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아카데미 탈/향 2009년 가을강좌 '역서로 읽는 성서II - 부족사회와 군주제사회 야훼신앙의 역사'의 둘째 마당(2009.10.29)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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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솔로몬
역사인가 신화인가. 희망과 절망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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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개인으로서의 자취가 전혀 없는, 인간의 집합적 성찰을 반영하는 신화적 주인공이다. 아브라함, 모세 같은 이는, 비록 그의 특별한 개인사가 그에 관한 이야기에 개입되었을 것이지만, 시대의 요청에 의해 개인이 신화 속에 전유당한 존재다. 여전히 그들은, 아담처럼, 신화 속 주인공이다. 반면 다윗은 (건국)신화적 주인공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신화 만들기의 주역이기도 하다. 사실 이스라엘의 많은 신화들은 지파동맹 사회의 소산이지만, 문서화된 신화문학의 탄생은 다윗 왕조에 의해 비롯된다. 그리하여 여러 신화적 주인공들은 후대의 다윗을 응시하고 있고, 그를 위해 자신을, 자신의 영웅적 캐릭터를 헌납한다. 그래서 가령, 모세 신화가 탈왕권적 이데올로기의 소산임에도, 왕조 시대를 연 다윗의 그림자가 되기 위해 그러한 자신의 이념을 표층에서 은폐시켜 버렸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모세에서 부족연합(지파동맹) 시대의 집합적 욕망을 보려면, 대개는 특별한 역사학적 비평 수단을 필요로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신화적 주인공들은 다윗이라는 검열관에 의해 자신의 신화적 영웅의 위상을 거의 박탈당해 버린 채, 누추한 몰골로 다윗이 신화적 존재로 부상(浮上)하는 것의 알리바이 제공자의 역할로 전락해 버리기도 한다. 성서 이야기들에서 전형적인 비극의 주인공 사울이 바로 그렇다. 요컨대 다윗은 배우인 동시에 연출가다.
한편, 다윗이 선행했던 다른 신화적 주인공들과 대비되는 또 다른 요소로, 그가 신화 장르의 유명한 주인공일 뿐 아니라, 인생극 장르의 대표적인 주인공이기도 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요컨대 그는 성서 신앙사 속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드물게도, 신화의 소용돌이에 완전히 빨려들지 않은 개인사의 족적을 무수히 남기고 있다. 이 글 뒤에 첨부된 (아들 암논에 의한 딸) 다말의 강간 이야기나 우리아의 아내 바쎄바를 자기의 아내로 빼앗는 이야기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윗을 알고자 할 때, 성서 문학 속에 구축된 그의 다중적 지평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성서의 복합적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적 이미지로서의 다윗이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면, 다윗의 인생극에는 인간 권력욕의 치졸함이 암시되어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고대인들의 절망적 기억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희망과 절망, 이것은 다윗 이야기 속의 두 이미지다. 물론 후속의 신앙사에서 다윗은 늘 희망의 기억술의 결과만으로 간직되고 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 남겨진 문헌들에 의하면 말이다. 그는 고난 속에 절규하는 이들에게 민족의 메시아적 자취로서 기대되고 있다.(“그 날이 오면, 샘 하나가 터져서,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의 죄와 더러움을 씻어 줄 것이다”—〈즈가리야서〉 13,1) 하지만 동시에 절망에 관한 냉소의 어법을 담고 있는 다윗 인생극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창조적인 형태로 부활하여, 권력적 인간 존재에 관한 절망의 기억술을 전수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성서의 다윗 이야기는 신앙사적 성찰의 풍부함을 보여주는 전범이 되고 있다고 평가해도 부족함이 없다.
2
복음서의 족보들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명기한다(〈마태복음〉 1,6; 〈루가복음〉 3,32). 또 제2성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동일한 주장이 개진되고 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그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1,2~4
동포 여러분, 나는 조상 다윗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서 묻혔고, 그 무덤이 이 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예언자이므로, 그의 후손 가운데서 한 사람을 그의 왕좌에 앉히시겠다고 하나님이 맹세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29~30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물리치시고서,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행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구주를 세워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으니, 그가 곧 예수입니다.
—〈사도행전〉 13,22~23
이 구절들은 ‘다윗의 후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전통적인 ‘다윗 메시아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야훼신앙에서 전통적인 ‘메시아사상’을 담고 있는 어휘로 ‘기름부음 받은 이(왕/대사제)’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사야서〉, 〈예레미아서〉, 〈에제키엘서〉(=〈에스겔서〉), 그리고 열두 편의 소예언서들에서 이 단어는 발견되지 않는다(예외: 〈이사야서〉 45,1; 〈하박국서〉 3,13). 반면 이 예언서들에는 ‘미래에 오실 다윗의 통치’라는 개념이 등장한다(〈이사야서〉 7,13~14; 〈예레미야서〉 23,1~4; 〈에제키엘서〉 17,22~24; 〈미가서〉 5,1~3; 〈하깨서〉 2,20~23; 〈즈가리야서〉 3,8 등). 아마도 기름부음 받은 존재의 이미지에 이미 신화화된 영웅 다윗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메시아를 가리키게 된 것이리라. 그런데 특히 ‘다윗의 후손’이 함축하고 있는 개념은 이방 족속의 압정으로부터의 해방에 강조점이 있다. 따라서 이 개념에는 정치 군사적인 저항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강하게 수반되어 있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 통치하에 있던 제2성서 시대에 다윗의 후손은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로마로부터의 해방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었을 것이다. 제2성서는 대체로 이러한 점을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서 이 탐탁스럽지 않은 개념을 조심스레 수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이 개념을 예수에게 적용시키는 것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을 정도의 이미지가 이미 예수 전승(아마도 대중 전승) 속에 강하게 스며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 자신은 ‘다윗의 아들 메시아’ 사상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1]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 〈마르코복음〉 10,47~52
[2]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올라 타셨다.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 〈마르코복음〉 11,7~11
[3]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친히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다윗 스스로가 그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많은 무리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 〈마르코복음〉 12,35~37
[1]과 [2]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예수와 예수운동가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용어로 활용되고 있는 반면, [3]에서는 부정적인 함의를 사용된다. 해서 예수운동과 이 용어 사이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함의를 결정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다윗 메시아사상이 민족주의적 해방사상과 결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메시아 신앙을 가진 각양의 사람들의 실존적인 해방 염원이 얽혀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메시아 개념은 민족적 해방에 방점이 있는 총체적인 희망의 기억술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사회적 집단화에 따라 그 함의의 결절점이 드러나겠지만 말이다.
