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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오클로스와 비참의 현상학 - 오늘의 오클로스를 묻다

이 글은 앞에 게재했던 문화신학회 때의 발표글을 대폭 보완하여, [21세기 민중신학]에 수록한 것입니다. 이 책은 영문본으로 출간되기도 했는데 그것의 제목은 Reading Minjung Theology in the Twenty-First Centur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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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과 비참의 현상학

오늘의 오클로스를 묻다

 

 

 

 

 

1. 시작_안병무의 민중 이해


안병무 선생의 민중 이해 속에는 분열적인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민족적 민중(national minjung)오클로스적 민중(ochlos-minjung)이 그것이다. 전자는 선생과 동시대(contemporary) 민중론자들의 일반적인 이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클로스적 민중은, 다른 이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선생만의 독특한 관점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선생의 오클로스론은 민족적이고 계급적인 민중 개념의 일부로서 이해되거나, 혹은 포괄적인 소외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이런 견해들은 모두 선생의 민중론이 분열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는다. 해서 대다수 연구자들은 선생이 애써 강조한 마가복음에서의 오클로스용례를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오클로스론은 귀속성(attribution)을 갖는 대중인 라오스(λαος)와 대조되는 존재로 해석되는, 마가복음의 오클로스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 귀속성을 비자발적으로 박탈당한 존재로서의 오클로스라는 문제의식에서 한국사회의 민중이 겪는 고통을 읽어내고자 했던 것, 이것이 선생의 오클로스론의 핵심이다. 그리스어 라오스, ‘70인역 성서(Septuaginta)에 따르면, 모세가 받은 야훼의 법 앞에 모인 이스라엘을 지칭한다. 이것은 야훼의 법의 백성, 곧 야훼가 다스리는 나라에 귀속된백성이라는 함의를 갖는 표현이다. 이것은 법익공동체로서의 국민(people)이라는 근대적 개념과 상응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선생의 유명한 글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에서 언급된 다음과 같은 표현과 잘 부합한다. “민중은 전통적으로는 농민이었고, 근대사회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이다. 이들이 생산주체요 기층생산자이다.”[각주:1] 여기서 선생의 민중 이해는 역사의 모순을 담지하고 있는 계급적 귀속의식을 가진 존재. 비록, 70인역 성서의 용례에 따르면 라오스가 민족적 함의를 지닌 어휘이지만, 귀속성을 지닌 기층대중이라는 점에서 선생의 계급적 민중과 유사한 속성의 존재를 가리킨다.

반면 이 글은 오클로스적 민중에 초점이 있다. 그것은 오클로스적 민중이 1970년대 한국의 민중론 가운데 민중신학만의 독특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지구화 시대를 사는 지금 우리의 민중을 논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다음 장(2)에서는 안병무 자신의 어법 속에서 두 가지 민중 이해가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그런데 서남동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 개념은 안병무의 오클로스 민중의 이해와 잘 어울리며, 서로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안병무의 오클로스와 서남동의 을 연계시켜 논의함으로써 민중신학의 민중 이해가 담고 있는 비판이론적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오클로스-의 민중 이해는, 매우 놀랍고 탁월한 문제제기였음에도, 1970,80년대 한국사회의 담론 지형에서는, 민족적 계급적 민중 개념에 비해, 그 의의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의 사회역사적 맥락과 그 담론지형으로 관심을 옮기면 사정은 달라진다. 내가 보기엔, 오클로스적 민중의 문제는 안병무 자신의 시대보다 오늘 우리에게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가 이 주제에 주목하게 된 것은 우리 시대의 민중 현상과 의의에 천착한 과정이고 결과다.[각주:2] 하여 제3장에서는 안병무의 오클로스 담론이 안병무 자신의 시대의 민중 문제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3.1), 그리고 우리 시대의 민중 문제를 이해하는 데 어떤 안목을 제시해 주는지(3.2)를 다룰 것이다.


2. 오클로스론의 논리구조

- 안병무의 오클로스와 서남동의 ()의 개념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에서 민족은 식민지 근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상상적 혈통공동체(imaginary single-ethnic community), 구성원 모두를 동질화하는 결속의 키워드. 이 키워드를 매개로 구성된 결속의 서사는 민족을 침탈하려는 제국의 위협 아래 놓인 희생자적 주체(victim subjectivity)로서 담론화되어 있다. 곧 외부의 에 의해 침략당하고 수탈당하면서 지켜온 땅가족국가의 주체, 그들이 바로 한민족(Korean)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안병무를 포함한 1970,80년대 한국의 민중론자들의 공통감각(common sense)이다. 그들은 독제체제가 민족 구성원의 주권과 인권을 착취하고 유린함으로써 국민 모두에게 민족의 자격을 박탈하고 배제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배제와 박탈의 연장선상에서, 그 끝부분에 배치된 존재가 바로 민중이다. 여기서 민족은, 배제와 박탈의 극한에 배치된 민중을 감정적 동일시(emotional identification)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민족은 민중적 계급의식으로 주체화되어야 한다. 이렇게 민족이 민중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면, 민중과 민족을 배제하고 착취하는 체제를 변혁시키는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민중주체라는 것은 민중을 고정변수로 하고 민족을 민중과 동일시되도록 계급적으로 주체화함으로써 형성된다. 해서 그들에게 민족과 민중은 때로는 동일한 것이고 적어도 깊은 연대성을 갖는 존재다.[각주:3]

반면 오클로스적 민중 이해는 이러한 민족과 민중 간의 연속성이 부정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클로스마가복음오클로스(무리, οχλος)의 용례에서 유추한 해석에 따라, ‘비자발적으로 귀속성을 박탈당한 대중을 지칭한다.[각주:4] 하여 그들은 민족의 일원도, 가족의 일원도, 다른 집단의 일원도 아니다. 하지만 적의 일원도 아니다. 그들은 내부의 외부자(outsiders within). 그리고 그들은 타인에 의해, 나아가 사회적 합의에 의해 귀속성의 박탈이 자명하게 받아들여진 자, 곧 존재하지만 비존재(non-being)로 취급되는 자이다(비존재의 존재, being as non-being).

그뿐이 아니다. 오클로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존재가 부정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언어의 붕괴(collapse of language) 현상이다. 마가복음5장의 거라사 광인 이야기에 따르면, 그 오클로스는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른다. 그이는 사람의 공간이 아닌, 죽은 자의 공간에 사는 자이며, 사람의 말이 아닌 괴성을 내지르는 자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자기를 묘사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그가 사람의 언어로 말을 하는 유일한 구절, 즉 예수가 당신 이름이 무엇이요?’라고 묻자 내 이름은 레기온(λεγιον, 군대)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구절(5,9), 그를 지배하고 있는 악령이 그의 몸을 빌어서 말하는 것이다. 마가복음텍스트 속에서 보면 그는 타인의 말에 의해서만 존재가 규정된다. 그는 자기 말을 하지 못하는 자이다. 곧 그는 언어 붕괴 상황에 있다.

