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동연출판사에서 2016년 4월 11일 발행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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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머리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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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을 폐하라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들에 대한 정치비평적 성서 읽기
나는 우리 시대의 보수주의가 극우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고 특히 박근혜 정부 시대에 그 절정을 드러내고 있는 현실에 문제를 느낀다. 극우주의는 누군가를 향해 분노하고 배척하며 공격적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가적 정신을 강조했던 MB 정부도 실상은 이윤 중심적 실용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집권 기간 내내 신냉전주의적 이념 정치에 몰두했는데, 그것은 MB 정권 내에도 극우주의적 세력이 강력한 정치력을 구사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그렇게 보수주의 정치가 극우적으로 재구성되고 더 강화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시민사회의 흐름이 있다는 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보기엔 이것은 한국의 보수주의 안에는 일종의 사회적 유전자로서 ‘극우적 보수주의’가 뿌리 깊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극우적 유전자의 안착을 살피려면 무엇보다도 한국 개신교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지만 무엇보다도 한국 개신교가 이 점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준비하고 있는 다음 책은 바로 이것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전(前) 역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현상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극우적 유전자가 ‘최근’ 강력하게 활성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MB 정부 시대와 박근혜 정부 시대에 말이다. 이러한 극우주의적 활성화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맥락을 읽어내고 비평하는 것이 이 책의 관심거리다. ‘종교적’인 비평이 필요한 것은 극우주의가 기본적으로 비성찰적인 종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특히 한국에서 그것은 개신교와 깊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의 종교성은 개신교적 종교성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나는 극우주의적 유전자가 활성화되는 장소를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들’이라고 불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극우적인 대형교회 예배 현장이다. 성서에는 이렇게 대중을 호도하고 폭력적이게 하는 장소를 가리킬 때 ‘산당’이라고 표현을 썼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나는 오늘의 ‘산당들’을 비평하려 한다. 그런데 나의 비평은 새로운 해석체계를 만들기보다는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런 점에서 나의 비평은 산당들에 대한, 그것의 형성과 작동에 관한 하나의 비판적 스케치다.
성서의 산당들을 철폐해야 하는 이유
‘산당’(山堂)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마’(bamah)는 제1성서(구약성서)에서 80회 이상 등장하는데, 거의 모든 경우에 극단의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다. 도대체 산당이 무엇이길래 성서가 그토록 위험시하고 있을까? 더욱이 그렇게 위험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거의 모든 왕들은 문제의 산당 예배를 철폐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기원전 7세기 유다국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특히 기원전 639~609년 재위에 있던 요시야 왕정의 사관실로 찾아가보자. 이곳에서 유다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국 역사가 편찬되었다. 또한 선사(先史), 그리고 예언자들의 문서 등도 편찬되었다. 이 문서들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1성서의 토라(오경), 〈사무엘기상/하〉 〈사사기〉 〈열왕기상/하〉, 그리고 〈이사야서〉 같은 예언서들의 최초 문헌본이다.
이들 요시야 왕실 사관들은 유다국과 이스라엘국의 선왕들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을 ‘산당’의 처리 문제에 두었다. 이에 따라 오직 두 명의 왕, 유다국의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산당 철폐를 추진한 이로서 칭송되고 있다. 또 이사야, 미가, 호세아, 아모스 등의 예언집들에서도 한결같이 산당은 치명적인 사회문제의 온상처럼 언급되어 있다. 심지어는 왕국 시조의 한 사람인 솔로몬조차 산당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 것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열왕기상〉 3,3) 그리고 모든 왕들 가운데 이 일로 가장 극렬한 비판을 받고 있는 이는 바로, 요시야 왕의 아비이자 선대왕인 므낫세다.
여기서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산당 문제가 요시야 왕실 정치의 가장 예민한 의제였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므낫세의 정치와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요시야 왕실의 문헌 편찬 작업이 왕성하게 펼쳐지고 있는 당시에도 이 문제를 놓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제1성서에 나오는 산당에 대한 비판적 논점은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요시야, 이 네 명의 왕 시대에 벌어진 격렬한 논쟁을 히스기야-요시야의 시각에서 기술한 결과다. 하여 이 시대 이전의 산당에 대한 기술도 이 시대의 시각에서 재평가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산당이라는 장소의 존치와 철폐를 놓고 벌인 정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이스라엘 부족동맹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제사장이자 예언자였던 사무엘의 본거지가 실로의 산당이었다는 사실이다.(〈사무엘기상〉 9,19) 그러니까 요시야 왕실 사관들의 주장과는 달리 모든 산당이 우상숭배의 장소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이 생기기 훨씬 전에 산당은 야훼의 전형적인 성소였다.
