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무례한 복음 - 한국 기독교의 선교 그 문제와 대안을 성찰한다] (산책자, 2007)의 머리글로 쓰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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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수치스런 선교, 성찰의 가능성은 있는가
아프간 피랍사태 이후, 그 사건이 남겨놓은 논점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오늘 우리 시대의 중요한 숙제의 하나가 되었다. 그 중 기독교의 (해외)선교 문제는 기독교 내부 뿐 아니라, 교회와 국가, 교회와 시민사회, 나아가 교회와 국제사회의 정치적 합의를 요청하는 문제임이 드러났다. 그것은 선교의 수행이나 효과가 순수 종교적 문제임을 넘어 국가적이며 전 지구적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중파 방송과 전국일간지를 포함하여, 다양한 매체들이 기독교의 선교를 다루기 시작했다. 인터넷 공간은 치열한 격론장이 되었다. 많은 기독교권 외부의 매체들은 이 문제를 진단할 전문가들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불행하게도 그들에게 이 문제를 시민사회에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 줄 이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많은 경우, 그것은 필경 교회 내부의 문제를 시민사회에 드러내는 것에 부담을 느낀 자기 방어적 행위의 소산으로 보인다.
이 책의 출간을 발의하고 기획한 이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감하고 시민사회와 교회 사이에서 공론의 지점을 모색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던 개신교 신학연구자이거나 목회자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아프간 피랍사태 이후 각종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기독교와 시민사회 사이의 소통 가능한 언어를 제시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이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아프간 피랍사태 이후 붉어진 교회와 사회 사이의 첨예해진 갈등의 배후를 비판적으로 읽고 성찰 가능한 지점을 기독교 측의 관점에서 점검해보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논의의 초점은 기독교 일반이 아니라 이 사태의 직접적인 계기인 한국기독교의 (해외)선교 현상에 있다. 하여 (해외)선교에 관한 한국기독교의 성찰 지점을 제시하고, 시민사회와 기독교가 서로 맹목적으로 갈등하기보다는 전향적인 대화가 가능한 지점에서 조우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참고자료를 제시하려는 것이 이 책을 기획한 이유다. 이를 이 책은 다음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제1부는 최근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현상과 원인을 밝히고 그 과정에서 빚어진 다양한 문제점들을 짚어보고자 하였다. 왜 한국기독교가 최근 해외선교에 열광하고 있는지, 그것의 신앙제도적 요인과 사회역사적 요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해외선교가 야기한 부정적인 요소들에 대한 성찰 가능성은 있는지 등을 묻고 있다.
제2부에서는 (해외)선교에 관한 성서의 주장들을 다루고 있다. (해외)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는 한국기독교의 주체는 압도적으로 ‘근본주의적’ 신앙에 몰입되어 있으며, 근본주의적 신앙은 자신의 신앙적 신념의 구성에서 성서를 결정적인 규준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한국기독교의 선교관에 관한 성찰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한국교회가 ‘선교’를 이야기할 때 자주 사용하는 텍스트를 분석해봄으로써 배타적이고 공세적인 선교가 과연 성서적 신앙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묻고자 한다. 이 물음은 현대 성서학의 학문적 성과를 참조할 때 거의 자명하다. 거의 모든 현대의 학문적 논의는 공격적 선교를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이 작업을 수행한 연구자들은 제각기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 성서적 선교의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 특기할 것은, 현대의 서구의 신학계가 특히 종교 배타성의 문제를 지양하고자 신약성서나 구약성서 같은 기독교 중심적인 표현 대신 각각 제1성서와 제2성서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수용하여, 이 책에서는 후자의 표현들을 사용하였다. 물론 이렇게 용어를 바꿔 쓴다고 해서 당장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표현의 생소함 탓에 독자와 대화하는 데 난점이 발생할 우려 또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대다수 필자들은 ‘신약’, ‘구약’이라는 표현상의 문제를 잘 알고 있음에도 표현의 이물감이 가져올 대화의 난점을 고려하여 익숙한 표현으로 원고를 집필해 주었다. 하지만 이 책이 기독교 중심적인 공격적 선교관을 비판적으로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적어도 성서 명칭에서라도 배타적인 함의를 줄이고자 편집 과정에서 임의로 수정하였다. 그럼에도 독자와의 대화에 장애가 걱정되어 번거롭지만 글마다 안내 표시를 하였다.
