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2006.11)에 수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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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의 현장을 성찰하며 안병무를 독해하기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삼인, 2006.10)의 저술을 마치며
안병무 선생의 추모 10주기일인 10월 19일을 전후로, 심원기념사업회는 전 주에 행사를 치루고, 내가 속한 교회는 그 다음 주에 행사를 치룬다. 공교롭게도 두 행사는 출판기념회를 겸하고 있다. 거의 매년 선생의 추모행사 때는 책이 헌정되었지만, 개 교회가 선생을 기억하는 이 특별한 기획을 준비한 것은 지금까지 선생을 애도하는 방식 가운데 생소한 것이다. 저자의 한 사람이자 기획책임자로서 나는 이 생소함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판단한다.
선생이 설립한 교회들은 크게 보면 민중신학자로서의 선생의 뜻을 승계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관성이 있고, 또 상호 연대적이지만, 그럼에도 제각기 다른 경로로 형성・전개되었고, 신앙의 사회적 개입에 있어서 나름의 담론 양식을 각기 구현해왔다는 점에서, 단지 그 중 가장 작은 교회가 독자적으로 선생의 추모도서를 헌정했다는 것이 그 의의의 전부는 아니다. 아니 그보다는 이 책이 그 교회가 지향하는 나름의 담론 양식에 기반을 두고 기획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컨대 이 책은 그 교회의 신앙고백의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저자들이 이러한 주문에 일방적으로 매여서 작업한 것은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교회나 교인보다는 신학자들이 훨씬 예리한 신학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여 담임목사는 이 프로젝트가 단지 책의 집필만이 아니라, 수차례의 설교, 강연, 강좌, 심포지엄 등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이것은 저자들의 작업이 교회 내적으로 교인들의 신앙 형성에 도움이 되어야 하며, 또한 외적으로 교회의 선교와 민중신학의 활성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끝은 책의 출간이다.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은 무엇인가? 나는 책의 제목에서 세 가지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선 “안병무를 ‘다시 본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책의 〈마중글〉에서 명시하고 있듯이, 이 표현은 엄밀히 말해서 타당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면 이 표현 속에는 안병무 선생을 보는 기성의 ‘표준적인 시선’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표준적인 시선에 대해 다른 시선을 제기하는 주장이 바로 ‘다시 본다’는 말일 것이다. 한데 실상은 ‘제각기 읽기’ 정도만 존재할 뿐, 안병무 읽기의 제도화는 아직 요원하다. 요컨대 안병무 연구는 여전히 시작 단계에 있다.
연구의 1차 자료인 선생의 저작들은 단행본 저작, 글 엮음집, 대담집 등 십여 권이나 되지만, 각각의 글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향해 쓰인 것인지, 혹은 시차를 달리하는 같은 글이 있을 때, 그 텍스트의 최초 버전과 재수록 버전 사이의 내용상의 변화 혹은 텍스트 전후 맥락의 변화는 어떤 유의미한 차이를 담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각각의 텍스트들이 동시대의 지성사적 맥락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지 등, 텍스트에 대한 최소한의 연구조차 부재한 상태다. 기념사업회가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여 마련한 ‘저작목록집’은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다시 읽기’를 말한다는 것은 타당한 설명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다시 읽기’라는 말을 쓴 것은, 글의 내용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논의의 접근방식이 기존의 글들과 다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추측에 의한 추론일 뿐이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들이 대체로 ‘고증학적 방식’으로 선생의 문제의식을 다뤄왔다면, 우리는 ‘해석학적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연구들이 연구자 자신의 시점이 아니라, 안병무 선생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선생의 사상을 파헤친다면, 이 책이 지향하는 바는 필자들의 시점인 ‘오늘 여기에서’ 선생의 문제의식을 재평가하고 재의미화하려는 데 있다. 민중신학자인 선생을 만나기 위해 1970,80년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로 선생을 소환하겠다는 것이다. 선생이 한 글에서 민중을 예수의 ‘환생’으로 상상해낸 것처럼, 그리하여 당신의 시대 맥락 속으로, 그리고 당신 자신의 시선으로 예수를 재의미화한 것처럼, 이 책 또한 선생을 오늘 우리의 시대로 ‘환생’하게 하고, 필자들의 시선으로 선생을 재의미화하겠다는 것이다.
