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래아 마을회당과 ‘호숫가’의 주요대중의 변화
라오스에서 오클로스로
라오스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당신네들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들을 두고 이사야가 제대로 예언했네요. 성경에 적혀 있는 대로군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떠받들지만, 그들의 마음은 나한데서 멀리 떨어져 있구나. 나를 받들어 섬겨 봐야 쓸데없는 일이다. 가르친다고 가르치는 것이 사람들의 계명들이니.” (〈마가복음〉 7,6)
그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절에는 죽이지 맙시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득고 일어날 겁니다.” (〈마가복음〉 14,2)
이 두 구절에는 ‘백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리스어 라오스(λαος)를 옮긴 것이다. [표14]에서 보듯 제2성서에서 ‘라오스’는 142회나 나오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유난히 이 단어 사용에 인색하다. 그나마 하나는 제1성서의 인용 문장이다. 뭔가 사연이 있을 법하다.
한편 〈마가복음〉 7,6은 〈이사야서〉 29,13를 인용한 것인데, 그 인용 원본은 (히브리어성서가 아니라)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성서(셉투아긴타)다.(1) 근데 ‘70인역성서’에선 이 단어가 무려 1,350회나 나온다. 거의 대부분 ‘백성’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고이’(גּוֹי)나 ‘암’(עַם)의 번역어다. 이 히브리 단어들은 지역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가의 과세・부역・징병의 대상자를 지칭할 때 쓰는 단어다. 제2성서에서 사용된 단어 중 비슷한 의미를 갖는 그리스어로는 ‘에클레시아’(εκλησια)(2)가 대표적이다. 알다시피 이 단어는 제2성서에서 ‘교회’로 번역되었다. 한데 70인역성서에선 히브리어 ‘콰할’(qקהל)을 에클레시아로 옮겼다. 그 뜻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이 〈신명기〉 10,4이다.
주님께서는, ‘총회’(콰할, asembly) 날에 산 위의 불 가운데서 당신들에게 선포하신 십계명을, 먼젓번과 같이 돌판에 새겨서 나에게 주셨습니다. (〈신명기〉 10,4)
이 문장에서 보듯 ‘콰할’은 모세가 광야에서 유랑하던 백성에게 하느님의 법을 반포할 때 거기 모인 백성의 모임을 말한다. 즉 ‘법 공동체’다. 그 법을 지켜야 하고 그 법의 특혜를 받을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도대체 광야에서 유랑하는 이들에게 성문법이 왜 필요한가. 법은 여러 종족이 한 사회 단위로 묶임으로써 한 종족의 관습법만으로 종족연합체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필요하다. 더구나 필요하다고 해서 법이 작동되는 것도 아니다. 법은 그것을 구현할 충분한 힘을 갖추어야 한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체벌할 수 있는 능력이 그 종족연합체의 중심 세력에게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해서 법은 고대사회에서 국가가 제법 잘 작동하게 되는 시기에나 가능하다.
혹자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장정만 60만 명이나 되니, 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출애굽 설화의 디테일 속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출애굽 인구 숫자가 대표적이다. 장정이 그 정도라면 여성과 노인과 아이들 합친 전체 인구는 200만 명이 훨씬 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광야를 휘젓고 다닌다면 시나이반도와 네게브 지역, 요르단강 동쪽지역의 소규모 종족들은, 인구가 많아야 수천, 많아야 수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 히브리인들이 지나간 곳에는 종족 자체가 말살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황량한 시나이반도와 네게브 지역에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식량이 있을리 만무하다. 성서에서 하느님이 그들에게 그날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하니, 그렇다고 해두자. 그런데 당시 이집트 인구는, 고대사회의 인구추산법을 적용한 결과, 최대 1백만 명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집트 전 인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유출되었다는 얘기다.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과장된 이야기들은 고대 설화의 전형적 현상이다. 그러니 디테일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해서 사건 자체가 전면 허구라는 것은 아니다. 해서 학자들은 그 뿌리가 되는 사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히브리인들이 건너갔다는, 한글 성서에 ‘홍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얌 수프’(יַם-סוּף)는 ‘갈대바다’라는 뜻의 단어다. 한데 70인역성서에서는 ‘에뤼쓰라 쌀라싸’(Ερυθρα Θαλασσα), 즉 ‘붉은 바다’로 번역되었다. 아마도 이런 번역이 가능했던 것은 그 이전에 출애굽한 히브리가 건넌 바다가 ‘얌 스프’이면서 ‘홍해’라는 이중 설화가 만들어진 결과일 것이다.
