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가 발행하는 신문 [종교와 평화] (2008.12.20)에 기고된 글
순혈주의 국적 담론, 과연 개선되었는가
한국정부와 다문화주의
국내 체류 외국인의 수가 올해 117만 명을 넘어, 전 인구의 2%를 상회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중 다수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더 나은 기회를 얻으려고 국내로 유입된 외국인이다. 도시에서 시골까지 전국 구석구석에서 외국인, 특히 이주노동자나 결혼이민자, 탈북자 등과 마주치는 일은 더 이상 낯선 경험이 아니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공산물이나 농수산물 가운데 그네들의 손길은 구석구석까지 스며 있다. 식당을 가도 그네들이 있고, 회사의 잡역 노동자 중에도 흔히 발견된다. 건축현장, 농장이나 과수원 등도 예외가 아니다. 시골은 물론이고 도시의 상대적인 저소득층 지역의 학교에서도 다문화가족의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TV 다큐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드라마에서도 이들의 이야기를 종종 접할 수 있다. 이제 상대적으로 열악한 이주 외국인의 문제는 어느새 일상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있다.
하여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에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국적 문제가 제기된다. 법제적 차원에서만 보아도 한국의 시민권 문제, 즉 거주, 이동, 노동, 의료, 교육 등의 권리상의 제약이 수많은 국내체류 외국인에게 생존의 위협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국적과 관련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에서 법제적인 요소는 비록 개선 정도는 낮아도 경각심 수준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의 소재였다. 여기에는 시민사회적 지원단체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고,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참여정부의 노력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보수적인 MB 정부 출범 이후 ‘이주노동자방송’(MWTV)에 대한 정부 지원이 끊겨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편 국적의 문제를 담론의 차원으로 확대해서 바라보면 더욱 암담한 현실에 접한다. 지난 2007년 8월,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가 한국의 단일민족 강조에 대해 우려를 표한 것은 대표적인 예다. 다문화정책의 필요성과 현실적인 난점에 대한 한국 정부의 보고서가 오히려 혈통주의적 편견을 담고 있다는 국제적 문제제기를 받은 것이다. 그간 한국 정부들 가운데 다문화주의 정책을 가장 활발히 수행한 참여정부가, 전략적인 언술들로 정교하게 다듬었을 보고서에서조차 몸에 밴 혈통주의적 국적 개념을 무심코 드러낼 정도로 순혈주의(純血主義)에 대한 인식은 뿌리 깊게 자리잡은 것이다.
사실 참여정부 시대에 한국사회는 다문화담론이 폭넓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다문화 담론을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제도화하였다. 법무부, 보건복지부, 교육부, 행정부, 여성부, 문화체육관광부, 그밖에 여러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나름의 다문화정책안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이러한 다문화정책들은 많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점이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지적된 바 있다. 우선 부처별, 지자체별 논의들이 서로 조율되지 않아 제도적 혼선이 적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민사회적 인식의 전환을 위해 그다지 기여하지도 못하였다. 또한 관주도적이고 사회통합모델에 초점을 두고 있어, 정작 외국인 이주자들 자신의 목소리는 오히려 주변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의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지적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외형적으로는 혈통주의를 공공연히 드러내지는 않지만 외국인 이주자들 자신의 주체화를 억제하고 ‘동화(同化)’를 다문화정책의 목표로 은연중 설정하는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사람들이 함께 삶을 나눈다는 것은 다수자와 소수자 간의 상호영향을 전제한다. 그런데 다문화정책은 이러한 상호영향 메커니즘에 다수자에 의한 동화주의가 작동하는 걸 억제하고, 소수자의 주체화를 활성화하려는 제도적이고 담론적인 사회적 장치들을 통해 구현된다.
물론 참여정부의 일견 진취적인 외국인 이주자 정책은 공공연한 동화주의를 추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지양하고자 한다. 그러나 정부 관료의 인식적 문제의식이 전환되지 않은 채 각 부처와 지자체 간의 이벤트성 다문화주의가 앞 다투어 시도된 것이 참여정부의 다문화주의의 실상이다. 한 연구자는 이러한 자가당착적 시행착오의 근저에는 다문화주의를 일종의 소수자에 대한 온정주의(paternalist)로 왜곡되게 이해한 결과라고 보면서, 이것은 소수자 자신의 주체화를 제약하지 않으면서 시민사회 내에서 공정한 상호간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담론적 노력이 요청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심보선)
실제로 지난 2005년에 문화관광부가 지원한 ‘외국인노동자 문화축제’의 경우, 이주노동자 자국의 문화와 한국문화간의 소통과 교류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정부 관료는 거기에 참여한 이주노동자 밴드의 명칭(스탑크렉다운: “강제 추방 중단하라”)을 문제시한다든가 연주할 노래에 간섭을 하는 등, 소수집단의 자기표현을 억제하고 순화된 형식으로 행사를 진행하려 했다. 이것은 이 축제가 정부의 다문화주의적 노력을 홍보하고 성과를 과시하려는 데 과도한 목적을 두고 있었고, ‘순화된 이주노동자’이기를 강요하는 원초적 동화주의를 답습하였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른바 불법체류자에 대한 강제연행 및 추방, 그 과정에서의 가혹행위 등을 전혀 개선하지 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노동자의 불법체류는, 알다시피, 단지 개별 이주민의 부정직성의 결과가 아니라 송출국과 유입국, 그리고 두 나라 정부가 방조하는 브로커들의 부당한 착복이 이주자들의 생존전략을 강제한 측면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러한 문제는 양국의 보다 근원적인 문제와 연결된 탓에 개선이 쉽지 않다. 아무튼 불법체류자 문제는 정부와 시민사회가, 의도하지는 않았더라고, 공모한 결과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다문화주의는 최소한 불법체류자에 대한 가능한 제도적 담론적 개선을 동반해야 하는데, 참여정부의 모색은 약간의 제도적 개선에만 그쳤을 뿐이고, 과시성 정책이나 행사에 너무 치중한 결과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인종차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회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참여정부의 실패한 다문화주의를 비판하고 성찰을 촉구할 틈도 없이, 우리는 MB정부의 지나친 천박한 자본주의적 지향에 당혹하게 된다. 아직 명료한 정책의 기조가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주노동자방송’에 대한 정부 지원을 끊는다든가, 그나마 과시성 다문화 프로그램도 현저히 후퇴하고 있다. 또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착 및 지원 업무를 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비정부 기관인 중소기업중앙회로 이관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부가 이 문제를 공공성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고용주의 생산성의 문제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에도 그런 인식은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최소한 참여정부는 인권 차원의 공공성 시각을 모순적이더라도 견지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반면 MB 정부는 보다 노골적으로 이주노동자 문제에서 인권적 문제의식을 포기하는 듯이 보이고, 그런 점에서 다문화적 지향이 거의 철회된 것으로 보인다.
다문화주의를 성찰할 틈도 없이 다문화주의는 형해화되고 있고, 그러한 문제의식의 첫걸음인 인권의 관점조차도 실종될 가능성 앞에 놓여있다. 요컨대 우리사회는 국제적으로 인종차별국가로서 명실상부한 위치를 잡아가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선정하는 ‘10대 인권보도’ 후보로 선정됐던 한 목사이자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가는 ‘모든 사람에는 신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인권의 기본적 문제의식임을 말한 바 있다. 그런데 MB정부의 대통령이자 개신교회의 장로인 이는 이 말과는 다른 신앙과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그게 무엇인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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