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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강좌

히즈키야의 개혁, 요시아의 개혁 - ‘반권력의 권력’을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

신학아카데미 탈/향의 2009년 가을 회원강좌인 '역사로 읽는 성서 II - 부족사회와 군주제사회 야훼신앙의 역사'의 첫 번째 강의(2009 10 22)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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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즈키야 개혁, 요시아의 개혁

반권력의 권력을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

 

 

 



아하즈에서 히즈키야까지

 

북왕국 이스라엘의 베가 왕과 다마스커스 왕국의 르신 왕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서 다시 한번 반아시리아 연합을 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다의 요담 왕은 이를 거절했고, 이에 연합군은 아시리아 군이 이 지역에 도달하기 전에 유다를 먼저 공격했다. 그때는 아하즈가 요담을 승계하여 왕이 된 직후였는데, 이사야서는 연합군이 유다 왕국으로 쳐들어가 아하즈를 폐위하고 반아시리아 정권이 집권하게 하려 했다고 한다(‘타브엘의 아들’, 7,6). 이때 유다는 북으로 베가-르신 군대를 맞아야 했고, 남으로는 에돔 족의 공격을 받았으며(열왕기하16,6), 서쪽으로부터는 블레셋과 맞서야 했다(역대기하28,17~18).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아하즈는 아시리아에 긴급한 도움을 요청했고, 아시리아 제국은 다마스커스, 이스라엘 등 연합군에 가담한 국가들에 처절한 응징을 가했다. 디글랏빌레셀(Tiglath-Pileser III, 재위 745~727 BCE.) 아시리아 황제의 승전 비문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 있다. “짐은 이 원정에서 비트 후므리(오므리의 집안) 땅의 모든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 짐은 그 땅의 모든 가축을 약탈했고, 사마리아만을 고립된 채 남겨두었다.”

사마리아가 남겨진 이유는 이스라엘 조정에서 정변이 일어나 베가를 암살하고, 호세아를 왕위에 앉힌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아시리아는 제국친화적 정부가 세워진 것으로 이해하고, 철군하였던 것이다. 한데, 디글랏빌레셀이 죽고 살마네셀 5(Shalmaneser V, 재위 727~722 BCE.)가 즉위하는 혼란 시기를 틈타 다시 이스라엘은 독립을 꾀하여 이집트의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낸다. 그러나 아마도 조정 내에서 친아시리아파의 제보로 이는 들통 났고, 살마네셀 5세가 이끄는 제국 군대가 다시금 쳐들어왔다. 비록 그 전쟁 기간에 황제는 죽었지만, 그를 승계한 사르곤에 의해 기어이 이스라엘은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위기를 넘긴 아하즈 정부 내에 반아시리아-친이집트 노선을 고집하던 정파는 몰락했다. 또 유다를 압박하던 이스라엘도 사라졌으니, 가나안 지역에서 유다를 억압할 만한 국가도 사라졌다. 이제 아하즈는 본격적으로 친아시리아를 표방하게 될 수 있었다. 이는 아시리아 경제권에 유다 지역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과정에서 올리브기름과 포도주 산업이 크게 확장되었고, 이는 왕의 부가 팽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아하즈의 왕권은 경쟁자를 압도할 만큼 충분히 강력해졌고, 체제에 협력하는 귀족들에게 부를 배분해주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데 그것만이 아니다. 아하즈 시대는 두 차례의 대대적인 전쟁으로 이스라엘을 포함한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했던 많은 국가들에서 전쟁유민이 유다 지역으로 피신해 들어옴으로써 대대적인 인구 변동을 겪은 시기였다. 거의 인구가 두 배 반 이상이 늘었다(대략 12만 명으로 추산). 인구밀도가 희박하여 공터가 많던 유다로선, 수많은 전쟁 유민이 유입돼 들어온 것이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실은, 마침 아시리아와의 올리브와 포도주 무역을 위해서는 땅을 더 개간하여 생산량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아하즈는 이들 유민들을 동원해서 국가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부가 팽창했고, 귀족들도 더욱 부유해졌다. 그러나 백성의 삶이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아하즈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의 삶의 안전을 위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풍요 속의 착취의 상황은 대중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지배 엘리트 내의 한 분파는 바로 이러한 대중을 동원하는 데 성공한다.

