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미시권력과 안식일신앙
역사적 고찰
예수가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이후 갈릴래아 마을 안, 특히 마을회당에서 활동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 과정에서 예수가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마을종교의 배타성이다. 거기에도 누군가를 억압함으로써 누군가의 권력이 정당화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다. 마을 안의 미시권력이 작동하는 중심공간은 회당이다. 그리고 그것을 추동하는 자들을 복음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배후에는 일정 지역의 마을들을 연결하는 지방종교가 있었고, 그렇게 지방종교의 엘리트 집단을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라고 불렀다. 한편 그들은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과 느슨한 연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과 지방, 그리고 마을을 연결하는 권력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다. 요한과 함께 활동할 때에 요한은 예루살렘의 거시권력에 주목했었다. 한데 요한이 체포된 후 예수가 마을에서 새로운 활동을 재개하면서 발견하게 된 것은 마을종교의 미시권력이었다. 그 미시권력과 예수는 갈등하고야 말았다. 그 갈등이 점점 고조되면서 그는 더 이상 마을 안에서 활동하기가 여의치 않게 되었다. 해서 예수는 마을 밖으로 나갔다.
여기까지가 앞 장에서 다룬 내용이다. 이번 장에서는 그 얘기를 좀더 깊게 살펴보려 한다. 특히 지방의 미시권력의 핵심이 안식일 신앙이었기에, 안식일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 살펴보면서 예수가 마을 밖으로 떠나야 했던 상황을 정리해보려 한다.
안식일법
마을회당 안에서 예수는 바리새파사람들과 충돌하고야 말았다. 그 결정적인 사건은 ‘안식일’을 둘러싼 갈등이다. 바리새파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가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것이고, 예수의 관점에서 보면 바리새파가 안식일을 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은 대개 그 사회의 존속을 위한 공공적 필요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준수하게 하려면 보상과 체벌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공공적 필요’란 법 제정의 동기이고, ‘보상과 체벌’은 그것의 결과다. 그러니까 ‘좋은 법’은 보상과 체벌이 그 제정 동기와 부합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믿음이 만들어낸 이미지다. 하지만 모든 법이 적용될 때마다 제정 동기에 부합하는지 물을 수는 없다. 법 자체로 보상과 체벌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여 법은 그것의 배경이 되는 역사로부터 탈출하여 보편적 지위를 주장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법의 정신 운운하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모호한 요소보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내용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법은 그 제정의 정신을 넘어서 적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해서 특정 법을 둘러싸고 제정의 정신과 그 적용 사이의 관계가 적절한지를 두고 논쟁이 야기되곤 한다. 이러한 논쟁이 많을수록 그 법은 건강하게 작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수일행은 안식일에도 길을 떠났다. 아직은 전적인 떠돌이 예언자는 아니지만 계속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활동하는 예언자들의 삶은 늘 그렇게 날을 가리지 않는다. 한데 그것이 시비거리가 되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일행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비난했다. 이에 대해 예수는 말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당신들은 아예 읽어 보지도 못했습니까?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말입니다. 다윗은 아바아달이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단에 차려 두었던 거룩한빵(진설병)을 먹지 않았나요? 그 빵은 제사장 말고는 누구도 먹을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에게도 주지 않았나요?”
예수님이 또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겨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 (〈마가복음〉 2,25~27)
바리새파는 예수일행이 그 법을 어겼다고 공격하고 있는데, 예수는 그 법의 정신을 말하면서 논박한다. 곧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라는 얘기다. 한데 그 앞 구절에는 그 정신의 구체적인 함의가 들어 있다. 즉 ‘굶주림’이다. 그런 상황에서 안식일은 굶주린 이를 위해 작동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안식일법의 정신
우선 안식일법 제정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살펴볼 것은 〈열왕기하〉 4장이다. 이것은 기원전 9세기 초 이스라엘국의 예언자 엘리사에 관한 전승으로 되어 있는데, 어쩌면 그보다 반세기 정도 앞선 엘리야 예언자의 전승일 수도 있다.(1) 나사렛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에 있는 수넴이라는 성읍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여인의 아들이 돌연사하자 그녀가 서둘러 예언자를 찾아가려 짐을 추린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이 이렇게 말한다. “왜 하필 오늘이요?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니지 않소?”(4,23) 이 말은 초하루나 안식일에는 예언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시사되어 있다. 초하루나 안식일에는 제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관행이 유다국에서도 있었다.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는 안식일에 거행되는 제사의 허례허식에 대해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이사야서〉 1,13)
이 두 텍스트를 통해서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국과 유다국에서 안식일마다 공적인 제의가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열왕기상〉 4장의 엘리사(혹은 엘리야) 설화에서 볼 수 있듯 그것은 사람들의 생로병사와 얽힌 일상적 종교성이었다. 사람들은 난데없이 일어나는 일상의 위기를 견뎌내기 위해 일년에 겨우 몇 번 오는 명절보다는 7일마다 오는 안식일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2)
