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삼인 2006)의 2부 5장에 수록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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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고전’ 혹은 ‘민중의 책’
1
1972년에 초판이 발행된 《역사와 증언》에서 안병무 선생은 성서를 ‘고전’(古典)의 하나로 보고 있다. 근대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주장이 그다지 파격적이라고 할 것은 없지만, 근대적 비평학으로 무장한 많은 신학자들은 활판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출간되는 책들 가운데 ‘하나가 된’ 성서를 어떻게 신학적으로 규정할지에 대해 모호하게 말함으로써 일반 신자들의 신앙에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해서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 성서관은 근대 신학으로 인해 그다지 상처입지 않았다.
신학자들의 주장이 애매한 것은 일반신자들에게 근대 신학이 야기할지 모르는 충격을 완충하고자 하는 ‘친절한’ 배려심 만이 이유는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교권과의 충돌을 회피하려는 신학자의 자기 방어 전략이 게재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에 아마도 많은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사실 성서의 ‘유일무이성’에 대한 교리는 신자 일반의 성서에 대한 섬세한 독서를 부추기기보다는 교회라는 신앙제도의 자기 존립 논리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이 유일무이성 교리는 교회제도의 수호자인 이른바 성직자 집단의 특권성을 보증해주며, 반대로 이들 성직자 집단은 그 교리를 사수한다. 그런 점에서 신학자의 생사여탈권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교회에 대해 신학자들 자신이 느끼는 압박감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가치 판단의 주체라는 근대적 자의식과 직업을 통해 자신과 가족의 경제적 생존력을 확보해야 하는 근대인의 생존 조건이 갈등을 일으킬 때 사람들은 생존 조건의 변형을 위해 ‘제도의 반항자’가 되거나 생존 조건과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가치 판단을 조정하는 ‘제도의 순응자’가 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도에의 순응을 삶의 전략으로 선택하는데, 이때 가치의 조정을 위한 행동은 종종 무의식적인 것이어서 제도의 순응자는 자기 모순에 봉착하지 않곤 한다. 아마도 대개의 신학자들은 성서에 대해 모호하게 말하면서도 거기에서 가치 판단의 주체로서의 자의식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서를 고전의 하나로 이해하는 선생의 주장은 신학자들의 이러한 모호함에 대한 또 한 사람의 신학자로서의 이의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성서가 책 중의 책이요 유일무이의 하느님의 말씀집이라는 믿음은 지극히 근대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성서관을 ‘정경(正經)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신앙은 물론 (근대에 태동한 것이 아니라) 고대로마 시대의 그리스도교에서 태동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대 유대교의 신앙운동을 모방한 데서 유래한다. 이러한 태동기의 정경 신앙은 수없이 많은 주(主)에 관한 이야기들이 유포되고, 그 이야기들이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상황에서 그 차이를 조정하고 갈등을 해소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태동기 정경 신앙, 곧 진짜와 가짜, 권위 있는 것과 권위 없는 것을 구분함으로써 수많은 차이들 가운데 순수한 것을 확정하고 이로써 갈등을 조정하려는 시도는 충분한 성공을 거둘 수 없는 운명을 안고 있다. 왜냐면, 대부분의 사람이 글을 읽지 못하던 시대에, 그래서 교회의 엘리트 계층인 성직자들이 들려주던 이야기로 권위 있는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신앙을 형성하던 시대에 소위 ‘순수한 책’의 확정은 교회 엘리트들 사이의 문제였을지언정 문맹의 일반 신자 대중에게는 그리 실감나는 신앙제도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 엘리트들의 경우도, 그들의 주된 신앙적 과제가 자신이 이끄는 신앙 대중이 다른 이들로부터 미혹되지 않게 하려는 데 있는 한, 문맹의 대중에게 글을 쓰인 그대로 읽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글’을 청각적 이야기, 즉 ‘말’로 전환시키야 하고, 이러한 전환은 그들과 교회 대중으로 하여금 한 자 한 자 오자와 탈자를 엄밀히 가르는 정경적 신앙을 충실히 내면화할 수 없게 하였다.
