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주간경향] 1199호(2016 11 01)에 실린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13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_id=201610041640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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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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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웰빙-우파화’, 가능성과 한계
구호・개발형 선교와 웰빙우파
‘공격적 해외선교’에 대한 낭만주의, 그 끝자락
1990년대 한국교회는 해외선교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초고속으로 성장하던 한국개신교의 교세가 급작하게 꺾이기 시작한 상황에서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인해 우연히 발견된 ‘해외’라는 상상력은 역성장의 위기에 대한 새로운 출구로서 선택되었다.
그간 해외선교는 선교전문기관들이 교회와 불화하며 외롭게 이어가고 있었고, 교회는 거의 무관심했었다. 교단 선교국이 국제 기독교네트워크와 연대하여 극소수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 한국교회가 수행했던 해외선교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한국선교연구원의 한국개신교의 세계선교 현황 자료(2003). 이 통계에는 개별 교회의 선교사는 빠졌다. 한데 2천 년대에 오면 개별 교회 파송 선교사의 수가 적지 아니 늘었다.
그런데 1990년대는 사정이 달라졌다. 수많은 개별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했고, 선교전문기관 파송 선교사에게도 교회들의 후원이 답지했다. 그리고 이런 급격한 증가추세는 2천 년대까지 이어져, 2006년 세계 선교사 파송 순위가 미국 다음인 2위를 기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2007년 이후 증가율이 현저히 줄기 시작했고, 2012년 이후 감소 추세에 있다.
그 이유는 국내에서의 성장 정체를 세계로 향한 팽창주의로 만회하려는 성장지상주의가 점점 교회에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겠다. 피선교국이던 한국이 세계적인 선교사 파송국이 되었다는 자긍심은, 한국 내에서 지탄을 받았던 공격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선교방식이 피선교지역 주민들을 포함해서 전 세계의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까지만 유지될 수 있었다. 2004년 김선일 사건이나 2007년 단기선교팀의 아프간 피랍사건을 계기로 해외선교라는 낭만적 자부심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후 언어능력과 독서능력이 뛰어난, 게다가 비판적이기까지 한 주권교인들은 이러한 공격적 해외선교에 얽힌 문제점들을 인지하게 되었다. 여전히 선교전문기구들과 여러 목사들은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열렬히 부르짖었고, ‘미전도종족 입양’이라는 좀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공격적 선교의 새로운 아젠다를 내걸었지만, 이제 해외선교라는 의제 자체만으로 교회 신자들을 동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구호・개발 선교
해외여행 자유화 시대 배낭여행 붐을 일으켰던 한비야 씨가 기독교계의 세계 최대 구호・개발 NGO인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공격적 해외선교의 로망이 무너진 자리에 한비야 씨를 통해 전해진 새로운 해외선교의 가능성이 쑤욱 끼어들어왔다. 1950년 전쟁 이후 세계 최빈국의 하나로 원조의 대상이었던 한국이 이제 원조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더구나 정부의 해외원조업무의 전담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구호・개발 NGO로 활동하는 한국 단체 가운데 기독교계 단체가 40% 이상이나 되고, 활동력이나 영향력 등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구호・개발 NGO들의 예산 총액은 국내 최대의 모금・배분기구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예산총액의 4.3배에 달하는데, 이는 기독교계 구호・개발 NGO들의 예산 총액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2~3배쯤 될 것임을 시사한다. 나아가 이 규모는 전 세계 기독교계 구호・개발 NGO 가운데서도 최대 수준이었다. 선교사 파송 순위야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나 장한 일로 통할 것이겠지만, 해외원조 분야에서 최고라는 건 한국사회 전체를 향해 우쭐해도 될 것이었다.
이 구호・개발 차원의 선교는 공격적 선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선교 항목으로 떠올랐다. 종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가르침에 기반을 둔 나눔을 실천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나눔의 대상에 대해서도 그들의 신념에 상처를 주지 않고 나아가 그들 자신의 자생력을 북돋고 그 인프라를 구축해주는 방식의 선교다. 확실히 구호・개발적 선교는 공격적 선교보다 진화한 것이었다. 적어도 주권교인들은 그렇게 보았다. 그들은 더 이상 교회의 자기 충족적 비용을 위해 자신들의 기부가 다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러 가치 있는 영역들로 나누어 기부를 실행했다.
하여 떠돌던 주권교인들을 정착시킴으로써 대형교회가 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의 하나는 구호・개발 차원의 선교를 교회 활동의 하나로 수용하는 데 있었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개별 교회가 모든 걸 주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원조가 필요한 사회를 찾아내고 그 사회에서 책임 있는 파트너를 찾아 그들에게 전달하며 그 과정과 결과를 수집・분석하여 지속적으로 새로운 구호・개발 전략을 기획할 수 있는 단체여야 한다. 또한 이런 활동은 개별 교회의 기부금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많은 기부자들로부터 굉장히 큰 원조금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여 개별 교회는 전문적인 구호・개발 NGO와 연합하여 다양한 프로그램과 캠페인을 통해서 주권교인들을 교회 활동에 동원하려 했다.
