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가톨릭평론] (2023 가을)에 실린 연재글 '역사의 바울을 찾아서'의 세 번째 글이다. 오래 전에 쓴 '리부팅 바울'을 보충하기 위해 쓰고 있는 것인데, 한백교회가 60살이 된 내게 마련해준 기금으로 예수와 바울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데 이 연재는 바울 편의 원고다. 이것을 다듬어서 최종 원고로 마련할 계획이다. 감사하게도 [가톨릭평론] 편집인이 내년에도 1년간 연재를 더 해 줄 수 있다고 허락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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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바울을 찾아서_03
바르예수를 넘어 바울이 되다
안티오키아를 넘어서
그 즈음에 예루살렘에서 예언자들이 안티오키아로 내려왔다. 그들 가운데 하나, 곧 이름이 하가보인 사람이 일어나서 성령님을 힘입어 앞일을 알려주었다. 온 제국에 큰 기근이 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 일은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일어났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자기 형편대로, 유대아에 자리 잡고 사는 형제 자매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또 그들은 그것을 실행했는데, 바르나바와 사울의 손을 통해서 그것을 장로들한테 보냈다. (〈사도행전〉 11,27~30)
이 인용문에 따르면 바르나바가 이끄는 협상단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대기근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안티오키아 교회의 기부금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제국 전체를 뒤덮은 ‘대기근’ 때문에 그 행보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그때는 클라우디우스 시대였다. 그는 서기 41~54년 사이에 로마의 황제였다. 한데 그가 재임하던 시절 제국 전체를 강타한 대기근의 기록은 전혀 없다. 반면 국지적 기근사태를 언급한 기록들은 여러 차례 나오는데, 그중 서기 45년 팔레스티나를 강타한 기근 사태에 관한 기록이 있다.(1) 아마도 이 본문에 언급된 기근은 이 국지적 기근 사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제국 전체를 뒤덮은 대기근이었다면 안티오키아 교회 주변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터인데, 예루살렘 교회만을 위한 기부금을 보낸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 여정은, 앞장에서 다루었던 〈갈라디아서〉 2,1~10의 바르나바가 이끄는 대표단이 예루살렘에서 야고보 등과 담판을 벌이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것과 같은 행보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행보인가.
앞장에서 나는 〈갈라디아서〉에 의지하고 〈사도행전〉을 보조 자료로 참조하면서 이 시기 바울의 활동기를 소개하였다. 이를 이 장의 내용과 연결되게끔 간단히 재정리하면 이렇다. 바울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운동을 공격하는 유대아 원리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예수운동으로 전향했다. 그리고 이 도시를 거점으로 예수운동을 폈다. 그러다 그는 문뜩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사도들을 만나고자 함이었다. 거기서 만난 바르나바를 통해 겨우 그는 사도들과 대면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전향자라는 낙인이 이번엔 유대아 원리주의자들의 표적으로 작용했다. 해서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갔고 거기에서 이 교회의 성공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 성공은 예루살렘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 사이의 긴장을 초래했다. 이에 바르나바가 이끄는 협상단이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바울은 그 협상단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이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그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오 파송되었고, 여기서 저 유명한 안티오키아 회식사건이 벌어졌다.
한편 〈사도행전〉 11,26~30을 보면 바울이 안티오키아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펴고 있을 즈음 예루살렘에서 대기근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해졌다. 이에 교회 지도자들은 급히 기금을 마련하여 바르나바와 바울로 하여금 전달하게 했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의 묘사는 좀 모순적이다. 방문 목적인 호혜적인 지원에 있는데, 왜 바울을 방문단에 포함시켰을까. 바울은 한때 그리스도파를 공격했다는 이력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에서 껄끄러운 인물이다. 또한 전향자라는 낙인은 이곳의 유대아 원리주의자들의 살기어린 눈길의 표적이 될 만한 인물이다. 이 방문 기록 바로 다음 장인 〈사도행전〉 12장은 교회의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인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당국에 처형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럴 만큼 살벌한 상황에서 바울이 이 방문에 어울릴까.
