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평론] 2023년 여름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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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바울을 찾아서_02
선교을 둘러싼 최초의 논쟁, 그 한 가운데서
안티오키아의 바울
동에서 서로(다마스쿠스에서 안티오키아으로)
지난 호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운동에 대한 박해자로 등장했다가 전향한 뒤 아라비아에서 활동하다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루살렘에서 그의 체류기간은 15일이었다.
방문 목적은 게바(1)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때 이곳의 예수공동체를 사실상 이끌고 있는 주의 형제 야고보(2)도 만났다. 한데 이 구절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리베르티논 회당에 속한 사람들도 두루 만났을 것이다. 헬라어권의 인사가 예루살렘에 왔을 땐 의당 이 회당에 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 여기서 시리아가 길리기아와 나란히 쓰인 것으로 보아, 이 ‘시리아’는, 다마스쿠스 근처의 시리아 남부 내륙지역이 아닌, 소아시아 지역에 연접한 북서시리아일 것이다. 길리기아는 북서시리아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 소아시아 동남해안의 지방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길리기아의 수도 타르수스 출신이다.(21,39) 심지어 그는 이 대도시의 시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마스쿠스와 아라비아에서 예루살렘을 거쳐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가는 그의 긴 여정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인 셈이다. 하지만 바울 자신은 길리기아에 대해 단 한 번 언급했을 뿐이고 타르소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당연히 그 도시의 시민 운운하는 말을 내뱉은 적도 없다. 바울의 친서들을 보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말들이 수두룩하다. 그만큼 그는 저평가된 자신을 변증해야 했다. 한데도 그는 한 번도 타르수스는 물론이고 어느 도시의 시민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그는 대도시들의 시민층에 속할 만큼의 출신성분은 아니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예수가 나사렛에 대해서 별로 애틋한 기억이 없었던 것처럼 바울에게도 타르수스가 그랬는지 모른다. 해서 고향인데도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상상도 가능하다. 바울이 길리기아 지역의 예수 선교사로 활동했기에,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는 그를 ‘타르수스의 바울’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초기 그리스도 운동에서 안티오키아 교회가 워낙 유력한 공동체였으니 ‘다마스쿠스의 바울’보다는 ‘타르수스의 바울’로 더 많이 알려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런데 바울 당대의 안티오키아 교회의 시대로부터 거의 40~50년이나 후대의 그리스도파 문서인 〈사도행전〉은 ‘타르수스의 바울’을 ‘타르수스 출신 바울’로 오독했을 수도 있다.
한편 〈사도행전〉 9,26~31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류한 15일을 다르게 묘사한다. 여기에는 바울 자신의 진술을 보충할 만한 내용도 있고 바울의 진술을 교정할 만한 내용도 있으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울(바울)이 예루살렘에 이르자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울이 제자라는 것을 그들이 믿지 못해서였다. 그런데 바르나바가 사울을 붙들어다가 사도들한테 데리고 갔다. ...... 그리하여 사울이 사도들과 함께 지내면서 예루살렘에 드나들었다. ...... 사울은 그리스 말을 쓰는 유대아 사람들한테 말을 건네기도 하고 논쟁도 했다. 그런데 그들은 사울을 없애려고 손을 썼다. 형제자매들이 이것을 알아차리고는 사울을 데리고 카이사레아로 내려가서 그를 타르수스로 떠나보냈다. (〈사도행전〉 9,26~31)
바울 자신은 예루살렘에 베드로를 만나러 갔고 야고보도 만났지만 다른 지도자들(사도들)을 만난 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위의 인용구절은 그가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애썼다고 한다. 그런데 주목할 대목은 그 뒷 구절들이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그가 동지인지 믿지 못했기에 만나려 하지 않았다.
서기 36년 빌라도가 실각한 직후, 그 치안 공백의 시간에 리베르티논 회당에서 심상치 않은 사태가 일어났다. 이 회당에서 활동하 예수파의 지도자 스테판을 살해한 사건이다. 그때가 서기 37년쯤이다. 그로부터 7년 뒤인 서기 44년, 헤롯의 손자인 아그립바 왕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참수했다. 한데 그해 아그립바도 의문사했다. 40년대 말쯤에는 테러리즘이 횡횡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각 처에서 무장저항이 일어났다. 그리고 66년에는 대대적인 반로마 항쟁이 발발했다. 서기 1세기의 처음 30여년은 권력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통치를 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이후 40여년은 전쟁으로 치닫는 혼란의 시기였다. 마지막 30여년은 원리주의가 이스라엘 사회의 지배적인 기조가 되었다. 그렇게 다음 세기가 되었고, 130년대 중반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반로마 항쟁이 발생했다. 로마가 유대아 사회를 회복불능의 상태로 절단내 버릴 만큼 큰 반란이었다.