한데 이집트 국경지역인 나일강 삼각주 북동부 지역부터 시나이반도를 지나 아카바만까지 갈대, 즉 파피루스가 자라고 있는 늪지대가 여러 곳 발견되었다. 하여 바다처럼 넓디넓은 갈대 늪지대를 ‘갈대바다’라고 불렀다고 한다면 많은 문제가 풀린다. 실제로 이집트 국경을 넘나드는 군사집단이자 유랑집단들로 국경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보고문들이 출애굽 시대로 추정되는 시대에 국경수비대로부터 이집트 파라오에게 수없이 전달된 바 있다. 이들 군사적 유랑집단을 보고서들은 이집트어 ‘아피루’(apiru)라고 표기했다. ‘히브리’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 둘이 같은 부류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를 오가는 위험한 군사적 유랑집단인데, 그들이 수백 명 정도의 무리를 지어서 갈대 늪지대를 거쳐 이스라엘이 부족을 이루며 살고 있는 가나안 중부 고지대로 유입되어 들어왔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스라엘과 히브리들이 장기간 함께 섞여 살면서, 이스라엘 사이에 출애굽 설화가 공유됨으로써 점차 이스라엘의 기원설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무튼 출애굽한 아피루 혹은 히브리들은 대규모 집단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정착민의 삶을 전제로 하는 법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단순하고 기동력 있는 집단이다. 한편 그들이 이스라엘 부족동맹 속으로 스며들었다고 해서, 종족들이 연합을 이루는 복잡한 사회가 되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법이 만들어졌다고 가정하는 것도 무리스럽다. 왜냐면 부족동맹 정도의 낮은 수준의 연합체에서 법은 실효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앞에서 인용한 〈신명기〉 10,4로 돌아가보자. 이 구절은 내용상 출애굽 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실제적인 배경은 〈신명기〉가 만들어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곧 요시야 왕 시대다. 유다국 역사에서 국력에서나 문화에서 가장 절정기에 이른 시기다. 그때에 무수한 문헌들이 만들어졌다. 〈신명기〉가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출애굽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법 반포 장면은 요시야 왕실이 국법을 만들어 백성에게 반포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때 법을 반포하는 왕실 주도의 세리머니가 있었겠다. 그리고 그 법 반포 축제의 장으로 초대된 이들이 있었다. 〈신명기〉에 따르면 바로 그들이 법의 백성을 뜻하는 ‘콰할’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 번역본인 70인역성서에서는 ‘에클레시아’로 옮겼다. 앞에서 우리는 에클레시아가 ‘라오스’와 유사한 함의를 가진 단어라고 말했다. 그러니 에클레시아의 히브리 원어인 ‘콰할’은 ‘라오스’와 동일한 의미의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리스어 ‘데모스’(δημος)는 ‘법 앞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갖는 그리스어다. 라오스나 에클레시아보다 훨씬 유명한 단어다. 원래 이 단어는 고대그리스 도시국가들에서, 특히 아테네에서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용어였고, 그 영역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했다. ‘마포구 혹은 마포구민’이라고 할 때, ‘구’ 또는 ‘구민’과 비슷한 용어가 바로 데모스였다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도시국가가 발전해서 영토도 넓어졌고 멀리 떨어진 곳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관료제도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그만큼 관료집단을 독점하다시피 한 귀족세력의 힘이 훨씬 강력해졌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평민층의 몰락을 뜻했다.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데모스’는 ‘빈민’ 같은 부정적 뉘앙스의 단어로 변화되었다.
그런데 몰락하는 평민들이 저항했다.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진 제도의 하나가 ‘도편투표제’였다. 평민들이 도기 조각에 투표를 하여 문제적인 통치자를 탄핵하는 제도다. 정해진 수 이상의 표를 받은 통치자는 국외로 강제추방되었다. 이러한 제도의 탄생은 고대그리스 도시국가의 민주주의화를 의미했다. 특히 기원전 5~4세기경에는 이런 현상이 일상화되었다.
6세기 초의 아테네의 정치가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 of Athens, 기원전 570~508경)는 이런 제도 도입의 견인차 역할을 한 인물인데, 그는 데모스가 주인공인 그리스 도시국가론을 폈다. 하여 그는 훗날 민주주의론의 선구자로 추앙되었다.
