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아카데미 강의 '예언 다시 읽기'(2004 04)의 두 번째 강의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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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냐 민중이냐
예레미야 다시 읽기
마치 마술에 걸린 것 같았다. 어명을 받는다는 명분 아래 레위인이라고 하는 젊은 사제들은 유대 땅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산당에 불을 지르고 사제들을 학살했다. 산당의 사제들 일부는 조정의 고관을 역임했던 명문 가문의 지방 유지에게 달려가 목숨을 구걸했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더 이상 그들은 사제들의 든든한 후견자가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 말도 못하던 농민들이 마치 당장이라도 반란을 일으킬 기세로 험상 굳게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간 자기들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니 말이다. 이윽고 구걸하는 사제의 머리통을 레위인의 쇠방망이가 사정없이 후려친다. 대중이 환호성을 지른다. 튀겨나가는 핏덩이로 얼룩진 레위인의 살기어린 눈빛은 마치 저승사자 같다.
이른바 요시아 개혁은 이렇게 한 시대를 휘몰아치는 광풍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떠나 그것은 일종의 혁명이었고, 혁명파와 반혁명파 간의 불타오르는 증오 속에서 사태는 전개됐다. 왕이 갑작스레 서거하자, 이후 유대 왕국의 역사는 요동쳤다. 여기에 에집트와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야수의 이빨에 유대 사회는 갈기갈기 찢겨졌고, 멸망하기 전에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바로 이런 광기의 시대에 한 걸출한 예언자가 살았다. 그가 바로 오늘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는 예레미야다.
제한된 정보에서 많은 것을 찾아낼 수는 없다. 유대 왕국 말기에 관한 〈열왕기하〉와 〈역대기하〉의 일부 구절 정도와 몇몇 예언서들, 이를테면 요시아 혁명기의 정보를 담고 있는 〈스파니야서〉・〈나훔서〉, 요시아 이후의 왕국 몰락기를 배경으로 하는 〈하박국서〉, 그리고 〈예레미야서〉 등이 그 자료이고, 그 밖에 고고학적 정보나 유대 외부의 문헌학적 정보 등을 종합해서 부족하지만 중요한 한 시대를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시대를 산 한 예언자의 정치적 꿈과 기획, 그의 실천을 조명해 볼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다. 동시대의 정치사와 국제정치의 맥락에서 수많은 행위자들의 전략 속에서 살았고, 그 또한 자신의 전략을 구상했다. 신명기적 역사가들에 의해 미화되기만 했던 그의 모습은 이런 배경 속에서 그 성공과 실패, 아름다운 비전과 위험스런 실천의 오류를, 그런 가능성을 추론해내어야 한다. 어쩌면 이런 분석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우리 당대의 역사를 맞이하는 신앙적 성찰의 계기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먼저 우리의 출발점은 요시아 개혁 아니 혁명이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예언자의 삶과 실천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요시아 개혁/혁명
주전 8세기 시리아-팔레스티나 사회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국제정치적 요소였다. 이제까지 익숙한 나라들은 비교적 한정된 영역을 통합했던 나라들이었고, 비교적 성공한 나라라고 해도 가까운 이웃 국가들을 복속시키거나 봉신국가화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시리아라는 전례 없는 팽창주의적 제국이 등장하였다. 지역공동체간의 느슨한 관계망에도 불구하고, 공간적 산개 수준을 엄청나게 확장한 사회정치적 조직 유형이 탄생한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강력한 전투력과 신속한 병력 이동 능력, 장거리 원정을 가능케 하는 병참 능력 등, 전쟁수행능력에서의 진일보가 결정적이었다는 점만을 언급하기로 하자.
항상 당대 최고의 문명을 자랑했던 에집트도 이 전투적인 제국의 말발굽에 무참히 유린되었다.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주축세력인 다마스커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도 몰락했다. 실은 아합 왕이나 하사엘 등에 의한 이스라엘과 다마스커스의 번영도 아시리아의 팽창이 내부사정으로 주춤했던 일종의 제국공백기였기에 가능했다. 8세기 후반 아시리아의 서방 진출이 다시 거세졌고, 기어이 다마스커스 왕국과 북왕국 이스라엘(주전 722년)이 멸망하였다.
이러한 번영과 쇠락의 시기, 남북왕국은 지배층과 귀족화된 종교계의 부패상으로 얼룩졌고, 이를 비판하며 체제 내외에서 격렬하게 화염을 뿜어대는 예언운동은 이 시대에 폭발한 한줄기 야훼 신앙의 화산 줄기였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즈음해서, 많은 유민들이 남하했고, 이 피난 행렬을 따라 야훼 신앙사를 장식했던 무수한 이야기들도 옮겨왔다. 이를테면 이 시대 걸출한 예언자인 이사야의 신탁 속에는 동시대 북왕국에서 활동했던 아모스의 잔영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사례일 뿐, 야훼신앙의 전통은 훨씬 광범위하게 남왕국의 사유 곳곳으로 스며들었고, 대중적인 반항적 예언자 전통 또한 이곳의 빈약한 민중사상을 채워 넣었다. 이것은 반아달리야 혁명 때 등장했고 역사의 전개에 따라 아마도 보다 강력한 민중 전통을 형성해 갔을 ‘암하아레츠’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체제의 상류사회에게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른바 민중적 진보주의가 정치의 무대에 커다란 흐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바로 ‘히즈키야-요시아 개혁’은 이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실례다. 나아가 이것은 구약성서 편집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어, 성서 신앙의 핵심적인 정신을 구성하게 된다.
