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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화쟁(和諍)

한백교회 2013년 12월 29일에 했던 하늘뜻나누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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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和諍)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마태복음22,21b

 

 


25, 전국의 모든 교회에서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무수한 성직자들이 거룩한목소리로 선포하던 날,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살리시네라고 성가대의 웅장한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날, 한 노동자가 조계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경찰의 체포망을 피해 쉴 곳이 필요했고, 어떤 대화도 하지 않으려는 정부와의 협상을 위한 중재자가 되어줄 이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그가 선택한 곳이 불교 사찰이었습니다. 왜 그는 천주교 성당도, 개신교 교회당도 아닌, 불교 사찰로 들어갔을까요? 그것도 구세주의 오심을 기리는 크리스마스에 말입니다.


물론 크리스마스에 그가 숨어들어온다면, 수천 명의 경찰이 교회당 혹은 성당을 둘러싸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할 것이고, 기자들 수백 명이 무질서하게 취재경쟁을 벌이는 혼잡한 광경이 연출되었겠지요. 그것은 그 교회당/성당의 연중 가장 중요한 축제를 벌집 쑤시듯 망쳐놓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교회당/성당으로 오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입장을 바꿔서 그가 경찰을 피해 들어온 날이 다름 아닌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역시 불교도들로서도 상상하기 싫은 사태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결코 다행으로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최고 명절에 그 종교는 타인을, 쉴 곳이 필요하고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그런 이를 환대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할 테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구세주가 세상에 온 것이 온 땅의 평화를 상징한다고 큰 소리로 떠벌렸지만, 실상 그것을 기리는 날은 오직 자기들만의 축일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자인한 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면 과연 누가 떳떳한 신앙인일 수 있을까요? 정부를 비판하고 노동자를 두둔하는 것이 공공의 가치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우리 자신도 그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의 비공공성 문제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정부 정책과 공공성에 관한 얘기를 해봅시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얘기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사회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광폭한 소용돌이 속으로 거칠게 빨려들어 가는 직접적인 계기였습니다. 198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등장했던 신자유주의적 지구 자본주의의 물결은 작은 정부라는 이데올로기적 슬로건을 따라 무수한 공공기관들을 민영화하였지요. 한데 그것이 복지사회를 심각하게 침해했고, 사회의 공공적 가치를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계기였습니다.


이 신자유주의적 민영화는 때로 사회의 총량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해서 보수주의자들은 민영화가 사회의 몰락을 막아내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식의 대안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사회적 안전망에 치명적인 폐해를 안김으로써,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질이 퇴락하게 되었다는 것은 거의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입증된 바입니다.


한데 1997년 이후 한국사회도 민영화의 흐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의 민주개혁정권을 거친 뒤 등장한 보수적 정권들은 훨씬 더 급격하게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지요. 이번 철도파업 사태도, 정부가 극구 부인하고 있음에도, 민영화로의 수순임은 외국의 사례들에서 예외 없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교육, 보건의료 등에서 현 정부의 민영화를 향한 뚜렷한 궤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만약 우려하는 대로라면, 소득이 낮은 사람들은 기초적인 이동의 권리, 교육의 권리, 건강의 권리를 침해당하게 될 것이 분명하며, 또 이러한 민영화 과정에서 재산이 증식할 소수와 감소할 다수로 사회의 양극화가 훨씬 심화될 것 또한 분명합니다. 한편 이런 분위기를 타고 지자체들도 앞 다투어 민영화 러시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부와 지자체들은 성장의 위기에 놓인 사회를 회복하기 위해 공공성을 훼손하는 아주 위험한 모험에 뛰어들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철도노조가 국가의 민영화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사회의 공공성을 지탱하려는 시민사회의 안간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사회적 저항에 동조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대항하는 생명연대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종교계는 이러한 시민사회의 공공성을 위한 투쟁의 대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활동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개신교와 불교 성직자들, 그리고 평신도 혹은 재가신도들도 생명연대의 주요 행위자로 부상하고 있지요.


