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논문

‘낯설음을 향한 욕망’으로서의 신앙

이 글은 나의 책 [반신학의 미소](삼인 2002)에 실렸고, 2009년 다지원 강의 때에 약간 수정 보완한 원고입니다

낯설음을향한욕망.pdf

-------------------------------------------------------------------------


낯설음을 향한 욕망으로서의 신앙

 

 

 

 

 

 

1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동명소설(1952)을 영상화한 엘리아 카잔Elia Kazand 감독의 '에덴의 동쪽'East of Eaden(1955), 청교도적인 중산층 농민 아담이 전 아내였던 케이트를 너무나 빼어 닮은 작은아들 칼을 미워하고 자신을 닮은 큰아들 아론을 편애함으로써 일어나는 일련의 비극적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들의 증오와 편견 배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미국에서 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사회의 전면적 재편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역사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소설은 단순히 한 가정의 가족사에 그치지 않고, 한 편의 문명 비평사로 확대해석할 여지를 보여준다. 비록 카잔이 매카시즘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동료 8명을 광분한 이념의 희생자로 헌납한 비겁한 전력의 장본인임에도, 원작의 문제의식을 압축적이고 한층 정돈된 모습으로 재현시킨 그의 탁월한 재능 덕에 우리는 이 영화에서 동시대를 보다 첨예하게 읽으려 고뇌하는 한 소설가의, 지성의 얼굴을 훨씬 더 잘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이 영화/소설은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독서자의 시공간에서 재현해내는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소설을 독서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첨예한 시대 읽기를 통한 고전(성서) 읽기의 훌륭한 전범典範이라고 감히 평하고자 한다.[각주:1]

그런데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인간 비극의 원형성을 문제시하고 있다면, 이 영화는 친숙함을 추구하는 인간 욕구에서 비극의 원형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과 닮은 것에 친숙함을 느낀다. 그런데 닮음에 대한 느낌은 사실 대단히 모호한 판단이다. 가령, 어떤 이는 그와 입이 더 닮았고, 다른 이는 코가 더 닮았으며, 또 다른 이는 말투가 닮았고, 또 어떤 이는 체격이 닮았다면, 이 네 사람 중 그와 가장 닮은 이는 누구인가? 이처럼 닮음이라는 판단에 관여된 비교대상은 너무 많고 다양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것이 그()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많은 비교대상가운데 특정한 것에 의해 우리의 판단이 과잉결정된 결과다.

한편 이러한 닮음에 대한 사람들 각자의 선택과 판단이 순수하게 자율적 판단에 기초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집단적인 공명 현상이 동반된다.[각주:2] 심지어 인간 사회를 닮은 사람들과 닮지 않은 사람들로 구분해내는 무수한 제도들의 네트워크라고 규정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곧 사회 제도란 무수한 우리[각주:3]타인을 생산하는 기재다. 여기서 제도라 함은, 친숙함에 대한 편견과 편애의 메커니즘이 단지 존재 외부에서 강제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 내부로부터 작동되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규격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규격화를 무의식적으로 체득한 인간으로 하여금 이 타자에 대한 배제주의적 제도의 자발적 공모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제도 속의 사람들은 자신과의 관계망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자신의 모사형으로 만들려 한다. 아담은 케이트를 사랑했으나, 그가 진정 사랑한 대상은 케이트가 아니라 아담 자신이 상상하는 현숙한 여인상이었다. 그는 이 여인상과 케이트를 동일시하려 했고, 그녀가 그런 여성이 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런 친숙함에 대한 욕구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순종적인 전통적 여성이 아니었다. 전통적 가치로는 도무지 바람직하게 볼 구석이라곤 없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선, 근대 도시의 진취성과 도구주의적 냉혹함을 동시에 갖춘, 그리하여 근대사회의 성공해법을 본능적으로 아는 지혜로운 인물이기도 했다. 근대화라는 사회의 시대적 변모는 인간 가치에 대한 판단기준을 한결 복잡화시켰던 것이다. 결국 닮음에 집착하는 전통적 인간 아담과 시대의 변화를 체화함으로써 차이를 존재 속에 실현하고자 했던 케이트는 파경에 이르렀고, 이후 그들 간의 증오는 그들의 경험과는 무관한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리하여 편견과 증오는 세대를 관통하며 전이된다.