아하즈를 승계한 히즈키야는, 과거 우찌야 왕의 국사였던 즈가리야 가문 출신의 여인의 아들이다. 이것은 그가 예루살렘의 전통적 야훼주의 일파와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가진 통치자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훗날 펼치게 될 개혁 정책의 한 측면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그는 예루살렘 중심의 야훼주의 보수파를 대변하고 있다.
이 세력은 과거 민중 세력과 제휴하여 발전 일변도의 사회체제를 지향하던 국제주의적 국가주의에 대항한 전력이 있었다. 즉 이들은 ‘반국제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이었다. 한편 이 세력은 민중세력과 연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념적으로도 보수파였다. 이것은 솔로몬 이후 남왕국 왕실에선 민중적 야훼주의 전통이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히즈키야의 개혁은 이 점에서 이전의 전통을 넘어서는 또 다른 차원을 갖는다. 이미 말했거니와, 히즈키야는 북왕국으로부터 전수받은 민중적 야훼주의, 특히 대중적인 반항적 예언자에 추동된 민중전통을 접할 기회를 이전의 누구보다도 더욱 많이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이것을 남왕국 왕실 신학으로 정치이념화하는 데 탁월했던 이사야 등의 업적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통치자였다.
더욱이 통치이념으로서의 민중적 야훼주의는 히즈키야에게 전략적으로 유리했다. 아달리야 이후 강화된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데 민중적 야훼주의는 더 없이 유용했던 것이다. 또한 정치적 동원이 종종 가능했던 ‘암하아레츠’의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이용하는 데에도 안성마춤이었다. 그리하여 히즈키야는 왕권에 대한 도전세력을 견제하면서 강력한 통치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한다.
히즈기야 등극 직전과 직후 적어도 세 차례나 전개된 사르곤 2세의 원정으로 이 지역 강국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아시리아에 대한 저항의 깃발은 번번이 무참하게 짓밟혔다. 그 결과,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는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약소국으로 전락해 있던 유다로서는 주변 강국이 주도한 이 반란에 마지못해 가담했지만, 제국의 군대가 다가왔을 때 재빨리 태도를 바꿈으로써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마침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벌어지고, 사르곤이 그곳에서 전쟁을 하는 데 여념이 없던 무렵 히즈키야는 국가 재건의 결정적인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이 개혁의 주된 타겟은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친아시리아 당파였다. 이들은 한 때 정부 내의 고관으로 득세했고 중앙과 지방에 막대한 자산을 축적한 대지주 세력이었다. 지방 산당의 철폐 정책은 이들 세력의 종교적 중심지이자 대중동원의 센터를 붕괴시키려는 조치였다(이것은 예루살렘 성전과 지방 신전들에서의 아시리아식 예배의 흔적들을 훼파하는 것을 수반하였다).
유대의 유적지들에서 발굴된 왕의 인장이 찍힌 큰 단지들은 히즈키야 개혁의 이러한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물들이다. 이것들은 현물세 징수용이거나 양곡 비축용 단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도량형을 표준화함으로써 대지주들의 무분별한 착취를 억제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동시에 히즈키야는 이것을 통해 조직적인 조세 및 병참 체제 같은 행정체계의 조직화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왕실의 부와 군사력은 강화되는 반면, 대지주들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역대기하〉 32장에 묘사된, 히즈키야가 취한 군의 재무장화, 군제 개편, 병참 체계화 및 요새화 등의 정책은,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보임에도, 바로 이런 개혁과 맞물려 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제의를 예루살렘에 집중시키려던 히즈키야의 정책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민중적 예언자 전통을 왕실의 통치이념으로 재해석하는 활발한 왕실 이데올로그들의 활동의 흔적일 것이다. 이것은 훗날 요시아 개혁의 밑거름이 된다.
히즈키야의 군재 개편 등의 개혁 정책은, 마침 아시리아의 사르곤이 키메르 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제국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의 물결 속에 동참하는 데로 이어진다. 그러나 사르곤의 승계자 산헤립은 얼마 안가 바벨론, 아나톨리아 등지의 반란들을 모두 제압하고, 시리아-팔레스티나를 향해 서진했다. 주전 701년과 688년 두 차례의 침공 때에, 유다는 예루살렘 성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을 약탈당했다. 막대한 공물과 함께 봉신국이 될 것을 약속함으로써 유대는 겨우 생존할 수 있었다. 이때 왕실의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볼모로 혹은 전쟁배상금조로 끌려갔고, 예루살렘과 그 인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토가 인근 친 아시리아 정부에 귀속되어버렸다. 이제 왕실 재정을 고갈됐다. 물론 개혁을 위한 비용도 결단나 버렸다.