아마도 아하즈를 승계한 히즈키야 왕의 일련의 정치적 종교적 개혁은 이러한 지배엘리트 내에서 대중동원에 보다 적극적이던 분파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새 왕이 과거 우찌야 왕의 국사였던 즈가리야 가문 출신의 여인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알다시피 우찌야 왕은 암하아레츠의 지지에 힘입어 왕권을 차지한 존재다. 그러므로 즈가리야는 다른 정파에 비해 비교적 민중노선과 결합 가능한 존재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 왕은 예루살렘의 전통적 야훼주의 일파와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가진 통치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하여 히즈키야 개혁의 문헌적 고고학적 증거가 빈약하여 내용을 추론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개혁에 관한 하나의 일관성 있는 상을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앞서 보았듯이 아하즈는 이스라엘의 유민을 비롯한 인근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많은 전쟁유민을 포용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대대적인 인구변동의 영향을, 앞서 말한 것처럼 단지 생산성의 증가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이질적인 인구의 갑작스런 혼합은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하였을 것이다. 아하즈는 이러한 이질성의 혼란은 억지로 통합하려고 하기보다는 다양한 종교적 관습을 허용했던 듯하다. 신명기사가가 그를 그토록 우상숭배의 혐의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의 이러한 종교 포용 정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하즈의 정치경제적 지배전략은 이질적 대중을 포용하여 왕당파의 지배 권력을 강화하는 데 활용했다. 즉 대중의 신앙은 반민중적 지배전략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히즈키야의 지방산당 철폐조치는 제의집중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루살렘의 야훼주의자들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고, 또한 지방의 올리브와 포도 대농장들을 장악하고 있던 아하즈 시절의 구집권층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바로 그들의 예속농으로 전락하고 있던 암하아레츠의 지지와 기대를 끌어오는 논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울러 구집권층의 친아시리아 노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것은 지난주에 본 이사야 예언자의 신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을 히즈키야 개혁이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함축한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 더, 개혁의 신학적, 이론적 배경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주의적 관점에서 유다 왕국의 진보적 야훼주의 전통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끊임없이 암하아레츠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있지만, 아마도 그들은 이스라엘의 풍부한 민중 예언자적 전통을 결여하고 있었고, 그것을 체제내적 실험으로 시도해온 경험도 일천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왕국 유민의 대대적인 유입은 그들과 함께 그들 사이의 설화들이 동시에 유입되었고, 또 문자적이고 엘리트적인 체제 구성적 신학도 이전되어 왔다는 것을 수반할 것이다. 그것은 유다에 민중적 메시아니즘이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그러한 사상을 체제 이념으로 발전시킨 자산이 축적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히즈키야의 개혁은 이러한 자산 위에서 위와 같은 개혁이 실험되었던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유다의 유적지들에서 발굴된 왕의 인장이 찍힌(lmlk, “왕에 속한다는 뜻의 어휘 약자) 큰 단지들은 히즈키야 개혁의 이러한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몇 안 되는 고고학적 유물들이다. 이것들은 현물세 징수용이거나 양곡 비축용 단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도량형을 표준화함으로써 대지주들의 무분별한 대중 착취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히즈키야는 이것을 통해 조직적인 조세 및 병참 체제 같은 행정체계의 조직화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왕실의 부와 군사력을 유지하면서도 지방의 대지주들의 권력은 약화되었던 것이다. 역대기하에 묘사된 바, 히즈키야가 취한 군의 재무장화, 군제 개편, 병참 체계화 및 요새화 등의 정책(32)은 바로 이런 개혁과 맞물려 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제의를 예루살렘에 집중시키려던 히즈키야의 정책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진보주의적 저항전통을 왕실의 통치이념으로 재해석하는 활발한 왕실 이데올로그들의 활동의 흔적일 것이다. 이런 흔적은 훗날 요시아 개혁의 밑거름이 된다.

한편 히즈키야의 개혁 정책은 반아시리아 노선을 수반하였다. 마침 (살만에셀 5세의 황위를 찬탈한) 사르곤(Sargon II, 재위 722~705 BCE.)이 키메르 족(Cimmerians)[각주:1]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히즈키야는 반란의 기치를 들어 올렸다. 당시 유다는 시리아-팔레스티나의 강대국으로 부상해 있었고, 이는 이집트의 배후조종과 관련이 있다. 아시리아의 갖은 조공 요구나 병참이나 병력 동원에 대한 압박에 불만을 품던 많은 소국들이 이집트의 지원을 기대하며 히즈키야와 연대했다.

히즈키야가 전쟁 준비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많은 문헌적 고고학적 흔적들이 발견된다. 역대기하32장에는 곡식과 기름, 포도주를 저장할 창고, 대규모 가축우리 등을 전국 요소요소에 세웠고(27~29), 예루살렘을 포함한 주요 도시들을 요새화하기 위해 민가를 헐면서까지 견고한 성벽 재수축에 힘썼다(이사야서22,10). 어떤 곳은 방벽이 6미터나 되는 곳도 발견되었다. 예루살렘 성 밖의 기혼샘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저 유명한 터널은 지하의 암반을 깎아 파낸 것으로, 525 미터(기혼샘에서 실로암 못까지)나 되는 수로이다. 양쪽으로 파들어 갔는데, 서로 정확하게 만났다는 기록을 담고 있는 실로암 비문은 이 사업에 얼마나 고도의 토목기술이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터널의 기울기가 거의 없어, 단지 고도의 차이가 32센티에 불과하다.