요한복음9장의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저 눈먼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저렇게 저주 아래 놓인 자가 된 것인지를 예수에게 묻는다(2).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오클로스는 의 굴레 아래 있는 자로 보고 있다. 이는 동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점이다. 하여 안병무는 를 지배체제의 언어로 해석한다.[각주:5] 이는 정결함과 부정함에 관한 질병관리체계가 배제의 장치(apparatus of exclusion)로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 배제의 장치는 그이(오클로스)에 대한 배제가 타인, 곧 사회에 의해 공유된 질서에 속한 것일 뿐 아니라 그이 자신조차 그러한 사회적 규정의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여 거라사 광인에 관한 마가복음의 압축적 묘사에서 드러나듯, 오클로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자기 상황을 적절히 표현하는 언어를 상실했고, 나아가 사회의 위악적(evil-pretending) 존재로서 자기를 드러내곤 한다. 이는 그가 위험한 존재라는 사회적 평판으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그이의 언어 상실, 곧 실어증은 생물학적 실어증이 아니라 사회적 실어증(social aphasia)이다.[각주:6]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서남동을 주목한다. 그의 죄 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에 관한 그의 논의에서다.[각주:7] 그는 김지하가 말한 한의 해석을 신학화함으로써 을 신학의 화두로서 부각시킨다.

김지하는 해방 이후 줄곧 절망적 체념상황에 대한 민족 특유의 자기 초월적 감정으로 해석되어 온 의 개념에 저항하며, 한의 자리는 민족이 아니라 감옥이라고 보았다. 서남동은 이를 추상화시켜 로 해석한다. 하여 죄는 민중이 저지른 잘못의 결과가 아니라, 배제와 차별의 결과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지배의 시선이다. 하여 그는 말한다. ‘죄는 권력을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붙여준 이름이다.[각주:8]

권력을 가진 자는 언어를 지배하는 자다. 그러므로 죄는 권력을 갖지 못한 자의 언어를 박탈하는 효과를 갖는다. 여기에 의 자리가 있다. 즉 한은 배제와 차별의 설움을 겪는 이가 자신의 설움을 적절히 표현하지 못하고, 장애적 양상(정신적 장애나 신체적 장애로)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민중의 언어는 박탈당한 것, 아니 지배체제에 의해 도난당한 것이다. 그래서 한의 정서는 응어리져 있다.

자기의 감정을 타자의 언어, 곧 지배체제의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자기 언어가 도난당했기에 말이다. 표상의 몰락(collapse of representations)이다. 자기 표상을 상실하고 타인의 표상으로 서사화될 수밖에 없는 그 언어는 그들이 겪는 배제와 차별의 경험을 죄로 인한 당연한 결과처럼 해석한다.

그런데 몸이 저항한다. 언어를 도난당했으니 뭐라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몸은 그것에 순응하지 않는다. 실어증이 발생하고, 기억장애가 오며, 마음과 몸에 병증이 나타난다.[각주:9] 해서 많은 민중은 질병에 걸려 있고, 정신줄이 나가 있으며, 알아들을 수 없게 말한다. 바로 한의 증후다.

이러한 서남동의 한의 신학적 사유는 안병무의 오클로스 체험을 보다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충해 준다. 하여 탄식하는 숨소리, 질병, 그 밖의 각양의 실어증상으로 표현된 한의 언어는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은폐된 말이다.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자신의 배제의 체험을 몸이 비언어적 언어(nonverbal language)로 말하는 언어인 것이다. 서남동의 표현으로 하면, 하늘에 호소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 무고(無告)의 소리.[각주:10]

그러므로 이 비언어적 언어는 민족의 언어일 수 없다. 즉 언어에서도 민족과 민중은 단절적인 관계다. 하여 이 단절적 관계를 매개하기 위해 민중신학자의 일이 요청된다. 그것이 안병무 선생이 말하는 증언이다. 민중신학자들은 증언을 통하여 민족으로 하여금 민중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자다. 하여 서남동이나 안병무에게서 오클로스의 소리, 그 비언어적인 은폐된 소리를 듣고 그들의 몸을, 영혼을 병들게 했던 배제의 체계를 해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자다. 이것이 서남동이 말하는 한의 사제의 역할이다.

 

3. 민중론의 역사사회적 맥락_민족적 민중에서 오클로스적 민중으로


(1) 군부권위주의 시대, 민족공동체 and/vs. 민중

군부권위주의 체제(Military Authoritarian Regime)는 발전을 위해 사회의 가용자원(available resources)을 총동원하는 돌진적 발전동원체제(mobilization system for rush-to development)를 추구했다.[각주:11] 하여 병영적 결속(military binding)의 구호인 총화단결(總和團結, total unity)을 사회적 결속의 논리로 확대 적용했다. 여기서 국민(people)[각주:12]은 민족공동체를 지칭하는 집합적 단일체로 해석되었다.

국가는 국민(개인이 아닌)의 행동뿐 아니라 기억의 내용과 방식에까지 침투하여 결정권을 행사하고자 했다. 이 시대에 지배체제가 국민 통제를 위해 활용했던 두 가지 주요 장치인 반공규율체제(system of anti-communism discipline)와 발전규율체제(system of development discipline)는 물리적인 통제장치일 뿐 아니라 마음의 통제장치로서도 효과적인 틀이었다. 전자는 사람들 개개인의 분노(wrath)[각주:13], 그리고 후자는 염원(desire)[각주:14]을 국가가 관리하여 공적이고 집합적인 형태로 번안시키는(adaptated) 사회적 기억의 틀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집합적 행위자로서 탄생한 국민은 돌진적 성장체제의 노예적 주체(slavish subjectivity)인 셈이다.

이런 사회에서 국민은, 이상적으로 말하면, 통합된 단일 집합체다. 하지만 내적으로 국민은 적어도 두 부류로 분화되어 있었다. ‘(좁은 의미의) 국민 대 비국민으로.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 있던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비국민은, 민족공동체의 성공을 위해 희생당한 잉여적 존재인 도시빈민이었다.