히즈키야의 아들 므나쎄가 왕이 되었다. 그는 아마도 부왕이 북부 지역의 대중을 왕실 중심의 개혁 정책에 끌어들이기 위해 오래된 북부 지파의 명칭으로 이름 붙였던 왕자였던 것 같은데, 역설적이게도 므나쎄 치하의 유대는 철저히 반 히즈키야 노선이 지배적이던 시대였다. 열두 살에 공동통치자로 등극한 왕은 아마도 한동안 친 아시리아파 관료들에게 좌우되었을 것이며, 필시 히즈키야는 무력한 상태였을 것이다. 절정기를 구가하던 아시리아는 유대를 포함한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여러 국가들의 내정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였고, 다른 나라들처럼 아시리아인 판무관이 파견되어 왕실을 일일이 감시한 것으로 보인다(〈이사야서〉 28,11~13과 33,19에 나오는 “생소한 입술”과 “어려운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유다 정부 내에 있던 아시리아인 관리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귀족의 횡포는 다시 극성을 부렸고, 히즈키야 개혁 지지파들은 집권층의 정치적 보복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야 했다(〈열왕기하〉 21,16). 이제 히즈키야의 개혁당 야훼주의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야만 했다. 군사적 테러리즘에 의존했던 아시리아는 이 봉신국에게 자신들의 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왕실과 친아시리아적 정부는 열광적으로 앗수르신과 이쉬타르 여신 신앙을 도입하였다.
55년간의 긴 통치기간을 거친 므나쎄가 죽고, 그의 아들 아몬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위 2년 만에 암살당한다. 당시는 아시리아가 갑자기 몰락하고 있던 시기였다. 아마도 이것은 친 아시리아파와 반아시리아파간의 정파적 대결의 소산인 것 같은데, 이때 또 다시 ‘땅의 사람들’이 등장하여, 암살자들을 처형하고 아몬의 아들 요시아를 즉위시킨다.
한편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시리아의 에살하똔은 에디오피아 계의 에집트 정부인 제25왕조와 시리아-팔레스티나를 두고, 나아가서는 에집트 본토를 두고 전쟁을 벌였다. 에살하똔은 에집트의 타르하가를 격파하고, 에집트 출신 지방 토호들을 통치자로 임명하여 지배권을 확립하려 했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대식민지 행정능력은 매우 서툴렀고, 재기하여 상부에집트로 다시 쳐 올라온 타르하가의 편에 대부분의 봉신들을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나 느고 1세만은 아시리아를 등에 업고 타르하가에 대항했는데, 에살하똔의 아들 앗수르바니팔 시대에는 아시리아를 배후에 둔, 느고 1세의 아들 프사메티쿠스 1세가 타르하가를 물리치고 제26왕조를 창건한다. 이제 에집트은 다시 본토민 출신 왕조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이 왕조 대에 에집트는 강대국으로 다시 부흥한다.
바야흐로 아시리아와 에집트간의 밀월관계가 시작되는데, 이것은 아시리아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행정력이 약한 아시리아는 프사메티쿠스 왕조와 더불어 시리아-팔레스티나를 공동지배하는데, 앗수르바니팔 이후, 아시리아가 내란에 시달리게 되면서, 이 지역은 에집트의 영향권 아래 있게 된다. 이렇게 아시리아에서 에집트로 관할권이 이전되는 시기가 바로 요시아 왕 시대였다.
요시아는 8세에 즉위한다. 그러므로 이 미성년의 왕은 자신의 배후 세력의 정치적 영향권 아래 전적으로 포섭되어 있었다. 이 세력에는 과거 히즈키야 개혁의 잔존세력을 포함하여, 전통주의적이며 개혁주의적 성향의 다양한 민중세력이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여하튼 이 세력은 몇 년 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또 다시 개혁 작업에 돌입한다. 〈역대기하〉 34,3에 따르면 재위 12년에 개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 때는 앗수르바니팔이 사망한 어간이었을 것이다.
개혁이 진행되기 이전, 스파니야 예언자는 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예언 활동을 펼친다. 그는 아마도 성전 관료의 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아모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렸하다. 그는 야훼신앙에 아시리아 신앙이 도입되는 것에 맹렬한 비판을 했고(〈스바니아서〉 1,4~6), 이에 협력하거나 소극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특권계층과 왕족을 정죄하며(1,7~13), 사제, 예언자 등도 격렬하게 고발하고 있다(3,3~5). 그의 선포에는 앗시라아식 신앙제의가 야훼신앙에 도입되는 현상과 연계된 특권세력의 사회적 부패 구조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것이다. 바로 히즈키야의 제의개혁과 동일한 맥락에서 스파니야는 보수주의적인 귀족들인 친아시리아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스바냐는 이런 비판의 정반대의 위상학을, 아모스와 마찬가지로 ‘야훼의 날’ 신탁으로 펼치는데,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이것은 요시아 개혁의 전조였다.
한편 나훔 예언자는 또 다른 차원에서 개혁 정책의 밑거름이 되고자 했다. 그도 스파니야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는 활동을 편 예언자로 보이는데, 그의 신탁의 핵심은 아시리아의 몰락 선포에 있다. 이것은 정부 내의 국제정치적 논쟁에서 왕당파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후원하는 정치적 기능을 하고 있다.