교회의 권력화는 정경 신앙을 주된 신앙 제도로 발전시킴으로써 수행되었다.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유럽의 고대와 중세기 그리스도교 제도의 내적 모순을 말해 준다. 즉 교회 제도에 있어 정경 신앙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로서 자리잡아 갔지만, 동시에 정경 신앙은 교회 대중의 일상적 신앙 속에 충분히 스며들 수 없었다. 결론을 말하면, 정경 신앙은 교회의 서열화를 지탱하는 추상적 개념으로써 작동하였지만, 대중의 일상은 정경 신앙과는 무관하게, 다양한 신앙적 이야기들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정경 신앙이,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면 어떤 글도 배타시했기 때문에, 정경에 버금가는 신앙적 글은 거의 저술되지 않았지만, 종교적 신화 전설 민담 등, 구술적인 신앙 이야기들이 수없이 생성되었고, 또 많은 그림들, 상징물들 등이 일상에서 대중의 신앙적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하여 공포와 희열, 욕망, 지혜로운 삶 등에 관한 신앙 이야기들로부터 대중은 교회 중심적으로 질서 지워진 세계의 감각을 체화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요컨대 교회 엘리트는 정경 신앙 덕분에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대중은 정경 신앙과는 거의 무관하게 교회적 질서 속에 포섭되었던 것이다.
한데 활판 인쇄술의 발전과 공교육 제도의 확산이 빠르게 전개되던 근대로 오면서 상황은 사뭇 달라졌다. 대중은 점차 ‘글을 읽는 존재’로 주체화된다. 책의 부피도 작아졌고, 가격도 저렴해진 덕이다. 많은 이들에게 책을 갖는다는 것은 이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정경화된 책들이 ‘단 한 권’의 책으로 탄생했다. 또한 공교육과 더불어 ‘모국어’라는 것이 대두하였고, 라틴어 성서의 저국어 성서로의 번역은 이러한 모국어의 형성에 중요한 매개고리였으며, 하여 근대적 국가의 등장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요컨대 성서는 이제 ‘한 권의 책’으로 대중에게 지각되었고, 그 한 권의 책은 국민으로서 자의식을 형성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즉 성서에 대한 신앙적 믿음은 곧 근대인의 국민적 자의식과 긴밀히 결합된 요소였다.
한편, 또 하나 고려해야 하는 사항은, 이 시기에 수많은 책들이 등장했고, 그 책들은 각각 한 권의 책인 성서가 다른 책들에 비해 배타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관념에 대해 도전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수도원이 아니라) 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근대적 지식 제도가 있었다. 여기에서 생성된 지식들은 성서를 상대화함으로써 자기 나름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근대는 진리를 둘러싼 지식들간의 전쟁의 장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엘리트와 신자 대중 사이에는 일종의 무의식적인 공조 관계가 형성된다. 즉 수많은 진리들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려는 욕망은 다른 진리들을 극단적으로 배타시하고 ‘오직 성서만’을 확고한 진리로써 받아들이는 이른바 근대적 ‘정경 신앙’을 낳았다. ‘일점일획’도 다를 수 없다는 믿음은 수많은 지식들이 성서의 의미를 구성하는 데 끼어들 여지를 봉쇄하는 마음의 장치였다.
정리하면, 교권화와 정경화(正經化)는 교회의 역사에서 서로 맞물려 있는 현상이며, 특히 근대에 이르면 교회의 엘리트들과 신자 대중 사이에 정경 신앙을 매개로 ‘마음의 연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근대로 오면서 다원성의 도전에 직면하여 존재론적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된 신자 대중이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불된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문제는 이러한 정체성을 위해 지불한 비용이 배타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데 있다. 즉 정경 신앙은 신앙의 배타주의를 동반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안병무 선생의 ‘고전으로서의 성서’라는 관점은 교회 자체에 대한 근원적 비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근대적 교회 대중의 배타주의에 대한 비난인 셈이다.
2
《역사와 증언》이 출간된 지 10년만인 1982년에 개정 증보판이 발행되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역사와 해석》이다. 증보판을 낸 동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의 머리글을 보면 ‘최신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자 했던 것이 그 계기라고 한다. 또한 제목이 ‘증언’에서 ‘해석’으로 바뀐 것이 또 다른 이유로 의미심장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선 자리에서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이에 대해 길게 얘기하는 것은 이 글의 논지를 빗나가는 것이다. 다만 결론만 간단히 말하면, 선생이 민중신학자로서의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 책의 개정이 요청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민중신학적 관점에 유용한 현대의 연구 성과들이 주로 개정 및 확장의 주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개정판에 담긴 독자적인 해석도 동시대에 대한 민중신학적 개입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는 얘기다.