러나 사르곤을 승계한 앗시리아 황제 산헤립(Sennacherib, 재위 704~681 BCE.)은 얼마 안가 바벨로니아, 아나톨리아 등지의 반란들을 모두 제압하고, 시리아-팔레스티나를 향해 서진했다. 주전 701년과 688년 두 차례의 침공 때에, 유다는 예루살렘 성에 갇힌 채, 아시리아의 가공할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세계 최고의 공성전 능력을 갖춘 대제국 아시리아를 막아낼 길은 없었다.


[그림1-3]히즈키야 터널


유다의 최대 곡창지역인 즈블라 지역에 있는 저 유명한 요새 라기스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는, 아마도 산헤립의 종군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이는 길이 18미터, 높이 2.7미터의 거대한 그림 속에서 단적으로 엿보인다. 이 전투에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치열한 항전을 벌이던 라기스와 그 인근의 농경지는 결국 잿더미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복원되지 못한 채 잔해만을 남기고 말았다. 이곳에서 발굴된 시체의 집단매장지에서는 최소한 천오백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결국 막대한 공물과 함께 봉신국의 왕이 될 것을 청원함으로써 유다는 겨우 생존할 수 있었다. 이때 왕실의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볼모로 혹은 전쟁배상금조로 끌려갔고, 예루살렘과 그 인근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토가 인근 친아시리아 정부에 귀속되어버렸다.

이제 왕실 재정을 고갈됐다. 개혁을 위한 비용도 결단났다. 그의 입지는 극도로 약화된 듯이 보이며, 아마도 제1차 전쟁 직후에 아들인 므나쎄와 공동통치를 해야 했고, 2차 전쟁 직후에 므나쎄에게 왕권을 이양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므나쎄 정권은 선대왕의 개혁 기반을 철저히 파괴했다.

 

므나쎄에서 요시아까지

 

므나쎄가 히즈키야를 승계했다. 그는 아마도 부왕이 북부지파를 왕실 중심의 개혁 정책에 끌어들이기 위해 북부지파의 명칭으로 이름 지었던 왕자였던 것 같은데, 역설적이게도 므나쎄 치하의 유다는 철저히 반히즈키야 노선이 지배적이던 시대였다. 열두 살에 공동통치자로 등극한 왕은 아마도 한동안 친아시리아파 관료들에게 좌우되었을 것이며, 필시 히즈키야는 무력한 상태였을 것이다. 최절정기를 구가하던 아시리아는 유다를 포함한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여러 국가들의 내정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였고, 다른 나라들처럼 아시리아인 판무관이 파견되어 왕실을 일일이 감시하였다(이사야서28,11~1333,19에 나오는 생소한 입술어려운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유다 정부 내에 있던 아시리아인 관리였을 것이다). 역대기하33,11에는 그가 아수르바니팔(Ashurbanipal, 재위 668~627 BCE.)[각주:2]에게 호출되어 연금당하기도 했다는 기억이 담겨 있고, 그 선대황제인 에살하똔(재위 680~669 BCE.)의 비문에는 건축자재를 조공으로 바치는 봉신국왕으로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 이것은 므나쎄 정권이 얼마나 철저히 아시리아에 예속된 국가인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사정이 그리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일단 체제가 안정화되었고, 아시리아라는 거중조정자의 존재는 인근 족속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체제가 가능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즈블라 지역은 황폐화되었지만, 좀더 나쁜 땅이지만 유다의 동쪽과 남쪽의 황무지들이 새롭게 개간되고, 여기서 생산한 올리브의 막대한 양이 블레셋의 텔 미크네(에크론)에서 가공되어 아시라아와 아라비아로 수출되었다.

곡창지역인 즈블라가 황폐화된 이후, 황무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는 사업은 왕실이 주도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그 생산물은 왕의 재산이 되었고, 왕과 왕당파 귀족 중심의 부는 선대왕 시절의 전쟁의 참화를 빠르게 회복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왕당파 귀족들의 횡포는 다시 극성을 부렸고, 히즈키야 개혁 지지파들은 집권층의 정치적 보복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야 했다(열왕기하21,16). 이제 진보주의자들인 히즈키야의 개혁당 야훼주의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야만 했다. 군사적 테러리즘에 의존했던 아시리아는 이 봉신국에게 자신들의 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왕실과 친아시리아적 정부는 열광적으로 아수르신과 이쉬타르 여신 신앙을 도입하였다. 또한 선대왕의 개혁정책이 무력화됨에 따라 다양한 지방 성소들이 다시 복원되었고, 이곳에서 귀족들의 이데올로기적 통치가 실행되었다.

