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한국교회(삼인 2020)에 수록된 글. 2021년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
모두에게 파괴였던 시간의 바깥
‘제주4.3사건’의 신학적 비망록
죽음의 섬
제주4.3사건 최대의 집단학살 및 암매장지로 알려진 제주공항 활주로 북단 지역의 유해 발굴 작업이 본격 시작된 것은 2007년이었다. ‘제주4.3연구소’가 조사 연구한 바에 따르면 1949년과 1950년 두 차례에 걸쳐 이곳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되고 암매장되었는데, 그 수효가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었다.
유해발굴팀은 암매장 추정지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총 388구의 유해만을 찾아냈고, 이 중 90구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발굴된 유해는 희생자로 추정된 이들의 절반도 안 되었고, 그중 23퍼센트만의 신원을 알아냈을 뿐이다.
이후 보수 정권 10년 동안 중단되었던 발굴 작업은 2018년에야 재개되었다. 하지만 더 체계적이고 더 진일보한 탐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발굴된 유해는 단 4구에 그쳤다. 그런데 이 4구 중 2구는 아동과 유아의 유골이었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참혹한 학살극에 대하여 ‘적에게 협력할 우려가 있는 자들을 제거하는 예방적 조치’라고 주장했지만, 아이들까지 무차별 살해했다는 점은 그런 변명이 얼마나 궁색한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제주공항 활주로 인근에서 자행된 집단학살 및 암매장은 제주4.3사건 당시 발발한 비극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2000년 총리실 산하단체로 설치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이하 ‘4.3위원회’)의 희생자 결정 현황에 따르면, 당시 제주에서 학살당하거나 행불자가 된 이들은 대략 1만 4,000명에 달한다(사망자 10,249명+행불자 3,583명). 이 숫자는 기록이나 증언에 기초하여 결정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인구 변동을 통해 추산하면, 2만 5,000명~3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1946년 제주도 인구(27만 6,000명 이상)와 비교하면 도민 전체의 9~11퍼센트가 국가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고, 특히 중산간 지역은 95퍼센트 이상의 집들이 불타 없어졌다. 영구적으로 사라진 마을도 100개가 넘는다. ‘4.3위원회’가 발표한 희생자 유가족의 수는 6만 명에 달하는데, 인구 변동을 통해 추산한 희생자 숫자로 환산하면 유가족은 10만~13만 명에 이른다. 이는 당시 제주도민의 거의 절반 가까운 이들이 희생자 유가족이라는 뜻이다.
제주대학교 정신의학교실 연구팀은 그들이 겪은 고통의 정도를 측정한 바 있는데, 그 결과는 충격적이다. 생존한 직접 피해자들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유병률이 한국인 일반의 평균보다 162배나 높게 나왔다. 유가족의 경우도 139배 높았다. 또 직접 피해자들과 ‘광주5.18사건’ 유공자를 비교해도 2.3배 높았으며, 유가족은 2배 높게 나타났다. 광주에서의 연구는 사건 발생 시점에서 26년이 지난 2006년에 발표된 것이고, 제주에서의 연구는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부터 67~68년이 지난 2016년에 발표된 것이다. 또 1995년에 일어난 삼풍백화점 사건을 겪은 이들을 3개월 후에 측정한 수치와 비교해도 직접 피해자는 2.3배, 유가족은 2배가 높았다. 한편 제주4.3사건의 생존 피해자 중 중증 우울증 증상을 보이는 이들의 비율은 41.8퍼센트인데,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60년 후 중증 우울증 상태에 있는 이의 비율이 56퍼센트다. 조사 시기가 사건 발생에서 10년 가까운 차이가 난다는 점을 감안하면 두 사건의 참혹함의 정도가 거의 맞먹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의 사회학자 다니엘 파이어스타인Daniel Feierstein은 국가에 의한 집단학살의 사회적 파급력에 대한 글(2012년)에서, 집단학살 사건은 그 파장이 너무 광범위하고 장기간 확대 재생산된다는 점에서 그 직접 희생자들에 한정하여 고통을 논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논지를 편다. 여기서 그는 ‘간접적 희생자’(indirect victim)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 범위에는 가해자나 제3자까지도 포함된다. 곧 집단학살 사건은 그 국가의 구성원 전체를 간접적 희생자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제주4.3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안목을 제시해준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직접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깊은 고통을 증언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이때 국가는 가해자였고 조직적으로 은폐·왜곡한 장본인이었다. 해서 은폐・왜곡된 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 그리고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피해자 보상 및 명예 회복을 위한 모든 조치를 다 하는 것은 절대 필요한 일이다. 