이렇게 서기 37년 스테판의 처형을 계기로 확산되기 시작한 유대아 원리주의는 다음 세기 전반기까지 계속되었다. 타종족에 대해 배타주의적이고 유대아 중심주의적인 야훼주의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비단 강성 원리주의자들만의 현상이 아니다. 사회 전반이 그런 성향을 띠었다. 심지어 원리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어 공격을 당했던 예루살렘의 예수파들도 그런 유대아 중심주의 성향에 물들고 있었다.
아무튼 스테판이 죽고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죽었다. 뿐만 아니라 지중해 곳곳에서 예수파를 공격하는 유대아 원리주의가 확산되고 있던 상황이다. 많은 이들이 죽었고 또 많은 이들이 변절했다. 그러니 다마스쿠스에서 예수파를 공격했다던 인물이 이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는 말에 순진하게 박수 치기만 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때 바르나바가 바울의 보증인이 되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인 야고보에 필적하는, 안티오키아 교회 지도자 바르나바가 보증했으니, 이제 의심받을 일은 없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변절자를 용서할 수 없었던 유대아 원리주의자들이 바울을 주목했다. 그리스도파 인사들의 입장에서 그대로 놓아두었다간 스테판 사건 같은 게 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해서 바르나바는 그를 타르수스로 보냈다.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파
바르나바는 사울을 ...... 찾아서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이 꼬박 1년을 교회에 함께 모여 큰 무리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도행전〉 11,25~26)
얼마 후 바르나바는 타르수스에서 사역하고 있는 바울을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왜 그를 불러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바울이 타르소스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을 보건대, 그곳에서 그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다고 성과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사역이 성공적이든 아니든, 바르나바가 그를 데리고 갈 즈음 타르소스의 그리스도파 공동체 내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르나바가 직접 그리로 갈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최고 지도자가 직접 수습해야 할 만큼 중대한 위기 상황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바울이 안티오키아로 합류하고 1년간 체류하고 있을 때 이 공동체는 제법 큰 성과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위의 인용구절에서 보듯 공동체 지도자들이 많은 무리를 가르쳤다고 하고 처음으로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χριστος)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옮긴 말이다. ‘신에게 선별된 자’를 뜻하는 이 말은 종종 체제를 전복시키는 혁명가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서기 66년 반로마 항쟁 지도자였던 시몬 바르 기오라(Simon bar Giora)와 135년의 시몬 바르 코흐바(Simon Bar Kokhba)가 그랬고, 예수도 그랬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묘사된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의 늬앙스에는, 그들이 혁명을 꿈꾸었든 아니든, 그 사회의 보통 사람들이 그들을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한데 ‘메시아’가 ‘그리스도’로 번역될 때 간과할 수 없는 의미상의 차이가 발생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이라는 영토성을 벗어나지 않는 용어다. 원리주의 성향이 강화되고 있던 당시 유대아에서는 더욱 그랬다. 반면 ‘그리스도’는 영토성의 확장 혹은 해체를 의미했다. 이스라엘만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혹은 이스라엘의 특권적 위상 자체가 해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 공동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을 조금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안티오키아에 예수라는 이가 전해진 것은 필시 예루살렘의 리베르티논 회당에서 일어난 스테판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 이미 말했지만,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원리주의적인 유대아주의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로마황제가 파송한 최고행정관 빌라도와 그의 가장 강력한 동지였던 대제사장 가야바가 동반 실각한 직후 리베르티논 회당에서 강경 유대아주의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라고 주장하던 일단의 사람들을 향해 공격을 가한 사건이다. 이때 예수파 지도자 스테판이 그들에 의해 공개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이곳의 예수파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살아남은 예수파 인사들은 서둘러 예루살렘을 빠져나갔다.