이러한 제도 속의 사람들은 자신의 관계망 외부의 사람들, 즉 타인을 자신과 무관한 존재, 별개의 운명을 타고난 존재로 여기려 한다. 그런데 사회 속에서 타인은 대개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겨냥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우리의 무관심의 대상인 타인은 바로 이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또 한 번 능욕당하고 수탈당하는 존재가 된다. 요컨대 배제와 박탈은 대체로 한 쌍을 이루게 된다.[각주:4]

그러므로 친숙함에의 욕구를 통한 우리됨을 정체성이라고 부른다면,[각주:5] 타인에 대해 배타적인 우리의 정체성은 동시에 가학적 세계의 형성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를 동반하며 발전한 근대사회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가학적 세계 및 그 세계의 제도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이다. 요컨대 근대사회는 산업화된 우리 시대로 재현된 친숙함의 욕구 체제라고 할 수 있다.

 

2

 

미국에서 근대화가 급진전된 시기가 영화 에덴의 동쪽의 시간적 배경이던 제1차 세계대전 어간이라면, 한국에서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계기는 1960~70년대다. 이 시기 이래 최근까지 한국사회는 급속도의 압축적인 성장condensed growth을 향한 질주를 거듭해 왔다. 이러한 한국적 근대화 과정을 개념화하는데 돌진적 성장rush-to growth이라는 용어가 최근 널리 사용되고 있다.[각주:6] 이는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기보다는 모든 가용한 사회적 자원을 동원하여 총량적 경제성장에 투입하는 방식의 성장주의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연 환경에 대한 성찰적 가치reflexive value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라는 집단적 정체성에서 외부로 규정된 다른 인간(타인)이나 자연 세계를 주변화시킨다는 말이다. 우리 외부의 타자the others를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단지 수단으로서만 취급하는 태도다. 돌진적 성장 과정은 타자적 존재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책임감 자체를 문제시할 여유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 한국의 근대화는금세기 초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매우 파행적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근대화/산업화의 부작용을 완충시켜보려 했던 유럽의 국가복지적 실험이 우리에게 전무하게 된 결과이기도 하다.

스타인벡의 또 다른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1939)가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급속히 추진된 압축적 산업화는, 이 근대화의 달콤하고 풍성한 포도열매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밀려난 자들의 절망과 분노를 가중시킨다.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존의 터전이자 조상의 숨결이 살아 숨 쉬던, 존재의 전통적 안착지였던 땅을 버리고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전통적인 존재의 근거로부터 뿌리 뽑힌 사람들의 광범위한 사회적 이동, 그 대대적인 사회적 동원 과정이 질풍노도처럼 급속도로 전개된 나머지 사람들은 대안적 가치를 형성할 만한, 아니 그러한 가치를 위해 현재를 성찰적으로 되돌아볼 만한 여유를 누릴 수 없었다.

근대화/산업화 사회의 냉혹한 생존 경쟁의 정글 속에서, 급속한 사회적 이행기의 사람들은 잃어버린 전통적 안착지를 대신할 대안적 공간을 만들어 가게 된다. 급속한 압축적 성장 속에서 불균등성의 심화로 인한 불협화음을 흡수할만한 사회적 안전망이 효과적으로 구축되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사적 영역에서 대안 공간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각주:7] 문제는 오늘날 파행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지연 혈연 학연 등의 집단화가 바로 이런 사적인 대안적 안착의 공간을 추구한 하나의 실례라는 사실이다. 생존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공공성이 결여된 사적 집단주의가 사회 곳곳에서 만연하게 된 것이다. 자신과 닮은 사람들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이러한 닮음의 체계를 통해서 사회적 이익의 분점 구조를 형성한 것이다. 그리고 파행적인 돌진적 성장으로 인한 존재의 뿌리 뽑힘에서 오는 불안과 좌절, 그리고 분노를 경계 밖 사람들(타자)을 향해 터뜨린다. 이러한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면서, 타자에 대해 폭력적이고 가학적이며 무배려한 태도는 이제 우리 모두의 습성화된 얼굴로 정착하고 말았다. 요컨대 너나할 것 없이 이러한 배제주의적 담론의 공모자가 되었던 것이다.

근대사회는 지난 시대의 어떤 역사보다도 더욱 파괴적인 가학성을 발현시키고 있다.[각주:8] 로마서에서 바울이 지적했듯이,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다 고통의 신음 소리를 내며, 형제에 의해 죽임당한 아벨처럼 하늘을 향해 절규하고 있다(로마서8,18~25참조). 그것은 우리 인간이 타자를 관계 속의 공동운명체로 보지 못해 왔던 오랜 모반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 정점에는 분명 근대 산업사회가 있다. 그것은 전쟁 같은 공공연한 파괴의 역사뿐 아니라, 창조와 재건의 순간에조차 타자를 도무지 배려하지 않는 이른바 도덕적 해이를 전제하는 역사다. 곧 울리히 벡Ulich Beck이 입론화한 위험사회risk society란 바로 이러한 죄성으로 인한 배제주의적 가학성과 근대성 간의 상관관계를 말하고 있다.[각주:9] 그럼에도 더욱 근대화된 선진 산업사회는 위험의 완충장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완충장치의 이면에는 분명 제국주의적 지배-종속의 국제적 관계가 있다. 요컨대 '더 근대화된' 사회의 충격 흡수를 위해 '덜 근대화된' 사회의 파행적 발전이 구조화된 것이다.[각주:10]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의 돌진적 성장은 이중의 위험사회dual-risk society적 요소를 담고 있다.[각주:11] , 보다 많은 근대화로 인한 위험과 보다 적은 근대화로 인한 위험의 복합 구조.