하지만 데모스의 정치는 부작용도 많았다. 데모스의 지지에 힘입어 통치권자가 된 이들, 특히 전통적인 왕족이나 귀족출신이 아닌 이가 데모스의 지지를 통해 통치자가 되는 일이 잦아지자, 구귀족세력은 그런 이들을 ‘참주’, 곧 ‘주를 참칭하는 자’라고 불렀다. 참주의 그리스어는 ‘튀라노스’(τυραννος)다. 오늘날 폭군을 뜻하는 영어단어 ‘타이런트’(tyrant)는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 ‘참주’들은 실제로 폭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한때 권력을 쥐었던 왕족이나 귀족들은 이들 자격 없는 비천한 자가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가지고 통치하는 것을 보면서 저들은 튀라노스, 곧 폭군이라고 하는 프레임을 덮어씌웠다. 오늘날 독재자의 후예들이, 혹은 그 시대 독재의 하수인으로 권력을 휘둘렀던 이들이 민주정부의 수반을 ‘독재자’라느니 ‘전재군주’라느니 하는 비난을 퍼붓는 것처럼, 그때 그리스에서도 그런 비난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이다. 한데 바로 이런 ‘나쁜’ 통치자인 참주에게 현혹되어 그자를 지지한 이들이 데모스였다. 하여 이런 담론의 프레임 속에서 데모스는 ‘믿을 수 없는 자들’, ‘선동이나 당하는 자들’, ‘자주 나쁜 권력자에게 매수되는 자들’ 같은 부정적 뉘앙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시각을 대표하는 이가 기원전 5세기 초 아테네의 철학자인 플라톤이다. 알다시피 그는 ‘철인정치’를 주장한 인물이다. 믿을 수 없는 데모스에게 정치를 맡겨서는 안 되다, 그들에게 적합한 것은 농사짓는 일 따위다,라고 그는 주장했다. 반면 ‘철학자’들이야말로 정치를 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요컨대 그는 대표적인 ‘아르케(αρχη)의 정치’(3)론자, 곧 엘리트정치론자였다. 반면 클레이스테네스는 ‘데모스의 정치’론자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데모스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와 맞물리며 그 뉘앙스가 변화해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데모스는 ‘영역에 속한 자들’이라는 함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귀족은 아니지만 노예도 이방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평민이었다. 그런 점에서 ‘라오스’와 ‘데모스’는 거의 같은 의미의 단어다.
하여 〈마가복음〉 7,6의 ‘라오스’는 ‘데모스’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그 ‘라오스’는 입술로는 야훼를 공경하는 척 하지만 마음은 떠나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버린 자들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이 이사야 예언자의 비판은 〈마가복음〉의 비판이기도 했다.
오클로스
한편 70인역성서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라오스’와는 달리 ‘오클로스’는 불과 50회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대개 ‘이방의 무리’(gentile crowds)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하몬’(הָמוֹן)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한편 다른 고대그리스의 문헌들에서 ‘오클로스’는 훨씬 더 부정적 뉘앙스로 쓰였다. 그들은 부도덕하고 무책임하여 정치적 주권을 가져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다. 해서 플라톤처럼 ‘데모스’를 부정적으로 말하고 싶은 이에게는 ‘데모스’는 오클로스와 비슷한 자들인 셈이고, 클레이스테네스처럼 ‘데모스’를 정치적 주체로 말하고 싶은 이에게는 이 둘은 매우 다른 의미를 지닌 표현이었다. 데모스가 정치적 주체인 것은 그들이 오클로스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의 민주주의의 핵심적 존재는 정치적 주권자로 형성되어 가는 데모스다. 이러한 데모스의 정치에 의해 대의제 민주주의를 포함한 ‘아르케의 정치’(엘리트정치)를 넘어설 수 있다고 본 현대의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정치적 주권자가 된 대중을 ‘데모스’로 말하고, 포플리즘의 대중 같은 파시즘에 빠진 대중을 ‘오클로스’로 표현한다. 서기 1세기 후반의 문서인 〈마가복음〉에도 그런 ‘오클로스’가 등장하는데, “대제사장들이 ‘무리’(오클로스)를 선동했다”고 하고,(15,1)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소리쳤다.(15,13) 그들은 선동되는 자들이고, 예수를 죽이는 데 일조한 자들이다. 요컨대 ‘데모스’나 ‘라오스’가 ‘영역 안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면, ‘오클로스’는, 그들이 영역 안에 살고 있지만, 그 ‘영역 안의 백성답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한데 〈마가복음〉에서 오클로스에 대한 이와 같은 두 번의 부정적 사례를 빼고는 나머지 용례들은 랑시에르나 다른 고대의 그리스 문헌들과는 전혀 다르게 쓰인다. 우선 앞에서 말했듯이 70인역성서에서 라오스와 오클로스의 사용 빈도는 1350 대 50, 27 대 1의 비율이다. 한데 〈마가복음〉은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라오스는 2회 사용되었는데, 오클로스는 38회 사용되었다. 17배나 더 많다. 게다가, 말했듯이, 2번 중 1번은 인용구다. 또 그 인용구에서 라오스는 예언자를 배척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은 자들이다. 반면 두 번의 예외를 제외하면 〈마가복음〉에서 오클로스는 예수 주위에 모여든 대중이고 예수는 그들에게 은사를 베풀었으며 하느님나라가 그들을 위한 것임을 강변한다.
