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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누가 내 ‘대신’ - ‘대속 신앙’에 대한 하나의 상상

[공동선] 2019년 03+04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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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대신

대속 신앙에 대한 하나의 상상

 

 

 

나는 그를 내 곁에 두고 내가 복음을 위하여 갇혀 있는 동안에

그대를 대신해서 나에게 시중들게 하고 싶었으나,

―〈빌레몬서1,13

 

 

 

 

한 남자를 한 여자가 공항으로 마중 나온다. 4년 전에 그 도시를 떠났다가 잠시 들른 남자는 그 여자가 자기를 대신해서 묵을 호텔 예약을 할 줄 알았는데, 여자는 떠날 때까지 자기 집에 머물라고 한다. 그들은 어떤 사이일까?

집에는 딸 둘과 어린 아들 하나, 그리고 동거 중인 남자가 살고 있다. 그리고 4년 만에 돌아온 남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다. 4년 전에 그 남자와 여자는 별거를 시작했고, 4년 후 남자는 이혼 절차를 밟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둘이 별거 중이던 4년 사이에 아내는 다른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어린 아들은 동거 중인 남자의 아들이다. 동거남이 자기의 부인과 낳은 아이다. 그런데 그 여자는 얼마 전 자살을 시도해서 식물인간 상태에 있다. 두 딸은 공항으로 마중 나온 여자가 첫 번째 결혼생활 때에 낳았다. ‘첫 번째라는 말에서 짐작했겠지만 4년 만에 돌아온 남자 이전에 또 다른 남편이 있었다. 그러니까 4년 만에 돌아온 남자는 두 번째 남편인 것이다. 그리고 아내는 임신 중이다. 동거남이 아빠다.

두 번째 남편이 묵는 동안 세 명의 어른과 세 명의 아이, 그리고 뱃속의 태아가 한 집에 살게 된다. 그러니까 혈연을 달리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것이다. ‘아내와 두 딸이 한 부류다. 그리고 아내와 4년 만에 돌아온 두 번째 남편으로 엮인 두 번째 부류가 있다. 여기에 아내와 동거남과 그의 아들이 또 다른 부류이다.

현재는 한 집에서 살게 되었지만 그들은 각기 다른 과거와 연루되어 있다. 과거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니 별 거 아닌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 그 과거가 현재를 뒤죽박죽 만들어 놓는 데 한 몫 하기도 한다. 과거로 인해 현재를 다르게 해석하는 이들이 서로 얽히면서 자기만의 우물에서 나와 더 넓은 세상과 조우하게 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배배꼬인 이해가 충돌하면서 소통불가의 상황으로 만들기도 한다. 해서 현재의 다른 해석들이 어떻게 소통하는지 혹은 불통하게 되는지에 따라 그 공동체에게 다른 미래가 도래한다.

아무튼 두 번째 남편이 당분간 머물게 됨으로써 그 가족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과거를 가진 혈연적 그룹 셋이 동거하게 되었다. 둘이라고 해도 만만치 않을 수 있는데 셋이니 더욱 그렇겠다. 실제로 두 번째 남편과 동거남은 서로 쿨한 척 하지만 미묘한 냉랭함이 감돌았다. 며칠 머무는 동안 한 방을 쓰게 된 두 번째 남편에게 동거남의 어린 아들은 처음부터 까칠하게 행동했다. 어른이 아이의 행동에 예민하지 않아야 하겠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지만 실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영화의 스토리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이란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만든 아쉬가르 파르하디(Asghar Farhadi)에 관심이 많다. 특히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에 매번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의 각본은 평범한 듯한 사건들의 깊은 이면을 들춰내는 데 있어 특출하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의 깊은 이면을 여간해선 드러내지 않고 숨기고 있듯이 혹은 스스로 모르기도 하듯이, 그가 들춰낸 이면을 재현하는 그의 영상에서, 배우들의 표정이나 말 속에서 그닥 명쾌히 드러나지 않는다. 때로는 그 미묘한 이면과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배우들의 말과 표정, 행동이 엇물려 있다. 그러니까 등장인물들 간에도 장벽이 있지만 각 인물도 스스로에 대해 장벽 속에 있다. 그런 벽들 속에서 살아가며 때로 맞물리고 때로 엇물리면서 엮이는, 특별한 결론도 없고 비약도 없는 삶들이, 그런 점에서 너무나 질리도록 리얼하게 영화는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물론 이 영화도 그랬다. 영화의 원제는 과거라는 뜻의 이란어라고 하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상영될 때 제목도 ‘Le passé’‘The Past’였다. 한데 한국에서 상영될 땐,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제목이 붙었는데, 그렇게 고쳐 쓴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굳이 내 생각대로 해독하면, 머물러 있을 수 있고 안식이 되는 곳이라는 가족 혹은 집에 관한 이데올로기와는 달리, 누구도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꽤 멋진 제목처럼 보인다.

