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학아카데미 탈/향의 '역사와 반역사 - 인물로 보는 성서' 첫번째 강의원고 <반역사'로서의 역사학적 성서 비평을 말하다>를 수정 보완하고 제목을 바꾼 것.
이 글은, 이 강의 원고를 간추리고 보완하여 펴낸 책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삼인)의 보론에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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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마음에 성찰의 기록들을 새기는 것
제3회 여성미술제 ‘판타스틱 아시아―숨겨진 경계, 새로운 관계’(2005.6.16~7.3, 성곡미술관)에 출품된 작품 중에 시마다 요시코(嶋田美子)의 〈비밀스런 욕망들〉이라는 설치작품이 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오른편 구석엔 커튼이 쳐진 테이블이 있고, 왼편엔 꽤 커다란 서랍장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그마한 상자가 하나 있다.
[그림] 시마다 요시코의 〈비밀스런 욕망들〉의 일부들
서랍장 속엔 타이핑된 이야기가 적힌 종이와, 이미지나 작은 물체 등이 들어 있다. 관람자들이 익명으로 적어 놓은 은밀한 성적 비밀들(딸의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어머니, 성불감증, 레즈비언, 낙태,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여자 등등)이 작가에 의해 타이핑된 종이, 그리고 작가가 글의 내용을 연상하면서 임의로 만든 이미지나 상징물이다. 실은 이것은 일본에서 전시할 때 관람자들이 적은 천여 편의 비밀 중 시마다 요시코 씨가 추려낸 십여 편의 이야기들이다.
한편 오른편의 테이블은 새로운 관람자들이 자기 가족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적는 자리다. 다 적은 글은 가운데의 상자 속에 넣으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작가에 의해 추려지고 타이핑되어 다른 장소에서 전시될 때 이미지나 상징물과 함께 서랍장 속에 배치되어 다른 관람자들에 의해 읽힐 것이다.
내게 이 작품이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작가의 설치작품이 결코 자기 완성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거기에는 과거의 관람자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있다. 작가가 주문한 주제였지만, 그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람자의 몫이다. 작가는 내용에 관여할 수 없고, 상상조차 못한다. 그 속에는 작가로선 어느 것 하나에도 끼어들 수 없는 관람자들 각자의 체험이 적혀있다. 아픈 기억이든 즐거운 기억이든 ...... 작가는 그것을 읽으면서 그 속에 서린 배경을 알 수 없고, 다만 추측만 할 뿐이다.
작가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은, 말한 것처럼, 포괄적이나마 주제를 제시하고, 주제에 따른 관람자들의 비밀 이야기를 선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녀가 상상한 상징물이나 이미지를, 그녀의 설치물 속에 함께 전시한다.
관람자의 이야기를 읽는 이는 그것을 적은 이 자신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경험의 소유자다. 물론 시간적으로도 다음 전시회의 관람자니, 얼마의 시차가 있든, 이후의 사람이다. 게다가 글이 익명으로 쓰였고, 그(녀)의 필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작가가 타이핑해 놓은 종이가 대신하고 있고, 그 내용에서 연상된, 작가가 만든 이미지나 상징물이 있어, 새로운 관람자의 글 읽기는 이러한 다른 질감의 대체물에 영향을 받는다.
요컨대 설치물은 고유한 작가도 작품도 없으며, 고유한 관람자의 이야기도 없다. 또한 관람자가 보고 읽는 설치물은 항상 변화하기 마련이다. 대신 존재하는 것은 설치물 속의 과거 관람자의 쓰기와 새 관람자의 읽기가 만난다. 물론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또 그들은 전혀 다른 체험을 한 사람들이다. 한데 그들은 이 설치물을 통해 만나고 상상하며 의미를 떠올린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로 소통하는 대화가 아니라, 제각기 상상하는 대화다.
작가는 그들을 중개한다. 작가는 자기 자신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만들고 배치하지만, 그 관심이나 취향이 관람자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극히 적다. 하여, 여기서 또 한 번 말할 수 있는 것은, 시차를 달리하는 생면부지의 관람자간의 대화는 작가가 끼어듦으로써 가능하며, 그런 점에서 이 설치작품은 두 부류의 관람자와 작가, 이들 삼자가 벌이는 대화를 담고 있다. 물론 이 대화는 서로 소통하는 대화가 아니라 제각기 상상하는 대화다. 즉 각자의 의미가 수렴하여 합의에 이르는 대화라기보다는 서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얻어 각자 자기의 의미를 떠올리는 대화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작품은 관람자의 자기 성찰에 관여한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여기서 오늘날의 역사가와 그의 역사 서술의 효과에 관한 상상을 이어갔다. 역사 서술은 시차를 달리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 간의 대화이다. 과거의 사람들과 지금의 독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서로 살아간 시기도 장소도 문화적 맥락도 다르다.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없고, 다만 과거의 사람들에 관해 서술된 역사를 통해서만 후대의 독자들은 저들 과거인(過去人)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
‘과거인’들의 삶과 체험 모두가 역사 서술 속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숱한 정보들이 있지만, 그것이 저들의 삶 전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숱한 정보들은 ‘파편적’이다. 더욱이 그 파편적 정보들은 역사가에 의해 일부가 취사선택되고 재배치되며, 또 역사가의 상상력에 의한 보완적 설명과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역사 서술이 된다.