랑시에르가 데모스를 민주주의 주역이라고 보았다면, 〈마가복음〉은 오클로스를 하느님나라의 주역이라고 말한다. 한편 제2성서에서 오클로스는 175번 사용되는데, 〈마가복음〉에서는 라오스와 오클로스가 대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반해, 나머지 문서들에서는 이 둘은 별 차이가 없다. 70인역성서나 고대의 그리스 문헌들에서 오클로스는 부정적 뉘앙스가 강한 반면, 제2성서는 라오스와 오클로스를 대동소이한 의미로 쓰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마가복음〉과 이 복음서 외의 제2성서 문서들, 그리고 70인역성서, 이 세 텍스트에서 오클로스와 라오스의 관계는 서로 다른 함의를 지닌다. 그리고 그 의미의 차이를 〈마가복음〉과 70인역성서는 ‘영역 안’인지 ‘밖’인지에 따라 나누고 있다면, 제2성서의 나머지 문서들은 그 차이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
이런 현상은 제2성서 전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제2성서에서 ‘라오스’는 142회다. 〈마가복음〉보다는 라오스의 사용 빈도가 대단히 높지만, 70인역성서와 비교하면 여전히 라오스가 덜 사용되었다. 실제로 〈마태복음〉과 〈루가복음〉은 많은 곳에서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를 라오스로 바꾼다. 게다가 〈마가복음〉을 제외한 모든 제2성서의 문서들에서 ‘오클로스’를 ‘라오스’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즉 그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백성 혹은 군중’을 뜻한다. 더 결정적인 것은 〈마가복음〉 외의 모든 제2성서 문서들에서 이 두 단어의 의미로 ‘영역 안’과 ‘밖’의 여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라오스 vs. 오클로스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는, 다른 문헌들과는 달리, 긍정적 뉘앙스를 갖는다. 여기서는 그것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사실 오랫동안 서양의 성서학자들은 〈마가복음〉에서 ‘오클로스’가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 주목하지 않았다. 제2성서의 다른 문헌들이 오클로스와 라오스를 서로 교환 가능한 단어로 쓰고 있다는 것 때문에, 〈마가복음〉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했듯이, 〈마가복음〉에서 오클로스는 라오스와 매우 대립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 라오스가 영역 ‘안’의 대중이라면, 오클로스는 ‘밖으로 내몰린 자들’이다. 오늘의 용법으로 말하면, ‘국민 대 비국민’ 같은 것이다. 〈마가복음〉의 이러한 오클로스 용법을 주목하여 새로운 가설을 처음 제시한 이는 일본의 성서학자 다가와 겐죠(田川建三)였다. 그는 1967년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런 주장을 처음 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가 등장하는 문맥에서는 세리, 병자, 창녀 등이 영락없이 나온다는 점이다. 이들 법 밖으로 내몰린 자들이 〈마가복음〉 공동체의 대중이었다는 것이 다가와의 결론이다. 해서 〈마가복음〉 저자는 그 대중인 오클로스를 위한 복음서를 쓴 것이라고 해석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다가와보다는 조금 늦게 오클로스를 이야기했다.(4) 내용상 다가와와 거의 비슷한 존재로 말이다. 한데 안병무와 다가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다가와는 오클로스가 〈마가복음〉 공동체의 주요 대중이라고 보았는데, 그들이 이 복음서(서기 70년 어간)보다 한 세대 이상 더 과거의 인물인 예수(서기 30년 어간)의 대중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복음서의 대중과 예수의 대중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은 성서학계의 상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런 상식에 기초하고 있다.
한데 안병무는 상식에 반하여 예수의 대중이 〈마가복음〉 공동체의 대중과 일치하고 있다고 단정한다. 그러므로 안병무에게는 그 상식에 반하는 해석을 내린 이유가 무엇인지를 입증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것은 20세기 이후의 성서학적 방법론으로는 입증 불가능한 과제다. 해서 서양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안병무의 주장을 제3세계의 급진적 신학을 대표하는 민중신학자의 주장으로 받아들였지 학문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복음이 민중을 편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 주장을 존중했을 뿐, 그것이 학문적인 성과라고 인정하지는 않은 것이다. 안병무와 다른 방식으로 복음서와 예수를 연결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지만 그것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오늘날 〈마가복음〉과 예수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냈다고 널리 인정받는 주장은 거의 없다.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고 그 의견들이 공공연히 공박되지 않을 뿐, 널리 지지를 받지도 않는다.