현 정부의 제주4.3사건에 대한 입장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파이어스타인의 문제의식처럼, 제주4.3사건은 희생자 대 가해자 문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파멸적 관계 파괴의 늪으로 빠뜨려버린 사건이다. 그러한 총체적인 관계 파괴적인 사건을 초석으로 하여 한반도는 폭력적 냉전체제로서 구조화되었다. ‘냉전’은 표현 그대로 전쟁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 다만 끊임없는 전투가 물리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전쟁 상황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전쟁이 지속되고 있으며, 그 상상의 질서가 사회를 전시처럼 폭력적으로 구조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반도에서의 냉전체제를 우리는 흔히 ‘1948년체제’라고 부른다. 여기서 ‘체제’, 곧 레짐regime이라는 용어에는 좁게는 ‘정치체제’라는 의미가 들어있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침투한 관습, 습관, 편향에 대한 것도 함축되어 있다. 즉, 냉전체제라는 표현 속에는 냉전적 정치체제뿐 아니라 일상에 스며 있는 냉전적 의식과 무의식도 포함된다. 하여 제주4.3사건은 1948년 8월 15일에 출현한 남한 단독정부로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는, 냉전체제로서 한국 사회의 구조화된 폭력의 기원이 된다. 이 글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제주4.3사건을 읽고자 한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사회 전체가 폭력이 난무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만으로 그 폭력의 메커니즘을 충분히 논할 수 없음을 뜻한다. 국가는 저 원초적 폭력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면서 폭력적 질서를 구조화한다. 이때 모두는 그 구조화된 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사회적 망각의 체계는 개개인을 강요된 망각의 상황에 놓이게 하지만, 그것은 기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것을 뜻한다. 파편화된 기억은 때로 병증을 유발하며 새로운 폭력의 배경이 되곤 한다. 새로운 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와전된 폭력’을 뜻한다. ‘와전’이라는 말은 ‘잘못 표현되는 것’(misrepresentation)을 가리킨다. 즉, 폭력은 전염되지만 당사자 간의 다툼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엉뚱한 제3자를 향해 가해진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계속되면 폭력의 원인은 모두에게 잊혀진다. 하여 사회는 그 원인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리고 간혹 어떤 대상을 향해 모든 폭력적 상황의 책임을 전가한다.
나는 오늘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러한 구조화된 폭력과 폭력의 와전, 책임 전가의 상황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개념을 ‘1948년체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사건의 초석적 사건을 ‘제주4.3사건’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 한국의 폭력적 체제의 기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세 범주의 증오의 화신들이 주목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를 ‘반공’이라는 새로운 증오의 질서로 구축하려는 미국과, 그러한 미국의 국제정치적 전략에 기초해서 남한 사회를 ‘반공’이라는 증오의 사회로 구축하려는 남한 정부, 그리고 ‘반공주의적 증오의 신학’으로 주체를 형성해갔던 월남자 중심의 개신교 세력, 이들의 헤게모니적 결합이 한국의 ‘1948년체제’를 구축했다. 다음 장에서는 ‘1948년체제’적인 ‘폭력의 기원’으로서의 제주4.3사건을 이 세 증오의 화신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이어서 제주4.3사건이 어떻게 ‘폭력의 와전’ 상황으로 모두를 몰아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함으로써, 그 폭력의 체제로부터의 해방은 직접 피해자와 유가족만의 염원이 아니라 모두의 바람임을 말하고자 한다. 하여 이 글의 마지막 과제는 ‘평화신학’에 관한 것이다. 모두의 염원이어야 하는 ‘폭력적 체제 넘어서기’를 위해서 평화신학은 증오로 덧입혀진 낡은 신학적 요소들을 청산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두의 염원이 될 수 있는 신학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글은 바로 이런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모색이다.
폭력의 기원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식민지 대중이 겪어야 했던 폭력의 시간은 끝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폭력의 종식이 아니라 다른 폭력의 시작을 의미했다. 특히 제주가 그랬다.