해서 이런 난관을 해명하는 하나의 방책은 이 두 텍스트의 예루살렘 방문 기록이 동일한 방문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 교회가 비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예루살렘 측이 받아들이게 하고자 바울과 디도를 대동해서 갔다. 앞장에서 말했듯이 유대주이적 극렬 반대파로서 예수운동에 적대활동을 펴던 이가 예수운동가로 전향한 사람과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계 신앙운동으로 전향한 사람, 상반된 두 사람을 대동해 감으로써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안티오키아 교회의 성과를 존중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존중하게 되었을까. 뭔가 중요한 다른 한 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만약 이때 바르나바가 기근으로 시달리는 교회 공동체를 위한 기금을 전달했다면, 이 협상은 바르나바에게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하여 나는 이 두 텍스트의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을 다르게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텍스트의 묘사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사도행전〉에선 기근에 대한 안티오키아 교회의 후원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갈라디아서〉는 두 교회 간의 논쟁에 초점이 있다. 물론 여기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달라는 예루살렘 측의 당부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후원의 정황이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앞장에서 언급했듯이 이것도 모든 ‘가난한 이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탄압 국면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 대한 후원이라는 점에서 두 문서의 관점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협상이 함축하는 바를 좀 더 살펴보자. 당시 각 지역에 형성된 이스라엘계 공동체들 내부에서 원리주의적 유대아 중심주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특히 예루살렘이 가장 극심했다. 바울이 예수운동가들을 탄압했던 것은 바로 그런 열풍의 한가운데 그가 활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이 등장한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다마스쿠스였다. 그곳에서도 원리주이적 유대아주의가 활개쳤던 것이다. 아무튼 이런 극단적 믿음은 혈통주의적 배타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론 그것이 이방인의 완전한 배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차등화를 정당화하는 경계의 벽을 최대한 높게 쌓음으로써 그 경계를 월장하는 것을 어렵게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대개의 배타주의적 극단주의가 그렇듯이, 그런 주장의 속살에는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현실을 ‘증오의 정치’로 풀어보려는 심리적 방어기재가 하나의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한데 이런 현상은 그 반대편의 신앙을 한층 강화시키기도 했다. 즉 ‘탈예루살렘적 야훼주의’를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들도 있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도시의 그리스도파 내의 그런 극단주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탈예루살렘 파였지만, 또 다른 방식의 증오의 정치를 추구했다. 그뿐이 아니다. 무수한 분파들이 제국 곳곳의 이스라엘계 회당에서 서로 갈등을 벌이고 있다. 예수운동의 분파화도 그런 갈등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유대아 중심주의적 원리주의가 가장 강력했던 예루살렘에서 이른바 사도계 예수파 그룹들은, 극단주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유대아 중심적 편향이 있었다. 반면 비팔레스티나 지역에서 가장 성공한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파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방인에 대한 포용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이방인 선교가 불편했다. 해서 두 교회 간에 깊은 갈등 상황이 노정되었다. 바르나바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담판에 성공을 거둔다.
물론 이것으로 두 교회 간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앞장에서 잠깐 언급했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벌어진 이른바 ‘회식사건’은 그 갈등의 재점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번엔 안티오키아 측에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바르나바 파의 일원인 바울이 예루살렘 측의 베드로뿐 아니라 바르나바까지도 비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누구에게 유리했는지에만 주목할 일은 아니다. 바울의 문제제기는 안티오키아 교회 신학의 발전을 의미했다. 특히 바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안티오키아를 넘어서 한층 예리한 신앙운동으로 나가갔다.
한데 바울의 바르나바 탄핵이 바로 독자노선으로 가는 바울의 행보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바르나바의 수행자였고 그런 위상으로 바르나바가 이끄는 선교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키프로스 선교
바르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섬김의 손길을 전달하는 임무를 끝내고 돌아왔다. ...... 성령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해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불러서 맡긴 일을 하게 하여라!” ...... 그렇게 하여 바르나바와 사울이 ...... 키프로스로 갔다. (〈사도행전〉 12,25~13,4)
바르나바가 이끄는 선교팀이 꾸려졌고, 바울도 그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제 좀더 확대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이방선교 여정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아래 [표] 참조) 위에서 인용한 본문은 이 세 번에 걸친 선교 활동의 도입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도입부 단락은 13,4~12다. 그 내용은 키프로스 선교에 관한 것이다. 이 단락 이후 바울은 바르나바의 수행자가 아니라 대등한 혹은 주도적인 활동가로 선교 활동을 본격 개시한다. 즉 바울이 바르나바의 영향권 아래 있다가 그 단락 이후의 행보부터는 대등한 혹은 독립적인 선교사역자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도입부는 독립선교사로서의 바울이 어떻게 바르나바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 그 알리바이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여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바울 행전은 이 도입부 이후부터 본격화된다. 한데 그 묘사가 사실적이라보다는 상징적이다. 아래에서는 이 상징적 서술 속에 함축된 역사적 함의를 읽어보려 한다.