한데 안병무가 제시한 연결고리는 매우 흥미롭고 어느 가설들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그 어려운 것을 해냈다. 나는 그렇게 평가한다. 여기서는 그런 학문적 논의를 길게 하기보다는 안병무의 주장을 기초로 해서 예수와 오클로스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마가복음〉은 장르상 구술문학(oral literature)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마태복음〉과 〈루가복음〉은 〈마가복음〉과 Q문서(예수어록)을 자료로 삼아 쓰인 것이라는 점에서 이 문서들은 구술문학이 아니다. 반면 〈마가복음〉은 대중 사이에서 구술로 회자되던 것을 어떤 이가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구술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서 〈마가복음〉과 다른 두 복음서는 기록자의 태도가 근원적으로 다르다. 두 복음서의 기록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자’(authors)다. 반면 구술문학의 기록자는 ‘채록자’(recorders)다. ‘저자’가 가장 빛날 때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묘사하거나 다른 관점을 드러낼 때다. 반면 ‘채록자’는 그 이야기를 회자하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을 잘 담아내는 자다. 그럴 때에야 그것은 구술문학으로서 살아남는다. 즉 구술문학은 대중의 예비검열을 통과함으로써, 즉 대중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구술문학이 된다. 하여 구술문학은 누가 채록자인지보다 누가 기억하는 자인지가 더 중요하게 마련이다.
물론 대중은 기억의 대상을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 가령 같은 사건을 남자집단이 기억할 때와 여자집단이 기억할 때, 성인들이 기억할 때와 아이들이 기억할 때 다를 수 있다. 또 지역별로도 다르다. 즉 기억은 지역성을 지닌다. 또한 계급성도 다르다. 한데 중요한 것은 아이든, 여성이든, 특정 지역 혹은 특정 계급의 기억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대상을 자신들의 관심에 따라 더 민감하게 기억하거나 덜 민감하게 기억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요컨대 ‘기억되는 존재’와 ‘기억하는 이’ 사이의 소통의 결과가 ‘기억’인 것이다. 하여 기억을 역사적 자료로 삼아 해석하려는 역사가는 그런 소통의 상황을 전제하면서 해석하게 된다.
이제 〈마가복음〉을 살펴보자. 이 복음서를 보면, 흥미롭게도, 예수의 최측근으로 그이의 가장 내밀한 것까지도 알고 있을 법한 제자들은 주요 등장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마가복음〉에서 자주 등장하기는 하지만 예수를 오해하는 자로 나오고, 심지어는 배신한 자며, 예수가 잡히는 순간 눈물이 피가 되도록 기도할 때 꾸벅꾸벅 조는 자이고, 예수가 살벌한 심문을 받고있는 그 순간에 예수를 모른다고 소리친 자다. 게다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당하는 순간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또 부활하는 이야기, 그분이 빈 무덤에서 사라진 이야기를 확인하고 전하는 이도 제자가 아니다. 즉 〈마가복음〉에서 제자는 ‘악역’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 구술이야기를 기억하고 전달하는 자가 제자는 아니라는 얘기다.
반면 이 복음서에서 오클로스는 늘 예수 주변에 있고, 예수는 그들에게 하느님나라를 설파하며 그 나라가 당신들의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병을 고쳐준다. 즉 그들은 예수의 복음의 주된 수혜자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를 기억하고 전달한 이는 오클로스였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5)
요컨대 〈마가복음〉에서 예수를 기억하는 주체는 오클로스다. 그들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준 이들은 누구일까. 오클로스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역 밖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영역 안의 사람들의 통념 속에서 그들은 결코 떳떳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자들이고 심지어는 민족의 재앙의 원천이 되는 자들, 곧 존재가 죄인인 자들이다. 그런 사회에서 오클로스는 결코 떳떳한 자로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주눅들어 있고 때로는 사회가 낙인찍은 대로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의 관점에서 예수를 기억하는 전승 덩어리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그들의 해체된 자존성이 예수로 인해 살아났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 실제로 예수는 그들에게 죄를 사면해 주었고, 종종 그 사면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한 것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그들 자신이 스스로의 관점으로 예수를 기억하게 된 것은 그들의 자기 치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런 이야기를 그들에게 전해준 이는 누구일까. 모든 이야기의 전달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예수에 관한 기억을 전수해준 이들은 〈마가복음〉의 오클로스 자신이었거나 그들의 부모 혹은 이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바로 예수 주위에서 그 사건을 접했고 수혜를 받은 이들이었을 것이다. 폐부를 찌르는 예수의 언행에 감화받은 이들이 그 이야기를 전했고 그것이 한 세대 정도를 지나서 〈마가복음〉 같은 오클로스적 예수 이야기집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이야기를 ‘루머’(rumor)라고 부른다. 한데 이 루머의 주인공인 예수는 모두에게 사랑받던 이가 아니다. 그는 국사범으로 처형당했고 그 현장에 있던 다수의 대중은 환호했다. 당국은 예수 얘기를 꺼내는 자는 불온한 자로 간주했고, 필시 예수는 가짜 예언자요 민족의 재앙이라고 선전되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 예수 이야기가 전파되었다. 그렇다면 이 루머의 형식은 ‘유언비어’라고 할 수 있다. 즉 〈마가복음〉의 예수 이야기는 예수 주변의 오클로스가 그 기억을 전했고 그것이 유언비어처럼 전달되면서 커다란 예수 이야기 덩어리로 발전했고 누군가가 그것을 채록한 결과 구술문학으로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이렇다 예수와 예수 주변의 대중인 오클로스가 예수를 기억했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오클로스가 그것을 전승시켰으며, 그것이 어느 오클로스 공동체에서 예수 이야기 덩어리로 발전하였고 그것을 누군가에 의해 채록된 것이 〈마가복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클로스들의 복음서’가 탄생했다.