이렇게 준비된 개혁은 그의 재위 제8년인 주전 633년경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마도 이 때에는 아시리아의 공식적 제의를 거부하기로 하는 결정이 내려졌던 것 같다. 신명기적 역사서인 열왕기에 따르면(〈열왕기하〉 22,3), 재위 제18년 성전에서 한 문서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히즈키야 시절에 왕실 이데올로그들인 서기관들에 의해 작성된 개혁 지침서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므나쎄 통치기간에 성전 창고 속으로 숨겨졌던 것이 발견된 것이라라. 혹은 어쩌면 요시아의 개혁파가 선왕대의 것으로 위조한 문서였을지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 시기에 유대 사회에 문자가 활발히 보급되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히브리어가 새겨진 수백 개의 개인 서명용 인장 등이 발견된 것이다. 바야흐로 기록이 사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성하는 중요한 매체로 등장한 시기가 된 것이다. 바로 그 때에 공교롭게도 한 ‘오래된’(?) 문헌이 성전에서 발견되었고, 왕당파는 호들갑스럽게 회개를 선포하고 급변화된 국정 시책들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이 문서는 개혁의 명분을 강화시켜 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며, 이를 위해 왕족의 부인이자 왕실 여예언자인 훌다가 이 문서를 야훼의 신탁으로 보증한다. 이 사건이 개혁의 시발점이라는 〈열왕기하〉의 묘사는, 개혁이 야훼 신앙에 기초한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지, 실제의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실제는 〈역대기하〉의 본문처럼 어느 시기에 개혁에 보다 질적으로 박차를 가하게 하는 계기로서 이 사건이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요시아 개혁의 실제 진행은 ‘예루살렘 성전 정화, 지방의 성소 철폐, 법률서(원신명기) 공표, 그리고 이 정책을 시행 가능한 북부 지역으로 확대’하는 순으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물론 북부지역으로의 확대는 히즈키야 때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개혁의 특징은 히즈키야 개혁과 마찬가지로 귀족들을 견제하고 왕당파의 입지를 강화하며, 친아시리아 노선을 견제하고 민족주의를 천명하려는 것이고, 동시에 대지주의 횡포로부터 소농들의 사회적 권익을 보호하려는 데 있다. 특히 지계표를 옮기는 것에 대한 금령(〈신명기〉 19,14), 고리대금과 악랄한 부채 회수에 대한 금령(〈신명기〉 24,6・10~13‧17), 정의로운 재판 강조(〈신명기〉 16,18~20), 뇌물수수 금령(〈신명기〉 16,18~20), 정량화된 도량형(〈신명기〉 25,13~16) 등이 언급되고 있으며, 늘상 소농들을 위협하고 있는 몰락을 억제하려 할뿐 아니라 최악의 상태에 떨어져 있는 과부, 고아, 이방인들에 대한 특별한 보호가 강조되고 있다. 비록 이러한 개혁의 왕실 차원에서의 실리적 목적은 왕실 재정의 확충을 통한 왕권 재강화에 있었다 할지라도(군대의 재조직; 행정기구의 지편 등도 포함하여), ‘정의로운 왕’에 관한 신념은 다윗왕조 이데올로기가 ‘땅의 사람들’의 염원과 결합됨으로써 구체화된 이미지였고, 특히 이사야 예언자 등에 의해 이미 정부의 대전승(Great Tradition)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개혁의 사회적 차원이 단지 왕당파와 민중파의 실리적 이해관계의 타협의 소산으로 환원시킬 수 없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아달리야 때부터 가시화된 민중운동, 위대한 예언자들의 신탁 활동, 그리고 찬란한 북왕국의 예언자 전통 등에 따라 민중적 가치가 대전승 속에 삼투된 결과인 것이다. 즉 다윗-솔로몬의 왕조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적 지평이 이러한 야훼주의자들의 실천과 교접하면서 보다 시대적인 함의를 갖는 민중적 상징체계를 함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앗시라아가 거의 멸망한 조짐이 보였다. 앗수르바니팔(주전 668~629)이 죽자 그의 두 아들이 대립왕으로 권력 투쟁을 벌이고, 제국의 전역에서 반아시리아 해방전쟁이 벌어짐과 동시에,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은 공세적으로 나와 아시리아 군을 연파했다. 주전 612년, 수도 니느웨는 동맹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제 아시리아의 패망은 눈앞에 다가왔다.
이제 대세는 메대와 바벨론의 것처럼 보였다. 에집트 제26 왕조의 느고 2세는,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티나에 대한 종주권을 되찾기 위해서, 이제 바벨론을 견제해야 했다. 그래서 아시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팔레스티나 해안로를 따라 진군하여 메소포타미아 중원의 갈그미스(유프라테스 강변)로 진군하려 했다. 한편 요시아는 새로이 등장하는 강국 바벨론과 대립하기보다는 선린관계를 맺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종주국 에집트로부터 해방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열왕기하〉 23,29에는 요시아가 갈릴래아 서편의 므깃도 요새에서 에집트 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몇몇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종주국으로서 예속국 군주들에게 충성을 다짐받고자 했던 느고 2세에 의해 요시아가 소환되어 처형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에집트의 폭력적 개입은 요시아 개혁의 붕괴를 의미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야훼주의자들의 꿈은 또 다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예언자의 분노와 고난, 그리고 왕국의 몰락
왕의 서거 소식에 예루살렘 조정은 당황했다. 대책 없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또 다시 ‘땅의 사람들’이 해결사로 등장한다. 이들은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즉위시킨다. 그런데 므기또를 지나 리블라에 진군하고 있던 중에 이 소식을 접한 느고 2세는 칙사를 파견하여 요시아의 다른 아들 여호야킴을 즉위시키고, 여호아하즈를 에집트로 압송한다. 즉위한 지 3개월만이었다.