3
그렇다면 다윗 원전승(原傳承) 자체는 과연 이런 해석과 얼마나 맞물리는가? 아니 어떻게 맞물려 있는가? 앞에서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다윗에 관한 성서의 원전승은 두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희망의 어법으로 된 이데올로기적인 신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에 대한 냉소가 깔린 절망의 어법으로 된 인생극 유형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속에서 ‘역사의 다윗’(historical David)을 조명해 낼 수 있다.
다윗은 부족연맹 시대 이스라엘의 해체기에 등장한 인물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내외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외적 위기란 블레셋 부족동맹체 위협을 말하는데, 이들은 철제문명을 통해 월등한 무장능력을 갖추었으며, 이스라엘 외에는 가나안에서 최초로 부족동맹적 연대체를 구성했다는 점, 1그리고 가나안 지역에서 비교적 풍요로운 곡창지역에 거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가장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고 잘 훈련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실로 위협적인 존재였다.
블레셋 팽창주의에 따른 위기에 대항하기 위한 비상대권이 사울에게 부여되었는데, 그는 지파동맹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두 부족(에프라엠과 베냐민) 2의 하나인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개인 병력을 동원할만한 능력을 갖춘 유력한 가문 출신이다. 그런데 사울 같은 이를 지도자로 선택하는 것이 위기에 대처하는 최선의 수단일 수밖에 없다는 바로 이 사실은 이스라엘 와해의 내적 요인과 관련된다. 평등공동체가 이상적으로 지켜지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 중에 하나가 부족 간의 불균등한 의사결정 능력이었다. 사실 부족 간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계속되었고, 에프라임과 베냐민 부족은 바로 이러한 갈등에서 대체로 우위를 차지하려 했다. 또한 이스라엘 부족연합의 특징은 가문 간의 불균등을 억제하는 형식의 평등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기드온이나 사울의 경우에 잘 드러나듯이 당시는 그러한 부족연합 이데올로기가 아래로부터 심각하게 와해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인구가 늘어난 것이 그 주된 이유인데, 가나안 중부 고지대로의 인구 이동의 물결이 그 사회가 체제의 동요 없이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섬으로써 부족사회의 가문간의 평등질서가 동요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I. Finkelstein), 이 지역으로의 인구 팽창은 청동기 후기에서 철기 초기 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대략 2만에서 5만5천 명으로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가문간의 부의 차이가 너무 커지고, 이 과정에서 부랑자 집단 혹은 도적집단에 가담한 이들도 많아졌고, 동시에 유력한 가문의 사병이나 예속농으로 전락한 이들이 늘어나는 상황이 속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 평등사회 이상은 사실상 무색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유력한 가문들을 중심으로 신상과 성소를 독점하려는 경향이 계속되었고, 이는 부족연합의 이데올로기가 군주제로의 이행에 대해 반감이 희석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다윗은 유다지파에 속했고, 그의 집안은 그 중에서도 변변치 못한 집안이었던 듯하다. 부족동맹사회에서 남부지파들인 유다, 시므온 지파는 그 영토가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 터를 잡고 있었다.
영향력 없는 부족의 몰락한 가문 출신이며, 그 주위에 모인 무리들 또한 그 체제의 한계를 드러내는 깡패 출신들, 이것이 초기 ‘다윗일당’의 정체였다. 그러므로 다윗 집단의 이해는 사울 중심의 연합에서 이단적이고 돌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사력으로 활용될 수 있는 모든 집단이 동원되어야 하는 위기상황에서 다윗에 사울이 이끄는 연합군에 참여한 것이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전투에서 그네들은 의용군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동력과 전투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이 전사하고 이스라엘이 대패하자, 이스라엘 부족연합은 사실상 붕괴되고, 부족사회는 연합의 이념보다는 생존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집단으로 급속히 변모한 것 같다. 연대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사무엘기상〉의 설화들에서 그가 남부 구릉지대의 황량한 곳을 전전하며 다닐 때 주민들이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23,15~26,25), 본문은 그가 사울의 군대를 피해 다니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느라 시간을 보낼 여유가 있었을지, 그리고 남부 부족들에게 그가 영향력을 유지하였을지 등 의심스럽다. 그러므로 아마도 주민들이 그를 사울에 제보하였다는 것의 실상은 약탈을 일삼던 다윗일당을 남부 부족의 유력세력(들)이 색출하고자 했던 것이거나 그 지역을 병합했던 블레셋의 족속들이 전투세력이 다윗일당을 소통하려 했던 것일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후대에 왕실 서기관들에 의해 변형되어 사울과 다윗의 갈등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성이 있다. 그래야만 다윗은 부족동맹의 대표자인 사울과 경쟁자의 위상에 서게 되며, 사울 사후 부족동맹의 정통 계승자의 위치를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일당의 세는 점점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나발이라는 유다 지역의 유력자와 다윗에 관한 〈사무엘기상〉의 일화(25,1~42)는 그가 어떻게 유대사회에서 권력을 강화해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지역 유력자에게 협박을 하고, 그를 죽인 뒤에 그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음으로써 유력자의 재산을 빼앗는 정당성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블레셋의 가드 족속 추장(chiefdom)인 아기스의 용병이 되기도 했는데, 그것 역시 그의 생존법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삼상〉 27,1~4). 길보아산에서의 치열한 전투는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전사했고 이스라엘 부족연합은 더 이상 재기할 수 없이 와해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블레셋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블레셋의 용병이던 다윗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남부지역에서 자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그의 강탈과 정략결혼 등은 그의 권력의 입지를 확고하게 했을 것이다.
블레셋의 봉신이었다는 약점은 그가 가드 족속의 전설적인 용장 골리앗을 죽인 우화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보완된다. “드디어 그 블레셋 사람이 몸을 움직여 다윗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윗은 재빠르게 그 블레셋 사람이 서 있는 대열 쪽으로 달려가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을 하나 꺼낸 다음, 그 돌을 무릿매로 던져서, 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맞히었다. 골리앗이 이마에 돌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졌다.”(〈사무엘기상〉 17,48~49). 하지만 후대에 왕국의 서기관들이 미처 숨기지 못한 이야기가 성서에 남겨지게 됨으로써(아마도 그들은 다윗과는 관심이 달랐기에 숨길 필요를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윗이 골리앗의 죽음을 자기 공로로 바꿔치기 한 것이 드러났다.
또 곱에서 블레셋 사람과 전쟁이 일어났다. 그 때에는 베들레헴 사람인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을 죽였는데, 골리앗의 창자루는 베틀 앞다리같이 굵었다.
