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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안녕들 하십니까" - 주님의 오심을 기리며 성찬을 나누다

한백교회의 성탄전야예배(2013. 12. 24)의 성찬나눔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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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주님의 오심을 기리며 성찬을 나누다

 



 

안녕들 하십니까대자보가 전국을 휘몰아쳤습니다. 지난 1210일 한 고려대학교 학생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전지 2장짜리 대자보를 써 붙인 이후, 수많은 릴레이 대자보가 이어졌던 것입니다. 수많은 대학 게시판뿐 아니라 고등학교 벽에도 붙었고, 버스정류장, 지하철역, 공원 전봇대, 아파트 단지 등에도 안녕들 하십니까대자보가 붙었지요. 국내만이 아닙니다. 해외에서도 유학생들, 교포들 등이 붙인 릴레이 대자보가 있었지요.


이 릴레이는 인터넷 공간에서도 이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의 것 혹은 자기 자신이 쓴 대자보를 사진 찍어 넷 공간에 퍼나르고, 또 많은 사람들은 대자보(大字報)가 아닌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에서 직접 쓴 소자보(小字報)를 넷 공간에 유포했지요. 하여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한국인들이 쓰는 가장 평범한 인사말은 20131210일 이후 오늘까지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특별한 말로 우리 사이에서 우리를 담아냈던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대자보 릴레이가 담고 있는 특별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한 신문사가 이 대자보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대학에 붙은 대자보 92, 고등학교에 붙은 대자보 4, 그리고 해외에서 유포된 대자보 4, 도합 100개의 대자보를 단어들의 사용빈도를 중심으로 분석한 기사를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 대자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명사 단어는 무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안녕입니다. 730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자보 한 장당 7.3회가 사용된 셈이지요. 그다음 빈도의 단어는 세상혹은 사회로 두 단어가 도합 317회 사용되었습니다. 그 다음 순위에 드는 단어는 직업과 생계에 관한 단어들인 취업’, ‘노동’, ‘일자리’, ‘비정규직’, ‘스펙’, ‘알바233회가 쓰였고, 불확실한 혹은 불안한 미래에 대한 실존적 두려움을 담은 단어들인 생각’, ‘고민’, ‘불안등은 212회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부’, ‘학업’, ‘학점’, ‘시험’, ‘수업’, ‘도서관’, ‘과제’, ‘토익같은 공부와 관련된 단어들이 도합 202회 사용되었는데, 여기에는 아등바등 공부에 매달리며 살아도 미래가 안 보인다는 생각, 혹은 그렇게 공부에 눈 감고 귀 막고 사느라 잘못되어 가는 세상을 억지로 외면해왔다는 자성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반면 이 대자보에는 거의 혹은 전혀 사용되지 않는 단어들도 있습니다. ‘투쟁’, ‘총학’, ‘애국’, ‘해방’, ‘단결’, ‘혁명’, ‘진군’, ‘구국’, ‘출정, 과거의 대자보에 흔히 사용된 단어들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런 새 세계에 대한 비전을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 기획에 대한 열정을 잃은 불임의 세대, 그 불안한 자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대략 이런 분석입니다. 전체적으로 대자보에 자주 쓰인 단어들에는 이 시대 사람들의 슬픈 실존적 자아상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이 대자보에는 고단하고 힘겨운 세상살이에 찌들어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슬픈 직시의 눈길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앞길이 막막하여, 살아남기 위해 틈도 없이 어디론가 숨차게 달리고 있지만, 그 미래가 그다지 기대되지 않는 절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현실의 고단함과 미래의 막막함에도 불구하고 아등바등 사느라 가족이, 동료가, 이웃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해 왔다는 자성의 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웃의 고통에 눈감았던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한 속죄의 마음 말입니다. 하여 이 대자보는 일종의 고해성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대자보들은 새 세계를 향한 예언자적 외침이라기보다는 죄책과 자기 성찰을 고백하는 실존적 기도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해 왔던 입에 발린 소리들이 잔뜩 나열된 상투적 기도가 아니라, 절절한 자기 내면의 소리가 담긴, 일종의 한백이 추구하는 기도인 삶의고백같은 것이 바로 이 대자보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를 향한 삶의 고백일까요? 저 위에 있는 전능자를 향한 고백은 물론 아닙니다. 그들이 고백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주변 사람들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주변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읽으며 함께 공명하는, 주변의 자기 성찰의 주체들입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 물음 형식의 이 제목은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자기 고백을 하는 이들은 주위 사람들도 비슷한 비루함에 매여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대자보, 그 자기 고백에는 비루한 현실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려 했던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몸부림, 그 순간의 자기 초월의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즉 자기만을 향했던 눈이,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고, 그 이웃을 향해 당신들도 힘겹지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하여 이 자기 성찰의 고백은 동시에 우리 함께 이런 성찰의 고백을 나눠보자는 권유이기도 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하느님이, 우주의 이치가, 혹은 진리가 어디 있느냐고 절규하는 내가, 그이는 바로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절규하고 있고, 나아가 그런 절규를 하는 우리 사이에서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즉 이 대자보의 자기 성찰적 고백은, 나만의 아픔에 대한 생각에서 신도 함께 아파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 내 주위의 모두가 그렇게 아파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신학적 인식과 유사한 체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그리스도교 신학은 내재하는 하느님신학이라고 말합니다. 한백이 공중 기도의 시간에 삶의 고백이라고 하는 새로운 기도 형식을 사용하는 것도 바로 그런 신학적 해석이 담긴 것이지요. 아무튼 이 대자보 릴레이 현상에는 내재하는 신, 내재하는 우주의 이치, 내재하는 진리를 향한 대중의 삶의 고백, 그 실존적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이 오심을 처음 기렸던 그 시대 그곳의 대중은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회당에서 두 손을 활짝 벌리고 저 높은 곳, 하늘의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그런 전능적 초월자를 향한 기도가 아닙니다. 질박하고 비루한 현실을 사느라 그 속에서 아등바등 했던 자기 자신을 속죄하고, 자기뿐 아니라 더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을 위해 가장 밑바닥의 대중 한 가운데로 와서 그 고통을 고스란히 몸으로 체감하는 분에 대한 고백에 이른 이들의 기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오심을 처음 기렸던 이들의 기도, 그 삶의 고백이었습니다.


