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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낡은 ‘한국전쟁의 신앙화’, 이제는 리셋해야

이 글은 한국종교인평화회의의 기관지 [종교평화] 2015년 6월호에 실린 칼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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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한국전쟁의 신앙화’, 이제는 리셋해야

  

 

 

 

195565일 한 설교에서 한경직 목사는 거리에서 유리걸식하는 수많은 대중을 보며 울컥한 마음에서 마태복음9,37목자 없는 양을 이야기한다. 하여 그는 저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이 시대 기독교도의 소명임을 전하고 있다.

당시 한경직은 단지 한 사람의 목사가 아니었다. 1947년 이후 줄곧 그는 남한 최대 교회의 담임목사였고, 교육기관 복지시설 병원 언론사 출판사 등 정부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사회적 기관의 운영 책임자였으며, 미 군정당국이나 이승만 정부 그리고 미국 장로교회가 가장 신뢰하는 한국인이었다. 또 한국전쟁의 발발과 지원요청을 가장 먼저 세계에 전한 이도 그였다. 이 사건은 그가 전 세계 기독교 사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이로 인식되게 하는 계기였다. 1955년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총회장이 됨으로써 명실상부 1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1955년 당시 그의 설교는 단지 한 명의 목사의 설교가 아니라 남한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지도자의 설교였다.

게다가 한국에 답지한 전쟁 구호물자의 절반 이상이 세계 개신교 교회들이 보낸 것인데, 그 대부분을 위탁받아 배분 책임을 맡은 기관은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산하부서인 기독교세계봉사회였다. 한데 구호물자들의 실질적인 배분에 관여한 이 단체의 한국위원회 구성에도 한경직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가 목자 없는 양에 관한 안타까움과 기독교도들의 책임에 대해 말한 것은 실제적인 힘을 가진 발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필요한 이들에게 구호물자를 배분하는 일에 교회는 매진하였고, 그것이 복음전파의 소명이라고 이해하였을까? 안타깝게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기독교세계봉사회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구호전문가들은 당시 전 세계에서 이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었는데, 이들은 한국위원회 인사들과 도처에서 수없이 다투었다. 그 주된 이유의 하나는 현장 책임자들인 남한교회의 목사와 장로들 다수가 개신교 신자의 구호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구호에서 우선하는 요건이 절실한 필요인가 포교인가의 문제로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선교에 관한 다른 인식론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당시 서구사회의 선교론은 과거 교회의 선교가 발전한 서양 문명을 원시사회에 이식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이른바 문명화론적 선교론에 기반을 두고 피선교지의 토착문화를 제거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을 통렬히 자아비판하면서 그런 유럽교회의 선교가 아닌 신의 선교를 논하고 있었다. 그것은 선교사가 당도하기 이전에 그 지역에서 그곳의 표상으로 이미 신의 선교가 있었다는 것, 하여 선교는 그런 신의 선교에 협력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호에 관한 신학에도 영향을 미쳐서, 이미 신이 그랬던 것처럼 구호는 긴급한 필요를 위한 신의 사역이라는 관점이 당시 세계적인 기독교계 구호전문가들의 생각을 꿰뚫고 있었다. 반면 한국위원회의 인사들은 개종하여 교회의 신자가 되는 것을 우선시하는 구호활동을 선호했던 것이다.

한데 이런 한국위원회 인사들의 구호론은 한경직을 위시한 당시 남한 주류교회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남한교회는 전쟁 전후 과정에서 적그리스도를 공산주의자라고 보았고 그들을 멸절시키는 것이 복음화의 첫걸음이라고 확신했다. 문제는 공산주의가, 악마가 그렇듯이, 이미 한국인들의 심성 속에 깊게 스며들어가 버렸다는 생각에 있었다. 하여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내면의 악을 청산하는 가시적인 행동을 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 자들은 적그리스도에 포획된 자, 곧 멸절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이 기간에 그 많은 이들의 학살에 개신교 신자들이 가담한 신앙적 알리바이였다.

또 전후,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사회에서 씨가 마른 뒤에도 교회는 여전히 내면의 적들을 제거하는 데 몰두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용공론WCC 논쟁으로 비화되어 대대적인 교단 분열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그 시기에 국가나 교회로부터 외면되었던 이들의 질병의 치유사건들을 운동으로 발전시켰던 대중신비주의운동들에 대한 교회의 이단시비가 본격 시작된 때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은 기 이후 줄곧 한국 기도교도들의 신앙의 기저에 깊게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신앙을 나는 몇 년 전 무례한 기독교라고 부른 바 있다. ‘우리가 말을 거는 타자를 불신하며, 그 존재의 자기 청산을 전제로 하는 복음화를 주장하는 신앙을 지칭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그것은 한국전쟁에 대한 잘못된 성찰의 산물임을 말하고자 했다.

흥미롭게도 이제 이러한 신앙은 더 이상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해온 세속적 성공을 무기 삼을 수 없게 되었다. 교회는 계속 실패를 거듭하고 있고, 그 근원지에 무례한 기독교 신앙이 똬리를 틀고 있다. 하여 우리는 한국전쟁 65년을 기리면서 무례한 기독교 신앙을 극복하려는 통렬한 자기 반성과 전쟁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성찰의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