 한 번 반아시리아 연합을 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다의 요담 왕은 이를 거절했고, 이에 연합군은 아시리아 군이 이 지역에 도달하기 전에 유다를 먼저 공격했다. 그때는 아하즈([735]732/31~716/15 BCE.)가 요담을 승계하여 왕이 된 직후였는데, 이사야서는 연합군이 유대로 쳐들어가 아하즈를 폐위하고 반아시리아 정권을 세우려 했다고 한다(‘타브엘의 아들’, 7,6). 이때 유다는 북으로 베가-르신 군대를 맞아야 했고, 남으로는 에돔 족의 공격을 받았으며(열왕기하16,6), 서쪽으로부터는 블레셋과 맞서야 했다(역대기하28,17~18).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 3(재위 744~727 BCE.)에 긴급한 도움을 요청했고, 제국은 다마스커스, 이스라엘 등 연합군에 가담한 국가들에 처절한 응징을 가했다. 디글랏빌레셀의 승전 비문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 있다. “짐은 이 원정에서 비트 후므리(오므리의 집안) 땅의 모든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 짐은 그 땅의 모든 가축을 약탈했고, 사마리아만을 고립된 채 남겨두었다.”

사마리아가 남겨진 이유는 이스라엘 조정에서 정변이 일어나 베가를 암살하고, 호세아를 왕위에 앉힌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아시리아는 친아시리아 정부가 세워진 것으로 이해하고, 철군하였던 것이다. 한데, 티글랏빌레셀이 죽고 살마네셀 5(재위 727~722 BCE.)가 즉위하는 혼란 시기를 틈타 다시 이스라엘은 독립을 꾀하여 이집트의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낸다. 그러나 아마도 조정 내에서 친아시리아파의 제보로 이는 들통났고, 살마네셀 5세가 이끄는 아시리안 군대가 다시금 쳐들어왔다. 비록 그 전쟁 기간에 황제는 죽었지만, 그를 승계한 사르곤(재위 722~705 BCE.)에 의해 기어이 이스라엘은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위기를 넘긴 아하즈 정부 내에 반아시리아-친이집트 노선을 고집하던 정파는 몰락했다. 또 유다를 압박하던 이스라엘도 사라졌으니, 가나안 지역에서 유다를 억압할 만한 국가도 사라졌다. 이제 아하즈는 본격적으로 친아시리아를 표방하게 될 수 있었다. 이는 아시리아 경제권에 유다 지역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과정에서 올리브기름과 포도주 산업이 크게 확장되었고, 이는 왕의 부가 팽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아하즈의 왕권은 경쟁자를 압도할 만큼 충분히 강력해졌고, 체제에 협력하는 귀족들에게 부를 배분해주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데 그것만이 아니다. 아하즈 시대는 두 차례의 대대적인 전쟁으로 이스라엘을 포함한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했던 많은 국가들에서 전쟁유민이 유다 지역으로 피신해 들어옴으로써 대대적인 인구적 변동을 겪은 시기였다. 거의 인구가 두 배 반 이상이 늘었다(대략 12만 명으로 추산). 인구밀도가 희박하여 공터가 많던 유다로선, 수많은 전쟁 유민이 유입돼 들어온 것이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실은, 마침 아시리아와의 올리브와 포도주 무역을 위해서는 땅을 더 개간하여 생산량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아하즈는 이들 유민들을 동원해서 국가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부가 팽창했고, 귀족들도 더욱 부유해졌다. 그러나 백성의 삶이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아하즈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의 삶의 안전을 위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풍요 속의 착취의 상황은 대중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지배 엘리트 내의 한 분파는 바로 이러한 대중을 동원하는 데 성공한다.