독립선교사 바울의 탄생기
바르나바 선교팀은 키프로스로 들어갔다. 바르나바의 고향이다.(〈갈라디아서〉 4,36) 그것은 바르나바적 신앙의 본거지로 바울이 들어갔다는 뜻이 아닐까.
그들이 당도한 곳은 로마황제가 파송한 최고행정관 관저가 있는 남부 키프로스의 핵심도시인 파포스(Paphos)였다. 주목할 것은 이 최고행정관의 이름이 ‘바울’(Sergius Paulus)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로마의 작명법에 의하면, 세르기오는 이름이고 바울은 그가 속한 씨족명이다. 이렇게 어떤 이를 부를 때 ‘이름 + 씨족명’으로 부르는 것은 그가 귀족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만약 그가 귀족출신이라면 씨족명 뒤에 가문명이 덧붙여져 있다.
한편 이곳에는 ‘바르예수’(Βαριησους. 바르이예수스)라는 이도 등장한다. 이 이름은 히브리어 ‘바르예수’(bar-Jesu)를 헬라식으로 음역하면 쓴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인물에 대해 조금 더 보자. 〈사도행전〉은 바르예수를 묘사하기를, “마술사요 거짓예언자로 유대아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서 ‘마술사’는 헬라어 ‘마고스’(μαγος)를 옮긴 것이다. 〈마태복음〉 2,2에 나오는 동녘에서 별을 따라왔다는 온 ‘박사’와 같은 단어다. 이 본문에서 보듯 ‘마고스’는 일종의 점성가로, 그들 중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사회에서 일종의 학자이자 예지자 같은 위상을 지닌 이들이 있었다. 그가 세르기오 바울과 ‘함께’(συν) 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이 키프로스 최고행정관의 측근 인사였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렇다면 필시 바르예수는 고위층의 마고스였겠다.
세르기오 바울은 실존인물일까. 문서상 키프로스의 최고행정관에 이런 이름의 인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한데 40년대 후반 ‘세르기오’라는 이름이 로마시의 테베베강의 관리직을 수행한 일물 중에 있다. 키프로스 선교가 실제 독립선교사로 바울의 초기 시대에 있었다고 본다면 두 세르기오는, 좀 빈약한 추론이지만, 동일인일 할 수도 있다. ‘바울’(라틴어로 Paulus)이라는 씨족이 존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키프로스의 최고행정관 중에 파울루스라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의 재임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1세기 중반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시 시기가 바울과 겹칠 수 있다. 아무튼 확실하지는 않지만 세르기오 혹은 바울이라는 키프로스의 최고행정관이 실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근거없는 추정은 아니다. 하지만 그를 바르나바와 바울이 만났다는 것은 조금 무리한 추정이다. 바르나바가 그런 정도의 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울 영웅전은 바울이 세르기오 혹은 바울을 만났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인물들이 실존인물이고 이 사건이 사실이었느냐의 여부보다, 바울과 바르나바가 키프로스 선교에서 마주친 두 인물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바울과 예수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텍스트가 실존인물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그 구성상 다분히 작위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해서 그 작위적인 구성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를 추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 섬에는 ‘바울’이라는 고위직 로마 관료를 보좌하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 섬에, 훗날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되는 ‘사울’이 들어갔다. 그 개명 시기는 키프로스 선교 이후다. 즉 이 섬에서의 선교 이후 사울은 바울이 되었다. 한데 키프로스에서 그가 선교하고자 하는 대상이 바울이고 그의 방해꾼이 바르예수다. 예수의 아들이 그가 바울이 되는 걸 방해했다. 여기서 독자들은 ‘바울’이라는 자신들이 추앙해마지 않는 인물이 키프로스 이후 출현하였는데, 그의 출현을 막아서는 어떤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예수의 아들’이라는 자였다. 여기서 독자들은 이 ‘예수의 아들’로 표상된 존재를 그리스도의 방해꾼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세르기오 바울은 ‘총명한’(συνετω. 쉬네토)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바르나바 일행을 불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경청했다. 문제는 방해꾼인, ‘바르예수’다. ‘예수’를 전하려 하는 사울을 방해하는 자는 ‘예수’와 연관된 이름을 가진 자다. 이를 하나의 상징적 명칭으로 이해한다면, ‘바르예수’라는 이름은 유대아 중심주의적 예수를 연상시킨다.
