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수요예배(신과대 & 연합신학대학원) 설교(2015.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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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잘린 암탉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마가복음〉 13,7
〈그을린 사랑〉(2010)은 레바논 내전(1975~1990)의 비극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후원을 받고 있던 기독교 우파 세력 대 팔레스타인 난민 자치정부인 PLO와 연결되어 있던 이슬람 좌파 세력 간에 벌어진 내전입니다. 이 전쟁의 와중에서 나왈 마르완(Nawal Marwan)이 겪은 얽히고설킨 비극들, 그리고 그로 인한 그녀의 극한적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영화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기독교도 집안의 딸인 그녀는 팔레스타인 사람인 남편이 오빠에게 살해되고, 가문의 수치로 간주된 아들과 강제로 헤어지며, 아들을 찾아가는 길에 버스에 탄 모든 이들이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겪고, 그녀 스스로 분노의 화신이 되어 기독교 민병대 대장을 암살하고, 이후 정치범 수용소에서 15년간 온갖 학대를 당하는 중에 간수에게 강간당하여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강간범이 갓 나서 강제로 헤어진 아들이었습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비극적 역사의 사건들이 종료된 지 한참 지난 시간에서입니다. 하지만 고통스런 기억은 점점 그녀 자신과 그녀를 둘러싼 관계를 온통 뒤죽박죽 헤집고 있었고, 그런 잔혹한 고통이 그녀의 몸속에 잔류하고 있던 시간에 그녀는 이 끔찍한 사실을 발견하고야 말았습니다.
한데 이 영화는 레바논계 캐나다인 극작가 와즈디 무아마드(Wajdi Mouawad)가 쓴 연극 〈화염〉(incendies)을 각색한 것입니다. 나는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원래의 시나리오에 나오는 한 어구가 눈에 꽂혔습니다. “시간은 ...... 목이 잘린 암탉이었어.”
나는 닭을 재료로 하는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한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은 탓일 것입니다. 그날 삼촌이 시장에서 산 닭을 사와서 마당 한 가운데서 닭의 머리를 칼로 내리친 적이 있습니다. 목이 잘린 닭은 피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마당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 죽어버렸지요.
이 표현 하나로 나는 나왈의 상태를 마치 한 편의 그림처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민병대장을 살해하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 처절한 공포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견뎌냈던 강철 같은 여자, 하여 감옥에서 “노래하는 여자”로 불리며 오히려 간수들과 죄수들 사이에서 경원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던 그녀였지만, 실상 그녀 자신은 그 시간을 ‘목이 잘린 암탉’ 같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그녀의 고통은 필경 외상후 트라우마 증세를 나타냈던 것 같습니다. 하여 이웃과는 물론이고 쌍둥이 자녀와도 소통이 깊게 단절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을린 사랑〉의 극중 문맥은 나왈이 죽은 뒤 쌍둥이 남매에게 전달된 두 편의 유서 속의 수수께끼를 그들(잔느와 시몽)이 풀어나가는 과정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레바논의 엄마의 흔적이 새겨진 장소들을 방문하면서 하나하나 파편적 에피소드들을 해독해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들이 연결되는 큰 이야기(네러티브)에 다가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엄마가 남긴 유서 속의 수수께끼의 풀이였습니다. 그것은 뒤엉키고 꼬인 인연의 실타래를 포용과 사랑으로 풀어내는 엄마의 메시지였습니다. 요컨대 엄마의 유서는 그녀를 목이 잘린 암탉처럼 미쳐 날뛰게 했던 트라우마를 그녀 스스로 극복해낸 자기 치유와 자아 성찰의 기록이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민중신학이 주장하는 〈마가복음〉의 형성사와 매우 닮았습니다. 그 진원지는 안병무 선생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마가복음〉의 형성에 관한 매우 새롭고도 참신한 가설을 제시합니다. 우선 이 복음서는 ‘이야기’, 즉 구술문학으로 된 문서라는 것입니다. 즉 구술로 전승된 것이 누군가에 의해 글로 채록된 설화집이라는 얘기지요. 이것만으로도 굉장히 참신한 주장인데 더 중요한 것은 이 설화집은 본래 유언비어(루머)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입니다.