여기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돌진적 성장과 그로 인한 무수한 사람들의 존재로부터의 뿌리 뽑힘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던 바로 그 시기에, 한국교회 또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사회적 위기와 아노미 현상으로 인해 막대한 반사이익을 얻은 것이다.[각주:12] 교회와 그리스도교가 전통적 존재 가치의 근절로 인한 심리적 불안을 충족시켜 주는 유력한 대안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교세에 있어서 고속 성장을 거듭해온 교회가 또 하나의 우리 중심주의의 본거지에 불과했다는 지성계 일각의 비판을 겸허하게 듣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공공성을 상실한 사적 집단주의의 종교적 발현을 한국 근대사의 그리스도교회에서 가장 명료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의 방주로서의 교회의 안과 밖, 신앙과 비신앙, 구원/축복과 심판 등 동어반복에 불과한 무수한 경계화boundarization를 내포하고 있는 교리는 '우리'와 타자간의 간극을 신의 이름으로 조장, 절대화했다. 때로 이러한 교리는 각종 분노의 생산 공정의 알고리듬 역할을 담보해 왔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과잉의 레드 콤플렉스는 바로 그 단적인 예다. 교회는 한국사회에서 공세적인 냉전적 반공이데올로기의 생산공장이요, ‘에 대한 분노를 생생하게 재생해내는 가공처리공장의 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과도한 반공주의는 돌진적 성장이 낳은 파행성으로 인한 사회적 불협화음을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으로 변조시켰다. 그리하여 교회와 그리스도교는 돌진적 성장이 야기한 고통의 질서를 성찰적으로 반성하고 개혁하게 하는 영성spirituality을 간직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21세기를 맞기까지의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교회의 사회적 위상은 단적으로 말해, 제거하는 편이 훨씬 낳은 암세포에 불과했다.

 

3

 

1995년 출범한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세계무역기구) 체제는 맘몬의 질서에 더욱 순종적인 지구촌적 질서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97년 말 갑자기 몰락해버린 한국 자본주의는근대화의 실패로 말미암은 것이라기보다는돌진적 근대화의 성공 바로 그것으로 비롯된 결과다. 파행적 성장의 이면인 위험요소가 폭발적으로 분출한 것이다.[각주:13] 그런데 바로 그 결과는 WTO로 표상되는 지구적 맘몬 의 진주에 불안해하면서도무장해제된 상태에서환영의 깃발을 흔들어야 하는 이율배반적 비극을 낳았다.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를 경유한 지금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거대한 파도에 휘말린 한국의 선택 여지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이제 새로운 천 년대를 맞이하면서 구체적 사실로 체감되고 있고 향후 한참 동안 우리의 경험을 지배할 것으로 예상되는,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지구화라는 근대화의 현재 이후 양상[각주:14]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구화는 전자통신기술상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전지구적인 공간적 거리가 축소되고, 이에 따라 인간의 경험이 지구적 공간 속으로 포섭되는 정도가 비약적으로 증대되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제 현상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 하지만 현재 이러한 지구화 현상을 추동하는 것은 자본의 운동이다. 그리하여 시장의 외연적인 확대시장 논리의 심화가 동시적으로 관철되는 신자유주의적인 지구적 경제체제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 WTO는 이러한 지구적 경제체제를 추동하기 위한 국제정치적 장치이며,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전망을 미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지구적 경제체제에서 금융시장은지구화라는 말이 함축하는바이미 지리의 종말end of geography을 구현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각주:15] 근대적 경계화의 전통적인 정치적 기초였던 국가의 특권적 지위[각주:16]는 금융시장의 탈지리성에 의해 격하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가와 자본 간의 갈등적 연계의 양상이 변모되고 있다. 가령, 선진적 근대화를 이룩한 사회에서 갈등의 완충장치로서 성립되었던 국가복지나 민주주의 제도는 오늘날 일반적인 위기를 맞고 있으며, 향후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측된다.