바울이 화가 나서 그를 논박했고 저주를 하자, 그에게 안개(αχλυς. 아클뤼스)와 어둠(σκοτος. 스코토스)이 내리깔렸다. 그리하여 세르기오 바울은 주님의 가르침에 경외심(εκπλησσομενος. 에크플레쏘메노스)을 갖게 되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 사건 이후 이방인 선교는 본격화되었다. 그것은 이 단락 이후부터 활발히 전개되는 바울 행전을 통해 구현된다. 한데 그것만이 아니다. 〈사도행전〉은 이 단락 이후부터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함께 이야기한다. 13,1~12까지는 ‘바르나바와 사울’이라고 표기했는데, 이 단락 이후부터는 슬쩍 ‘바울과 바르나바’로 바뀌어 있다. 사울 대신에 바울이 사용되었고, 바르나바 뒤에 언급되던 바울이 먼저 언급되기 시작했다. 요컨대 이제부터 독립적 주체로서 바울의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된다는 것이고, 또한 바르나바의 영향권으로부터도 독립된 행보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자. 사울이 바울이 되는 분기점에 세르기오 바울이 하느님에게 경외심을 갖게 되는 사건이 있다. 이때 바울, 아니 사울이 극복해야 하는 것은 바르예수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대아 중심주의적 예수론을 극복함으로써 세르기오 바울이 하느님에게 동화되었다는 것, 그럼으로써 사울은 바울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세르기오 바울과 그리스도파 선교사 바울이 겹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해석이 좀 과하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사도행전〉이 또 한 명의 걸출한 선교사인 베드로를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어떨까.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세 명의 선교사(베드로, 바울, 필립)의 행전으로 묘사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베드로편’에 속하는 8장을 보면 베드로의 이방 선교의 출발점은 사마리아 선교다. 사실 〈사도행전〉은 이 지역 선교를 먼저 한 이가 필립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진정한 선교는 베드로를 통해서 전개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한데 흥미롭게도 여기서 베드로의 방해자는 ‘시몬’이라는 점술가다. 사람들은 ‘시몬’이 베드로의 본명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여기서 시몬은 이스라엘식 이름이고, 베드로는 헬라식 이름이다. 그렇다면 독자는 여기서 점술가 시몬과 베드로라는 시몬이 겹쳐지고 있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주역의 하나인 베드로가 극복해야 하는 존재가 자신의 히브리식 이름을 한 시몬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베드로는 점술가 시몬을 극복함으로써 땅끝까지 이르는 선교의 주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필립은 원래 리베르티논 회당의 예수파였으니 그런 과정이 필요없다. 하지만 유대주의에 세뇌된 경력의 바울과 베드로는 땅끝까지 전파되는 복음의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유대주의적 예수를 극복하는 일이 필요했다. 〈사도행전〉은 바로 그런 이방지역 선교사로서 거듭나는 과정을 우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동역자 바울과 바르나바
그러나 바울과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서 계속지냈다. ...... 며칠이 지나서 바르나바한데 바울이 말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널리 알렸던 모든 도시마다 되돌아가서, 형제자매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살펴봅시다.” ...... 날카롭게 다툰 끝에 그들은 결국 서로 따로 갈라서게 되었다. 바르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키프로스로 갔다. 한편 바울은 실라는 선택하여 데리고 떠났다. 바울은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을 두루 다니며 교회들을 더 굳건하게 했다. (〈사도행전〉 15,35~41)
13장은 바울이 바르나바와 대등한 사역자가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이제 바울은 바르나바의 수행자가 아니라 독자적인 사역자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두 인물은 행보를 함께 했다. 한데 위에서 인용한 15장에서 그들은 동역자라고 해도 행보까지 함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바울 자신의 문서인 〈갈라디아서〉 2장의 안티오키아 회식사건에 의하면 바울은 바르나바와 입장이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울은 바르나바와 함께 선교여정에 올랐다. 그것은 바울이 아직 경륜이 부족할 뿐 아니라 이 선교여정의 주요 행로인 아나톨리아(티르키아 지역)에서 바르나바의 신망이 높았기 때문일 수 있다. 한데 둘이 헤어지면, 바울은 더 이상 바르나바의 영향권 아래 있지 않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바울의 고유한 사역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바로 바르나바와 다른 선교여정을 떠나게 되었다는 위의 본문이 그 출발점이다.
