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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서론, 역사로서의 십계명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글항아리, 2018.2)의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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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역사로서의 십계명

 

 

 

 

모세가 먼저 () 말을 거니, ()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

―〈출애굽기34,31b~32

 

 

 

 

출애굽 이야기, 법 수령 설화와 만나다

 

먼저 이주하여 성공적으로 정착한 요셉 덕택에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의 식구들은 요셉과 그의 가족을 포함해서 70명이었다.(출애굽기46,27) 한데 요셉의 형인 레위의 증손자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출애굽할 때는 성인 남자만 6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출애굽기12,37)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인 총수가 최소한 200만 명은 되었을 것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많은 이민자들의 규모는 이집트 본토민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이에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탄압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스라엘인들의 강제노역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장소는 나일 강 동부 삼각주인 고센 지역이다. 이곳에 있는 비돔pithom과 라암셋ra-am'-sez에 도시를 건설할 때 파라오가 이들 이민자들을 혹독한 강제노역에 동원했다고 성서는 전한다.(출애굽기1,11)

모세는 야훼에게 이끌려, 학대당하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때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건너간 곳을 한국어판 성서들은 한결같이 홍해라고 표기한다. 여러 영어 성서에서도 The Red Sea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출애굽한 지역을 히브리어 성서는 홍해가 아닌 얌 수프yam suph’, 갈대바다로 쓰고 있다. 알다시피 갈대는 바다 식물이 아니다. 그러니 그곳이 홍해를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비돔과 라암셋에서 시나이 반도로 이어지는 지역에는 여러 호수와 강지류가 있다. 그렇다면 이 호수들과 강지류들 주위의 갈대숲 지역을 얌 수프라고 불렀던 게 아닐까.

아무튼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 들어섰다. 그리고 시나이라는 이름의 미지의 산[각주:1]에서 야훼의 법을 받는다. 법령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을 가지고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은 송아지 상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모세는 불같이 화를 내며 돌판을 깨버렸고, 그날 이스라엘에 야훼의 혹독한 징벌이 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산에서 모세가 두 번째 돌판을 받고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은 그가 반포하는 하느님의 법을 받는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법의 백성이 되었다. 이렇게 출애굽 이야기는 법의 백성으로 부름받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출애굽기의 뿌리가 된 역사를 찾아서

 

이와 같은 성서 속 출애굽 이야기는 대단히 허구적이다. 성서의 설화에 의하면 레위-고핫-아므람-모세로 이어지는 불과 4(출애굽기6,16~20) 만에 70명에서 최소 200만 명(출애굽기12,37), 그러니까 무려 3만 배 가까운 인구 증가가 있었다. 한편 이 기간을 4대로 적고 있는 창세기35장의 족보와 다른 계열의 자료인 창세기1240절에는 그 기간이 430년이라고 말한다. 이는 매해마다 인구가 66배 이상 증가했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더구나 자연생식을 통한 고대사회의 인구 증가율은 일반적으로 0.1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더욱이 출애굽 시대로 추정할 수 있는 기원전 15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 사이 이집트 인구는 1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니 이집트에 체류한 이스라엘인이 최소 200만 명에 달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숫자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정도의 거대한 무리가 빠져나갔다면 이집트 사회는 영락없이 몰락했을 것이다. 또 이 규모의 유랑민이 지나간 곳에 살아남을 수 있는 족속은 없다. 이스라엘인들의 유랑지인 시나이 반도와 가나안[각주:2] 동남부 지역에는 기껏해야 수백에서 수천 명에 지나지 않는 족속들이 드문드문 산개해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랑 이후 이스라엘이 정착했다는 요르단 강 건너의 땅, 즉 가나안 지역에 살고 있던 인구는 5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니 수백만 명의 사람이 이집트 국경을 넘는다거나 그들이 황량한 시나이 반도와 가나안 동남부 지역을 장기간 떠돈다는 것 그리고 가나안 서부 지역(요르단 강 서편)에 진입한다는 것은 신화적 상상이지 역사적 상상일 수 없다.

이러한 신화적 상상력은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져 이스라엘이 그 사이로 지나갔으며 그들을 추격하던 이집트 군대를 바닷물이 덮쳐버렸다는 이야기에서 극에 달한다. 이 스펙터클한 서사 때문에 얌 수프’, 갈대바다큰 바다였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상이다.