아마도 아하즈를 승계한 히즈키야(716/15~697/96[687/86] BCE.)의 일련의 정치적 종교적 개혁은 이러한 지배엘리트 내에서 대중동원에 보다 적극적이던 분파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신명기사가의 개혁의 뿌리가 바로 이 시기에 놓인 것은 바로 그것을 시사한다. 한편 새 왕은 과거 우찌야 왕의 국사였던 즈가리야 가문 출신의 여인의 아들이다. 이는 그가 예루살렘의 전통적 야훼주의 일파와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가진 통치자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그의 개혁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자. 앞서 보았듯이 아하즈는 북왕국의 유민을 비롯한 인근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많은 전쟁유민을 포용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대대적인 인구변동의 영향을, 앞서 말한 것처럼 단지 생산성의 증가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이질적인 인구의 갑작스런 혼합은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하였을 것이다. 아하즈는 이러한 이질성의 혼란은 억지로 통합하려고 하기보다는 다양한 종교적 관습을 허용했던 듯하다. 신명기사가가 그를 그토록 우상숭배의 혐의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의 이러한 종교 포용 정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본 것처럼, 아하즈의 정치경제적 지배전략은 이질적 대중을 포용하여 왕당파의 지배 권력을 강화하는 데 활용했다. 즉 대중의 신앙은 반민중적 지배전략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히즈키야의 지방산당 철폐조치는 제의집중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루살렘의 야훼주의자들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고, 또한 지방의 올리브와 포도 대농장들을 장악하고 있던 아하즈 시절의 구집권층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바로 그들의 예속농으로 전락하고 있던 암하아레츠의 지지와 기대를 끌어오는 논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울러 구집권층의 친아시리아 노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것은 다음에 살필 이사야 예언자의 신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을 히즈키야 개혁이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 더, 개혁의 신학적, 이론적 배경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주의적 관점에서 유다왕국의 진보적 야훼주의 전통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끊임없이 암하아레츠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있지만, 아마도 그들은 이스라엘의 풍부한 민중 예언자적 전통을 결여하고 있었고, 그것을 체제내적 실험으로 시도해온 경험도 일천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유민의 대대적인 유입은 그들과 함께 그들 사이의 설화들이 동시에 유입되었고, 또 문자적이고 엘리트적인 체제 구성적 신학도 이전되어 왔다는 것을 수반할 것이다. 그것은 유다에 민중적 메시아니즘이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그러한 사상을 체제 이념으로 발전시킨 자산이 축적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히즈키야의 개혁은 이러한 자산 위에서 위와 같은 개혁이 실험되었던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유다의 유적지들에서 발굴된 왕의 인장이 찍힌(lmlk, “왕에 속한다는 뜻의 어휘 약자) 큰 단지들은 히즈키야 개혁의 이러한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들이다. 이것들은 현물세 징수용이거나 양곡 비축용 단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도량형을 표준화함으로써 대지주들의 무분별한 대중 착취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히즈키야는 이것을 통해 조직적인 조세 및 병참 체제같은 행정체계의 조직화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왕실의 부와 군사력을 유지하면서도 지방의 대지주들의 권력은 약화되었던 것이다. 역대기하에 묘사된 바, 히즈키야가 취한 군의 재무장화, 군제 개편, 병참 체계화 및 요새화 등의 정책(32)은 바로 이런 개혁과 맞물려 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제의를 예루살렘에 집중시키려던 히즈키야의 정책은, 이스라엘의 진보주의적 저항전통을 왕실의 통치이념으로 재해석하는 활발한 왕실 이데올로그들의 활동의 흔적일 것이다. 이런 흔적은 훗날 요시아 개혁의 밑거름이 된다.

 


[그림4-2] 히즈키야 터널

한편 히즈키야의 개혁 정책은 반아시리아 노선을 수반하였다. 마침 사르곤이 키메르 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히즈키야는 반란의 기치를 들어 올렸다. 당시 유다는 시리아-팔레스티나의 강대국으로 부상해 있었고, 이것은 이집트의 배후조종과 관련이 있다. 아시리아의 갖은 조공 요구나 병참이나 병력 동원에 대한 압박에 불만을 품던 많은 소국들이 이집트의 지원을 기대하며 히즈키야와 연대했다.

히즈키야가 전쟁 준비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많은 문헌적 고고학적 흔적들이 발견된다. 역대기하32장에는 곡식과 기름, 포도주를 저장할 창고, 대규모 가축우리 등을 전국 요소요소에 세웠고(27~29), 예루살렘 등의 요새화를 위해 민가를 헐면서까지 견고한 성벽 재수축에 힘썼다(이사야서22,10). 어떤 곳은 방벽이 6미터나 되는 곳도 발견되었다. 예루살렘 성 밖의 기혼샘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저 유명한 터널은 지하의 암반을 깍아 파낸 것으로, 525 미터(기혼샘에서 실로암 못까지)나 되는 수로이다. 양쪽으로 파들어갔는데, 서로 정확하게 만났다는 기록을 담고 있는 실로암 비문은 이 사업이 얼마나 고도의 토목기술이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터널의 기울기가 거의 없어, 단지 고도의 차이가 32센티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르곤을 승계한 아시리아 황제 산헤립(재위 705~681 BCE.)은 얼마안가 바벨로니아, 아나톨리아 등지의 반란들을 모두 제압하고, 시리아-팔레스티나를 향해 진군했다. 주전 701년과 688년 두 차례의 침공 때에, 유다는 예루살렘 성에 갇힌 채, 아시리아의 가공할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세계 최고의 공성전 능력을 갖춘 대제국 아시리아를 막아낼 길은 없었다.

