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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강좌

이스라엘왕국과 유다왕국 - 성서 설화 대 역사의 흔적들

신학아카데미 탈/향 2009년 가을 강좌 '역사로 읽는 성서 II - 부족사회와 군주제 사회 야훼신앙의 역사'의 셋째마당(2009.11.05) 강의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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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왕국유다왕국

성서 설화 대 역사의 흔적들

 

 

 

통일왕국(?), 그것은 없었다!

 

역사는 지난 시대의 모든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역사라는 채에 걸리려면, 동시대의 엄청나게 높은 경쟁의 벽을 뚫고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 드높은 장벽을 넘어선다 해도, 대부분은 하찮은 조역이나 단역에 그친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주연급 배역을 맡을 뿐이다. 1성서에서 주연급 배역으로 두드러진 인물을 들라면,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등을 꼽을 수 있으리라. 또 주류적 담론에서는 다소 소외되었지만, 대중 사이에선 열렬히 환영받았던 대중스타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엘리야다.

한데 주역은 악역이 있음으로 해서 더욱 빛난다. 그리고 어떤 악역은 다른 악역들보다 분량에서나 비주에서 훨씬 중요하게 다뤄지기도 한다. 그 중 대표적인 이를 뽑으라면, 아마도 여로보암 1세가 두드러진다. 물론 성서를 읽는 우리들에겐 그리 주목받는 독자들이 뽑은 악역의 대중스타는 아니지만, 성서 편찬자들에게선 그 누구보다도 가장 빛나는 악역의 스타다. 왜냐하면 그에 관한 묘사도 길뿐 아니라 그가 사라진 이후에도 두고두고 그는 악의 상징으로 다른 악역의 존재들을 평가하는 잣대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왜 그렇게 악마적 존재로 묘사되었을까? 그리고 실제의 인물 여로보암을 재구성할 수는 없을까?

우선 제1성서의 설화에서 그는 왕국형성사에서 나타난다. 사울의 왕국이 다윗에 의해 대체되고,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은 이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만큼 강력한 국련과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국가를 이룩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유일한 통일왕국이다. 한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부역관리책임자였던 여로보암이라는 이가 유다지파 이북의 11개 지파를 이끌고 나라를 만들어 이스라엘을 창건했다. 하여 유다와 이스라엘이라는 두 왕국 역사가 계속된다, 이스라엘왕국이 먼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유다왕국은 바벨로니아에 의해 멸망하게 됨으로써 왕국 역사는 종식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여로보암은 다윗-솔로몬의 통일왕국이 분단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며, 나아가 이스라엘 멸망의 근원적인 책임을 지어야할 존재로 묘사된다. 왜냐하면 왕국을 분단시킨 후 그는 자기 백성들이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게 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서 왕국의 남(베델)과 북() 끝부분에 성서를 세움으로써,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야기시켰다는 것이다. 하여 이 나라의 모든 왕들은 예외 없이 이러한 여로보암의 죄를 되풀이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의 설화가 과연 얼마나 역사적으로 개연성이 있을까? 물론 이는 유다, 특히 요시아 왕대의 신명기적 사관들의 역사적 개작의 소산임은 말할 것도 없다.

큰 틀에서 왕국사가 부족연합의 법통을 잇는 사울왕국그것의 법통을 잇는 확대된 통일왕국으로서의 다윗-솔로몬 왕국다윗왕국의 법통을 잇는 유다와 잘못된 역사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서사는 역사적 개연성이 없다. 무엇보다도 다윗-솔로몬 대의 위대한 역사에 대한 상상은 고고학적으로나 문헌해석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상상일 뿐이다.

말했듯이 다윗-솔로몬 시대의 수도 예루살렘은 작고 보잘것없는 변방의 도시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 강력한 국가가 되기 위해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는 문헌적 기록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고, 웅대하고 강력한 성채(하솔과 므깃도, 게셀 등)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사무엘기하열왕기상이 묘사하는 강력한 지방요새들은 다윗-솔로몬 시대의 것이 아니라, 보다 후대의 북왕국의 왕들(오므리왕조)의 것들이다. 광활한 국경도 오므리왕조나 여로보암 2세 시대의 북왕국의 영토를 반영한다. 오므리왕조 당시 남왕국은 일종의 북왕국의 속국이었으므로 오히려 오므리왕조가 통일왕국의 장본인일 수 있다.

그러므로 통일왕국 다윗-솔로몬 가설은 역사적 개연성이 없다. 그렇다면 사울왕국다윗-솔로몬의 통일왕국분열왕국이라는 도식 자체가 붕괴하게 된다. 아마도 에프라임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사울왕국이 존재했고, 그 뒤에 여로보암이 이끄는 이스라엘왕국이 보다 본격적이고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했던 듯하고, 그 주변지역인 유다 산지에 작은 소국형태의 왕국이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다왕국은 다윗설화라는 국가 창건신화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대안적 역사틀로 보면 여로보암은 다윗-솔로몬에 반발한 국가의 창건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전통을 재해석하여 국가로 발전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여로보암

 

1) 열왕기상 11,14~40을 읽고 다음 물음에 답하시오.

솔로몬 시절 다윗-솔로몬의 제국에서 이탈해간 종족들/지역과 그 지도자를 이야기하시오.

여로보암의 개인 신상에 관한 정보를 이야기해 보시오.

여로보암이 망명하게 되는 경위는?

 

2) 열왕기상 12,1~19을 읽고 다음 물음에 답하시오.

경과를 이야기해 보시오.

르호보암은 왜 세겜 회합에 참석했는지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야기해 보시오.

다윗 왕조와 회의 참석자들간의 갈등의 핵심은?

여기서 여로보암의 역할은?

 

3) 열왕기상 12,20~33을 읽고 다음 물음에 답하시오.