‘오클로스’와 ‘비장소성’
한편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활동 동선을 추적해보면, 예수는 처음에 세례자 요한이 벌인 운동에 참여하고자 갈릴래아의 나사렛에서 페라이아의 요르단강 근처로 갔다.(I) 그러나 요한이 잡힌 뒤에 그는 다시 갈릴래아로 갔다. 갈릴래아에서 처음에는 주로 마을 안에서 활동했다.(II) 그러나 마을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충돌한 이후 마을 밖 공터에서 활동을 재개했다.(III) 성서 구절로 보면 페라이아 활동은 1,2~13까지이고, 1,14~3,6은 갈릴래아의 마을 안에서의 활동을 보여준다. 그리고 3,7~9,30까지는 갈릴래아의 마을 밖 공터에서 활동한 이야기다. 그리고 10장부터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야기와 예루살렘에서의 이야기로 마무리 된다.
그런데 오클로스는 갈릴래아 마을 밖에서 집중적으로 나온다. 즉 그들은 마을 밖을 전전하는 자들이다. 예수가 페라이아에서 요한이 잡힌 뒤, 요한을 추종하는 이들이 당국에 의해 추적을 당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군대의 감시망 밖에서 활동하려 했는데, 그것에 적합한 첫 번째 장소가 갈릴래아의 마을 안이었다. 마을은 군대가 주둔하고 있지도 않았고 관료도 없었다. 단지 때마다 마을의 생산물을 왕의 요새에 있는 군인들에게 공납물로 바쳤다. 그런 일을 충실히 하는 한 마을은 왕의 군대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한데 그렇게 자율적으로 유지되는 마을에 질서를 부여한 이들은 소자산가계층의 마을 엘리트였다. 그들 중 가장 유력한 이가 자신의 재산으로 회당을 만들어 마을 주민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달통한 자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을 〈마가복음〉에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한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원래 사제들의 규율집인 율법을 대중화시키는 운동을 이끌었다. 해서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먹어도 되는 날과 안 되는 날 등에 관한 율법을 마을 사람들이 조상대대로 지켜온 관습과 연결시켜 해석했다. 특히 그들은 안식일을 중요시했다. 7일마다 돌아오는 날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마을 주민들은 그 마을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한데 당연히 그날을 못 지키는 이들이 있다. 가령 몰락한 이들이어서 일거리라도 생기면 안식일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일하는 이들은 회당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혔다. 그런 이들은 마을 안에 있더라고 그 마을의 질서 바깥으로 내몰린 자들이다. 또 어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이곳저곳을 떠돈다. 명절 때는 세관이나 성전 근처에서 구걸을 하며 자비를 구하는 자가 되고, 농번기에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녔다. 때로 너무 굶주렸는데, 먹을 것이 없으면 강도가 되어 타인의 것을 빼앗기도 했다. 그런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오클로스였다.