마지막 세 번째 파트는 현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넘어서 좀더 넓은 지평에서 선교에 관한 논의를 펴고자 했다. 여기서 우려한 것은 자칫하면 현장 없는 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에 수록된 글 모두는 아프간 피랍사태에서부터 사유의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으며, 거기에서 ‘나눔’, ‘섬김’, ‘생명’이라는 기독교 선교가 지향해야할 대안적 가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여기에 현대서구의 선교론적 논점을 요약하는 글 하나와, 개신교와 천주교를 아우르는 한국기독교의 선교 양상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글 하나를 포함시켰다. 특히 후자는 한국기독교의 선교 현실과 그 발전 가능성을 짚어보는 데 유용하다.
여기에 수록된 3부의 17편의 글로 한국기독교의 선교에 관한 충분한 비평과 안내, 그리고 성찰이 시도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첫 시도라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공론이 될 만한 말을 찾아내는 것이 이 책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어려웠던 점이다. 하여 우리가 기대하는 이 책의 의의는 독자를 중심으로 해서 한국의 기독교와 시민사회 간의 진지한 대화와 토론이 전개되었으면 하는 데 있다.
한편 기획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제기로 담아내고자 했던 하나의 논점이 전체적으로 누락되었다. 그것은 (해외)선교의 문제를 한국의 근대성과의 연관성 속에서 살펴보려는 일련의 시도들이었는데, 이 전인미답의 논의를 구체화할 만큼의 기획을 내놓는 데 실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어떠한 글도 싣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물론 그것은 기획 과정에서의 실패가 필자들을 극복할 수 없는 혼란에 빠뜨린 탓이다. 여전히 그 항목들을 잘 설명할 수 없으나 문제제기적 차원에서 열거하면 이렇다. ‘선교’와 ‘제국’이라는 최근 한국근대성을 구성하는 두 요소가 담고 있는 공간 확장의 제국주의적 함의를 읽어내는 문제, ‘선교’라는 존재 외부를 향하는 욕망이 ‘일상의 발견’이라는 최근 한국근대성의 체험적 요소와 어떻게 연동되고 있는지의 문제, 그리고 포스트근대적 여성 체험과 기독교의 단기선교라는 종교적 행위를 선택하는 것 사이의 상관성의 문제다. 이 마지막 논점은 아프간 피랍사건에서 보듯이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이 단기선교팀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과, 장기선교에 나서는 이들 가운데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한국의 포스트근대적 체험과 관련해서 살펴보려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우리는 향후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러한 의문들을 해석하는 시도를 할 예정이다. 한국근대성의 체험의 변형과 기독교신앙의 변형 과정은 불가분 연관되어 있으며, 아마도 시민사회와 기독교 간의 대화 가능한 지점을 발견하는 데 있어 이러한 연관성에 대한 물음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필요성에 대한 절실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 논점을 거의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 때문에, 아래에서는, 머리글답지 않지만, 한국기독교의 해외선교 열풍을 한국근대화 과정과 관련시켜서 해석하려는 하나의 문제제기를 스캐치하듯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책에 실린 여러 글에서 논의하고 있듯이 최근 한국기독교의 해외선교 열풍은 주로 ‘1990년대 이후’의 현상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1970년대 한국기독교가 온통 ‘기도원’ 열풍으로 물들었던 현상과 대비된다. ‘기도원’ 현상은 신앙체험의 반합리성이 한국기독교의 집단적인 신앙적 다이내미즘을 창출했던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한국기독교는 급속도로 교세가 팽창했다. 또한 이런 반합리성의 신앙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교회들은 빠른 속도로 초대형교회로 성장했다. 하여 크건 작건 대다수의 교회들이 너도나도 기도원으로 향하기를 권장했고, 기도원에서 성공적으로 신앙체험을 겪은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나아가 사람들의 일상 공간에 들어와 있는 개개 교회들이 ‘의사(擬似) 기도원’처럼 변하기도 했다. 요컨대 기도원 현상은 이 과정에서 성공한 초대형교회만의 현상이 아니라, 거의 모든 교회의 현상이기도 했다. 초대형교회가 거의 모든 교회의 모방과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기도원 현상을 통해 성공한 초대형교회의 시대라고 말해도 그리 지나친 규정은 아니다.