여로보암이 취한 종교개혁 조치 세 가지를 이야기해 보시오.

여로보암이 그러한 조치를 시행한 실제 이유는 무엇일지 이야기해 보시오.

 

다음에 첨부된 글 여로보암건국의 영웅인가 왕국사의 악의 화신인가?을 참조.

 

두 왕국

 

두 왕국 연대표는 열왕기를 중심으로 해서 대조표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성서의 왕조 비교연대가 자명하게 대조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좀 더 복잡한 연구가 필요하다. 나의 대조연대표는 이에 관련해서는 헤이스와 후커의 연구에 많은 부분 의존하여 작성한 것이다.[각주:1] 성서의 연대기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실역대기를 자료로 했다고 하는데, 이들 자료는 현존하지 않고, 별개의 두 왕실 연대기를 대조하는 데서 신명기사가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했는지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대조연대기는 충분한 정확성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략적인 연관성을 추정하는 정도로만 제한해서 사용하는 것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서 불가피하면 또 매우 유용하다.

한편 두 왕국의 연대를 우리가 사용하는 서력기원 연도로 환산하는 것은, 두 왕국의 역사가 제국의 역사와 엮이면서 제국의 비문에 등장하는 경우를 기준점으로 하여 계산한 결과이다. 가령, 오므리 왕조의 두 번째 왕인 아합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12개국 연합군에 참여하여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858~824 BCE.)와 맞서 싸웠다는 기록이 살만에셀이 세운 모놀리스 비문에 새겨있다.[각주:2] 이때가 살마네셀 재위 6(853~852 BCE.)이고, 아합은 제위 15년 되던 해로 추정된다. 그 시점을 포함한, 몇 가지 환산 가능한 연대를 조사해서 이를 기준으로 앞뒤 연대를 환산한 것이 바로 이 도표의 연대인 것이다. 또 살만에셀이 제5차 서방원정(841 BCE.)을 하고나서 세운 블랙오벨리스크에는 예후가 살만에셀에게 항복을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 또한 연대설정의 기준점이 된다.



유다와 이스라엘 왕정의 연대표(글 뒤에 첨부)에서 주목되는 것은 유다왕국에는 유난히 공동통치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한편 연대표만으로는 나오지 않지만, 유다는 왕조가 존속한 344/5년 동안 한 혈통의 왕조가 지속된 반면, 이스라엘은 반세기나 짧은 208/9년 동안 9번이나 왕조가 바뀌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왕조를 무너뜨린 쿠데타만 여덟 번이나 이스라엘에서는 있었는데, 유다왕국은 단 두 번에 그친다. 한편 왕위 재위기간도 이스라엘이 11.4/11.5년이고, 유다는 17.2/17.3년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만 계산해도 유다는 평균 17.3/17/4이다. 이러한 사실들만을 고려하면 이스라엘보다 유다가 훨씬 안정된 체제를 유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표3-1] 유다왕국과 이스라엘왕국, 몇 가지 통계 

 

존속기간

평균재위기간

이스라엘멸망까지

평균재위기간

공동통치 횟수

성공한 쿠데타

이스라엘왕국

208/9

11.4/11.5

 

1

8

유다왕국

344/5

17.2/17.3

17.3/17.4

6

2


하지만 국력의 관점에서 보면 사정은 전혀 다르다. 우선 영토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훨씬 넓고 풍요로운 곡창지대가 많은 반면, 유다의 영토 거의 대부분은 스텝지역이고, 인구밀도도 희박하며, 크기도 훨씬 적다. 국제관계사의 차원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인데, 앞서 말했듯이 아합왕 당시 이스라엘은 시리라-팔레스티나의 패권국가로서 아시리아의 동진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군사강국인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하는 아람 왕국과 이 지역의 패권을 두고 지속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한편 동쪽의 암몬과 모압, 그리고 남쪽의 유다 등은 종종 조공을 바치는 예속국의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되는데, 이스라엘의 요새들인 므기또나 하솔 등을 조사해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이 얼마나 강성한 국가였는지가 입증된다. 거주지 유적을 통해 추산한 인구도 대략 35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숫자는 시리아-팔레스티나 전역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조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국제무역에 있어서도, 그리스, 키프러스, 페니키아 등과 교류관계에 있었다는 증거물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 반면 유다왕국은 이러다할 고고학적 발굴물이 나오지 않으며, 그나마 매우 조야한 정도이고, 외국의 문헌들에도 이 왕국은 거의 등장하지도 않을 만큼 당대에는 잊혀진 왕국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국력이 강했으나 왕조 자체는 매우 불안정한 반면 유다는 국력이 약했음에도 왕조가 안정됐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먼저 내적 요인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말했듯이 유다는 영토가 작고 단조로웠다. 즉 체제를 통합하는 데 있어 왕권에 대한 견제세력이 약했다. 상대적으로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 많지 않았기에, 도전연합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도 이유이다. 게다가 이렇다 할 유서 깊은 산당이 없었기에, 지방세력이 형성될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기반도 매우 빈약했다. 또한 부족연합의 전통도 약해서 중앙집권적 체제를 형성하기도 쉬웠고, 부족연합 전통의 견제세력도 매우 약했다.

