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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헌법전문 다시 쓰기(민중신학의 관점)

이 글은 [황해문화]가 기획한 '헌법전문 다시 쓰기'에 게재된 원고입니다.(2004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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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의 부침에서 숱한 폭력에 희생되어온 민중의 고통을 기억하며 대한민국은 건립되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국내외적 폭력에 대항하여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며, 신분과 부와 연령과 성별, 기타 다양한 차이에 따른 배제와 박탈이 없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이유이다. 어떠한 이념도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명분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은 민중이 체제로 인한 고통에 신음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며, 분단된 민족이 통일되어야 하는 이유도 증오의 정치가 사람들의 행복에 우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의 행복이 전 지구인의 행복과 무관하지 않고 우리의 고통 또한 전 지구인의 고통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대한민국은 인류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종의 차이를 넘어 국제적 인권을 존중하고, 가난과 국가폭력에 신음하는 모든 이들의 생명을 위해 국제사회와 연대해야 하며, 고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각종 음모와 거래에 대항하는 국제적 행동에 동참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자행한 지구 약탈의 결과 한반도뿐 아니라 전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현실을 반성하며, 전 지구적 존재의 보전과 안전을 위한 국제적 행동에 동참해야 하는 과제를 바로 우리의 것으로 대면해야 한다.

곧 국내적, 국제적, 전 지구적인 민중의 고통, 나아가 모든 존재의 신음을 기억하며 대한민국은 낯선 타자의 얼굴에서 가장 신성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런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랑의 정신을 더욱 고양시키는 자세로 헌법의 틀을 세운다.

 

 

[취지]

고대 이스라엘은 법전의 서언에서 신화 속의 웅대한 선사의 기억이나 조상의 위대한 역사를 반추하기보다는 고통을 먼저 기억한다. 승자의 시선이 법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헌법의 출발점은 고난의 담지자로서의 민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헌법이 어떤 이념을 과대대표하려는 태도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가 고대 유대인의 법적 가치의 핵인 정결 체계(-부정의 원리)와 대립하면서, 그 한 가운데 있는 안식일에 대한 논쟁에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듯이, 어떠한 이념체계도 인권을 우선시할 수 없다. 특히 더 많은 고통에 노출된 이들을 배려하는 체제가 헌법이 지향하는 비전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화(globalization)가 급가속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고통의 네트워크는 더 이상 국가 단위의 현상이 아니다. 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는 고통의 네트워크는 빠르게 확장되고 있고 치밀하게 연계되고 있다. 헌법은 이러한 현실의 변화를 반영해야 한다. 그것은 고통의 지구화에 대항하는 국제법적 연계성을 확보하려는 전 지구적 노력을 우리의 헌법이 담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이라면 모름지기 이러한 지구적 규범을 담지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그러한 법익적인 지구적 연대행동에 동참해야 한다는 과제를 헌법이 그 법정신으로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바울은 인간의 죄의 영향사적 맥락에서 우주적인 모든 존재의 고통이 구조화되었음을 논한 바 있다. 민중신학은 이를 살림의 신학이라는 테제로 해석하였다. 즉 모든 존재를 위기에 빠뜨리는 죽임의 문화에 대한 살림의 문화가 신학의 핵심 과제라는 문제의식이다. 그것은 물론 신학의 과제를 넘어선다.

헌법은 우리의 근대화가 우주의 모든 존재를 죽임의 네트워크 속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반성적으로 자기비판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속죄의 행동을 신념화하는 데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살림의 법정신은 전 지구적 차원의 연대를 지향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나의 헌법 전문 다시 쓰기는 민중의 고통을 기억하며 그것을 구조화해온 국가적이고 지구적인 차원의 문화에 대항하는 시민정신을 담아내야 한다는 데 초점이 있다. 그것은 법이 안보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배려의 담론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