유다의 최대 곡창지역인 즈블라 지역에 있는 저 유명한 요새 라기스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는, 아마도 산헤립의 종군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이는 길이 18미터, 높이 2.7미터의 거대한 그림 속에서 단적으로 엿보인다. 이 전투에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치열한 항전을 벌이던 라기스와 그 인근의 농경지는 결국 잿더미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복원이 되지 못한 채 잔해만을 남기고 말았다. 이곳에서 발굴된 시체의 집단매장지에서는 최소한 천오백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결국 막대한 공물과 함께 봉신국의 왕이 될 것을 청원함으로써 유다는 겨우 생존할 수 있었다. 이때 왕실의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볼모로 혹은 전쟁배상금조로 끌려갔고, 예루살렘과 그 인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토가 인근 친아시리아 정부에 귀속되어버렸다.

 

이제 왕실 재정을 고갈됐다. 물론 개혁을 위한 비용도 결단났다. 그의 입지는 극도로 약화된 듯이 보이며, 아마도 제1차 전쟁 직후에 아들인 므나쎄([697/96]687/86~643/42 BCE.)와 공동통치를 해야 했고, 2차 전쟁 직후에 므나쎄에게 왕권을 이양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므나쎄 정권은 선대왕의 개혁의 기반을 철저히 파괴했다.

 

완성 그리고 몰락므나쎄에서 요시아까지, 그리고 마지막 왕들

 

므나쎄가 히즈키야를 승계했다. 그는 아마도 부왕이 북부지파를 왕실 중심의 개혁 정책에 끌여들이기 위해 북부지파의 명칭으로 이름이 지어졌던 왕자였던 것 같은데, 역설적이게도 므나쎄 치하의 유다는 철저히 반히즈키야 노선이 지배적이던 시대였다. 열두 살에 공동통치자로 등극한 왕은 아마도 한동안 친아시리아파 관료들에게 좌우되었을 것이며, 필시 히즈키야는 무력한 상태였을 것이다. 절정기를 구가하던 아시리아는 유다를 포함한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여러 국가들의 내정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였고, 다른 나라들처럼 아시리아인 판무관이 파견되어 왕실을 일일이 감시하였다(이사야서28,11~1333,19에 나오는 생소한 입술어려운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유다 정부 내에 있던 아시리아인 관리였을 것이다). 역대기하33,11에는 그가 아수르바니팔(재위 668~627 BCE.)에게 호출되어 연금당하기도 했다는 기억이 담겨 있고, 그 선대황제인 에살하똔(재위 680~669 BCE.)의 비문에는 건축자재를 조공으로 바치는 봉신국왕으로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 이것은 므나쎄 정권이 얼마나 철저히 아시리아에 예속된 국가인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사정이 그리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일단 체제가 안정화되었고, 아시리아라는 거중조정자의 존재는 인근 족속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체제가 가능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즈블라 지역은 황폐화되었지만, 좀더 나쁜 땅이지만 유대의 동쪽과 남쪽의 황무지들이 새롭게 개간되고, 여기서 생산한 올리브의 막대한 양이 블레셋의 텔 미크네(에크론)에서 가공되어 앗시라아와 아라비아로 수출되었다.

곡창지역이 즈블라가 황폐화된 이후, 황무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는 사업은 왕실이 주도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그 생산물은 왕의 재산이 되었고, 왕과 왕당파 귀족 중심의 부는 선대왕 시절의 전쟁의 참화를 빠르게 회복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왕당파 귀족들의 횡포는 다시 극성을 부렸고, 히즈키야 개혁 지지파들은 집권층의 정치적 보복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야 했다(열왕기하21,16). 이제 진보주의자들인 히즈키야의 개혁당 야훼주의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야만 했다. 군사적 테러리즘에 의존했던 아시리아는 이 봉신국에게 자신들의 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왕실과 친아시리아적 정부는 열광적으로 아수르신과 이쉬타르 여신 신앙을 도입하였다. 또한 선대왕의 개혁정책이 무력화됨에 따라 다양한 지방 성소들이 다시 복원되었고, 이곳에서 귀족들의 이데올로기적 통치가 실행되었다.