에집트 | 유다 | 아시리아 | 바빌론 | 메대 |
[제26왕조] 프사메티쿠스 1세(664~610)
느고 2세(610~594)
프사메티쿠스 2세(594~589)
아프리에스(호프라)(589~570) | 므나쎄(697/6~643/2)
아몬(643/2~641/0) 요시아(641/0~609)
여호아하즈(609) 여호야킴(609~597) 여호야긴(597) 시드키야(597~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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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수르바니팔 (668~627)
신사르이스쿤 (629~612) 앗수르우발릿 2세 (612~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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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폴라살(626~605)
느브갓네살(605/4~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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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약사레스 (625~585)
아스티야게스(585~550) |
여기서 우리는 이 왕위 승계 과정 이면에 숨겨진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 여호아하즈는 23세에 즉위했다. 그런데 3개월 후 즉위한 여호야킴이 25세였다. 즉 여호야킴이 손위인 것이다. 얼핏 정상적인 승계질서가 무너진 듯 보인다. 요시아가 생전에 이미 여호아하즈를 세자로 책봉한 탓일까? 그렇다면 왜 ‘땅의 사람들’의 특별한 활동이 필요했을까? 이들은 유다 역사의 국면에서 비상사태에 출현하곤 했다. 만약 여호아하즈가 세자였다면, 요시아가 에집트에 패전하고 전사하자, 므나쎄 이후 실각했던 친 아시리아-친에집트 세력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여 세자의 왕위 승계를 위협하려는 어떤 움직임에 대해 ‘땅의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리라. 또 여호아하즈가 자연스런 승계자가 아니었다면, ‘땅의 사람들’의 등장은 일종의 왕실 정변을 의미할 것이다. 어찌됐던 여호아하즈는 요시아와 땅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정치적 계보 위에 있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호아하즈의 즉위에는 요시아 개혁을 민중적 개혁의 차원에서 계승하라는 요청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에집트는 그를 강제로 퇴위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우리의 추론의 개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사건은 여호아하즈를 집권하게 한 세력이 과거 요시아 개혁 세력과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간접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보았듯이 요시아의 개혁주의는 아시리아-에집트의 지배로부터 자주권을 쟁취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반대로, 여호야킴이 친에집트 노선의 정파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필시 유대 정부 내의 이러한 세력이 왕위 승계에 얽힌 상황을 리브나의 느고 2세에게 알려주었을 것이다. 므기또에서 승전한 이후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틈도 없이 북동진하던 에집트의 느고가 갑자기 예루살렘 조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뒤늦게야 승계에 얽힌 정황을 알게 되었던 것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후방에 또 다시 적대세력이 잔존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여호야킴의 즉위는 친에집트적이고 반개혁적(보수주의적) 정파의 득세를 의미했다.
여호아하즈의 폐위에 즈음한 예레미야의 다음과 같은 탄식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너희는 죽은 왕(=요시아) 때문에 울지 말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오히려, 너희는
잡혀 간 왕(=여호아하즈)을 생각하고 슬피 울어라.
그는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다시는 고향 땅을 보지 못한다.
― 한글새번역 성서. 〈예레미야서〉 22,10
여호야킴 정부 아래서 부패한 귀족정치는 부활했다. 귀족들의 사치행각은 벼랑 끝에 선 국가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끝을 모르게 심화되어 갔고, 이것은 백성의 피와 땀을 인정사정없이 잔혹하게 사취함으로써 가능했다(〈예레미야서〉 22,13이하・17). 지방 산당을 중심으로 이방관습이 다시 기승을 부렸다(7,16~18; 11,9~13). 여호야킴 왕도 질세라, 요시아 시절 비축되었던 개혁의 기금을 톡톡 털어 왕실을 호화스럽게 치장하는 데 마구 지출했다(22,13~19). 이제 개혁 정신은 정부 내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이것을 비판하는 예언자들을 포함한 비판세력은 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26,20~23). 성서에는 여호야킴 정부의 비판세력에 대한 대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나온다. 우리야 예언자는 부패한 정부를 비난하는 방법으로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언했다. 체포 명령이 내려졌고, 과거 솔로몬 치하의 여로보암처럼, 그리고 정치범이 전통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우리아는 에집트로 망명했다. 그러나 여호야킴은 솔로몬과는 달랐다. 그는 악볼의 아들 엘라단에게 그를 에집트에서 체포해올 것을 명령했다. 우리야는 여호야킴 앞으로 압송되어 왔고, 처참하게 처형당했다(26,20~24).
예레미야 예언자는 요시아 개혁 때에 공적 활동을 개시하였다고 하나, 당시의 활동에 관한 묘사나 당시를 반영하는 신탁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요시아 개혁 당시 이 운동에 대한 그의 태도를 알 길은 거의 없다. 그러나 여호야킴 시대 이래 예레미야는 열렬한 요시아 개혁의 지지세력을 자임했고, 바로 그런 관점에서 정부 당국을 비판했다. 아마도 시드키야 시대를 반영하는 본문이 집중된 46~51장의 앞부분은 대부분 여호야킴 시대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 본문들을 토대로, 여호야킴에 대한 예레미야의 활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예레미야의 신학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의 출신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서에 의하면 그는 ‘아나돗’ 출신이라고 한다. 이곳은 과거 다윗 정부에 참여했다가 솔로몬에 의해 축출된 아비아달이 유배된 곳이다. 또한 우리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건국에 참여한 아히야 예언자도 이 계열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요컨대 유대와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평등주의적인 지파동맹의 전통과 발전주의적인 국가적 지향 사이에서 양자를 절충해보려는, 즉 국가 정치 내에서 평등주의를 어떻게든 현실화해보려는 야훼신앙 운동의 맥락에서 이 계열의 활동이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힐키야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요시아 개혁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유력한 사제가문 출신이다. 그의 숙부인 살룸은 요시아 개혁 당시 여예언자이자 왕녀인 훌다의 남편이다(〈예레미야서〉 32,7; 〈열왕기하〉 22,14). 또 살룸의 아들 마아세야와 스바니야는 왕실의 고위직 사제였다(〈예레미야서〉 35,4; 21,1; 37,3; 52,24).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요시아 개혁의 열렬한 지지파 가문 출신으로서, 가장 유력한 사제 귀족의 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활동을 국가 정책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포착해야 하며, 이를 둘러싼 조정 내부의 권력 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그의 신탁을 읽어야 한다.