반면 이스라엘은 다양한 지파들의 연합이 왕조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또 어느 정도 정복국가의 성격을 지니면서 국가 경계를 확장했고, 봉신국을 거느리기도 했다. 이것은 군벌세력이 형성될 요인이 됐다. 강력한 왕이 있을 당시에는 군대가 왕에게 충성 하겠지만, 그 왕이 죽은 이후 통치권 누수기가 올 때 군부가 독자세력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더욱이 왕들은 자기 개인의 부대를 종종 다른 세력을 등에 업지 않은 존재인 외국의 용병을 활용하곤 했는데, 이는 이들이 독자세력화될 때도 어떤 전통에도 견제를 받지 않은 채 세력을 형성할 요인이 되곤 했다. 가령, 오므리는 외국용병 출신 장군으로서,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인물로 보인다. 게다가 지방의 산당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제적, 예언자적 세력은 지파 경계를 넘어서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하여 이들은 왕조에 대한 견제세력이기도 했고, 종종 정치-군사적 지도자와 연대해서 대안세력을 형성하는 주체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사울-사무엘, 여로보암-아히야, 예후-엘리사 등등).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체제 통합을 위한 보다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고, 왕위승계 시기에 적지 않은 혼란을 겪어야 했던 사회다.

한편 대외적으로, 유다 지역은 발달된 교통로도 없었고, 풍요롭다기보다는 황량한 지역인 탓에 주변 국가들 누구도 별로 주목하지 않는 곳이었다. 게다가 강한 국력을 갖지도 못해서 정복국가로서 활약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러니 주변국들의 입장에서 유다는 별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영토 자체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 많을 뿐 아니라, 국력이 강해서 정복되지 않기 위한 전쟁도 많았으며, 부유한 도시들이 많아서 약탈할 이유도 많았다. 또한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대제국의 경우, 서로를 제압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는 국소지역의 패권국가였다는 점에서 늘 국제관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였다.

아래 표는 열왕기하에 묘사된 국제관계 관한 우열관계의 언급을 요약한 것이다.


[도표3-2] 유다와 이스라엘왕국과 주변국들의 국제적 우열관계

유다

이스라엘

 

에집트

구스

시리아

블레셋

아랍

암몬

에돔

모압

시돈

르호보암

 

 

 

 

 

 

 

 

 

 

아사

 

 

 

 

 

 

 

 

 

 

 

바아사

 

 

 

 

 

 

 

 

 

 

아합

 

 

 

 

 

 

 

여호사밧

 

 

 

 

 

 

여호람(요람)

 

 

 

 

 

 

 

 

요아스

 

 

 

 

 

 

 

 

 

 

 

여호아스

 

 

 

 

 

 

 

 

 

아마지야

 

 

 

 

 

 

 

 

 

 


여기에서 보듯, 유다 사관들의 묘사인데도, 유다왕국은 부분적으로 비교적 약소국에게만 우위를 유지한 반면, 이스라엘은 별로 언급되지 않는 중에도 시리아 같은 강대국과 우열관계가 대등하게 교차될 만큼 강력했다는 점이 시사되고 있다.

이상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왕조가 불안정함에도 강한 국가일 수 있었고, 반면 유다는이 안정된 체제에도 불구하고 약한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제국과 왕국

 

이상에서 시사한 것처럼,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은 아람 지역의 국가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패권국가로서 서로 경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국가들은, 말했듯이, 제국들의 발흥으로 인해 끊임없이 명암이 바뀌곤 했다. 아합 왕 때의 연합군을 제외하면, 아시리아나 이집트의 진군을 적절히 방어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여, 이 두 왕국은 모두 아시리아에 의해 무력화되고 멸망에 이르게 된다. 또한 두 나라가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는 시기도 제국이 내적 혼란으로 인해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아래 표는 열왕기하를 통해서 제국의 번영과 쇠퇴에 이스라엘과 다마스커스(아람)가 어떻게 영향을 받아 발전과 쇠퇴를 경험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살만에셀 3세의 공격을 아합이 이끄는 연합군이 성공적으로 방어한 뒤, 아시리아는 한동안 서부 지역으로 세력을 팽창하지 못했는데, 이 시기에 아합 직후 이스라엘은 쿠데타에 의해 예후왕조가 성립하여 왕조의 기반이 흔들렸고, 반면 아람 왕국은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아닷니라리 3세 때 아시리아가 다시 서방 원정에서 벤하닷 2세의 아람에 치명상을 입힌 직후, 다시 혼란에 빠져든 사이, 여호아스 시대에 이스라엘은 부흥기를 맞았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와서는 최고의 절정기를 구가한다. 이때 이스라엘의 동맹국이던 유다도, 아마 페니키아, 이스라엘, 아라비아를 잇는 국제무역에서 중간 기착지로 부흥기를 맞았던 듯하다. 또 여로보암 2세 이후 잇따른 쿠데타로 정국이 극도의 혼란에 빠진 이스라엘이 다시 발흥한 아시리아에 의해 몰락하게 됨으로써, 아람과 이스라엘 모두 더 이상 역사의 무대에서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유다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또 아시리아가 내분으로 힘을 쓸 수 없어 이스라엘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틈에, 북부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최고의 번영기를 맞이한 때가 바로 히즈키야와 요시아 왕 시대다. 이상을 통해 보듯이,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역사는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와 깊이 연관된다. 또 이 도표에선 확인할 수 없지만, 요시아 대에 잠시 번영기를 맞았던 유다는 이집트의 발흥으로 말미암아 몰락의 길에 접어들고, 결국에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이러한 역사적 개관을 통해서 우리는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아시리아, 이집트, 바벨로니아 등의 대제국의 역사와 긴밀히 엮이면서 발전과 쇠퇴가 되풀이 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좀더 세부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명암은 더욱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강한 왕조를 이룩했던 몇몇 시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왕들은 조정 내의 파벌들에 의해 좌지우지됐는데, 이들 파벌들은 대개 대제국과의 연계고리를 통해 기반을 공고히 하려 했다. 해서 친아시리아, 친이집트, 친바벨로니아 등의 정파들이 유다와 이스라엘의 정치를 복잡하게 했다고 할 수 있으며, 결국에는 두 왕국의 멸망도 이들 정파들이 국제정세를 잘못 판단함으로 말미암아 제국의 침공을 받은 결과였다.

