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60주년 기념도서 [자유인의 교회 - 향린교회를 말하다]에 실린 글입니다.
취지에 맞지 않는 글을 쓴 탓에 또 한 편을 새로 써야 했습니다.
해서 두 편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벌칙 치고는 너무 과한 벌칙이예요.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고 체력은 바닦가지 소진되어버렸지요.
그래도 나의 선생님인 안병무의 수많은 글을 다시 읽고 감동받았고 새로 깨닫게 된 것도 많았으니
부질없는 것은 아니었지요.
아무튼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쓴 안병무 선생님에 관한 두 편의 중 하나입니다.
설교의 신학자 안병무의 교회론_향린교회 60주년기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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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안병무의 교회론
작은 교회, 분가선교, 평신도교회 개념을 중심으로
설교자 안병무
안병무 선생은 오랫동안 대학에서 가르쳤다. 1 선생의 교수법은 탁월했고, 그 엄격함과 신랄함을 두려워하는 하는 학생이 많았음에도 언제나 강의실은 학생들로 넘쳐났다. 선생 자신에게서도 교수라는 자의식은 대단히 강고했다. 강의하다가 죽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종종했고, 실제로 심장이 매우 안 좋은 상황에도 선생의 강의는 걱정스러울 만큼 격정적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선생을 잘 아는 사람들조차 종종 간과하는 사실은 선생이 여간해서는 결강(缺講)을 하지 않는 이였다는 점이다. 결강을 할 때는 대개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때였다. 어깨를 들썩이며 가까스로 숨을 쉬며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때에도, 선생은 힘겨운 표정을 애써 감추고 강단에 섰다. 그만큼 선생에게서 대학교수라는 점은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자의식에 속했다.
한편 선생의 글을 수록한 대부분의 매체는 그를 ‘한신대학 교수’라는 직함으로 표기하고 있다. 언론이 선생을 표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공적 사회가 선생을 기억할 때 ‘교수’로 표기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교수라는 직함이 갖는 압도적인 우월적 위상 때문일 것이니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교수’는 안병무를 기억하는 공적 기억의 주된 양식이다. 2
또한 선생은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대표적인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고, 두 번이나 강제해직되었던 이른바 ‘해직교수’ 3다. 또 ‘민중신학자’라는 명칭은 서구 신학계와 한국사회의 교양시민층이 선생을 기억하는 가장 대표적인 명칭이다. 그런 점에서 안병무의 신학을 논할 때 반독재투쟁과 해직, 그리고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요소다.
한편 선생을 ‘한국신학연구소 소장’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가 1973년 설립한 한국신학연구소는 한국신학이 당대 세계의 주목받는 신학들과 대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고, 또 개신교의 여러 교단들과 가톨릭을 아우르는 한국적 신학 담론의 대표적인 공론장이었다. 또 여러 분야의 해직교수들이 중심이 되는 포럼이 바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열렸고, 여기에서 한국의 민중론이 태동하였다. 4
민중론의 태동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한국전쟁 이후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던 진보담론이 지식사회에서 부활하는 신호탄이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당시로선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관행인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를 통해 수행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신학연구소 소장으로서 선생은 한국에서 신학이 종교간 벽을 넘고 학제간 벽을 넘어 담론화될 수 있도록 하는, 특히 반독재의 정치적 기조로 종교들과 분과학문들의 경계를 넘어서 재구성되도록 하는 비판적 학문제도의 조직가이자 지휘자였다.
또한 1970,80년대 대중은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간하는 각종 책들, 그리고 계간지 《신학사상》, 월간지 《현존》과 《살림》 등을 열렬히 탐독했고, 그 덕에 민중신학, 토착화신학, 그밖의 현대 서양신학과 제3세계신학 등은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가졌다. 그럼에도 선생을 ‘한국신학연구소 소장’으로 표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는 한국신학연구소의 의의가 사회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저평가된 탓이겠다. 그러므로 안병무 연구에서 한국신학연구소가 갖는 신학적, 비판이론적 의의를 묻는 일은 반드시 검토해야할 주요 과제에 속한다.
그런데 또 하나, 선생을 ‘설교자’로 표기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는 점이 내가 이 글에서 문제제기하는 바다. 알다시피 선생은 다작의 저술가다. 5 한데 그 글들 중 굉장히 많은 것들이 ‘설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선생이 설교자로 기억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목사가 아닌데다 한국교회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아낌없이 퍼부었던, 이른바 ‘반교회적 신학자’라는 인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선생은 어떤 신학자보다도 ‘교회적’이다. 선생은 최소한 네 개의 교회들(일신교회<1947>, 향린교회<1953>, 갈릴리교회<1975>, 한백교회<1987>)을 설립했고, 그 교회들의 주요 설교자였다. 6 그러니까 일신교회가 창립하던 1947년부터 소천 하던 1996년까지 선생은 자신이 설립한 교회들의 주요 설교자로서 줄곧 활동했다. 이 네 교회들이 모두 평신도교회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설교자의 위치는 대개의 교회들에서 이른바 ‘협동목사’라는 직함으로 가끔씩 설교하는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직위다. 또한 이들 교회들에서 교인들은 명설교자로서 선생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독자와 청자
선생은 대개 원고 없이 설교를 한다. 대개의 경우 그는 구상한 내용을 메모한 노트가 있었다. 특히 건강이 악화된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설교는 언제나 메모만으로 수행되었다. 그런데 그 메모들 가운데 일부가 얼마 후 글이 되었다. 건강이 악화된 이후의 많은 글들은 설교 이후에 대필자가 선생이 구술하는 대로 글로 옮긴 뒤에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들이 다듬어서 완성되는 경로로 만들어졌다. 한편 선생 사후(死後)에 심원안병무선생기념사업회가 선생이 설교했던 여러 교회들로부터 녹음자료를 얻어서 녹취하여 제작한 것들이 전집에 다수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때에도 녹취된 것을 문장으로 다듬는 데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들의 손길이 필요했다. 또 그 이전에도 설교가 후에 글로 나온 경우는 매우 많았다. 그때에는 당연히 선생이 직접 썼다. 이렇게 저술가 안병무에게 있어서 글이 생성되는 주요 경로의 하나는 ‘설교 메모→(대필자)→(편집자)→글’이었다.