 

요시아 개혁

 

55년이라는 유다 왕국 사상 최장기간 통치자였던 므나쎄가 죽고, 아몬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위 2년 만에 암살당한다. 당시는 아시리아가 갑자기 몰락하던 시기였다. 아마도 이것은 친아시리아파와 반아시리아파간의 정파적 대결의 소산인 것 같은데, 이때 또 다시 암하아레츠(땅의 사람들)가 등장하여, 암살자들을 처형하고 아몬의 아들 요시아(재위 641/0~609 BCE.)를 즉위시킨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시리아의 에살하똔은 에디오피아 계(누비아족) 이집트 정부인 제25왕조와 시리아-팔레스티나를 두고, 나아가서는 이집트 본토를 두고 전쟁을 벌였다. 에살하똔은 이집트의 타하르콰(Taharqa, 또는 Tirhakah, 재위 690~664 BCE.)를 격파하고, 이집트 출신 지방 토호들을 통치자로 임명하여 지배권을 확립하려 했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대식민지 행정능력은 매우 서툴렀고, 재기하여 상부이집트로 다시 쳐올라온 타하르콰의 편에 대부분의 봉신들을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나 느고 1(Necho I, 재위 672~664 BCE.)만은 아시리아를 등에 업고 타하르콰에 대항했는데, 에살하똔의 아들 아수르바니팔 시대에는 아시리아를 배후에 둔, 느고 1세의 아들 프삼티크 1(Psamtik I, 그리스식 이름인 Psammeticus로 더 많이 알려진 인물. 재위 664~610 BCE.)가 타하르콰를 물리치고 제26왕조를 창건한다. 이제 이집트는 다시 본토민 출신 왕조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이 왕조 대에 이집트는 다시 강대국으로 부흥한다.


[그림1-5] 유다 왕국의 영토

바야흐로 아시리아와 이집트 간의 밀월관계가 시작되는데, 이것은 아시리아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행정력이 약한 아시리아는 프삼티크 왕조와 더불어 시리아-팔레스티나를 공동지배하는데, 아수르바니팔 이후, 아시리아가 내란에 시달리게 되자, 이 지역은 이집트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이렇게 아시리아에서 이집트로 관할권이 이전되는 시기가 바로 요시아 왕 시대였다.

요시아는 8세에 즉위한다. 물론 이 미성년의 왕은 자신의 배후 세력의 정치적 영향권 아래 전적으로 포섭되어 있었다. 이 세력에는 과거 히즈키야 개혁의 잔존세력을 포함하여, 전통주의적이며 개혁주의적 성향의 다양한 민중세력이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여하튼 이 세력은 몇 년 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또 다시 개혁 작업에 돌입한다. 역대기하에 따르면(34,3), 재위 12년에 개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때는 아수르바니팔이 사망한 어간(627년 어간)이었을 것이다.

개혁이 진행되기 이전, 스파니야(스바냐) 예언자는 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예언 활동을 펼친다. 그는 아마도 성전 관료의 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아모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다. 그는 야훼신앙과 아시리아 신앙과의 혼합화를 맹렬히 비난했고(스바냐서1,4~6), 이에 협력하거나 소극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특권계층과 왕족을 정죄하며(1,7~13), 사제, 예언자 등도 고발하고 있다(3,3~5). 그의 선포에는 이러한 종교 귀족주의와 연계된 특권세력의 사회적 부패 구조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종교 귀족주의는 아하즈, 므나쎄 치하에서 왕당파인 친아시리아 파가 열광적으로 도입했던 아시리아식 제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 바로 히즈키야의 제의개혁과 동일한 맥락에서 스파니야는 보수주의적인 귀족들인 친아시리아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스파니야는 이런 비판의 정반대의 위상을, 아모스와 마찬가지로 야훼의 날신탁으로 펼치는데,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이것은 요시아 개혁의 전조였다.

한편 나훔 예언자는 또 다른 차원에서 개혁 정책의 밑거름이 되고자 했다. 그도 스파니야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는 활동을 편 예언자로 보이는데, 그의 신탁의 핵심은 아시리아의 몰락을 그리는 데 있다. 이것은 정부 내의 국제정치적 논쟁에서 왕당파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후원하는 정치적 기능을 하고 있다.