 

국가의 논리와 야훼의 논리

 

당연한 얘기지만, 이상과 같이 유다와 이스라엘왕국은 야훼 신학적 논리보다는 국제정치적 논리에 의해 나라가 흥망이 뒤바뀌는 역사를 체험했다. 즉 왕국의 흥망은 종교적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태도의 문제와 더욱 긴밀히 연관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다음 주에서 좀더 깊이 이야기할, 왕국을 비판했던 예언자들의 논점들이 국가의 부흥논리와 배치되는 관점을 취했던 것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들 예언자들은 국가의 발전논리를 신학화한 왕실 사제, 예언자들과 대립하면서 야훼의 신탁을 폈던 것이다. 그런 신탁 속에 담긴 신학을 요약하면 야훼의 구원은 나라의 발전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체제나 세력가들이 대중을 괴롭히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스라엘이 자주 받았던 혼합주의에 대한 혐의를 논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다음주에 예언운동을 얘기할 때 좀더 상세히 논하겠다. 아무튼 예언자들의 야훼신학은 체제의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체제가 어떻게 되든 대중의 고통과 대면하는 데 있으며, 그러한 고통을 문제제기하면서 권력과 비판적으로 대면하는 데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나 예레미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국제정치에 예언자가 개입할 경우에도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택하는 국제노선이 대중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야기하겠다.

신명기사가들은 야훼신앙의 올바름의 기준을 국가 중심의 가치에서 보려했다. 그리고 우리 성서는 표면상 이러한 시각에서 야훼의 뜻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시각에서 이들 사가들은 이스라엘왕국의 모든 왕들을 우상숭배의 혐의로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유다왕국의 왕들은 르호보암에서 시드키야까지 20명의 통치자 중, 8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데 이들 여덟 명의 왕은 16년 동안 재위에 있었던 요담을 제외하면, 모두 평균 통치기간을 넘어서는 왕들이고, 나머지 왕들은 므나쎄(55)를 제외하면 모두 평균통치기간을 밑도는 이들이다. 므나쎄가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은 그가 요시아 개혁의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가는 말할 것도 없이 유다왕국의 왕조의 흥망이 신학적으로 옳은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의 국제정치적 배후에는, 앞서 본 것처럼, 제국의 팽창주의가 얼마나 성공했는지의 여부와 직결되고 있다. 즉 이러한 신학은 국가의 논리에 의한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신명기 사가의 개작으로 감추어진 듯하면서도 살짝 드러나는 예언운동의 면모는 우리에게 야훼신앙의 민중신학적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야훼의 논리는 국가의 논리와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의 고통을 야훼가 돌보신다는 데 있다. 󰡖







여로보암

건국의 영웅인가 왕국사의 악의 화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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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지난 시대의 모든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역사라는 채에 걸리려면, 동시대의 엄청나게 높은 경쟁의 벽을 뚫고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 드높은 장벽을 넘어선다 해도, 대부분은 하찮은 조역이나 단역에 그친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주연급 배역을 맡을 뿐이다. 1성서에서 주연급 배역으로 두드러진 인물을 들라면,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등을 꼽을 수 있으리라. 또 제1성서 사가들의 주류적 담론에서는 다소 소외되었지만, 대중 사이에서는 열렬히 환영받았던 주연급 인물도 있다. ‘엘리야가 대표적이다. 아무튼, 주류적이든 주변적이든, 성서의 담론에서 이들의 구체적 역할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야훼 구원사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것은 기나긴 야훼 신앙사를 거치면서, 그 복잡다단한 부침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의미의 소산이다. 성서 속에는 신앙공동체가 집합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어떤 의미()이 담겨있으며, 위와 같은 구원사적 주역들은 이렇게 형성된 의미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을 선택해서 그들을 구원해 가는 야훼의 섭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 해석은 거의 언제나 사후적으로 구성되기 마련이며, 따라서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것에 대한 변증적 의미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변증적 작업으로서의 제1성서 편찬의 핵심 주제어는 단연코 구원이며, 이러한 편찬 작업 초기의 가장 중요한 주체는 왕실과 예언자 집단이다. 이들은 때로 서로 간섭적으로 또 때로 배리적으로 기억을 보존해왔다. 전자에는 사기(史記)나 제의 담론 형태의 엘리트적 텍스트가 많다면, 후자는 대중서사 형태의 텍스트가 특징적이다. 하지만 대중서사 가운데는 예언자들에 의해 전수된 것이 아닌, 순수한 의미의 민간전승도 있다. 단 민간전승의 경우엔 민족사적 의미보다는 미시적인 생활사적 관심이 다루어진 경우가 많다.

아무튼 크게 두 부류의 집단에 의해서 전승되던 다중적 텍스트를 광범위하게 문헌화하여 집성하는 작업이 몇 차례 있었는데, 그중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 ‘신명기사가적 편찬 작업(DtrH)사제적 편찬 작업(ChrH)을 들 수 있다. 이 두 편찬 작업은 어느 개인에 의해 일거에 이룩된 것이 아니며, 더욱이 수세기에 걸친 기나긴 노력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그 편찬의 기조를 좁게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지만, 두 작업은 경향상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 신명기사가란 유다 왕국 말기의 요시아 왕 당시 왕실 주도로 기획된 하나의 개혁운동과 관련이 있으며, 식민지 시대에 와서는 성서 편찬에 지속적으로 관여할 만큼 여전히 적지 않은 영향력을 보유하여 온 운동적 실체다. 한편 후자는 식민지 재건공동체 시절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제계열 주도로 수행된 작업으로, 민족공동체의 재주체화 운동의 일환으로 펼쳐진 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1성서 텍스트는 넓은 의미에서 이들의 눈으로 해석된 대단위 문서 전승으로 집성되었다.