그로부터 한 세기쯤 후, 기원전 7세기 초 유다국에서 안식일법이 제정되었다. 그때는 요시야 왕 시절이다. 〈신명기〉 5,12~15이 이때 제정된 안식일법의 조문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신명기〉의 안식일법보다 더 오래된 안식일법이 있었다. 〈출애굽기〉 20,8~11에 그것이 반영되어 있다. 학자들은 이 텍스트를 포함하여 〈출애굽기〉에 수록된 법 텍스트 묶음을 ‘계약법전’(Covenant Code)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유다국의 문서로 보이지만 그 원형은 이스라엘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 역사를 추정하면 이렇다. 가나안(시리아-페니키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최고 선진국이었던 이스라엘국에서 법전이 만들었다. 하지만 이스라엘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면서 이스라엘의 법전은 유실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스라엘국 출신 유민들에 의해 유다국에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국이 멸망할 즈음에야 비로소 국가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유다국 왕실에선 이 문서에 기반을 두고 법전을 만들었다. 아마도 이스라엘 법전의 상당히 많은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법전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의 계약법전이다.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유다국은 특유의 관점과 역사를 담은 법전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에 수록된 법전, 곧 학자들이 ‘신명기법전’(Deuteronomy Code)이라고 부르는 법 문서다. 이 문서가 만들어진 시기는 요시야 시대다.
아래 도표는 두 법전이 안식일법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비교한 것이다.
위에서 보듯 두 안식일법의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안식일에는 반드시 쉬어야 한다. 쉼을 누리는 대상은 집주인, 자녀, 종, 가축, 그리고 식객(גֵּר, a stranger)이고, 그런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이는 집주인이다.
한데 두 안식일법에는 다른 부분이 있다. 도표에서 이탤릭체로 표시한, 법 제정의 동기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출애굽기〉는 창조 때에 하느님이 쉬었으니 모두 그날엔 쉬라고 하는 데 비해 〈신명기〉는 출애굽 때에 하느님이 구출해 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쉬라고 한다. 전자는 쉼 자체가 우주의 질서임을 말하고 있다면, 후자는 해방받은 것을 기념하는 쉼이다. 아마도 〈신명기〉 문서를 만들어낸 요시야 개혁의 주체세력은 안식일의 쉼이 일종의 ‘구원을 상징하는 가상적 체험’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요시야 정부가 바로 그런 잠정적 구원을 가져다 줄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겠다. (‘긍극적 구원’은 신의 영역이니 왕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두 법전에서 안식을 실행하는 주체와 안식을 누리는 대상에 관한 내용은 일치하지만, 안식에 관한 철학, 그 법 제정의 정신은 동일하지 않다.
이러한 안식일법은 안식일 제사가 이스라엘국과 유다국에서 널리 거행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대중의 일상 깊게 스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초점은 그날 수행되는 제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땅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쉼의 날이 되게 하라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서 제사와 노동금지는 어떻게 연관되는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날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안식일 제사는 여전히 중요한 행사였을 것이다. 여기에 안식일법은 그날은 제사를 드릴 뿐 아니라 노동을 멈추고 쉬는 날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제사종교에서 계율종교로
그런데 식민지 재건공동체 시대에 오면 안식일법이 다르게 해석된다.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는 요소가 약화되고 제사가 강조된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반드시 쉬어야 하는 안식일이다. 거룩한 모임을 열어야 하고,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날은 너희가 살고 있는 모든 곳에서 지킬 주의 안식일이다. (〈레위기〉 23,3)
계약법전, 신명기법전 등과 아울러 3대법전이라고 불리는 ‘성결법전’(Code of Hollness)의 안식일 규정이다. 성결법전은 식민지 재건공동체 시대의 법문서다. 이때 유다재건사회는 제사장 중심의 귀족과두체제의 사회였다. 제사장이 중심인 사회니 제사가 중요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 ‘쉼’은 추상화되고,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는 구체적 규정은 사라졌다. 오히려 ‘쉼’의 의미가 ‘고행’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 날은 너희가 엄격하게 지켜야 할 안식일이다. 너희가 스스로 고행을 하는 날이다.”(〈레위기〉 16,31)
한데 제사장이 주도하는 사회라는 얘기는 중앙 제사장 권력이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 중앙성전의 위상이 압도적으로 높아졌고 지방성전의 위상은 추락하였다. 과거 군주국 유다 시대의 요시야 개혁의 슬로건인 중앙성전 중심주의는 왕권이 지방에 미치는 것을 방해하는 지방호족들의 아지트인 성전을 견제하려는 정책이었는데, 식민지 재건공동체 시대에 오면 이 슬로건이 그 발생맥락과는 다르게 적용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방성소에서 제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니 실제로는 여전히 많은 제사들이 수행되었을 것이다. 중앙의 지배권력은 이를 사교(邪敎)적 집회로 간주하였지만 많은 대중은 그 제사를 통해 악령이 퍼뜨리는 재앙을 견뎌냈다. 지방 제사장들은 지방성소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제사의 주관자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는 중앙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국가적 종교의례에 차출되어 중앙성전에서 거행되는 제사의 허드렛일 하기도 했다. 여기에 지방제사장들의 모호한 이중성이 존재한다. 그들은 촌락에서 마치 사교의 교주(敎主)처럼 독자적 종교엘리트인 양 행세하면서도 동시에 예루살렘 중심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어, 중앙 이데올로기의 지방화를 위해 일했다.