오래전부터 이 큰 바다는 홍해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생각을 명시적으로 보여준 현존하는 최초의 문헌은 ‘70인역성서(셉투아긴타 Septuaginta). 이것은 기원전 2세기, 그러니까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를 포함한 이스라엘 부족동맹 생성설화가 만들어진 시대보다 1000년 이상 지난 뒤에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거류하는 이스라엘계 이주민들이 히브리어 성서(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책이다. 여기서 히브리어 얌 수프는 그리스어 에뤼뜨라 딸라싸Erythra Thalassa’, 붉은 바다로 번역되었다. 그렇다고 ‘70인역성서가 이러한 견해를 확정한 최초의 선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리스어 번역이 이루어지기 전에 큰 바다를 연상시키는 스펙터클한 서사로 출애굽 이야기의 신화화가 이미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추측하자면 많은 이들 사이에서 얌 수프가 홍해라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얌 수프가 홍해를 가리킨다고 보기엔 어휘 자체에 무리가 따른다. 말했듯이 갈대라는 식물은 습지나 갯가, 호수 주변에서 자란다. 이라는 단어는 바다뿐 아니라 호수를 가리킬 때도 쓴다. 지중해와 홍해 사이의 이집트 국경 지역에는 호수가 많다. 그리고 그 인근 도처에 갈대숲들이 있다. 갈대가 많은 호수 지역은 수심이 낮은 곳으로, 사람들이 지나가기에 용이하다. 더욱이 이집트의 저 무시무시한 병거 부대(히브리어 rekeb, 출애굽기14,6)는 늪지인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요컨대 일단의 이집트 체류자들의 출애굽 사건이 실제 있었다면 그들이 지나갔을 가장 그럴듯한 국경지대는 늪지인 갈대숲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얌 수프는 신화화되기 전의 출애굽 이야기가 실재를 반영하고 있다는 단서가 되는 어휘이며, 따라서 우리는 거기서부터 그 원사건, 곧 역사적 뿌리에 대한 추정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한때 이집트의 수도였던, 나일 강 중류 지역의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굴된, 토판으로 된 수백 개의 문서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추론되었다. 이 문서는 기원전 15~14세기경 파라오와 이집트의 국경 수비대 관료 혹은 가나안 지역의 봉신국들인 도시국가의 통치자들 사이에 오간 서신들인데, 여기에는 이집트어로 하피루hapiru라 불리는 수십에서 수백 명 정도의 떠돌이 부랑자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그들의 일부는 이집트의 부랑자 집단이고 다른 일부는 가나안 지역의 부랑자들이다. 도처에서 출몰하여 체제를 혼란케 하는 이들로 인해 당국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다른 명칭인 히브리와 아마르나 문서의 하피루는 유사한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하거니와 유랑 집단이라는 점에서도 유사성이 있다.[각주:3] 그래서 여러 연구자들은 하피루와 히브리가 유사한 집단화 현상을 가리키는 표현들이라고 추정한다.[각주:4] 만약 그렇다면 출애굽의 역사적 기원에 관해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할 수 있다. 즉 기원전 15세기경부터 이집트와 가나안 지역에는 대중의 유랑집단화 현상이 꽤 심각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비돔과 라암셋의 이스라엘처럼 체제에 의해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등 준노예로서 혹독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다.

한데 그들이 모세[각주:5]라는 이름을 가진 지도자의 영도 아래 탈출하여 유랑길에 올랐다. 아마도 이 사건 이전에도 하피루의 이탈은 수없이 있었고, 모세 집단은 그런 이탈자 집단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설화 속의 모세는 특정 집단을 넘어서 이집트를 탈출한 집단들 전체를 상징하는 존재다.) 그런데 팔레스티나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 하피루는 다른 이들이 아닌 바로 모세 집단이었다. 처음 그들의 수는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갈대숲 지대와 시나이 반도, 그리고 동남부 가나안 지역을 거쳐 요르단 강 서부의 가나안 땅으로 유입해 들어왔다.

이들이 들어간 곳은 동쪽의 요르단 강 인근의 저지대 및 서부 지중해와 맞닿은 저지대 사이에 남북으로 이어지는 중앙 고원 지역이다. 이곳에는 가나안의 성읍국가들과 이집트 등에서 탈출한 하피루/히브리의 다수가 이미 들어와서 수백 년간 살았고, 씨족과 부족 단위로 결속되어 가고 있었다. 모세가 이끄는 하피루/히브리는 이들 가나안 고원지대의 하피루/히브리를 만났고, 이들이 연대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부족연합체가 만들어졌다. 그 중심은 모세 집단으로 추정되는 에브라임족과 므낫세족이었다.