이러한 종교계의 저항에 대해서 정부와 보수언론, 그리고 보수주의적 종교인들은 늘 그렇듯이 정교분리론을 들고 나옵니다. 종교는 영적인 영역을 담당해야 하고, 세속 영역은 국가가 담당할 몫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택한 성서 본문은 그러한 정교분리론을 지탱하는 것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구절에 속합니다. 황제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면 말입니다.


하지만 세 공관복음서 모두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공히 예수를 고발하려는 이들의 함정질문을 피하려는 그이의 기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의 정당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어떤 본문들도 영과 세속의 이분법을 정당화하는 식의 정교분리론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한편 이러한 정교분리론 해석은 헌법 정신에 대한 해석으로서 타당하지 않습니다. 정교분리의 원리를 헌법화한 최초의 사회는 미국입니다. 1791년 연방헌법의 수정조항 제1조에 포함된 정교분리 규정은 특정 종교를 특권화하기 위한 국가나 종교의 행위를 제약하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즉 특정 종교의 권력화로 인한 종교차별을 억제하려는 법 규정이지, 공공적 가치를 훼손할 것이 우려되는 정책에 대한 종교의 반대를 억제하는 규정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법해석은 정교분리를 헌법화한 모든 사회에서 예외 없습니다.


또 정교분리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종교는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에는 종교정당이 존재하고 있고, 미국은 대통령 취임 선서를 성서에 손을 얹고 하며 개신교 성직자가 축도를 하는 등 은연중 국교처럼 존재하는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동지사대학교 신학부 교수인 모리 고이치는 이를 미국사회의 보이지 않는 국교라고 불렀지요. 또 좋은 사례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개신교는 장로대통령 만들기를 노골화했고, 성시화 운동이 붐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정부의 민영화 정책이나, 그 반대자들, 특히 종교인들을 비판하기 위해 정부가 사용한 프레임인 정교분리론은 정부가 공공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철도노조와 그 주장에 동조하는 시민사회와 종교인들은 공공성의 가치, 생명의 가치로 네트워크된 사회적 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도 내면에 은폐된 비공공성을 품고 있다는 점이 우리를 한계에 빠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공성의 연대, 생명연대의 진정한 일원이 될 수 있을까요? 나는 화쟁이라는 불교적 가치에서 그 한계를 넘는 실천의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조계사로 피신해온 노동자는 화쟁위원회 위원장인 도법스님을 만났습니다. 불교의 생명살림운동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고승은 특유의 소탈함과 겸허함으로 노동자를 맞이했고 정부를 대리하여 찾아온 철도공사 사장과의 대화를 주선하였습니다. 수많은 기자들이 취재하는 자리에서 스님은 노동자와 공사 사장의 손을 맞잡게 하고 그이들의 손을 감쌌습니다.


여기서 스님은 이미 정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비록 정부가 이 타협을 사실상 거부함으로써 좌절로 돌아갔지만 스님의 정치 개입의 방식은 하나의 유의미한 선례가 되었다고 봅니다. 스님은 양자를 협상의 자리로 안내했고, 그들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습니다. 그것은 노와 사(정부), 그리고 시민사회의 대타협을 향한 요청입니다.


나는 악수하는 둘의 손을 감싼 스님의 손길에서, 그 자신의 직위가 말해주는 것처럼, 일종의 화쟁(和諍)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 주장과 다른 주장이 갈등할 때 양자를 진리 대 거짓의 대립으로 보지 않고, 진리 속에 거짓이 들어 있고, 거짓 속에 진리가 들어 있다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점에서 타협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노--시민사회의 타협은 결코 한 번에 절충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협상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감싼 손은 맞잡은 손 간의 신뢰회복을 향한 메시지이고, 그 과정에서 상생의 길을 찾아가라는 격려의 신호입니다. 즉 종교의 바람직한 정치 개입의 하나는 바로 화쟁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