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내 글이 발견되었다. 이 글을 쓴 적이 있다는 걸 기억나긴 하지만, 내용이 가물가물했다. 근데 내 글을 모아둔 외장하드엔 이 글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글이 게재되었던 [창비주간논평] 146(2019 03 13)을 찾아서 다시 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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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운동의 기억과 극우의 실패
탑골공원 뒷길 까페에 앉아 창밖을 몇 시간째 바라본다. 태극기를 든 긴 행렬이 지나가고, 그 방향과 같거나 다르게 움직이는 행인들이 태극기를 손에 쥐고 수없이 오간다. 낯설다. ‘태극기집회’에서 흔히 보았던 이들과는 다른 풍모의 사람들이 적잖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달라졌나? 당혹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서둘러 까페를 나와 그 대열에 다가가 보았다. 이상하다. 과장된 비장함도, ‘증오’를 부추기는 구호도, 시끄럽게 내지르는 고함도 없다. 조곤조곤 정담을 나누며 걷는다. 그들에게 물을 것도 없다. ‘태극기부대’는 분명 아니다.
물론 그 길에는 ‘태극기부대’의 일원이었을 법한 이들도 있다. 까페의 내 옆자리로 찾아 들어온 네 명의 노인들이 그랬다.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던 시국토론 대신 스마트폰으로 어떤 트로트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얘기꽃을 피운다. 한 방송기자는 그날 저녁 리포트에서 “오늘 본 태극기가 3·1절 태극기인지 태극기부대의 태극기인지” 헷갈렸다고 말했다. 유난히 북적댄 그날 그 거리, 오랫동안 입장이 나뉘어 날선 대립을 거듭하던 이들은 여전히 아무런 대화도 화해도 없이 각자 자기의 길로 갔지만, 서로를 불편하게 할 만한 시선도 말도 행위도 없었다. 대책 없는 반목이 그치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날 그런 정도로도 위안을 받았다. ‘함께 살면 됐지 뭐!’
지인과의 약속도 있었지만, 그곳에 가려던 다른 속내가 있었다. 1946년 이래 반공주의적 보수파에 의해 장악되어온 ‘3.1절의 기억’을 탈환하려는 진보개혁파의 기억전쟁이 본격화된 시점에 수세에 몰린, 낡은 기억을 사수하려는 이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특히 상투적 고함과 구호만 넘치는 행사장 앞보다는 뒷길이 궁금했다. 그런데 잘못짚었다. 이날 태극기부대의 집회 장소는 여기가 아니었다. 몇군데서 집회가 열렸고, 새문안교회 앞에서는 개신교 극우의 ‘절대 1인’ 전광훈 목사가 주도했다.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주최의 행사다. 그 위세가 추락일로에 있지만, 그가 대표회장이 된 올해 그 급락 추세는 가파르다. 하여 이 집회는 군소단체 주관 행사 같았다고 한다.
2003년 3·1절 구국기도회에 참석한 개신교도는 20만 명이 넘었다. 그날은 노무현 대통령 취임 6일 후였다. 그로부터 1년 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개신교 보수파 사이에선 1946년 3·1절에 버금가는 승전의 기억이었다. 해방되고 처음 맞이한 3·1절 기념식에서, 그러니까 역사상 처음 거행된 그 기념식에서 남한의 좌익과 우익은 총력전을 폈다. 당시 미군정청 조사에 의하면 남한의 이념지형도는 77대 23으로 좌익의 절대우세 상황이었다. 그러나 집회 결과는 세배나 많은 대중을 동원한 우익의 완승이었다. 이후 3·1절 광장집회는 이승만정권이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정치선전의 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2003년 3·1절 구국기도회는, 그 성공의 기억은 1946년 3·1절의 데자뷔였다.
이명박정권을 정점으로 개신교 우파의 분화가 본격화되었다. 그 무렵 강남- 분당권에서 압도적 성공을 거듭하던 신흥 대형교회들에선 시장주의적 우파 엘리트들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 또 그곳엔 ‘쿨함’을 삶의 대원칙으로 삼는 보보스(보헤미안 부르주아)류의 웰빙주의적 우파 성향의 신자들도 많았다. 이 두 그룹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나뉘기도 하지만 냉전주의적 이념 성향이 낮다는 점이 공통된다. 반면 개신교 우파를 대표하는 한기총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내내 이념전쟁에 몰두했다. 이것은 한기총의 구심력이 약화되는 구조적 요인이 되었다.
