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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개신교 신앙 - ‘88선언’의 ‘2018년식 리폼’을 위하여

이 글은 [공동선] 140(2018 05+06)의 특집 '한반도 평화를 위해 종교계는 제 역할을 찾아야 한다'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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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개신교 신앙

‘88선언‘2018년식 리폼을 위하여

 

 

 

 

 

평창에서 판문점까지한반도 평화레짐의 형성과 전개

 

417일자 블룸버그 통신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노동당위원장이 정당회담에서 종전선언(to announce an official end to military conflict)을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같은 날 미국 대통령 트럼프도 한국과 북한의 종전선언을 축하한다(Have my blessing)고 말했다. 그리고 22일 청와대는 회담 당일의 모든 과정을 TV와 모바일로 생중계할 것임을 발표했다. 이것은 종전선언에 관한 모든 합의가 이미 끝났고 27, 정상회담 당일은 그것을 공표하는 세리머니만 남았음을 시사한 것이다.

한국정부는 또 한 번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53‘7.27 정전협정(Korean War Armistice Agreement)은 일체의 전투행위를 중단한다는 협약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여전히 전쟁은 진행 중임을 의미했다. 그로부터 65년 만에 전쟁의 종식을 선언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선언은 국제법적인 효력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남한은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미국 대통령은 이 선언을 축하한다고 말했고, 정전협정의 또 다른 당사자인 중국도 지지를 표명했으니, 이 선언은 한반도 평화협정의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201776, 문재인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구조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종전과 함께 관련국이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까지도,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의 가능성에 대해 국제사회나 한국사회의 대부분은 요원한 것으로 생각했다. ‘코리아패싱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비존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1113, 평창올림픽 기간에 군사적 분쟁을 중단하자는, 한국이 제출한 휴전결의안UN총회에서 채택되었을 때, 그리고 북한이 선수단을 파견하고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이 만들어지며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 문 대통령과 회담을 하게 되었을 때, 국제사회에는 일종의 한반도 평화레짐이 빠르고 구축되고 있었다. 그리고 평창올림픽이 끝나고 한 달이 채 못 된 417종전선언보도가 전 세계로 타전된 것이다.

19포춘(Fortune)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 50인 중 4(정치인 중 1)에 문재인 대통령을 올렸고, 같은 날 더타임(The Time)도 세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문 대통령을 포함시켰다. 이것은 한반도 평화레짐을 한국정부가 주도하고 있음이 전 세계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방증이다.

만약 아무런 이변 없이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이 공표된다면, 6월 중에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북미정상회담에서는 최소한 평화협정 체결에 관한 명시적 진술이 나올 것이 기대된다. 필경 중국도 이 평화협정과정에 참여하고 싶어 할 것이고, 러시아와 일본도 이 협정에서 자신들의 이해가 어느 정도 반영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즉 한반도를 둘러싼 당사국들인 ‘2+4’ 중 어느 나라도 현재의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공공연한 비토를 놓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남북 양국뿐 아니라 플러스 4’에 속하는 나라들이 강대국인 터라 협상의 디테일을 구성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현재의 정세에서 한반도 평화레짐은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최종 목표를 지향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2005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때에도 한반도 평화체제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특히 그해 9.19공동성명에서 6자회담 당사국들은 한반도 평화협정과 단계적 비핵화를 선언했다. 이 선언에 이어 이듬해 11월 미국 부시 대통령은 한반도 종전선언(a declaration of the edn of the Korean war)을 제안하였고, 2007104일에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하 ‘10.4선언’)이 있었다. 10.4선언에는 평화협정의 구체적 방안으로 남북한 간의 상호존중, 신뢰, 적대관계종식, 경제협력 등에 관한 포괄적 합의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해 1219일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은 이듬해 9월 유엔총회에서 그랜드바겐(Grand Bargain)이라는 새로운북핵 해법을 주장했다. 그것은 북한이 핵 프로그램의 핵심부분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리면 대대적인 대북지원을 한다는 것인데, 이는 단계적 핵폐기를 선언했던 9.19공동선언을 부정하는 셈이었다. 그러자 북한은 20095, 2차 핵실험을 단행함으로써 눈앞에 보이는 듯 했던 한반도 평화체제는 물거품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임기가 4년이나 남은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부의 비전을 계승하면서 그때보다 더 잘 준비된 관료들을 포함한 전문가집단이 있다는 사실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기대를 갖게 한다. 여러모로 운도 따르고 있지만, 불리한 국제정치를 반전시켜 한반도 평화레짐의 구축을 주도한 역량에 대해서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돌진하는 정부, 방황하는 시민사회

 


그러나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향한 현재까지의 흐름을 보면 정부가 너무 앞서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편에서 이것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정권의 처참한 실패로 보수주의적 대중정치의 기반이 산산이 부서져버린 상황에서, 열렬한 대중적 지지를 받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와 여당은 이제까지의 어느 개혁적 정권과도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한 대중정치적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에 구체적인 남북대화에 참여했던 경험을 가진 관료들과 참모진용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현 정부가 한국사회에서 어느 집단보다 북한과의 대화에서 주도권을 쥘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 미국 트럼프 정부도 미국사회를 이끌어왔던 기성의 엘리트집단과는 다른 정치를 펴고자 하는 탓에, 이제까지 북한에 대한 정책을 주도해 왔던 전문가들이 부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의 입지가 좀더 여유롭게 되었다.