이처럼 안병무 선생은 스스로를 설교자로 자임했고, 그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또 설교는 (많은 경우에) 저술가로서 선생의 글이 독자와 만나는 경로의 첫째 단계에 있다. 하여 청중은 선생이 글을 쓸 때 가상하고 있는 가장 직접적인 ‘예비독자’이며, 그이들의 ‘예비검열’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글에서 ‘예비독자’는 일반적으로 ‘추상적 존재’지만 설교의 청중은 ‘구체적 존재’다. 마주볼 수 있고 질의응답을 나눌 수 있다. 또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선생의 설교가 연행(performance)되는 현장은 설교자가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방식과는 달리 즉석에서 질문과 토론이 오가는 대화적 양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선생의 설교에서 청중은 글을 쓸 때 가상한 독자가 글에 미치는 영향보다 훨씬 더 강한 예비검열관 역할을 한다. 하여 설교가 연행되는 현장의 맥락 속에서 애초에 생각했던 내용을 보완하거나 수정하게 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설교는 선생의 글의 상상력의 토대이며, 대중적 감각의 밑바탕이었다.
이렇게 설교에서 발전한 글들을 포함한 선생의 저작들은 많은 독자를 갖고 있다. 거의 1인 잡지에 가까웠던 《야성》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창간(1951.1)되어 전후복구가 아직 요원하던 기간에 발행되던 잡지임에도(1956.1 종간), 최고발행부수가 무려 3천부에 달했다. 책의 생산, 유통 시스템이 잘 발전하고 잡지의 의제형성 능력이 왕성하던 1990년대에도 이런 정도의 발행부수는 놀라운 수준이다. 또 선생의 저작 가운데 최고의 판매고를 기록한 《역사와 해석》(1981)은 1972년에 발행된 《역사와 증언》의 개정증보판인데, 《역사와 증언》이 1981년에 17쇄까지 인쇄되었고, 《역사와 해석》은 1998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행될 때까지 30쇄를 찍었으며, 그 이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재발행된 이후에도 꽤 많이 권수가 판매되었다. 하여 선생은 출판계와 신문, 잡지 기자들에게 매우 선호되던 저술가였다.
반면 이렇게 많은 독자로부터 깊은 애정을 받고 있던 저술가임에도 선생의 설교가 연행되던 현장에 찾아온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 따르면 바울은 글로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그의 말은 “변변치 못”했다. 그 다음 절(11절)에서 바울은 말할 때나 마주대할 때 한결같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필자’의 느낌과 ‘화자(話者)’의 느낌의 일치는 어디까지나 바울의 주장일 뿐이고, 고린도의 그리스도 공동체는,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독자’의 느낌과 ‘청자’의 느낌이 너무나 다르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선생은 바울처럼 눌변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선생의 설교를 들은 이들은 선생의 글보다도 더 큰 인상을 받았다고 증언하곤 한다. 선생은 강약 고저를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면서 어떤 때는 매우 논리적이고 또 어떤 때는 매우 감성적으로 이야기를 폈다. 사회와 교회의 권력자를 향해 독설을 퍼붓고 서구 신학들의 추상성에 강력한 문제를 제기하다 어느 틈에 화살을 청자에게 돌렸다. 그렇게 허를 찔린 청자는 아픔을 느끼면서 동시에 쾌감을 얻는다. 문자 그대로 통쾌(痛快), 아픔에서 오는 쾌감이다.
청중의 소수성과 신학/신앙의 급진주의
그렇다면 왜 선생의 설교를 듣고자 교회로 찾아왔던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을까? 첫째 이유는 선생의 기독교 비판이 갖는 급진주의적 요소 때문일 것이다. 《야성》을 발행하던 20대말, 30대초 청년 안병무는 한국전쟁 전후기의 극한적 좌우 갈등과 극우 전위대로 분노의 정치에 광분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며, 당대의 지배적 담론이 노정하던 외면 세계적 논점의 틀에 흡수되지 않고 거기에서 이탈한 자아, 곧 내면성의 신앙을 추구한다. 이때 선생이 선택한 내면성의 신앙은 일상에서 벗어난 수도자적 생활공동체운동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7
1951년 11월 피난지였던 전주에서 시작한 일신회 회원들의 수도자적 공동체생활은, 1952년 2월에 쓴 글 〈목회론―내가 만일 목회를 한다면〉 8에서 ‘새로운 교회’적 실천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며, 그 1년 후에 쓴 〈평신도의 목회―그룹 운동의 방향〉 9에서는 그것이 ‘평신도교회’와 ‘그룹 공동체운동’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생각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해 5월 평신도교회적 이상을 담은 향린교회가 창립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목회자 중심적 교회가 거부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룹 공동체운동에 뛰어든 평신도 지도자들이 설교자로서, 교사로서, 의사로서, 출판인으로서 등등, 각기 자기의 재능에 따라 교회 사역을 분담함으로써, 종교 영역에 갇혀 있던 평면적 교회와는 다른 ‘입체적 교회’를 지향하였다.
