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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김태연의 〈코로나 시대, 서양의 위기담론에서 드러난 근대국가와 종교 문제―정치신학적 관점을 중심으로〉에 대한 논평

2021년 5월15일에 열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상반기 심포지엄 '코로나19 이후의 종교와 종교학'에서 발표된 5편의 글 중 제2발표원고인 김태연 박사의 글에 대한 논평글. 김태연 박사의 글은 [한국종교문화연구]에 게재될 예정이어서 여기서 공개할 수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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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연의 코로나 시대, 서양의 위기담론에서 드러난 근대국가와 종교 문제정치신학적 관점을 중심으로에 대한 논평

 

코로나 시대라는 현실의 문제를 해석하기 위해 왜 정치신학이 호출되었을까? 글의 제목을 읽으면서 들었던 첫 번째 질문이다. 가장 진부한 나의 질문 방식이다. 어떤 글이든 처음 읽을 때 나는 늘 그 글이 우리의 현실에 어떻게 끼어들려 하는지를 캐묻는다. 물론 이것은 많은 저자들에게 폭력일 수 있다. 그 글의 진정성에 대해서 말해 보라는 추궁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의 진정성이라는 표현이 우습기도 하지만, 재야의 민중신학자가 질문한 것이니 마치 민중신학적 시각에서 답변을 해야만 진정성을 인준받게 될 것 같은 뉘앙스의 질문이 될 수 있다.

이 물음이 내게는 정말 궁금하지만 그런 폭력을 가하는 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해서 늘 나는 조건을 붙인다.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그냥 내가 자문자답하려 한다. 물론 완전히 나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다.

내가 보기엔 정치신학을 묻는 저자의 물음의 출발점에는 아감벤이 있다. 코로나 대감염 사태 초기에, 가장 심각한 나라의 하나였던 이탈리아의 지식인으로서 그는 도발적인 논점을 던졌다. 방역을 빌미로 국가가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기회로 삼지 말라고.

이 문제를 제기한 이후 그는 엄청난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얼핏 읽은 나의 독서 능력으로는 아감벤의 논점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헤아릴 수는 없다. 다만 저자는 아감벤의 논점을 출발점 삼아 국가에 대해 더 깊게 질문하려 한다. 그래서 도달한 것은 칼 슈미트다. 아감벤의 논점에서 비판적으로 주목하는 대상이 칼 슈미트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정치신학론이 그의 국가론의 요체다. ‘신학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그에게서 (근대의) 정치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탈세속적 신학이다. 한편 그에게서 정치란 적대의 정치를 말한다. 적과 우리의 비타협적 전쟁이라는 전제 위에서 구현되는 정치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지젝은 이런 정치를 울트라 폴릭틱스(ultra-politics)라고 불렀는데, 정치학자 김정한은 극단정치라고 옮겼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은 뒤에 그는 바이마르공화국의 세속적 정치인 시민의 정치에 반하여 극단정치를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세속적 정치가 아니라 탈세속적 신학의 정치이며, 절차를 통한 합의를 강조하는 정치가 아닌, 대중의 흥분과 떨림을 구현하면서 적그리스도의 준동을 막는 적대의 정치인 것이다. 그렇게 구축된 국가를 그는 강조한다. 신의 재림이 일어나기 전, 그 중간기에 적그리스도가 날뛰지 못하도록 하는 국가가 진정한 국가인데, 이런 국가를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 존재를 그는 카테콘이라고 불렀다. 데살로니가후서2,7 “불법의 비밀이 벌써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억제하시는 분이 물러나실 때까지는, 그것을 억제하실 것입니다.”에서 억제하는 분으로 번역된 그리스어가 바로 카테콘(κατεχων)이다. 카테콘의 역사적 서사를 해석해내는 것이 바로 슈미트의 정치신학의 과제다.

이 발제글의 저자인 김태연은 슈미트의 국가론의 전범으로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론을 다룬다. 30년 전쟁이 끝난 직후 쓴 이 책은, 유럽 전역에서 30년 동안이나 벌어진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리바이어던과 같은 국가를 호명한다. 흔히 말하는 절대주의국가가 그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보호를 절체절명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만약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국민에 의해 심판받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전쟁이라는 예외상태. 30년 전쟁을 거친 뒤 홉스는 리바이어던론을 폈고, 1차 세계대전을 거친 칼 슈미트는 정치신학론을 폈다.