본문에 의하면 비겁한 동역자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이었다. 이 비겁한 동역자는 ‘마가’(Μαρκος. 마르코스)다. 이 사람도, 베드로처럼, 원래 이름이 히브리식인 ‘요한’이었다는 점에서(2) 헬라계 그리스도파가 아니라 이스라엘계 예수파일 가능성이 있다. 〈사도행전〉과 비슷한 시대의 문서인 〈골로새서〉 4,10에 의하면 그는 바르나바의 조카다. 해서 바르나바는 그의 흠결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를 수행자로 데리고 다녔다는 얘기다.
〈사도행전〉은 그 둘이 각기 다른 길로 갔다는 것이 노선상의 차이라고 보지 않는다. 실제로 ‘마가’는, 바울 자신의 문서에서도, 바울의 동역자의 한 사람으로 나온다.(〈빌레몬서〉 1,24) 또 바르나바도 같은 시기에 바울의 중요한 동역자였다. 〈고린도전서〉 9,5~6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도들과 주님의 형제들과 게바가 하듯이 믿는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간 없단 말입니까. 오직 나하고 바르나바 한테만 일하지 않을 권리가 없는 겁니까?” 이것은 바울이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베드로와는 노선상의 차이가 있어서 함께 하지는 않았음을 전제한다. 반면 바르나바는 계속 바울의 동역자였음이 시사된다. 물론 〈사도행전〉 저자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그 갈라섬의 의미는 하위 동역자에서 대등한 동역자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정리하면 마가는 바울과 바르나바의 선교팀이 나뉘게 되는 이유가 되지만, 그것은 두 인물의 노선상의 차이를 드러낸다기보다는, 바울이 바르나바로부터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라는 키워드는 바울과 바르나바의 차이를 드러내는 요소가 아니라 베드로와의 노선적 차이를 드러낸다. 바로 그것이 바울과 바르나바의 미묘한 차이를 시사하기도 한다. ‘마가라고 하는 요한’은 그 본명이 히브리식인 데서 볼 수 있듯이 예루살렘과의 연결고리가 남아 있다. 바르나바는 그런 마가를 외면하지 않는다. 반면 바울은 마가를 버린다. 그것은 예루살렘과의 완전한 독립을 시사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지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한편 위의 〈고린도전서〉 9,6에서 바울과 바르나바가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노동하며 사역하는 일을 감내해야 했다는 말에 주목해보자. 그들은 힘겹게 노동해야 했다. 그것은 그들이 활동한 시리아-팔레스티나 사람들의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후원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스도파가 잘 안착했던 안티오키아와 다른 환경에서 그들이 사역을 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그들의 사역환경을 열악하게 했던 것일까.
앞 장에서 살펴본 안티오키아 회식 사건은 하나의 실마리다. 그리스도파가 튼튼한 기반을 형성하고 있던 안티오키아에서조차 할례를 강조하고 이방인에 대해 배타적인 기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휘둘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방인에 대한 반대기류가 공동체 전반을 휩싸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인에게 차별이 없는 복음을 설파하는 바울과 바르나바는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겠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왜’ 그런 기류가 강하게 흘렀는지를 물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 그 물음에 바로 다가갈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텍스트는 현존하는 바울 친서 중 가장 먼저 저작된 〈빌립보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강성 유대아 중심주의의 흔적이 거의 접할 수 없다. 이 도시에는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
[후주]
(1) 서기 4세기 그리스도교계 저술가였던 유세비우스는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제국 전체를 휩쓴 대기근(universal famine)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로마사에 관한 기념비적 저작들을 남긴 2세기 초의 타키투스(Tacitus)나 3세기 초의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하에서 제국을 휩쓴 대기근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못했다. 반면 그들은 국지적인 기근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데, 41~42년 로마, 42년 이집트, 45년 팔레스티나, 50년 그리스, 52년 로마 등을 덮친 기근 사태 등이 그것들이다. 로마에서 발생한 기근 사태를 두 번이나 언급한 것을 보면 그들이 침묵하고 있는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기근 현상들이 더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실제로 1세기 말 유대아계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44~46년 사이에 팔레스티나에서 두 번의 기근이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
(2) 해서 〈사도행전〉은 마가가 등장하는 4번 중 3번에서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라는 표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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