55년이라는 유다 왕국 사상 최장기간 통치자였던 므나쎄가 죽고, 아몬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위 2년 만에 암살당한다. 당시는 아시리아가 갑자기 몰락하고 있던 시기였다. 아마도 이것은 친아시리아파와 반아시리아파간의 정파적 대결의 소산인 것 같은데, 이때 또 다시 암하아레츠가 등장하여, 암살자들을 처형하고 아몬의 아들 요시아(641/0~609 BCE.)를 즉위시킨다. (이 왕에 관하여는 첫째 마당에서 자세히 논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제 유다의 마지막 왕들에 관한 이야기다. 요시아 개혁은 (미가 예언자를 포함한) 민중세력이 현실 정치사에 개입하여 온 200년 전통의 결실이자, 이사야 같은 비판적 지식인들의 열정적이면서도 신중한, 지파동맹 전통 재해석의 결실이었다. 바야흐로 유다에서도 이른바 진보적 정치가 실행되었던 것이다. 히즈키야를 승계한 요시아 정부는 다양한 개혁세력을 결집하여 이른바 신명기 정신이라는 개혁의 신학적-이데올로기적 토대를 마련하였고, 이에 기반을 둔 진보주의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이 위대한 정치사적 실험은 순식간에 나락을 향해 빨려들어 갔다. 무섭게 발흥하고 있던 바벨로니아를 견제하기 위해 이집트 제26 왕조의 느고 2(재위 610~595 BCE.)의 군대는 아시리아를 후원하기 위해 출병했고, 이집트와 아시리아로부터 자주권을 되찾으려는 요시아의 유다 왕국은 바벨로니아의 전초기지 혹은 이집트의 후방 교란의 역할을 자임하여 느고 군대의 진군을 저지하려 했다. 혹은 고분고분하지 않는 요시아를 느고가 호출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므기또 요새 전투에서 왕이 전사했든, 느고가 호출된 왕을 처형했든, ‘요시아 개혁호는 이로써 좌초했다.

예루살렘 조정은 당황했다. 대책 없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또 다시 역사의 해결사 암하아레츠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즉위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므기또를 지나 리블라에 진군하고 있던 중에 이 소식을 접한 느고 2세는 칙사를 파견하여 요시아의 다른 아들 여호야킴을 즉위시키고, 여호아하즈를 이집트로 압송한다. 즉위한 지 3개월만이었다.


[4-1] 유다 왕국 말기의 연대표

이집트(26왕조)

유다

아시리아 제국

바벨로니아 제국

메디아 제국

 

므나쎄

(주전697/6~643/2)

 

 

 

앗스루바니팔

(668~627)

프사메티쿠스 1

(664~610)

아몬(643/2~641/0)

요시아

(641/0~609)

 

신사르이스쿤

(629~612)

나보폴라사르

(626~605)

시약사레스

(625~585)

앗스르우발릿 2

(612~609)

느고2

(610~594)

여호아하즈(609)

여호아김(609~597)

 

느브갓네살

(605/4~562)

여호야긴(597)

시드기야(597~586)

프사메티쿠스 2

(594~589)

아프리에스(호프라)

(589~570)

아스티야게스

(585~550)

 

 


우리는 여기서 이 왕위 승계 과정 이면에 숨겨진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 여호아하즈는 23세에 즉위했다. 그런데 3개월 후 즉위한 여호야킴이 25세였다. 여호야킴이 손위 형제인 것이다. 얼핏 정상적인 승계질서가 무너진 듯 보인다. 요시아가 생전에 이미 여호아하즈를 세자로 책봉한 탓일까? 그렇다면 왜 암하아레츠의 특별한 활동이 필요했을까? 이들은 유다 역사의 국면에서 비상사태에 출현하곤 했다. 만약 여호아하즈가 세자였다면, 요시아가 이집트에 패전하고 전사하자 므나쎄 이후 실각했던 친아시리아-친이집트 세력의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여 세자의 왕위 승계를 위협하려는 어떤 움직임에 대해 암하아레츠가 등장한 것일 수 있다. 또 여호아하즈가 자연스런 승계자가 아니었다면, 암하아레츠의 등장은 일종의 왕실 정변을 의미할 것이다. 어찌됐던 여호아하즈는 요시아와 암하아레츠를 결하는 정치적 계보 위에 있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호아하즈의 즉위에는 요시아 개혁을 민중적 개혁의 차원에서 계승하라는 요청이 함축되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집트는 바로 이런 인물을 퇴위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우리의 추론의 개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사건은 여호아하즈를 집권하게 한 세력이 과거 요시아 개혁 세력과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간접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보았듯이 요시아의 개혁주의는 아시리아-이집트의 지배로부터 자주권을 쟁취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반대로, 여호야킴이 친이집트 노선의 정파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필시 유다 정부 내의 이러한 세력이 왕위 승계에 얽힌 상황을 리브나에 있던 느고 2세에게 알려주었을 것이다. 므기또에서 승전한 이후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틈도 없이 북동진하던 이집트의 느고가 갑자기 예루살렘 조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뒤늦게야 승계에 얽힌 정황을 알게 되었던 것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후방에 또 다시 적대세력이 잔존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여호야킴의 즉위는 친이집트적이고 반개혁적(보수주의적) 정파의 득세를 의미했다.