그럼에도 도시빈민은 전통의 향기가 넘쳐나는 푸근한 도시공동체(이러한 이미지의 한국어는 Kkobangdongne이다)를 이루고 있다는 허구적 담론이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이러한 담론적 위조 아래서 이른바 꼬방동네 사람들(Kkobangdongne‘s people)은 상상적으로 민족공동체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들은 발전동원체제의 희생자요 사회적으로 배제된 존재였다.[각주:15]

안병무, 서남동 등이 목격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위조와 은폐의 장막을 헤치고서야 그곳에 있는 민중의 참혹함을 보았고, 그들의 왜곡되고 봉쇄된 언어를 체험하며, 그 속에서 민중 자신의 진정한 소리[각주:16], 그 소리의 내력(biography of sound)을 읽어내고자 했다.[각주:17]

또한 그들은 민족공동체의 형성 논리 속에 민중의 배제가 작동되는 메커니즘을 주목했다. 마치 요한복음9장에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저 눈먼 사람의 불행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묻는 것처럼, 서남동과 안병무는 민중의 불행이 그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일반화된 생각, 바로 그것이 민중 배제의 장치라고 보았다. 결국 그들은 라는 개념은 지배체제의 언어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각주:18]

그렇게 민중 현실은 국가권력에 의해 철통같이 봉쇄되었다. 반공규율체제나 발전규율체제 같은 마음의 통제장치들은 국민의 귀를 막았고 영혼을 환각에 빠지게 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안병무는 민족공동체 밖으로 추방당한 민중, 곧 오클로스로서의 민중에 관한 상상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서남동은 민족공동체 밖으로 추방당한 언어, 민중의 한을 주목한 것이다.[각주:19]

 

(2) 민주화-소비사회화 시대, 민족공동체의 분열 그리고 민중

1980년대 말 이후 민주화는 염원의 대상이 아니라 제도화의 대상이 되었다. 민주적 제도화는 국가의 의지와 다른 국민의 의지가 존재한다는 바람을 제도화하려는 정치사회적 실험이다. 나는 다른 글에서 국가의 안전과 성공을 자기 자신의 것과 동일시하는 국가화된 주체(subjects as a state)국민(people)으로, 그리고 국가와 거래교섭하는 사회적 주체를 시민(citizens)으로 명명한 바 있다. 이 용어들로 한국의 민주화를 다시 표현하면 민주화는 국민의 시민화 과정으로 재기술할 수 있다.[각주:20]

그런데 시민이 된 국민은 공공성의 주역이 되지 못했고, 도리어 사적인 인정욕망(desire of recognition)에 치우쳐 버렸다. 하여 민주화시기에 사회적 계층분화는 권위주의 시대보다도 더욱 심화되었고, 실패한 시민, 곧 민중이 다량으로 양산되었으며, 재벌기업(conglomerate)의 사회적 자원의 독과점 현상(symptoms of the monopoly of social resources) 또한 국가권력을 압도할 만큼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각주:21]

한편 이 시기는 산업의 비중에서 내구소비재(durable consumer goods) 산업이 비약적으로 확대되는 시기이기도 하다.[각주:22] 한데 소비사회는 소비하는 욕망이 주체 형성에서 결정적인 위상을 지니는 사회다. 즉 소비사회는 모든 시민이 소비자로서의 주체가 되기 위한 일상의 전쟁에 몰두하게 한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민주화로 인해 정치적 주체로 전화시킨 시민을 시장화시켰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시민의 시장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23] 이렇게 시장화된 시민은 분출하는 자기의 소비욕망을 표현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하지만 시장에서 퇴출된 존재는 비시민으로 전락하며, 일상까지 시장으로 만들어버린 소비사회에서 이들 비시민에 대한 시민의 감수성은 극적으로 퇴화하게 된다.

요컨대 일상화된 전쟁의 시대(the age of everyday life as a war)의 문법에 따라 살아가는 시민적 주체들은 점점 더 자신의 권리와 욕망의 게임에 중독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시민사회가 타자를 생각할 여유를 앗아갔다.

이러한 변화는 민중신학의 논점 변화를 수반하는데, 과거에는 박탈된 비국민의 권리를 신학적으로 담론화하기 위해 국가의 권력독점이 문제시됐다면, 이제 민중신학은 국가와 시민, 이 두 주체간의 의도하지 않은 공모(unintended conspiration)로 작동되는 배제의 메커니즘을 주목하게 되었다. 우선 안병무의 텍스트에 대한 다시 읽기작업이 수행되었는데, 이것은 안병무의 언술 속에서 분열적 요소를 찾아내 민주화 시대의 새로운 문제의식과 연계시키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각주:24]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우리 시대 오클로스의 문제도 이 책에서 다룬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의 재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최형묵은 더 많은 민주주의(more democracy)의 관점에서 시민사회와는 구별되는 민중사회(minjung society)를 그리스도교윤리학의 관점에서 모색하는 연구를 수행하였고,[각주:25] 미시적 차원에서는 일상적 생활양식을 체현하는 민주주의로서 교회 개혁의 논점을 담론화하고자 하였다.[각주:26] 한편 나는 안병무의 요한복음해석을 보다 발전시켜서, 탈제도화의 관점에서 유목적 자유주의자(nomadic liberalists)를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주변 혹은 외부를 민중신학적으로 주체화하는 논의를 폈고,[각주:27] 다양한 사회적 배제의 맥락에서 발생한 민중의 고통의 문제를 민중신학적 과제로 담론화하는 작업을 수행했다.[각주:28]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배제와 민중에 대한, 특히 사회적 고통에 대한 민중신학적 관점은 지구화에 대한 이해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3) 지구화 시대, 거대한 유동성(mobility)과 타자성의 장치들

1994년 한국 정부는 지구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변화에 적응할 준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빠른 속도로 금융시장을 개방하였다. 하지만 불충분한 준비는 1997년 치명적인 외환위기로 귀결되었다. 국가 파산(state bankruptcy)의 위기 속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 아래 비자발적으로 추진된 지구화는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니라 재앙으로 다가왔다.

항구적인 것들이 붕괴하고 전 지구적인 광속의 유동성(global mobility of the beam)이 경험을 주도하게 되는 변화에 사람들은 존재론적 위기(ontological crisis)에 휩싸인다.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변화로 인해 불안, 공허, 공포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친숙함(intimacy)에 대한 병적인 열망, 그리고 낯섦에 대한 적대감에 사로잡히게도 하였다. 국가들, 종족들, 종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분쟁들, 그리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웃과의 갈등, 심지어는 자기 내면에서 벌어지는 존재론적 쟁투 ......, 바야흐로 전 지구는,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무수한 적대감(hostility)의 밧줄로 칭칭 감겨 있다.[각주:29] 이것은 삶 자체가 전쟁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상화된 전쟁터에서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한다. 지구화 시대를 맞아 민중신학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고통을 해석하는 삶의 준거(references)가 일상화된 전쟁의 포연(smoke of war) 속에 잠식되었다. 이것은 전쟁의 상흔(trauma)이 도처에서 출몰하며 서로를 괴롭히는 현상, 곧 전후 체험이 일상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은 고통의 비대칭성이 극대화된 계층적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바닥에 배치된 민중의 문제를 보는 시선이 고통이어야 하는 이유를 암시한다.[각주:30]

한편 얼마 전까지 국가공동체 혹은 민족공동체에 대한 대안적 개념으로 동아시아 3(한국, 일본, 대만)에서 대두했던 새로운 가족으로서의 기업공동체 이상은 붕괴되고,[각주:31] 자본은 빠른 속도로 정규직을 폐기했다. 비정규직(temporary employed)의 문제는 1997년 지구적 제도화가 본격화된 이후 빈곤층 급증 현상의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각주:32] 이것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한국이 저임금계층의 비율이 가장 높고, 임금불평등도가 가장 심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50%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뿐 아니라, 대부분의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직장은 이제 더 이상 귀속의 공간이 아니었다.