당연히 예수가 갈릴래아 마을 밖으로 내몰리게 되자 그 주변에 모여든 이들이 오클로스였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그런 예수의 활동을 기억한 이들이 오클로스였다. 당연히 예수 이야기에서 마을 밖의 공간에서 오클로스의 비중이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사렛의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가 되기 위해 페라이아로 갔고 거기에서 요한의 다른 추종자들과 더불어 수행을 하며 비판적 광야예언자의 동역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이 페라이아 지역의 통치자인 안티파스를 공격하자 그가 주도하는 운동은 당국의 탄압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지도자 요한은 체포되었으며 그의 운동을 괴멸되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곳을 이탈하여 갈릴래아의 가버나움에 거점을 삼고 그곳 출신이자 요한운동의 동역자였던 야고보-요한 형제와 베드로-안드레 형제 등과 함께 요한운동을 계승하는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요한의 운동은 안티파스의 영토 중 ‘비장소성’(non-place)의 공간(6)인 광야에서 벌어진 것인 반면, 예수의 운동은 장소적 성격이 강한 갈릴래아의 마을 안이었다는 점에서 차별화될 수밖에 없다.
세례자 요한이 일상에서 이탈하여 광야수행자가 되려는 이들 혹은 일시적으로 수행의 길에 들어온 이들과 하느니나라를 선포한 것이라면, 예수의 운동은 일상의 공간 안에서 벌어진다. 그러므로 요한의 운동은 대중의 일상 경험 바깥의 종교적 장치인 성전을 비판하는 것이 중심일 수 있었지만, 예수의 운동은 마을 안에서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경험인 악령 들림, 질병, 굶주림 등의 문제와 대면했다.
아마도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악령 들린 이, 질병에 걸린 이, 굶주린 이를 배척하지 않는 일상의 장소인 마을공동체를 주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을은 오랫동안 그런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존속해온 질서 아래 형성된 장소다. 즉 그 장소성은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써 유지되는 공동체였다. 해서 글 서두에 인용한 7,15의 ‘백성’이 예언자를 배척했듯이, 마을 안의 대중은 예수를 배척했다. 물론 그 장소성이 항상 그렇게 배제의 장치가 작동되는 장인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포용의 전통도 있다. 한데 예수는 배제된 이들의 편에 서서 활동했고, 그러다 보니 배제의 장치에 대해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당시 마을의 배제의 장치는 ‘(광의의) 바리사이’가 주도하는 ‘(마을)회당’이었다. 하여 예수는 회당의 질서, 그 질서의 수호자인 바리사이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출된 사건이 바로 안식일 갈등이다. 안식일은 7일마다 돌아온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대중에게는 가장 일상과 접맥되는 종교성의 장치다. 그런데 ‘바리새파’는 소자산가적 가치를 대중화하는 방식으로 안식일 수행법을 해석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인 안식일을 단식하는 날로 정하고 일체의 활동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규율화하려 했다. 이것은 고정된 특정일을 단식일로 정하고 노동을 금해도 되는 사람들의 수행법이다. 그날을 그렇게 지킬 수 없는 이들 중에는 굶주림이 일상이고 노동의 기회가 제약된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건강의 문제로 혹은 정신적 발작의 문제로 항시 위험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도 안식일은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는 날이 된다. 하여 그들이 겪는 배제는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바로 이 점에 대해 예수는 문제를 제기했고, 그 결과 더 이상 회당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 안에 어디에서도 활동하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하여 예수운동의 세 번째 단계는 마을 밖에서 벌어진다. 한데 안티파스의 공권력에 의해 추격을 당하는 이들이 마을 밖에서 활동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국경 근처일 것이다. 마침 어부 출신의 추종자들이 적지 않은 덕에 갈릴래아 마을 밖의 호숫가가 주요 활동 공간으로 선택되었다.
그런데 마을 밖에서 활동하려면 그곳에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놀랍게도 그곳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마가복음〉은 그들을 ‘오클로스’라고 불렀다. 마을 안에서도 있었지만 그들은 회당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더 많이 보이는 곳은 마을 밖이다.