 

여호아킴 체제, 귀족정치의 부활

 

여호야킴 정부 아래서 부패한 귀족정치는 부활했다. 귀족들의 사치행각은 벼랑 끝에 선 국가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끝을 모르게 심화되어 갔고, 이것은 백성의 피와 땀을 인정사정없이 잔혹하게 사취함으로써 가능했다.

 

부정한 수법으로 제 집을 짓고

사취한 돈으로 제 누각을 짓는 이 몹쓸 놈아!

동족에게 일을 시키고

품삯을 주지 않다니!

집을 널찍이 지어야지,

누각을 시원하게 꾸며야지!” 하며

창살문을 최고급 송백나무로 내고

요란하게 단청까지 칠하였다만,

누구에게 질세라 송백나무를 쓰면

그것으로 왕노릇 다하는 것 같으냐?

너의 아비는 법과 정의를 펴면서도

먹고 마실 것 아쉽지 않게 잘 살지 않앗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 주면서도

잘 살기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안다는 것이다.

내가 똑똑히 말한다.

그런데 너는 돈 욕심밖에 없구나.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려고 눈을 부릅뜨고

백성을 억누르고 독볶을 생각뿐이구나.

―〈예레미야서22,13~17

 

지방 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구태가 다시 기승을 부렸다(7,16~18; 11,9~13). 여호야킴 왕도 질세라, 요시아 시절 비축되었던 개혁 기금을 톡톡 털어 왕실을 호화스럽게 치장하는 데 마구 지출했다(22,13~19). 이제 개혁 정신은 정부 내에서도 실종되고 말았다.

이것을 비판하는 예언자들을 포함한 비판세력은 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예레미야서에는 여호야킴 정부의 비판세력에 대한 대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나온다. 우리야 예언자는 부패한 정부를 비난하는 방법으로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언했다. 체포 명령이 내려졌고, 정치범이 전통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우리아는 이집트로 망명했다. 그러나 여호야킴은 솔로몬과는 달랐다. 그는 악볼의 아들 엘라단에게 그를 이집트에서 체포해올 것을 명령했다. 우리야는 여호야킴 앞으로 압송되어 왔고, 처참하게 처형당했다(26,20~24).

 

예레미야의 등장

 

예레미야는 요시아 개혁 때에 공적 활동을 개시하였다고 하는데, 당시의 활동에 관한 묘사나 당시를 반영하는 신탁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요시아 개혁 당시 이 운동에 대한 그의 태도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호야킴 시대 이래 예레미야는 열렬한 요시아 개혁의 지지세력을 자임했고, 바로 그런 관점에서 정부 당국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그는 요시아 개혁 당대에도 개혁의 형식화, 민중의 도구화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레미야서4,3 이하, 그리고 8,4 이하의 긴 신탁, 특히 11절의 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건성으로 치료해주면서 / ‘괜찮다, 괜찮다하지만 어디가 괜찮으냐!” 등의 발언을 요시아 개혁 당시의 대중 복지적 차원의 정책의 형식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그는 요시아 말기 피상적인 개혁에 그치고 마는 현상을 간파했고 그것을 비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는 요시아가 죽은 직후 암하아레츠가 주동하여 일으킨 정변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사건으로 인해 즉위한 여호아하즈가 강제로 폐위당한 것에 그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너희는 죽은 왕(=요시아) 때문에 울지 말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오히려, 너희는

잡혀 간 왕(=여호아하즈)을 생각하고 슬피 울어라.

그는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다시는 고향 땅을 보지 못한다.

― 〈예레미야서22,10

 

그러나 여호야킴 왕에 대해서는 항상 그는 비판을 서슴치 않았고, 심지어는 왕의 시해를 충동하기까지 했다(예레미야서22,13~17). 그래서 그는 수차례나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고, 그때마다 그를 후원하는 일단의 고위층 인사들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곤 했다. 그의 후원자들은 주로, 사반이나 악볼처럼, 과거 요시아 개혁의 주도세력을 형성하던 인물들의 후손들이었다. 게다가 예레미야서36,11~32의 예레미야 필화사건에서 보듯이 그들은 이 급진파 인사의 과격한 발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시드키야 시대를 반영하는 본문이 집중된 46~51장의 앞부분은 대부분 여호야킴 시대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 시기 그는 체제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시절,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의 독설을 쏟아 붇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신학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의 출신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서에 의하면 그는 아나돗 출신이라고 한다(예레미야서1,1). 이곳은 신명기사가들이 과거 다윗 정부에 참여했다가 솔모몬에 의해 축출되었다고 전하는 전설적 예언자 아비아달이 유배된 곳이다. 또한 우리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건국에 참여한 아히야 예언자도 이 계열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요컨대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평등주의적인 지파동맹의 전통과 발전주의적인 국가적 지향 사이에서 양자를 절충해보려는, 즉 국가 정치 내에서 평등주의를 어떻게든 현실화해보려는 야훼신앙 운동의 맥락에서 이 계열의 활동이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힐키야의 아들이라고 한다. 동시대에 요시아 개혁과 관련된, 더욱이 왕족과 혼인관계로 얽혀있는 유명인사 중 동명이인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요시아 개혁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유력한 사제가문 출신이다. 그의 숙부인 살룸은 요시아 개혁 당시 여예언자이자 왕녀인 훌다의 남편이다(예레미야서32,7; 열왕기하22,14)임을 의미한다. 또 살룸의 아들 마아세야와 스바니야는 왕실의 고위직 사제였다(예레미야서35,4; 21,1; 37,3; 52,24).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요시아 개혁의 열렬한 지지파 가문 출신으로서, 가장 유력한 사제 귀족의 한 집안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활동을 국가 정책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포착해야 하며, 이를 둘러싼 조정 내부의 권력 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그의 신탁을 읽을 필요가 있다.