선생이 유언비어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1980년 광주사건이었습니다. 당국에 의해 철저히 언론이 통제되어 광주에서 무장공비에 사주된 폭도들이 내란을 일으킨 것으로만 보도되었지만, 유언비어는 그 철통같은 통제망을 뚫고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한데 그 속에는 중대한 진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언론의 보도와는 다른 방식의 진실입니다. 그것은 특히 감정의 언어 속에 품어져 있는 진실입니다. 여기에서 선생은 예수에 관한 유언비어를 상상해 낸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하던 때에 공권력의 폭력성은 미친 칼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공포스러웠는지 예수의 가장 측근들이 지하로 숨어버렸고 베드로조차 그이를 모른다고 부인할 정도였습니다. 며칠 전만해도 겉옷을 땅바닥에 깔고 “만세”(호산나)를 연신 외쳐댔던 이들이, 심지어는 성전 거상(巨商)의 상점을 뒤엎으며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전락시켰다”고 일갈하던 이들이 어디론가 숨어버렸고, “죽여라”는 대중의 함성 속에 그분은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바로 이 장면을 예수의 일부 추종자들이 통렬한 마음으로 목격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원통했지만 절망감을 안고 터덜터덜 갈릴리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낙망이 너무 깊어 어떤 이들은 병이 들었고 어떤 이들은 포악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 하나하나는 예수의 비수 같은 말과 파워 넘치는 행적에 관한 일화들 몇 개씩을 갖고 있었고, 곧 그것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단계가 있습니다. ‘침묵이 극복되는 단계’입니다. 깊은 절망에 빠진 이들은 대개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일종의 ‘사회적 실어증’(social aphasia)입니다. 여기에는 한숨소리, 탄식소리, 고함, 괴기한 행동, 난폭한 행동 등이 포함됩니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언행들입니다. 한데 가까스로 침묵이 극복되면 사람들은 더듬거리며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그들은 가슴에 품고 있던 예수를, 그이에 관한 기억들을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하여 예수 이야기들, 그 단편적 이야기들이 유언비어 형식으로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병무가 말한 예수 유언비어입니다.
이 예수 유언비어의 유포자들을 선생은 ‘오클로스’(οχλος)라고 주장합니다. 〈마가복음〉 형성사에 한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오클로스는 병자였고 창녀였으며 세리였고 거렁뱅이였습니다. 한마디로 오클로스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혐오의 대상으로 간주되던 자들로, 사회문화적 자원을 거의 보유하지 못한, 그 자원들이 유통되는 장소의 ‘밖’으로 내몰린 자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예수에게 희망을 품었다가 낙망한 채 예수 유언비어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가, 침묵의 질곡을 넘어서서 이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점차 에피소드들이 모여 큰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렇게 에피소드가 큰 이야기로 되고 그것이 채록되어 〈마가복음〉이 탄생하였던 것입니다.
트라우마에 몸과 정신이 포박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 증상은 기억의 파편화와 실어증입니다. 그리고 흥분 상태가 지속되고 때로 마치 ‘목이 잘린 암탉’처럼 과도한 분노를 폭발하곤 합니다. 자전적인 네러티브 만들기는 이런 상태를 극복하는 데 꽤나 유용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집단적 트라우마 연구에도 유사하게 활용되는데, 민중신학의 〈마가복음〉의 형성사에 관한 해석도 바로 이런 집단적 자기 치유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기억연구의 중요한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유의미한 것은 〈마가복음〉의 큰 이야기의 핵심 키워드가 바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문서를 만들어낸 대중은 이 문서를 예수의 죽음과 함께 트라우마에 결박된 자들의 자기 치유의 이야기, 곧 부활 이야기로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부활 신앙에서 출발한 종교입니다.
1년 전 우리는 수백 명 죽음들의 비명이 아직 귓가를 생생이 맴돌고 있는 상황에서 부활절 예배가 얼마나 무력하고 빈 말들뿐인지를 절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신앙을 다시 돌아보지 않는 한 이런 빈 이야기들로 점철된 부활절 예배는 우리는 내년에도 반복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공동체도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13장은 예수가 죽임당한 때처럼 자신들이 겪고 있는 죽음의 현실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그 처참한 순간을 겪으면서 “아직도 아니다”고 말합니다. 더 겪어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부활에 관한 기록임에도 진정한 부활은 계속 유예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 실어증에 걸렸으나 다시 말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유언비어로서의 예수 에피소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의 자전적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신들의 자전적 기록을 대체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활이라고 단정하면 안 됩니다. 아직 그것은 과거의 폭력적 기억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첫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의 기억의 질곡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까지 다루는 거대한 서사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마가복음〉은 복음 전파로 묘사하였습니다(13,10). 해서 아직 우리는 고통에 관한 성찰, 특히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기 위한 성찰과 다짐을 부활 예배로 나누어야 합니다. □ (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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