또한 노동의 후방기지로서 안락한 가족이라는 이상적 담론을 유포했던 산업화 시대의 가족주의도 붕괴되었다. 집은 일터의 연장이고, 노동에서 실패한 이들은 가정에서도 ()자발적으로 퇴출되어, 극단적인 경우엔 노숙자로 전락하곤 하였다.[각주:33] 노동중독(workaholic)의 사회[각주:34]에서 직장과 가정에서의 과도한 스트레스는 종종 가정폭력으로 이어지며, 민주화와 소비사회화의 과정에서 주체화된 많은 아내들은 이러한 폭력을 과거처럼 순순히 용인하지 않음으로서 이혼율이 급증하였다.[각주:35] 한국의 가족해체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요컨대 가족 또한 귀속의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빠르게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청()년은 사이버공간과 현실공간에서 벌어지는 비항구적이고 임의적인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되곤 한다.[각주:36] 그런데 이들 대안적 가족은 혈연적 가족에 비해 유동성(liquidity)이 대단히 높고 귀속성(attribution)은 매우 낮다. 이렇게 문턱 낮은 대안적 가족의 경계를 넘나들며 네티즌, 특히 청()년은 부유하는 주체(endless floating subjects)로 전화되고 있다.[각주:37] 민중신학에서 이러한 청소년의 부유성은 사이버테러나 교실에서의 집단따돌림 같은 가해적 폭력성과 관련이 있다는 문제의식을 발전시켰고,[각주:38] 최근 한국의 교회가 단기선교를 폭발적으로 활성화시키고 있는 것은 이러한 부유하는 청()년을 재주체화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제기된 것이라고 보았다.[각주:39] 또한 가족에서 탈주한 청()년은 매우 불안정한 자본의 하위시장으로 편입되었다.[각주:40]

한편 과거 국가가 주권을 말소(cancel)하는 장치는 사실상 무력해졌지만, 시장에서의 주권 말소를 의미하는 신용불량(creat default)이라는 낙인은 배제의 새로운 양식으로 부상했다.[각주:41] 신용불량자는 1997년 급증하기 시작하여 200412월 현재 3614000명으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16%에 이르는데, 그들의 70% 이상이 불안정노동에 종사하며, 주로 기초생계비를 충당하기 위해 고리의 신용카드 현금대출을 받은 결과 신용불량자로 추락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빠지고, 가정폭력, 가족해체, 심지어 자살로 이어지곤 한다.

이와 같이 지구화 시대 한국의 새로운 자산 양식으로 급부상한 신용이라는 것과, 그것이 야기하는 배제의 새로운 양식으로서 신용불량자 문제가 부상했다. 민중신학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배제가 어떠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사회문화적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를 주목하였다.[각주:42]

하나 더 언급할 것은 한국으로 유입된 외국계 이주노동자들과 결혼 이민자의 문제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99년 이후 급증하여 20071백만 명을 넘어선 한국내 외국인 체류자 가운데 70% 이상이 외국계 이주노동자다.[각주:43] 그리고 결혼 이민자는 2010년 현재 136천여 명에 달한다.[각주:44] 그들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조건의 일터에서 가장 비하되는 노동자로서 일하며, 그것도 대부분 불법체류자로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아야 한다. 가는 곳마다 그들에 겪는 사회문화적 배제의 경험, 가령 언어 불평등, 집단따돌림 등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배제의 체험은 이주노동자 자신을 위축시키고 자기를 비하하게 하며, 또 아직은 미미하지만 도박이나 범죄에 빠지게도 한다.[각주:45] 한편 결혼 이민자의 경우는 좀더 심각하여, 많은 여성들이 정신장애나 자살에 이르는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각주:46]

이러한 지구화 시대 민중은 대체로 귀속성의 박탈체험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안병무가 말한 오클로스는 선생의 당대보다 우리시대 민중의 존재 양식과 더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지구화시대 민중 연구에서 중요한 문제의식인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 개념은 배제를 경제적 차원이나 정치적 차원에서만 논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주권의 침해를 막고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이 실현되어도 배제의 메커니즘은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배제의 시스템이 단지 국가권력이나 경제체제에 의해 작동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 내에서 다양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복지제도 같은 호혜적 시스템도 배제의 기제가 되고 있다. [각주:47]이것은 하위계급(under-classes)에 관한 일련의 연구들과 서로 조응한다. 이에 따르면 빈곤계층은 더 범죄적이고 더 의존적이며 더 폭력적인 경향성을 보이고, 자존성을 극도로 약화시킨다.[각주:48]

이렇게 민중의 자기 파괴 현상은 점점 심화되었다. 많은 이들은 자기의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고 중언부언한다. 또한 적지 않은 이들이 노동력을 상실했다.[각주:49] 어떤 이는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다른 이는 친구나 동료, 혹은 알지 못하는 자에게 폭행을 가한다.[각주:50] 시민사회는 점점 민중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민중의 경험이 왜곡되고, 언어가 붕괴된 것이다. 서남동의 이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민중의 장소는 점점 시민의 공간으로부터 격리되고 있다. 국가권력이 격리시킨 결과가 아니라 시장이 그렇게 한 것이다. 민중이 도심 속에 끼워살만한 여백은 거의 사라져버렸고, 시민의 공간은 너무 비싸서 오클로스는 그곳에서 버텨낼 수가 없다.[각주:51] 그들이 거기에서 함께 살 수 있는 방식은 그들의 하인이 되는 것 뿐이다.[각주:52] 이러한 현대판 신분제의 바닥계층으로 편입되는 이들은 주로 이민자들인 경우가 많다. 특히 자존성이 약하면서도 무능력화되지 않은 이들이 도심내의 하인으로 적절하다.