말했듯이 요시야 왕실이 문제시한 산당은 므낫세의 산당이었다. 그곳에서는 당시 유다국을 식민화하고 있던 아시리아 제국 풍의 일월성신 의례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시야가 므낫세의 산당을 철폐한 것은 유다국 내에서 친아시리아 세력을 거세시키려는 의도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를 좀더 앞으로 돌려야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므낫세의 아비이자 선왕인 히스기야는 당시 강력한 세력으로 메소포타니아 전역과 이집트 지역을 크게 위협하던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다가 처절하게 패배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이 전쟁 이후 히스기야는 그냥 왕위만 유지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식물통치자에 다름 아니었다. 이때 공동통치자로 그의 아들 므낫세가 등극하지만, 그 나이가 12세에 불과했으니 사실상의 권력은 아시리아를 지지하는 귀족당파가 장악했을 것이다. 필경 므낫세 모친의 가문은 친아시리아 정파의 유력 가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9년이 흘렀고 히스기야가 사망했다. 그리고 어린 므낫세는 어느새 권력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이후 그가 단독 왕으로 다스린 기간은 무려 46년이다. 도합 55년간 왕으로 군림했던 이는 유다국은 물론이고 이스라엘국에도 전무후무하다. 그 긴 시간은 친아시리아 당파가 정국을 주도한 시기였다. 하지만 아마도 어느 때부턴가는 므낫세 자신이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유다국은 친아시리아 동맹의 열렬한 일원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히스기야식 정치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적지 않은 히스기야의 잔당들이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한데 그가 죽은 뒤 아들 아몬이 즉위했다가 2년 만에 궁중정변으로 살해당하자 1, 민중적 농민세력(암하아레츠)이 들고 일어나 정변을 수습하고 다른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추대 2했는데, 이때 요시야를 추대한 세력은 히스기야를 추종했던 반아시리아파 귀족들과 예루살렘 성전의 귀족들, 그리고 민중세력 등이었다. 하여 이 왕은 므낫세에 반대하고 히스기야를 계승하는 정책을 폈다.
여기서 요시야가 왕이 되는 데 민중적 농민세력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그것은 선왕 므낫세의 정치가 친아시리아적일뿐 아니라 반농민적이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필경 그가 피를 많이 흘린 통치자라는 점(〈열왕기하〉 21,15; 〈역대기하〉 33,9)은 정적을 가혹하게 처벌했을 뿐 아니라 반민중적 정책으로 많은 농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의미도 포함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므낫세-요시야로 이어지는 산당을 둘러싼 갈등의 배후에는 대(對) 아시리아 정치만이 아니라 농민의 권익을 둘러싼 정치도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요시야로 이어지는 네 명의 유다국 군주 시대에 산당을 둘러싼 격렬한 갈등의 역사가 시종 ‘몰렉 제사’ 문제와 얽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열왕기하〉 21,6; 〈역대기하〉 33,6)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몰렉 제사는 절체절명의 긴박한 위기에 처한 이들의 제사 형식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런 인신제사는 대체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한데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왕국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공격해 들어왔을 때 국가는 존폐의 위기에 놓였고 히스기야의 부친인 아하스 왕이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의례를 지냈다. 한데, 거짓말처럼 적들이 물러간 데다, 그 침공자들이 아시리아에 의해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아시리아라는 제국이 유다를 구원하기 위해 야훼가 불러일으킨 제국이라는 신앙을 낳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죽이기까지 스스로를 희생한 왕 아하스의 신실함 때문이라는 여론을 낳았다. 게다가 그는 유다국 역사상 처음으로 강국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장본인이었다.
한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그가 유다국을 번성케 할 때, 이 나라의 기득권세력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만을 갖춘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담론적 장치를 보유한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대중의 수탈자임에도 대중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 담론적 장치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당’이라고 묘사된 ‘성소’다. 풍요제의를 드리고 온갖 사적 공적 재앙에서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신의 장소가 성소인데, 그곳이 이들 기득권층의 이해를 위해 종사하는 사제들에 의해 장악되어 대중을 포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아하스의 인신제사를 칭송하고 대중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장소가 바로 산당이었던 것이다.
히스기야가 이 성소, 곧 산당을 철폐하고자 했던 것은 아하스의 정치, 곧 귀족 중심의 정치를 종식하려는 것을 의미했다. 한데 이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하스 대에 형성된 기득권 세력이 친아시리아파였고, 아시리아의 개입에 의해 반아시리아를 표방한 히스기야가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므낫세의 부상은 친아시리아파의 승리를 의미했고 민중의 절망을 뜻했다. 그런 점에서 요시야의 반므낫세 정치는 곧 반아시리아 노선의 개혁세력이 부상했다는 것을 뜻하고, 대중 중심의 정치의 부활을 의미했다.
