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늘뜻나누기(설교)

우울증과 애국

이 글은 2014년 1월 5일에 했던 한백교회의 하늘뜻나누기 원고입니다.



--------------------------------------

 

 


우울증과 애국

 



 

그대는 나더러 '이스라엘을 치는 예언을 하지 말고,

이삭의 집을 치는 설교를 하지 말라'고 말하였소.

―「아모스서7,16

 

 


번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새해의 첫 시간엔 샴페인 터뜨리는 소리도 환호성 소리도 없었습니다. 촛불 켜고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지도 않았습니다. 새벽 한적한 길로 드라이브를 하지도 않았고, 해돋이 여행을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언젠가 한두 번씩 했던 이 이벤트들은 옛날 얘기였을 뿐입니다. 12월 초부터 거의 모든 원고 청탁을 거절하고 책 한줄 안 읽고 보낸 한 달의 끝을 지난 뒤, 오랜만에 맞는 한가한 새해 첫날 첫 시간은 참 쓸쓸한 밤이었습니다.


잠이나 자야지 하며 누운 지 불과 삼십분도 못되어 다시 일어납니다. 무심코 TV를 켭니다. 수없이 채널을 바꾸기만 하다 벌떡 일어나 물 한 컵 들고 돌아오다 책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책이 보입니다. 그것을 꺼냈다 머리글 한 페이지를 채 읽지 못하고 꼽아 넣기를 수십 번. 다시 방을 나가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그리고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가만히 앉습니다.


지난 십년 이상을 무수한 글을 썼고 여러 권의 책을 썼던 그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켭니다. 필경 지난 십년 이상 이 모습은 가장 익숙한 나의 자세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이 컴퓨터를 바라보는 이 날의 모습이 낯설어 잠시 차갑게 미소를 지어봅니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신문들을 훑습니다. 그러나 제목만 읽을 뿐, 내용을 열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간혹 어떤 것들은 보아야 할 것 같은 마음에 클릭해보지만, 역시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페이스북을 열어봅니다. 친구 신청한 이들이 8, 새해 인사 메시지가 5개나 있습니다. 얼른 응답을 하고 타임라인의 글들을 훑어봅니다. 철도노조에 관한 글들이 넘쳐납니다. 정부와 보수언론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들과 냉소들. 무력해진 나와는 달리 많은 이들은 좀 과한 흥분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지요.


이날 나는 수면장애와 집중력 저하, 의욕상실 등의 증상을 드러냈습니다. 한 후배 심리학자는 이를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기분장애 증상으로 가벼운 우울증 현상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페이스북을 보면 많은 이들의 일시적 조증 증상이 엿보인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새해 첫날 페이스북에서 느낀 것과 부합하는 해석입니다. 얼마 전 읽은 한 글에서도 오늘의 사회를 조증과 우울증의 사회라고 해석하고 있지요.


만약 그렇다면 그날의 나의 경험은 오늘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집단적인 기분장애 증상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집단적 우울증과 조증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전 세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자살률은 아마도 집단적 우울 증상이 우리사회에서 얼마나 심각한 병리적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한편 최근에 쓴 글에서 내가 주장한 격노하는 사회라는 주장은 우리사회의 집단적 조증의 심각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기분장애 증상이 특별히 심각하게 발현하게 된 것은,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1997년 외환위기의 여파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이후 사회는 빠르게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화염 속으로 빨려들어 갔고, 사람들의 고통은 질적으로 극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이후 MB 정권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날 가능성에 대해 막막함을 느끼는 절망 상황에 빠지게 되었지요.


지난 대선에서 박정희와 노무현 메시아주의가 물결쳤던 것을 기억하는지요. 나는 그것이 이런 절망감에서 헤어 나올 계산 가능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던 이들의 종교적 갈망의 표현이라고 해석합니다.


절망감의 극대화는 사회의 전반적인 종교화를 낳은 것입니다. 한데 이러한 종교적 갈망은 기성의 종교들에서 해소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종교도 사람들의 고통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고 고통의 사회적 배후를 읽어내려는 시도와 집단적 절망감의 치유에 힘을 쏟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게 적절할 것입니다. 하여 기성의 종교에서 해소되지 못한 사회적 종교성이 사회 이곳저곳을 부유하면서 간간히 폭발하곤 했는데, 정치의 해인 2013년에 그 종교성이 머물렀던 대표적인 장소는 메시아주의 정치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탄생은 박정희 메시아주의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한데 박근혜 정부는 고통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사회를 치유하는 데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치유란 법과 제도를 통한 치유인데, 선거 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의제들인 복지나 경제민주화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박근혜 정부 1년은 그러한 열망으로부터의 배신의 기간이었습니다. 또 최근 부상한 민영화 반대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제도적으로 약속하기보다는 희석화하는 데 치우쳐 있는 듯이 보입니다.


