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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두 개의 복음, 민중이 은폐된 예수와 민중이 전한 예수

이 글은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삼인 2006) 2부 4장에 수록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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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복음, 민중이 은폐된 예수와 민중이 전한 예수

 

 

 

1

 

안병무 선생은 1979전달자와 해석자라는 흥미로운 글을 발표한다. 실은 이 글은 그 전 해(1978)에 갈릴리교회에서 민중의 설교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바로 그 원고였다.[각주:1] 설교와 글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예수의 이야기를 민중에게 설교한 전달자가 누구였느냐에 관한 물음을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한 선생의 답은 유랑하는 설교자이다.

실은 이것은 그 어간 사회학을 성서 해석에 적용하는 것으로 독일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던 저명한 성서학자 게르트 타이쎈(Gerd Theissen)의 가설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 가설의 특기할 점은 전달자가 문어(文語)가 아니라 구어(口語)로 전달하는 경우, 그의 말과 행태는 강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데 있다.[각주:2] 즉 이들 유랑하는 설교자들은 집도 가족도, 그밖의 어떤 소유도 포기한 사람들이었는데, 바로 이들이 탈가족(“아비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비에게 맞서고, 어미가 딸에게, 딸이 어미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루가복음12,53), 무소유(“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루가복음9,3)의 유랑적 기풍을 가진 예수 이야기들을 전달하던 주체였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오늘날 북미의 많은 예수 연구자들의 상상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예수 어록(Q 텍스트)의 전승사를 역추적함으로써 예수의 역사성에 접근하려는 저들의 문제의식[각주:3]의 기저에는 타이쎈의 가설이 어떤 방식으로든 참조되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가설의 결정적인 중요성은 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참조한 이들에게조차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북미 예수 연구자들은 구술 텍스트를 마치 문자로 쓰인 텍스트가 전승될 때처럼 생각함으로써 타이쎈의 가설을 부적절하게 검토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반면 타이쎈은 자신이 주장한 비평방법인 문학사회학적 접근[각주:4]을 세 가지 분석 범주(분석적 추론, 구성적 추론, 유추적 추론)를 통해 수행하는데, 이 중 그의 두드러진 공헌은 그 첫째 요소인 분석적 추론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방랑하는 카리스마적 설교자의 말(구술)은 그들의 삶의 방식과 연관되었을 것이라고 봄으로써, 예수 어록의 전달자는 탈가족, 무소유의 유랑하는 예언자였다는 가설을 도출해내고 있다. 그리하여 이전까지 성서학에서 구술 연구를 독점해왔던 양식비평학(form criticism)이 발견하는 데 실패한 전달자의 사회적 삶의 자리를 그는 보다 개연성 있게 추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거칠기는 하지만, 선생은 구술 전승의 특수성에 대한 타이쎈의 문제의식의 핵심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논하려면, ‘(문자)(구술)의 차이를 살펴봐야 한다. 우선 보다 정보를 저장하는 데 있어 탁월하다. 시간적으로 오래도록 이야기의 보존을 가능하게 하며, 또 공간적으로 보다 먼 곳, 생활습관도 다르고 때로는 말도 통하지 않는 곳까지 이야기의 전파를 가능하게 한다. 하여 글은 시공간적 환경이 많이 달라서 서로 대면할 수 없는 이들을 공통의 가치를 공유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드는 주요 매체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고대 국가가 성립하는 데 있어 문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글의 특성에 대해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생산하거나 수용하는 이들의 행위와 연관되지 않아도, 심지어는 상반되는 경우에도 글을 통한 이야기는 생산, 보존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 글과는 달리, 말 하는 이(이야기꾼)와 듣는 이(수용자) 사이의 교감을 일으키면서 소통되는 매체라는 특성을 지닌다. 이야기는 그 현장에서 이야기꾼과 수용자 사이의 밀접한 감정적 상호작용의 산물인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서로 감정이 얽히지 않으면 이야기는 좀처럼 기억되지 않는다. 즉 이야기는 소멸하고 마는 것이다. 이야기꾼과 수용자 사이에서 느낌이 교차하는 가운데 이야기의 의미가 발생하고, 이 의미는 단순한 인식상의 작용만이 아니라 그 의미를 공유하는 이들의 삶 자체를 연루시킨다. 해서 이러한 감성적 교감이 일어나는 순간 그 말은 동시에 사건이 된다.