제주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 본토를 수호하는 최후의 저지선으로 설정되었다. 당시 제주 인구가 20만 명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었는데 주둔한 병사는 7만 5천 명으로 인구 대비 군인의 수가 34퍼센트를 넘었다. 또 다른 최후 저지선이었던 오키나와의 경우 섬 주민이 80만 명 정도였는데, 주둔 병력이 12만 명이었으니 인구 대비 군병력이 15퍼센트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제주에는 전투비행장이 네 개나 되었고 요새들도 100여 개에 달했으니 섬 전체가 군사 기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주로 파견된 부대는 만주 등지에서 민간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던 관동군의 일부였다. 그러니 제주도민이 겪었을 고통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러다 해방이 되었다. 일본군은 철수했고, 철수한 병력만큼의 인구가 제주도로 유입되어 들어왔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일본 군대를 피해 타향으로 이주했던 이들이었다. 그때부터 1946년 8월 이전까지 약 1년간은 제주도인민위원회가 도의 행정과 치안을 주도했고, 선주민과 이주민 모두가 가난했지만 평화롭게 내일을 꿈꾸며 살아갔던 시기였다.
하지만 1946년 3월부터 시작된 미・소공동위원회 국면, 그리고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을 거치면서 이념 갈등이 모든 사회적 문제를 뒤덮기 시작했고, 미군정청이 임명한 경무국이 그해 여름부터 본격적인 좌파 사냥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때 미군정과 경무국은 자신들에 동조하는 적극적 지지자를 제외한 거의 모두를 ‘좌파’이거나 ‘좌파 협력자’로 간주했다. 하여 남한 지역의 국민 다수를 가상의 적으로 삼는 좌파 사냥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게 갈등이 고조되면서 1947년 3.1절이 되었다. 이때 좌익계 기념식 인파를 향한 경찰의 총격 사건이 벌어졌고, 전국에서 22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그중 제주에서만 경찰의 발포로 인한 사망자가 6명이었다. 이에 좌익계 사회운동 조직의 저항, 그리고 시민들의 동조 시위 등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당국은 강경 진압 및 체포, 구금 등으로 대응했다. 그 와중에 1947년 4월 3일 좌익계 청년들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24개 경찰 지소 중 12개 지소를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직후 제주 모술포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9연대는 좌익 무장대와 협상에 들어갔으나 미군정청이 직접 개입한 5월부터는 강경 진압으로 선회했다.
이러한 변화의 배후에는 미국의 국제정치적 전략의 선회가 있었다. 1823년 발표된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 이래 미국은 국제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1947년 3월 12일 선포된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국제적 네트워크 건설’을 위해 미국이 ‘적극 개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는 처참했던 전쟁의 시간이 종식된 이후를 평화가 아닌 (반공주의적) 냉전의 시간으로 이어가겠다는 신호이며, 이 반공 전선을 미국이 주도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이 독트린은 곧바로 그리스와 한국에서 벌어진 엄청난 폭력적 사태의 배후가 되었다. 미국은 이 두 곳이 공산화될 우려가 농후한 지역이라고 보았고,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우파 세력을 적극 지원하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제거한다는 ‘원칙 아닌 원칙’을 적용했다. 그 결과 5만여 명의 사망자와 70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킨 그리스 내전이 일어났고, 제주도를 ‘죽음의 섬’으로 만든 제주4.3사건이 자행되었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바로 다음 날 이승만은 ‘남한 지역에 과도정부를 세우는 것만이 공산주의를 막는 유일한 길’임을 주장했고, 미국의 사실상의 승인과 주도 아래 이듬해인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4월 3일 제주에서 벌어진 파출소 습격 사건은 바로 이 총선거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계속된 저항 국면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에서만 3개 선거구 중 2곳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5.10총선으로 당선된 제헌의회 의원들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가장 먼저 취한 행보 중 하나는 제주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는 10월 11일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고 군병력을 증파했으며, 17일에는 이 섬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일본군 하사관 출신의 송요찬 중령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때부터 송요찬이 지휘하는 대한민국 국군은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고 가옥을 무차별 파괴했다. 그리고 12월 7일부터는 일본군 준위를 지낸 함병선 중령이 계엄사령관을 승계하여 학살극을 이어갔다. 이 두 인물이 토벌대를 이끈 1948년 가을부터 1949년 봄 사이에 제주4.3사건 중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가옥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군이 주도한 만행만으로 이 사건의 폭력성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다. 서북청년단은 제주도민들에게 가장 잔인한 토벌자들로 기억되고 있다. 서북청년단이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은 주로 서북 지역(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의 젊은 월남자들이었다. 이곳은 20세기 초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산업화된 지역이었고, 개신교는 그중 더 산업화된 도시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하여 개신교 신자는 자산 능력과 사회적 능력을 갖춘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들과의 주도권 경쟁에 밀린 개신교도들의 상당수가 월남했는데, 그중 다수는 자산가 집안 출신의 청년 남성이었다.
