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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폭설 내린 날의 카니발적 상상력

이 글은 2001년 2월18일 한백교회의 설교원고다. 이 글을 나의 책 [반신학의 미소]에 싣고자 했으나 분량조정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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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내린 날의 카니발적 상상력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 <마르코복음> 12,25 (공동번역 성서)

 

 


하루 종일 엄청난 눈이 내렸는데, 저녁이 다될 무렵 외출해야 할 시간이 됐을 때, 쏟아지듯 퍼붓던 눈이 거짓말처럼 완전히 그쳤다. 한산하던 골목길로, 사람들이 하나 둘 나와 눈을 치우기 시작한다. 그때 외출한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이미 약속된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부삽질하는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비키면서 동네를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차내 방송이 시끄럽게 열차 안을 진동했다. 읽고 있던 책에 막 빠져들 무렵이라 이 무뢰한 방해꾼에 심사가 불쾌했고, 억지로 그 소리에 무감각해지려 노력했다. 한데 웅성이는 사람들의 반응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비로소 그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폭설로 인해 오늘 지하철은 연장운행을 할 것이며, 운임료를 일체 받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내린 눈의 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차내 방송을 듣고서야 비로소 폭설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가 실감되었다. 서울시의 설해 대책회의가 긴급히 열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정부 혹은 청와대에서까지 이날의 심각한 긴급 현안으로 다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재난상황인 셈이다. 여름철이라면 재난 대책 운운하는 게 그다지 낯설지 않았을 테지만, 겨울에, 그것도 입춘이 지나 3월이 얼마 남지 않은 막바지 계절에 이런 경험을 한다는 게 생소했다.

그날 무려 다섯 번이나 지하철을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원래 계획된 목적지도 변경되었고, 회합의 목적도 주로 한가한 환담을 나누는 것으로 바뀌었다. 옮겨 다니는 동선의 결정은 예외 없이 지하철 노선에 영향을 받았으며, 지하철역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을 중심으로 회합 장소를 결정했다.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향한다. 지하철을 내려서 집을 향해 걷다가 문뜩 비디오 대여점을 들른다. 밀린 일에 헉헉대던 터라, 이런 선택은 충동이 아니고선 별로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더욱 충동적인 건, 원하는 걸 못 찾자, 나도 모르게 눈길을 헤치고 다른 가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망원동 일대를 배회하며 무려 일곱 군데나 대여점을 돌아다녔다. 끝내 못 구했지만 ......

여기서 어떤 사람이 들려준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해야겠다. 그가 미국에 유학하던 때 얘기다. 그가 교포인 한 사람의 집을 방문했는데, 이 저택은 그가 이제까지 보아온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딸려 있었다. 한데 이 집의 주인은 새벽부터 출근해서 밤이 깊은 시각에야 귀가하는 그런 직업의 사람이었다. 그래야만 그만한 집을 가꿀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더욱이 집에서도 그는 쉬지 않고 일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벌어들인 돈을 세어야 하고, 그 일이 끝나면 기절하듯 잠에 빠져드는 일상을 가진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실은 그 집 식구 모두가 그렇게 바빴다고 한다. 그러니 그 가족 중 아무도 아름다운 정원을 즐길 수 없었다. 오직 그 집의 정원사만이 정원의 진정한 주인인 셈이었다는 것이다.

남의 얘기지만, 결코 남의 얘기만은 아니다. 나의 일상도 별 차이가 없으니 말이다. 하루 종일, 그리고 매일매일 책더미에 빠져 지내지만, 그렇게 얻어낸 정신의 전리품을 감상할 여유란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그럴 틈이 있다면 나의 골방을 방문한 다른 책과 새로운 씨름에 돌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데 폭설은 일 중독 증세의 내게 한가한 일탈을 조장했고, 적어도 반나절의 휴가를 선사해줬던 것이다.

그날, 폭설 내린 밤길을, 동네 앞 도로를 한 시간 이상 한가로이 배회하면서 나는 새로운 낯선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차선이 사라져버린 길을 보았다. 중앙선을 물론이고 차도와 인도의 경계도 사라져 버린 길을 말이다. 질서를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도로의 규약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길을 말이다. 태초의 혼돈이 그날의 유일한 규약인 그런 길을 말이다.