 

필화사건

 

그는 여호야킴이 즉위한 직후, 성전 경내에서 성전 파멸 신탁을 선언한다(7,1~8,3). 물론 이것은 새로 즉위한 왕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는 신탁임이 분명하다. 왕과 더불어 집권에 성공한 성전 사제들은 그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히즈키야 때의 선례를 들면서 선처를 호소하는 지방의 장로들의 중재 덕분에 생명을 구한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한동안 성전 출입이 금지된다(26,1~24). 이것은 왕실 정책에 대한 공식적인 자문활동을 제한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도 그는 일정 기간 동안 공적 활동을 제약하는 상당한 감시 아래 놓여야 했을 것이다.

한편 느고 2세는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로니아의 황태자 느브갓네살에게 패전한다. 이제 바빌론은 동부지중해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유다 왕국도 더 이상 친이집트 노선을 취할 수 없게 된다. 여호야킴은

아마도 바로 이때 예레미야는 다시 활동을 개시한다. 그는 왕의 정책을 비판하는 신탁 문서를 바룩을 통해 비밀리에 반입하여 선포하게 한다(36). 바룩은 마아세야(예레미야의 숙부인 살룸의 아들)의 손자이며 네리야의 아들이며, 훗날 시드키야 정부의 재무대신이던 스라야와 동기간인데, 아마도 바로 그 시드키야 시절에 그는 왕실 서기관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활동을 개시할 무렵의 그는 그리 높지 않은 젊은 조정관리인 듯하다. 아무튼 이 문서는 즉시 조정의 반왕당파를 결집시키는 계기로 활용된다. 과거 요시아 개혁의 가장 중요한 집안인 사반 가문과 네리야 가문 등이 주동이 되어 이것을 암암리에 유포시킨다. 왕은 이것을 불태움으로써 대응하지만, 아마도 이 필화사건은 왕당파에 상당한 상처를 준 것 같다.


[4-2] 예레미야와 바룩의 족보 

 

힐키야(사제)

 

예레미야

 

 

 

 

 

 

 

 

 

 

 

 

 

 

 

 

 

 

 

살룸(훌다의 남편)

 

 

마아세야

 

네리야

 

 

바룩(왕실서기관)

 

 

 

 

 

 

 

 

 

 

 

 

 

 

 

 

 

 

 

스바니야

 

 

 

 

스라야(시드키야의 재무대신)

 

 

 

 

 

 

 

 

 


이제 바빌론의 한 봉신국 통치자로 임명된다. 하지만 친이집트 성향의 유다 조정은 바빌론에 대항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전 601년 느브갓네살이 이집트 원정에서 실패하고 철군하게 되자, 여호야킴은 반란을 도모한다.


시드키야 체제, 동요하는 정국

 

주전 599/98, 전력을 회복한 느브갓네살의 바빌로니아 군은 다시 진군하여,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반란국들을 점령한다. 이때 유다 국토는 처절하게 유린당한다(열왕기하24,2; 예레미야서35,11). 그리고 그 즈음 바빌로니아 군에 예루살렘이 포위된 상태에서 왕은 의문사한다(독살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를 승계했고, 새 왕은 항복한다. 즉위 석달만에 그는 반란국 통치자의 직위로, 많은 지도층과 더불어 바빌로니아로 유배된다(1차 유배). 바빌론에 멸망되리라고 예언했던 예레미야의 선포는 실현되고 만 것이다.