한편 인터넷 등을 매개로 하는 사이버 소통 현상 또한 지구적 경제체제의 확고한 구축을 뒷받침하는 주요 부문으로 이미 그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이들 사이버 매체는 국가라는 장소적 매개가 미처 통제할 수 없는 엄청난 정보를 개개인에게 쏟아 붓고 있으며, 이러한 접촉 과정에서 개개인의 무의식까지도 시장 전략의 동원 대상으로 노출된다. 여기서 자본의 공략을 받은 개인의 욕망은 근대적 계몽성을 교란시키며, 이로 인해 개개인은 탈가치화와 정체성 혼란을 체험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지구적 전자통신기술을 매개로 공간 정복을 더욱 첨예하게 실현할 지구적 자본은 장차 무소부재의 권력을 더욱 완전하게 실현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그 능력의 무한한 가능성은 가히 전지전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각주:17]

1980년대 이후 이미 세계의 많은 국가들에서 고용의 유연화 정책이나 복지제도의 후퇴 등을 전제로 하는 지구적 자본의 유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국가들/도시들 간의 바닥을 향한 경쟁race to the bottom은 국가가 자본에 굴복하는 시대의 사회적 추세를 나타내며, 이것은 국가의 보호막을 상실한, 존재로부터 뿌리 뽑힌 대중의 유랑 현상을 동반한다. 한편 바닥을 향한 경쟁에서 낙오된/될 집단 사이에서 지구적 통합에 반동적인 혈연적 지연적 종교적 결속이 형성되고 있는데, 이러한 집단화는 자본의 광풍으로 인한 존재의 뿌리 뽑힘을 방어하기 위해 광적인 자폐적 정체성을 추구한다. 이른바 신부족주의neotribalism라고 하는 고강도 공동체주의적 정치의 출현은 과도한 배제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족주의 정치는 타자적 대상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제노사이드zenocide 연출하고 있다.[각주:18] 바로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 유랑 현상의 또 다른 맥락이다. 더 나아가 지진, 기근, 기상 이변(엘니뇨, 라니냐 같은) 등 자연환경의 반란으로 인해 존재의 뿌리 뽑힘은 더욱 증폭된 현상으로 구조화된다. 그밖에 사이버 시장에 세뇌된 대중의 정체성 상실로 인한 가치의 유민화 현상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선사시대 기근과 질병과 전쟁 등 각양의 생존의 위기 속에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알 수 없는 희망의 땅을 찾아 기나긴 유랑 길에 올랐던 아브라함 일가처럼, 근대화 초기 미국에서 도시화와 산업화의 거센 물결에 밀려 존재의 얼이 깃든 본향을 떠나 트랙터를 타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에 올랐던 조드 일가처럼(분노의 포도), 지구화 시대 또한 유랑이라는 저주받을 운명에 세례 받은 존재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실은 지구화 시대의 존재의 뿌리 뽑힘은 이제까지의 어떤 체제보다 더욱 광범위하며, 더욱 내면화된 현상이다.

이제 한국도 지구적 자본이라는 전능자와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존재는 국경을 넘어 지구적 범주의 체제를 구축해 가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지배하려 달려들고 있다. 마치 점점 더 강해지는 악의 힘으로 똘똘 뭉쳐서 혜성처럼 돌진해와 파괴의 잔해만을 남기고 떠나버리기라도 할 양.[각주:19] 벌써 우리는 저 전능한 악의 화신의 규칙대로 타자를 배제하고 증오하는 체제의 건설에 돌입하고 있기도 하다. 1999년부터 본격화된 경제 회복기 및 도약기를 맞이한 한국의 사회경제적 재건의 방향과 지배적인 담론 지형은 그러한 징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신자유주의적인 안팎의 자본의 대공세 아래서 민중적 개혁의 가능성과 비전은 극도로 위축되어 있다.

과연 우리에게 미래는 있을까?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날 담론 지형에서 지구적 자본과 쌍생아적인 모습을 한 신이 우리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언술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그는 승리의 신이며, 승리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존재며, (만만한 대상들만 골라서 선정한) 타자에 대해 배제와 폭력을 자제하지 않는 존재다. 과연 이런 종교의 제자들에게 미래는 있는가?