또한 위생상의 문제도 발생한다. 건강을 관리할 자산을 갖지 못한 탓에 각종 질병의 유병률(prevalence rate)이 매우 높다.[각주:53] 하여 그들은 불결한 존재로 여겨져, 시민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또한 사소한 것에서 심각한 것까지 많은 범죄들을 저지름으로써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이러한 직간접적인 경험들은 시민사회 내에서 이들 오늘의 오클로스적 존재가 자기 지역의 부가가치를 낮추는 요인이 된다는 집합적 감각을 낳았다. 하여 그들의 공간은 혐오스러운 장소로 폄하되는 사회적 편견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지구화 시대는 그러한 각종의 배제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작동한다. 이러한 촘촘한 사회적 배제의 권력망은 수없이 분절된 귀속박탈계층을 낳았고, 이들 탈주체화된 대중의 사회적 실어증상, 곧 자기 묘사력의 붕괴 현상이 급격히 높아졌다.

이런 맥락에서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이 함축하는 비참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wretchedness)은 오늘 우리 시대에 오면 더욱 절실한 현실이 되었다. 오클로스적 민중 이해는 민중의 고통을 발견하고, 그러한 은폐된 가학성 체제의 메커니즘을 해석하며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생각과 실천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4. 맺음_오클로스의 신학, 그 과제


나는 다른 글에서 민중신학의 과제를 고통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pain)이라고 불렀다.[각주:54]현상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고통의 본질에 관한 이론들을 유보하고 현장의 경험 그 자체를 주목하겠다는 의지를 담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오클로스가 겪고 있는 고통의 현상학적 신학을 위한 연구 방법으로 나는 신학-인류학적 연구(theological-anthropological study)를 주장한다. ‘인류학적이라는 표현은 고통이 발생한 현장을 중층적으로 읽어냄으로써[각주:55] 고통을 겪고 있는 이의 경험에 공시적이고 통시적으로 얽힌 다층적인 인과성을 살피는 작업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신학적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 그리고 가학적 체제에 공모하고 있는 우리의 해방과 구원에 관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마가복음724~30절의 시로페니키아 출신 헬라 여인 이야기에서, 이 여인과 예수의 관계는 악령 들린 딸로 인한 고통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예수가 그녀에게 유독 까탈을 부린 것은 해석을 위한 다른 정보를 필요로 한다. 만약 시로페니키아에 살고 있는 헬라 여인이라는 정보가 그 지역의 귀부인을 뜻한다면, 예수의 이상한 반응의 이유가 조금은 설명될 수 있다. 게르트 타이쎈(Gerd Theissen)에 의하면[각주:56] 팔레스티나 출신 이스라엘 유민들이 시로페니키아로 유입되어 사회의 하층민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 여인 같은 귀부인의 밥상에서 그녀의 딸이 흘리는 음식 부스러기를 주어먹는 신세였다면,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7)는 말은 예수가 무관한 듯 보였던 두 가지 고통을 의도적으로 연계시키고 있음을 시사한다. 딸로 인한 그녀의 고통과 부자에 의해 착취당하는 가난한 자의 고통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여기서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계층적 관계는 또한 본토민과 이주민 사이의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즉 본토민의 가난한 자와 이주민의 가난한 자가 그 사회의 배제 상황에 놓여 있지만, 그 관계가 비대칭적이라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이주민의 발생은 유출국과 유입국 간의 비대칭성과도 얽혀 있다. 그밖에 여러 가지 중층적 사정들을 복합적으로 살핌으로서 우리는 이 텍스트의 해석에 다가갈 수 있다.

예수는 그녀의 딸과 그녀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이 텍스트는 여기까지 말한다. 하지만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8)는 그녀의 말에서 우리는 텍스트의 행간을 상상할 여지를 본다. 만약 이 텍스트 속에 부자와 빈자, 본토민과 이주민, 노동이민자 유출국과 유입국 간의 비대칭적인 관계와 연루된 사회적 고통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예수와 그녀가 나눈 대화 속에 이러한 사회적 고통을 연계시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필요하다. 어쩌면 이 사건 이후 그녀가 다른 약자들에 대한 구원자의 역할을 수행하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바람을 가지고 이 텍스트를 보며, 그녀의 변화된 삶에서 구원의 시스템을 상상한다. 이 여인의 구원은 개인 차원의 고통의 해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주변 세계에 파급되는 구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무능력에 관한 나의 연구[각주:57]에는 한 노숙인이 있었다. 그는 빈곤층에 속하는 40대 중반의 남자인데, 짧은 시간에 몰락을 거듭하며 극빈층으로 전락하다 노숙자가 된 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술에 찌들어 있었고, 술이 깨면 목욕을 하고 싶어 했다. 술에 취해 있는 자신을 후회하고 미워하며 정화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상실의 시간과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시간을 그는 이런 식으로 맞았다.

나와 대화를 나눌 때 그의 말은 파편화되어 있었다. 대화의 맥락과는 관계없는 말을 불쑥 던졌고, 이미 한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나는 좀처럼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집을 찾았다. 아내와 초등학생인 아들, 노모, 이렇게 세 식구였다. 그들은 집을 나간 그를 기다리기는커녕 도리어 미워했고 두려워했다. 그는 술주정뱅이였고 난폭한 폭군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기억했다. 그는 집에서 돈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며 가구를 부수어댔고, 전세 임대계약서를 가져가겠다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지역 복지사의 도움으로 아내는 남편을 한정치산자(限定治産者, quasi-incompetent person)[각주:58] 신청을 했다. 그의 법률행위를 제한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제 존재가 법률적으로 부정된 자, 즉 존재하지만 존재가 부정된 자가 된 것이다.

이웃도 그를 난폭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한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직장에서 퇴출된 이후 몇 번의 시간제 노동을 했으나,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는 어느 곳에서도 정상적인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웃들의 평가는 한결같았다. 그가 저 꼴이 된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더욱 심각한 것은 타인의 평가를 그 자신도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술이 깨면 자신이 했던 말, 행동, 무능력에 대한 수치심에 부끄러워했다.

가족과 이웃, 나아가 국가, 그리고 그 자신은 공히 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평가는 현재의 그의 모습에서 과거의 그를 유추한 것이다. 결과가 원인을 규정하고 있고, 그에 관한 기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일반적 기억을 뒤집어 없을 만한 아무런 가능성도 보여주지 못했고, 도리어 그런 생각을 뒷받침할 만한 무능력함, 그리고 위악적 행동을 보여줄 뿐이었다. 이런 모습에서 나는 무능력의 적나라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무능력에 관한 나의 관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를 둘러싼 주변 상황에서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자신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변론권을 갖지 못한 피의자와 같았고, 자신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는 존재 같았다.