이들 부족연합 사회는 기원전 13~11세기경에 실재했다. 사사기는 이 부족동맹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웅담을 수집해놓은 문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출애굽 설화가 처음으로 신화화된 형태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 신화화된 출애굽 설화는 바로 이 시기 부족동맹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수세기에 걸친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작은 사건들의 결합체다. 바로 이 작은 사건들이 뿌리로서의 출애굽 사건인 것이다.

 

출애굽+법 수령설화, 그 역사적 실체를 찾아서

 

두 세기 정도 지속된 부족연합 시대의 종말은 동부 지중해 지역 정치사에 대격변을 초래한 해양 족속들의 대대적인 이주 현상으로 말미암아 도래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작가인 호메로스가 지은 일리아드(일리아스 Ilias)오디세이(오뒤세이아 Odysseia)는 원래 이들 해양족속들 사이에서 유래한 영웅담에 기반을 둔 설화로 해양 유민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면, 사사기에 담긴 블레셋 관련 이야기들은 이들 해양족속들로 인해 고통받던 가나안 정착민들의 공포감을 반영하고 있다.

아무튼 블레셋으로 인해 가나안 지역에서 정치적 대격변이 일어난다. 즉 부족연합 시대가 종식되고 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이들 국가 가운데 야훼를 수호신으로 섬기는 두 나라가 있었는데, 바로 이스라엘국과 유다국이다. 두 나라는 자신이 서로 이스라엘 부족동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초기에 유다국은 매우 조야한 원시 국가에 다름 아니었고, 이스라엘국이야말로 이스라엘 부족동맹의 정통성을 고스란히 이어간 나라로서 가나안과 시리아 지역의 가장 발달한 선진국 중 하나였다. 필시 여기서 출애굽 신화는 매우 짜임새 있는 기록물로 보존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스라엘국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의 침공으로 역사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하며, 불행히도 이 나라의 문서들도 모두 유실되었다. 바로 그 무렵 남부의 유다국이 국가다운 국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이스라엘국 유민이 유다국으로 대거 유입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서기관들이 적지 않았던 듯하다. 바로 이들이 이 시기에 급성장하는 유다국의 왕립 문서 활동의 기초를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앞 절에서 언급한 모세의 법 수령 설화가 출애굽 이야기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으로 보인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다국의 번영을 주도한 요시야 왕의 서기관들의 유다국 역사 편찬 과정에서 출애굽과 시나이 법 수령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로 재구성되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모세가 법이 새겨진 돌판을 가지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올 때 백성이 황금송아지 상을 만들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이에 하느님의 징벌이 내렸다는 법 수령 설화의 주장이다. 문맥 속에서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저지른 일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부족동맹이 형성되기 이전인) 기원전 13세기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원전 7세기 요시야 왕 시대의 역사적 맥락과 부합한다.

우선 법 수령 설화 속에는 문헌화된 법전의 등장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은 유랑자들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 유랑자 공동체들의 법은 관습적인 규범들로 충분했다. 문헌화된 법전의 등장은 정착된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그 공동체가 개별 부족 수준을 넘어 전통을 공유하지 않는 여러 부족과 사회 집단이 군주의 통제 아래 하나의 단위로 섞여 살게 되는 상황에서 법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또한 국가가 그러한 다양한 세력을 결속할 만한 군사적행정적 체계를 구비하며 발달된 기록 체계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법전이 등장한다. 유다국에서 그러한 법전이 등장한 시기는, 문헌적고고학적인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요시야 왕 시대다.

말하자면 사정은 이러했을 것이다. 왕은 법을 백성에게 반포했다. 그리고 이 법은 왕이 만든 것이 아니라 과거 출애굽 시대에 야훼가 모세에게 준 것이라는 설화적 근거를 설파했다. (이 법전과 십계명의 관계에 대해서는 마지막 절에서 이야기하겠다.)