한편 그로부터 11년 후인 1993년에 《역사와 해석》은 전집의 일환으로 재출간되는데, 이로써 또 한 번의 개정 증보판이 나오게 되었다. 민중신학적 시각으로 다시 일부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 이렇게 초판에서부터 두 번에 걸친 개정증보판에 이르는 저술 과정에서 그 ‘개정 증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선생의 민중신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하나의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서론’격인 〈고전의 의미〉는 두 번에 걸친 개정 작업에도 불구하고 전혀 보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전으로서의 성서’라는 관점은 민중신학적 시각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얘기겠다. 위에서 정리한 바에 따르면 선생의 이 주장이 민중신학적 시각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을 법도 하다. 필경 선생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1987년에 발행된 대담집 《민중신학 이야기》에서 선생은 《역사와 증언》 혹은 《역사와 해석》과는 상당히 다른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책에서 성서에 관한 대담에 집중한 〈민중의 책 성서〉라는 제목의 장은 선생 자신의 내적인 분열성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우선 이 책에 관해 간략히 소개한 후에 성서에 관한 선생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살피겠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선생은 집필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독서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펜으로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해서 이후 선생의 대부분의 글은 친필로 적은 간략한 노트에 기초해서 선생이 구술(口述)하면 대필자가 ‘글’로 옮겨 적는 방식으로 초고가 집필되었고, 이것은 다시 한국신학연구소의 연구원에 의해 최종 다듬어짐으로써 완성되었다.
제자들은 선생이 더 이상 집필활동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살아 있을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우려감에 빠졌다. 그런 고민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 ‘대담’이었다. 질의자는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이 중심이 된 제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대개 제2세대 민중신학 연구자들이었다. 맑스주의적 문제의식과 민중신학을 접맥시키는 데 관심을 가진 소장 신학자들인 그들에게 민중신학적 자원은 거의 전적으로 선생과 서남동 목사로부터 나왔다. 해서 이 책의 물음들은 안병무-서남동의 신학을 1980년대적 문제의식과 접맥해보려는 시각에서 잘 정리되어 있다. 또한 선생의 답변은 부분적으로는 질의자들에 의해 사유가 유도되는 측면도 엿보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미묘한 갈등을 드러내는 측면도 담고 있다.
아무튼 ‘대담’이라는 애초의 기획은 집필이 어렵다는 고육지책에서 마련된 소극적 태도의 소산이지만, 그 과정과 결과물은 뜻밖에도 기대 이상이었다. 선생 자신은 이 대담 이후, ‘질문이 대답을 생성시키더라’는 말을 자주하였다. 그만큼 이 방식은 선생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책을 섬세히 검토하면 알겠지만 이때 이 말은 ‘질문이 대답을 결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질문이 생각을 야기시킨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질의자도 답변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창조적인 생각을 자극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나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선생의 단행본 저술 가운데 민중신학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책이 바로 이 《민중신학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아무튼 이 대담은 선생의 다른 글에서 암시됐던 많은 화두들이 한결 발전된 형태로 구체화되게 했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그 화두들이 들어 있던 글들이 내포하던 의미가 이 대담 속에선 새로운 문제의식에 의해 전복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글이 언급하려는 선생의 성서관에 관한 얘기가 그 한 실례다.
이 책의 〈민중의 책 성서〉 장에서 선생은 서양의 주류 교회와 주류 성서학은 성서관에 있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지만, 또한 동일한 입지를 갖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대립점은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근대의 비평학이 교회의 정경 신앙을 뒤흔들어 놓는 효과가 있다는 데 있다. 해서 교회는 더욱 견고하게 비평적 성서학을 견제하고, 성서학은 교회를 조롱하게 되었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일치점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두 관점 모두 주-객 이분법을 사유의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자는 공히 성서를 ‘텍스트’로 본다. 그리고 독서하는 이 혹은 그의 현장은 ‘컨텍스트’다. 이런 관점은 성서에서 독서자의 상황으로 가는 의미의 흐름을 수반한다. 즉 성서가 ‘말하는 자’이고 독서자는 그것을 ‘듣는 자’인 것이다.
이러한 담론 양식은 독서자의 상황에 기초한 새로운 이해(해석)을 억압하는 효과가 있다. 바로 이 점이 문제인데, 교회의 도그마(경직된 교리 체계)가 그랬던 것처럼 신학 특히 성서학의 도그마(경직된 담론 체계)도 그 해석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 대해 닫힌 담론 체계인 것이다.