그런 점에서 예수와 유랑하는 설교자 사이의 말 사건은 그들을 엮는 삶의 얽힘을 수반한다. 가족도, 어떠한 소유도 포기한 유랑자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살았듯이 그들도 그렇게 살면서 예수의 말을 전했다는 것이다. 타이쎈이 제기한 가설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각주:5]

안병무 선생은 민중의 설교자에서 이와 같이 타이쎈의 가설을 누구보다도 더욱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지만, 늘 그렇듯이 자기가 활용한 가설의 가능성을 본래의 것보다 훨씬 치열하게 급진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타이쎈과 입장이 갈린다. 선생은 이 가설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문자 중심주의를 근원부터 흔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라는 정전(canon), 그 문자주의의 극치는 그토록 철저하게 예수의 기억을 보전해왔음에도 예수의 삶에 조금도 다가서지 못한 종교를 구축해버렸다는 것이다. 해서 선생의 이 설교의 마지막 장의 소제목은 다시 원점으로. 그동안 구축해온 제도, 교리, 관행 일체를 다 무시하고,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자는 과격한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아직 타이쎈의 가설의 틀 내에서 그 가설의 실천적 의의를 급진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반면 얼마 안가서 선생은 그의 가설을 넘어서는 견해를 펼친다. 그의 가설을 낳게 한 사유의 가능성을 다르게 상상해냄으로써 새로운 가설적 제안에 이르게 한 것이다.

 

2

 

이듬해인 1980년 초에 발표된 선생의 또 한 편의 글은 바로 이러한 사유의 출발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라는 글인데,[각주:6] (구술 전승에서) 말과 삶의 일치라는, 타이쎈에게서 영향 받은 문제의식이 여기서도 견지되고 있지만, 카리스마적인 떠돌이 설교자의 예수 말보다는 무지랭이 대중이 전달하는 예수 이야기를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 특별히 관심을 끈다. 카리스카적인 떠돌이 설교자들의 말은 어록의 사회사에 관한 연구의 소재이지만, 대중의 예수 이야기가 간직된 곳은 마르코복음이다. 즉 선생은 구술 전승 연구를 위한 문서 텍스트를, 타이쎈이 주목한 어록자료(Q)가 아니라 마르코복음으로 바꾸고 있다.

 


또한 선생은 구술 전승의 문학적 양식을 이라는 포괄적이고 애매한 표현보다는 이야기(narrative)라는 보다 명료한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실은 타이쎈은 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이 어록 텍스트이므로, 그가 고려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가 아닌 단편적 말 모움 자료인 예수 어록만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가설이 구술 연구의 현대적 성과를 활용하여 발전시키는 데 있어 한계지점이 된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현대의 구술 연구의 성과들을 다각도로 활용하고 있음에도, 구술 전승 연구는 이야기에 관한 연구이지 말 모움(어록)에 관한 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선생은 구술 연구의 가장 대표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주목함으로써, 그 자신은 비록 이론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상상력에 의존해서 견해를 펴고 있음에도, 보다 풍부한 이론화의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그의 논지의 장점이다.

바야흐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주장하지 못한 안병무의 관점, 그의 민중신학 다운창조적 인식론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방랑하는 설교자들이 전한 예수 말이 간직된 어록은 단지 말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한데 마르코복음에는 이야기가 있다. 선생은 바로 이것을 민중언어의 주요한 특징으로 본다. 말이 따로 있고 행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야기에는 양자가 얽혀있다. 짤막한 말의 단편들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일종의 한 편의 영웅담인 민중의 이야기가 마르코복음의 예수전이라는 것이다.