둘째로 황금송아지 예배를 우상숭배로 비난하는 것도 요시야 왕 시대와 부합한다. 황금송아지 상을 예배의 상징물로 만드는 것은 정착민들의 상황을 반영한다. 즉 유랑자들에게 풍요를 상징하는 송아지는 뜬금없는 신상이다. 한데 황금송아지 예배가 야훼 예배의 상징물로 제도화된 곳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국의 왕립 성소들이다. 즉 황금송아지 예배는 이스라엘국이 공인하는 야훼 예배 양식이었다. 그런데 유다국의 요시야 왕실은 이스라엘국이 패망한 것이 바로 이런 예배 때문임을 만천하에 공포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요시아 왕실이 만들어낸 역사에 따르면, 이스라엘국의 예배는 과거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이 저지른 잘못을 반복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국은 멸망했고, 유다국의 예배야말로 야훼가 선택한 올바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지방 성소들의 예배 양식도 철회 대상이 되었다. 그 당시는 아시리아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하던 때였고, 아시리아의 신인 아닷과 이슈타르[각주:6](이스라엘 대중의 커플 신인) 야훼-아세라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가나안 지역 일대에 만연해 있었다. 유다국도 다르지 않았다. 요시야 왕실은 우선 예루살렘에서 성전 개혁을 통해 이런 외세 신앙 혁파를 단행하면서 등장했고, 개혁의 둘째 단계에서는 지방에서의 신앙개혁운동을 펼쳤다. 그것이 바로 지방 성소 철폐로 나타났다. 십계명의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든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엄명은 바로 이런 현상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정치사적 사정을 함축하고 있다. 요시야 왕정의 도전 세력이 그의 부친이자 선대왕인 므낫세 당시에 집권 세력으로 지방의 대지주들이었으며 지방 성소들을 장악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요시야 왕은 반개혁파인 이들 구집권 세력의 권력 기반을 혁파하고자 지방 성소들을 철폐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방 성소들에서는 아시리아 신들이 새로운 기풍의 야훼 신앙처럼 숭배되었는데, 이 지방 성소를 장악하고 있던 대지주들은 친아시리아 노선의 세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방 성소 혁파는 자신의 정적인 친아시리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정책의 성격을 띤다.

한데 이 정책은 또한 당시에 정치 세력화되었던 농민 세력(히브리어 성서는 이들을 암하아레츠am ha'aretz, 땅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는 의도이기도 하다.[각주:7] 암하아레츠는 당시의 여러 문헌에 의하면 농민 일반을 의미하지만, 요시야 개혁 세력의 관점을 반영하는 문서들인 열왕기상열왕기하에서는 정치 세력화된 농민집단으로 등장한다. 요시야 정부가 서민층인 농민 대중의 몰락을 억제하고자 하고 몰락한 이들을 복원시키려는 데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바로 이들, 정치 세력화되어 요시야 정부에 참여했던 농민 세력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겠다.

그리하여 요시야 왕실의 사관들은 출애굽 이야기 속에 법 수령 설화를 첨부했다. 이를 통해 유다국은 법의 지배를 실현하는 국가로 발돋움한다. 그런데 여기서 유다국이 비로소 번듯한 국가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앞서 논했듯이 당시 유다국 내 구성원들 간의 치열한 권력투쟁 과정에서 출애굽 설화 속에 법 수령 설화가 포함되는 것으로 나타났고 또 법 제정으로 귀결되었다. 이 사실은 이 나라의 법신학이 어떠한 이상을 담고 있는지를 시사한다. 또 이 나라의 국가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유다국 법신학이 꿈꾼 것

 

자원에 대한 태도

 

자원독점형 체제 지향

 

자원배분형 체제 지향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성향 모름)

 

 

 

 

 

 

요시야

 

 

 

 

 

 

친이집트, 친아시리아

 

친바벨로니아

 

국제정치적 태도


이 시기 유다국 내의 권력투쟁은 자원독점 세력과 자원배분 세력으로 양분되어 수렴되었다. 아하스, 므낫세로 이어지는 권력 분파는 왕과 귀족이 자원을 독점하는 체제를 지향했고, 히스기야와 그의 손자 요시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분파는 귀족을 견제하고 대중 세력을 포섭하는, 자원 배분형 체제를 꿈꾸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요시야 정부 개혁 정책의 법률적 축을 이루는 문서인 신명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신명기의 법신학 기조는 대중의 재산을 보호하고 몰락을 억제하며 권리를 옹호하는 데 있다. 이러한 법신학이 요청된 것은 이 체제의 도전 세력이 자원독점형 체제를 지향하는 이들인 것과 관련 있다. 또한 말했듯이 정치화된 농민 세력인 암하아레츠가 요시야 정부를 적극 지지했다. 즉 왕당파에는 예루살렘의 사제귀족 세력과 일단의 개혁적 귀족 세력, 그리고 암하아레츠가 연합하고 있었다.