박정희, 이명박 찍고 박근혜
2013년 한국에서 산업화 시대의 전통적인 극우정부가 재집권했다. 복지를 주장했고 경제민주화를 부르짖었음에도, 이 정부가 기본적으로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지향하고 있다는 데 의심의 여지는 없다.
알다시피 박정희 정부 때 한국에서 산업화 시대의 기득권체제가 안착되었다. 이 정부는 본래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압도적인 권력집단으로 부상한 군부세력에서 나왔지만, 1970년대 영동(강남권) 개발 과정에서 신흥부유층이 관료, 법조계, 정치계, 학계, 언론계, 그리고 종교계를 아우르는 기득권세력으로 부상하게 되고, 군부와의 동맹체제를 구축하게 되면서 산업화 시대의 기득권세력이 형성된 것이다. 이후 민주화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기득권 동맹이 와해되었다가 다시 군부와 기타 엘리트 세력이 재동맹을 맺고 등장한 것이 바로 박근혜 정부인 것이다.
내가 이 짧은 문단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정부의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아시아의 세 마리 용’ 운운하면서 대두한 ‘신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설명처럼, 1인의 카리스마적 독재자, 그에게 절대 충성하는 테크노크라트, 강력한 지지기반으로 형성된 중산층 등에서 박정희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일면 유사성이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유사성은 형식적 유사성일 뿐이다. 두 정권은 닮았지만 명백히 구별된다. 우선 박정희 시대 때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사회는 복잡해졌다. 이와 연관해서 그를 지지하는 테크노크라트의 성격도 복잡해졌다. 언론이나 법률권력 등은 더 이상 하나의 일사불란한 조직이 아니다. 수많은 언론기업들은 대체로 극우적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지만 그들 각개는 서로 치열한 경쟁과정에서 이데올로기를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실용적 주체들이다. 법률권력도 검찰에서 대법관으로 이어지는 단선적 체계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검찰-대형로펌들-정치계와 경제계’로 연계되는 복선적 체계에 의해 작동된다. 그런 점에서 법률권력도 충성으로 결속시킬 수 없는 이해집단적 성격이 더 강하다. 기업 또한 일국적 질서에 통합될 수 없을 만큼 다국적 혹은 초국적 형식을 띠고 있다. 비록 박근혜 정부 아래 광범위한 권력집단이 ‘잘 결속’된 것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이 정권은 근원적으로 탈중심적이다. 각 집단이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중적으로 행동하고 있는데, 그러한 다중적 행동들이 ‘박근혜’라는 ‘일시적 소실점’을 향해 수렴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콘크리트 지지율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게임의 법칙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한데 이 콘크리트 지지율의 주요 요소의 하나는 박정희 메시아니즘이다. 박정희는 박근혜를 통해 이 시대로 현현한 것이라는 종교적 현상이 실현된 것이다.
알다시피 박근혜로 현현한 박정희 메시아니즘은 극우적 보수주의 언론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다. 조갑제, 김정렴, 이인화 같은 예언자들이 그것을 서사화하였고, 언론들은 그것을 증폭시켜 대중화했다. 또 재정치화된 군부가 종북마케팅을 통해 그것의 강력한 발동기를 장착했다.
여기서 우리는 MB 정부를 주목하게 된다. 신자유주의에만 관심을 가졌던 이 정권은 대북안보를 중요한 변수로 간주하지 않았고, 그 결과 청와대는 대북 정보에 무능했다. 한데 그 정권 초기에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청와대가 상황도 파악 못하고 갈팡질팡 할 때 정보를 독점하고 있던 군부의 위상이 급상승했고, 결국 이 과정은 김영삼 정부 때에 단행한, 정치화된 군부조직인 ‘하나회’의 해체로 탈정치화된 군부가 재정치화되었다. 이른바 정치군인들의 설레발이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MB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기업과 일부 정권 인사와 그 인맥을 제외한 사회 전체를 위기에 빠뜨렸다. 결과적으로 MB 정부의 친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는 국가를 파탄으로 몰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정권 안보를 위해 언론을 국가화하는 반민주적 정치를 폈다. 그리고 대형로펌들은 MB 정부를 구성하는 주요 행위자로 참여하였다. 그 사이 법이 모든 논의를 종결짓는 최종 결정자가 될 만큼 법지상주의적 사회가 되었다.