여호야킴이 즉위한 직후, 그는 성전 경내에서 성전 파멸 신탁을 선포한다(7,1~8,3, 26장). 물론 이것은 새로 즉위한 왕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는 신탁임이 분명하다. 이 사건으로 왕과 더불어 집권에 성공한 예루살렘 성전 사제들은 그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히즈키야 때의 선례를 들면서 선처를 호소하는 ‘지방의 장로들’의 중재 덕분에 생명을 구한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한동안 성전 출입이 금지된다(26,1~24). 이것은 왕실 정책에 대한 공식적인 자문활동을 제한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도 그는 일정 기간 동안 공적 활동을 제약하는 상당한 감시 아래 놓여야 했을 것이다.
한편 느고 2세는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의 황태자 느브갓네살에게 패전한다. 이제 바빌론은 동부지중해 일대를 장악하였다. 유대 왕국도 더 이상 친 에집트 노선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여호야킴은 이제 바빌론의 한 봉신국 통치자로 임명된다. 하지만 그의 정부는 바빌론에 대항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전 601년 느브갓네살이 에집트 원정에서 실패하고 철군하게 되자, 여호야킴은 반란을 도모한다.
이때 예레미야는 다시 활동을 개시한다. 그는 왕의 정책을 비판하는 신탁 문서를 제자 바룩을 통해 비밀리에 반입하여 선포하게 한 것이다(36장). 이 필화 사건은 왕실 내 각 정파 간의 권력 투쟁에 예민하게 활용되었다. 즉 조정의 반 왕당파는 이 문서를 통해 결집한다. 과거 요시아 개혁의 가장 중요한 집안인 사반 가문과 네리야 가문 등이 주동이 되어 이것을 암암리에 유포시킨다. 한편 왕당파는 이것을 불태움으로써 대응하지만, 아마도 이 필화사건은 왕당파에 상당한 상처를 준 것 같다.
주전 599/98년, 전력을 회복한 바빌론군은 다시 진군하여,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반란국들을 점령한다. 이때 유대 국토는 처절하게 유린당한다(〈열왕기하〉 24,2; 〈예레미야서〉 35,11). 그리고 그 즈음 바빌론 군에 예루살렘이 포위된 상태에서 왕은 의문사한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를 승계했고, 새 왕은 즉시 항복한다. 즉위 석 달 만에 그는 반란국 통치자의 직위로, 많은 지도층과 더불어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된다(제1차 유배). 바빌론에 멸망되리라고 예언했던 예레미야의 선포는 실현되고 만 것이다.
느브갓네살은 시스키야를 즉위시킨다. 이 인물은 요시아의 또 다른 아들로서, 그의 모친은 바로 여호아하즈의 어머니였다. 시드키야가 즉위할 때 21세였으니, 비운의 왕 여호아하즈와는 14년 정도 연하였다. 즉 형이 즉위할 때 그는 불과 7살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정황을 기억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게다가 여호야킴 정부에서 은밀한 비판세력이던 이들이 공개적으로 그의 집권을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바빌론의 지배는 그리 정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조정은 친바빌론 노선을 취하는 과거 요시아 개혁의 계승집단과 친에집트 노선을 취하는 여호야킴 정부의 집권파간의 팽팽한 대립 구도를 이루었다. 아마도 여호야킴 시절의 탄압 때문에 전자는 수에 있어서나 권력에 있어서 그리 견고하지 못했던 것 같고, 설상가상으로 종주국에 대한 반발감에 의해 배가된 민족주의 탓에 더욱 세력이 위축되었던 듯하다. 물론 예레미야는 여전히 전자를 대변하는 명망가의 한 사람이었다.
양대 세력간의 격렬한 분쟁은 시드키야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나타났고, 통치 능력이 결여된 왕은 시국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공공연히 시드키야 대신 유배당한 여호야긴의 귀환을 열망을 담은 주장이 유포되기까지 했다(〈예레미야서〉 22,24~30). 갈수록 시드키야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채 이리저리 동요하기만 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시드키야에 대해 상당히 동정적이었음이 분명하다(34,1~5). 시드키야 역시 곧으면서도 국제정세에 밝은 노련한 종교지도자 예레미야에게 많이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왕국 멸망까지 11년간은 그에게 있어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민족주의를 등에 업은 반대파의 선동으로 민족의 파멸을 예언한 예레미야는 대중으로부터도 소외되었던 것 같고,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서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들이 잇달았다. 그는 여러 차례 구금되고 고문당해야 했다. 이런 소외감 속에서 그는 점점 장례나 혼례에 참석하길 꺼리게 되었고(16,1~9), 심지어 예언자적 중재 역할을 수행하는 것조차 회피하게 되었다(11,14~17; 14,11~12).