많지는 않았지만 차들과 사람들은 경계선 없는 도로 위를 지나다닌다. ‘사람들은 왼쪽, 차들은 오른쪽’!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이 진리는 마치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어왔던 삶의 공리 같이 느껴졌었는데, 그것 없는 세상이란 존재할 수도 없는 것처럼 머릿속에 각인되었던 것인데, 이날 밤 차들과 사람들은 이 공리가 사라져버린 세상을 지나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더욱 놀라운 일은 어느 차도 어느 사람도 한결같이 너무나 예의바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리 비키라고 경적을 울려대는 차도 없었고, 도로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차를 향해 시위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지나칠 정도로, 서로에게 조심스러운 태도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나는 그날 보았다.

갑자기 석유통을 다섯 개나 싣고 가던 오토바이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기어가듯 엉금엉금 가던 버스가 갑자기 서더니, 기사가 달려 나온다. 옆에서 승합차 바퀴에 체인을 감고 있던 한 청년도 달려온다. 택시 기사도 달려오고, 지나가던 승용차의 운전자도 달려 나온다. 순식간에 여러 사람이 그리로 달려가서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부축한다. 눈을 털어주고 다리를 저는 그의 몸을 문질러 준다. 또 한편에선 넘어진 오토바이를 세워서 길옆으로 가져간다. 그것으로 인해 잠시 차들이 엉키고 길이 혼잡해졌지만, 그곳에선 누구도 신경질적인 경적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폭설 내린 날의 본 또 하나의 풍경이다.

문뜩 카니발이 떠올랐다. 치외법권적 공간이 일상 위로 엄습해 와서 잠시 세상의 질서를 정복해버리는 역설의 세상에 관한 축제다. 이때에는 규약으로 가득한 일상의 시간이 사라져버린다. 규칙이 파괴된 그곳으로 자유분방한 무질서가 도래한다. 이곳을 지배하는 새로운 규칙은 자유분방함이며, 이때에는 기존의 질서관에 대한 파괴적 본성이 한껏 분출한다. 계급이 해체되고, 가족이, 그 위계적 질서가 해체되고, 성적인 엄숙함이 교란되며, 사람들은 제멋대로 자신의 자유분방함을 만끽한다.

이것이 카니발이다. 일찍이 미하엘 바흐친이라는 스탈린 치하 소련의 한 사상가는 카니발을 이야기하면서, 희망의 세계관을 역설한 바 있지만, 나는 그의 다른 사상에 대해 지극히 존경해마지 않았음에도 이 카니발론에 대해서는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았었다. 한데, 폭설 내린 밤의 정경에서 나는 그것을 가르쳐준 바흐친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일탈의 난장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그 속에서 잠시나마 유토피아의 희망이 뚜렷한 이미지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그곳은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일체의 규약이 사라진 세상이다. 그곳은 자유가 분출하며 모든 경계가 흐트러진 세상이다. 그곳은 질서가 사람을 포박하지 않아도 충분히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놓는 세상이다.

성서는 그런 세상을 부활에의 꿈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은 가상현실로서 매순간 실현된다. 예수는 그런 꿈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의 가슴속에 심어준 일종의 카니발적 도전이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사는 확실히 카니발적 모험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규약이 필요했고, 규약을 지키는 대리자로서의 성직의 권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리스도교는 온갖 역경을 헤치고 긴 역사를 성공적으로 살아온 종교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데 바로 이러한 길에서 우리는 하나를 잃어버렸다. 규약이 짓누르는 자유의 억압에 대해 무딘 감성을 갖게 된 것이다. 가장 엄격한 윤리체계를 주장하는 종교의 탄생이다. 물론, 그런 윤리관조차도 지키지 못한 종교인이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그런 파렴치한 얼굴만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볼 때, 오히려 더욱 무서운 것은 엄격주의를 표방하는 존경받는 종교의 수호자들이다. 그들은 경제질서에 대해서, 문화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가장 엄숙한 질서를 주장하며, 그것이 깨진 세상을 경고하는 우리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것을 조장해왔고, 오늘날 그것을 지키는 대표적인 주축대임에 분명하다. 이들에 의해 대변되는 세상은 현실의 질서의 연장이다. 그곳을 넘어서는 한 치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이다. 요컨대 카니발적 상상, 역설의 도전이 부재한 세상이다. 결국 희망이 사라진 부활만이 유포되는 세상인 것이다.

한데 그것에 반대하는 나 자신조차도, 알게 모르게 질서의 미학에 동화된 사람으로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카니발의 상상이 부재한 나의 신앙을 깨우친 건, 신학자로서의 나의 성서 이해가 아니라, 폭설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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