또 하나, 이 정권 창출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하면서 정치세력화된 개신교 교회, 특히 대형교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MB 정권이 등장하기 직전 한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바이블벨트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해방정국과 이승만 정권기에 난폭하게 활동했던 개신교를 재현하려는 극우주의적 욕구의 부활을 의미했다. 특히 최근의 이 현상에서 주목할 것은 일부 대형교회 담임목회자들 중심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존재다. 3 아무튼 이후 (대형)교회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와 극우적 권위주의 질서가 체험되고 확산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장(field)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MB 정부는 박정희에서 박근혜로 연결되는 권위주의 사회의 부활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의도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정권 시기에 언론과 법률, 그리고 교회는 우리시대의 가장 문제적인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로서의 ‘산당들’이 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의 실패로, 시민사회는 공공성을 상실했고 독자생존적 욕구의 화신으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박근혜 정부가 탄생했다. 이 정권 초기에 터진 세월호 사건 때에 제기된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통렬한 문제제기는 대통령 임기 중반을 넘긴 오늘에 이르면 의혹을 넘어 사실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것은 사회의 몰락이 임박했다는 위기감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대중적 극우정치의 장소들, 즉 우리시대의 산당들에 대한 (비판적) 정치비평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 그 시기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시대로 한정하였다. 특히 그것을 성서 시대의 역사적 현실과 대비시킴으로써, 일종의 정치비평적 성서 읽기의 양식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2009년부터 2016년 2월까지 여기저기 기고했던 글들을 모우고 다소간의 손질을 가한 것이다. 최종 수정은 2015년 12월부터 2016년 2월 사이에 수행되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손질에는 현재의 관점이 반영되었다. 또한 이 글들의 원본들을 먼저 읽었던 이들로부터 간간히 들을 수 있었던 코멘트들을 감안했다.
책의 구성은 글머리와 맺음글 그리고 두 개의 부로 되어 있다. 제1부는 박근혜 정부 시대, 제2부는 MB 정부 시대의 정치비평적 성서 읽기에 관한 글들이다. 시기로 하면 MB 시대가 앞서지만, 정치적 시의성이 비평적 현장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 시대에 대한 비평을 앞에 배치했다. 각 부에 수록된 글들은 글 서두에 성서 구절을 인용하고 그 구절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시대의 정치비평적 성서 읽기들이다. 글들의 순서는 인용된 성서 구절들의 순서에 따랐다. 여기서 내가 시도한 정치비평들은 대개 미시적인 사건들에 관한 것이다. 미시적인 것에서 좀더 큰 범주를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이 글들의 출발점은 거의 설교들이었고, 그것을 다듬고 보충하여 여기저기에 기고한 것을 책으로 구성하는 최종단계에서 대폭 수정보완했다.
이 글들의 원본들을 독서했던 이들에게 감사한다. 특히 코멘트를 해준 몇몇 분들은 이 책의 공동저자인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즘처럼 독서가 위축된 상황에서 책을 만드는 모든 이들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이들 덕에 글에 대한 무관심이 나무나 심각해진 오늘의 시대에도 글을 통한 성찰이 여전히 가능성으로 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나의 책을 출간하는 용기를 내준 동연출판사 대표와 동연의 모든 이들께 감사한다.
문뜩 2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생전에 별로 대화도 없었고 그다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나는 아버지를 닮고 있었다. 그이는 청년 시절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에 대한 정치비평으로 잠시 곤욕을 겪었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아버지는 거의 정치적 관심을 접은 사람이 되었고 심지어는 전향자처럼 살았다. 새삼스레 아버지의 마음이 읽혀지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물론 내가 이 책을 쓰는 시대는 그때보다는 훨씬 자유롭다.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여러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들’의 크고 작은 저항이 내게 준 선물이다. 그 모든 이들에 대한 감사와 아울러, 나의 아버지께도 생전에 못했던 감사의 말을 드린다.
2016년 2월 마지막 날 새벽
올빼미의 골방에서
- 유다국의 연대계산법에서 2년은 햇수계산방식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재위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새해가 되면 재위 2년째로 계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몬이 2년 만에 살해되었다는 정보로 24개월 안에 살해된 것인지 며칠 만에 살해된 것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그는 재위한 지 얼마 안 돼서 궁중암투의 희생자가 되었다. [본문으로]
- 민중적 농민세력이 아몬이 죽임당한 정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이 이들이 요시야를 추대하는 주역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본문으로]
- 한기총은 1989년 월남자 개신교 원로들이 중심이 되어서 출범하였지만, 1990년대 중반경부터는 이후 세대, 특히 남한 출신의 개신교 목회자들이 원로 목사들 못지않은 주도적 활동을 하게 되면서 한기총의 전국화가 실현된다. 이 조직에서 주목할 것은 1인1표제가 아니라 지분에 따른 의결구조를 지닌다는 점이다. 즉 한기총은 대형교회 중심적 조직이라는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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