이러한 편찬 운동은 항상 역사의 주연급 인물 가운데 악역을 필요로 한다. 구원은 위기를 전제하며, 특히 위기가 심화될수록 구원의 효과는 극적이기 때문이다. 구원사적 담론의 효과는 악역의 존재가 부각될수록 더욱 유효한 것이다. 주연급 인물 혹은 그들과 부합하는 정의의 편에 선 존재를 위협하는 악의 화신들의 원조로, 모세에게 이집트의 파라오라는 적()이 있었고 다윗에게 사울이 있었으나, 그들의 역할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국의 창건자 여로보암 1세의 악역은 몇몇 에피소드에 혹은 그 당대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분열왕국 시대 전체에 걸쳐 모든 통치자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즈)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정치를 폈다.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린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떨쳐 버리지 않고 그 전철을 밟았던 것이다.

열왕기하 13,2

 

이렇게 여로보암을 따랐던 자는, 말할 것도 없이, 악한 통치자다. 더욱이 이러한 악한 통치자는 백성 전체를 타락하게 한 장본인이다. 그러므로 그는 민족사의 적이다.

이러한 평가는 대체로 유다 왕실의 시각에 의존하며, 특히 신명기사가의 편찬에 의해 가공된 것이다. 그것은 여로보암 자체의 인물됨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신명기 개혁을 주도했던 요시아 왕조의 이해와 관련된다. 그러므로 텍스트는 이 개혁운동이 펼쳐지던 당시의 사회적 세력관계의 맥락을 고려하는 가운데, 여로보암이라는 인물의 격하가 지니는 의미의 효과를 살필 때 그 역사적 함의가 드러난다.

하지만 (신명기사가의 시대, 즉 요시아 왕 당시의 역사가 아닌) 두 왕국이 존속하던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이러한 의미는 오히려 걸림돌이다. 특히 민중신학적 성서 읽기에서 이것은 극복되어야할 시각이다. 왜냐면 이스라엘의 형성이 갖는 민중적 의미를 유다의 특정 시선으로 환원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여로보암을 당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재현함으로써 그를 둘러싼 역사의 민중적 의의를 탐색하고자 한다.

 

2

 

신명기사가는 왕을 평가할 때마다 다윗의 길여로보암의 길중 어느 길을 따랐는지의 준거에 따라 그의 통치가 의로왔는지의 여부를 평가한다.(“아사는 조상 다윗을 본받아 야훼께서 보시기에 곧바른 일을 하였다.”―〈열왕기상15,11 등 참조) 특히 산당의 존폐 여부는 그러한 평가에서 가장 핵심적이다. 그것은 요시아 개혁 당시, 지방 호족들의 본거지로, 왕권을 확립하는 데 장애물이었던 지역 성소를 철폐하는 것에 이 정풍운동의 성패가 달려 있었던 정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시대를 대략 3세기 정도 거슬러 올라가서 여로보암 자신이 집권할 당시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각주:3]

요시아 개혁 당국은 왕권 확립을 위해서 다양한 세력과 연합했는데, 그 중에는 암하아레츠[각주:4]라는 민중세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공동의 적이던 지방의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지방호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백성을 착취하던 온갖 사회종교적 관행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취지를 담은 정책이 바로 요시아 개혁이다. 반면, 열왕기상의 이야기에서 추론되는 여로보암 정부[각주:5]는 솔로몬-르호보암 정부의 가혹한 부역에 대항해서 형성된 반정부연합에서 발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세력화를 위해서는 솔로몬 정부에 대항하기 위한 사회종교적 조치들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여로보암의 종교개혁으로 나타났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지방 성소(산당)의 활성화 조치였다는 것이 신명기적 역사서가 암시하는 여로보암 왕 시대의 역사다.


[그림3-2] 에프라임과 유다 지파


여기서 우리는 여로보암이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데 있어, 신명기사가의 관점을 전면 수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명기적 역사를 참조하되, 고고학적 정보, 동시대적 문헌 정보 등을 다각도로 고려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등장한 정치세력인 여로보암 세력의 역사를 재건해보고, 그 속에서 신앙사적 의의를 살펴보는 데 우리의 목적이 있다. 여로보암은 본래 에프라임 족속 출신이다. 이 지파는 과거 지파동맹 시절 동맹의 추진력을 제공하던 주역이었다. ‘왕 없는 사회를 추구했던 동맹의 에너지가 소진될 무렵, 동맹을 괴멸시킬만한 블레셋 지파동맹이라는 준왕권제적인 강력한 외부 세력이 대두했고, 이러한 중대한 위기상황 아래서 지파동맹은 (에프라임 지파가 아니라)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준왕권제적 대항연합을 구축해야 했다.

신명기적 역사서가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블레셋에 의한 사울 동맹의 실패는 제3세력인 유다지파의 다윗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동맹체의 등장을 낳았고,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지파동맹을 잇는 최초의 국가가 탄생하는 역사적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역사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많다. 다양한 증거들을 토대로 해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인구도 희박하고 토양도 척박했던 남쪽에서도 유다 부족 등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국가 형태의 발전이 있었는데, 이 나라가 이 지역 최초의 초기국가는 아니지만 선사에서 역사 시대로 이어지는 국가를 탄생시킨 것이 다윗의 국가인 유다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비슷한 시기에 팔레스티나 중부 지역에서는 사울 사후 알려지지 있지 않은 중간 시기를 거쳐 여로보암의 국가가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열왕기상 11,26~28은 그가 솔로몬 왕실이 임명한 에프라임과 므나쎄 지역의 부역책임자였다고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다윗-솔로몬 왕국이 에프라임-므나쎄 지역까지 영역이 미치지 못하였고, 지방에 부역을 조직할 만큼 체계화된 나라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이 구절은 후대에 의한 신화 만들기의 소산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여로보암이 부역책임자였다는 것은 사실에 기초한 정보일 수 있다. 왜냐면 그가 하나의 나라를 창건하는 데 있어 에프라임 출신 부역책임자로서 종주국에 도전하였다는 것은 개연성이 있는 정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을 피해 망명한 그를 받아주었다(11,40)고 하는 이집트의 파라오인 시삭(재위 945~924 BCE. 그는 세숑크 1세이다. 11,40)은 여로보암이 왕으로 부상할 무렵 팔레스티나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하고 많은 도시들로부터 조공을 징수받았다.