물론 마르코복음은 말(이야기)이 아니라 글이다. 한데 선생은 이 텍스트가 글이 된 것은 어느 작가의 창작물이거나 기록물이 아니라, 구술되던 민중의 이야기가 채록된, 이른바 구술적 텍스트라고 보는 것이다.[각주:7]

선생이 이 글을 쓴 몇 년 뒤 서구의 일부 연구자들이 마르코복음이 독자(reading audience)가 아니라 청중(listening audience)을 위해 쓰인 텍스트라는 주장을 편다.[각주:8] 이것은 구어로 된 작품이 아니면서도 구어적 성격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는 문어 텍스트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민중신학과는 무관한 연구 전통의 소산이다. 마샬 맥루한 등에 의해 제안된 커뮤니케이션학의 미디어 생태학적 문제제기를 성서학 내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아직은 미진한 성과밖에 없지만, 현대의 구술문학 연구와 접맥된다면 새로운 차원의 연구 성과들이 이 접근을 통해 속출할 수 있는, 그야말로 비평학적 보고의 자물쇠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 서구의 몇몇 선구자적 연구자들보다 앞서 이런 관점을 제기한 안병무 선생의 문제제기는 민중신학의 가장 빛나는 성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앞서 언급한 선생의 글은 전달자로서의 오클로스(민중)와 그들의 전달 양식으로서의 이야기를 제안하고 있다. 이 점은 선생이 타이쎈을 따라 말과 삶의 일치라는 구술 전승의 관점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민중신학적 성서 이해의 전거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대해 할 말은 너무 많다. 아니 많아 보인다. 선생의 문제제기 속에 담긴 사유의 지평은 무궁무진하게 넓은 영역에로 우리의 시야가 개방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단지 하나의 관점만을 더 논할 것이다. 나머지는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간의 교감이 없으면 기억되지 않는 매체다. 여기서 잠시 타이쎈의 가설을 살펴보자. 떠돌이 설교자들은 예수에게는 듣는 이였지만, 그들이 전한 말의 수용자에게는 항상 말하는 자였다는 생각이 이 가설 속에 전제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와 듣는 이는 분명하게 나뉜다. 그것은 초기 예수 담론의 한 전승주체가 운동의 엘리트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비범한 삶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타이쎈이 그들을 카리스마적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그들의 비범함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단순히 그들과 접촉한 경험에 따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함축한다. 사람들은 그들과의 접촉 하나하나를 체험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을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길 자세가 되어 있다. 즉 그들과 대중의 만남 사이에는 잉여가 있다. 결국 그들은 대중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반면 이야기의 경우,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이분법은 더 이상 확고하지 않다. 예수가 식탁공동체에서 민중과 먹고 마셨듯이 그들도 먹고 마시는 일상 속에서 그분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전달한다. 이 속에서 예수와 예수 이야기를 하는 이들 사이의 교감이 일어난다. 위대한 중계자 없이 그들은 예수와 직접 대면한다. 각자 가기들의 경험을 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통한 대면 속에서 그들은 예수와 느낌을 나누고 감정이 교차하며,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초월의 경험을 한다. 바로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이렇게 시공간을 넘는 예수와의 말 사건을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와 민중 간의 이러한 감정 교감의 사건 속에서 그네들의 말과 삶은 얽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예수와 민중은 구별되지 않는다. 예수가 민중이요 민중이 예수인 것이다. 바로 그 얽힘 속에서 예수 이야기는 생명력을 갖는다.

이렇게 보면, 최근 북미의 예수 연구자들 가운데 가장 도드라진 활약을 보이고 있는 존 도미니크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브로커 없는 평등주의(unbrokered egaliterianism)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타이쎈의 무소유, 탈가정의 유랑하는 예언자 가설을 수정하여, 그들의 이런 삶의 양식과 주장은 그들이 벌이고 있는 예수운동의 형식적 요소일 뿐이며, 더 근저에는 브로커체제(brokerage)에 대한 반대의 에토스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른바 신의 중계자중심의 신학은 로마제국 체제, 팔레스틴의 토착 지배체제, 그리고 심지어는 팔레스틴 마을 구석구석까지 스며든 지배의 메커니즘 속에 두루 내재된 공통감각(common sence)으로서, 지배제도에 일종의 심미성[각주:9]을 부여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이러한 크로싼의 가설은 외부를 향한 비판담론의 성격을 지녔을 뿐 아니라, 내부를 향한 자기비판의 성찰적문제제기이기도 했다. 가령,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가 환대받지 못했다는 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의 메시아성을 혈연적, 지연적 브로커로 환원시키려는 예수 운동 내부의 욕망에 대한 자기 비판적인 성찰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전승이라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유랑하는 예언자들의 존재가 과연 브로커체제를 지양하는 데 얼마나 유의미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근원적으로 방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수 어록의 가장 오래된 전승에는 전승 주체인 떠돌이 예언자들의 시선과 그것에 공명하는 공동체의 순응적 반응이 함축되어 있다. 자신들의 삶의 스타일과 괴리됨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는 떠돌이 예언자들의 삶의 스타일을 반영하는 예수 말을 수용해야 했다는 것이다. 결국 타이쎈과 똑 같은 문제에 그 역시 봉착하고 만다. 타이쎈처럼 그의 문제도 떠돌이 예언자의 예수 기억을 민중의 기억과 동일시할 때만 브로커 없는 평등주의는 근원적으로 가능하다는 데 있다. 실제로, 초기 예수 운동 발전의 변증법을 방랑하는 예언자와 공동체 조직가 간의 갈등으로 보든(타이쎈), ‘떠돌이집주인의 갈등으로 보든(크로싼), 이런 시각은 민중을 소외시킨 채 민중 담론의 전개를 읽으려 한다. 민중 없는 민중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이 이러한 가설 이면에 내재되어 있다.