그런데 미래에 대해 결코 낙관할 수 없었던 나는 분노의 포도에서 하나의 대안적 희망을 발견했다. 조드 일가는 고향과 존재의 본향을 상실한 뒤 산업화의 황폐함 속에서 불모처럼 보였던 삶을 연명해 나가야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력이 회복된다. 스타인벡은 이 생명력의 회복 과정을 조드 일가가 자본가적 심성으로 무장한 존재로 적응해 가는 과정으로 그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비자발적 유랑의 현실을 자발적 유랑으로 전위해 가는 존재론적 선택을 통해 그것을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유랑의 노정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타인들에 대한 이타성의 회복을 통해서 구현된다. 그들은 유랑의 길에서 친밀함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고, 그 자리에 낯선 타인을 포용하는 자기 초월의 영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사실 스타인벡 자신의 상호텍스트적 성서 읽기의 한 예다. 그는 여기서 광야 유랑기의 이스라엘에 관한 성서를 읽고 있다. 정처 없이 광야를 유랑해야 했던 이스라엘의 유랑은, 전능자처럼 보였던 이집트의 풍요의 신상과 같은 야훼상을 구축함으로써가 아니라, 바로 민중의 신 야훼의 백성으로 새로 태어나는 경험을 통해서 종결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 사회는 평등공동체적 이타성을 신앙적으로 체현한 사회였다. 그것은 유랑의 끝, 젖과 꿀이 넘치는 새로운 유토피아일지언정, 결코 풍요로운 사회는 아니었다. 즉 이스라엘의 탈이집트는 이집트의 풍요를 넘어선 더 큰 풍요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풍요로의 길, 즉 전제군주적 국가로의 길과는 다른 길을 의미한다. 전자가 안착지를 향한 정착의 길이라면, 정착자의 우두머리인 신/파라오의 권력을 정점에 두고 펼쳐지는 독점과 착취의 길이라면, 이스라엘의 길은 그 정반대의 길, 자발적 유랑의 노정, 이타주의적 사회체제 혹은 존재로의 끝없는 자기 갱신의 길[각주:20]을 의미한다.

 

4

 

최근 코스보에서 펼쳐졌던 제노사이드는,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하고 서유럽과 북아메리카 자본주의의 동진東進이 일으키고 있는 회오리 광풍에 대응하려는 수구적 국지주의와 종족주의의 파괴적 발흥과 무관하지 않다. 소종족들은 지난날의 느슨한 정치제도적 연대로는 이 무시무시한 바람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보다는 종족 내부의 결속이 훨씬 중요하며, 이는 해묵은 종족간 적대감을 한껏 발기시키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이때 이 해묵은 적대감, 세르비아 족속과 알바니아 족속간의 반목과 편견의 역사는 무려 6백 년이나 된 것이다.

아버지의 축복을 도적질당한 에사오의 분노를 삭이려고 어머니 리브가는 시간 지연전략을 편다. 대개의 사람이라면 시간이 흐르면 자연 분이 삭기 마련이고, 이때 성찰적 태도로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성서는 리브가의 화해 기도가 실패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야곱과 에사오의 반목이 이스라엘과 에돔 족속간의 적대감으로 자손대대로 이어졌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리라. 마찬가지로 6백 년이나 지연된 시간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족속간의 적대감은 삭기는커녕 더욱 증폭되었다. 그런데 이 친숙함을 추구하는 욕구체계인 자종족 중심주의에 오래 전의 악연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종교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라는 종교 간의 기억술은 분노의 시간저장고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한 정치인이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해 기억의 타임캡슐을 개봉하자, 판도라의 상자에서 탈출한 분노의 악귀가 종족간의 제노사이드를 야기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종교의 기억술이 이렇게 놀라운가? 그 긴 기간 동안, 분노를 삭힐만한 숱한 계기들이 있었을 텐데, 어쩌면 다른 대상으로 분노가 전가될만한 계기들도 많았을 텐데, 우리의 종교는 오직 한 대상을 향해 불타오를 증오만을 기억해왔다. 그 불꽃이 활활 타오를 그때를 염원하면서. 그리하여 마치 메시아의 때가 도래하는 것처럼 불의 때가 당도하자 그리스도교는 우리중심적 정체성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신부족주의 현상의 견인차 역할을 했고, 그만큼 우리외부의 타자를 극렬하게 배제하고 우리의 공간에서 추방시키는 가학성, 말하자면 인종청소라는 흉물스런 잔혹극을 또 한 번 저지르고 말았다인류 역사상 제노사이드를 이처럼 많이 자행한 종교는 일찍이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죽임당한 이가 하늘을 향해 절규할 때 과연 그리스도교는 뭐라고 기도해야 할지...

서로 아버지의 축복을 독차지하려고, 형제를 타인으로 삼고 그를 짓밟음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했던 야곱과 에사오의 분노의 정치는, 자손 대대로 이어진 적대의 씨앗이 되었고, 그 후손들도 선조가 남긴 유산을 아낌없이 승계하여 적대를 더욱 증폭시키는 냉혹함의 정치의 공모자가 되어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이런 분노의 정치를 매우 효과적으로 승계한 종교의 입지를 구축해 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종교의 정전인 성서는 이러한 우리 중심주의의 물결에 저항한 반항적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숱하게 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예언자 아모스는 이스라엘과 유다와 인근의 여러 종족들을 향한 심판의 신탁을 선포하는 중에, 에돔과 이스라엘간의 형제다운 화합정신의 회복을 갈구하는 심정을 내지르고 있다.