이렇게 준비된 개혁은 그의 재위 제8년인 주전 633년경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마도 이때에는 아시리아의 공식적 제의를 거부하기로 하는 결정이 내려졌던 것 같다. 신명기적 역사서인 열왕기하에 따르면(22,3), 재위 제18년 성전에서 한 문서가 발견되는데, 개혁주체세력이자 요시아 왕당피는 이것은 히즈키야 시절에 왕실 이데올로그들인 서기관들에 의해 작성된 개혁 지침서였다고 천명한다. 그렇다면 정황상 므나쎄 통치기간에 성전 창고 속으로 숨겨졌던 것이 발견된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실제 히즈키야 때의 것이든 아니면 요시아 정부에 의해 조작된 것이든 간에, 이 문서는 개혁의 명분을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는데, 이를 위해 왕족의 부인이자 왕실 여예언자인 훌다가 이 문서를 야훼의 신탁으로 보증한다. 이 사건이 개혁의 시발점이라는 위의 열왕기하의 묘사는, 개혁이 야훼 신앙에 기초한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지, 실제의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실제는 앞서 본 역대기하의 본문처럼 어느 시기에 개혁에 보다 질적으로 박차를 가하게 하는 계기로서 이 사건이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요시아 개혁의 실제 진행은 예루살렘 성전 정화, 지방의 성소 철폐, 법률서(원신명기) 공표, 북부 지역으로의 확대의 순으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물론 북부지역으로의 확대는 히즈키야 때와 마찬가지로 성공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개혁의 특징은 히즈키야 개혁과 마찬가지로 귀족들을 견제하고 왕당파의 입지를 강화하며, 친아시리아 노선을 견제하고 종족주의를 천명하려는 것이고, 동시에 대지주의 횡포로부터 소농들의 사회적 권익을 보호하려는 데 있다. 특히 지계표를 옮기는 것에 대한 금령(신명기19,14), 고리대금과 악랄한 부채 회수에 대한 금령(신명기24,610~1317), 정의로운 재판 강조(신명기16,18~20), 뇌물수수 금령(신명기16,18~20), 정량화된 도량형(신명기25,13~16) 등이 언급되고 있으며, 소농들을 위협하고 있는 몰락을 억제하려 할뿐 아니라 최악의 상태에 떨어져 있는 과부, 고아, 이방인들에 대한 특별한 보호가 강조되고 있다. 비록 이러한 개혁의 왕실 차원에서의 실리적 목적은 왕실 재정의 확충을 통한 왕권 재강화에 있었다 할지라도(군대의 재조직; 행정기구의 지편 등도 포함하여), ‘정의로운 왕에 관한 신념은 다윗왕조 이데올로기가 땅의 사람들의 염원과 결합됨으로써 구체화된 이미지였고, 특히 이사야 예언자 등에 의해 이미 정부의 거대전승(Great Tradition)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개혁의 사회적 차원이 단지 왕당파와 민중파의 실리적 이해관계의 타협의 소산으로 환원시킬 수 없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아달리야 때부터 가시화된 민중운동, 위대한 예언자들의 신탁 활동, 그리고 찬란한 북왕국의 해방전통 등에 따라 진보주의적 가치가 대전승 속에 삼투된 결과인 것이다. 즉 다윗-솔로몬의 왕조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적 지평이 이러한 야훼주의자들의 실천과 교접하면서 보다 시대적인 함의를 갖는 민중적 상징체계를 함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 요시아 왕국의 영토에 편입된 것으로 보이는 메사드 하사비야후라는 서부해안 지역의 요새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에 쓰인 히브리어로 된 한 법적 호소문를 볼 수 있다. 끝부분이 파손되어 확인할 수 없지만, 재현할 수 있는 부분까지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나의 주인이신 지도자(사르), 당신의 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당신의 종은 열심히 추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종은 하짜르 아삼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종은 매일 하던 것처럼 거둔 곡식을 묶어 창고에 집어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일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종이 거두어들인 곡식을 묶어서 매일 같이 창고에 집어 놓을 때 쇼바이의 아들이 호쉬야후가 찾아와 당신 종의 겉옷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내가 매일 하던 것처럼 거두어들인 곡식을 묶고 있을 때 그가 당신 종의 겉옷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뙤약볕 아래에서 나와 함께 추수하고 있었던 나의 형제들의 모두 나를 위해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의 형제들은 나를 위해 증언해 줄 것입니다. 나는 법을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제발 나의 옷을 돌려주십시오. 지도자께서 당신의 종의 옷을 되돌려 주는 것을 당신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종을 불쌍히 여겨 옷을 돌려주게 하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종이 옷을 빼앗겼을 때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은 노동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관리자인 호쉬야후라는 이가 징벌로 노동자의 겉옷을 빼앗아간 사건에 대한 노동자의 법적 호소문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어쩌면 호쉬야후는 노동자의 세금을 징수하는 국가 관리일 수도 있고, 대지주의 관리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청원의 대상인 지도자(사르)는 재판을 담당하는 국가관리이다. 어쩌면 그는 요시아 정부가 전국에 파견하여 농민/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부당한 착취를 감독하고 재판하는 관리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요시아 정부의 농민 친화적 정책의 결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권리 박탈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상징체계가 어느 정도 보편화된, 즉 어느 정도 주체화된 사회의 저항의 문화를 반영한다. 바로 이러한 민중 저항의 토대 위에서 이사야, 미가 등의 예언운동이 가능했고, 요시아 개혁의 민중주의적 요소가 가능했던 것이다.

