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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것은 종교적 비평의 대상이다 - 아베 담화에 즈음하여 한국과 일본의 극우주의를 묻다

이 글은 일본잡지 [福音と世界] 2015년 가을 호에 실린 아베 담화에 대한 칼럼 원고다






그것은 종교적 비평의 대상이다

아베 담화에 즈음하여 한국과 일본의 극우주의를 묻다

 

 

 

_김진호(金鎭虎). 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민중신학자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아베스러웠다. 70주년을 맞는 패전일 하루 전날(8.14) 발표한 아베 총리의 담화는 무라야마 담화의 네 가지 키워드인 식민지배’, ‘침략’, ‘반성’, ‘사죄를 어떻게든 자신의 관점과 연속성 있게 이야기하고자 노력한 듯하다. 이 담화의 내용만 보면 이른바 자학사관에 대한 역사수정주의자로서의 면모가 후퇴한 듯 보인다. 물론 이 후퇴에 대해서도 나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정계에 입문한 1993년 이래 그는 큰 틀에서 극우적 역사수정주의자로서 일관된 입장을 취해 왔고, 이번 담화에서 그것을 후퇴시킬 특별한 이유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후퇴로 보인 것은 입장이 바뀐 것이 아니라 모호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아베의 모호함을 긍정적 가능성으로 해석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지금까지 한일 양국은 숱한 갈등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화해와 협력의 대의(大意)를 위해 이와 같은 긍정적 제스처를 취해왔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에게서 이것은 외교적 협상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상의 것을 나는 박근혜 정부에게서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아베 정부도 표현의 모호함을 통해 한국 등의 외교적 공세를 방어할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한동안 경색되었던 한일 관계의 꼬인 실타래가 풀릴 빌미가 생겼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가 개선되어 가는 국면에서도 동아시아의 평화와 아시아 민중의 명예와 존엄에 상당한 상처를 입은(아베의 담화문에 담긴 문구와 같은) 자존권의 문제는 조금도 개선될 것이 기대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이 국면에서 아베 정부나 박근혜 정부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 결정적 이유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과 함께 아시아의 제국으로 부상했다. 특히 세 나라의 경제적 성공은 아시아의 민중이 겪고 있는 극도의 빈곤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 일본의 제국적 팽창주의가 많은 아시아 사회들에게 안겨주었던 고통 못지않은 폐해를 오늘의 세 아시아의 제국들이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 말 아시아를 휩쓴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야만적 횡포를 방어할 아시아국가 간 연합의 필요성이 강력히 대두했을 때, 일 삼국은 그 구상의 추동주체로서 협력할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이 구상은 현재 거의 좌절 상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책임은 한일 삼국에 있다. 중국과 일본은 서로 패권 경쟁에 돌입했고, 한국은 그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보다는 싸움을 격화시키는 데 일익(一翼)을 하고 있다. 일본에 있어서 이 패권경쟁은 평화헌법의 철회를 필요로 했고, 이것은 동아시아의 세 제국간의 과거사 논쟁을 격화시켰으며, 공격적 민족주의의 발흥을 야기했다. 그리고 이것은 동아시아를 신냉전주의(新冷戰主義)의 격랑(激浪) 속으로 몰아갔다.

이러한 상황은 동아시아에서 극우주의가 자라나기 용이한 환경이 되었다. 계속된 경제적 활황으로 대중의 낙관적 기조가 강한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 Dèng Xiǎopíng) 이래 지속되어온 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양극화와 불황의 수렁에 빠진 한국과 일본에서는 극우적 엘리트들이 절망적 상황에 놓인 대중을 공격적 민족주의의 구호 아래 결속시켰다. 하여 공격적 민족주의 기조의 극우정권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박근혜 정권과 아베 정권이 있다.

양국의 극우주의 정권은 각각 자국 시민의 강력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또한 정권의 경제적 성과는 절망적 대중을 달래기에는 너무 미미하다. 더욱이 그 미미한 성과조차 정권의 엘리트 친화적 성격 탓에 서민 대중에게 잘 분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이 두 극우주의 정권은 비교적 높은, 고정적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박근혜 정권의 이런 지지율을 일컬어 콘크리트 지지율이라고 부른다. 한데 나는 이 콘크리트 지지율의 배후에는 절망에 빠진 대중의 메시아주의가 깔려 있다는 견해를 펴왔다. 그것은 그녀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그는 1979년에 암살당했다)을 메시아로 호출하려는 1997년 이후의 시도가 그녀를 통해서 구현된 것이다. 즉 한국의 극우주의는 종교적 분석을 필요로 하며, 동시에 종교적 대안이 모색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나는 일본의 아베 현상의 배후에도 이와 비슷한 종교적 현상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갖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아베 담화를 기화로 한일 양국은 대화국면에 들어섰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정부간 대화는 동아시아 삼국 간의 격화된 신냉전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대화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동아시아 평화연대는 요원해보일 만큼 형해화(形骸化)되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은 아시아의 고통당하는 민중을 더욱 극한의 지점까지 약탈할 것이며, 그들 다수는 세 제국의 하위노동시장으로 유입되어 들어와 노동시장의 약탈적 성격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신냉전주의를 격화시키는 양국의 극우주의 정권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일은 아시아 민중의 존엄성과 권리를 위한 가해자국 국민의 반성사죄의 첫 번째 과제다. 그리고 이 견제와 비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양국 극우주의의 종교성에 관한 것이다. 절망의 위로를 위해 요청된 종교성이 특정 국면에서 적대감을 강화하고, 그렇게 타자화된 이들에 대한 자본의 약탈을 정당화하는 마음의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제를 위해 한일의 비판적 종교인들이 힘을 모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