한데 이러한 원리를 구현하기 위한 요시야 정부의 문서 편찬은 역사로서의 법이라는 전략을 통해 수행된다. 법전에는 일반적으로 역사가 없다. 왜냐하면 법은 역사의 산물이 아니라 무시간적인, 보편타당한 진리를 의미한다는 이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법전은 역사 서술 형식이 아닌, 법률 간의 상하위 혹은 수평적 관계를 통한 자기완결적 체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가령 최고의 보편적인 추상적 가치가 하위 법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그리고 횡적으로 법률 간의 모순이 어떻게 조정되어야 하는지 등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요시야 정부는 특이하게도 법률을 역사화한다. 법의 제정사 격인 모세의 시나이 산 돌판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말했듯이 이 설화는 법이 황금송아지 제사를 대체하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황금송아지 제사를 국가화했던 이스라엘국과 달리 유다국은 법을 통해 나라를 통치한다는 선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사를 통한 지배보다는 법의 지배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스라엘의 제사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제사 대 법이라는 데 초점이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여기서 제사는 국가 제전을 의미하는데, 이런 제전은 제사 전문가인 사제 엘리트와 제사 비용의 조달자인 평신도 엘리트로 구성된 귀족 집단에 의해 주도되는 지배의 장치였다. 그리고 이 체제에서 법은 그러한 귀족 중심적 체제를 보조하는 장치에 다름 아니었다. 이때 대중은 법 조항을 알지도 못한 채 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법은 단지 지배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한데 모세의 돌판은 그러한 제사를 부정하고, 그 자리를 법으로 대체한다. 글 서두에서 인용한 성서 구절을 다시 보자. “모세가 먼저 () 말을 거니, ()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출애굽기34,31b~32) 여기서 법은 왕이 제정하고 일방적으로 집행하는 것이 아니다. 왕이 대중에게 법으로 말을 걸고 있다. 법을 통해서 대중은 제사장이나 대지주와 똑같은 권리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하여 법은 왕과 귀족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포고된다. 법은 대중의 재산을 보호하고 몰락을 억제하며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된다는 얘기다. 적어도 요시야 정부가 제정하려 했던 법은 힘 있는 자들의 권력 장치가 아니라 무력한 자들을 법적으로 주체화하는, 즉 국가의 주인은 백성임을 선언하는 장치였다.

 

두 개의 법전, 신명기법전과 십계명

 

그런데 이러한 친대중적 법신학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법의 지배가 그리 쉽게 대중의 동의를 얻어내지는 못한다. 대중은 복잡한 법의 논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신명기법전이 아무리 친대중적 성격을 띠고, 왕과 귀족만이 아니라 대중 또한 법의 주체라고 소리 높여 주장한다고 해도, 절대다수의 대중은 글을 읽지 못한다. 그들은 청각을 통해 법을 기억할 뿐이다. 문자를 읽는 것에 비할 때 듣는 것으로는 길고 복잡한 논리를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하루 종일 노동에 시달리는 대중은 사변적 삶과 거리가 있는 만큼 길고 복잡한 논리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모든 법의 정신을 상징하는 간략한 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쉽고도 간단한 법이 요청된다. 이에 왕은 다이제스트 법령을 반포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물론 십계명에 속한 계율 하나하나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 계율은 열 개보다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십계명은, 그 계명 하나하나가 아니라, 열 개 계명의 묶음본을 뜻한다. 왜 열 개일까? 왜 구계명이나 십일계명이 아니라 십계명일까?

사실 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유다 전통에서 911 사이의 수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열은 종종 전체를 상징하는 숫자로 쓰였다. 가령 창세기31,7에서 야곱이 아내들에게 자기 외삼촌이자 그녀들의 아버지인 라반이 자신의 품삯을 속이기를 열 번이나 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숫자 은 열 번만 속임수를 당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속여 왔다는 주장을 담은 상징적 숫자다. 마태복음25,1~13에서는 신랑을 맞아야 하는 열 명의 여자 이야기를 예수가 비유로 말하고 있는데, 이때도 10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인간 일반을 대표하는 숫자다.