안병무는 증언을 말했다. 그런데 내가 만났던 노숙자는 가정폭력 가해자다. 술이 깨면 수치심에 괴로워했지만, 술에 취하면 수치심은 타자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증오는 약한 타자에게 공격적으로 표출되었다.

과연 민중신학자는 가정폭력 가해자를 증언해도 좋은가, 아니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나는 이런 고민에서 좀처럼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고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스스로 정한 과제에 떠밀려 그와 그의 주변을 탐문했고, 물음을 좀더 확장해서 지구화 사회의 배제의 문제를 그와 연관시켜 해석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다가오며,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여러 행동 또한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어떤 고통은 언표되며(uttered), 또 어떤 고통은 언표되지 않는다. 즉 고통에 직면할 때, 비명을 지르거나 반격하는 반응 등은 언표된 고통에 속한다. 반면, 어떤 것은 언표되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치환(substitution)되어 표현되곤 한다. 너무 엄청난 사건을 겪거나, 반복적인 고통에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치환 작용이 일어난다.[각주:59] 가장 대표적인 고통의 치환으로는 증오가 있다. 자기에 대한 증오는 자기를 공격하는 증상으로 나타나며, 그 극단에는 자살이 있다. 반면 타자에 대한 증오로 고통이 치환되기도 한다. 많은 경우 가정폭력이나 집단따돌림 같은 것은 타자에게 고통을 치환시킨 결과다. 이것은 집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과거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증오하고 학살한 것도 그런 예에 속한다.

나는 이 글에서 오클로스의 고통을 강조하였다. 많은 경우 그들은 고통을 표현하는 데 실패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했고, 종종 그것은 병증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오클로스라는 마가복음용어의 함의에 따르면, 이러한 고통의 사회적 배후로 공간의 문제를 지적한다. 즉 공간의 안과 밖의 문제다. 그러나 여기서 밖은 경계의 밖, 곧 외부라기보다 내부의 외부를 가리킨다. 즉 그들은 경계 내부에서 잘 통합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내부의 균열(rupture)에 존재하고 있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사회 속에서 참여와 분배를 조직하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 곧 사회적 통합의 과정을 정치(politics)가 아니라 치안(police)이라고 말했다. ‘정치는 반대로 통합 속의 균열을 폭로하는 것이고, 배제된 자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다.[각주:60] 나는 여기서 민중신학의 증언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얻었다.

이처럼 민중신학자의 증언은 노숙자이자 가정폭력 가해자인 남자, 자기 서사 능력을 상실한 자의 변론 행위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고통 체계의 작동방식을 이야기함으로써 그가 단순한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이기도 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증언은 그러한 체계에 우리 자신이 공모자로 연루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증언은 사회의 고통 체제가 어떻게 배제의 기제를 작동시킴으로써 통합을 구현하고 있는지를 폭로함으로써 그 체제에 균열을 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글에서 고통의 현상학 대신 비참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wretchedness)이라는 표현을 썼다. ‘고통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바닥의 것, 그러한 경험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런 고통, 곧 비참은 너무 심각하고 치명적이어서 종종 언어로 표현되기조차 못한다. 해서 서남동이 말하는 비언어적 언어인 의 소리로밖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 자체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소리, 해서 그것을 듣기 위해 민중신학자는 인류학적인 연구를 통해 현상학적 해독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내가 강조하는 비참의 현상학이라는 말의 함의다.

우리는 앞에서 지구화 시대 민중의 존재 방식에서 귀속성의 박탈을 주목했고, 그것을 안병무의 용어를 따라 오클로스적 민중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오클로스는 민족적 민중처럼 하나의 거대한 집합체가 아니다. 그들은 수많은 요인에 의해 온갖 방식으로 배제를 체험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며, 다양한 방식으로 분산된 흩어진 존재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클로스는 그 현장을 중층적으로 읽어내야만 그 비참의 양상이 포착되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자에게 있어 오클로스와 비참의 현상학은 서로 쌍을 이룬다.

하여 오클로스를 신학적으로 묻는 일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 시선 혹은 통념적 시선에서 삭제된, 은폐된 이들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 하트와 네그리가 저술한 󰡔제국󰡕의 용어에 따르면 탈영자들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다.[각주:61]

이러한 진영의 이탈자들, 귀속성을 박탈당한 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증언하는 것은 지배적인 신학적, 신앙적 서사에 시비를 거는 작업을 포함한다. 예컨대 전통적인 신학적, 교회적 관계모델은 절대 자율적 존재인 신’, ‘타율적 자율의 존재인 성도’, 그리고 절대 타율적 존재인 타자(others)’, 이렇게 삼분된 존재들의 일방향적 소통의 틀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vs. 성도 vs. 타자의 관계의 일방향성은 /독재자(또는 국가) vs. 백성/국민 vs. 이방인/타자의 틀과 쌍생적이다. 그런 점에서 서남동의 반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의 개념을 재전유하는 민중신학의 반신학적 모색들이 요청된다.[각주:62]

한편 교회의 개혁 담론이 성직자와 성도 간의 경계 허물기를 지향하면서 소통의 쌍방향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민주화 담론의 국가와 시민간의 쌍방향적 소통 관계와 병행적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교회 안 vs. ’, 그리고 국경 안 vs. 의 이분법은 여전히 견고하다.