어쩌면 여로보암은 시삭에 의해 강제된 공납에 저항한 에프라임-므나쎄 지역의 저항 지도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가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추대된 것은 필경 이집트의 지배권으로부터 자유를 얻어내는 투쟁에서 거둔 성공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아무튼 사울 당시가 왕 없는부족연맹 사회에서 군주제로의 이행을 둘러싼 갈등이 지배적인 의제가 된 시대였다면, 여로보암 시대는 군주사회에서 더 발전된 군주사회로의 이행이 화두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신명기사가의 텍스트인 열왕기상은 북왕국에 세워진 국가인 이스라엘은 사울부터가 아니라 여로보암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한다. 이는 열왕기가 사용한 참고자료 중에 이스라엘의 사기(史記; 열왕기상14,19)가 이러한 시기구분을 한 결과일 것이다. 요컨대 이스라엘은 국가의 창건 원년을 여로보암부터 잡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필경 여로보암에 와서야 이 지역에 그럴듯한 국가틀을 갖춘 나라가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여로보암 당대에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불과 50년도 못 된 오므리 왕조(주전 885~843. 오므리아합아하지야여호람) 때에 강력한 군주제 국가로서 대두하였다. 그런 점에서 여로보암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팽창주의적인 체제의 가능성,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지방 세력을 억제하기에 충분한 군사력 체제의 가능성이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무엘기~열왕기가 말하는 다윗-솔로몬의 국가 프로젝트에 속하는 성전을 포함한 성도의 건설, 전국 각처에 세워진 요새도시와 그밖의 대규모 건설사업, 그리고 정복전쟁 등은, 고고학적 정보 등을 통해 추론되는 국가의 규모를 통해 추정해 본다면, 필경 여로보암 이후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국가 프로젝트를 자기 것으로 바꿔치기한 역사 가로채기의 소산일 것으로 보인다.

하여 이러한 국가 프로젝트로 인한 다윗-솔로몬 제국의 전대미문의 노동력 착취와 이에 대한 대중의 저항은 사울 이후, 특히 여로보암 왕국 이후 점점 고조되어 가는 권력 집중의 상황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것이겠다. 물론 다윗-솔로몬 자신도 허약하나마 집중화된 권력의 한 주역이겠지만, 에프라임-베냐민 지역에는 아마도 보다 발달된 초기국가 형태의 정치세력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권력의 강제부역에 대한 대중의 저항이 여로보암을 등장시키는 배경이 되었다는 열왕기상의 다소 과장된 서사는, 아마도 솔로몬을 빼면, 이스라엘 지역에 형성된 이집트의 종주권 주장에 저항하는 정치적 운동에 관한 어떤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에 관해 좀더 살펴보자. 그는 에프라임 지파의 유력 가문 출신의 인물이었지만, 과부의 아들이었다(열왕기상11,26). 즉 몰락한 집안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런 환경의 사람이 대개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상승욕구가 강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어떤 기회가 그를 유혹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지향은 확연히 달라질 수 있었다. 그는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됨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성서가 묘사하는 대로, 그는 힘이 장사였다(열왕기상 11,28). 그는 빠르게 출세하여 국가 전체 혹은 에프라임과 므나쎄 지역에 대한 부역책임자로 등용되었다(열왕기상 11,28).

그러나 정작 그의 인생을 좌우한 것은, 뒤늦게 그의 인물됨을 알아차린 아히야 예언자와의 만남이었다. 이 인물은 실로 출신 예언자였다. 실로는 과거 엘리 계열 사제집단의 본거지였는데, 이 사제 계열은 사울을 택하여 블레셋의 공격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요컨대 이들은 군주제의 도입을 선도한 사제집단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한 왕권은, 현대적인 표현으로 묘사하면, 지파동맹 정신에 충실한 군주제라는, 즉 평등한 카리스마적 군주의 지배에 의한 체제였다.

고대사회에서 전통은 대단히 지속성이 강하다. 열왕기상에서 아히야도 분명 군주제를 주장하고 있다(11,30~40). 동시에 그는 부역을 강제하는 정치세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세겜 전통에 충실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런 존재와의 만남, 이것은 여로보암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았다.

[그림3-4] 여로보암 대 르호보암

그의 저항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성공했다. 그가 지배자에 대항하는 모종의 계획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이집트로 망명하였다는 성서의 묘사(열왕기상 11,40)는 그를 2의 모세로 해석하려는 어떤 시도들이 있었다는 암시겠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그는 동시대 지배체제의 학정에 반대하는 지파동맹 세력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격상되었다. 그리스어 성서 사본(70인역 성서)에 따르면, 그는 고향인 세레이라(즉 사례다)에서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열왕기상 12장의 세겜에서 벌어진 솔로몬의 후계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이 담판을 벌이는 이야기 역시 후대의 유다왕국 사관에 의한 개작으로, 그 이면에는 세겜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위임됨으로써 이스라엘 국가가 건립된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이야기는 선왕이 죽고 후계자가 누구인가를 놓고 일전이 벌어지는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왕의 아들은 선왕의 재산을 물려받은 자다. 그리고 아마도 왕은 한 부족의 족장이고 사유재산이 매우 많은 존재이다. 나의 가정에 의하면, 시삭이 에프라임-므나쎄 지역 혹은 보다 큰 지역의 통치자로 위임한 어떤 이스라엘계 통치자의 권력 승계의 상황이 이 이야기 배후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이기 위해서는 종주국 시삭의 지지도 필요하겠지만, 동시에 세겜에 모인 부족장들의 지지도 필요했다. 아직 왕위 세습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부족연맹의 전통에 적지아니 영향을 받던 시대였다. 그런 점에서 유다지파가 이스라엘의 지배세력이 되었다는 가정은 확실히 무리한 상상이다. 이들은 다른 지파들에 비해 훨씬 척박한 토양에 적은 인구의 종족이기 때문에 지파들의 지지를 받아내기 어려운 족속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세겜에서의 담판은 이러한 왕위 승계를 위한 부족간 협약의 성격을 지닌다. 이 회담의 시기가 부족연합을 기리는 신년제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설정이다.