 

좌절

 

아시라아가 거의 멸망한 조짐이 보였다. 아수르바니팔이 죽자 그의 두 아들이 대립왕으로 권력 투쟁을 벌이고, 제국의 전역에서 반아시리아 해방전쟁이 벌어짐과 동시에,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은 공세적으로 나와 아시리아 군을 연파했다. 주전 612, 수도 니느웨는 동맹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제 아시리아의 패망은 눈앞에 다가왔다.

이제 대세는 메대와 바벨론의 것처럼 보였다. 친아시리아적 이집트 제26 왕조의 느고 2세는,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티나에 대한 종주권을 되찾기 위해서, 이제 바벨론을 견제해야 했다. 그래서 아시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팔레스티나 해안로를 따라 진군하여 메소포타미아 중원의 갈그미스(유프라테스 강변)로 진군하려 했다.

한편 요시아는 구정권인 친아시리아 파와 대립하며 형성된 체제의 상징이다. 그런 맥락에서 바벨론의 등장은 권력의 재생산에 있어 매우 유리한 요소였다. 더욱이 당시는 아시리아가 무력해진 뒤 친아시리아적인 이집트 제26왕조의 영향권 아래에서 갖은 압박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요시아는 바벨론을 지지하는 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올바른 판단이었지만, 문제는 요시아 당대에는 너무 빠른 입장 표명이었다. 므기또에서 요시아는 느고와 전투를 벌여 전사했거나(역대기하35,20~24), 혹은 호출되어 처형당했다(열왕기하23,29). 그때까지 바벨론은 서부 지역의 작은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요시아가 죽었다. 그리고 유다 왕국 말기를 추동했던 그 화려한 개혁도 끝장났다. 유다는 더 이상 그것을 밀어붙일 힘이 없었고, 조정 내의 칫이집트-친아시리아파가 보다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




상처로부터 출발하는 기억의 신앙사

성서는 역사의 기억에 관해 무어라고 말하는가

 

 

 

성전 깊은 곳에서 오래된 법전이 발견되었다. 왕명에 따라 성전 정비 사업에 여념이 없던 대사제 힐키야[각주:3]는 즉각 왕의 최측근인 서기관 사반에게 보고한다. 당연히 그것은 왕에게 전달되었다. 왕은 그 문건 내용에 접하자 옷을 찢는다. 왕이 자신의 어의를 찢는다는 것은 국가적인 비상사태가 벌어진다는 신호다. 왕실과 예루살렘, 그리고 전국 곳곳에 왕명이 전달된다.

바야흐로 대대적인 정풍운동이 시작되었다. 불순한 것을 척결하여 야훼 앞에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척결한다는 이유로 지방 성소들을 훼파하였고, 제관들을 처형하거나 축출하였다. 이렇게 지방의 제의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왕실 이외의 세력에게 독자적인 정당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종교 이데올로기적 자원을 몰수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농민 대중[각주:4]은 신앙적으로 지방 성소보다는 예루살렘의 중앙 성소에 귀속되게 될 것이 기대되었다.

이 정풍운동의 다른 차원은 일련의 사회적인 조치들을 통해서 시행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된 법전을 확대하여 법률을 반포한다.[각주:5] 이 조치의 의의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는 한 가문의 재산이 보다 강한 다른 가문에게 복속되는 것을 억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몰락하거나 몰락 위기에 있는 가문을 보호하는 복지 체계를 강화한 것이다. 농민 대중의 왕실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고, 대지주들의 경제적인 기반을 약화하려는 조치였다.

마지막으로 역사 편찬 작업이 활발히 전개된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른바 토라묶음이 편찬되고, 판관기〉 〈사무엘기상〉 〈사무엘기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학자들이 신명기적 역사서라고 부르는 일련의 역사서 묶음의 최초 버전이 구성된다. 창조 때부터 왕조사에 이르는 일련의 파노라마적 선민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1성서의 역사틀은 이렇게 구축된다.

이 정풍운동은 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요시아 개혁이라고 불리게 된다. 빈약하나마 고고학적 증거나 문헌적 증거에 의존해 본다면, 그것이 성서가 묘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거나 성공적인 결과를 이룩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매우 강력했고, 몸속 뿌리 깊게 박힌 대중의 습속도 그리 쉽게 변하지 않았다.

요시아 왕이 므기또 요새에서 갑작스레 서거한 이후, 유다 왕국은 급속히 쇠락했고, 이후 30년이 못 돼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하지만 요시아 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운동은 유다 왕국 멸망 이후까지도 계속되어, 1성서에 수록된 토라의 최종 형태에까지 이들의 시선은 깊이 새겨졌다. 신명기적 역사서들의 최종 형태는 거의 이들의 관점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예언자들의 담화집들이 묶인 것도 주로 이 운동의 소산이었다. 이들 신명기적 역사서와 예언집들은 훗날 정전(canon) 형성 과정에서 제1성서의 두 번째 요소인 예언으로 분류된다.[각주:6]

토라도 그렇지만, 특히 예언파트는 야훼신앙의 역사관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이 제1성서 예언의 편찬 정신의 핵심에는 요시아 개혁이 자리잡고 있다.