 

나 야훼가 선고한다.

에돔이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에돔을 벌하고야 말리라.

동기간의 정을 끊고

칼로 겨누며 달려들었다.

사뭇 증오심에 불타올라

끝내 앙심을 풀지 않은 죄 때문이다.

―〈아모스서111~12

 

나아가 절망이 가장 깊은 현실에서 희망이 물결치듯 솟구치는 메시지를 내뿜고 있는 제3이사야서(이사55~66)는 메시아가 바로 원수종족 에돔에서 온다는 깜짝 놀랄 선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에돔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중략)

나는 구원을 약속하는 자,

도울 힘이 많은 자이다’“

―〈이사야서631

 

2성서의 히브리서를 보면 유랑하고 박탈당하는 자들, 권력이 자행하는 폭력에 노출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는 자들의 고난의 역사에 가슴아파하며, 이러한 고난의 역사의 종식, 즉 구원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사건이 단 한번임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 희생은 끝나야 한다는 강한 염원의 표현이리라. 그런데 그 대안적 실천을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처럼 영문 밖으로 나가라고 말하고 있다(13,13). 이것은 영문 밖이 고난의 담지자들이 있는 현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동시에, 그러한 고난의 담지자인 히브리서의 그리스도인들 자신도 또한 영문 안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 영문 밖으로 가라는 것은 이중의 경계를 넘는 실천을 시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지배권력이 설정한 특권과 비특권의 경계요, 다른 하나는 그것에 저항하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특권구조의 경계다. 전자가 권력에 대한 비판의 차원이라면, 후자는 비판의 비판이라는 함의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에게서 이러한 문제의식의 가장 철저한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예수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원론적인 신조에 따르면, 예수는 신의 자기중심주의의 해체로서 강령화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 고전적 강령에 의하면, 그는 본래 하느님이었으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절멸시켰다는 것이다. 전능자가 구원할 능력이 부족해서 변신했다는 뜻이 아니다. ‘전능자부족이라는 말은 이율배반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전능자는 구원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 전능자적 존재인 자신을 해체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최근의 시 한편을 떠올린다.

 

내가 퇴행을 각오하면서까지

너의 네 줄 가로무늬를 주술처럼

지니고 있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내 몸 속의 또 하나의 나인 너를

철갑으로 껴안고 있는 이 고집도 알 수 없다

 

오직 너의 예민한 촉각에 굴종하기 위하여

빛깔 없는 나의 노래는

허공을 흔들고, 단 한순간

천년을 떨게 하는 오르가즘을 위해

그 황홀 같은 기적을 위하여

음지를 기어가며 너와 나의 살점을 뜯는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하든

그것이 소통이 아니라 하든

, 그것이 소멸이고 폐허라 하든

운명처럼 너 있는 곳에 내가 있고

내가 토하는 모든 슬픔이 네 안에 고임에야

 

하여, 장마철 나의 힘겨운 산란은

너를 위한 아름다운 퇴화가 되고

너의 네 줄 무늬는

치욕으로 잉태한 나의 기적이 된다

김철식, 달팽이

 

시인은 세기말의 인류의 위기를 말하면서 원시적 생명체인 달팽이가 되겠다고 자신의 퇴행을 술회하고 있다. 바로 그것처럼 신은 모멸적 존재의 상징인 인간으로 스스로를 퇴행시킴으로써 그 인간의 구원자가 되겠노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상에서 친숙함을 추구하는 우리 중심주의의 욕구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적 문제설정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한국적 근대화의 위기는 우리를 지구적 자본주의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 속에서 우리는 뿌리 뽑힘의 심각한 위협 아래 직면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조건은 신자유주의적으로 지구화된 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아마도 위기는 더욱 증폭될 것이고 훨씬 가중될 것이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또 한 번 친숙함을 향한 욕구에 집착하는 유혹에 흔들리고 있다. 여기서 친숙함의 욕구는 친숙하지 아니한 자, 즉 만만한 타자를 경원시하고 적대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요컨대 우리의 정당성을 위해 누군가 이 되어줘야 한다. ‘우리의 분노의 대상이 되어줘야 한다.