느브갓네살은 시스키야를 즉위시킨다. 이 인물은 요시아의 또 다른 아들로서, 그의 모친은 바로 여호아하즈의 어머니였다. 시드키야가 즉위할 때 21세였으니, 비운의 왕 여호아하즈와는 14년 정도 연하였다. 그러므로 형이 즉위할 때 그는 불과 7살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정황을 기억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게다가 여호야킴 정부에서 은밀한 비판세력이던 이들이 공개적으로 그의 집권을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바빌로니아의 지배는 그리 정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조정은 친바빌로니아 노선을 취하는 과거 요시아 개혁의 계승집단과 친이집트 노선을 취하는 여호야킴 정부의 집권파간의 팽팽한 대립 구도를 이루었다. 아마도 여호야킴 시절의 탄압 때문에 전자는 수에 있어서나 권력에 있어서 그리 견고하지 못했던 것 같고, 설상가상으로 종주국에 대한 반발감에 의해 배가된 민족주의 탓에 더욱 세력이 위축되었던 듯하다. 예레미야는 친바빌로니아적-친요시아개혁적 정파와 인맥적으로 연계된 명망가의 한 사람이었다.

양대 세력 간의 격렬한 분쟁은 시드키야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나타났고, 통치 능력이 결여된 왕은 시국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 했다. 필경 그의 일관되지 못한 통치는 그의 권력기반이 심각하게 취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오락가락하는 통치자의 무능력한 모습은 일각에서는 공공연히 시드키야 대신 유배당한 여호야긴의 귀환을 열망을 담은 주장이 유포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예레미야서22,24~30). 갈수록 시드키야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채 이리저리 동요하기만 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시드키야에 대해 상당히 동정적이었음이 분명하다(34,1~5). 시드키야 역시 곧으면서도 국제정세에 밝은 노련한 종교지도자 예레미야에게 많이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왕국 멸망까지 11년간은 그에게 있어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민족주의를 등에 업은 반대파의 선동으로 민족의 파멸을 예언한 예레미야는 대중으로부터도 소외되었던 것 같고,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서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들이 잇달았다. 그는 여러 차례 구금되고 고문당해야 했다. 이런 소외감 속에서 그는 점점 장례나 혼례에 참석하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고(16,1~9), 심지어 예언자적 중재 역할을 수행하는 것조차 회피하기까지 했다(11,14~17; 14,11~12).

그러던 중 바빌로니아에서 군부의 반란이 일어나고, 이집트에선 프사메티쿠스 2(재위 595~589 BCE.)가 느고 2세를 이어 왕이 되어 다시 이집트의 발흥을 외치며 이웃 나라들을 부추기자, 유다에서의 민족주의는 절정에 이른다. 이집트에 의해 선동된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소국의 사절들이 예루살렘에서 회동했고, 예언자 하나니야는 여호야긴이 복위할 것과 유다가 바빌론의 지배에서 해방될 것을 예언한다(28). 한편 디아스포라 유배민 공동체 사이에서도 본국에서처럼 해방에의 열망에 고취되어 있었다.


[4-4] 이집트 제26왕조의 파라오들

Tefnakht II

Nekauba

Necho I

Psamtik I (Wahibre)

Necho II (Wehemibre) Psamtik II (Neferibre)

Apries (Haaibre)

Amasis II (Khnemibre)

Psamtik III (Ankhkaenre)

?

재위 678~672 BCE.

재위 672~664 BCE.

재위 664~610 BCE.

재위 610~595 BCE.

재위 595~589 BCE.

재위 589~570 BCE.

재위 570~526 BCE.

재위 526~525 BCE.

Founder of dynasty in Manetho, but existence debated.

 

Manetho gives his reign as 8 years.

Manetho gives his reign as 54 years.

 

 

Manetho gives his reign as 19 years.

 

 


더욱 절망에 빠진 채 예레미야는 소의 멍에를 메고 나타나서는 민족주의에 열광된 채 야훼로부터 빗겨가기만 하는 동족의 모습을 절규하듯 비판한다. 또한 디아스포라 유배민들에게 망상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낸다. 그는 맹목적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소수의 특권층이 선동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그네들의 무책임한 단견의 소산임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귀족들의 부패함에서 벗어난 세상을 주장했다. 이것이 그의 메시아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다윗의 혈통에 의한 메시아 은유를 통해서(23,5~6), ‘정의의 통치자를 기대했다. 이때 주의할 것은, 그가 말한 정의는 혈통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심지어 그는 메시아 기대의 주인공이 바빌로니아 왕이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그가 주장하는 정의로운 왕의 기준이 혈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책에 의존하는 것임을 뜻한다. 존재가 아니라 행함에 초점이 있다. 누군가 권력과 억압을 분쇄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그가 바로 정의의 통치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드키야는 결국 반란에 참여하고 말았다. 이 회동 후 몇 년이 못가서, 프사메티쿠스 2세를 승계한 호프라(아프리에스)가 팽창주의 정책을 펴면서 다시 팔레스티나 여러 나라들을 충동질했는데, 유다가 이에 넘어간 것이다. 이것은 단견임이 분명했다. 주변의 나라들은 이집트의 회유에 미온적이었는데, 시드키야 정부가 섣부르게 반란의 대열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주전 587년 느브갓네살의 대군은 유다 왕국 강토의 전역을 구석구석 파괴해갔다. 이 시기의 고고학적 증거들은 그 파괴의 처참한 흔적들을 보여준다. 즈블라 지방의 도시 라기스에서 발굴된 패각에는 왕국의 최후를 추측케 하는 이런 문구가 있다. 이를 예레미야서34,7~8과 비교해보라.