요시아 개혁이 시작되던 당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성전 깊숙한 곳에서 법전이 발견된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느 과자와 같이, 이 기억의 단자는 깊숙한 곳에 망각된 채 방치돼 있던 과거를 현재의 시공간 속으로 이끌어낸다. 왕은 옷을 찢는다. 아니 망각, 그 변조된 기억으로 직조되어 온 왕조 전통을 찢어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기억을 굴절시키고 변형되게 한 체계를 청산하는 일이다. 요시아 개혁의 주체들은 개혁의 이유를 이렇게 주장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그릇된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그릇된 기억을 처벌해야 한다. 지방 성소들을 불 지르고 그 사제들을 처벌한 것은, 그리하여 지방 성소를 완전히 폐쇄시킨 것은 바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그 기억의 코드를 단절시키려는 것이다. 하나의 기억을 위해서 다른 기억을 망각의 창고 속에 가둬야 한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청산될 역사의 처벌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 된다. 요시아의 조부였던 히즈키야 왕 시절 만들어졌던 각종의 개혁적 제도들은 친아시리아적인 므나쎄 정권 치하에서 불온한 기억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기억 처벌의 대상이 되었고, 이때 개혁 정책의 토대가 됐던 법전이 성전 깊은 곳에 처박혔다. 요시아 왕은 이 처벌된 기억을 다시 망각의 창고에서 꺼내어 개혁의 실마리 기억으로 삼은 것이다.

그때마다 역사를 주도하면서 기억을 관장했던 세력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처벌될 기억을 그릇되고 사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역사 청산은 사악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치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이와 같이 기억의 전쟁은 언제나 과거의 진실을 들이댐으로써 현재적 존재의 부당성 혹은 정당성을 판별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둘러싼 전쟁은 현재의 권력 투쟁과 맞물린다. 요컨대 과거의 진실이라는 것은, 그때 실제로 그랬었다는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호출한 이들의 시각에서 편집된 기억이다. 다만 기억을 둘러싼 전쟁의 게임의 법칙은 그 과거의 기억을 호출한 이들이 그것이 편집된 것임을 알지 못해야 한다. 기억의 전쟁 당사자는 자신의 기억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가운데 싸움에 임한다.

왕을 포함한 요시아 개혁의 주체 세력은 자신들의 역사적 기억이 실체적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그것이 개혁 세력의 시각에서 무의식적으로 편집된 기억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야훼신앙의 역사관에 대해 질문하려는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요시아 개혁이 과거의 기억을 호출한 신앙적 기조에 있다.

요시아 개혁의 실마리 기억을 제공해 준 법전은, 앞서 말한 것처럼, 농민 대중의 재산 보호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런데 신명기26장에는 의미심장하게도 회복된 땅(재산)에서 햇곡식을 드리는 제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햇곡식의 봉헌례는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시간에 관한 제의를 함축한다. 물론 그것은 낡은 시간들에 속하는 제의와는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새로운 기억은 낡은 기억을 배제한다.

그런데 문맥에서 보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된 땅에 돌아와 불하받은 토지에서 얻은 소출에 관한 것이지만, 요시아 개혁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대지주들에 의해 몰수당한 땅을 개혁 사업을 통해 회복하게 되는 상황을 암시한다. 아마도 개혁 주체 세력은 이 정풍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미래에는 땅을 돌려받게 될 것이라고 농민 대중에게 선포하였을 것이다. 과거에 선조들에 관한 역사적 기억은 농민 대중에게 미래의 꿈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현재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된다. 과거는 미래를 생산하며, 현재를 조직한다.

그런 점에서 햇곡식을 드리며 고백하라는 다음의 역사적 신조는 요시아 개혁이 추구하는 기억의 정치의 핵이 담겨 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는데,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주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신명기26,5~9

 