대신 국가가 열을 올린 것은 사회적 종교심을 악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공포마케팅입니다. 이른바 종북몰이가 그것이지요. 북한을 악마화하고 그 악마와 손잡은 내부의 적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공포심을 이용한 반공주의 종교를 활성화시킨 것입니다. 한데 이 유사종교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공포심을 분노로 표출시키는 신앙심을 양산하는 데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퇴행적 신앙심을 애국심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부가 종북이라고 규정한 이들은 곧 국가를 해치는 자들이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가령 이번 철도노조의 파업을 불법이라고 규정하는 정부 주장의 근거는 파업의 목적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파업을 정부 정책에 대한 찬반 여부로 검증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노동기구의 관점과는 정면 배치되는 논리입니다. 정부는 이렇게 국제표준을 공공연히 어기면서 노동자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부 정책에 찬성하는 것이 애국이며, 반대하는 것은 국가에 폐해를 입히는 행위이므로 그들은 국민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며 법은 의당 그들을 처벌하는 게 옳다는 주장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28백 년 전 이스라엘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리가 정부에 의해 설파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국은 지배층의 향락문화가 만연하고 있었고, 그에 대비되는 사회적 빈곤화 또한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부유층들이 대중의 한 조각 식량까지도 강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것을 억제하는 법과 정의는 거의 작동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불의한 사회를 지탱하고자 국가는 연일 화려한 제의를 국가성소에서 드립니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국가의 번성이 곧 백성의 번성임을 강변했고, 현실을 감내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신의 명령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한 예언자가 나타나 사회의 부조리를 낱낱이 고발하고 그것이 신의 뜻을 어기는 것임을 절규하듯 외칩니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국의 봉신국이던 유다국의 소농 출신으로, 이스라엘국으로 이주해온 노동자였던 듯합니다. 한데 그가 어느 날 신의 신탁을 받았다며, 정부와 부유층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아마도 국가성소에서 전국의 많은 이들이 모여 제를 드릴 때에 이 예언자의 주장은 그곳에 모인 많은 노동자들과 소농들의 주목을 받았던 듯합니다. 하여 이곳 성소를 대변하는 제사장 아마샤가 나서서 그를 공박하며 기소합니다. “이곳은 왕의 성소다. 너 같은 이방인이 함부로 입을 놀릴 그런 곳이 아니다. 너는 지질히 가난한 네 고향에서나 예언이랍시고 하고 그것으로 밥벌이하며 살아라.”


그러나 예언자는 말합니다. “당신은 나더러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예언을 하지 말하고 위협하고 있소. 하지만 바로 그런 식의 호도하는 말로 인해 이스라엘이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오. 당신의 아내는 적에 의해 농락당할 것이고 자녀들이 학살당할 것이며, 남은 이들은 사로잡혀가 그 땅에서 죽게 될 것이요.” 곧 공의를 외면한 이른바 애국심의 말이야말로 사회를 회복할 수 없는 재앙에 빠지게 할 것이라는 얘기지요.


이 예언자의 이름은 아모스입니다. 훗날 많은 이들에 의해 정의의 예언자라는 별명이 붙은 바로 그이입니다. 한데 아마도 그는 이 굽히지 않는 말로 인해 당국에 의해 기소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이 나라는 급격하게 쇠락했고 결국 예언자의 말대로 처절한 멸망의 재앙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시 우리 사회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사회의 집단적인 기분장애 증상에 대해 종교야말로 가장 중요한 치유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치유자로서의 종교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국가가 법과 제도로서 치유를 수행하였음에도 남은 이들, 그 버려진 이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일일 것입니다. 일찍이 민중신학자 서남동 목사께서 민중신학자는 한의 사제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모든 종교인과 종교기관이 그 과제를 외면하였기에 민중신학자가 그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즉 모든 종교인은 한의 사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데 지금의 문제는 국가가 치유 자체를 방기하고 심지어 사회를 더 병들게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때 종교는 아모스처럼 그런 국가를 고발하고 공의를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오늘의 종교인은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하고 동시에 공의를 외면하는 국가를 비판하는 예언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올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