그러던 중 바빌론에서 군부의 반란이 일어나고, 에집트에선 프사메티쿠스 2세가 느고 2세를 이어 왕이 되어 다시 에집트의 발흥을 외치며 이웃 나라들을 부추기자, 유다에서의 민족주의는 절정에 이른다. 에집트에 의해 선동된 시리아-팔레스티나의 6개국(암몬, 모압, 에돔, 띠르, 시돈, 유다)의 사절들이 예루살렘에서 회동했고, 예언자 하나니야는 여호야긴이 복위할 것과 유다가 바빌론의 지배에서 해방될 것을 예언한다. 예레미야는 그 회의장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당대의 유력한 사제의 하나였던 하나니야와 논쟁을 하면서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다(27~28장). 한편 디아스포라 유배민 공동체 사이에서도 본국에서처럼 해방에의 열망에 고취되어 있었다.
더욱 절망에 빠진 채 예레미야는 소의 멍에를 메고 나타나서는 민족주의에 열광된 채 반바빌론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동족의 모습을 절규하듯 비판한다. 또한 디아스포라 유배민들에게 망상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낸다. 그는 맹목적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소수의 특권층이 선동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그네들의 무책임한 단견의 소산임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귀족들의 부패함에서 벗어난 세상을 주장했다. 이것이 그의 메시아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다윗의 혈통’에 의한 메시아 은유를 통해서(23,5~6), ‘정의의 통치자’를 기대했다. 이때 정의는 ‘혈통’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메시아 기대의 주인공이 바빌론 왕이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중요시한 것은, 전쟁의 승패에 대한 판단 문제가 아니라(어쩌면 친바빌론 파의 일단의 세력은 이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빌론 치하든 아니든, 민중적 개혁에 정부가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식량을 대대적으로 반출하고, 백성을 강제동원하는 식의 정책을 중단하는 것은 개혁의 전제 조건인 것이다. 이것은 그가 주장하는 정의로운 왕의 기준이 혈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책’에 의존하는 것임을 뜻한다. 존재가 아니라 행함에 초점이 있다. 누군가 권력과 억압을 분쇄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그가 바로 정의의 통치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드키야는 결국 반란에 참여하고 말았다. 이 회동 후 몇 년이 못가서, 프사메티쿠스 2세를 승계한 호프라가 팽창주의 정책을 펴면서 다시 팔레스티나 여러 나라들을 충동질했는데, 유대도 이에 참여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견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주변의 나라들은 에집트의 회유에 미온적이었는데, 시드키야 정부가 섣부르게 반란의 대열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처절한 최후에 관해 〈열왕기하〉 텍스트(25,1~11)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시드키야 왕 구년 시월 십일, 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을 포위하고 사면에 토성을 쌓았다. 이 포위는 시드키야 왕 십일 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해 성에 기근이 혹심하여 식량이 떨어지자 일반 서민들은 굶주려 죽게 되었는데, 사월 구일에 드디어 성벽이 뚫렸다. .........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제 십구 년 오월 칠일, 바빌론 왕의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야훼의 전과 왕궁와 예루살렘 성안 건물을 모두 다 불태웠다. 큰 집은 모두 불탔다. 친위대장을 따르는 바빌론 군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죄다 허물어 버렸다.
589년 예루살렘은 정복되었고, 왕은 자신의 눈앞에서 아들들이 도살당하는 것을 목도하고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이때 수많은 유다 귀족과 장인들이 함께 끌려갔다(제2차 유배). 이로써 유대 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당하고 포로로 끌려갔다. 또 수많은 촌락과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인근의 여러 성읍들의 파괴의 흔적들이 고고학을 통해서 발굴되었는데, 그 참화를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만큼 처참한 잔해를 볼 수 있다. 이 잿더미들과 함께 유대 왕국에서 민중적 야훼주의가 꽃피우는 나라를 소망했던 예레미야의 꿈도 사라졌다.
새로운 신정통치의 가능성, 그달리야, 그리고 ...
바빌론 당국은 유대 같은 작은 지역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여전히 강력한 저항을 펼치고 있는 띠로와 시돈을 정복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그 후원세력인 에집트를 제압하는 데 그들의 서방원정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러니 친 바빌론 입장의 유력인사에게 위임통치를 맡긴다면, 이 사소한 지역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적임자로 선택된 것이 그달리야였다.