—〈사무엘기상〉 21,19
아마도 다윗은 서서히 힘과 정통성을 확보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점차 남부 부족들의 보호자 노릇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점차 그의 권력은 원시적인 군주제로 이행한 듯하다. 성서는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0킬로 정도 거리의 요새도시인 헤브론을 점령하였고(〈사무엘기상〉 2,1~3), 유대인들이 그를 찾아와서 왕으로 추대했다는 얘기가 나온다(2,4). 헤브론은 황량한 유다 지방에서도 변두리에 속하는데, 유다 족속이 그곳의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은 그리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다윗 집단이 거기에서 독자적으로 일종의 원시적 도시국가를 선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헤브론을 중심으로 하는 소국인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압살롬과 다말의 모친)와 결혼하였다는 것(3,3)은 그가 이곳의 통치자가 되는 과정을 암시한다. 그리고 7년 6개월(〈사무엘기하〉 5,4~5) 후에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사무엘기하〉 5,6~9) 유다, 시므온 지역을 초기 형태의 국가가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2-5] 다윗-솔로몬 치하의 도시들
[그림2-6] 므기또 요새 모형
하지만 예루살렘이 부족연합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국가의 도읍으로 등장했다는 성서의 시나리오는 역사적 개연성이 없다. 만약 그가 부족동맹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국가를 만들었다면 의당 다시 수도를 좀더 북쪽으로, 사마리아 지방의 성읍의 하나로 옮겼을 것이다. 부족동맹사회의 다양한 정치세력을 포괄하기에는 예루살렘은 너무 남쪽에 치우쳐있고, 강한 군대를 효과적으로 유지할만한 많은 재화를 얻기에도 너무 생산성이 낮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윗이나 그의 후계자 솔로몬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예루살렘 인근의 고고학적 발굴물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기원전 11세기 말인 이 시대 다윗의 나라가 대단히 초라한 국가였음을 시사한다.
〈사무엘기하〉의 줄거리에 따르면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왕권을 확고히 한 뒤 정복군주로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갈릴래아를 병합하고, 요르단 동편 지역도 정복하여, 북으로는 페니키아, 북동으로는 다마스커스, 남으로는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편의 모압, 암몬, 남동의 에돔 등에는 다윗의 군대가 주둔했다고도 한다. 하여 다윗의 왕국은 소제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제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요새도시들이 필수적인데, 솔로몬이 건축했다는 도시들(〈열왕기상〉 9,15), 특히 유다 서부의 게셀, 갈릴래아의 므기또, 그리고 상부 갈릴래아 내륙의 하솔 등이 그러하다. 이 도시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비교적 큰 공공건물, 곡식창고, 마구간, 그리고 방성전(防城戰)을 위한 성문 등이 강성하고 잘 짜인 국가의 요새도시다운 면모를 드러냈다.
문제는 이러한 웅대하고 강력한 요새를 가진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은 이보다 훨씬 보잘 것 없는 도시형태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탄소연대측정법을 따르면 이 세 성읍의 연대는 잡아도 다윗-솔로몬의 시대로 추정되는 기원전 11세기 말~10세기 전반기보다 두 세대 정도 후대인 9세기 초 혹은 중반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 성읍들은 다윗-솔로몬 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문헌자료를 통해 살펴볼 때, 이러한 요새를 지었을 법한 통치자로 제일 적합한 이는 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나 아합이다. 특히 이스라엘 왕국은 강대국일 뿐 아니라, 마전차 부대가 유명했다는 점에서 대형 마구간의 존재는 이들과 잘 들어맞는다.
한편 강한 정복국가를 위해서는 요새도시와 군사력 외에도 잘 짜인 관료기구가 필요하다. 아래 [표2-1]은 〈사무엘기하〉에 나오는 다윗의 관료들의 명단이다.
[표2-1] 다윗의 관료들
〈사무엘기하〉 8,16~18 | 〈사무엘기하〉 20,23~26 | ||
군사령관 | 스루야의 아들 요압 |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 요압 |
역사기록관 | 아힐롯의 아들 여호사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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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 아히둡의 아들 사독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 |
| 사독과 아비아달 |
서기관 | 스라야 (〈역대기상〉18,16에서는 사워사) | 서기관 | 스와 |
그렛족과 블렛족의 장관 |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 그렛족과 블렛족의 장관 |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
제사장 | 다윗의 아들들 (〈역대기상〉18,17에서는 ‘왕을 모시는 대신’) | 다윗의 제사장 | 야일 사람 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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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역감독관 | 아도니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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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기록관 | 아힐롯의 아들 여호사밧 |
아무튼 그는 유다-시므온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고, 이 지역의 유력층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 새로운 통치자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래야만 그 사회는 유지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점차로 대중 사이에서도 느슨하나마 공유되는 가치가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이 다윗 메시아 담론의 뿌리일 것이다.
하여 그가 비록 비천한 집안 출신임에도 위기 시에 용맹을 발휘하여 지파를 구원했다는 설화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고 그를 승계하는 통치자가 점점 더 강력한 국가를 구축하게 되면서, 대중 사이에서 그를 ‘민중적 지도자’로 각인하는 기억의 편집과정이 수반되었던 것 같다. 물론 이 명성은 아마도 유대 지역에 국한된 것 같고, 따라서 그는 사울만큼의 카리스마적 이미지를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과장할 수는 없더라도, 그에 대한 대중의 희망은 메시아적 기대와 결합되어 있었다. 그와 그를 추종하는 집단이 생존하는 길이란 약탈이었고, 전리품이 그들의 충분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동족을 포함한 인근 족속들을 약탈하면서 생존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 점은 그의 민중왕적 이미지를 확장시키는 데 장애가 되었다. 한편, 사울은 그가 비상대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부족동맹 전통을 간직하려는 많은 이들에게는 비판의 초점이 되었다. 그래서 다윗 집단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전리품의 전면 소각이라는 헤렘의 전통이나, 전쟁 직전의 승리기원제의 임의적 집전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따라서 사울에 관한 좋지 않은 전승 또한 만만치 않게 유포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고, 현존하는 역사기록의 최종 판본의 초기본이 유다 왕국의 사관에 의해 작성됨으로써, 문서화된 설화의 최종 승자는 다윗이 되었다. 하여 민중왕적 다윗 전승은 공식화되었고, 확대 과장되었다. 반면 사울의 영웅담은 축소되거나 다윗을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되었다. 또 사울에 대한 혐오적 이야기는 다윗과 관련된 것으로 개작되어 확대되었을 것이다. 히즈키야와 요시아 시대 왕실의 서기관들은 이런 방식으로 신화들의 이데올로기적 재역사화를 추진했고, 이런 맥락에서 신학화를 수행했다. 지파동맹 전통의 모세 계약이 다윗 계약에 의해 개정되는데, 그것은 다윗 왕조 이데올로기의 극치다. 이 개정된 계약에 의하면, 모세 계약이 담고 있는 야훼와 이스라엘 간의 직접적인 관계의 신학은, 그 사이에 다윗 가문이 들어가게 되면서, 사실상 모세 계약이 지양하고자 했던 군주제 신학으로 되돌아가 버렸고, 게다가 다윗 가문에 내려진 계약은 무조건적인 축복의 기조를 이룬다. 충성이라는 축복의 담보 조건이 무조건의 축복으로 변형된 것은, 다윗 왕조의 영원한 집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 전승은 대중에겐 더 이상 희망의 전조가 아니었다. 다윗이 희망의 대상이 되기까지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완전히 망각될 만큼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 대중은 다윗과 그의 왕조를 혐오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한다. 그것은 다윗 인생극 속에 반영되어 있다.