많은 교회들은 한기총의 자장에서 이탈했다. 특히 강남-분당권의 적잖은 신흥대형교회들이 개신교의 이념적 우파 행보와는 다른 우파적 실천의 장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갔다. 한편 여전히 한기총 주변에 남아 있던 이들 중 다수도 한기총을 떠나 새 단체를 만들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과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이 그것이다. 이 중 결속력은 매우 느슨하지만 규모에선 압도적으로 큰 한교총은 이념적으로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3·1절 때에는 진보성향의 평화통일연대(평통)와 공동심포지엄을 열더니, 올해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연합예배를 드렸다.
한편 한기총은 더욱 극우화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전광훈이 돋보인다. 1998년 그가 만든 청교도훈련원은 2010년 무렵 위세가 절정에 달했다. 당시 이 단체가 주관한 목회자 프로그램에 참석한 숫자는 전국 목사의 7~10%에 달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그가 주도한 기독정당들은 번번이 실패했고, 2017년 3·1절 구국기도회에 참석한 개신교 신자도 2003년의 십분의 일에 그쳤다. 또한 2018년엔 몇천 명 정도였으며, 이번 새문안교회 앞 집회에선 불과 5백 명이 모였다. 전광훈과 한기총의 극우 개신교의 입지는 경사 깊은 골짜기로 추락 중이다.
3·1절 구국기도회로 상징되는 개신교의 광장정치가 ‘약발’을 받지 못하는 추세가 명백해진 지난해 9~10월경, ‘태극기부대’ 내부에선 대중전략 대신 정당의 당권을 장악하자는, 이른바 기획입당 메시지가 SNS를 통해 파다했다. 아마도 그 결과가 이번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벌어진 ‘극우대잔치’로 나타난 것 같다.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자원은 많은 이들이니 약화일로에 있는 개신교 극우파의 위세를 ‘극우의 몰락’이라고 예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 단계에서 개신교가 중심세력으로 활동하는 극우세력이 대중정치에서 물러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다시 ‘기회’가 올 때까지는 그들이 과점하고 있는 제도권력의 뿔을 잡고 남은 위세를 휘두르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증오의 종교정치에 반대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겠다.
그 ‘기회’란 무엇일까. 전광훈은 대중이 이승만을 다시 기억하는 순간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문재인정부가 벌이는 3·1절 기억전쟁의 요체를 ‘이승만 죽이기’라고 단언한다. 그것을 달리 얘기하면 ‘1948년체제’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곧 ‘반공보수주의적’ 사회체제를 붕괴시키려는, 그런 점에서 내부의 적화 기획이라는 얘기겠다.
반면 3·1절 기념식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1948년체제’, 그 이후를 가리키는 용어인 ‘신한반도체제’를 논하면서 전광훈과는 다른 방식의 기억전쟁을 벌인다. 우파의 기획이 옳은지 좌파의 기획이 옳은지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중심이 되는 평화공동체, 사람이 더불어 혜택을 받는 경제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느 이념이 지배적 프레임이 되느냐를 넘어 사람이 주체가 되고 사람이 혜택을 나누는 사회를 강조한다. 지난해 4·27판문점선언에서 평화가 발전을 준다는 낙관에 빠져 평등, 분배, 사람 등의 단어를 모조리 생략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1946년 첫 번째 3·1절 기념식을 둘러싼 광장정치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우파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기념식에선 완패했다. 주목할 것은, 우든 좌든, 이념이 사람을 압도하는 순간 그 정치는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극좌나 극우의 기획은 실패할 운명에 있다. 왜냐면 거기에는 항상 누군가를 ‘적’으로 지목하려는 욕구가 넘실대기 때문이다. 간혹 그런 주장이 지배 프레임이 되기도 한다. 그때 사람은 살육의 영혼을 주입받아 다른 이들을 증오하고 학살하도록 부추김받는다. 결국 사람은 그로 인해 서로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된다.
예수는 말했다. “요한이 위대한 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하느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가 그이보다 더 크다.”(루가복음 7,24) 어떤 위대한 이도, 위대한 이념도 ‘작은 자’의 존엄보다 높은 수 없다는 것, 그런 세상이 예수가 꿈꾸었던 하느님나라라는 얘기다. 한국의 극우파 개신교가 기억전쟁에서 놓쳐버린 것은 바로 이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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