반면 안병무 선생의 이야기는 구술 전승의 미시적 공간인 연행 현장(performance field)[각주:10]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루가복음24,13~35)에서 우리는 그 연행의 한 양상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마음을 다해 신뢰하고 존경해마지 않던 그분의 죽음 앞에 낙망한 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한다. 당국에 의해 극형을 당한 이에 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떠벌리며 할 수는 없었지만, 낮은 목소리로 그분에 관한 서로의 기억을 주고받는다. 때로는 기억들끼리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기억이 부재한 이를 꾸짖기도 하면서...

후에 안병무 선생은 민중의 이러한 비공식적인 대화 나눔을 유언비어(rumer)라고 부른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그들의 동선을 따라 전파된다. 그리고 귀향한 뒤 고향에서 가족들에게, 이웃에게, 기타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된다. 일하다가 잠시 쉬는 중에, 아이를 돌보는 중에, 기타 생활 현장 곳곳에서 예수 이야기는 회자되었던 것이다.

서로 얘기를 나누는 중에 민중은 자기들의 기억을 다듬어간다. 한 사람이 기억을 말하면, 다른 이가 동조하기도 하고, 또 상반된 기억을 내놓으며 서로 우겨대기도 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이야기는 제법 긴 스토리를 가진 이야기로 다듬어진다. 이렇게 연행현장에서 다듬어진 이야기는 집단적인 기억이 되며, 한 편의 예수 이야기 유형(type)을 이루면서 전승된다. 민중의 예수 이야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선생은 그것의 한 유형이 마르코복음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민중의 예수 이야기는 예수에 대한 전기 작가의 보고서 같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거기에는 사실 그대의 재현보다는 민중의 절망과 꿈이 함축되어 있다. 즉 예수와 민중은 이야기 속에서 서로 삶을 나누고 있고, 소망을 교차시키고 있다. 민중이 예수와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구체적인 연행 현장의 검증, 민중에 의한 일상의 검열을 거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여 예수 이야기는 예수와 민중의 이야기이다.

마르코복음의 첫 구절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안병무 선생의 입장에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예수와 민중이 더불어 나눈 복음이다. 따라서 그 복음의 발화자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와 민중이다. ‘예수만의 복음’, ‘예수의 독백으로서의 복음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예수-민중의 복음인 것이다. 곧 예수와 민중의 상호 대화의 결과를 복음으로 선포한 텍스트를 우리는 알고 있을 뿐이다. 해서 선생에 의하면, 예수-민중의 복음은 민중신학적 강령일 뿐 아니라, 성서 해석 방법론의 필연적 귀결이기도 한 것이다.