이때 교회의 지도자 집단인 그룹 공동체운동의 참여자들은 목회활동과는 별개로 생계노동을 하여 그것을 공동체에 기부하고, 그것으로 생활공동체의 집단적 운용비와 생계비를 충당하였다. 이러한 수도자적 공동체 규범은 소유욕에 대한 과감한 단절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위에서 인용한 글 〈평신도의 목회〉에 따르면 이미 이러한 공동체 규범은 1953년 초에 벌써 흔들리고 있었다. 선생 자신을 빼면 모두가 기혼자들이었고 자녀들을 두고 있었던 탓에 공동체 멤버들 간의 평등한 소유에 대한 이상에 균열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강도 높은 공동체 규범에 기초한 교회는 창립 2년 반이 지난 1955년 말에 130명을 넘어섰지만, 그 때에는 지도그룹인 생활공동체의 붕괴가 현실화되었다. 즉 그룹 공동체운동을 통한 평신도교회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실패에 대한 좌절감을 안고 그 이듬해에 독일 유학을 떠난다. 요컨대 소유 해체적 지향에 기초한 고강도 규범공동체의 평신도 그룹목회운동은 그 교회가 갖는 의미심장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을 끌어들이기에 쉽지 않은 형식이었고, 심지어 지도그룹 자체도 감당하지 못하는 급진주의적 이상의 반영체였던 것이다. 하여 당시에 벌써 꽤 많은 이들에 의해 읽혀졌던 선생의 글에 비해 선생의 설교를 들은 이들은 훨씬 적었다.
한편 선생은 1975년 이후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운동을 주도하였다. 향린교회와 갈릴리교회, 한백교회에서 선생은 주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민중신학적 설교를 쏟아냈다. 한데 이때도 선생의 글의 독자에 비해 설교의 청자는 매우 적었다. 그 주된 이유 역시 선생의 신학이 갖는 급진적 성격 때문이다.
민중신학자로서 선생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죄론과 구원론에 대한 과격한 해체와 재구성을 도모하였다. 그것은 민중 메시아론으로 표현되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스스로는 그 죄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교리를 고수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수반되어 있는데, 하나는 예수의 구원 사역은 그이가 죽고 부활한, ‘단 한번’ 일어난 사건에 의해서 완결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구원 사역은 오직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한 분’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는 것이다.
한데 선생은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 예수와 민중(오클로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예수 사건을 읽을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 예수 사건을 바로 읽으려면 예수와 주변의 대중, 곧 오클로스를 구분하는 이른바 ‘주객도식’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예수와 민중이 더불어 사건을 일으켰고 그것이 예수의 구원사건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단 ‘한 분’이라는 교리가 해체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성령을 통해 시공간적으로 확장되어 끊임없이 재현된다. 하여 1세기 팔레스티나의 구원사건은 20세기 서울에서도,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끊임없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익명의 예수와 더불어 일어난) 민중사건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것은 ‘단 한번’이라는 교리를 해체한다. 이것이 선생이 말하는 민중 메시아론의 개요다. 10
또한 선생의 민중신학은 평신도교회론을 통해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학의 교회론으로부터 과격한 단절을 도모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평신도교회의 아이디어는 이미 1950년대부터 있었지만, 그때의 평신도교회론은 수도자적 생활공동체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엘리트적이고 계몽적인 성격을 지녔다.
한데 민중신학적 평신도교회론은 장소로서의 교회를 해체한다. 민중사건에 대한 예수사건적 해석이 소통되는 담론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목사가 필수적이지 않고, 과거 선생이 생각했던 그룹 공동체운동 지도자들도 필수적이지 않다. 아니 누구도 계몽적 지도자가 아닌, 모두가 주역인 평등공동체가 추구되는 곳이 바로 교회다. 11
이러한 민중 메시아론과 민중 교회론이 갖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에 대한 급진주의적 해체는 많은 신자들에게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혼란을 야기했다. 해서 양심적 지식인이자 민중신학자로서 선생을 존경하고 선생의 글을 탐독하는 이들 대다수는 선생이 설립한 교회를 선뜻 찾아가길 주저했다. 저자가 보이지도 들리지 않는 글을 읽는 독자보다 눈을 마주치고 육성으로 듣는 청자의 자리는 훨씬 더 생생했기에, 그것을 감당하기에 벅차 했던 대다수는 익명의 독자로 남기를 원했던 것이다.
청중의 소수성과 ‘작은 교회-분가선교’론
많은 이들이 설교의 청자가 되기보다는 글의 독자로 남기를 원했던 둘째 이유는 선생이 주요 설교자였던 교회들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이다. 네 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큰 교회인 향린교회는 최대일 때 4백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고 다른 교회는 모두 50명 안팎의 작은 규모의 교회였다. 이 교회들의 규모가 작은 만큼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선생의 글의 열정적인 독자들조차도 선생이 설교자였다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한데 이 교회들의 규모가 작은 것은 선생이 추구한 교회가 바로 ‘작은 교회’였다는 점과 직결된다. 앞에서 인용한 〈목회론―내가 만일 목회를 한다면〉은 일신회 회원들과 함께 시작한 생활공동체운동에서 향린교회로 이어지는 중간시기에 쓴 글로, 아직 목회를 시작하기 전의 글인데, 여기서 선생은 목회자가 감당할 수 있는 교인의 최대치가 2백 명이고, 자신에게 알맞은 교인 수는 최대 1백 명 이내라고 말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수가 넘을 때는 ‘분가’를 얘기했다는 점이다. 12 선생의 작은 교회론의 요체인 ‘분가선교론’이 이때 처음 문자화되었다.
한데 1987년 설립한 한백교회 교인들과의 대화 과정에서 선생은 최대 적정치를 50명으로 축소한다. 해서 이들 간에는 50명이 넘으면 교회를 분가하자는 생각이 공유되었다. 뒤에서 평신도교회에 관해 논의할 때에 좀더 이야기하겠지만, 1950년대에 선생이 생각한 평신도교회에는 ‘가르침’이 중요했는데 1987년 당시 선생은 ‘나눔’을 중요시했다. 여기서 가르침이 일방향적 의미 전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나눔’은 쌍방향적 의미 형성 과정을 중요시하는 실천 양식이다.