다윗 인생극은 끊임없는 족벌간의 형제살해적 권력투쟁, 근친상간, 음모, 암투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스보셋(사울의 아들)의 대장군 아브넬이 자신의 주인 몰래 적성국 지도자 다윗과 협상을 하고, 이 협상 직후, 아브넬은 다윗의 측근 중의 측근인 요압에 의해 암살당한다. 성서에는 요압의 이런 식의 행동을 여러 차례 묘사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결과는 다윗 자신은 이 일에서 무고함이 강조된다. 마치 의도된 음모의 결과이기라도 한 양. 부하의 아내를 가로채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왕은 그 사이에서 난 자식의 죽음으로 다 용서받은 듯이 이야기한다. 그의 아들 암논은 이복동생을 강간하고는 책임지지 않는 모습으로 나오며, 왕은 이를 방조한다. 결국 압살롬이 누이의 복수로 암논을 살해함으로, 그는 제2의 카인이 된다. 압살롬은 공정한 재판을 주장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을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이용한 술책에 불과하다. 다윗은 아들의 칼날을 피해 도망하나, 노련한 술수로 아들을 자멸하게 하여, 자신의 권력을 회복한다. 또 한 번 요압이 악역을 맡아, 요나단을 살해하며, 다윗은 슬퍼하는 행동을 취한다. 그의 왕위가 솔로몬에게 승계되는 과정까지도 치졸한 음모는 계속된다.
다윗 왕조의 검열을 거쳤음에도, 다윗 인생극의 신랄한 냉소는 여전히 노골적이다.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행간을 읽어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아 보인다. 훗날 ‘신명기적 역사가’에 의해 다윗 이야기가 편찬될 때, 다윗 영웅담은 그의 인생극과 한데 섞인다. 전체적인 흐름은 다윗 왕조 찬양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요시아 개혁의 정당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과정에서 인생극의 냉소주의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왕조에 대한 친요시아적 비판의 의도도 있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얘기를 은폐하고는 다윗 이야기를 편찬할 수 없었을 만큼 이것이 대중에게 인기 널리 알려진 스토리였다는 사실이다.
4
다윗의 성공은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지파동맹에서 국가로 이행시킴으로써 집단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만약 그가 실패했다면, 이스라엘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족속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야훼 신앙 또한 명시적인 종교의 세계에서 생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윗의 성공은 동시에 야훼신앙사의 결정적인 왜곡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 또한 망각해서는 안 된다. 야훼신앙은 또 다른 대중 착취의 종교로 자리잡았고, 그것은 지파동맹 시대의 야훼신앙의 결절점을 극도로 증폭시킨 모습을 띤다. 그리하여 그는 민중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었으며, 민중의 종교를 반민중의 종교로 전도시켰다.
훗날 다윗 메시아 대망은 다윗의 이러한 이미지와는 무관하다. 그런 점에서 성서의 다윗 메시아사상은 다윗에 대한 자의적 해석의 결과다. 그것은 다윗의 역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를 희망의 상징으로 재현시키는 대중적 상상력의 위대한 창조성을 보여준다. 이 눈으로 다시 역투영되는 다윗의 이야기는 또 다시 해방의 기호요,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이것은 ‘성공의 미학’에 대한 비판이다. 실패했더라도, 야훼 종교가 명시적인 종교 담론의 공간에서 더 이상 설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민중의 희망 속에 되살아나는 야훼의 암시적 실천을 믿기에, 그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는 자세다.
한편 이러한 재해석의 가능성 속에서도 다윗 인생극의 냉소주의는 희망의 부호 속에 혹 감춰져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권력의 욕구를 들춰낸다. 해방이라는 거대한 기획 속에 희생되는 소수자의 강요당한 침묵을 항변하는 소리로서 말이다. 이것은 성공주의에 대한 비판이 또 다른 성공주의를 지향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니 사실은 종종 그랬기 때문에, ‘비판의 비판’의 소리로서 남아 있고자 하는 것이다.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특히 성공의 신화를 담고 있는 다윗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 자체는 그것을 성공에 대한 비판으로 읽고 있으며, 동시에 비판의 비판으로서의 의미 공간 또한 마련해 놓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읽는 것이 필요할까? □
※ 성서 읽기로서의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
1936년 발표된 이 소설은 포크너의 대표작으로, 산업화의 격변을 겪고 있던 1930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저자의 첨예한 시대 읽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의 전체 스토리는 토마스 썻펜이라는 40년 전 사람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세 차례에 걸쳐 여러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의 연쇄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의 시간적 무대는 1909~10년이다. 이때 화자들은 썻펜의 이야기를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재구성하고 의미를 재현한다. 또한 그들의 경험은 급속한 산업화와 전통이 한데 뒤얽혀 복잡하게 상호 접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벌어진 역사화된 개인의 체험이다.
이들의 대화 속에 드러나는 쎗펜의 스토리는 대충 이렇다: 가난한 하층민 백인 썻펜은 그의 가난으로 인해 겪은 무수한 계급적 차별을 겪는데, 특히 대농장 정문에서 흑인 하인에게 쫓겨난 기억은 그의 모든 계급적 적개심을 집약시키고 있다. 계급문제가 인종문제로 투사된 것이다.
이런 굴욕감을 넘기 위해 이를 악문 썻펜은 남부의 요크나파토파 카운티의 제퍼슨 마을에 당도해서 물불가리지 않는 노력으로 드디어 그의 웅대한 ‘왕국’을 건설한다. 그런데 그에게는 헨리라는 아들과 주디스라는 딸이 있었다. 그런데 주디스가 사랑한 남자 찰스 본이 실은 썻펜의 또 다른 아들이었다. 헨리는 이러한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깊은 숙고 끝에 둘의 사랑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또 하나의 장애물이 헨리의 복잡한 심사를 뒤흔들어 놓는다. 외모로는 거의 확인할 수 없었지만, 찰스 본에게는 1/8의 흑인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헨리는 찰스 본을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이 살해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썻펜의 왕국은 몰락하고 만다.