1946년 11월 30일, 이들 월남자 개신교도들이 주축이 된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었다. 그들은 남한 사회에서 점점 더 무자비한 백색테러 집단이 되어갔다. 그렇게 되었던 이유의 하나는 그들의 반공주의 성향이 월남할 당시부터 매우 강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그들은 잘 결속되어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월남자 교회들, 특히 한경직의 영락교회가 있었다. 한경직은 미군정 당국과 가장 긴밀한 네트워크를 가진 인사로, 미군으로부터 일본 종교 집단의 소유였던 적산(敵産)의 상당 부분을 할당받아 월남자들의 정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를 비롯한 월남한 개신교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과 연결 고리가 강한 남한의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은 이들 월남자들을 남한 사회의 우파 세력과 연결시켜주었다. 그것은 월남자들이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것을 뜻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백색테러였다. 남한의 우파 성향 정치 세력과 자본가들은 그들의 백색테러를 적극 지원했다. 또 월남자 교회의 목회자들은 그런 증오의 행위들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그리고 미군정청이 임명한 경무국장 조병옥, 수도경무청장 장택상은 그 테러 집단의 배후 세력이었고 비호자였다. 그렇게 폭력이 정당화되면서 서북청년단은 점점 광폭한 집단이 되어갔다.
바로 이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원들 1,000여 명이 1948년 11~12월 사이에 제주도로 들어왔다. 그들 대부분은 경찰이나 경비대 소속이었다. 그들의 잔혹상에 대해서는 아직 본격적인 조사가 수행되지 않았지만 방대한 구술 기록 등에서 이들이 자행한 잔인한 폭력의 기억은 뚜렷하다. 주로 증언들에 기초해서 『제주의 소리』에 제주4.3사건에 관해 컬럼을 연재했던 김관후는 그들을 ‘극우 민병대’로 정의하면서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장본인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특히 제주에서의 만행을 이들이 저지른 가장 무자비한 폭력의 사례들로 꼽고 있다.
요약하자면 그들의 폭력은 북한에서의 공산주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밀려남으로써 형성된 ‘체험된 적개심’과 남한의 비호 세력의 후원에 기초하여 형성된 ‘수행적 적개심’이 겹쳐지면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나 여순사건의 경우에서 보듯 일본군 출신 장교들의 잔혹성에 고무되어 점점 더 잔혹한 가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학살전인 ‘초토화작전’은 송요찬과 함병선, 그리고 서북청년단 등이 충실한 실행자이긴 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1949년 4월 1일자 미군사령부 첩보보고서(G2)에 따르면 미군사고문단에 의해서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 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 among civilians)이 한국군에게 지도・하달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송요찬 부대의 작전참모를 지낸 한 장교의 증언에 의하면 그것을 한국군은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한국전쟁 중에도 제주는 계속 계엄령 아래 놓여 있었고, 그때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과 강간, 파괴 등은 생존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의 삶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제주 사회 전체를 고통 속에 빠뜨려버렸다. 하여 이러한 초토화작전은 미국 정부가 사주하였고, 한국의 우파가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실행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그렇게 한 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트루먼 독트린에 의거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리스나 한국 같은 사회에서 다수 대중이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는 미국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공산화를 막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목표였다. 해서 그 목표에 가장 근접한 우파 정권을 설립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정권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정권이 국가를 장악하는 과정에 대중이 저항하면 그들을 철저히 무력화하고자 했다. 그리스나 남한의 우파 정권은 이러한 미국의 원칙에 지나치게 충실했다. 해서 엄청난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렇게 정권은 제주에서 잔인한 반공주의를 추구함으로써 수립되었고, 그것을 강도 높게 추구하고 전국 곳곳으로 확대할수록 더욱 견고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체제는 정권이 바뀌어도 변화하지 않았다. 곧 제주4.3사건은 ‘1948년체제’의 초석적 사건인 것이다. 하여 이 사건은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들을 규정짓고 있는 폭력적 질서의 기원이 되는 사건이다. 다음 장은 이 기원적 사건에 기반을 둔 ‘1948년체제’의 병리성, 그 와전된 폭력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폭력의 와전