이와 같이 선생이 생각하는 교회에 대한 강조점이 변하였고 그에 따라 적정 규모도 조금 달라졌지만, 작은 교회와 분가선교는 선생의 교회 신학에서 초기부터 후기까지 일관되게 한 쌍을 이룬다. 여기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르침’에서 ‘나눔’으로 강조점이 달라졌다는 평신도교회의 성격이 덧붙여지면 안병무식 교회 모델은 보다 구체화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논의하고, 여기서는 분가선교에 대해 좀더 얘기해보자. 분가할 시점에 대해서 위에서는 규모를 중심으로 얘기했지만, 실은 그것이 실행되는 데는 좀더 복잡한 상황이 필요하다.
먼저 왜 분가를 해야 하는가의 물음이 첫 번째로 직면한 문제다. 선생은 “대교회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했다. 13 선생이 보는 대교회주의의 문제는 “내 교회주의”에 있다. 선생은 이것을 교회를 화려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이로 인해 선교열이 상쇄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여 분가선교를 통해 교인 하나하나가 선교의 전선에 서게 하고, 그럼으로써 양에서나 질에서나 교회가 확장되는 것을 얘기한다. 14 한데 이 주장은 다소 수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선교는 교회가 교회 밖 세상 위에 군림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섬기기 위한 행동이다. 15 그런 점에서 분가선교가 ‘양의 성장’에 기여한다는 말을 교회 규모의 관점에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양적으로도 ‘더 많이’ 교회가 교회 밖 세계의 구원에 기여하게 된다고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분가선교는 교회가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가 된다는 것이다.
한데 당위만으로 분가가 실행되는 것은 아니다. 분가를 교인들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가의 문제, 분가한 교회를 어떻게 모교회가 지원할 것인가의 문제, 그것을 위해 재정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의 문제 등, 많은 요소들이 해결되어야만 한다. 한데 무엇보다도 작은 교회가, 가뜩이나 자립도 채 안 될 만큼 미미한 재정 규모를 가진 교회가, 분가를 하고 분가한 교회를 지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해서 실제의 분가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항상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런 이유로 선생이 설립한 교회들 가운데 분가를 실행에 옮긴 선례가 아직 없다. 굳이 얘기하자면, 선생이 설립자는 아니지만 향린교회가 창립 40주년(1993년)을 기리면서 설립을 지원한 강남향린교회가 창립 11주년이 되던 2004년 분가선교를 실행에 옮겼다. 당시 이 교회의 교인 수는 150명 정도였다. 그리고 창립 때부터 분가를 얘기했고 20주년에 분가를 공식적으로 결의했음에도 16 창립 60주년인 2013년에야 분가선교를 시행에 옮길 예정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강남향린교회에서 분가선교를 수행하는 방식이다. 담임목사가 교인들에게 발의하고, 교회에서 특위를 만들어 국내외의 사례를 조사하고, 몇 차례 교인 공청회를 거친 뒤에 방안을 구체화하는 실행위원회가 오랜 동안 협의한 뒤에 공동의회를 거쳐 확정하게 되었다. 준비와 논의 기간만 족히 2년이 걸렸다. 이러한 사정은 2013년에 분가할 향린교회에서도 대동소이하다.
이 점을, 최근 분가를 실행에 옮겼거나 옮기겠다고 선언한 높은뜻숭의교회와 분당우리교회의 사례와 비교하면 흥미롭다. 높은뜻숭의교회는 분가를 실행하던 2010년 당시 교인 수가 6천 명 정도였는데, 같은 규모로 4등분하여 네 개의 교회를 만들었다. 또 분당우리교회는 2012년을 기점으로 교회 규모를 10년 내에 1/4로 축소할 것을 선언했는데, 선언 당시 교인 수는 1만 5000명이 넘었다.
이 두 대형교회의 분가 선언의 양식을 보면 대체로 비슷한 절차로 진행되었다. 먼저 담임목사가 비상한 결단을 하고 그것을 교인이 아니라 시민사회에 공포한 뒤에, 교회가 그 선언을 받아 구체화하기 위해 협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선언은 많은 그리스도교 대중과 시민사회의 찬사를 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교인들의 합의과정보다는 담임목사의 결단이 중요했다는 점에서 이 두 대형교회의 분가 양식은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처리된 사례들이다. 해서 그 절차는 대단히 간명했다. 이 두 교회는 교인 수가 향린교회와 강남향린교회보다 수십에서 수백 배 큰 규모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규모의 차이만큼 합의를 도출하는 일은 훨씬 어려울 법한데, 이 두 대형교회는 교인 협의를 생략하면서 그런 중대한 결정이 빠르게 결의되고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이 두 대형교회에서 교인의 동의 절차를 생략하는 것이 가능했던 배경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학자로 대형교회, 특히 순복음교회에 정통한 연구자 박종현에 따르면 한국 교회들은 일찍부터 순회목회자 시스템이 일반화되어 있었는데, 대형화에 성공한 교회들은 공히 카리스마적인 목회자가 장기간 그 교회를 담임하는 새로운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17 카마리스마적이라는 것은 합리적 절차를 통한 설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신앙 자원의 활용이 독점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독점적 지도력이 30,40년간 1인에게 집중되었다. 바로 이런 조건이 교회 성장에 결정적인 요소였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교세가 급성장하고 대형교회가 대두하게 된 1960~1990년 사이의 한국의 고도성장사회의 전개와 유사하다. 특히 1960~1980년 사이에는 1인에게 모든 권위가 독점되는 과정을 통해 성장사회가 구축되었으며, 1980~1990년은 그러한 1인 독점체제가 더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사회가 복잡해졌고 특히 민주화를 관철시키는 사회적 형성 능력이 크게 신장된 시기다. 요컨대 1980~1990년 사이는 탈독점 시대에 맞는 (성장 모델이 아닌) 새로운 사회 모델을 찾아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던 시기였다. 결론만 얘기하면 이 기간에 한국사회는 새로운 모델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전 지구적인 성장 모델인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편승하려다 ‘외환위기’라는 치명적 재앙에 처했던 시기였다.
