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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 예수가 왔다

한 포악한 왕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고의 절대자라고 믿었고, 또 번번이 그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혹 누가 왕 자신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품격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킨다면, 고의든 실수든 간에, 왕은 이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점차 신하들은 어떻게 하면 이 왕에게 지존무상다운 격식을 차릴 수 있을까만을 궁리하게 된다. 그래서 날마다 열리는 어전회의 때마다 왕의 등장을 기리는 특별한 요식 절차가 벌어졌고, 점점 길고 복잡해져 갔다. 우선 왕의 등장 시에 불리는 수많은 칭송의 노래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다. “지고하신 왕, 백성의 단 한 분이신 아버지, 진정한 구원자시여, 어서 납시오소서. 세상의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리다.”

그런데 그의 포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모반이 일어난다. 왕의 암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은 안성마춤의 기회를 바로 이 복잡한 요식 행사에서 잡는다. 감히 누구도 쳐다볼 수 없도록 베일이 쳐진 용상 앞에는 모살당해 목 베인 왕 대신 가짜 왕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얼마 후, 가짜 왕은 자신의 쿠데타를 위한 안전한 모든 조처를 다 취한 후에 백성과 만조백관 앞에 왕의 죽음를 선포한다.

새 왕은 베일을 걷어치우고, 백성 앞에 당당히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 보인다. 큰 키에 우람한 체구를 갖춘 그가 푸른빛 보석이 박혀 번뜩이는 황금 칼을 차고 성루 위에 올라설 때 온 백성은 경탄에 마지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시작된 칭송 소리가 어느새 합창으로 변한다. “옛 임금님이 언덕이면 새 임금님은 태산, 옛 임금님이 강이면 새 임금님은 바다 ...” 왕은 우쭐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신하들은 이 새 왕을 위해 또 다시 어전 회의에 앞서 매일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된다. “지고하신 왕, 백성의 단 한 분이신 아버지, 진정한 구원자시여, 어서 납시오소서. 세상의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세상의 모든 산과 언덕이 눕혀지리다.”

 장난스레 만들어본 가상의 이야기다. 하지만 단순한 창작이라기보다는 권력자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그 자신도 권력 추구자며 그렇기에 권력에 복종하는 자세가 몸에 밴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있을 법한 상황에 대한 풍자다.

여기서 성서 구절 하나를 인용해보겠다. 사실은 이 구절을 보면서 위의 이야기를 상상해낸 것이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책에 기록된 말씀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가복음3,4

 

이 선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나는 오랫동안 예수라는 모범 답안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뜩 이런 상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느님의 백성을 향해 요한이 푸른빛 가죽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이렇게 선포한다. ‘너희는 주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그러자 예수가 보석 같은 푸른빛 눈을 번뜩이며 세상을 향해 유유히 걸어 나온다.

그야말로 주인공인 예수의 등장 장면다운 모습이 아닌가. 전능하신 절대자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 세상에 행차하시는 길인데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머리칼 수도 익히 헤아리신 분이 아닌가. 수십 억 인류의 운명을 개개인마다 예정하고 있다는 분 아닌가. 복잡다단한 인간의 폐부 속에 감추어진 속내마저 다 통달하고 있다는 분 아닌가. 그러니 성서에 언급된 요한의 칭송말로도 결코 충분한 환영사는 못될 것이다.

나는 지금 빈정대고 있다. 만일 본문의 의미가 이런 것이라면, 서두에 언급한 이야기에 나온 왕과 우리의 구세주 하느님/예수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하느님/예수는 자기 자신의 권력을 맘껏 행사하고픈 욕망에 굶주린 권력 중독자와 무엇이 다른가. 또 우리의 신앙은 왕의 권력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며 아부가 몸에 밴 그의 신하들의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 사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임하는 많은 사람들도 하느님의 권력 주변에 빌붙어 그가 가끔씩 던져주는 떡고물을 받아먹으려고 갖은 아양을 떨어대며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찬양 노래나 지껄여대고 있지 않은가. 이들의 신앙 동기는, 하느님이 자기에게 아부하는 백성에게만 준다는 값싼 축복을 받아먹는 데 있지 않은가. 이들의 신앙 동력은, 하느님이 앵무새처럼 신조만 중얼거리는 자기 백성을 위해 예비해 놓았다는 대리석 바닥의 90평 아파트같은 천당에 살 장미빛 꿈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교회는 언제부터인지 축복’, ‘천당운운하는 이런 신앙이나 서로 얘기하면서 기나긴 세월을 복권 추첨날 기다리듯 보내왔고, 그러는 동안 어느덧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모든 면에서 절대권력의 추구자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절대권력의 횡포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대한 반면, 착취당하는 자의 항거에 대해서는 온갖 폭언을 숨기지 않고 힐난하는 데 앞장서는 게 신앙인다운 심성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역사 속에 어마어마한 대학살극들의 다수는 그리스도교의 꺼질 줄 모르는 광기의 소산이었고, 역사 속의 비극적인 대 전쟁들 배후에도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빗나간 신앙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늘에 영광 땅엔 절망!’