1987,88년 즈음, 선생은 부쩍 대화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셨다. 아마도 대담집 《민중신학 이야기》를 만들 때의 새삼스런 발견이 선생에게 어떤 통찰에 이르게 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선생은 “질문이 대답을 결정한다”는 표현으로 말한 바 있다. 민중신학에 입문하기 전, 실존주의에 심취했을 시절의 상투적인 통찰이었겠지만, 만년에 대담을 하면서 새삼스레 실감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 대담집을 좀더 섬세하게 읽으면, 질문이 대답을 결정한다기보다, 이 대화 과정에서 질문자나 답변자 모두가 각기 미리 준비하고 있거나 익히 알고 있는 생각을 넘어서는 지점에 다가서는 것을 보게 된다. 요컨대 대화는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통찰에 이르게 한다는 얘기다. 바로 그런 것처럼, 필자들이 이 책에서 선생을 우리 시대의 문제의식 속으로 소환하겠다는 해석학적 주장은, 선생과 필자들 간의 시공간을 넘어서는 대화를 통해서 선생이 말하지 않았고, 필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 이르는 사유의 발견을 추구하고 즐기려는 것이다.
둘째로, ‘다시 보는’ 대상이 ‘안병무 선생’이라는 점이 이 책의 또 다른 핵심요소다. 앞서 말했듯이 안병무 연구는 아직 표준적 이해가 없다. 그러므로 선생의 책을 열심히 읽어대도, 사람들에게 선생은 제각기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안병무 심포지엄’을 할 때, 나는 자료집에 필자들의 글을 ‘5인5색’이라는 제목으로 엮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연구 상황을 반영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제각기라 할 때, ‘안병무, 그는 누구인가’를 우리는 말할 수 있는가? ‘안병무’의 이미지가 수없이 많은 것들로 재현될 수밖에 없다면, 그 기표가 담고 있는 기의는 비어있는 것 아닌가?
책의 기획단계에서, 이 책은 앞서 말한 다시 읽기의 관점, 곧 필자 자신들이 문제제기하고 이해하는 우리 시대에로 안병무 선생을 환생시키려는 작업이라는 기획취지를 필자들에게 제안했을 때, 한 분이 이렇게 되물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안병무를 통해 복화술하자는 거지?”
만약 그의 말이 위와 같은 ‘비어있는 기의’라는 식의 극단적인 해석의 다중성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단지 해석자의 소리만 있고, 안병무는 인형에 불과한 것, 즉 해석자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 책은 거기에 공감하지 않는다. 만약 ‘비어있는 기의로서의 안병무 읽기’라는 함의로 책을 구성했다면, 내가 좋아하는 표현에 따라, 차라리 ‘X, 다시 읽기’라고 제목을 잡는 게 나았을 것이다.
안병무라는 이름이 표상하는 가장 대표적인 함의는 ‘민중신학자’이다. 거꾸로 민중신학을 말할 때도, 많은 이들은 곧 안병무의 신학을 떠올린다. 민중신학과 안병무는 이렇게 서로에 의해서 과잉규정되고 있다. 바로 이 점에 필자들은 주목한다. 즉, 선생을 다시 읽기 위해 선생의 책을 읽을 때, 선생이 민중신학자라는 점은 필자들의 연구에서 핵심적 요소다. 요컨대 ‘안병무 다시 읽기’라는 말은 곧 ‘오늘 민중신학을 다시 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선생의 책과 우리 시대에 대한 필자들의 감각은 그 매개의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죽은 민중의 시대’라는 제목은 이 책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을 담고 있다. 선생이 말년에 자주 사용한 용어 가운데, ‘죽임과 살림’이라는 대립쌍을 이루는 개념이 있다. 전자는 선생이 보는 시대에 대한 감각을 담은 표현인데, 여기서 죽임당함의 실체는 ‘민중’이다. 이것은 일종의 선생 식의 ‘민중의 정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민중은 ‘체제에 의한 죽임’을 몸에 새기며 사는 존재다. 여기서 ‘죽임당함’이라는 은유는, 고통스러우나 그것을 표현할 언어를 박탈당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고통이 몸에 새겨져 있기는 하나, 그 새겨진 고통의 전후 맥락, 사회적 요인, 개인사 등(나는 이를 ‘고통의 네러티브’라고 부른다)이 감춰지고, 단지 고통으로 인한 상처만 남게 하는 체제, 그 체제의 희생양을 지칭하는 용어가 민중이라는 것이다. 때로 그 고통의 상처는 병증으로 나타나곤 한다. 가령, 어떤 이의 상흔은 끊임없이 특정한 타인, 가령, 아내나 자식, 혹은 엄마를 향한 폭력으로 표현되고, 또 어떤 이는 연쇄살인범이나 연쇄방화범처럼 제3의 존재/것을 향한 가학증으로 표출되기도 하며, 또 다른 경우로 무기력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그(녀)가 겪은 사회적 고통은 은폐되고, 그의 병증적, 혹은 범죄적 행각만 드러날 뿐이다.