1224, 성탄 전야는 바로 그런 처음의 고백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그때 그곳에서 그렇게 주님의 오심을 기리며 기도했던 이들의 마음이 되어보는 날입니다. 교회가 그 날의 뜻을 잃어버린 가운데,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대중이 대자보 릴레이를 통해 그날을 기리는 고백을 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도 그 고백의 대열에 서서 주님의 오심을 기리며 기도하는 마음, 자기만을 보았던 삶을 속죄하고 이웃에게 열린 마음을 갖고자 한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떡과 포도주는 바로 그날의 고백을 되새기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님이 그런 우리와 함께 아파하며 절규하고 있다는 표식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과 절규가 나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공감으로 이어지는 성찰임을 나타내는 표식입니다. 곧 떡과 포도주는 우리 마음에 새겨진 대자보이며, 우리 사이에 그 성찰의 모습으로 함께 하는 주님의 살과 피입니다.


이제 그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그 뜻을 마음에 모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1123~25절에서 바울이 쓴 성찬 나눔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고백으로 다시 쓰면 이렇습니다. 이것은 너희와 함께 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먹고 마시며 나를 기억하여라. 그 먹고 마시는 의례를 행할 때마다 그 속에 담긴 나의 뜻을 되새겨라. 나는 그 속에서 너와 함께 하고 이웃과 함께 하며 그 모두와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공감을 나눈다. 너희도 이 나눔 속에서 나에게 열리고 이웃에게 열리는 성찰의 고백을 하여라. 그리고 이 삶의 고백을 성찬 나눔의 때마다 되새겨라.”


그런 마음으로 떡을 나누겠습니다. 각자 우측 손으로 떡을 눈높이만큼 들고, 다른 손으로 동료의 손을 잡으십시오. 떡을 사이에 두고 보이는 동료의 눈을 바라보고, 잡을 잡은 동료의 체온을 느끼십시오.


다 같이 고백하겠습니다. “이 떡은 당신의 몸입니다. 이 떡은 나와 아픔을 같이 하기 위해 내 자신이 된 당신의 몸입니다. 이 떡은 내가 바라보는 동료, 내가 잡고 있는 동료, 내 이웃이 된 당신의 몸입니다.”


다 같이 주님의 살을 상징하는 떡을 먹겠습니다.

이제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시고자 합니다. 우측 손으로 포도주잔을 쥐고 눈높이만큼 들어 올리십시오.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이의 눈은 그이 안에 있는 주님의 눈입니다. 내가 잡은 동료의 손은 그 안에 있는 주님의 손입니다.


다 같이 고백하겠습니다. “이 술은 당신의 피입니다. 이 술은 나와 내가 바라보고 내가 손을 마주잡은 동료들과 함께 하는 주님의 열정이자 의지입니다. 하여 이 술은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낯선 타인을 이웃으로 모시려는 우리의 신앙과 실천입니다.” 다 같이 주님의 열정과 의지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시며 그 뜻을 기리겠습니다.


눈을 감고 좌우 사람과 손을 잡으십시오. 손의 체온을 느끼고 부여잡은 손의 힘을 느끼며 우리 사이에서 우리가 된 주님의 뜻을 되새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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