한데 이 거창한 민중신학적 강령 이면에는 복음이란 다름 아닌 대화의 산물이라는 간명하면서도 구체적인 현실이 반영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때 그 대화에는 세계의 폭력에 의해 난도질당한 이들의 고통의 현실이 놓여있다. 거기에는 예수와 민중이 함께 나눈 눈물이 있으며, 또 함께 나눌 웃음이 있다. 이러한 감성의 공감이 복음의 기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3

 

민중의 설교자에서 선생은 말과 글을 대조하면서, 글 중심주의적인 그리스도교의 위기를 문제제기하였다. 이 글 이듬해에 발표된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에서 선생은, 지식인의 글이 아닌 민중언어()에 새롭게 주목하여, 보다 구체적이면서도 폭넓게 그리스도교와 서구 근대, 그리고 한국의 선교 역사와 한국 근대성을 비평하는 민중신학적 사유의 거점을 제시하였다. 명설교가이자 명저술가이기도 한 그가, 글을 무기로 세계를 향해 비판의 예리한 칼날을 휘둘러댄 그가 여기서 을 비평하고 있다. 글쟁이가 글을 나무라는 자가당착이 엿보인다. 과연 그런가.

선생은 왜 에 대해 그토록 문제의식을 갖고 있을까? 서구의 그리스도교가 민중의 일상 속으로, 특히 고통 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삶의 외부에서 군림하고 있다는 데서 글의 속성과 선교는 맞물려 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자, 즉 글 외부의 존재에게도 글은 변함없이 기호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면서 자기를 읽으라고 호령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 담론이나 제도에 낯선 이들에게 각자 자기들의 삶의 특징을 포기하면서까지 신조에 동화되라고 강요한다. 그것은 또한 식민지 체제의 정치와 꼭 닮았다. 또 군부독재 체제의 그것과도 닮았다.

요컨대 선생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글은 글의 배후에 놓인 세계, 특히 글이 사물의 질서를 상징하는 근대적 세계를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경험이 배제된 채, 단지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의 틀에 따라 생각하고 행위하도록 강요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선생이 문제시하는 의 실체다. 즉 선생이 말하는 글은 군림하고 지배하는 권력의 은유, 특히 근대적 권력의 은유인 셈이다. 좋은지 나쁜지, 즐거운지 슬픈지 느낌을 솔직하게 나눌 수 없게 하는, 일체의 선과 악의 질서체계다. 그러한 질서체계를 정당화하는 일체의 논리다.

그러한 질서는 그 체계에 순화되지 않는 모든 경험을 억압한다. 그러므로 느낌을 나눌 수 없는 폐쇄 권력에 다름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글은, 글이 상징하는 질서는 사람들의 삶을 왜곡한다. 그리스도교의 정전인 성서가, 그것의 해석틀인 교리가 예수를 왜곡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세계는 , 글을 통한 세계의 지배적 질서가 급격히 쇠락하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근대의 등장을 점차 실감하고 있다. 누구는 이런 현상의 세계를 포스트근대(postmodern)라고 하고 다른 누구는 급진적 근대(radical modern)라고 한다. 그러면 선생의 문제의식은 오늘의 우리에겐 시대착오에 지나지 않은가?

한데 선생이 비판해 마지않던 것이 글 자체가 아니라 글이 함축하고 있는 세계의 질서, 즉 글의 은유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선생이 문제제기한 것은 글 속에서, 글이 상징하는 지배적 문화 속에서 민중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결국 민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세계, 민중을 배제하고, 사회 속에서 민중의 말을 앗아간, 민중 부재의 세계 바로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이 신학에서 부재한 언어인 민중언어를 성서 읽기에 개입시킨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관점이라는 것이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요지다.

한 가지 더 첨언하면, 권위주의 시대가 역사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지금에도, 여전히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왜곡한 예수를 경험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니 실은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왜곡의 진정한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낡은 성장주의의 주역이던 그리스도교가 모두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지 오래지만, 새로운 시민운동적 포즈로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추동하는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꿈꾸는 질서 속에서 민중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존재다. 민중 부재의 그리스도교에는 민중이 기억해낸 예수가 없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민중의 기억 속에서 전승된 예수를 다시금 주목하려는 이유이다.