제주4.3사건 당시 토벌대는 무장대뿐 아니라 그들과 연계되었을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가정 아래 무수한 민간인을 학살함으로써 이 섬에서 ‘빨갱이’의 흔적을 아예 지워버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원사건으로 하여 성립한 ‘1948년체제’는 그런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기억하게 하고, 그 폭력의 정당성에 저촉되는 기억들을 망각하게 했다. 이런 ‘1948년체제’의 기억과 망각의 정치학의 틈새에서 사회는 무수한 냉전주의적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1978)은 이런 냉전주의적인 폭력적 체제의 원사건인 제주4.3사건에 주목하면서 거기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와전 현상을 증언하고 있다. ‘순이’(제주에서 ‘삼촌’은 가까운 친척을 일컫는 표현이라고 한다)라는 여성은 1949년 음력 섣달 17일에 발생했던 집단학살 사건으로 그 이후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사건은 북제주군 조천읍 북촌리의 북촌초등학교 인근에서 군인들이 마을 주민 400여 명을 집단학살한 것을 말한다. 그녀는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30년 가까이 지나 56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소설은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화자의 큰집에 모인 가족들이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에 드러나는 제주4.3사건을 둘러싼 파편화된 기억의 흔적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 흔적들 속에서 공적 기억에 의해 은폐됐던 반기억(counter-memory)이 도처에서 출현한다. 작가는 바로 이렇게 출현하는 반기억의 편린들을 조합하여 그때에 관한 단편적인 폭력의 기억들이 스토리를 이루도록 사람들에게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주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가 강요한 공적 기억에 균열을 내고 나아가 그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공적 기억을 만들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순이 삼촌이 왜 자살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막연히 지병인 신경쇠약이 악화된 탓으로 말한다. 아니, 사실은 가족들 대부분은 그 원인에 대해서 비슷한 추측을 내리고 있다. 북촌초등학교 옆 그녀의 땅인 옴팡밭에서 그녀의 가족들과 이웃들이 모두 죽임당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30여 년 후 그곳 옴팡밭에서 그녀도 자신의 생명을 끊었다.
그런데 그 사건을 그녀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 사건은 공적 기억에 따르면 빨갱이를 처형한 사건이다. 하여 그것이 ‘오해’라고, 자신과 가족과 이웃들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그녀의 기억은 금지되었다. 그녀의 무의식은 빨갱이가 되는 대신 기억을 파편화시켜 서사화될 수 없게 했다. 서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언어로 표상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것이 가끔 몸 밖으로 뛰쳐나온다. 가령, 이웃집의 메주콩이 없어진 것으로 그녀가 훔쳤다는 오해를 받은 일이 있었다. 한데 메주콩의 ‘오해’로 인해 그녀에게 옴팡밭에서의 ‘오해’가 소환되는 플래시백flashback 현상이 일어났다. 겨우 그 흔적들을 무의식 깊은 곳에 숨겨두었는데, 이 일로 몸 밖으로 뛰쳐나간 그 흔적들은 이유 모를 공포 속으로 그녀를 휘몰아갔다. 이후 그녀에겐 일종의 대인기피 증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환청을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주검들의 소리다. 그때 죽은 그녀의 아이들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 말이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 그녀는 자살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자살한 것은 옴팡밭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사건을 ‘오해’ 탓이라고 생각하는 순이 삼촌과 공감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공감대는 금지된 기억이다. 금지되었기에 사람들은 그런 공감을 표현할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다. 하여 가족들의 대화는 그 사건에 다가가지 못하고 곳곳에서 부서져버린다.
그녀에 대한 다른 기억들이 불쑥불쑥 끼어들어 온다. 결벽증 같은 이상 행동, 불규칙하게 날뛰는 날카로운 감정 변화 등, 그녀의 평소 모습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폭력적 상황이었다. 그녀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녀는 피해자였지만 가해자였다. 그런 피해-가해의 이분법적 틀을 해체시키는 경험들이 그녀를 둘러싼 또 다른 사실들을 구성함으로써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사건에 사람들은 다가가지 못한다. 단지 미묘한 불편함을 느낄 뿐이다.
화자와 화자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핑계를 대며 고향을 찾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고향은 가장 강렬한 기억의 장소다. 가족들, 친구들, 이웃들, 동물들, 나무들, 돌들 하나하나와 뒤얽힌 기억이 그를 고향과 연계시킴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이가 되게 한다. 도덕 공동체는 그렇게 형성된다. 사람들은 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에 대해, 설사 생각이나 이념이 다르더라도 공감하는 이가 될 수 있다. 그렇게 공감하기에 그이들이 고통을 겪는 일이 벌어질 때 그이들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런데 고향의 상실은 종종 그이에게서 도덕 공동체 감각을 해체시키는 ‘장소적 기억의 파괴’ 증상을 일으키게도 한다. 화자와 그의 아버지는 그런 장소적 기억의 파괴 증상을 변형된 양상으로 드러낸다. 도덕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꺼리는 것이다.