여기서 이 글의 관심인 근대적 성서학 얘기에만 초점을 두면, 이러한 성서학의 주-객 이분법적 체계가 정당화되려면 그 연구 결과가 객관적 사실이어야 한다가 전제가 필요하다. 실상 주된 성서 연구방법이라 할 수 있는 역사비평학은 객관적 사실을 실증해낼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것은 교회의 도그마가 주관적 믿음만을 생산해냈을 뿐이라는 성서학의 조롱과 맞물린다. 하지만 성서학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적 연구들은 그것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연구자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교회의 신자들이 각자 자기가 깨달은 계시적 이해가 자신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사회의 사유 양식의 틀 속에 자리잡은 약간의 변형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성서학 역시 연구자 자신이 귀속된 이데올로기적 편견의 산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서자와 분리된 객관성을 발견한다는 성서학의 주장은 붕괴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류 성서학적 가설을 전복시킨 ‘컨텍스트(맥락) 중심적 비평학’이 제기된다. 어차피 모든 사유는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 가는 사유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각자 가기가 선 자리에서 성서를 읽을 수 있으며, 그때 성서는 그런 독서자에게 의미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역사와 증언》이나 《역사와 해석》이 주장하는 선생의 성서관에로 돌아가보자. 앞서 말했듯이 선생은 이 글에서 성서를 ‘고전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진리는 각각의 시간과 공간에서 그 나름의 컨텍스트에서 생성된다. 한데 모든 진리들이 성서에 버금가는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성은 특정 시공간대에 국한되지만, 동시에 특정 시공간대를 초월하는 담론, 즉 시공간적 ‘보편성’을 획득한 담론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또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다른 어떤 요소, 가령 권력에 의해 재해석이 차단되면 그 진리는 죽은 것이 된다. 선생이 말하는 고전이란 바로 이러한 진리들이 시공간적 보편성과 재해석에로의 열린 가능성을 담지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그런 예로 선생은 인도의 《베다》, 불교의 《대장경》, 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디세이》, 플라톤의 《대화》, 유교의 《사서오경》 등을 든다. 물론 성서도 그 한 예라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으로서의 성서’라는 주장은 위의 컨텍스트 중심적 성서관과 겹친다는 점을 주목하자. 텍스트 중심의 성서관은 실상 그 텍스트의 해석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자 중심의 컨텍스트주의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은, 선생이 말하는 고전의 특징인 시공간적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 근대에 이르면 역사비평학의 객관성이란 서양 백인 남성 중심주의적 시각의 반영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서 텍스트주의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맥락에서 선생의 성서관은 해석자의 컨텍스트를 통해 항상 재해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때 재해석이 보편성을 띤다는 것은 해석자의 지평이 ‘대중적인 공공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대중적 공공성은 민주주의가 정당성을 확보하는 지평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전으로서의 성서란 의미 독점을 추구하는 권위주의적 권력 체계에 대한 비판이 된다.
한데 〈민중의 책 성서〉를 보면 이러한 고전으로서의 성서관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우선 선생은 여기서도 성서학의 역사비평학이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이 점에선 선생이 말하는 ‘고전’과 ‘민중의 책’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또한 이 대담의 질의자도 같은 지평에 있다. 이렇게 보면 같은 사유의 지반이 선생과 질의자를 아우르고 있듯이 보인다. 하지만 좀 더 섬세하게 살피면 양자 사이의 미묘한, 하지만 날카로운 차이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와 해석》과도 대립하는, 선생 내면의 자기 분열의 지점이기도 하다.
질의자들은 성서 연구자들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은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결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선생은 역사비평학 자체의 방법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강조한다. 전자는 행위자의 선택의 결과로 위기가 발생한 것처럼 말하고, 후자는 담론 구조가 내장하는 편견의 체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연구자들의 편향성은 그 자신이 의도한 결과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까지 그를 지배하는 담론 양식의 소산인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선생은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나누는 이분법 자체에 비판을 가한다. 이것은 독서 행위자가 사유의 방향을 선택하고 해석의 관점을 결정하기 이전에 그는 이미 양자의 상호관계의 망 속에 포섭된 이며, 그 안에서 이해하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공공성이 권력 게임에 경쟁력을 갖춘 존재들, 즉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계층의 자기 중심주의의 반영물이라는 최근의 ‘급진민주주의’적 논점과 맞물린다. 민주주의가 이상적 지평처럼 주장하는 ‘시민적 공공성’이란 실상 배제된 비시민의 영역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 배제된 영역의 목소리를 구조적으로 은폐함으로써, 즉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상상함으로써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은 자신의 편견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서 사회의 배제의 공모자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적 공공성은 이렇게 구성되며 이렇게 작동한다. 바로 이것이 ‘고전’이 주장하는 보편적 지평인 것이다.