스테판 일을 계기로 생겨난 핍박 때문에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이제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퍼져나갔다. ......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키프로스와 키레네 출신이었다. 그들은 안티오키아에 와서 그리스 말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을 좋은 소식으로 전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1,19~21)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안티오키아에서 복음을 전한 키프로스 출신의 인사다. 그는 누굴까. 이때 먼저 떠오르는 이가 바르나바다. 그는 유대아계 키프로스인이었다. 그리고 안티오키아 교회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요컨대 안티오키아 교회는 예루살렘의 리베르티논 회당에서 발생한 테러사건과 연관이 있다. 바르나바는 그때 탈출한 이들 중 하나일 수도 있고 그들이 키프로스에서 활동할 때 예수 추종자가 된 사람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개척자의 하나였다. 아래 인용한 〈갈라디아서〉의 텍스트는 이 교회가 어떤 신앙적 성향을 갖고 있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14년이 지나서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디도도 같이 데리고 갔습니다. ...... 나는 그들에게 내가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선포하는 복음을 내놓고 설명했습니다. ...... 나와 함께한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었지만, 할례받도록 강요당하지 않았습니다. ...... 그들이 한때 어떤 사람이었든지 그것은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곧 기둥같이 여겨지는 사람들......이 나와 바르나바에게 사귐의 표로 오른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그들은 할레받은 사람들에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부탁한 단 한 가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도 힘써 해 오던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0)
아마도 안티오키아 교회의 성공은 당시로선 아주 예외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해서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 공동체의 위상은 예수운동 진영에서 급부상했다. 그 무렵 바르나바가 바울과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위의 인용문에서 시사되듯, 그것은 비이스라엘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예루살렘의 예수파 공동체와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데 바르나바가 함께 데리고 간 두 사람이 흥미롭다. 하나(바울)는 이스라엘 혈통이지만 강성 유대아주의자로서 예수파를 공격하는 데 가담했던 전력의 그리스도파 활동가이고 다른 하나(디도)는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파 활동가다. 예루살렘의 예수파에게 한 사람은 강성 유대아주의의 위협을 연상시키는 인물이고 다른 사람은 반유대아주의적 예수운동이 위험스럽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그것은 바르나바가 유대아 중심주의가 강했던 예루살렘에서, 피해자였음에도 가해의 논리에 동화되고 있던 이곳 예수파의 모순을 드러내며 정면돌파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대단한 협상가였다.
이 협상에서 바르나바는 승리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와 베드로, 요한 등은 안티오키아 교회의 이방인 선교를 인정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정당할 뿐 아니라 그렇게 복음을 수용한 이들에게 할례를 강요할 필요도 없다는 것도 동의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추정되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상황을 유념한다면,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헬라계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비이스라엘 출신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중에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들도 적잖았다. 그런 활동이 이곳에서 많은 이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한편 그렇게 좋은 평판을 얻은 덕에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도 이 공동체에 꽤 많이 가입한 듯하다. 해서 예루살렘의 예수파 지도자들은 바르나바와 협상하면서 이런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지원을 부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토코이’(πτωχωι)는 단지 물질적 궁핍이라는 의미로 한정되기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억압과 연동되어 궁핍의 상태에 놓인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달라’는 구절은 그리스도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지원해달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 부탁을 예루살렘의 교회가 특별히 바르나바에게 하고 있다는 것은, 안티오키아 교회가 그런 후원을 해줄 만큼의 사회경제적 역량이 있는 공동체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회적 호칭이 생겼다는 것은 그런 의미도 함축한다.
안티오키아 회식 사건
하지만 이런 협상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예수파는 여전히 이방인 선교에 대해 반감이 적지 않았다. 그런 반감이 갈등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안티오키아 회식 사건’이다. 이 사건의 전모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요약한다.
게바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내가 얼굴을 마주해서 그에게 맞섰습니다. 그가 비난받을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한테서 몇몇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게바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자 뒤로 물러나서 따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할례받은 쪽 사람들을 두려워해서였습니다.
나머지 유대아 사람들도 게바와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바르나바마저도 그들의 위선에 딸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걸어가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유대아 사람이면서도 다른 민족 사람처럼 살고 유대아 사람답게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다른 민족 사람들을 유대아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십니까?” (〈갈라디아서〉 2,11~14)