 

게놈 프로젝트 운운하면서 복제인간 얘기가 장안의 화젯거리로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을 때,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복제하고 싶은 인물과 복제하고 싶지 않은 인물 선호도를 조사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복제하고 싶지 않은 인물 1위가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고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가 박정희 전대통령으로 나왔다고 한다. 지금 다시 조사했다면 김영삼의 자리엔 노무현이 들어갔을 법하다. 아무튼 이것은 아마도 작금의 혼돈의 원인을 사람들이 부권 상실 현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뜻일 게다. 아버지의 권위를 회복해야 이 총체적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겠다.

필시 이런 조사를 1987년쯤 했다면 그 결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사람들의 머리 속엔 현재의 위기는 권위주의적 정부의 과도함탓이었다는 생각이 지배했을 테니 말이다. ‘부권 상실이 위기의 요체가 아니라 부권의 과잉이 문제라는 얘기다. 그런데 몇년 사이에 상황은 이토록 바뀌었다. 아니 사실은 1987년의 담론은 일시적인 태풍같은 것일 뿐이었다. 광풍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점차 다시 옛 주인의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옛 주인의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처럼 돼 버린 것이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질서의 근저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안정과 영원(지속성)을 상징한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변화와 청산(단절)의 문제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변화와 청산이 시대의 화두로 대두할 땐 부권의 상징인 왕의 머리 베기를 시행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제대로 변화하지도 못했고 그럴듯한 청산이 수행되지 못했음에도, 곧 다른 부권의 상징인 왕을 추대한다. 그리고 새 왕은 또 다시 옛날처럼 안정과 질서의 광폭한 수호자를 자처하게 된다. 위의 선호도 조사 결과는 바로 이런 상투적인 역사의 흐름을 너무나도 전형적으로 잘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런 역사의 흐름에 가장 잘 적응한 대표적인 종교의 하나였고, 나아가 이런 대세를 유포하는 가장 열렬한 주창자로서 존립해 왔다. 그들은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이 눕혀지는 태도로, 즉 순종적 자세로 절대권력자 예수를 대하듯, 세계의 권력자에 대해서도 그렇게 맞이한다.

그런데 예수는 어땠을까? 분명 예수의 등장은 변화와 청산을 갈구하는 민중의 메시아 대망과 관련되어 있다. 위의 성서 인용구절은 바로 이런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태산 같은 권력의 횡포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대중을 향해 예언자는 선포한다. “산이, 그 도도함이 눕혀질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 추상같은 엄포로 고난의 천길 질곡을 향해 추락하는 대중을 향해, 그 하소연을 향해 예언자는 선포한다. “골짜기가, 그 수치가 메워지리라.” 스포트라이트는 곧 무대 위로 등장할 예수를 향하고 있지만, 예수의 등장을 기리는 이 찬양의 노랫말의 참된 주연은 변화를 진정 바라는 자, 권력의 역사의 진정한 청산을 갈망하는 자, 곧 민중인 것이다.

신은 세계의 중심이고자 하지 않았다. 곧 권력의 진원이 되려 하지 않았다. 신은 오히려 세계의 중심이라고 찬양하는 자를 비웃듯, 세계의 변두리로 도래했고, 변두리 사람들의 절망의 옷을 입고 태어났다. 다시 말하면 신은 권력의 중심이라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스스로 분쇄했고, 자신에게 부여된 아버지의 이름을 포기했던 것이다. 도리어 그는 자신이 탈중심임을 선포하며, 이 세상 어디에도 중심은 없고 높고 낮음도 없고 귀하고 천함도 없는 평등한 세상임을 실천하는 자로 세상으로 왔고 인간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권력 부재를 안타까워하며 또 다시 아버지의 이름으로 절대권력을 갈구할 때, 신은 당신에게 부여된 그 이름을 내동댕이치며 우리 세계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동료로서, 우리의 가장 비천한 얼굴로서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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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05.04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나의 책 [예수의 독설]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