남북전쟁 이후 본격화된 것은 인종 분리 정책의 철폐가 아니라 산업화의 급진전이었다. 사회는 바야흐로 급속히 변모하고 있었고, 이는 무수한 계급적 문제를 양산하고 있었다. 또한 세대 간의 문제, 성의 문제 등이 현실을 더욱 복잡하게 꼬이게 하였다. 그런데 이 모든 사회적 모순과 갈등은 인종적 적대감으로 표출되고, 이것은 근대화의 한 가운데서 가장 성공을 거둔 한 가문에서 벌어진 형제살해를 경유하면서 그 소용돌이 속에서 몰락을 가져왔다. 압살롬, 압살롬! 절규하는 아버지 다윗의 울부짖음은 1930년대 몰락해 가는, 적대감 가득한 사회의 고통의 목소리였다. □
장군의 아내
바쎄바, 우리야와 다윗 사이, 혹은 다윗과 솔로몬 사이
1
양귀자의 소설 《모순》은 안진진이라는 결혼을 앞둔 25세 여성의 1년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서 스토리는 그녀가 결혼 상대자를 택하는 그 모순적 선택에 이르는 삶의 미스테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을 테마로 하는 냉소주의적 기풍이 작품 전체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삶의 깨달음과 삶의 선택은 모순 관계라고.
이 소설은 사랑에 관한 삶의 선택을 냉소하기 위한 장치로 이분법적인 인물 배치를 설정한다. 우선 일란성 쌍둥이인 어머니와 이모. 이들은 단지 10분 차이로 언니와 동생이 되었을 뿐, 똑 같이 생긴 서로의 분신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억척스럽고 매사에 공격적인 여인네로 변모해 간다. 인생이 매순간순간 격동적인 변화의 연속이며, 그 변화 속에서 그녀는 번번이 죽음과도 같은 절망의 늪으로 내동댕이쳐진다. 그러나 마치 부활이란 이런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때마다 삶의 능동성을 발견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안진진의 어머니의 삶이다.
이모는 소녀 같은 감수성으로 인생의 생명성을 관조하는 수동적 여성이다. 풍요롭고 단란한 가족, 여유에서 오는 격조 있는 문화의 소비, 언니와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 그녀의 삶을, 운명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무수히 반복되는 일과표와 같은 인생, 비약이나 전복 없이 단지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기만 하는 꼬마병정과도 같은 삶, 그녀에겐 이 모든 것은 무료함과 권태로만 인식될 뿐이었고, 그러한 운명의 주문에서 잠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라곤 풍파 많은 언니네 가족을 엿보는 것이 전부다. 이모는 언니의 삶을, 그 역동성을 동경하는데, 어머니는 동생의 난초 같은 품위 있는 안락, 그 관조의 삶을 질투한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적인 운명의 갈림의 계기는 결혼이었다. 단지 태어난 10분 차이로 말미암아 순서 매겨진 것일 뿐, 애초에 사랑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짝지어진 남편들과의 만남, 바야흐로 이 만남에서 두 쌍둥이 자매의 극단적 인생의 갈림길이 펼쳐진다. 언니의 남편, 그러니까, 안진진의 아버지는 안주할 수 없는 격랑의 인물이다. 폭행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주벽, 결국 직장도 잃고 건달 생활에 돌입한 그는 기어이 부랑자로 전락하여 행불자로 가족으로부터 말소된 존재가 된다. 소설 말미에 중풍과 치매에 걸린 채로 귀환한 아버지, 그러나 정신이 가끔씩 되돌아올 뿐인 그는 여전히 안주할 수 없는 떠돌이다. 반면 이모부는 연착조차 허용하지 않는 기차와도 같은 사람이다. 언제나 계획된 시간표에 따라 행동하고, 차근차근 쌓이는 삶의 획득물에 존재의 의미를 다 걸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상이 반복되는 한 결코 부재할 수 없는 존재로서 이모의 인생에 개입되어 있다.
세 번째로 대조되는 인물은 안진진의 두 애인. 나영규는 이모부를 빼어 닮은, 안정을 선사해줄 만한 남성으로, 모든 면에서 적극적이고 계획적이다. 이 남자의 사랑의 대상은 안진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계획이라는 액자 속에 그려진 ‘진진(眞眞)’의 이미지다. 부재하는 아버지를 품고 있는 안진진과는 전혀 다른, ‘진진이가 아닌’ 진진이의 이미지. 한편 또 다른 남자 김장우는 안진진의 가슴 속에 품어 있는 동경의 대상인 아버지의 재현이다.
그렇다. 현실 속에서는 끝내 부재하는 아버지, 그러나 그는 안진진의 가슴 속에서 실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김장우를 사랑했다. 아니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분신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타인 앞에선 이모를 어머니로 부르고 싶은 욕망을 가진 그녀는 나영규 또한 포기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그 기획에 따라 모든 것을 채워주려는 나영규와 만날 땐 그에게 몸을 맡긴 채 그의 계획에 순응한다. 하지만 김장우를 만날 땐 그녀는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을 실행하며 관계를 이끌어간다. 김장우에게 마음을 맡긴 채.
팽팽하던 저울이 점차 김장우에게로 기울고 있다. 그 절정의 시간에 마치 선택의 종지부를 찍으라고 윽박지르기라도 하듯 다가온 엄청난 소식. 이모의 자살은 나영규의 선물이 말짱 헛것에 불과한 것임을 결정적으로 공포하고 있다. 안진진의 최종 선택은, 그런데, 나영규다. 이런 역설이 있는가? 삶의 깨달음이 달음질하는 방향과는 전혀 엉뚱하게 그녀의 사랑의 선택은 종결된다. 바로 이것이 삶의 선택의 ‘모순’이겠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만큼 무수한 기회를 맞이하면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회란 의도한 만큼 주어지는 연속적인 인생 노정 위의 신호등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연속되는 공간을 뛰어오르는 할주로의 비상점(飛上點)과도 같다. 달리다 날아오를 수도 있지만, 실패하면 종종 달리는 관성에 앞으로 나뒹굴 수도 있다.
기회가 삶에서 선택의 비약점이라는 것은, 그것이 계획의 단순한 소산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유독 어떤 사람은 기회를 잘 잡는다. 그리하여 이른바 세속의 성공적 가치를 충족시킨다. 계획한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예상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누군가는 기막히게 그 기회를 잘도 이용한다. 만약 세상에 한 가지 가치만 존재한다면, 기회는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고, 그 기회를 잘 이용한 자는 성공한 자로서 길이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성공’을 동경하며, 그것을 향한 삶의 질주를 욕망할 것이다. 또한 누군가의 ‘실패’를 반추하며, 추락의 삶을 저주하곤 한다. 사실은, 세상은 이러한 보편적인 성공, 공인된 성공의 기준을 갖고 있다. 비록 시대마다 그 기준이 조금씩 바뀌기는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성공 예찬적 지혜의 체계도 발전하게 된다. 이 지혜는 기회를 만났을 때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성공의 가치를 추구할 것을 권고하는 지혜다. 비약의 지점이 존재함에도, 그것에 무감각하여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과거와의 연속성에만 몰두하는 수동적인 관조자, 흔히들 ‘순정파’라고 부르는 그러한 삶의 자세를 조소하는 지혜다.