우리의 헌법 전문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이라고 시작하는 데 반해, 요시아 개혁은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로 역사적 신조를 시작한다. 곧 개혁 주체가 선사한 약속은 강대국에의 꿈이 아니라 구원에의 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국가가 강력해지면 모든 백성의 구원 소망이 실현되리라는 비전보다는, 모든 백성이 꿈꾸는 구원의 세계가 실현됨으로써 국가는 존재 의의가 확인되고, 그럼으로써 야훼의 후견 아래 놓이게 된다는 주장이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도식화해본다면 전자가 위로부터의 시선에서 본 꿈이라면, 후자는 아래로부터의 꿈이다. 요컨대 요시아 개혁의 종교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아래로부터의 꿈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정치적 자원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성서의 역사관은 바로 이러한 소망의 코드와 연계되어 있다. 곧 대중의 꿈에서 과거와 미래의 기억의 실마리가 추적된다. 위대한 영웅의 뿌리에서 혹은 신의 혈통에서 유래한 선민의식이 아니라, 강자들에 의해 괴롭힘당하고 사정없이 부림당하는 착취의 대상들이 품는 구원의 소망에서 유래한 선민의식이다. 머물 곳도 연명할 것도 없는 약한 자들을 선조로 둔 이들, 그러한 조상에 관한 기억을 역사의식으로 간직한 이들, 그러한 기억 속에 구원에의 꿈을 품으며 사는 우리가 바로 야훼 백성의 자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1성서의 역사관은 식민지 시대를 겪으면서 민족주의에 흡수되어 버린다. 해서 야훼께서 오신다 / 사막에 길을 내어라 /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 벌판에 큰 길을 내어라.”(이사야서40,3), 바벨론에 유배당한 이들의 귀향에의 꿈을 실은 신탁을 선포한 익명의 예언자의 목소리는, 실제로 귀향한 유대인들의 자폐적 종족주의(민족주의)큰 길신학으로 탈바꿈해 버린다. ‘대로(大路)를 통해 야만적 학대를 받으며 끌려갔던, 거할 곳도 연명할 것도 모두 상실하게 된 이들이, 귀향한 이후 새로 구축한 체제의 비전을 제국의 대로를 모방하여 설계한 것이다. 예언자가 제국의 대로주의를 빗대어 역설적으로 말한, 사막을 뚫고 개설된다는 길, 그 불임의 시공간에 던져진 대중의 고통을 가로지르는 절절한 소망의 길이 제국적 성공을 꿈꾸는 민족주의적 꿈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러한 변질된 꿈에 기반을 두고 그들은 순수 혈통주의를 추구했다. ‘오염된타자를 가려내고, 그들을 마음껏 저주함으로써 자신들의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물론 배제될 타자에 대한 폭력은 항상 보복할 힘이 없는 약한 자들을 향했다. 그러한 증오를 통한 자기 재생산의 장치로 발전한 것이 바로 율법이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발전한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의 제도는 훌륭한 삶의 지혜를 수없이 많이 담고 있음에도 오염된 것과 정결한 것을 가르려는 혈통주의적이고 종족주의적인 강박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그러한 강박증은 과거의 기억을 편집한다.

약한 자들의 꿈에 토대를 두고 발전한 제1성서의 역사관은 수난당하는 민족의 꿈에 관한 이야기로 변질되고, 떠돌며 사는 조상들에 관한 기억은 영토에 대한 민족주의적 집착으로 해석되었다. 바로 이러한 야훼 신앙의 율법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훼손된 대중의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했고 역사의 집행관들에 의해 처벌당했다. 그와 함께 그런 이들에 관한 기억도 처벌됐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예수에 관한 기억은 살아남았다. 알다시피 제2성서는 예수를 통한 야훼 신앙의 훼손된 기억의 복원에 관한 이야기다. 이러한 예수를 통한 기억에서 초점은 대중의 아픔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는 요시아 개혁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예수의 특징은 더 철저하고 더 구체적이라는 데 있다. “너희는 ...라고 들었으나라는 마태복음의 율법 비판의 말은 예수에게서 진정한 말의 권위는 율법의 기억(전통)이 아니라 그 말과 관련된 상황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의 상처에 관한 기억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식일이 존재하는 이유는 율법이 그렇게 명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들의 고통을 치료하는 하느님의 구원의 사역에 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예수에게서 대중의 아픔보다 더 중요한 기억은 없다. 모든 것은 대중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하느님의 구원의 품에 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율법도 민족도 심지어는 하느님 자신도, 모든 숭고한 기억의 단자들도 상처 입은 이들을 감싸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 

  1.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의 인도-유럽 계통의 유목족속으로, 기마술로 유명한 종족. [본문으로]
  2. 산헤립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후 아들들 간의 치열한 내전을 벌인 끝에 막내아들이자 산헤립의 총애를 받던 에살하똔(Esarhaddon, 재위 680~669 BCE.)이 권좌를 차지한다. 아수르바니팔은 에살하똔의 아들이자 상속자다. [본문으로]
  3. 그는 유다 왕국 말기의 위대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아버지다. [본문으로]
  4. 공동번역은 이들을 ‘지방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히브리어로는 ‘암하아레츠’ 곧 ‘땅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회적 실체에 대하여, 최근의 정교한 문헌학적 연구들은 ‘농민 대중’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는 견해를 도출해낸다. [본문으로]
  5. 이것은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신명기〉의 원본으로 추정된다. [본문으로]
  6. 정경을 형성한 유대인들은 제1성서를 다음 세 요소로 분류하였다. ‘토라’(율법서), ‘예언’(예언서), ‘책들’(성문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