세겜은 야곱 전승과 결부된 유서 깊은 고도(古都, 창세기33,18; 요한복음4,12)로 이스라엘의 정신적 통합에 중요한 기반이 되는 성소의 하나다. 회담은 처음부터 왕위 승계자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왜냐면 강력한 저항연합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로보암과 그 지지자들, 특히 아히야 같은 예언자들은 평등한 옛 전통을 상기시키며, 각 지파를 돌아다니며, 왕에 반대하는 이들을 결속하고 다녔을 것이다.

급기야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결속한 세겜 협약의 주역들은 왕에게 부역의 경감을 요구하고 나섰다. 젊은 왕은 대동한 자신의 자문관들과 협의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늙은 신하들젊은 신하들은 아마 부족 원로회의용병부대 장교회의같은 관료조직을 의미할 것이다. 아마도 군주제 사회가 보다 견고하게 자리잡은 오므리 왕조 때의 상황이 여기에 역투영된 것이 아닐까. 오므리는 용병부대의 장군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세한 대화 묘사는 후대의 반영이겠지만, 이 묘사 속에 담긴 기조는 아마도 여로보암 때도 그랬음직하다는 개연성이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성서의 묘사인즉슨, 왕은 선협상을 주문한 원로회의의 충고를 무시하고, 군부의 강경입장을 채택한다. 아마도 위엄을 보이는 게 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태의 전개 후에 확인하게 된 것이지만, 이것은 착오였다. 그는 협상에 응하는 태도를 취했더라도 왕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에게는 선왕의 응집된 권력, 어느 정도 훈련된 병력을 물려받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막 즉위한 왕으로서는 그러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왕으로서의 호기를 부리는 게 더 익숙했다. 그는 분명 반대파의 힘을 경시했다.

젊은 왕의 강경태도에 지파의 족장들은 그의 왕위 승인을 거절한다. 왕은 부역 총책임자였던 아도람을 보냈다. 그는 다른 부족을 비교적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부역책임자라는 직책은 착취를 담당한 왕의 측근이다. 그러니 아도람은 이 상황에서 적절한 왕의 사절은 아닌 셈이다.

왕은 여전히 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파악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하여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분노한 지파 지도자들은 이 부적절한 왕의 사절을 죽였다. 폭발할 것 같은 험상궂은 분위기에 놀란 왕은 급히 자신의 본거지로 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종족들은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웠고, 그를 왕으로 옹립했다.

여로보암의 왕국은 다양한 세력들이 일시적으로 결속하여 형성한 국가였다. 그러므로 왕의 권력은 취약하였다. 당장은 선왕의 군사력을 물려받은 왕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로 결속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각 지파들의 상이한 이해관계가 드러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의 주된 무기는 군사력이 아니라 정치력이었으나, 정치력의 발휘로 국가의 통합이 지속되기에는 지파간 소통의 통로가 대단히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로보암은 이러한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만큼 영리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열왕기상22년이라고 묘사한 그의 긴 통치 기간만 보더라도(14,22), 그는 대단히 유능한 정치가였을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무수히 많은 왕들이 쿠데타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각주:6] 무에서 유를 창출한 그의 정치력은 매우 돋보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에프라임 족속 출신인 만큼 이스라엘의 전통에 대해 익숙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히야 예언자가 그를 지지한 것은 그의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왕으로서 그는 아히야가 기대한 만큼 평등주의를 실현한 왕이 아니었다. 곧 아히야는 그와 결별했고, 이후 실로의 예언자들은 현실의 왕조에 대해 비판적인 전통을 전승하는 핵심적 제야세력의 하나가 되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은 어려서부터 체득한 지파 전통이나 아히야의 주장에 충분히 공조하지 않았을까?

이제 그는 비판자가 아니라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비판의 논리는 대안적 통치의 논리를 구성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다. 여로보암은 이제 집권자로서 통치의 논리를 따라야 했던 것이다. 군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백성을 강제 징용해야 했으며, 군수용품을 백성에게 갈취해야 했다. 인근 족속들이 모두 군주제 국가로서 성립하고 있던 차에, 국방력의 강화는 필수조건이었던 것이다. 그가 백성의 자원을 전유하는 한, 반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기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권력이 필요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통치자로서의 유일한 제도적 모델은 권력의 집중화를 극대화한 군주제였다.