소설의 안진진처럼 삶의 허무성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여성, 그래서 순정이니 희생이니 모성성이니 하는 것들의 덧없음을 20대에 이미 알아버린 여인. 이런 것들에 대한 그녀의 냉소는, 냉소주의적인 지혜는 그래서 훨씬 더 타산적이다. 물론 갈등은 한다. 자기 혈관 속을 흐르는 순정파적 운명의 부름을, 그 부름에 대한 그녀의 친숙한 정감을 그녀 또한 알고 있다. 또 세상의 경험은 그러한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 단순하게 실패로 귀결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도 해 준다. 그러나 결국 계산하는 자신에 복종한다. 냉소자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기회의 적극적인 향유자가 된다.
그런데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자든, 단지 과거에만 집착하는 삶의 수동적 관조자든, 그들에게는 공히 성공과 실패라는 보편적인 이분법이 작동한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보편적 기준에만 집착하면서, 전통을 고수할 것인지 미래를 욕망할 것인지를 결정하려고만 한다. 이분법적인 가치의 갈등 속에서만 자신의 선택의 지점을 고수하려 한다. 그 이분법으로부터의 탈주 자체를 고려하려 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 우리는 필시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했을 한 여성, 그러나 언제나 전통적이고 인습적인 삶의 순환고리 속에 남아있기보다는 다가온 기회를 보다 더 ‘성공적’인 기획의 계기로 쟁취한 여인에 관한 얘기를 보게 된다.
바쎄바! 우리는 그녀를 〈마태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의 족보에서 발견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인들(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마리아)이 한결 같이 규범적 질서에서 단순히 아름답게 포장되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여성신학자들을 포함한 비판적 신학자들의 적지 않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아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빈약한 정보 탓에 족보만으로 충분한 해석을 내리는 것은 어려움이 많다. 아무튼 무수한 여인들 가운데 예수와 연관된 몇 안 되는 존재의 하나로 기억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바쎄바에 대한 인식은 그리 나쁘지 않다.
아마도 예수와 다윗을 연결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 같다. 본문이 그녀를 이름으로 기억하기보다는 ‘우리아의 아내’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은 필경 하나의 약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중은 그녀를 이름으로보다는 비운에 숨져간 우리아의 비극적 운명과 결부시켜 기억하고 있었기에 부득이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다윗의 여러 부인들 가운데 하필 그녀가 선택된 것은 그녀가 다윗을 승계한 솔로몬의 어머니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예수와 다윗을 연계시킨 가장 결정적인 동기가 메시아를 왕적 지위로 격상시키려는 신앙적 열망을 충족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와 같이 바쎄바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소외된 존재는 아니며, 또한 유대교 신앙사에서도 간과된 여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서 본문이 전하는 설화의 내용에 비하면, 신앙사의 궤적에 남겨진 것 자체가 단지 솔로몬의 모친이라는 사실, 즉 왕실 사가들의 전폭적인 기억하기의 소산일 거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바쎄바 설화를 왕실 사가의 손에서 빼내려고 한다. 따라서 솔로몬과 연계됨으로써 억지로 위상이 규정된 신앙사적 의미부여로부터도 구출해내려 한다. 오히려 우리는 다윗의 후궁이나 솔로몬 왕실의 대왕대비(大王大妃)보다도 우리아의 아내로 그녀를 기억해 왔던 대중의 기억술 속에 담겨 있었을지 모르는 이야기의 정서를 추정해보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설화적 상상을 우리 시대의 삶의 선택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추론해볼 것이다.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소설 《모순》은 우리가 바쎄바의 텍스트를 읽는 상상력의 단서로 활용될 것이다.
2
성서는 이 여인에 얽힌 두 개의 설화를 보존하고 있다. 하나는 그녀가 다윗의 후궁으로 입적하여 솔로몬을 출산하게 된 경위에 관한 것이고(〈사무엘기상〉 11,1~12,25), 다른 하나는 솔로몬의 즉위 경위에 관한 것이다(〈열왕기상〉 1,1~2,25).
우선 첫 번째 얘기를 보자. 〈사무엘기상〉 11~12장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고 이야기를 재현하면 이렇다. 당시는 다윗이 암몬을 정벌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암몬은 요르단 동편의 야뽁강 상류 지역의 소국으로 다윗 군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무엘기하〉 10,6~19에서 보듯이 시리아-다마스커스의 소바 왕국(하닷에셀)이 다윗을 견제하기 위해 이 전쟁에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정세상 그리 만만한 전황은 아니었다. 10장과 11장의 이야기의 선후 관계를 추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다윗 군은 치열한 전투를 거듭한 끝에 시리아 용병을 격파했고, 암몬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야는 헷 족속 출신의 다윗 용병 대장이다. 〈에제키엘서〉 16,3을 유념한다면, 우리야는 소아시아 지역 출신이라기보다는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헷족(히타이트 족 Hittite) 3 출신 용병이었던 것 같다. 그가 전장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 바쎄바는 월경을 마치고 정결의례를 치루고 있을 때 옥상을 거닐던 다윗의 눈에 띈다. 여기서 우리는 바쎄바가 다윗의 눈에 들게 하려고 모종의 의도된 행위를 벌였다는 증거를 포착할 수는 없다. 오히려 본문이 묘사하는 이야기의 분위기상 아마도 다윗의 즉흥적인 욕정을 불러일으킨 바쎄바의 목욕 장면은 우연의 일치인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그녀의 행위가 설사 의도된 것이라 하더라도, 전쟁에 보내진 부하의 아내를 불러다 통간한 것은 어떤 의미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더구나 바쎄바가 임신한 것을 은폐하려고 취한 그의 처신, 결국 충성을 다하는 부하를 죽이는 음모를 꾸미는 데까지 이르는 왕의 모습은 졸렬한 치한을 넘어서 추악한 범죄자의 몰골로서 드러날 뿐이다.