 

그리고 나의 주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나의 주께서 내린 모든 신호에 따라 라기스의 신호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아제카를 보지 못하므로 .........

그때 바빌론 왕은 유다의 성읍들 가운데서 예루살렘 외에 아직 떨어지지 않은 성읍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때 유다의 성읍들 가운데서 남은 것이라고는 요충도시인 라기스와 아제카뿐이었다.

 

결국 느브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589년 예루살렘은 정복되었고, 왕은 자신의 눈앞에서 아들들이 도살당하는 것을 목도하고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빌로니아로 끌려간다. 그리고 이때 수많은 유다 귀족과 장인(匠人)들이 함께 끌려갔다(2차 유배).

 

미완의 실험게달리야-예레미야의 진보정치

 

바빌로니아는 두 번씩이나 반란을 일으킨 다윗 가문을 폐지하고 대신 친 바빌로니아 파의 일족인 게달리야를 통치자로 임명한다. 신명기사가는 그를 총독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실상 그는 여호야킴과 마찬가지의 직위로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레미야서41,10왕의 딸들이라는 표현과 41,1절의 왕의 장관이라는 표현은 게달리야와 관련된 어구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게달리야는 사반 가문의 일원으로, 가문의 전통을 승계하는 대표적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조부 사반은 요시아 개혁 당시 사관으로서 봉직했고, 아버지 아히캄은 여호야킴 시절 궁중 고관의 한 사람으로, 예레미야를 비호하면서 자파에 유리하게 이용한 세력의 대표적 존재였다. 또 삼촌인 그마리야나 엘라사, 그리고 사촌인 미가야 등도 당시대의 명사들이었다. 게달리야는 유다 멸망 당시 이 가문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임이었던 것 같다. 바빌로니아 당국은 전략적으로 요충지에 위치한 유다를 유능한 친바빌로니아 인사에 의해 통치되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 했다. 아마도 바빌로니아는 여러 가지로 그의 집권을 도왔던 것으로 보이며, 국제정세에 대한 입장을 제외하고는 많은 자율권을 주었던 것 같다.

많은 잔존세력이 그의 휘하로 들어왔고, 그는 통치자로서의 기반을 빠른 속도로 구축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그가 예레미야를 중용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여러 차례 말했듯이 예레미야는 유다 말기의 정치사에서 진보주의 노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것은 요시아 개혁 정신의 계승이자 멀리는 이스라엘 지파전통의 계승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 재건을 모색한다는 거이다. 여로보암의 국가 건국 때의 아히야나 예후 왕 때의 엘리야처럼, 아마도 예레미야는 야훼정신을 담은 왕국을 실험하고 싶었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게달리야가 수도를 페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미스바로 옮겼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지명은 왕조시대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지명이다. 그러나 이곳은 특히 사무엘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스라엘 지파동맹의 정신이 깊게 스며 있는 곳이다(판관기20,1~3; 21,1~8; 사무엘기상7,10~17). 하필 왕국의 전통이 약한 반면 지파동맹의 전통이 강한 지역을, 다름 아닌 게달리야의 정부가 중심지로 선택했다는 것, 더구나 예레미야가 참여하는 정부가 그렇게 했다는 것, 이것은 결코 예사스런 선택이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마침 전쟁으로 왕국 시절의 주요 도시들은 파괴된 탓에, 게달리야 정부는 도시의 귀족 당파들에 견제 없이 미스바에서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모색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에게서 정의로운 왕의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민중의 새 세상을 위한 바람을 안고서. 그러나 게달리야에게 투항했던 방계 왕족 출신 군부지도자 이스마엘을 위시한 일단의 사람들이 게달리야를 암살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동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42,7~11), 이들 적개심에 불타는 귀족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은 예레미야를 끌고 이집트로 망명한다. 이로써 잠시 기대되었던 이상사회를 향한 꿈은 다시 지하로 묻히고 만다. 그리고 두터운 식민지의 지표에 덮여 버리고 만다. 언젠가 이곳에서 탈출시켜줄 메시아를 대망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