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7년 02월 5일에 했던 한백교회의 설교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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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로스 가모스
...... 너희의 딸들이 음행을 하고, 너희의 며느리들이 간음을 한다.
너희 남자들도 창녀들과 함께 음행을 하고, 창녀들과 함께 희생제사를 드리는데,
너희 딸들이 음행을 한다고 벌하겠느냐?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한다고 벌하겠느냐?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
―〈호세아서〉 4,13~14
유다국 서기관들은 요시야 대왕의 명에 따라 예언자들의 신탁들을 수집하여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대왕께서 예언자들의 신탁서 편찬을 바랐던 것입니다. 과거의 예언자들이 대왕의 나라를, 그 나라에 둔 야훼의 뜻을 미리 예언하였음을 만백성에게 선포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예언자들의 신탁들을 두루 살피던 중 서기관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던 한 사람, 그이는 호세야라는 백년 쯤 전 이스라엘국에서 활약했다는 이였습니다. 특히 이 대목,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는 말이야말로 대왕께서 기뻐하실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 이스라엘국은 그래서 망한 거야’, 서기관들은 호세아의 예언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바로 여자들과 남자들이 하느님의 성전에서 마구 성교를 해댄 행위, 그것을 제어하지 못한 체제, 그것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백 년 전, 이스라엘국은 국가의 발전이 절정에 달했었지요. 당시 유다국은 국가라고 하기엔 민망할 만큼 작고 가난했었습니다. 살길이 막막했던 수많은 백성들이 부유한 이스라엘국으로 이주하여 밑바닥 노동자로 일하곤 했었지요.
말할 것도 없이 왕은 이스라엘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땅들이 왕의 소유지였고 많은 농민들이 왕의 소작농이었습니다. 또한 왕의 관료들도 굉장한 부자들이었습니다. 나라 곳곳, 마을 마을마다 그들 소유의 땅이 있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유다국 등 여러 나라의 이주민들은 거의 노예와 다름없었지요.
국제무역도 활발했습니다. 멀리 아라비아와 아프리카, 심지어 페르시아와 인도에서 상아와 귀금속, 값진 옷감들, 카펫 등이 수입되었습니다. 왕과 귀족들은 상아로 침대와 가구를 만들고, 백향목으로 거대한 집을 만들며, 귀금속으로 치장하고 화려한 채색옷을 입고 카펫으로 덮인 거실에서 연일 잔치를 벌였습니다.
한데 그럴수록 백성들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져갑니다. 소농들은 고리의 부채로 시달렸고, 땅을 빼앗기고 가족들을 하나씩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굶어죽거나 가족이 동반자살 하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지요.
예전엔 이럴 때 의로운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이 나타나 왕을 비판하고 반정을 일으키기도 했었습니다. 또 어떤 이는 기적을 일으키며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이들을 치유했다고 전해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의인들은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권력과 돈에 눈이 멀어 있었지요.
바로 그때 호세아 예언자가 나타나서 그런 세상을 개탄하며 왕과 귀족들을 향해 독설을 퍼붓습니다. 또한 호세아가 힘주어 비판해마지 않았던 것이 바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고, 그들이 주도한 제사의례였습니다.
제사의례는 왕과 귀족들의 혹독한 착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국가의 통치에 백성을 순응하게 하는 장치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의는 국가화되었고, 그럼으로써 권력과 부를 차지한 고위직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즉 종교의 국가화와 상업화, 그것이 호세아가 본 당대 이스라엘의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의만 비판한 게 아니라 백성을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백성이 잘못된 종교에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잘못된 종교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적인 난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적인 난행이라고 그가 본 것의 실재는 그리스 말로 ‘헤에로스 가모스’(신성한 결혼)라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중해 지역에 널리 퍼진 대중종교적 관행이었습니다. 이 넓은 지역 곳곳에서 이슈타르, 이난나, 이시스, 비너스, 루시퍼 등으로 알려진 여신들에 대한 숭배신앙이었습니다. 이 신들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했던 관능의 신이었습니다. 하여 신전에선 그 신들이 사제들인 여자들과 남자들이 백성들과 성관계를 하는 의식을 수행했지요. 그것이 히에로스 가모스입니다.