한편 바쎄바는 다윗의 눈에 들게 된 것을, 그 기회를 적극 활용한다. 사실 군인의 아내란 그리 행복한 운명을 선사받은 이가 아니다. 끊임없이 벌어지는 다윗의 전쟁에 참전해야 하는 남편은 그 목숨을 언제나 주인의 손에 담보로 걸어놓은 상태였다. 허구한 날 출병으로 빈집을 지켜야 했을 여인, 더구나 전쟁을 앞두고 부정탈까봐 엄격한 절제를 하는 타고난 군인의 아내인 여인, 기껏해야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이었을 그녀의 이런 나날은 비록 배곯은 처지는 아니었을지라도 참으로 권태로운 하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이방인이자 군인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집안이 그리 여유로운 혹은 품격 있는 삶을 영위한 처지가 아닌 상황이었음을 암시한다. 어쩌면 결혼에서 그녀는 빚에 찌든 가문의 지긋지긋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 집안의 가부장은 그런 기대를 가지고 딸을 용병 대장에게 넘겼을 것이다. 아니면 타고난 미모 탓에 군인의 눈에 든 하층 여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쎄바는 결혼을 통해서 결핍된 많은 것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고통의 조건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죽음을 상상했을 수도 있다. 그만큼이나 답답한 하루하루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활짝 피어오른 육체의 감수성을 은폐하며 보내기엔 20대 안팎의 연륜은 너무 짧았다. 더구나 또래의 다른 여성에 비해 육체에 자랑할 것이 넘치는 여인에게, 그것도 정상적인 가훈 교육을 받지 못했을 여인에게, 긴긴 기다림의 나날을 몸단장하는 것 이외에 다른 소양을 연마함으로 보낸다는 건 별로 신통한 대안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왕이 그녀를 찾는다. 본능적으로 남성의 유혹을 직감한다. 왕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한편으론 호기심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멀리서 곁눈질로 보기만 했던 왕, 그 앞에선 모든 장군들도 다 머리를 조아린다. 또 그는 전쟁터에 나가는 게 아니라, 전쟁에 나가라고 명령하는 이다. 날마다 만날 수 있고, 그가 원하는 한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 그런 이의 유혹을 받다니...
월경 직후여서인가 바쎄바는 임신을 했고, 왕은 당황한다. 자신의 품위가 손상될 것이 두려웠다. 필시 많은 참모들이 바쎄바를 제거하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제거하기엔 너무 아리따웠나보다. 도리어 왕은 우리야 장군을 제거하기로 선택했다. 음모에 의해 그가 전사하자, 곡하는 일정기간을 보내고 즉시 바쎄바를 후궁으로 들인다. 하지만 부하의 미망인을 후궁으로 들이는 게 무리가 되지 않을 리 만무다. 요압 대장군의 용의주도한 처리에도 불구하고, 소문은 널리 퍼져나갔고, 왕의 처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비등했다. 나단 예언자의 발언으로 극에 이른 비판적 여론에 다윗은 몹시 난처한 상황에 몰렸다. 그러나 여기서도 바쎄바는 살아남는다. 다윗과 바쎄바의 간통죄를 대속한 것은 그들 사이에서 난 아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걸까? 아무튼 아기의 죽음은 다윗과 바쎄바의 정치적 위기를 해소시켜 준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두 번째 아기가 태어난다. 솔로몬이 바로 그다. 다윗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인과 그 여인의 아들, 이것은 다윗 왕실의 화근거리임에 분명하다.
〈열왕기상〉에 묘사된 바쎄바에 관한 두 번째 일화는 아들 솔로몬의 즉위에 관한 것이다. 다윗이 늙어 직무를 처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권력 암투로 죽은 윗대의 아들들(암논, 압살롬 등)을 빼면 생존한 적장자는 아도니야 뿐이다. 왕실이나 대부분 고관들의 후광을 등에 업은 그는 아마도 일부의 정무를 담당하는, 일종의 공동통치자가 되었던 모양이다. 요압 대장군과 대사제 에비아달(아비아달―새번역) 등이 그의 집무를 도왔다. 바로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신주류가 형성되어 포스트 다윗 시대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 집단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졌는지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 지파동맹적 전통과 군주제적 대안을 절충하고자 했던 대표적 이론가인 에달아달이라는 인물에서 그것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요압 또한 유다 지파 출신이라는 점에서, 비록 그가 유식한 사상의 해석 과정에 참여하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음에도, 지파동맹 전통에 다른 이들보다는 좀더 친화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이러한 신주류의 이데올로기는 아도니야의 부상과 더불어 정권에서 소외된 비주류의 면모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사독 제사장은 에비아달과 경쟁관계에 있는 인물인데, 그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다윗 정부 내에서 일찍부터 비이스라엘 계의 통합을 담당했던 자였다. 4 또 대장군 브나야는 항상 요압에 이어 군부의 제2인자였으나, 다윗 부대의 가장 용맹한 부대인 외인부대를 장악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방인 용병 출신이었고, 그것이 요압에게 밀리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그는 생각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오랫동안 다윗의 가장 측근에 있던 인물 나단이 있었다. 그는 예언자였는데, 그의 사상적 위상을 측정할 만한 정보가 전혀 없다. 단 다윗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이로서 그의 선택을 가장 효과적으로 변증해주는 명망 있는 종교지도자였으리라는 점만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이상의 비주류로 밀린 인물들의 면모(나단의 경우에는 불명확하지만)는 신주류의 이데올로기적 취향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게 한다.
다윗 이후를 준비하는 아도니야 블록의 활동에 대해 위기를 느낀 비주류들이 솔로몬을 중심으로 뭉친다. 여기엔 나단과 바쎄바가 다윗과 이들을 연계시키는 역할을 당당했던 것 같고, 사독과 브나야가 그렛 부대와 블레셋 부대 등, 다윗의 근위대 역할을 하는 용병부대 주력을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늙어 사리판단이 흐려진 다윗의 칙령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이들 솔로몬 일파는, 그것을 명분 삼아 대신들의 검증이나 지방 장로들의 추인도 거치지 않은 채 왕위 승계를 선포한다. 그리고 군부의 힘을 빌어 왕실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로써 아도니야 일파의 이스라엘적 기획은 일거에 무너져버리고 만다. 이제 다윗 왕국은 전통의 견제를 덜 받으면서 보다 더 전제군주적 국가로의 길을 가게 되었다.
[표2-2] 아도니야와 솔로몬의 정파
아도디야 파 | 솔로몬 파 |
• 요압(군대의 대사령관. 이스라엘 계 군대의 사령관) • 에비아달(사제. 이스라엘계)
| • 브나야(외인부대와 벨렛부대의 사령관, 비이스라엘 계 군대의 최고 지휘관) • 사독(사제. 비이스라엘계) • 나단(예언자) |
만약 아도니야가 즉위한다면, 이제 그녀의 시대는 끝장나버린다. 아니 아들 솔로몬도 어찌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열왕기상〉 1,11 이하를 보면 솔로몬을 옹립하는 궁중쿠데타는 나단이 바쎄바에게 귀띔해 줌으로써 시작한다.