그런 점에서 탈영자들의 기념비를 세우는 신학운동은 기독교 중심주의의 해체 주장을 포함한다. 이것은 성도사회를 의미하는 교회와 죄론 간의 특권적 연동관계를 부정하게 한다. 왜냐면 교회라는 진영의 외부를 로 규정짓는 관념을 낳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중에게 집합적 유죄낙인을 찍어버리는 사회적 배제의 메커니즘과 쌍생적이다. 또한 민중신학은 정전(Canon)에 관한 믿음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각주:63] 정전은 교회 중심주의의 핵심적 요소이고, 타종교와 비종교에 대한 기독교적 편견과 배타성의 신념적 근거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민중신학적 오클로스 증언의 신학은 전통적인 신학의 온갖 영역 중심성의 해체를 지향한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신적 타자성을 체험하는 장소(places)는 그 모든 영역들의 외부, 곧 안주할 장소를 상실하고 부유하는 민중의 공간(space of floating minjung)이다. 신은 그 타자화된 공간(the space as the other)으로 육화(incarnation)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1.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 (한길, 1986), 31쪽. 이와 유사한 민중 이해는 선생의 글 도처에서 발견된다. [본문으로]
  2. 이에 대하여는 나의 글 「이름을 불러주기까지 그들은 ‘꽃’이 아니었다―안병무의 ‘오클로스론’ 다시 읽기」,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 (삼인, 2006) 참조. [본문으로]
  3. 1970년대 민중론들의 일반적 경향에 대하여는 민중신학의 민중론들을 모아 놓은 󰡔민중과 한국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82)와 그밖의 각종 민중론들을 보여주는 󰡔한국민중론󰡕 (한국신학연구소, 1984) 참조. 이러한 민중론적 민족주의는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을 추동하는 중심적 프레임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1990년대 말에서 2천 년대 초에 지식사회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서양사학자 임지현의 글 「한국사학계의 '민족' 이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역사비평󰡕 28 <1994 여름>)은 민족주의를 둘러싼 본격적 논쟁의 시발점이었고,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글을 모운 그의 책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나무, 1999)는 그 논쟁의 절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본문으로]
  4. 나의 글 「이름을 불러주기까지 그들은 ‘꽃’이 아니었다―안병무의 ‘오클로스론’ 다시 읽기」. 여기서 사용한 표현으로는 “타율적으로 영토들 밖으로 쫓겨난 자”이다(99쪽). [본문으로]
  5. 안병무와의 대담집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90)에 수록된 「죄와 체제」를 보라. [본문으로]
  6. ‘사회적 실어증’에 대하여는 나의 글 「고통과 폭력의 신학적 현상학―민중신학의 당대성 모색」, 󰡔안병무 신학사상의 맥󰡕 (한국신학연구소 2006), 236~238쪽 참조. [본문으로]
  7. 서남동 선생에게서 ‘한’에 관한 신학적 모색들은 그의 논문 모음집 󰡔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1983)에 실린 글 「한의 사제」와 「한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등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져 있다. [본문으로]
  8. 한에 관한 개념사적 연구인 김진, 「한의 희망철학적 해석」, 󰡔철학󰡕 78(2004 겨울) 참조. 서남동의 죄에 대하여는 그의 글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 󰡔민중신학의 탐구󰡕, 243쪽. [본문으로]
  9. 한에 관한 정신의학적 연구들인 김종주, 「한(恨)의 정신분석」, 󰡔코리안이마고󰡕 2 (1998.7); 민성길, 「한(恨)의 정신병리학」, 󰡔코리안이마고󰡕 2 (1998.7) 참조. [본문으로]
  10. 서남동, 「한의 사제」, 44쪽. [본문으로]
  11. ‘돌진적 발전동원체제’는 1961~1987년까지 한국사회의 형성원리를 지칭하는 용어, 1950년대에 국민통제의 장치로 성립한 ‘반공규율사회’적 요소를 ‘발전규율사회’의 요소와 결합시킨, 국가가 주도하는 발전을 위한 사회의 총동원체제를 가리킨다. 조희연,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와 시민운동의 변화」, 김진균 엮고 지음, 󰡔저항 연대 기억의 정치 2󰡕 (문화과학사 2003) 참조. [본문으로]
  12. 이때 국민은 민족공동체가 이 시대에 육화된 형태다. [본문으로]
  13.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는 북한체제에 대한 분노일 뿐 아니라 남한 사회 내부에서 공산주의적 혐의를 지닌 자들에 대한 색출의 욕망으로 표현되었으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규율하는 원리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14. 세계 최빈국중의 하나였던 사람들에게 빈곤 탈출, 그리고 나아가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은 남한 대중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었다. 이러한 개개인의 욕망을 국가의 발전과 동일시하도록 하는 담론적 장치가 발전규율체제다. [본문으로]
  15. 1971년 광주대단지에서 일어난 폭동은 발전동원체제 아래서 국가에 의한 강제 이주정책의 피해자들인 도시빈민의 삶의 현실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기아에 시달린 임산부가 갓난아기를 삶아 먹었다’ 소문이 그곳 주민들 사이에서 퍼져 있을 정도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는 김원, 「8월의 현대사―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월간 고대문화󰡕 (2008.9) 참조. [본문으로]
  16. 말이 아니라, 언어가 아니라 그냥 ‘소리’다. 즉 아직 해석되지 않는 발성이다. 신음일 수도, 고함일 수도, 한숨일 수도 있는 그런 소리다. [본문으로]
  17. 서남동 선생이 1979년에 발표한 역작들인 「한(恨)의 사제」, 「한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소리의 내력」(󰡔민중신학의 탐구󰡕에 수록)과, 안병무 선생의 「전달자와 해석자」, 󰡔현존󰡕 101 (1979.5)와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 󰡔현존󰡕 108 (1980. 1⋅2 합본) 참조. [본문으로]
  18. 안병무, 「죄의 체제」, 󰡔민중신학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87), 192~94쪽; 서남동,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 󰡔민중신학의 탐구󰡕, 243쪽. [본문으로]