어떤 소경을 보고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묻는다. ‘저이는 누구 때문에 저런 모습을 하고 있나요?’ 예수가 대답하였다. ‘그 때문도, 그의 부모 때문도 아니다. 단지 하느님의 깊은 뜻을 (너희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다라고(요한9,1~3).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그리고 향후 한참 동안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지구적 자본이 야기한/할 악취 나는 위기를 통해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본 뜻은, 우리 외부의 존재들을 향한 사회의 배제를 재생산하는 제도 및 그것에 공조하는 우리를 정당화시켜 주지 않는다. 도리어 이 체제가 배제하고 격리시키고자 하는 존재들, 우리에게 낯선 이들의 얼굴에서 신의 자취를 찾아내려는 자세 속에 하느님의 진리가 있다. 이것은 굶주린 얼굴, 알콜 중독자의 얼굴, 마약 중독자의 얼굴, 가출청소년의 얼굴, 동성애자의 얼굴, 범죄자의 얼굴, 공산주의자의 얼굴 등, 우리의 주류 담론에서 배제된 이의 얼굴로 신이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또 내/우리가 가장 미워하는 혹은 무시하는 이의 얼굴로 현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려는 우리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인은 (교리를 내면화함으로써 혹은 교회 성장을 추구함으로써가 아니라) 낯설음을 향한 욕망으로 사는 자인 것이다.