근데 주목할 것은 기도원 현상은 당시 돌진적 성장을 거듭하면서 도시로 꾸역꾸역 몰려들던 이농인파들 사이에서 활성화됐다는 점이다. 그들은 ‘덜 근대적인’ 농촌을 떠나 ‘더 근대적인’ 도시로 왔다. 과거엔 그렇게 세밀하고 엄밀하지 않았던 일정표가 삶의 일상을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들이 선호한 신앙적 유형은 그 반대였다. 도시의 일상을 떠나 귀신이 출몰하는 야만의 공간이고, 구마사들이 귀신과 사투를 벌이는 원시의 공간이다. 곧 기도원 신앙은 급가속하는 근대적 도시화 과정에서 폭력적 배제를 체험하고 있는 이들이 존재론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전근대의 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집단적으로 활성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말했듯이, 1990년대 이후는 너도나도 ‘해외선교’에 몰두하는 교회들로 가득하다. 1990년대 해외선교란, 역시 이 책에 수록된 여러 글들이 말하고 있듯이,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기업의 해외진출이 활기를 띠며, 나아가 자본의 경계 이동이 급가속화하던, 이른바 지구화 과정의 국경의 강고함이 무너지는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다.
지구화 과정의 ‘단단한 국경’(solid boundary) 개념의 해체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야기한다. 하나는 국경의 단단함을 여전히 견지하고자 하는 국가주의 내지는 민족주의의 활성화이고, 다른 하나는 국경의 월장(越牆)을 더 이상 일탈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런 체험으로 느끼는 감각의 활성화이다. 이 두 반응은 거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모순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각 계층적 범주에 따라 이 두 요소의 모순적 공존의 비중은 제각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해외선교는 국경 월장의 요소가 더욱 우세하게 나타난 계층에게 더욱 호소력을 지니는 신앙적 요소였다.
과거 도시로 몰려들던 인파들 사이에서 성장한 많은 교회들이 1990년대 즈음에는 이미 ‘강남’으로 속속 이주하였으며, 또 새롭게 부상한 많은 교회들이 이른바 ‘강남권’에 입지하였다. 그리고 그 교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앙문화가 발전하였다. 기도원 현상은 쇠퇴했고, 쇼비지니스적인 경영전략이 교회의 새로운 동력을 낳는 전략으로 선호되었다. 도시 밖으로의 원시적 공간이 아니라, 잘 기획된 더 도시적인 문화공간을 연출한 교회가 더 성공적인 결실을 누렸다. 그리고 반합리성이 유포되는 대신, 이들 교회들을 중심으로 도시적 근대성 문화에 ‘적극적인 삶’을 강조하는 신앙적 품성이 유포되었다.