아무튼 영화는 원제처럼 과거가 현재를 뒤죽박죽 만들고 있고, 그 안에서 미래란 얼마나 모호한지를 이야기한다. 다른 과거를 가진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 현재에 개입해 들어가 해석을 만들어 내고 그것은 다른 이의 다른 해석과 얽히면서 뒤엉켜 버린다. 그런 것이 봉합된 채 가족은 함께 살아간다. 한데 간혹 그 봉합된 문이 열리면서 갈등을 일으키고 상처가 되며 때로 다시 봉합될 수 없는 결과를 빗기도 한다. 그 원인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해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그냥 서로 오해하면서 각자 상처를 받고 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할 뿐이다. ‘과거는 참으로 위험한 기억일 수 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에서 과거는 혈연적 차이를 매개로 하고 있다. 가부장제적 가족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가족은 혈연적으로 동질집단이다. 족외혼이라는 것 자체가 다른 가족 출신인 여성이 그 가족 안에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족외혼을 기반으로 하는 가족이데올로기는 혈연적 차이를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가족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혈연적 동질성으로 규정했다. 그러니까 이 이데올로기는 여성이 자신의 혈연적 정체성을 해체시키고 남편 혹은 가부장의 혈연적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런 가족이데올로기가 위기에 처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혼과 재혼이 매우 흔하게 일어나게 된 탓이다. 이런 혈연적 이질성이 가족의 동질성 이데올로기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고 그래서 가족은 위기에 처했다.

일본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히케츠엔카조크’, 즉 비혈연가족(非血縁家族)이라는 용어는 바로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사카모토 가츠에(坂本佳鶴恵)에 따르면 일본에서 가족을 소재로 하는 홈드라마의 붐은 가족의 위기와 사회의 위기를 동질성의 해체라는 관점에서 읽어낸 결과라고 한다. 그것은 최근 아베 정권처럼 군국주의적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욕구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혈연가족의 이질성을 너무 빨리 유사혈연적 연대로 봉합하려는 일본 홈드라마의 양상은 군국주의적인 정치적 기획과 맞닿아 있는 사회적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이겠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최근 한국도 비혈연가족의 갈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고 결혼이주로 유입되는 여성이 크게 늘고 있는 것은 가족갈등에서 비혈연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한국사회의 가족주의 담론에서 비혈연성으로 인한 갈등이 가족 위기 담론의 한 소재이긴 하지만 가족위기의 핵으로 부상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근대한국사회에서 가족은 늘 위기였고, 최근에는 그 정도가 극도로 심화되었다. 비혈연가족 뿐 아니라 혈연가족도 심각한 소통의 부재와 갈등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1인 가족현상은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기반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의 위기가 날로 첨예화되고 있음에도 설날이나 추석에는 가족주의가 넘쳐난다. 가족을 주제로 하는 TV 프로그램이 집중적으로 방영되는 것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요맘때가 되면 국회의원들이 너도나도 기차역으로 달려가는 현상에서 가족주의의 위기는 더욱 명료한 현실임이 드러난다. 그들은 명절 때마다 너무나 상투적인 가족주의적 메시지를 날린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제각기 자신의 정파적 이해를 담고 있는 정치적 이슈를 평소보다 더 집중적으로 터뜨리는 전략을 취한다. 핵가족들 혹은 1인가족들이 확대가족으로 한데 모였을 때 그들 간에 정치적 격론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면서 각 주체에게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의 대변자가 되도록 언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가족주의를 해체시키는 요소 중 하나가 정치, 특히 이념임을 가정하고 있고 그런 현상을 정치세력들이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념만이 아니다. 종교도 가족을 뿔뿔이 나눠버린 지 오래다. 또 최근에 두드러진 것은 취향 같은 소비 태도를 둘러싼 갈등이다. 여기서는 세대간 갈등이 특히 첨예하게 부상한다. 게다가 여성의 권리의식이 고양되면서 전통의 이름으로 남성가부장주의가 활개치는 명절은 성적 전쟁이 심화되는 계기가 된다. 여태까지 자신을 죽이면서 참아왔던 여성들 중 많은 이들이 더 이상 순응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에서 비혈연가족이 모여 살게 됨으로써 서로 관계가 배배꼬여 나타나게 된 것처럼, 한국의 명절에는 이념을 달리하고 종교를 달리하며 취향이나 성으로 갈라져 있는 이들이 그들 각각의 이질적인 요소들로 인해 불통과 불신과 분노로 각각의 마음들이 난도질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갈등 상황에 대해 누군가는 그 얽히고설킨 나쁜 감정들을 조정해보려 나서기도 한다. 이때 그이가 취하는 가장 대표적인 전략은 갈등 당사자 사이에서 상대편을 대신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혹은 갈등 때문에 벌어진 사태를 대신처리하는 데 나서기도 한다.