아무튼 이 시기에 대형교회는 내내 1인 독점체제를 유지했고, 그런 한에서 교회의 성장체제는 굳건했다. 1980년대 이후 카리스마적 목회자들은 속속 은퇴하는 시기를 맞았지만 ‘원로목사’라는 직함으로 은퇴 이후에도 지배를 사실상 연장하는 방식으로 독점체제를 유지해 왔으며, 일부 교회들에서는 부자세습의 방식으로 권력독점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
한데 이러한 대형교회의 권력독점체제가 최근 시민사회의 집중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바다. 높은뜻숭의교회나 분당우리교회는 이러한 교회 대형화로 인한 폐단을 개혁하려는 대형교회 내부의 흐름을 대표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교회가 주장한 일종의 대형교회 해체의 상징적 선언이 너무나 전형적인 대형교회적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즉 카리스마적이고 독재자적인 담임목사의 독점적 권력이 아니었으면 결코 수행될 수 없는 방식으로 대형교회 해체를 상징화하는 분가 선언이 수행된 것이다.
반면 중소형 교회들, 특히 개혁적 성향의 교회들 대부분은 한 명의 담임목회자가 교회의 권력자원을 독점하는 경우가 많지 않고, 장기간 재임한 경우도 적다. 더구나 이 두 요소가 결합된 대형교회적 권력독점 양식은 상대적으로 매우 드문 현상이다. 향린교회나 강남향린교회, 들꽃향린교회, 한백교회 같은 일부 교회들의 경우는 목사와 장로 임기제를 포함한 교회 민주화 규약까지 마련해 놓음으로써 장기간에 걸친 권력 집중화를 억제하는 장치가 제도화되기까지 했다.
하여 이들 탈권위주의적 교회들에서 분가는 매우 복잡하고 긴 협의과정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담임목사 개인의 결단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교인 하나하나가 참여하는 협의 과정을 통한 교인간의 합의에 있다. 강남향린교회는 목사의 결단이 선행되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전 교인이 다양하게 참여하는 길고 복잡한 논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당시 재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기에 분가선교에 교인들이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았고, 누가 분가한 교회로 갈 것인가를 두고도 쉽지 않은 토론을 진행해야 했다. 결국 2년여 만에 합의가 이루어져 분가 교회인 들꽃향린교회가 설립되었다. 또 향린교회는 창립 때부터 교회의 중심 기조로 분가 정신을 견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데 무려 60년이 걸렸다.
이렇게 작은 교회와 분가선교를 결합시킨 선생의 교회론은 설교들이나 에세이 등에서 별로 다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생이 설립에 관여한 교회들은 예외 없이 그러한 지향을 끈질기게 간직해왔다. 그 결과 선생의 설교를 들은 글의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선생이 설교를 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도 다수였다. 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교회의 문제의식이 깔린 선생의 글은, 비록 분가선교나 작은 교회 운운 하지 않아도, 성장지상주의에 몰두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상실하고 권력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한 선생의 고언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신앙의 물질화와 평신도교회론
이제 ‘작은 교회-분가선교론’과 맞물려 안병무 선생 특유의 교회론을 구성하고 있는 평신도교회에 관한 얘기를 좀더 해보자.
〈목회론―내가 만일 목회를 한다면〉에서 선생이 말하는 목회자는, 그이가 목사든 평신도든, 예배와 교육을 통해 교인을 ‘가르치는’ 역할을 담당하는 지도자다. 여기서 교회의 기능은 ‘가르침’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반면 1985년 말 어느 때쯤 있었던 제자들과의 대담에서 선생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나눔’이라고 말한다. 18 과거에도 나눔의 기능을 간과한 것은 아니지만 청년 안병무가 “내가 목회자가 된다면 ...”이라는 꿈을 이야기할 때(1952년) 예배와 교육에서의 가르침의 역할이 중요했다면, 민중신학자로서 사유가 절정에 이르던 시기(1985년)에 선생은 가르침보다는 나눔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중요한 것은 가르침에 방점이 찍힌 평신도교회가 평신도 지도력을 강조하게 되는 반면, 나눔에 방점이 찍힌 평신도교회는 나눔의 실행자인 교회의 모든 대중의 역할을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이것을 선생은 위의 대담에서 ‘평등공동체’라고 얘기한다. 곧 ‘평신도 지도자 중심’의 평신도교회가 ‘평등공동체’로서의 평신도교회로 강조점이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와 관련해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대략 1980년을 전후로 하여 선생의 사유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전에는 민중신학자의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했다면, 그 이후에는 지식인에 대한 민중의 영향력에 더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1980년의 글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는 중요한 전환을 보여준다. 19 여기서 선생은 그리스도교의 위기의 요체를 민중언어의 유실에서 보면서 민중언어의 복원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완전하게는 불가능하더라도, 지식인인 민중신학자로 하여금 민중과 “함께 살아보는” 것, 하여 신학대학이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민중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20
그렇다면 1985년의 대담에서 얘기한 ‘나눔’은 교회가 교회 밖의 이웃, 특히 “가난한 자, 실권을 박탈당한 자, 여러 측면에서 수난당하는 자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 공동체 지도자들(목사든 평신도든)과 민중인 교인들과의 일치도 의미한다. 21 이러한 교회 내적인 평등공동체적 지향은 교회 내에서 누구도 이야기를 독과점하지 않도록 하는 것,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론장의 형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함께, 누구나 설교자가 되고 예전의 집전자가 되는 실험적 예배 형식으로도 나타났다. 이 무렵 창립한 한백교회는 선생이 설립한 다른 교회들에 비해 평신도 지도자들이라고 할 만한 이들이 별로 없었지만 동시에 민중이라고 할 만한 하층민도 거의 없었다. 하여 이 교회를, 계층을 가로지르는 평등공동체의 실험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교회의 비엘리트 대중이 나누는 평등공동체적 제도를 적극적으로 실험하였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해 보자. 1980년대 중반 경, 선생은 건강히 급격히 악화되었다. 심장질환으로 손에 힘을 쓰지 못하게 되면서 글을 쓰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된 것이다. 이에 제자들이 생각해낸 것이 대담이다. 앞서 언급한 《민중신학 이야기》는 이렇게 해서 태동한 책이다.