아무튼 제사장이 중심인 사회로의 변화는 대중의 일상 속에서 안식일 제사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7일마다 거행되는 제사보다는 중앙성전에서 벌어지는 연중행사가 더 강조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만 중앙의 관점이다. 대중은 여전히 일상을 덮치는 악령의 마수를 견뎌내야 했다. 그래서 지방의 사교화된 제사가 여전히 소비되기도 했지만, 또 다른 구원의 장치가 필요했다. 사교적 제사가 아닌 정통의 위상을 갖는 장치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글’을 주목하게 된다. 과거 글은 중앙정치세력이 탄탄한 정치경제적 기반을 갖추었을 때 활용된다. 저장성(Storage capacity)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글’이라는 매체는 왕을 까마득하게 먼 조상, 심지어 신과 연계시킬 수 있는 탁월한 도구였다. 가령 국가들은 나라의 창건설화를 신의 우주창건설화와 연결하곤 했다. 이렇게 글을 통해 왕은 신과 연결되는 막강한 위상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글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그 형체도 보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데 있다. 즉 백성이 철저히 탈주체화된 사회에서 글은 통치의 도구였다.
한데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사회에서 문자혁명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것은 우선 상형문자가 아니라 알파벳문자가 널리 활용되는 시대와 맞물린다. 대표적인 것이 아람어와 헬라어다. 그것이 위력을 발휘한 시대는 시리아 지역어의 국제화된 버전으로서의 아람어를 통치에 활용한 페르시아 제국 시대와, 그리스 지역어의 국제화된 버전으로서의 (코이네) 헬라어(Κοινη Ἑλληνικη)(3)를 통치에 활용한 알렉산드로스의 제국과 그의 후계자들의 제국들(헬레니즘제국들) 시대다.
이 시기에 문자혁명이 일어나는 데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휘하 장수 중 한 사람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기원전 367~283)가 이집트에서 헬레니즘 제국을 건국한 뒤(기원전 305)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 대규모 도서관 건축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원전 309~246) 때에 완공되었는데, 그 장서가 무려 70만 권에 달한다는 전무후무한 초대형이 도서관이다. 제국은 건축 못지 않은 막대한 기금을 마련하여 서적수집관을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곳곳에 파견하였다. 그런 만큼의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제국만이 할 수 있는 사업이다. 이로 인해 지중해 곳곳에서 필사자들의 수요가 급증했다. 또 이러한 기록물 수요의 폭증은 저렴한 필기도구인 파피루스의 소비를 크게 진작시켰다. 요컨대 민간서기관들이 담론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후 그들은 대필자, 변호사, 학자, 각종 기록관 등 글과 관련된 다양한 직종을 탄생시켰다. 성서의 지혜문학 중 일부는 아마도 이런 민간서기관들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 글들은, 왕의 이야기가 아닌, 글쓰는 이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를 다루곤 했다. 또 대중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가 있는 일종의 대중소설을 쓰기도 했다.