그 제의는 소란스러운 난장처럼 진행되었습니다. 악기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내고 사람들은 춤을 추며 환호합니다. 그 속에서 많은 남녀 사제들과 백성들이 성관계 의식을 벌였고, 다른 이들은 축복을 갈구하며 고함치고 자해까지 하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데 이 모든 것은 가난과 고통에 빠진 비루한 삶들에게 축복을 내려달라는 대중적 갈망에 초점이 있었지요.
사실 고위 사제들, 예언자들의 국가화된 종교의례는 백성들의 이런 난장 같은 종교의례와 별로 섞이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그것들은 각기 별개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해서 오늘날 학자들은 이 시기의 국가제의들 속에서 히에로스 가모스의 흔적을 읽어낼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대중의 신심이었던 것입니다.
한데 호세아는 그것들을 분리해서 보지 못했습니다.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를 누구보다 탁월하게 읽어낼 만큼의 고고한 지식인이었던 그의 눈에 대중의 축복신앙과 국가화된 예언자와 제사장들의 왕-귀족 중심의 축복의 신앙은 하나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는 국가화된 제의를 우상숭배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히에로스 가모스, 즉 남녀제사장들과 백성의 성관계를 우상과 간음하는 행위와 동일시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패러디입니다. 그가 비판하고 싶었던 것은 국가화된 제의인데, 그것을 히에로스 가모스, 즉 성전의 남녀사제들과 성관계 의례를 수행하는 백성을 우상과 간음하는 이스라엘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극언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런데 간음하는 백성을 말할 때 호세아는 머릿속에서 간음하는 여성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상과 간음하는 여성이 낳은 자식들은 백성이 되는 것이고, 하여 백성들은 결국 우상의 자식들이니 죽어 마땅한 자들이 되며, 그것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하는 그의 저주와 이어지는 것이지요.
여기서 그의 말은 꼬입니다. 그가 비판하고 싶었던 것은 백성을 착취하는 왕과 귀족이며,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그럼으로써 권력과 부를 거머쥔 고위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었습니다. 한데 그는 이것을 히에로스 가모스 의식 속의 성행위하는 백성으로 패러디하다보니 엉뚱하게도 그 화살이 저들에게 당해왔던 백성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백성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그 생각은 성행위하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 감정과 뒤섞여 버립니다.
호세아의 엇나간 비난을 간파하지 못한 유다국 서기관들은 이것을 히에로스 가모스 같은 난장 의례를 추방한 요시야 대왕의 종교제의야말로 ‘영원한 제국’의 신학적 알리바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민중의 복지에 관한 신기원이 된 저 위대한 요시야 식의 야훼종교에서 바로 이 지점은 ‘파열된 아킬레스건’이었음을 유다국 서기관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 파열된 아킬레스건은 유다국 왕조신학에서 유대주의 신학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하여 야훼종교의 성차별적 가부정주의는 종교의 내재적 요소처럼 견고히 자리잡아 버린 것입니다.
민중의 풍요에 대한 염원의 표현이었던 성행위를 ‘여성의 간음’이라는 부정적 상상력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상념을 낳았습니다. 나아가 그것은 여성 자체를 성적 존재 혹은 간음하는 존재라는 혐오의 시선에서 보게 했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고 보는 편견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여 예수를 낳은 마리아를 신앙의 대상으로 승화시킬 때 그녀가 성행위 없이 예수를 낳았다는 동정녀 신앙, 나아가 동정을 ‘죄 없음’으로 해석하여 원죄 없이 예수를 낳았다는 무염시태(無染始胎) 신앙으로 성모론이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런 신앙은 비단 가톨릭만의 신앙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동정을 무죄함으로 보면서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신앙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개신교도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신앙의 형성사에는 모든 여성이 성적 존재, 아니 간음하는 존재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까지도 이 계보에 있는 종교들을 가운데 가장 마초적인 종교의 하나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대중을 착취했던 권력에 대항한 위대한 예언자 호세아, 그러나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 말들 가운데 하나, 히에로스 가모스 속의 대중의 갈망을 이해하지도 공감하지 못한 채 던져버린 빗나간 신학적 해석 하나, 그것은 이후 긴 역사 속에서 야훼 신앙의 파열된 아킬레스건이 되어야 했습니다. 잘못 던진 패러디 하나가, 그것을 기억하고 전승한 이들이 무심코 반복한 그 패러디 하나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잘못된 편견과 관행의 뿌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사회에서 돌아다니는 빗나간, 성찰하지 않는 말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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