한편 시민사회도,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방향을 잃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적 태도나 진보주의자들의 시혜적 태도는 모두 너무 나이브하고, 양자 공히 맹목적 민족주의에 휘말려 있는 탓에, 그 실천이 현실적인 기획보다는 당위에 치우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탓에 현 상황을 해석하는 능력이 매우 취약한 형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평화체제 구축의 시간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정권 후반기로 가면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대중적 지지는 추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때 보조를 같이 하는 시민사회의 도움이 없다면 평화체제를 향한 노력은 또 다시 물거품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의 평화선교는 어떠해야 할까. 이 글의 마지막 단락은 바로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개신교의 평화선교

 


19882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하 ‘88선언’)을 발표했다. ‘88선언은 한국개신교의 통일운동의 최정점에서 나온 가장 빛나는 선언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개신교의 통일운동은 남북한 관계가 극도로 경직되어 있던 1980년대에 가장 빛나는 성과를 이룩했다. 그것은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의 막강한 국제적인 공신력과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북한 인사들과의 교류를 진행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유능한 대북관계 전문가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또한 WCC의 신학적 담론시장에서 통일신학이라는 범주를 만들어냄으로써 신학적 어젠다를 통한 국제적 여론을 추동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전 지구적 의제로 한반도 분단과 통일 문제를 부상하게 했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활발한 담론과 실천을 낳았는데, 19938.15를 맞아 벌인 남북 인간띠 잇기 대회1995년의 통일희년 운동이 대표적인 대중운동의 성공사례라면, ‘88선언은 이러한 대중적 통일운동의 원칙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해 낸 담론적 성과물이었다.

‘88선언7.4공동선언의 3대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다 인도주의 원칙민주화 원칙을 첨가하는 ‘5대 원칙을 선포했다. 여기서 참가된 두 개의 원칙이 ‘88선언의 시대적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통일운동은 이념이나 체제를 넘어 인간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모든 시민과 민중의 민주적 참여를 통해 실행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 것이다.

이때 민주적 참여라는 제5원칙은 현재 정부 주도의 평화체제 구축 프로젝트의 한계를 보충하는 논점임을 주지하자. ‘88선언은 시민이, 그리고 모든 기독교도로 하여금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운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한다.

한데 ‘88선언30년 전의 한반도 평화통일 선언이었다. 그러니까 2018년엔 새롭게 리폼(reform)된 원칙이 필요하다. 나는 인도주의 원칙(인간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원칙)과 민주화 원칙(대중 참여의 원칙)을 오늘의 시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으로 ‘88선언의 리폼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때 문재인 정부의 개헌안 중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확대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민에서 배제된 이들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한반도 평화체제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들이 이 체제 구축의 주체라는 것이다. 성서 텍스트도 바로 이 점을 얘기한다. 고대 유다국에서 요시야 왕이 신으로부터 선사받은 법을 반포하여 새로운 체제를 구축할 때 부름받은 법의 백성을 열거하는 본문(신명기29,10~11)에서 부족의 지도자들 외에 아이들, 여자들, 외국인들, 노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오늘의 시각에서 다시 말하면, 남성뿐 아니라 여성, 성인뿐 아니라 아이, 이른바 정상인뿐 아니라 비정상인(성소수자나 장애인, 특정 질병 걸린 자 등), 그리고 외국인 노동이주자나 결혼이주자, 난민과 유민 등도 평화체제가 소외시켜서는 안 되는 대상이며 그것을 함께 이끌어가는 주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88선언의 통일운동이 함축하고 있는 민족주의는 2018년의 평화체제 담론에서는 지양해야 할 요소다. 즉 통일운동이 아니라 평화체제를 향한 운동인 것이다. 이제까지 개신교 선교담론과 운동이 추구해왔던 민족주의적 요소를 넘어서, 한반도에 들어와 있는 모든 이들, 혹은 한반도에서 비존재로 취급당해온 모든 이들을 포함시키는 신앙, 여성도 무슬림도 성소수자도 차별받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신앙, 그런 신앙에 의해서 만나고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신앙, 이것이 바로 평화체제적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