바로 이런 맥락과 관련해서 해외선교라는 신앙적 실천이 이른바 강남권 교회들에 선도되어 범교회적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선교라는 공간확대의 신앙적 욕망은 돌진적 근대화 과정에서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던 요소인 ‘국경 너머’(beyond boundary)를 향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덜 민족주의적인 계층인 여성이 국경 밖으로의 공간이동에 더 손쉽게 반응한 결과가 이번 분당샘물교회의 단기선교팀에서 보여준 성비의 불균형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여성은, 돌진적 근대의 사회보다, 포스트근대적 체험에서 더욱 자율적 선택의 여지가 넓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하여 지도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의 주체로 자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가부장적인 교회의 신앙제도 속에서 엘리트 충원의 장치로 발돋음한 장기선교 사역자로 부상할 수는 없었기에, 장기사역사인 여성이 절대적으로 적게 된 것이 아닐까.(통계수치에서 장기여성사역자의 수가 많은 것은 선교사들의 부인들이 통계에 잡힌 탓이다.) 여기에 하나 더 언급하자면, 결혼이라는 도피구를 통해서 직장 퇴출의 위협을 회피하는 생존전략을 취하는 가부장제 사회의 전형적 여성은 가족의 모든 경제적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자의식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전형적 남성에 비해 국경을 교란시키는 지구화의 현상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여성상은 기독교가 강조하는 가족의 질서와 그다지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결혼을 여성스러운 삶의 선택으로 강조하는 기독교의 결혼윤리관에 체화된 여성이 국경 너머로의 단기선교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구화의 공간 변화의 체험을 폭력적으로 덜 느끼는 중산층 그리고 청년층의 사람들이 해외선교의 가장 열광적인 자원자가 되었을 것이다. 온누리교회나 분당샘물교회 등 해외선교라는 신앙동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교회들에 중산층과 청년층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와 상관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1970,80년대의 기도원 열풍은 돌진적 근대화의 폭력성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계층의 신앙적 체험이 종교적 제도화에 개입한 결과라고 한다면, 최근의 해외선교 열풍은 지구화의 폭력성에 상대적으로 덜 노출된 계층의 신앙적 체험의 제도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정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한국기독교의 해외선교는 지구화의 급격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여전히 성공을 영위할 수 있는 적실한 생존전략의 하나로서 활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주역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구화라는 사회역사적 변화를 폭력적으로 체험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선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폭력성의 현장에서 이탈함으로써 가능한 행위전략이 선교인 셈이다. 사람 사는 현장으로 내려온 신인 ‘예수의 선교’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또한 이러한 선교는 피선교 대상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과 아무런 관련 없이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노정한다. 오히려 교회의 해외선교 전략은 피선교대상에 대한 관심보다는 선교행위를 선택할 모집단인 교회 대중의 문화적 취향에 대한 호소력에서 선택된 것인 셈이다. 그러니 피선교지역의 문화나 역사, 사회 등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선교, 결국 무례한 공격적 선교가 수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간략히 가설적으로 스캐치한 한국근대성의 체험과 교회의 해외선교 전략 사이의 상관성에 대한 논의는 더 많은 연구와 토론을 통해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많은 부분이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설적 논의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말했듯이, 한국기독교의 해외선교는 한국사회의 근대적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담아내지 못했기에 머리글에서라도 간략히 제안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설적 스캐치는 이 책 필자들과 교감을 나눈 것도 아니고 기획진의 합의된 의견도 아니다. 단지 머리글을 쓰게 된 이로서 개인적으로 펴는 의견에 불과함을 밝힌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내게 된 것은 아프간에서 희생된 두 명의 젊은 신앙인에 대한 애도의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사태 이후로 많은 격론이 있었음에도 신학자들이 적절히 개입하여 논의하지 않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책을 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책으로 발전하게 되는 데 학문적인 제도적 토대가 되었다. 여기서 학문적 토론을 함께 했던 많은 연구자들이 이 책의 기획과 집필에 참여하였다. 또한 본 연구소와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지 않은 저자들도 적지 아니 참여하여 논의를 더욱 풍성하게 하였다.
이 기획물이 우리 나름에는 매우 중요하였지만 그리 인기 있을 법하지 않은 책이기에 출판이 가능한지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였다. 그런데 웅진 지식하우스 ‘산책자 팀’의 김수한 주간이 우리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우리사회에 소통할 수 있는 꽤 그럴듯한 형식으로 가공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이 책은 비로소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편집자인 박재영 선생의 꼼꼼한 시선을 통해 책의 많은 부분이 보완되었고 더 정돈된 내용을 갖출 수 있었다. 그밖에 나로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산책자의 여러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낀다. 그이들이 아니었으면 이 책은 결코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언어로서 내놓여질 수 없었을 것이다. 기획자로서, 저자로서, 편집자로서 참여한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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