도대체 어떤 이들이 마을 밖에 살고 있을까. 마을 안의 농경지나 어촌에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다. 예수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빚진 이들’이다. 그것은 마을 안에서 농민이나 어민이 수탈당하여 생계가 막막해진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부채를 져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리대금을 통해 대중을 수탈하는 이들은 대개 부재지주의 땅을 관리하는 ‘청지기’들이다. 이들의 존재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른 글로 미루겠다. 아무튼 그런 이들로 인해 부채에 시달리는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마을을 이탈하여 떠돌이가 되었다. 떠돌이들은 때로 순례자에게 구걸하는 거지가 되기도 하고 농번기에는 일용노동자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강도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편 병든 자나 악령 들린 자들 중 일부는 사람들을 부정 타게 하는 자라는 점에서 마을 안에서 살 수 없어 마을 주변을 떠도는 이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마가복음〉의 이야기에서 ‘오클로스’가 한 번도 회당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간혹 마을 안에서 살고 있다. 또 일부는 마을 밖으로 내밀렸다. 하지만 마을 안이든 밖이든 그들은 회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바로 이런 이들을 〈마가복음〉은 ‘오클로스’라고 불렀는데, 예수일행이 마을 밖에서 활동하게 되자 예수는 그들을 만났다. 이들은 마을 밖으로 내밀려서 떠돌이의 삶을 살아야 일종의 ‘노마드적’(namadic) 존재가 되었다. 즉 ‘비장소성’에 더 잘 어울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규범에 여전히 매여 있지만 일탈을 일삼았기에, 예수의 탈규범적 메시지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다. 반대로 예수는 그런 노마드적 대중과 접촉하면서, 그리고 그들 자신이 노마드적 수행자가 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탈규범적 하느님나라를 주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여 ‘오클로스’와 예수 사이에는, 마을 안에서보다도 훨씬 더 공감력이 높아지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안병무의 예수연구의 명제가 ‘오클로스의 체험의 유사성이 기억의 유사성을 낳았다’는 것임을 주목하자. 물론 이 표현은 내가 안병무의 해석을 유념하면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안병무의 것이다. 구술문학인 〈마가복음〉에서 안병무는 ‘오클로스의 비장소적 기억’에서 예수를 밝견하였던 것이다.
정리하면, 갈릴래아 마을 밖, 특히 회당의 질서에서 포용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들이 바로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의 기억의 주요 대중이다. 마을 안에서 예수는 그들을 위해 활동했고, 마을 밖으로 내몰린 뒤에는 그들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는 더욱 명료해졌다. 예수는 성전이 형성되고 마을회당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존재로 취급되지 못하는 이들을 편들며, 그것을 위해서 성전과 회당의 제도 자체를 해체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예수의 이런 메시지를 몸으로 체현한 이들이 바로 ‘오클로스’였기에 그들은 예수를 기억하는 제1의 주체다. 나아가 그들은 예수 기억들을 결합하여 스토리를 만들어낸 주역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예수의 기억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전달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오클로스’는 예수운동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일 수 있다. 비록 예수의 최측근들인 제자집단이 훨씬 더 내밀한 예수 이야기를 알고 있었겠지만, 그들의 역할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담론의 형성자는 바로 ‘오클로스’인 것이다. □
[후주]
(1) ‘셉투아긴타’(σεπτυαγιντα)는 ‘70’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팔레스티나계 이주민이 많고 유력한 인사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에서 70여 명의 랍비가 참여해서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그리스어판 번역성서다. 그 시기는 기원전 2세기 쯤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번역된 문서들은 제1성서다. 한데 그 범위가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이 사용하는 제1성서보다 훨씬 더 많은 문서를 포함하고 있다. 오늘날 가톨릭이 사용하고 있는 제1성서는 70인역성서를 참조하여 그 범위가 히브리어판 제1성서본(마소라 사본)에 의존한 개신교판보다 더 많다. 아무튼 제2성서의 저자들이 제1성서를 인용할 때는 예외 없이 이 그리스어판 성서인 70인역성서를 사용했다.
(2) 바울 친서들에 나오는 ‘에클레시아’는 백성으로 부름받지 못한 이들을 불러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백성, 그들의 공동체를 지칭할 때 이 용어를 쓴다. 반면 바울 위서나 다른 텍스트들에는 좀더 평이하게 하느님의 백성다운 이들의 공동체에 가깝다.
(3) 그리스어 아르케(αρχη)는 ‘머리’라는 뜻의 단어다.
(4) 안병무가 오클로스를 처음 얘기한 해는 1975년이었다.
(5) 다가와는 〈마가복음〉이 구술문학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다. 반면 안병무에게서 그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그가 이 복음서가 구술문학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6) ‘비장소’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가 개념화한 용어로, 조상의 역사가 없는, 즉 전통이 부재한 장소를 말한다. 가령 현대사회에서 도시를 만들 때 전통이 부재한 곳은 새로운 혁신이 가능하여 새로운 변화에 더 잘 적응하고, 강한 전통을 갖고 있는 장소는 변화에 대한 저항이 보다 강하다. 이렇게 전통이 강한지의 여부가 미치는 사회적 이펙트를 논하기 위해 비장소 개념이 제기된 것이다. 한데 예수의 활동공간으로 마을 ‘안’과 마을 ‘밖’이라는 요소는 각각 라오스와 오클로스가 복음의 수혜자이자 주체로서 부각되는데, 여기에 비장소 개념을 적용하면, 마을 밖의 공간에서 활동하는 예수, 그런 예수 이야기를 전승한 예수설화와 〈마가복음〉은 좀더 급진적인 예수운동의 계보를 이룰 수 있었음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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