한데 이런 방법은 고육지책(苦肉之策)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선생은 대담을 하면서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생각들이 돌출하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하여 선생은 그 이후 “질문이 대답을 낳는다”는 말을 종종 했다. 물론 이 말은 질문이 대답을 제한한다는 뜻이 아니다. 질문을 통해서 선생이 가지고 있던 스토리라인이 변형, 확장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실은 그것만이 아니다. 질문을 통해 선생뿐 아니라, 질문자들도 애초의 생각이 바뀌고 확대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요컨대 질의-응답이 어느새 대화가 되고, 대화는 어느새 이야기를 나누는 양편에게 자기 자신의 생각에 갇혀버린 편견들이 질서에서 벗어나 무한한 상상력과 의미의 바다 위로 자유롭게 유영하도록 이끈 것이다. 대화, 곧 이야기 나눔의 힘을 발견한 것이다.
그 무렵 선생은 한백교회에서 이 이야기 나눔을 예배 속에 담아보곤 했다. 아직 방식이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22 특히 선생이 설교할 때 교인이 즉석에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선생과 토론을 벌이기도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던 것이다.
한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한백교회의 예배터가 한국신학연구소 강당이었기 때문이다. 즉 전형적인 예배당 형식으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높이 턱지어 있는 단도 없었고, 1인용 의자를 둥그렇게 배치하면 앞과 뒤도 따로 없었다. 대담 〈민중공동체―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평등한 교회에 좀더 가까운 공간 형식이 우연히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교인 수가 30여명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그 수는 둥그렇게 둘러 않아 대화 나누기에 적합한 규모다.
이와 같이 선생의 평신도교회론은 초기에 다양한 전문적 소양을 기반으로 하여 스스로 생계를 조달하면서 교인을 가르치는 평신도지도자들의 그룹목회운동에 방점이 찍혔다가, 민중신학자가 된 이후에는 비엘리트 교인들까지도 설교와 나눔의 주역이 되는 평등공동체 논의로 생각이 옮겨졌다.
선생이 평신도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유리된 성직자 중심적 교회는 삶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3 곧 종교의 영역에 갇혀버린 교회가 아닌 삶과 마주하는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한데 1950년대부터 표방된 이런 생각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물질’의 신앙화 문제로서 재해석된다.
‘물질’의 문제가 처음 글로 표현된 것은 《민중신학 이야기》에 수록된 대담 〈하느님나라―민중의 나라〉이다. 24 이것은 〈요한복음〉, 특히 6장에 관한 선생 특유의 해석과 연관되어 있다. 다른 복음서는 성찬 담화를 마지막 만찬 설화와 엮어서 이야기하는 데 반해 〈요한복음〉은 오병이어 설화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성찬이 사람들의 삶과 유리되어 다루어지고 있는 상황, 곧 비역사화, 추상화, 관념화되고 있던 당대 교회의 상황에 대한 〈요한복음〉 저자의 비판신학의 맥락에서 해석한다. 25
한데 6장의 텍스트에서 말하는 성찬의 물질화의 핵심을 선생은 ‘가난하고 권력 없는 이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라고 보았다. 26 다른 복음서는 그 빵과 생선이 ‘제자들/사도들’의 음식이었다. 그리고 예수가 이것을 ‘축사’한 뒤에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기서도 제자들의 선취적 행동이 대중을 선도한다. 반면 〈요한복음〉 6장에서는 최초에 내놓아진 빵이 제자들의 것이 아니라 한 비천한 소년(파이다리온)의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계기가 되어 비상식량을 갖고 있던 이들이 각자 자기의 것을 내놓아 그것으로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먹었다. 이 얘기에서 제자들의 지도적 역할은 사라진다. 예수의 정신에 따르는 가난하고 아무런 권력이 없던 대중이 그 정신에 따라 자기의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성찬의 물질화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하여 ‘물질’이라는, 1980년대 중반에 제기된 화두는 평신도교회에 관한 선생의 신학을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초기의 논점이 변화, 확장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한 명의 목회자 대신 삶과 신앙을 일치시킨 그룹공동체 운동의 지도자들이 평신도교회의 주축이었다. 한데 물질론에 와서는 그런 지도자보다도 무지렁이 대중이 나누는 삶이 더 소중하다. 앞서 선생의 평신도교회론이 가르침에서 나눔으로 강조점이 이동하였음을 얘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물질론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선생의 무수한 설교와 글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성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맥락에서는 영락없이 이 논점이 언급되었다. 하여 선생이 주 설교자로 활동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성찬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성찬 예전 속에 그 정신을 담아보고자 여러 시도들을 했다. 때로는 성찬과 식사를 결합해서 진정한 성만찬을 재현하고자 시도하기도 했고,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유랑하는 이들의 음식인 주먹밥과 찬물로 대체하기도 했으며, 성찬의 집례자와 배분자를 목사와 장로가 아닌, 교회에서 ‘가장 작은/낮은 이’가 맡게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획들은 대개 목사가 아닌 평신도들이 생각해낸 것이었다. 이들은 예배 속에서 새롭게 시연하는 상징적 재현 행위 속에 그 뜻을 어떻게 해서든 담아보고자 하는 노력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해왔던 인습에 머물러 있던 성찬 예전이 잃어버린 뜻을 되살리려는 노력이며, 또한 우리 시대의 맥락에 맞게 새롭게 재구성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지할 것은 선생의 물질 화두는 예배 속의 상징적 재현 행위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삶과 신앙의 합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비역사화, 추상화, 관념화로 가득한 지배적 언술들로 인해 숨겨진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특히 민중 고통의 현장 속으로 신앙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것을 위해서 선생은 교회의 예전들에 대해 말한 것이며, 그 예전을 해석하고 시행하는 주체로 평신도를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예전 속에서 담아낸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생활신앙의 주체 또한 평신도임을 강조한 것이다.