‘고모부’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장소적 기억의 해체 증상을 보여준다. 그는 월남자로 남한에 내려왔다가 서북청년단에 가입했고, 빨갱이들을 색출・처결하기 위해 제주로 들어왔던 사람이다. 화자의 할아버지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이 난폭한 청년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학살한 자이지만 화자의 가족에겐 구원자였다.
그의 난민적 정체성을 시사하는 것은 그의 이중언어다. 그는 고모부가 된 이후 가족 대소사에 깊이 개입하였는데 그럴 땐 제주 말을 능숙히 사용한다. 그의 존재는 그 가족에겐 그 이후에도 계속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의 능숙한 제주 말은 그가 가족과 공감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제주4.3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는 평안도 말을 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제주 사람들을 철저히 타자화한다. 고향인 평안도는 빨갱이에게 폭행당했다는 기억과 분리할 수 없는 장소다. 해서 그는 그곳에 대한 장소적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곳은 그에겐 증오의 공간일 뿐이다. 그런데 그는 제주에서 빨갱이를 향해 증오를 표출할 때 평안도 말을 쓴다. 평안도 말은 그에게서 증오의 언어이고 폭력적 가해의 언어인 것이다. 요컨대 고모부는 폭력의 가해자였다. 그런데 고모와 결혼하고 제주에 눌러살게 된 이후 그는 가족이자 이웃이 되었다. 그러나 4.3사건의 폭력적인 기억이 소환될 때는 또다시 가해자가 된다. 즉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이것은 고모부도 제주4.3사건의 학살의 기억을 서사화하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한편 소설에는 이와 비슷한 이중적 주체에 관한 얘기가 또 있다. 인천상륙작전 앞뒤로 제주의 청년들이 대거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그렇게 국군이 됨으로써 자신들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함이었다. 그들이 열렬한 반공 전사가 된 것은 자신들에게 덧씌워진 오해를 벗기 위함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이북 사람들에게 당했으니 이북 사람들에게 되갚아준다는 복수심이 그들이 용맹스러운 반공의 전사가 된 숨은 동기였다.
이렇게 소설 「순이 삼촌」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쾌하게 나뉘지 않는다. 의도하든 않든 그들은 각자 누군가에게 폭행당했고 또 누군가를 공격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과거에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이에게 복수하지 못했다. 늘 복수는 다른 대상에게로 와전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모부나 해병대에 입대한 제주 청년들의 경우처럼 엉뚱한 제3자를 증오의 대상으로 낙인찍고 그에게 폭력을 퍼붓는다. 즉 폭력의 와전 현상에는 전가된 폭력 현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1948년체제’는 반공 프레임 아래서 모두를 희생자이자 가해자로 만들어 타자를 향해 끊임없이 이념적 폭력을 가하도록 제도화된 체제다. 더욱이 그 폭력은 와전되며, 그 와전된 폭력의 희생자로 낙인찍히는 타자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적’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다.
평화신학
‘적’을 만듦으로써 존재하는 사회, 그 ‘적’을 증오하고 공격함으로써 생명력을 유지하는 사회, 특히 그렇게 만들어진 ‘적’을 늘 ‘빨갱이’와 연결시켜 생각하도록 하는 사회, 그런 사유의 문법이 작동하는 담론의 질서를 이 글에서는 ‘1948년체제’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담론을 한국의 주류 개신교도 갖고 있다.
한국의 주류 개신교는 ‘사탄’의 하수인들로 지목된 ‘이단’을 만들어내곤 했다. 특히 신앙의 위기가 심화될 때는 이단 만들기 현상이 폭증한다. 개신교 신자들 다수는 ‘이단’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화들짝 놀라면서 낙인찍기에 공조한다. 낙인찍은 대상이 실제로 어떤지에 대해 묻지도 않고 먼저 경계하고 배제하며 공격하는 데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1948년체제’에 포획된 대중이 ‘빨갱이’에 과민 반응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과민 반응이 신경증적 분노장애 증상을 일으키면서 화염을 분출시킨 계기적 사건이 1948년 제주에서 벌어졌다. 미국이 그 ‘증오의 정치’의 기획자였다면, 이승만 정권과 개신교는 기획자의 의도를 기획자보다도 더 충실히 수행한 행위자였다. 그리고 이 증오의 수행자들은 ‘1948년체제’라는 담론적 질서 아래서 헤게모니 세력이 될 수 있었다.