여로보암이 개인적 권력욕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더라도, 단지 그가 당면한 현실에 따른 합리적 판단을 했을 뿐이라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그는 어쩔 수 없이 군주가 되어야 했고, 백성의 권리보다는 백성의 충성을 필요로 하는 통치자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통치자로서 아히야가 요구하는 평등은 국가의 안전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즉 그는 평등원리보다는 발전원리를 우선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정에는 그가 개인적으로는 권력욕을 향유하는 자가 아니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실제로는 아마 그도 적지 않은 경우에 권력의 짜릿한 자극에 자신을 맡겼을 것이다. 그리고 아히야와의 결별 배후에는, 합리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권력의 횡포와 관련되었을 것이다. 아마 아히야도 분명히 여로보암이 직면한 난처한 상황을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겠다. 하여 그는 비판자이기는 하되, 체제 내의 비판자이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양자는 계속해서 서로를 참아줄 수 없었던 듯하다. 그것은 서로간의 소통 부재 때문일 것이고, 그런 소통적 품성을 충분히 갖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여로보암은 아히야의 요구와는 별개로, 권력의 안정화를 위한 종교개혁 조치를 취하였다. 영토의 북단의 단과 남단의 베델에 있는 성소를 왕립성소로 격상시켜, 왕의 권력이 야훼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했고, 여기서 왕을 위한 제의를 수행하였다. 그곳에는 풍요를 상징하는 금도금한 황소상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훗날 신명기사가에 의해 지방성소의 우상으로 지목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신명기사가의 논리대로라면 예루살렘 성전을 상징하는 기물인 법궤와 게룹도 우상이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윗 왕실의 신학인 시온 사상에 의하면 그것은 우상이라기보다는 야훼의 임재를 상징하는 부속물로 간주되었다. 마찬가지로, 아마 법궤나 게룹보다 훨씬 오랜 전통을 갖고 있고, 대중 사이에서 폭넓게 수용되고 있던 황소상은 더 적합한 상징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징은 예언자들의 야훼신앙 전통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야훼의 임재를 특정 장소에 국한시키는 것이며, 임재의 조건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징은 누구나 어디에서든 야훼를 만날 수 있다는 관념을 방해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과 대비해서 볼 때는 여로보암의 성소가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는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3

 

여로보암의 정책에 대해서 더 이상의 정보는 거의 없다. 훗날 유다 출신 사관들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보이는 정보들이 몇 개 더 있고, 나머지는 필경 소거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평가할만한 정보는 극히 부족하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으로만 추정하면 그가 모든 왕들의 악행의 상징적 원류라고 평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오히려 그는 군주제의 과도한 권력 남용의 전통과 그것의 반대편에 있는 평등주의적 야훼주의, 군주제와 지파동맹의 전통 사이에서 동요했던 평범한 초기 군주사회의 통치자의 하나다. 하지만 그는 설화 속의 다윗처럼 보다 전제군주적 성격에 가까운 인물상과는 다르다. 아히야가 그를 통해 꿈꾸었던 민중 해방자의 이미지는, 군주로서의 여로보암이 실현할 수 없는 한계적 상상이었을 것이지만, 분명 그의 등장 이면에는 그러한 대중의 꿈과 부합하는 그의 존재 위치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꿈이 좌절됨으로써 아히야 예언자 같은 민중적 야훼주의자들은 그를 다윗이나 오므리, 아합 같은 이보다 더 증오하였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릴 때 그는 결코 악의 화신은 아니다. 그것은 유다 사관의 자국사적 시선일 뿐이다.

  1. J.H. 헤이스 & P.K. 후커,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신연대기》(대한기독교서회, 1991) [본문으로]
  2. 여기에는 반아시리아 연합군의 병력까지 묘사되어 있는데, 연합군을 이끈 3개국의 병력을 비교하면(다마스커스의 하닷에셀: 마전차 1,200승, 기병 1,200명, 보병 20,000명/ 하맛의 이르훌레니: 마전차 700승, 기병 700명, 보병 10,000명/ 이스라엘의 아합: 마천차 2,000승, 보병 10,000명) 이스라엘과 다마스커스 왕국이 이 연합군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3. 여기서 여로보암은 여로보암 1세인데, 그가 국가를 창건한 시기는〈열왕기〉의 연대기에 따르면 대략 BCE 924년경이며, 요시아 왕이 개혁 정책이 시작된 시기는 대략 BCE 620년대이다. [본문으로]
  4. 이 용어는 우리말 성서에서 ‘온 국민’(개역한글판), ‘온 백성’(개혁개정판), ‘모든 백성’(표준새번역), ‘지방민’(공동번역)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각기 일면의 타당성을 지닌다. 이들은 ‘농민’을 포괄적으로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방민’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사회의 주요 포섭계층이라는 점에서 ‘백성’ ‘국민’ 등의 표현이 갖는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번역어들은 또한 한 면 만을 함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충분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용어가 사용된 성서 텍스트 가운데 왕국 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경우는 거의 모든 경우에서 정치세력화한 농민세력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민중세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열왕기상〉 11,14・18・19・20; 21,24; 23,30; 24,14; 〈역대기하〉 23,13・20・21; 33,25; 36,1; 〈예레미야서〉 11,9;52,25) 한편 식민지 시대를 다루는 텍스트들에는 백성, 국민 등의 함의가 보다 타당해보인다.(〈에제키엘서〉 12,19; 〈느헤미야기〉 7,6) [본문으로]
  5. 물론 이 이야기 속의 역사는 가공된 것이다. 솔로몬-르호보암의 나라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북왕국 이스라엘이라는 틀은 요시아 왕대의 역사 만들기의 산물이다. 그보다는 부족동맹체였던 초기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강력한 국가가 발전했고, 그보다는 매우 뒤쳐진 초기국가 형태인 다윗-솔로몬의 나라(유다 왕국)가 남부지역에 있었으며, 이 나라가 고대국가적 정치체로 발전하게 된 것은 아마도 히즈키야 왕 또는 요시아 왕 시대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그보다 적어도 한 세기 전인 오므리-아합 왕 때에 고대국가적 정치체로의 계기적 발전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본문으로]
  6. 〈열왕기〉의 연대표에 의하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208/9년 동안 9번이나 왕조가 바뀌었다. 그리고 평균 재위기간도 11.4/11.5년에 불과했다. 그런데 다른 왕들에 비해 기반이 빈약했던 여로보암은 평균 통치기간을 훨씬 상회하는 22년을 통치했던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