설교의 신학자 안병무의 교회론
서두에서 안병무 선생의 글 가운데 많은 것들이 설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이 글 전체에서 말하고 있듯이, 딱히 설교에서 시작된 글이든 아니든 많은 글은 선생이 설립하고 주요 설교자로 활동했던 교회들의 경험을 담고 있다.
이 글은 그러한 관점에서 거꾸로 글에서 선생의 설교를 상상하고, 선생이 교회에서 말하고 행동했던 것들을 살펴보고자 했다. ‘독자’의 시야에 포착된 글에서 ‘청자’의 상황을 살펴보는 방식이 내가 여기서 취했던 방식이다.
이것을 통해서 나는 선생의 교회론을 읽어보려 했다. 선생은 삶과 유리된 교회에 갇힌 설교자와 서재에 갇힌 신학자의 신학이 아닌 현장의 설교자이자 신학자이고자 했다. 27 그런 점에서 선생의 교회론은 당연히 서재 속에 앉아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특히 선생이 설립하고 주 설교자로 활동한 교회의 경험과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졌다.
작은 교회, 분가선교, 그리고 평신도교회, 이 세 요소가 내가 이 글을 통해 보았던 선생의 교회론의 키워드다. 이 용어들 속에는 선생의 ‘교회 민주화’의 문제의식이 담겨졌고, 신앙의 물질화 논제가 펼쳐졌다. 하여 교회 밖 세계를 향해 선포되어야 하는 하느님의 복음은 바로 교회를 만들어 가는 평신도들의 신앙적 실천을 통해 시작된다. 목회자가 아니라, 교회의 엘리트들이 아니라 가장 작은 자 하나하나의 삶과 신앙, 그것이 교회의 시작이고 선교의 출발점이다. □
- 선생은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1965년부터 대학 강의를 시작했다. 그해 대전감리교신학교(현 목원대학. 1965.9~1966.3)에서, 그리고 이듬해에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1966.9~1969.2)에서, 그 외에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 1968.9~1970.4), 숭실대학(1969.3~1971.3) 등에서 가르쳤고, 1965~1969년까지는 중앙신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강의를 했다. 그리고 1970년 5월부터 1987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17년간 재임하였는데, 두 차례의 강제 해직을 당하여 9년간이나 강의를 할 수 없어(1차 해직: 1975.6~1980.2; 2차 해직: 1980.8~1984.7) 실제 교수 재임기간은 8년이었다. 그렇지만 정년퇴임 이후부터 소천하게 된 1996년까지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한 학기에 한 과목 정도씩은 강의를 계속했다. [본문으로]
- 안병무의 공적 직함 가운데 ‘교수’만큼이나 흔히 사용되는 것은 ‘박사’겠다. 나의 판단으로는 이것은 ‘박사’가 교수보다도 희소하던 시대에 ‘교수’를 좀더 높여 부르는 경칭(敬稱)이었다. 그런 점에서 ‘박사’는 ‘교수’의 다른 표현이다. [본문으로]
- 학생들의 유신반대투쟁을 배후조종한다는 혐의로 1975년 6월에 첫 번째 해직을 당하였고 박정희가 서거한 직후인 1980년 2월에 복직된다. 그러나 그해 8월 신군부의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에 의해 두 번째 해직을 당하였는데, 글이나 강의까지도 불가한 해직이었다. 두 번째 복직은 1984년 전두완 정권이 유화정책으로 기조를 전환하면서 이루어졌다. 한데 이 해직기간에 선생은 해직교수들과 함께 한국기독교와 한국사회에 있어 중요한 사건들을 주도한다. 1차 해직 때에는 해직교수들과 함께 갈릴리교회를 만들었는데, 이 교회는 한국사회의 비판담론으로서의 민중론이 회자되는 대표적 공론장이 되었다. 또한 여기서는 새로운 교회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무수한 실험을 시도했는데, 이것은 훗날 민중신학적 교회들의 형식과 내용에 영향을 미친다. 2차 해직 때에는 선생이 소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한국신학연구소가 주관하고 독일교회가 후원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해직교수들이 주도한 ‘민중론들’을 본격화하게 된다. 하여 1970년대 시작한 비판담론으로서의 민중론들이 학문적 담론화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본문으로]
- 앞의 주3)에서 말한 것처럼 전두환 정권에 의한 강제 해직 때에 수행했던 프로젝트는 한국 민중론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진행된 작업의 결과는 출판되지 않았고, 한국신학연구소에 자료 형식으로 보관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1984년 한국신학연구소가 여기저기 발표된 글을 모아 출간한 《한국민중론》은 이때 논의된 것이 보완된 형태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점에서 선생의 2차 해직 때에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한국 민중론의 산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문으로]
- 심원안병무선생기념사업회가 추모 10주기를 맞아 발간한 《심원 안병무 논저 총목록집》에 따르면 논문, 에세이, 대답, 머리글, 서평, 칼럼, 편집후기 등을 포함한 그의 글 총 편수가 918편이고, 단행본 한글판 개인저서는 28권이며, 공저가 6권이다. [본문으로]
- 향린교회 초기에 선생은 목사가 아님에도 목회 사역도 담당했다. 하여 향린교회는 선생을 ‘담임자’라고 명명했다. [본문으로]
- 안병무, 〈평신도의 목회: 그룹 운동의 방향〉, 《야성》 7(1953.1). 이 글은 《기독교의 개혁을 위한 신학》(한국신학연구소, 1999), 549~555쪽에 재수록되었다.(이하 이 책에서 인용함) [본문으로]
- 《야성》 3(1952.2). 이 글은 《기독교의 개혁을 위한 신학》, 539~548쪽에 재수록되었다.(이하 이 책에서 인용함) [본문으로]