  1. 성서 읽기의 대안적인 한 방법으로서 최근 ‘상호텍스트적 읽기’intertextual reading가 제기되고 있는데, 나는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이나 《분노의 포도》에서 더 없이 훌륭한 실례를 발견하였다. [본문으로]
  2. 민족의 동족의식이나 가족주의 등이 그 대표적이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적 이해는 ‘이데올로기’의 효과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이하에서 ‘타인’에 대응하는 집합적 존재로서의 ‘우리’는 작은 따음표를 붙여 표기할 것이며, 작은 따음표 없이 사용된 경우는 1인칭 복수의 표현이 담을 수 있는 일반적인 함의를 나타낸다. [본문으로]
  4. 이마무라 히토시는 근대성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인간 중심주의’를 든다. 여기서 인간은 주체의 동일자적 존재, 곧 ‘우리’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타자는 비인간이 된다. 가령, 나치시대 독일인에게 있어서 유태인이나, 반공주의가 전일화된 한국전쟁 이후 남한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는 비인간적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이러한 타자에 대한 배제와 박탈의 메커니즘을 히토시는 ‘식인주의’라고 부른다. 이마무라 히토시, 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서울: 민음사, 1999), 제5장 참조. [본문으로]
  5. 정체성은 자아가 ‘영구불변’한 것인 양 착각하게 한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가 소설 《정체성》에서 냉소하고 있듯이, 자아의 정체성은 사랑하는 아리따운 여인과 늙고 추한 여인을 혼돈하는 것처럼 전혀 확실한 것이 못된다. 영화 감독 루이 브니엘은 ‘욕망의 모호한 대상’의 여주인공을 전혀 닮지 않은 두 여자로 캐스팅했다. ‘2인 1역’의 상황이 영화 속에서 원칙 없이 뒤바뀌면서 연출된다. 그런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두 여인이 계속 바뀌는데도 관객이 전혀 혼돈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이것은 자아가 통일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조화적 상황에 더 익숙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근대에 와서 더욱 기승을 부린 정체성 담론은 고정된 영구불변한 자아를 주장한다. [본문으로]
  6. 한국사회의 파행적 근대화가 담고 있는 독특한 위험사회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돌진적 근대화/산업화’rush-to modernization/industrialization(한상진) 또는 ‘돌진적 성장’(김대환)이라는 개념이 활용된다. 한상진, 〈왜 위험사회인가? 한국사회의 자기반성〉, 《계간 사상》 (1998 가을); 김대환, 〈돌진적 성장이 낳은 이중 위험사회〉, 같은 책 참조. 이것은 울리히 벡Ulich Beck이 입론화한 서구 근대화에 따른 위험사회론을 한국적으로 변형하여 재개념화한 것이다. 울리히 벡, 홍성태 옮김, 《위험사회》 (서울: 새물결, 1997) 참조. [본문으로]
  7. “국가나 법 등 공적 제도가 거래비용을 줄이는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응으로서 사적 제도로서의 연결망이 발달하고 지속한다.” 김용학, 〈연결망와 거래비용〉, 《사회비평》 14 (1996). [본문으로]
  8. 가령, 근대사회는 ‘신뢰의 비가시성’에 의존하고 있다. 예컨대 화폐거래는 거래 상대자에 대한 인지도와는 관계없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때 규칙의 신뢰성은 개인의 품성보다도 초개인적인 사회적 품성과 더욱 관계된다. 더 근대화된 사회일수록 규칙의 엄정성이 개개인에게 내면화되어 비가시적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Y2K의 위험처럼 전산망의 혼란은 금융거래에 있어서 대규모 재앙을 낳을 수 있다. 이때 이 재앙의 원인은 신뢰의 과잉과 관계된다. 이런 점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의 하나는 핵무기와 핵발전소다. ‘체르노빌’처럼 신뢰의 과잉은 광범위한 위험 가능성을 담지한다. [본문으로]
  9. 〈창세기〉 2~11장의 일련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문명의 발전 과정이 폭력성과 파괴의 잠재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과정과 맞물려 있음을 풍자하고 있다. 앞의 주6)에서 소개한 울리히 벡은 현대 서구 선진국들의 근대화를 문명사적으로 검토하면서 근대화의 진전과 위험성의 심화가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는, 이른바 ‘위험사회론’을 제기하였는데, 성서의 J문서 저자는 바로 그러한 사상을 이미 주전 10세기경에 내놓고 있다. 이 책에 실린 나의 글 〈지구화 시대의 정의: ‘말’이 통하는 세계를 향하여(〈창세〉 11,1~9)〉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0. 근년에 한국사회의 근대성과 식민성을 둘러싼 일련의 역사학계의 논쟁은 한국사회의 발전을 내재적 가능성의 발현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의 ‘의도하지 결과’로 볼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 논쟁에서 분명해진 것은 식민지적 수탈체제가 근대화의 주요 요소의 하나이며, 식민지적 근대성이 향후 우리 사회의 파행적 발전의 유제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연태,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의 비판과 신근대사론의 모색〉, 《창작과 비평》 103 (1999 봄) 참조. [본문으로]
  11. 김대환, 앞의 글 참조. [본문으로]
  12. 1970년대 이른바 ‘순복음 열풍’으로 상징되는 한국교회의 급속한 양적 팽창은 박정희 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따른 광범위한 이농 현상과 불가분 연관되어 있다. [본문으로]
  13. 김대환, 〈세계화를 넘어서. 세계화와 국민경제, 그리고 한국경제〉, 《계간 사상》 (1998 겨울), 120~21. [본문으로]
  14. 나는 지구화를 근대성의 급진화radical modernity로 보는 기든스의 견해에 동의한다. 안토니 기든스, 《포스트모더니티》 (서울: 민영사, 1991) 참조. [본문으로]
  15. Richard O'Brien, Grobal Financial Integration: The End of Geography (London: Pinter Publichers, 1992) 참조. 기든스의 ‘장소귀속성 탈피’disembedding도 오브라이언의 ‘지리의 종말’과 동일한 현상을 개념화한 것이다. 안토니 기든스, 앞의 책 참조. [본문으로]
  16. 근대사회는 기술사회학적으로 육지와 해양 교통 능력의 발전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체험공간을 근대 이전 사회에 비해 훨씬 원거리적으로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숱한 지리적 재영역화reterritorization가 이루어지는데, 영토국가는 바로 이러한 재영역화의 가장 중요한 승자였다. 그리하여 ‘우리’와 타자를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범주는 국가가 되었다. 시민이 국민권 개념으로 확대된 것은 그것을 시사한다. [본문으로]
  17. 1999년 개봉된 영화 〈매트릭스〉는 인공지능화된 기계적 체계에서 무소부재의 전능성이 구현된 암울한 미래사회를 상상하고 있다. 그런데 스스로 진화하는 기계의 인간 정복을 소재로 하는 이런 류의 SFX 영화들은 권력을 지배의 욕망으로써만 다루고 있다. 요컨대 기계는 인간을 단지 지배하기 위한 욕망에 의해서 통제할 뿐이다. 하지만 인류 문명사에서 권력을 둘러싼 투쟁에는 자원의 전유를 향한 욕망이 지배 욕망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자본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전유 욕망의 물신적 허구가 사이버리얼리티를 획득하며 의인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18. 임혁백, 〈세계화시대의 민주주의: 현실적 위협과 미래의 대안〉, 《계간 사상》 (1998 겨울) 참조. [본문으로]
  19. 나는 여기서 ‘뤽 베송’이 감독한 영화 ‘제5원소’를 떠올리고 있다. 이 영화는 한편에서는 절대악과 절대선의 대립이라는 헬리웃의 통속적 액션영화의 법칙을 따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악의 세력이 자신의 파괴력의 강도와 세기를 진화시켜 세력을 확장해간다는 과정론적 사유가 함축되어 있으며, 이러한 악의 진화가 인간의 악마성의 발현인 폭력적 대응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관계론적 관점이 게재되어 있다. 나는 이와 같이 인식론적으로 동요하고 있는 이 영화를 후자의 관점에서 읽고자 하였다. [본문으로]
  20. ‘끝없는 자기 갱신’이라는 표현은 ‘성찰적’reflexible이라는 개념을 달리 쓴 것이다. 왜냐하면 reflexible이란 ‘재귀적’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끝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가 스스로를 수정하는 사유의 과정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