우리의 왕 다윗 임금님도 모르시는 사이에, 이미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혹시 듣지 못하셨습니까? 제가 이제 마님의 목숨과 마님의 아들 솔로몬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좋은 계획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서 다윗 임금님께 들어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임금님, 임금님께서는 일찍이 이 종에게 이르시기를, 이 몸에서 난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임금님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될 것이며, 그가 임금님의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맹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습니까?' 마님께서 이렇게 임금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계시면, 저도 마님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마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1,11~14
[그림2-9] 다윗에게 아도니야를 밀고하는 바쎄바
이제 그녀는 생사의 귀로에 놓인다. 다윗이 아직도 자기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더 이상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 그랬다간 아도니야가 왕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자기와 아들 솔로몬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단의 충고대로 다윗에게 솔로몬의 왕위승계를 간언하는 게 최선일지, 그건 확신할 수 없다. 그토록 오래 살았건만 남편의 속 꿍꿍이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오래전 압살롬을 견제하기 위해 암논을 이용했다는 시종의 얘기를, 궁중의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압살롬이 부왕(父王)의 생각을 꿰뚫고 묘책을 발휘해서 암논을 죽이고도 살아남게 되었다는 소문에 그녀는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다윗과 압살롬의 절묘한 경쟁을 보면서, 어린 아들(솔로몬)의 생명을 지켜낸다는 게, 더구나 왕위를 승계하게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했었다. 한데 압살롬이 죽은 지 한참 지난 이젠, 아도니야가 문제였다. 더구나 요압, 에비아달 등 최고 참모들이 아도니야를 비호하면서, 병들어 누운 아비를 제치고 왕처럼 행세하고 있다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이미 대세가 결정되어 버렸다면 나단의 말을 섣불리 믿고 행하는 게 도리어 화를 자초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나단의 충고를 따라 다윗을 찾아가서 밀고한다. 엄청난 음모를 도모했고, 결과적으로 황모의 자리에 올랐으며, 별다른 위업을 이룬 것으로 기억되지 않음에도 길이길이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3
바쎄바의 다른 행적에 관하여 우리는 아는 게 없다. 또 그녀의 성품에 관하여도 아무 것도 말할 게 없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 그녀는 분명 보기 드물게 적극적인 삶을 산 여인이다. 더구나 왕실 규방 속에서 이런 여인을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여인. 물론 그 모든 기회를 처음부터 홀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위기들을 그녀는 놀랍게도 비상의 계기들로 창조해냈다. 그 적극성에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밀한 계산과 비정함이 포함된다. 이런 사람들은 통칭 ‘착한 사람들’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여성에게서 이런 속성은 전형적인 ‘악녀’ 혹은 ‘팜므파탈’의 기질로서 받아들여졌다. 다만 바쎄바가 그러한 오명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은 그녀가 커다란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놀라운 성취에도 전승은 다분히 냉소적 자취를 도처에 풍기고 있다.
컨대 남성 중심적 편견이 여기에도 작동하고 있다. 여전히 여성은 헌신과 사랑과 희생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물리칠 수 없다. 여전히 여성은 다소곳한 소극성을 품성으로 지녀야 한다는 계율 아래 묶인다. 순종의 미덕을 가진 여인이 아닌, 그러한 인습적 편견에 반기를 든 여성, 그녀의 성공은 심지어 여성 자신으로부터도 폄하의 대상이 되곤 한다. 만약 우리가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성서를 읽을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성서 자신의 곡해된 읽기를 해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우리는 바쎄바가 보여주는 모습에서 또 하나의 문제를 읽을 수 있다. 또 다시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여인/인간. 일반적으로 추구되는 성공-실패의 이분법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순응하는 실패자로 남아있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성공을 이루어내는 것, 그러한 삶의 자세가 바쎄바에게서 여실히 드러난다. 성공-실패의 이분법을 넘어,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차단된, 그리하여 결국 지배적인 인습적 가치의 틀을 더욱 견고하게 할 뿐인 인생 여정, 바로 이 점을 우리는 비판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더욱이 소설 《모순》의 안진진처럼 바쎄바의 선택은 항상 남성을 전제로 한 선택이다. 그녀의 성공과 실패는 어떤 남성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면 그 적극적 선택의 행위란 도대체 적극적인 행동 주체인 자아인가 아니면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자아인가? 여전히 성의 이분법, 성을 둘러싼 가치의 이분법의 노예인 인간만이 보일 뿐이다. □
- 일반적으로 가자, 가드, 에크론, 아스켈론, 아스돗의 가나안 남서부 해안 지역의 5개 부족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 이데올로기적으로 에프라임은 부족사회의 반 왕권적 지향을 고수하려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었던 듯하며, 베냐민은 군주제사회로의 이행을 선도했던 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창세기〉의 설화에 의하면, 노아의 아들 함의 네 명의 아들 가운데 하나가 가나안인데, 그에게서 헷 족속이 나왔다고 한다. 히타이트 족이라고도 하는 헷족은 지금의 터키지역에서 형성된 국가로, 앙카라 근처의 핫투사를 수도로 한때 메소포타미아(비옥한 초생달)와 이집트를 정복했던 대제국이었다. [본문으로]
- 〈역대기〉의 족보는 그가 아론에서부터 유래한 사제가문 출신으로, 아히툽의 아들이라고 한다(흥미롭게도 역대기의 족보에는 엘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무엘기〉에서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아히툽이 사울의 사제였던 아히야의 아버지이며, 에비아달의 할아버지라는 점에서, 사독은 에비아달의 삼촌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의심을 남긴다. 우선 아히야나 아히멜렉과 동급의 항렬이고 에비아달보다는 윗대임에도 그가 등장하는 것은 한참 뒤인 예루살렘 정복 이후에야 나타난다는 것이 의아하다. 게다가 〈사무엘기상〉 2,27~36과 〈열왕기상〉 2,26~27은 사독 가문이 엘리 계열을 대체하여 사제직을 맡은 것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독이 엘리 가문 출신일 가능성은 많지 않다. 또한,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솔로몬과 아도니야의 다윗 후계권 투쟁에서 주로 비이스라엘계 출신의 지지를 받던 솔로몬의 주요한 지지자로 등장한다는 점은 그가 비이스라엘계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흥미롭게도 ‘사독’이라는 단어의 어근은 제1성서(=구약성서)에서 유일하게 예루살렘과 결부되어 나타나고 있다. 가령 〈창세기〉 14,18~20에 나오는 살렘왕 멜기‘세덱’, 〈여호수아기〉 10,1~5의 예루살렘왕 아도니‘세덱’이 그런 경우다. 그렇다면 그는 성읍국가였던 예루살렘의 사제였던 것이 아닐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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