무대는 안티오키아 교회다. 특기할 것은 여기에 게바, 곧 베드로가 있다는 점이다. 앞의 예루살렘에서의 담판 때에는 바르나바와 바울과 디도가 협상차 온 안티오키아 교회의 대표단이었고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 등과 더불어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였다. 한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일어난 이 사건에서 베드로는 안티오키아에서 체류하는 이로 나온다. 아마도 안티오키아 교회의 성공에 고무되어 선교의 열정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해서 예루살렘 교회도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선교사들 중 가장 거물급 인사인 베드로가 갈 법한 곳은 가장 중요한 교회인 안티오키아 교회였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파송한 선교사의 주된 역할은 ‘오염된 가르침’을 교정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와 함께 활동했던 제자는 그런 권위를 가진 최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안티오키아 교회의 관점에서 이것은 부적절한 개입이었다. 현지의 언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이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점에서 〈빌립보서〉 1,12는 의미심장하다. 바울의 말을 최대한 직역하면 이렇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복음의 진화에 한몫했다는 점을 당신들이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이다. 여기서 ‘복음의 진화’라고 직역한 헬라어 표현은 ‘프로코테 투 유앙겔리우’(προκοπη του ευαγγελιου)다. 여기서 ‘진보’라고 옮긴 ‘프로코테’는 이 구절 외에 〈빌립보서〉 1,25에도 나오는데,(3) 여기서 ‘믿음이 더 발전하게 된다’는 의미로 쓰였다. 요컨대 ‘프로코테’는 한 단계 더 진전된 상태를 함축하는 단어다. 그러니까 바울은 원래의 복음이 자신의 경험으로 통해 새로운 전기를 이룩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의 선교가 원래의 것을 그대로 보존하여 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환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표현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최초의 선교 논쟁을 보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와 그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베드로는 복음의 오염을 막는 선교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면, 안티오키아 교회와 바르나바, 그리고 바울은 복음은 현장의 상황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안티오키아에서 활동하면서 불가피하게 자신의 원칙을 고수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특히 ‘식사’가 그랬다. 바울과 거의 동시대의 이스라엘계 로마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에서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을 ‘필란쓰로피아’(φιλανθρωπια)라고 표현했고, 유대인끼리 식사하는 것에 코이노니아(κοινωνια)라는 용어를 썼다. 요세푸스는 팔레스티나에서 유대아주의를 체현하며 성장한 자였고 훗날 그런 완고한 유대아주의를 부드러운 유대아주의로 변증하는 저작은 남긴 이였다. 여기서 두 식사를 다르게 표현한 것은 유대아인에게 이방인과의 식사가 결코 가벼운 선택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사실 이방인과 식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가령, 흔히 알려져 있듯이, 돼지고기를 꺼려하는 유대아적 식문화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먹는 헬라적 식문화를 경멸했다. 그러나 선교사는 대화와 소통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만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자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미 예수는 죄인들과 먹고 마셔댔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식문화에 스며들며 함께 식사자리를 나누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의 사람들이 도착하자 베드로는 식사 자리를 떠나려 했다. 심지어는 바르나바도 그랬다. 아마도 그들은, 두 교회의 대표격 존재이니, 예루살렘 교회와 불화를 초래할 행동을 자제하려 한 것이었겠다. 하지만 그것이 안티오키아의 어떤 이들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수 있다. 특히 자존성이 높지 않은 이들은 지도자들의 이런 행동에 심한 모욕감을 가졌을 수 있다. 교회의 지도자라기보다는 현장 활동가로서 바닥 민심에 더 민감한 활동가 바울은 이런 반응을 즉각 대변했다. 그는 최고 지도자들인 두 사람을 신랄하게 논박했다. 위선자들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적지 않은 스캔들이 되었던 듯하다. 안티오키아 교회의 지도부 인사들은 바울의 행동을 섣부른 객기로 보았음 직하다. 하지만 바닥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일부는 바울에 깊이 공감했을 것이다. 어쩌면 교회 도처에서 이 논쟁은 계속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 중심부 인사들로부터 문제적 인물로 낙인찍히게 되었을 것 같다. 그것은 바울로 하여금 더 이상 안티오키아에 남아 있을 수 없게 했다. 이제 그는 안티오키아의 영향권 밖으로 떠나간다. 이어지는 연재들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이 과정은 바울스러운 예수운동의 탄생을 향하는 여정이 된다. □
[후주]
(1) 〈마태복음〉 16,17에 의하면 그는 ‘시몬 바르 요나’다. 곧 ‘시몬의 아들 요나’다. 아마도 다른 언어권 사회로의 전승 과정에서 그의 부친 요나는 요한으로 오독된 듯하다. 하여 〈요한복음〉은 수차례나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표기한다.(1,42; 21,15・16・17) 아람어식 이름인 ‘게바’(כֵּיפָא. 헬라어성서는 이것을 Κηφας로 음역했다)는 그의 별명인 듯하다. 바울은 그를 9번이나 ‘게바’라고 부르고 있는 반면, 단 2번만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인 베드로(Πετρος)라고 표기한다. 여기서 게바는 ‘거친 돌’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베드로라는 그리스 단어의 어원은 ‘큰바위’의 함의를 갖는다. 그러니까 원래 그의 별명이 함축하는 바는 필경 그의 ‘거친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리스식으로 의역된 베드로는 ‘반석’ 같이 든든한 돌 같은 뉘앙스로 전환되었다. 한편 바울은 ‘게바’와 ‘베드로’를 병기하고 있지만 아람식 이름인 게바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은, 바울 당대에 베드로는 아직 헬레니즘권 사회에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명성만 널리 알려진, 그러나 헬레니즘 사회에서는 낯선 이미지의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2) ‘야고보’는 이스라엘식 이름인 ‘야곱’의 헬라식 표기다. 야고보는 제2성서에는 5명이 나오는데, 모두 예수와 관련된 인물들이다. 우선 제자단에 두 명의 야고보가 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그들이다. 또 가룟 유다와 이름이 같은 또 다른 유다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를 제자 명단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한편 가족에도 두 명의 야고보가 있다. 한 사람은 주의 형제 야고보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의 목격자인 마리아의 아들 야고보다. 어쩌면 이 두 야고보는 동일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만난 야고보는 이중 주의 형제 야고보다.
(3) 이 두 구절 외에는 이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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