동시에 이런 프로그램과 기획들을 통해 교회는 자교회 청년들에게 구호・개발 분야의 취업 기회(기독교계 구호・개발 NGO의 직원수가 1만 명이 넘는다)를, 그리고 해외유학을 원하는 청소년에게 대학입시를 위한 봉사활동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구호・개발 선교 프로젝트는 공공적 가치와 사적 이해가 ‘잘 결합된’, 가치 소비 시대에 걸맞는 종교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행의 전 지구적 시스템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도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과시적 성과주의보다는 그 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에 대한 소비가 주권교인들의 신앙태도로 형성되는 데 구호・개발형 선교는 한몫했다. 그것은 전형적인 ‘웰빙우파스러운’ 선교였다.
아동결연 선교
이러한 구호・개발 선교 프로젝트 중 가장 많은 대중의 참여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동결연 사업이다. 가난한 제3세계 아동 1인에게 매월 3만 원 정도를 후원한다는 것인데, 차인표・신애라 부부의 활동으로 유명해진 한국컨패션(Compassion Korea)을 포함하여 240여 개 단체에 무려 600만 명에 달하는 기부자가 참여하여 전 세계에서 67만 명의 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이중 개신교 단체와 기부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여기에는 무려 30명의 제3세계 아동과 결연을 맺었다는 차인표・신애라 부부뿐 아니라, 105명과 결연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정애리, 무려 2백여 명이나 된다는 션・정혜영 부부 등, 공격적 선교를 지양하고자 하는 많은 유명 개신교 신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대형교회들이 아동결연 캠패인을 벌이고 있는데, 분당우리교회는 3000명의 제3세계 아동과 1:1 결연을 맺기로 한국컴패션과 약정을 맺었다.
이러한 아동결연을 매칭하는 NGO들은 주기적으로 후원아동의 성장을 체크하여 후원자에게 공지해주고, 때로는 서신교환 및 만남을 주선하며, 나아가 후원아동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해당 지역사회의 개발에도 관여하고 이를 후원자에게 알려 준다.
한국컨패션이 후원하는 필리핀 아동들과
이 단체의 홍보대사 신애라
분당우리교회(이찬수 목사)는 제3세계 아동 3000명과 1:1 결연 계약을 한국컨패션과 맺었다.
이러한 사업은 후원의 일회성과 익명성을 지양하고, 개인후원과 사회개발의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다른 것들보다 한층 진일보한 선교다. 또한 적은 기부금액으로도 기부효과가 작지 않다는 상각에 이르게 함으로써 대중성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 프로젝트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은 강남과 분당 지역의 대형교회들이다. 주권교인들의 기호에 대한 맞춤형 선교의 압박이 더 컸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공적 가치를 소비하게 한다는 점에서 웰빙적 선교라고 할 수 있다.
‘진공포장’된 선교
그러나 이러한 구호・개발형 선교는 너무 ‘진공포장’되었다. 현지의 고통에서 철저히 차단된 사치스런 선교다. 그럼에도 구호・개발 선교기구들과 교회는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기부자에게 최고의 립서비스를 제공한다. 아동결연자에게 ‘입양자’라는 칭호를 주고, 후원자의 현지방문을 ‘단기선교’로 명명하곤 했다. 가벼운 참여를 ‘부모 되기’ 혹은 ‘선교사 되기’와 연결시키는 과장된 자의식과 결합된 주체는, 현지에서 벌어지는 난감하고 불편한 진실로부터 그들이 차단되었을 때만 그 ‘자뻑’형 착시를 유지할 수 있다.
실제로 구호・개발 사업을 벌이는 NGO들은 현지에서 종교성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재정의 15% 가까운 지원을 받았다. 이 정부지원금이 이들 단체들의 운영기금으로 활용됨으로써 참여자들의 기부금 거의 전액이 현지에 전달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현실에선 점점 기독교계 구호・개발 NGO들의 종교색이 노골화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한국교회들의 후원금이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권교인들의 바람을 수용하여 구호・개발 선교에 끼어든 교회들은 구호・개발 선교에 대한 신학적 고민을 치열하게 하지 않았다. 단지 교인들의 바람을 교회에서 흡수하기 위한 전략에만 몰두했다. 이것은 동시에 주권교인들의 ‘자뻑형 착시’가 일으키는 주체 효과와 상응관계에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권교인들은 ‘먼 곳’의 수혜자를 타자화함으로써 현장의 복잡한 고민에서 거리를 둔 ‘깨끗한 선교’의 일원이 될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진리의 수행자로서의 자의식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은 현지의 복잡한 정보를 단절시킨 ‘진공포장된 선교’를 만드는 구조적 요인의 하나였다.
아동결연 사업도 그 사회의 성장 인프라 구축이라는 사회구조적 요소를 포함한 선교기획이지만, 사회구조의 문제는 개별 구호・개발 NGO가 담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축적된 연구와 활동의 기반을 갖고 있는 기독교계 국제네트워크들을 포함한 여러 국제기구들과 협의하고 연대하며, 현지 시민사회 및 정치 단체와도 공조하며 진행해야 할 것이었다. 이런 거시적인 협의와 연대 없이 진행되는 사회 인프라 구축 기획은 성공하기 쉽지 않으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아동결연 사업 참여자는 그 아동이 겪을 혼란과 갈등에 얽히지 않은 채 자신의 안전한 기부가 성과로 돌아오길 바랐다. 그들이 원한 것은 시시콜콜한 현지 사정이 아니라 자신이 후원하는 아이들이 잘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하여 웰빙-우파적 주권교인들의 ‘깨끗한 선교’ 욕구는 선교 현지의 사회적 복잡함에 대한 외면과 은폐를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공격적 선교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타자화’에 다름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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