그는 유다의 가장 유력한 가문의 하나인 사반 가문의 후손이었다. 이미 보았듯이 이 가문은 친 바빌론 노선의 세력 가운데 가장 유력한 가문이다. 또 그달리야는, 라기스에서 출토된 한 인장에 의하면, 시드키야 당시 군부 지도자의 하나였던 같다. 즉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실재로 그의 정부 내에로 과거 유다 군의 잔존 세력이 속속 투항해 왔음이 분명하다(〈예레미야서〉 40,8). 정국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그의 직위는 아마도 총독이 아니라 ‘왕’이었던 것 같다. 성서는 그의 공식 직위를 한 번도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레미야서〉 41,10의 ‘왕의 딸들’이라는 표현이나 41,1의 ‘왕의 장관’이라는 표현은 문맥상 그 왕이 게달리야를 지칭할 경우에만 자연스러운 진행을 나타낸다. 아마도 텍스트 저자들은 그가 다윗의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볼 때, 게달리야는 바빌론으로부터 왕으로 위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재로 바빌론의 입장에서, 총독부라는 새로운 관리기구를 설치하는 것보다는 왕권을 승계하는 것으로 할 때, 가장 손쉽게 이 지역을 안정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게달리야는 자신의 새 도읍을 미스바로 정했다. 이것 또한 유의미하다. 예루살렘은 이미 잿더미가 됐으니 새 왕국의 도읍으로 적절치 않은 상황이었다. 여러 대안 가운데 게달리야가 선택한 것은 미스바였다. 우선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이니, 위치상 적합했다. 그밖에 요새도시들은 필시 바빌론 군에 의해 거의 완파된 터였다. 그 외에 남은 가능성 가운데 그는 왜 하필 미스바를 택했을까? 그런데 독자들은 이 지명이 매우 익숙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이곳은 오래전 국가 성립 이전 시절 유명한 성소가 있는 곳이다(〈판관기〉 20,1~3; 21,1~8; 〈사무엘기상〉 7,10・17). 더욱 흥미로운 것은 미스바는 국가로 이행한 뒤,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요시아 개혁 때 산당 철거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곳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게달리야에게 이곳은 이스라엘의 오래된 야훼신앙 전통을 상기시키면서도, 요시아 개혁과도 모순되지 않는 장소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정부의 특징을 추론할 수 있지 않을까.
더욱이 정황은 개혁을 펴기에 매우 유리했다. 구왕족 치하에서 귀족 노릇하던 많은 이들이 처형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 주인 없는 토지와 재산이 매우 많았다. 토지와 재산의 재분배가 가능했고, 이는 자신의 가문이 그토록 추구했던 신명기 개혁의 핵심 사안이기도 했다. 국가 경제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이 엄청난 국난은 동시에 기회였다. 인근 지역으로 피난 갔던 유민들이 속속 돌아왔다. 그것은 그의 모종의 개혁정책의 대가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 정부의 참여했음이 분명하다. 단, 그가 노령이었고, 여호야킴과 시드키야 당시 숱한 고초를 겪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게다가 전쟁의 참화를 거치면서 그의 건강상태는 퍽 좋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므로 정책 자문역을 활발히 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게달리야의 정부가 채 꽃을 피우기도 전, 그는 측근 장교에 의해 시해되고 만다. 주범 이스마엘은 구왕족의 방계친척으로, 아마도 다윗 혈통이 아닌 자가 왕이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는 게달리야가 민족을 바빌론에 팔아먹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왕족을 통한 민족 자주권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던 열광적 민족주의 당파에 속했던 귀족 출신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의 배후에는 유대 지역에서 도망해서 목숨을 건진 그 당파에 속한 인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기에는 이 망명인사들을 보호하고 있던 암몬 왕 바알리스가 있었다.
글을 맺으면서
〈예레미야서〉의 내용 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명기적 역사가는 이 텍스트에서 여호야긴 왕에 대한 아련한, 그러나 애뜻한 기조의 기억을 남긴다(52,31~34). 마치 거기에서 희망의 단초가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는 포로로 끌려갔지만, 37년간 수감된 이후에는 바빌론 왕과 더불어 식사하고 후대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슬쩍 지나가는 듯한 문투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마감하는 부분에 나온다는 사실은 결코 지나쳐버릴 수 없는 암시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여호야긴이라는 인물은 불과 3개월간 등극했다가 제대로 왕권도 휘둘러보지 못한 채, 바빌론으로 유배된 인물이지만, 유다의 적어도 한 당파에 의해서 정통적인 유일한 왕처럼 여겨졌었다. 그의 삼촌인 시드키야가 그를 이어서 왕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반대파들은 여호야긴이 유일한 합법적 왕이라고 생각했고, 게달리야가 그 뒤를 이어 임명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 당파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시드키야나 게달리야가 바빌론에 의해 임명된 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주적 주권을 갖지 못한, 아니 오히려 주권을 외세에 양도함으로써 왕이 된 인물들이라는 혐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충분한 개연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중시하는 여호야킴 왕도 외세인 에집트에 의해 위임된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여호야킴이나 그의 아들 여호야긴의 정통성도 의심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텍스트의 저자는 이 정파와는 대립적 입장에 있던 신명기 학파의 일원이다. 그러니 이들은 시드키야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게달리야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신명기 개혁 정신의 입장에서 볼 때, 시드키야처럼 별 성과 없는 통치자에 비해, 게달리야는 분명 뚜렷한 공적을 가진 인물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텍스트가 게달리야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여호야긴을 합법적 왕으로일 뿐 아니라 희망의 전거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레미야에 관한 이야기를 묶으면서, 그 예언자의 열정과 노고를 기리는 긴 텍스트를 구성하면서, 내리는 결론은 다윗의 왕국만이 여전히 유일 적법한 메시아 나라의 꿈이라는 얘기일까? 민중적 개혁의 꿈을 키우면서, 다윗 가의 민족국가 틀마저도 부인할 수 있었던 예언자의 메시아적 열망은 어디로 갔을까? 오랜 후에 예수가 나타났을 때,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바로 그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가 다윗의 후손임을 입증하고 싶어 했다. 물론 이것은 가문의 혈통을 중시하는 귀족이나 고위 사제계급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중의 생각이기도 했다. 근원 없는 자식에게선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편견이 그토록 강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습을 가로질러, 다윗 왕조 몰락기의 유대 왕국의 대표적 가문 출신 예레미야에게서 우리는 이런 편견을 넘어서려는 급진주의적 예언 전통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는 예수에게로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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