필경 신명기에서 열 개짜리 계율 묶음도 그런 뜻일 것이다. 즉 십계명은 단지 열 개의 계명만을 지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모든 계율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대중은 이 열 개 계명만이 아니라 다른 생활률로 전해 내려오는 모든 규율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을 공동체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 국가가 반포한 십계명의 항목들도 이미 백성은 다 지켜왔던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 열 개 계명의 묶음을 국가가 반포한다. 그것은 이 계명을 받은 이들은 이제, 마을의 생활률이 아니라 국가의 법을 지키는 의무 아래 놓인 자들인 동시에 국가의 법 아래부름받은 백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어느 나라든 국법이 있고, 그 법의 백성/국민이 된다는 것은 그 국가의 주역임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십계명이 의도하는 바는 대중을 지주도, 지방 성소의 제사장도 아닌 바로 국가에 속한 자, 왕에 속한 자로 호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백성은 법의 대상도 법의 주체도 아니었다. 백성은 단지 통치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요시야 왕은 이 십계명으로 백성을 국가의 주체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십계명을 이해할 때 그 계명 하나하나의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묶여 백성과 왕이 공유하게 된 역사적 함의다. 말했듯이 그 함의는 왕도, 귀족도, 사제도 아닌 백성 자신이 법의 주체라는 것이다. 그 전부터 존재해왔던 하나하나의 계율들을 묶으면서 요시야는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앞으로 이 계율들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십계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서 있다. 성서 자신이 법속에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성서의 법들을, 우리 시대정신을 담아 이해할 것인가? 이 책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그리고 이 대답의 기조는 성서에서 그러하듯, 법의 주체는 왕도, 권력자도, 성직자도 아닌, 대중 자신이라는 점이다.

  1. 시나이 산이라는 지명이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원래는 시나이 지역에 있는 산이라는,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쓰였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런데 후대로 가면서 이스라엘 신앙의 기원에 관한 상상의 산으로 기억되면서 그 구체적 장소성은 사라지고 상징성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가령 중국 산둥 성에 있는 타이산 산(태산)이 그 구체적 장소성을 잃어버린 채, 거대한 산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과 같다. [본문으로]
  2. 이집트와 소아시아 사이의 지중해 동부 지역을 레반트Levant라고 부른다. 그리고 레반트에는 남쪽의 가나안과 북쪽의 시리아가 있다. 가나안에는 요르단 동서부와 사해 남부 지역이 포함되며, 시리아에는 해안의 페니키아 지역과,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를 중심으로 하는 내륙 지역이 포함된다. 훗날 로마제국은 가나안 지역 중 이스라엘계 지역을 팔레스티나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3. 일단의 학자들은 히브리가 하피루처럼 원래 종족 명칭이 아니라 부랑자 특성을 갖는 사회적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부족동맹으로 성장하면서 이스라엘이 히브리라는 용어를 전유했다. 그리하여 히브리는 종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한편 이스라엘은 아마도 최초에는 부족동맹을 가리키는 용어였고, 그 후에는 팔레스티나 중북부 지역을 차지한 국가의 명칭이었으며, 나중에는 히브리처럼 종족의 명칭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4.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우리는 전자의 입장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5. 모세는 가나안 계의 셈족 이름이 아니라 전형적인 이집트식 이름이다. [본문으로]
  6. 이라크 남부 지역의 수메르 문명이 탄생시킨 길가메시 서사시에 의하면 아닷 신Atad은 폭풍우와 비, 날씨를 주관하는 신이고, 이슈타르Ishtar는 슈메르 만신전의 최고신인 아누Anu의 딸로 전쟁과 풍요를 관장하는 여신이다. 이 서사시에서 이 둘은 특별한 관계로 묘사되지 않는다. 한데 이슈타르 여신은 가나안 지역에서는 전쟁신의 함의가 사라지고 풍요, 다산의 신으로 받아들여지며, 바알, 아닷 등의 남신과 부부로 숭배되었다. 이스라엘-유다의 대중신심에서 종종 야훼-아세라는 부부신이었는데, 아닷이 야훼와 동일시되면서 야훼(아닷)와 이슈타르 부부신에 대한 숭배가 널리 확산되었다. [본문으로]
  7. 유다국 조정에서 벌어진 이러한 권력투쟁은 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아, 다섯 대에 걸친 통치자들을 둘러싼 세력 간의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아하스-므낫세 시대에 집권했던 구지배세력과 히스기야-요시아 시대에 집권했던 신진 개혁 세력 간의 치열한 공방은 당시의 국제정치상의 격변 상황(이집트, 아시리아, 바벨로니아 제국 간의 전쟁)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정치 세력화된 민중세력이 중요한 변수로 개입되어 있었다. 인류학자로서 고대사회의 국가성격에 관한 중요한 이론적 성과를 제시하여 주목받고 있는 크리스티안 크리스티안센Kristian Kristiansen에 의하면, 국가 구성원들 간에 벌어진 자원배분 갈등이 국가의 성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이론은 요시야 당시 유다국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출애굽 설화와 법 수령 설화를 하나의 거대서사로 만들어내는 문서편찬 작업이 해석될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