서구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데탕트’détente라는 키워드가 크게 유행하였다. 그것은 세계가 적의 절멸을 전제로 하는 냉전체제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이제 세계는 데탕트라는 단어의 뜻인 ‘긴장 완화’의 개념을 넘어서 ‘상호 공존’의 제도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냉전은 이곳을 지배하는 원리다. 절대로 전쟁이 벌어져서는 안 되는, 전쟁이 터지는 순간 동아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가 몇 번이나 사라지고도 남을 만큼 가공할 만한 화력이 집중된 세계의 화약고가 동아시아다. 그리고 한반도는 냉전적 동아시아의 국경이다.
바로 이런 동아시아의 국경인 한반도 남쪽을 지배하는 담론적 틀이 ‘1948년체제’다. 해서 한반도의 탈냉전을 지향하는 ‘평화론’은 한국 사회를 냉전적 폭력으로 뒤덮었던 ‘1948년체제’를 극복하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와 전 지구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1948년체제’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의 하나인 한국 개신교는 평화론이 주목해야 하는 주요 항목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한국 개신교 신앙을 구성하는 데 핵심 요소의 하나인 ‘증오의 신학’을 해체하는 신학적 모색이 절실히 요청된다. 나는 그것을 ‘평화신학’이라고 불렀다.
위에서 본 것처럼 ‘이단’에 집착하는 종교성은 ‘증오의 신학’의 중심고리가 되고 있다. 그런 신앙에 몰두하는 이들은 늘 증오를 퍼부을 대상을 필요로 한다. 「마가복음」 3장 20~30절에서 예루살렘계 율법학자들은 고통당하는 이들을 치유하고 다니는 대중예언자 예수를 ‘바알세불’Beelzeboul에 들린 자라고 낙인찍었다. 바알세불은 원래는 블레셋의 최고신 ‘바알세붑’Baalzebub과 비슷한 발음의 혐오적 표현인데, 그 뜻은 ‘똥파리의 신’이다. 요컨대 예루살렘계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악령 들린 이들을 치유한 것을 가장 혐오적 표현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낙인찍기는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빼앗는다. 그들이 악령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사는 이들이 해방받는 것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 자체에 집착한 탓에 그들은 저 반대자들을 적대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증오’를 그들의 신학의 중심 키워드로 삼은 것이다.
바로 그처럼 한국 개신교는 신앙의 위기가 올 때마다 ‘이단’을 찾아다녔다. 저들을 낙인찍고 공격하는 데 몰두하다 보니 자기를 성찰할 틈을 갖지 못했다. 아니 자기를 성찰하지 않으려 적의 발견 혹은 발명에 집착한 것일 수도 있다.
증오의 신학은 적으로 낙인찍은 대상을 신의 이름으로 응징하라고 부추긴다. 그런 부추김에 동화된 이들은 자신에게 허용된 폭력의 방식을 최대한 활용하여 응징을 수행한다. 때로 허용된 폭력은 잔혹한 학살로 나타났다. 제주4.3사건에서 기독교의 증오의 신학에 부추김받은 전사들인 서북청년단원들이 그랬다.
그리고 그 잔혹한 시간은 끝났다. 하지만 증오의 신학은 증오를 멈추지 않는다. ‘패배한 적’은 죄인이 된다. 하여 평생 속죄하며 살 것을 강요한다. 만약 누군가가 저들을 죄인의 굴레에서 해방하고자 하면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는다. 물론 예외적 해방이 일어나기는 한다. 그들은 과장되게 전향 행위를 수행한 자들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전향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타인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힐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죄인의 낙인을 찍곤 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죄인이 된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하하고 저주한다. 하여 ‘죄인은 말할 수 없다.’ 죄인은 타인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고, 스스로 말할 때조차 타인이 규정한 말로 말해야 한다. 예수 주변에 그 많던 벙어리 악령 들린 이들은 이러한 ‘말할 수 없음’이 병증으로 표출된 자들이다. 즉 실어증은 증오의 신학이 초래한 파괴적 효과의 하나다. 또한 병증은 정신적 장애로 나타나기도 한다. 복음서에서 ‘악령 들림’으로 표현된 이들이 그런 경우다. 물론 그들도 ‘말할 수 없는’ 노예적 주체이기는 마찬가지다.