- 이미 1952년 7월에 발간된 《야성》 5집에서 선생은 “평신도의 목회”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그러니까 평신도교회에 대한 생각은 일신회의 생활공동체운동이 교회로 이어지는 1952년 초부터 1953년 5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선생의 민중 메시아론의 성서적 토대가 되는 주객 이분법의 해체를 통한 역사적 예수의 해석은 1979~1981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전한다. 특히 〈민중신학―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34(1981 가을) 참조.[이 글은 〈마가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라는 제목으로 NCC 신학연구위원회 엮음, 《민중과한국신학》(한국신학연구소, 1982)에 재수록되었다.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함] 이런 주객 이분법을 통해 선생의 오클로스론은 1984년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주관의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 신학자대회>의 주제강연으로 행한 〈예수사건의 전승모체〉에서 이론적으로 완성된다.[이 글은 한길사에서 발간한 《민중과 성서》 안병무 전집5 (한길사, 1993)에 재수록되었다.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함] 한편 이러한 오클로스론에 기초하여 선생의 민중 메시아론이 처음 제기된 것은 아마도 1985년 가을에 발표된 글 〈예수와 민중〉, 《신학사상》 50집일 것이다. 여기서 선생은 케리그마를 벗겨낸 〈마가복음〉의 오클로스와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에서 교회의 금관을 벗겨낸 거지들(민중)을 연결시켜 예수가 그리스도일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민중사건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1986년 《신학사상》 55(겨울호)에 게재된 대담원고인 「민중 예수〉에서 민중 메시아론은 보다 체계적인 신학적 논리를 갖추었다. 이 대담은 1985년 말부터 진행된 제자들과의 세 번째 대화의 결과물인데, 이 대화록이 모아져서 《민중신학 이야기》(한국신학연구소, 1987)가 출간된다.(이하 이 책에서 인용함) [본문으로]
- 대담원고 〈민중의 교회〉(《신학사상》 53<1986 여름>) 참조. 이 글은 《민중신학 이야기》에 재수록되었다.(이하 이 책에서 인용함) [본문으로]
- 〈목회론―내가 만일 목회를 한다면〉, 546쪽. [본문으로]
- 안병무, 〈교회 분화론〉, 《현존》 68(1976.2). 이 글은 《불티》(한국신학연구소, 1999), 355~358쪽에 재수록되었다.(이하 이 책에서 인용함) [본문으로]
- 같은 글, 356~357쪽. [본문으로]
- 안병무,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군종 해군》 (1969.3). 이 글은 《기독교의 개혁을 위한 신학》, 549~555쪽에 재수록되었다.(이하 이 책에서 인용함). 여기서 선생은 선교와 교회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요점은 정복적 팽창주의가 아닌, 교회 밖 세상의 구원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행위에 있다(566쪽). [본문으로]
- 〈교회 분화론〉, 355쪽. [본문으로]
- 박종현, 〈한국 오순절 운동의 영성―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성과 성장에 대한 시대사적 회고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 82(2008.4). [본문으로]
- 〈민중공동체―교회〉, 《민중신학 이야기》, 185쪽. [본문으로]
- 《현존》(1980.1•2합본)에 처음 발표된 글이다. 한길사에서 발간한 전집 6권에는 이 글이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로 제목이 수정되어 수록되어 있다.(이하 이 책에서 인용함) 한편 같은 출판사에서 1986년 발행한 선생의 글 모음집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에는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라는 제목으로 두 편의 글이 수록되어, 1과 2라는 숫자로 구별하고 있는데, ‘1’로 분류된 것이 《현존》에 실린 글이고, ‘2’로 분류된 글은 1985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주제강연 원고이다. 후자는 나의 이 논의에서 그다지 관심을 끌 만한 내용이 아니다. [본문으로]
- 위의 글 65쪽. [본문으로]
- 《민중신학 이야기》, 184쪽. [본문으로]
- 이런 대화적 실험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2010년대 어간 이후에 이 교회만의 대화설교의 전형들이 교인들 사이에서 일상화되었다. [본문으로]
- 1953년에 쓴 글 〈평신도의 목회―그룹운동의 방향〉에서 이미 노동과 복음사역의 일체를 주장했고, 〈한국의 교회〉, 《현존》 2(1969.8)[이 글은 《불티》, 332~334쪽에 재수록되었다.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함]에서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다. 여기서 평신도교회의 신학을 주도하는 이는 “평신도와 직결된 목회자”이며, 그 신학은 “평신도의 삶 한 복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333쪽) [본문으로]
- 실제 대담이 이루어진 시기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1986년 말에서 1987년 상반기 사이의 어느 때인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민중신학 이야기》, 244쪽. 한편 선생은 1987년 한신대 신학대학원생들과 했던 수업 ‘요한복음 세미나’에서 〈요한복음〉에서 6장의 텍스트뿐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 설화’ + “예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4장), ‘소경을 눈 뜨게 하는 설화’ + “예수는 생명의 빛”(9장), ‘나사로 소생 설화’ +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11장) 등 세 개의 텍스트를 더 들면서 ‘신앙의 물질화’,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신학의 중심 테마임을 이야기한 바 있다. 이에 대하여는 나의 책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요한복음》의 〈넷째 마당, 배부름〉을 보라. [본문으로]
- 같은 책, 246쪽. [본문으로]
- 〈한국의 교회〉, 33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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