물론 역사가는 부재하는 사료를 날조할 수 없다. 그것은 과거의 누군가의 이야기며, 삶의 기록이어야 한다. 비록 그(녀)의 변화무쌍한 삶 전체일 수는 없지만, 어느 한 순간의 기억을 담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는 본래의 고유한 의도에 따라 선택, 배치, 보충설명을 일관되게 하지 못한다. 사료에 영향을 받아 그의 본 취지가 변화하기 마련이다. 또한 전체적인 서술 과정에서 그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들 요소들이 어우러진 전체로서의 텍스트가 만들어지는데, 이 최종결과물은 역사가 자신이 애초에 혹은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 아니다. 작가 자신이 활용한 제재의 질감에 따라 설치물이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탄생하듯이, 역사 서술도 역사가가 의도한 것의 단순한 반영물이 아니다.
요컨대 역사 서술은 역사가와 과거인(過去人) 사이의 대화인데, 그 대화는 과거인의 본래적인 무엇이 밝혀지는 것을 지향하는 것도, 역사가 자신의 사상의 단순한 반영인 것도 아니다. 양자의 대화는 양자의 상호얽힘이자 분열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역사 서술은 역사가와 과거인 사이의 ‘의도하지 않은 대화’, 아니 ‘대화들’이다.
한편, 이들 양자, 역사가와 사료간의 의도하지 않은 대화는 문헌으로 출판된다. 출판되지 않는 역사 서술은 ‘실패한 역사’다. 그것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개봉되어지길 기다리는 비극적 운명의 존재다. 그리고 이렇게 개봉되기 전까지는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전시되지 않은 작품이, 관람자에겐, 작품이 아닌 것처럼. 요컨대 역사 서술은 텍스트이어야 하며, 독자와의 대화 속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역사 서술이라는 텍스트는 과거인과 현대인(현대의 독자) 사이의 대화다. 그리고 이 대화는 서로 얽혀 있되, 결코 하나일 수 없는, 분열적으로 연루된 관계의 대화인 것이다. 또한 독자는 여기서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텍스트의 의미를 읽어낸다.
역사란 이런 것이다. 적어도 현대의 역사학은 이러한 역사 철학적 성찰에 이르게 됐다. 한데 많은 역사가들이 착각하듯, 성서 연구자들도 성서에서 과거인의 고유한 사실로서의 역사를 알아내려고만 한다. 그 결과 성서 역사학은 성서 연구자들 자신에 의해 파산선고를 받았다. 성서 역사가들은 과거의 고유한 사실을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미 백 년 전에 말이다. 동일한 관심을 가졌던 역사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결국 그 연구 성과들은 실패한 역사요 비역사인 셈이다.
한편 그러한 실패에 대한 우회로로, 많은 성서 연구자들은 ‘반역사’로서의 성서 읽기를 모색했다. 예컨대 과거인의 시공간적 맥락과 관계없이 역사가(歷史家) 자신의 시선으로 자유롭게 성서 텍스트를 읽고, 그것을 역사가 자신 그리고 자기와 동시대를 사는 독자의 상상력과 대면시켰다. 이때 텍스트는 역사 서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학적 서술이다. 그러므로 역사 비평 대신에 문학 비평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현대의 성서비평은 문학비평이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학이 이러한 문학적 비평에 착안함으로써 새로운 비평 방법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역사 서술 자체가 과거인과 현대 독자 사이를 매개하는 대화의 소재라는 인식에 기반을 둔 비평 방법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역사와 반역사를 넘나드는 비평 방법이다. 역사와 반역사를 넘나들며 구성한 역사 서술로서의 텍스트, 그리고 독자와 텍스트 간의 의도하지 않은 대화를 지향하는 역사적 혹은 반역사적 독서를 추구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단 하나의 역사, 과거 사실의 재현으로서의 하나의 역사(Geschichte)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인/과거사건이 그것에 관한 정보들을 선별하고 배열하여 서사화한 역사서술들을 독서하는 독자들에 심상(心像, image)에서 역사는 실재한다. 그것은 역사서술을 통해 과거를 읽는 독자들의 성찰에 관한 마음의 기록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를 역사로 읽는 이들에게서 성서는 하나의 역사적이고 신앙적인 성찰의 기록들로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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