바로 이 지점이 저자가 슈미트의 국가론을 주목한 이유겠다. 왜냐면 오늘의 현실인식인 코로나 대감염 사태를 겪으면서 세계의 지도자들이나 사상가들, 그리고 주요 언론들은 전쟁의 레토릭을 유행처럼 사용했다. 그것을 아감벤은 예외상태가 일상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연일 쏟아지는 확진자들, 더구나 요양시설에 있는 노인들이 대대적으로 감염되었다. 해서 연일 무수한 응급환자가 생겼고 공공의료인력은 그것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상황을 뉴스로 보면서 의사들의 트리아지(Triage)를 목격한 아감벤은 질문은 던졌다. 누가 그들에게 이 엄청난 권리를 부여했는가. 이렇다할 의문 제기도, 사회적 논의도 거치지 않고 국가는 트리아지 체계를 작동시키기로 했고 의사들은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시민사회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것은 용인했다.

전쟁이나 전쟁에 준한 상황에서 작동되는 트리아지 체계가 일상화된 코로나19 상황, 아감벤이 던진 논점의 핵은 그 시스템은 문제가 없는가였다.

이에 대해 아감벤은 전쟁이라는 예외상태를 용인하극단적인 적대의 정치적 국가론의 장본인인 칼 슈미트를 비판적으로 주목한 것이다. 신학자 양권석은 “‘예외적 상황전시상황어쩔 수 없는 조치와 선택들이라는 반자동적 프레임이 작동할 가능성을 경계하고 경고하는 것으로 아감벤의 논지를 해석한다. 반면 슈미트는 그러한 아감벤의 해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에게서 정치는 늘 우리를 상정하고 있다. 슈미트의 책 정치신학1장은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예외상태라는 전제 아래서 주권자는 적을 식별하고 그 적의 절멸을 선언하는 자이다. 물론 거기에는 종종 우리의 관점에서 해석된 어쩔 수 없는 조치와 선택들이라는 정당성 담론이 동반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을 절멸하고, 그 적대의 정치를 위해 희생될 이를 선포하는 트리아지의 담론화 과정이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어야 한다는 국가, 그런 국가를 강조하는 슈미트의 논점에 대해 아감벤은 날카롭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국경을 폐쇄하고 내국인에 대해서도 셧다운(Shutdown)제를 강력히 실시하는 국가가 코로나로부터 국민을 더 잘 보호할 수 있었다는 견해는 일견 타당성이 있다. 한데, 아직 충분히 결론 내릴 상황은 아니지만, 흔히 얘기하듯이 그것이 더 효과적이었다고 해도 그런 정책을 위해서 예외상태라는 명분 아래 안전과 생존의 권리에서 배제되는 이들의 문제에 대해 공론을 제기하지 않는 정치가 적절한가의 문제는 슈미트적 국가론의 한계지점이다.

한편 다른 논점 하나를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이나 그의 국가론의 전범인 홉스의 리바이어던론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를 강조했다. 한데 온라인 네트워크가 충분히 발달된 오늘날 과연 중앙집권적 국가의 존재가 가능한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국가가 어떤 성격을 갖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과정을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통해 논한바 있다. 한데 하버마스가 공론장을 이야기할 때 공론의 매개는 라디오와 신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공론장의 형성은 위에서 아래로 정보가 전달되고 합의가 이루어지는 수직적 공론장의 성격을 가졌다. 하버마스는 그것을 부르주아적 공론장이라고 불렀고, 미디어 학자 머독은 그러한 수직적 공론장을 재현공론장(representation public space)이라고 불렀다. 한데 미디어가 쌍방화되고 탈중심화되면서 합의의 장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담론들이 수평적으로 표현되고 뒤얽히면서 공론장이 형성되게 되는데, 그것을 머독은 표현공론장(expressive public space)이라고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논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는 논의들이 현대국가론의 핵심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앙집권적 국가를 전제하는 슈미트의 정치신학은 수정되거나 보완되거나 대체되어야 한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더 이야기하겠지만 민중신학이 주장하는 오클로스 정치신학은 그런 논점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