한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중해 곳곳에서 이들 대중적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정치적 운동들이 벌어졌다. 즉 대중정치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기원전 5세기경 등장한 로마의 호민관(tribunus plebis)은 그런 현상을 반영한다. 또 비슷한 시기 이른바 견유철학자들, 곧 개처럼 떠돈다는 뜻의 ‘퀴니코스’(κυνισμος)라고 불리는, 이들 떠돌이 지식인들도 글을 쓸 줄 아는, 그리고 대중 사이에서 활동하면서 간혹 대중을 정치적 공론의 장으로 호출해낸 이들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좀더 혁신적인 대중정치인들의 흔적이 보인다. 묵시문학은 대중의 메시아적 열망을 재해석한 혁신적 기록물들이다. 이들 묵시가들 중에는 〈다니엘서〉 11,25의 ‘마스킬림’(히브리어 maskilim, ‘지혜 있는 지도자’) 같은 묵시운동가들도 있었다. 그리고 하시딤, 바리새 등도 그런 맥락에서 등장한, 문자를 활용할 줄 아는 대중운동 지도자들이었다. 하스모니아 왕국 시절 바리새파는 대중을 중앙정치 무대로 끌어왔고,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 시절(기원전 76~67)에는 집권세력이 되기도 했다.
비록 대중은 글을 읽지 못했지만 글을 읽는 이가 대중에게, 판소리나 마당극처럼, 낭송의 형식으로 들려주곤 함으로써 글의 소비자가 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밖에 억울한 일이 있어 재판을 받을 때 민간서기관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과거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확장된 국제교역 과정에 일정한 역할을 부여받은 이들도 거래장부를 위해 민간서기관을 필요로 했다. 아무튼 글을 읽든 읽지 못하든 대중은 ‘글’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마치 동물 같은 형상이 종교적 상징이 되듯 글자가 종교적 표상이 되기도 했다.
위에서 보았듯 하스모니아 왕국 시절 바리새파라고 불리는 문자계층의 대중지식인들이 중앙정치의 장에서 집권세력으로 부상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주로 도시와 시골의 미시적 공간에서 대중과 일상이 겹치는 곳에서 활동했다. 그들이 대중과 만나는 미시적 공간의 장소가 바로 ‘(마을의) 회당’(συναγωγη, 쉬나고게)이었다. 회당의 유례를 명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지만, 미시적 공간에서 제사장 종교가 사교화되면서 그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 회당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회당을 주도한 이들을 대체로 바리새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들 바리새파 사람들에 의해서 회당을 중심으로 안식일 신앙이 재동력화되었다. 이때 그 새로운 구동 장치가 바로 ‘글’이었다. 율법으로 해석된 다섯 권의 책 ‘토라’는 대중에게는 너무 먼 텍스트다. 그것은 이전까지는 제사장들의 율법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 문자 덩어리를 일상의 계율들과 매칭시키는 가르침을 배우는 장소, 그것을 지키거나 지키지 못함으로써 보상과 체벌을 받는 것을 확인하는 장소, 그것이 바로 회당이었던 것이다.
하여 극단적으로 대중은 회당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자와 들어가지 못하는 자로 나뉜다. 이때 회당 안의 사람들은 구원의 가능성 앞에 열린 죄인이다. 그것이 가능성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회당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안과 밖의 이분법은 바리새적인 회당체제가 작동되는 데 있어 필요불가결한 요소였다. □
[후주]
(1) 예후가 주도한 반오므리 혁명에 성공하여 왕의 국사가 된 엘리사는 왕까지도 그 존엄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최고의 권세를 누린 인물이다. 하여 그에 관한 기록 대부분은 정사의 형식을 띠고 있다. 반면 엘리야는 평생 오므리 왕조의 집요한 추격을 피해 도주하며 활동했던 급진적 비판자였다. 그래서 그는 집도 가족도 재산도,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그를 열광했다. 하여 엘리야 이야기는 훗날 대중설화 형식으로 남겨졌다. 이렇게 엘리야와 엘리사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던 예언자들이다. 단지 공통점이 있다면 양자는 오므리 왕조에 대항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엘리사 이야기 중에는 대중설화 형식을 띤 것들이 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형식은 그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설사 그런 전력이 있을지라도 정사를 쓴 사관들은 이런 것들이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은 예후 당국이 혁명에 성공해서 집권하게 된 이후에도 지지기반이 빈약했던 탓에 대중에게 인기 있는 엘리야 이야기까지 엘리사의 이야기로 흡수함으로써 대중의 지지기반을 확대하려 했던 결과가 아닐까 한다.
(2) 조선시대 제주에도 비슷한 신앙이 있다. 일룃당(七日堂)이라는 신당이 있는데, 이름에도 드러나듯 매달 7일에 제를 올리는 신당이다. 이 신당의 신 일렛할망은 아이의 육아, 특히 치병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3) ‘코이네’는 ‘공용의’라는 의미를 갖는 형용사다. 즉 코이네 헬라어는 알렉산드로스가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에 걸친 거대 제국을 만들었을 때 제국의 폴리스 간에 통용되던 국제어로서의 헬라어를 말한다. 이는 헬라어의 본토인 그리스 지역에서 통용되던 헬라어의 국제화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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