이 영화에선 두 번째 남편이 첫째 딸과 아내가 갈등하고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또 집 안에서 하수구가 막혔을 때나 전기가 나갔을 때 그것을 수리하는 데 나서기도 한다. 아내가 하거나 동거남이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집의 고장난 곳이 곳곳에 있다는 것은 그 가족의 갈등이 더 이상 봉합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실은 두 번째 남편이 4년 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 집은 새로 색을 칠하고 있었다. 4년 전의 색이 다르게 바뀌는 과정이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완성되지 못한 집의 모습은 어수선했다. 새로운 색으로 칠해질 집의 미래는 현재의 집에선 좀처럼 엿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는 그 집의 미래에 대해 관객에게 아름답게 상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아니 어떤 색깔로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한데 두 번째 남편이 끼어들어 그 가족의 갈등을 봉합하는 데 조력을 하려 했다. 하지만 아내와 딸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고, 나간 전기도 막힌 하수구도 고쳐지지 않았다. 이 영화처럼, ‘대신하는 걸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는 허다하다. 사이에서 복받치는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대신말하고 대신행동해도 사람들은 그때마다 새로운 오해 하나를 더 쌓게 되곤 한다. 이미 닫혀 버린 마음은 어느 것도 상대의 입장에서 해석하지 않고 자기가 받은 상처에만 집착해서 반응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더 나아질까. 난감한 일이다. 우선 이런 갈등 사이에 끼어 들어가서 상대방 대신무엇을 하는 것으로 관계의 꼬임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가족인 아무개가 자기와 달라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을 분노로 표출할 핑계가 이념이고 종교며 취향이고 성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평소에 그런 것들을 달리 하는 무수한 이들과 서로 웃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물론 다투어서 관계를 절연하는 일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어쩌면 가족이기 때문에 대신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미 너무 넘치게 간섭과 감정을 드러내왔던 탓에 제3자가 대신하기 전에 너무 깊게 감정이 패어버렸기 때문일 수 있다.

요컨대 달라서’, ‘이질적이어서, 다른 기억의 준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가족이 특히 그런 다름의 경계를 무시하고 끼어들어 무뢰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훨씬 잦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입은 상처가 장기간 깊게 새겨진 탓에 그 벌어진 틈새를 매우기 위해 대신하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 된 것이라는 얘기다.

이쯤에서 이 글 서두에 인용한 성서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바울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해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바울이 보기에 빌레몬은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야 마땅하다. 한데 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골로사이에서 활동하는 바울의 동역자(συνεργῷ)이니 감옥에 갇힌 바울과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이겠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던 곳은,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들을 참조하면, 세 곳이다. 고린도와 에베소, 로마. 이 중 이 성서 구절 속에 반영된 바울의 수감 장소는 어디일까. 확정할 수는 없지만 세 곳 중 하나다.

아무튼 세 곳 모두 빌레몬이 있는 골로사이에서 제법 멀다.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기에 바울은 빌레몬이 당연이 자기를 도와야 함에도 돕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섭섭하지 않았다. 근데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가 옆에 있다. 이때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당신을 대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한데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마음의 예의를 지켜서 말하고 있다. 오네시모의 도움을 허락해 달라고 말이다.

함께 일하다는 뜻의 쉰에르고’, 동역자라는 말은 가족이라는 말처럼 자칫 거리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장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종종 동역자 간에, 가족 간에 상처가 되고 분노의 원인이 되곤 한다. 해서 누군가 제3자가 대신 말하고 행동하고 도움을 줄 때 그것이 도움은커녕 또 다른 오해와 분노의 원인이 되곤 하는 것이다.

관점을 바꾸어서 대신하는 이의 입장이라고 하자.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는, 그 어려움이 깊은 만큼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해서 그이는 도움을 줄 이를 열렬히 찾는다. 가족, 친구 등 가까운 이들이 먼저 떠오르겠다. ‘누가 내 대신이 십자가를 짊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그런 절실함에 응답하는 이는, 자기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일이 또 다른 오해와 상처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다른 이념, 종교, 취향, 성 등을 존중하고, 조건 없이 대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차이의 선을 넘지 않고 그것 때문에 도움이나 받게 되는 것이라고 탓하지 않고 말이다.

대속’, 신이 우리를 대신해서 무엇인가를 해주었다는 신앙, 공동선은 지난 호에서 이 신학을 다룬 바 있다. 한데 신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대신 하였을 때, 우리는 그 대신함으로 인해 행복해야 한다. 대속 신앙은 그것을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다. 한데 실은 신의 대속은 오해되고, 때로 불신을 낳았다. 심지어는 서로 더욱 증오를 불태웠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말한 것처럼 조심스레 개입하지 않고, 신이 신중하지 않게 끼어든 것처럼 대속이 해석된 결과다. 바울의 이 텍스트로 상상하면,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에 끼어든 바울은 갈등의 조정자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어쩌면 신도 우리의 문제에 끼어들어 대신 무엇을 해 주는 존재이지만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예수는 복을 주는 분이었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집에 묵기도 하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기도 했으며 마지막 만찬을 위한 장소를 얻기도 했다. 누군가가 그이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갔고, 누군가가 그이에게 물 한 모금을 나눠주기도 했다. 하여 마태복음25장은 대속의 주인 그리스도가 동시에 우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였다고 해석한다.

아무튼 대속은 그렇게 서로에게 조심스러운 것이어야 하고 서로에게 자기의 여분을 나눠주는 가운데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만큼 대속, 대신 하는 것도 위험스럽기도 한 것이다. 우리들끼리,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들어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신은 이렇게 서로 조심스럽게 서로를 나누어 왔다. (올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