안병무 선생은 이러한 체제의 메커니즘을 ‘죽임의 문화’라고 불렀고, 또 다른 민중신학의 개척자인 김용복 선생은 ‘침묵의 문화’라고 지칭했다. 이러한 죽임/침묵의 사회적 장치는 민중이 부재한 사회인 양 보이게 한다. 오히려 그 사회에는 범죄자, 정신이상자, 혹은 무능력자들만 존재할 뿐이다. 그것을 이 책은 ‘죽은 민중의 시대’라고 불렀다.
그런데 선생의 민중신학적 감수성이 지배하던 시대인 ‘권위주의’ 시대와 달리, 필자들은 이른바 ‘민주화와 지구화’의 시대적 감수성으로 ‘민중의 죽음’에 주목한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고통의 은폐 메커니즘이 그다지 정교하지 않았다. 또한 가해자인 독재자가 있고, 피해자인 민중이 확연하게 나뉘는 시대였다. 반면, 민주화와 지구화의 시대에는 무수히 많은 작은 독재자들이 부상한다. 또한 가해와 피해의 경계가 애매해지며, 많은 이들은 원초적인 폭력보다는 ‘예감된 폭력’을 더욱 예민하게 체감한다. 하여 오늘의 시대는 죽임의 메커니즘이 훨씬 정교하게 작동한다. 즉 민중의 망각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에는 민중의 부활을 외치는 많은 담론들이 있었으나, 오늘의 시대에는 ‘민중의 죽음’이라고 할 만큼, 사회적 고통의 네러티브가 은폐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시대를 ‘죽은 민중의 시대’라고 개념화하고 있다.
필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각자 자신들의 주요 테마들을 잡았다. 하지만 이 책을 구성하는 테마들은 체계적인 범주들의 분할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그러한 체계적 범주화는 분류의 객관성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것은 필자들의 개체적 성향을 생략하는 틀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지향과는 다르다. 이러한 교과서적인 틀에 의도적으로 저항하면서, 이 책은 필자들 개개인의 관심과 성향을 가능한 한 폭넓게 보장하려고 하였다. 차정식은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온 우주의 생명까지를 폭넓게 주목하면서, 죽임의 체제에 대해 살림의 상상력을 안병무 선생을 매개로 펴고자 했다. 김진호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죽임의 틀을 해부하려는 데 좀더 치중하면서, 선생의 민중론을 재해석하고 있다. 황용연도 선생의 민중론에 주목하지만, 김진호가 고통의 체계로부터 민중을 논하는 데 반해, 황용연은 고통을 넘어서 꿈틀대는 소수자 운동의 관점을 더욱 강조한다. 최형묵은 민주화와 지구화의 고통의 틀을 지양하는 대안체제의 문제를 선생의 ‘공(公)’의 상상력을 빌어 체계화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정희는 오늘 우리 시대의 풍부한 비판적 이론들을 통해 안병무 선생의 상상력을 보충하여 보다 완성적인 민중담론으로서의 신학적 체계화를 모색한다.
다섯 명의 연구자가 이 작업을 마치는 데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3배의 시간이 든 셈이다. 그만큼 필자들은 각자 심한 진통 끝에 글의 마침표를 찍었다. 전체 작업의 기획자이자 필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책에 실린 글들 하나하나 속에서 필자들의 고통스런 글쓰기를 읽을 수 있었다. 우리 시대와 대면하면서 안병무를 다시 읽는 일의 고통스러움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안병무를 (고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무수한 해석의 한 전범(典範)으로 권하고 싶다. 이 책이 우리 시대에 안병무를 읽는 하나의 괜찮은 안내서라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첨언할 것은, 이 글의 서두에서 얘기했듯이, 교회도 이제 신학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신학의 번역에 치중하기보다 사목 현장의 고민과 더욱 치열하게 대면할 수 있는 공간은 대학이라기보다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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