선생은 이 대담에서 그러한 보편적 지평을 함축하는 시각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민중의 책’으로서의 성서관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선생 자신은 그 차이의 첨예함을 인지하지 못하였고, 그렇기에 이 대담 이후에도 성서는 ‘고전’이라는 종례의 입장을 교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선생이 ‘진보’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즉 지금 당장은 보편성이 민중을 배제하는 사회 구성의 논리이지만, 그것이 점차 지양되어 보편성과 민중성이 합류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민중의 책’인 동시에 ‘고전’으로서의 성서라는 관점을 동시에 견지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3
한편 선생은 〈민중의 책 성서〉에서 성서의 중심 사상에 대해서 말한다. 이 말은 성서 전체가 하나의 진리를 향해 응집적으로 무언가를 발언하고 있다는 뜻인가? 적어도 교회나 성서학계에서 성서의 중심사상에 대해 논의할 때는 그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그에게도 그런가?
선생이 말하는 그 중심사상이란 ‘오직 야훼만’의 신앙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나아가 인간이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일체의 권력에 대해 이를 거부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이 신앙은, 선생에 의하면, ‘출애굽 신앙-지파동맹 신앙-예언자 신앙-하시딤의 신앙-에쎄네의 신앙-세례자 요한의 신앙-예수 신앙-〈마르코복음〉의 신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계보를 갖는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긴밀한 연계성을 갖지 않는 요소들을 임의로 엮어 하나의 신앙 계보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선생은 ‘화산맥’의 은유로서 설명한다. 성서 담론의 표층에선 단절적이지만, 그 이면엔 화산맥처럼 거대한 연계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비평학적으론 포착되지 않는 연계성을 선생은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선생이 말하는 성서의 중심 사상은 비평학적 결과가 아니라, 비평학 외부의 관점인 셈이다. 이러한 선생의 주장을 좀 더 살피기 위해 선생의 질문 방식을 보다 깊이 탐문해 보자.
‘오직 야훼만’이라는 선생의 주장은 권력이 누구에게 귀속되었느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가? 즉 왕 같은 특정 사람의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력을 말하는 것인가? 더 나아가 하느님이 민중을 지지하니 결국 민중 권력을 강조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독재가 아니라 민중 민주주의? 선생의 사상을 이렇게 볼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동시에 반대로 볼 여지 또한 안고 있는데, 나의 판단으로는, 특히 이 글은 그런 반대의 가능성을 보다 강하게 드러낸다.
앞서 보았듯이 선생은 독서자가 텍스트와 컨텍스트에서 어느 편향인가를 결정하기 이전에 이미 양자를 아우르는 상호관계적 담론의 망 속에 포섭되었다고 보았다. 그것은 성서 시대의 오직 야훼만의 신앙을 강변한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는 각기 그 시대의 지배담론이 있었다. 그것은 지배자들의 담론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비판하는 이 자신도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말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담론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행복을 말하고 고통을 말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꿈을 키우고 절망에 빠진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하고 미워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의 모순에 직면하며, 그것이 문제의식을 품는 자기 자신조차로 포섭된 거대한 권력의 망임을 발견한다. 이때 그들은 ‘오직 야훼만’을 부르짖으며 탈출을 꿈꾸었다. 해서 선생의 표현대로 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당하는 자’의 편에서 보는 것”이다. 당하는 자가 새로운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꿈보다는 그러한 이분법적 틀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의 망 속에 사로잡힌 이들, 특히 그 속에서 ‘깊은 절망의 수렁에 나뒹구는 희생양들’의 관점에서 주장하는 신앙인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성서를 아우르는 비판의 계보를 안고 있다는 것이 바로 선생의 중심사상이라는 주장이다.
이제 결론을 말해야겠다. 앞서 말했듯이 ‘고전’을 선생은 보편성을 갖는 진리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보편성은 지배담론이 갖는 자기 정당화의 미학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내가 보는 〈민중의 책 성서〉에서의 선생의 관점이다. 성서의 중심사상은 이러한 미학이 갖는 편견의 틀을 읽어내고, 그것이 권력의 담론임을 발견하려는 신앙이다. 해서 보편성의 책인 고전이 아니라 탈보편성을 함축하는 ‘민중의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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