  1. 선생은 간략한 노트를 가지고 원고 없이 설교를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것이 발전하여 원고로 집필된다. 〈민중의 설교자〉라는 제목의 설교(1978.5)는 그 이듬해인 1979년 〈전달자와 해석자〉라는 제목으로 《현존》(1979.5)에 발표되었다. 그러므로 필경 〈민중의 설교자〉는 논리상으로나 구성상으로 좀 더 간단한 형태였을 것이다. 한데 1986년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라는 선생의 글 엮음집에 〈민중의 설교자〉라는 제목의 글이 마치 설교 원고 그대로인 양 게재되었는데, 이는 《현존》에 실린 글과 동일한 글이다. 이것은 후에(1997) 심원 안병무 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한 전집 《생명을 살리는 신앙》에 〈민중의 설교자〉로 재수록되었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이 글의 제목을 ‘전달자와 해석자’로 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본다. 첫째로 그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실제의 설교는 이 원고보다 좀 더 간략한 것이었을 것이고 이 원고의 최초 제목은 〈전달자와 해석자〉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앞 장에서 말한 것처럼 이 글이 선생의 오클로스론으로 이어지는 연구사적 경로의 필수불가결한 한 과정이었다면, ‘전달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모색되는 것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바로 이 점에 대해 보다 상세히 논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2. 문헌적 기록은 그 내용이 기록자나 수용자의 삶과 반드시 맞물리지 않아도 되지만, 구술 전승(oral traditions)은 양자 간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는 현대 구술 연구의 성과를 그는 활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3. 최근 북미의 예수 연구 동향은 압도적으로 예수 어록 자료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어록이 가장 오래된 전승 층위로부터 가장 덜 오래된 층위까지 3단계 내지는 5단계의 전승 과정을 거쳐 발전했다는 가설에 대다수 연구자들이 합의함으로써 가장 오래된 층위라고 가정하는 ‘지혜적 층위’를 통해 역사의 예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낳은 결과이다. [본문으로]
  4. 구술 텍스트는 문자 텍스트와는 달리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전승 현장의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전승 현장의 사회학적 맥락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관심에서 타이쎈은 문학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5. 크로싼이나 호슬리 같은 진보적 색채를 지닌 예수 연구자들이 타이쎈의 가설에 대해 갖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무소유, 탈가족, 유랑이라는 삶은 예수운동 실천의 형식적 요소이지 그 요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민중해방의 실천을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은 것을 예수운동의 특징으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타이쎈 같은 중도적 연구자에 대한 적절한 비평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타이쎈의 결론에 대한 문제제기일 뿐, 그가 보다 중요시하는 방법론적 가능성에 대한 것은 아니다. 반면 안병무는 그의 방법론적 가능성을 활용하고 있고, 그것을 넘어선다. [본문으로]
  6. 《현존》(1980.1~2)에 처음 발표된 글이다. 한길사에서 발간한 전집 6권에는 이 글이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로 제목이 수정되어 수록되어 있다. 한편 같은 출판사에서 1986년 발행한 선생의 글 모움집인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에는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라는 제목으로 두 편의 글이 수록되어, 1과 2라는 숫자로 구별하고 있는데, ‘1’로 분류된 것이 《현존》에 실린 글이고, ‘2’로 분류된 글은 1985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주제강연 원고이다. 후자는 이 글의 주제에서 그다지 관심을 끌 만한 내용이 아니다. [본문으로]
  7. 이 점은 최소한 이른바 마르코공동체 내부에서는 이 텍스트가 구술적 성격을 띠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루가복음서〉나 〈마태오복음서〉의 생산에 〈마르코복음서〉가 대본이 되었다는 문서 가설적 논의의 맥락에서는 구술성은 무의미해진다. 오히려 이러한 발전 맥락에서 보면 〈마르코복음서〉는 구술성을 상실하고 있다. [본문으로]
  8. 1960년대 초 마샬 맥루한에 영향 받은 미디어생태주의자 월터 옹(Walter J. Ong)이 성서 텍스트의 구술성에 대해 주목할 만한 논지를 편 이후, 베르너 켈버(Werner Kelber, 1983), 요안나 듀이(Joanna Dewey, 1989) 등이 월터 옹을 따라 1980년대에 〈마르코복음〉이 구술적 텍스트임을 논증해낸다. [본문으로]
  9. ‘지배적 제도의 심미성’은 그 제도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도덕적, 영적인 차원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0. 현장 중심으로 구술이 전달되는 과정을 살필 때 우리는 두 가지 차원을 고려하게 된다. 하나는 공동체적인 공감에 기반을 둔 거시적 전승을 다루는 ‘전승 현장’ 중심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으로 이야기꾼과 수용자의 대화 과정에 관한 미시적 관점인 ‘연행 현장’ 중심적 차원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