증오의 신학은, 이렇게 질병에 걸린 이 혹은 악령 들린 이가 세계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공포심을 조장한다. 그들이 ‘노예적 주체’로서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할 수 없는 자든 아니든, 그런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을 부정 타게 하는 자들에 관한 성서 텍스트들은, 예외 없이 약한 존재가 강한 존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 대한 대중의 공포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증오의 신학에 의해 사람들이 포획된 결과일 것이다. 아무튼 이런 신앙에 따르면 증오의 신학에 의해 낙인찍힌 이들은 사람들에 의해 피해를 당한 이들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그들을 가해자로 기억한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병든 이들이 구원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소’라고. 그들은 죄인도 아니고 타인을 부정 타게 하는 이들도 아니다. 심지어는 그런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이 일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즉 그들은 부정 타게 하는 이가 아니라 구원하는 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증오의 신학에 맞선 예언자였다. 그이는 누군가를 죄인으로 낙인찍는 신앙의 메커니즘을 비판했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의 자기 파괴적 양상이 사람들을 위기에 빠뜨린다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이 세계의 구원자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증오의 신학에 대한 예수의 비판이 바로 예수의 평화신학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평화신학을 부르짖을 때도 함정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담론 제도 자체가 함정이다. 그리스도교는 ‘저 위’에 있는 거룩한 신의 소리를 듣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온 종교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신은 저 낮은 곳에 혐오스러운 자의 이름으로 죽어간 이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리고 온갖 죄인의 혐의를 안고 살아 있는 자들은 ‘말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그 소리도 신은 듣지 못한다. 요컨대 신의 소리를 대언하는 자인 성직자는 신이 듣지 못한 것을 들을 수 없고 신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할 수 없다. 해서 성직자들은 제주4.3사건에서 학살되어 암매장된 희생자들의 소리를 대언할 수 없고, 실어증 걸린 생존 희생자들의 소리도 증언하지 못했다. 해서 제주에는 그리스도교가 별로 성장하지 못했다. 특히 가해자였던 개신교는 주로 타지에서 이주한 이들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제주에는 무수히 많은 샤먼이 있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학살된 유골이 발굴되는 곳마다 위령제를 주관한다. 그런데 이들 샤먼들은 저 높은 곳에 있는 지극히 숭고한 신의 소리를 듣는 자가 아니다. 아니, 그이들은 저 땅속 깊은 곳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희생자들의 소리를 듣고자 한다. 반복적으로 울리는 북과 징 소리에 맞춰 기괴한 동작을 반복하던 샤먼이 어느 순간 구천을 떠도는 영혼과 접신하게 되면, 그는 소리로 혹은 몸으로 그 영혼들의 언어를 표현한다. 그리하여 죽은 자는 산 자와 만나고 서로 소통을 시작한다. 순이 삼촌처럼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어떤 사건에 접하면서 그때 거기로 플래시백되어 죽은 자들의 소리를 듣는 자기 파괴적인 만남이 아니라, 양자가 서로 소통하여 폭력에 의해 망각된 기억의 흔적들을 하나씩 꺼내 엮어서 서사를 만들어낸다. 역사학자인 마리안느 허쉬Marianne Hirsch가 규정한 ‘포스트메모리’postmemory가 의례를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 신학이 죽은 자와 산 자 간의 소통이 만들어내는 포스트메모리 의례를 주관하지 못한 것은 땅의 소리를 듣는 것이 의례로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항상 위에서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아래를 향해서는 선포만 하는 자, 그런 성직자의 종교는 죽은 희생자들 혹은 살아 있더라도 죽은 자와 진배없는 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남동은 민중신학자란 ‘한’의 소리를 듣고 증언하는 사제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한’의 소리란 고통에 시달리고 죄 담론에 치여서 자기를 표현할 언어를 상실한 자들이 외치는 소리다. 그것은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이고 동작이 되지 못한 몸짓이다. 해서 한의 사제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자다. 그리고 그 소리를 언어로 재현(representation)하여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자다. 더 나아가 그 소리에서 제주를 넘어 전국 차원의 희생자들, 아니 전 지구적인 희생자들, 아니아니 온 우주적인 희생자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증오의 신학, 그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해체하는 데 사력을 다하는 자다. 평화신학은 이러한 한의 사제들의 증언과 활동, 바로 그것과 함께 전개되는 신학적 담론이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의 바울을 찾아서_02 / 선교을 둘러싼 최초의 논쟁, 그 한 가운데서 - 안티오키아의 바울 (0) | 2023.07.15 |
---|---|
역사의 바울을 찾아서_01 / 역사의 무대에 서다 - 다마스쿠스의 바울 (0) | 2023.04.18 |
민중신학자 안병무, 우리가 그를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 (3) | 2023.03.20 |
새해 길목에서 문뜩 떠올리다 - 안병무의 〈요한복음〉해석에 기대어 ‘오늘의 사릌스가 누구인지’를 묻다 (0) | 2023.03.20 |
한국의 ‘작은 독재자들’ - 정치종교와 문화종교 개념으로 살펴보는 퇴행적 대중의 출현 (0) | 2023.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