  19. 안병무, 「예수와 민중―마가복음을 중심으로」, 󰡔현존󰡕 106 (1979.11)와 주17)의 서남동의 글 참조. [본문으로]
  20. 나의 글 「민주화 시대의 ‘미학화된 기독교’와 한국 보수주의」, 당대비평 편집위원회 엮음,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 (웅진지식하우스, 2007) 참조. [본문으로]
  21. 신명호, 「한국사회의 양극화와 빈곤」, 󰡔아세아연구󰡕 49/1 (2006 봄) 참조.. 자본집중에 대하여는 이종보, 󰡔민주주의 체제하 ‘자본의 국가 지배’에 관한 연구―삼성그룹을 중심으로󰡕 (한울아카데미, 2010) 참조. [본문으로]
  22. 한국의 소비사회의 형성에 관하여는 백욱인, 「한국 소비사회 형성과 정보사회의 성격에 관한 연구」, 󰡔경제와 사회󰡕 77 (2008 봄) 참조. [본문으로]
  23. 나의 글 「민주화 시대의 ‘미학화된 기독교’와 한국 보수주의」 참조. [본문으로]
  24. 이정희 외,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 (삼인, 2006) 참조. [본문으로]
  25. 최형묵, 「한국 경제개발과 민주주의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평가」, 2011년도 한신대학교 신학박사 청구논문. 미간행). [본문으로]
  26. 같은 저자, 󰡔한국기독교와 권력의 길󰡕 (민예총, 2009) 참조. [본문으로]
  27. 나의 책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네 복음서와의 낯선 여행 01 (동연, 2009) [본문으로]
  28. 나의 글 「게임 같은 전쟁의 시대, 소비되는 타인의 고통―폭력의 일상화에 대한 민중신학적 고찰」, 󰡔제2의 종교개혁과 민중신학. 한별 임태수 교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한들, 2007) 참조. [본문으로]
  29. 지구화가 배타성의 제도화와 친화적이라는 것에 대하여는 나의 글 「‘낯설음을 향한 욕망’으로서의 신앙―새로운 천년대로 이어지는 증폭된 위기 넘어서기」, 󰡔반신학의 미소󰡕 (삼인, 2002) 참조. [본문으로]
  30. 조은, 「전쟁과 분단의 일상화와 기억의 정치」, 󰡔사회와 역사󰡕 77(2008 봄); 나의 글, 「게임 같은 전쟁의 시대 소비되는 타인의 고통」 참조. [본문으로]
  31. 지구화 정책을 추동했던 1990년대 초 한국정부는 국가복지 대신 ‘기업복지’를 강조하였고, 당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자율적 공간을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있던 재벌 중심의 기업은 자기 회사 직원에 국한된 복지를 확장하면서 ‘평생직장’이라는 담론을 유포시켰다. 이에 대하여는 송호근, 「기업조직과 고용체제의 구조변화」, 󰡔경제와 사회󰡕 56 (2002 겨울); 정이환, 「비정규노동의 성격과 그 요인 」, 󰡔한국사회학󰡕 36/1 (2002.2) 참조. [본문으로]
  32. 한국사회의 양극화 상황에 관하여는 박명림, 「민주화에서 인간화로―21세기 한국사회의 이상과 가치」 (제3회 여해평화포럼. 오래된 새길 ‘인간화’ 자료집. 2010.10.21~22) 참조. 한편 급증하는 빈곤층의 형성이 정규직에서 배제된 노동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지은정, 「근로빈곤층의 빈곤탈출 결정요인 연구: 근로빈곤노동시장의 경로제약성을 중심으로」, 󰡔한국사회복지학󰡕 59/3(2007.8) 참조 [본문으로]
  33. 강수돌, 󰡔노사관계와 삶의 질󰡕 (한울, 2002) 참조. [본문으로]
  34. 한국사회의 노동중독 현상에 관하여는 김왕배, 「노동중독―직무태도와 조직특성의 관점에서 본 사회심리적 접근」, 󰡔한국사회학󰡕 41/2(2007) 참조. [본문으로]
  35. 김재엽 최수찬 정윤경, 「직장⋅가정갈등과 스트레스가 남편의 아내폭력에 미치는 영향―가정폭력 행위자 교정 치료 프로그램 참여 남편을 중심으로」, 󰡔한국가정관리학회지󰡕 26/1 (2008) 참조. [본문으로]
  36. 이장영⋅박용미⋅이은실, 「개인 웹페이지를 매개로 한 친교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싸이월드 대학생 이용자의 일촌관계 분석을 중심으로」, 󰡔정보와 사회󰡕 9 (2006) 참조. [본문으로]
  37. 사이버공간과의 접촉으로 인한 청소년의 주체의 혼란에 관하여는 정원섭, 「사이버 공간에서의 정체성 위기」, 󰡔동서사상󰡕 제9집 (2010 여름) 참조. [본문으로]
  38. 나의 글, 「안티기독교의 사이버테러 vs 혹은 and 기독교의 공격적 해외 선교」, 󰡔무례한 기독교. 한국 기독교의 선교 그 문제와 대안을 성찰한다󰡕 (산책자, 2007) 참조. [본문으로]
  39. 유승태 경동현, 「지구화 시대 기독교의 주체화 프로그램과 청(소)년의 공동체 체험―단기선교(개신교)와 카리스마 성령운동(가톨릭)을 중심으로」 (평화와 공공성 콜로키움2010―지구화 시대 부유하는 청(소)년과 공공성 모색, 2010.10.18.) 참조. [본문으로]
  40. 전경숙, 「10대 학업중단 청소년의 근로실태에 관한 실증적 고찰 연구―가출경험 학업중단 청소년을 중심으로」, 󰡔청소년상담연구󰡕 14/1 (2006.1) 참조. [본문으로]
  41. 은행연합회가 규정한 ‘신용불량자’ 정의에 따르면, 30만 원 이상의 대출금과 카드대금을 3개월 이상 연체한 사람을 가리킨다. 신용불량자가 되면 대출된 일체의 은행거래를 제한당하며, 연체된 대출금을 모두 상환한 이후에도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신용불량자에 대한 사회적 규정의 제도적 문제와 담론적 문제에 대하여는 김순영, 「민주화의 배반―신용불량자 문제의 구조와 특징」, 󰡔아세아연구󰡕 48/4 (2005 겨울) 참조. [본문으로]
  42. 나의 글, 「무능력과 신용불량 담론―그 시민적 욕망과 악의 진부화에 대하여」,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59 (2004.7-8) [본문으로]
  43. http://www.kosis.kr/learning/learning_002007.jsp [본문으로]
  44. 「상품 취급되는 여성들...부끄러운 국제결혼 실태」 (󰡔동아일보󰡕 2010.7.10) [본문으로]
  45. 「이주노동자들, '잠재적 범죄집단'이 아닙니다―석원정의 '우리 안의 아시아' <49> '제노포비아'를 경계해야」(󰡔프레시안󰡕 2008.2.22) [본문으로]
  46. 권유경 정여주, 「집단미술치료가 여성결혼이민자의 문화적응 스트레스와 자아존중감에 미치는 효과」, 󰡔재활심리연구󰡕 16/2 (2009 여름) 참조. [본문으로]
  47. 조문영, 「가난의 문화 만들기-빈민지역에서 가난과 복지의 관계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석사학위논문 2001) 참조. [본문으로]
  48. 한겨레 노동교육연구소, 󰡔서울지역 저소득 실직가정 현황파악 및 효과적 정책수립을 위한 조사보고서󰡕 (한겨레 노동교육연구소, 1999); 박병현⋅최선미, 「사회적 배제와 하층계급의 개념과 이들 개념들의 한국빈곤정책에의 함의」, 󰡔한국사회복지학󰡕 45 (2001 여름) 참조. [본문으로]
  49. 지은정, 「근로빈곤층의 빈곤탈출 결정요인 연구」 참조. [본문으로]
  50. 김재엽⋅이서원, 「부부의 의사소통유형과 가정폭력―빈곤가구 부부의 의사소통 유형과 아내폭력을 중심으로」 (한국사회복지학회 2001년도 추계학술대회, 2001.10) 참조. [본문으로]
  51. 김준, 「잃어버린 공동체―울산 동구지역 노동자 주거공동체의 형성과 해체」, 󰡔경제와 사회󰡕 68 (2005 겨울) 참조. [본문으로]
  52. 이선영, 「로마와 로스앤젤리스 그리고 서울의 필리핀 이주여성―주제서평. 파레냐스의 ‘세계화의 하인들’」, 󰡔여/성이론󰡕, 20 (2009 여름) [본문으로]
  53. 유병룰은 특정 시점에서 어느 집단 내부에 특정 질병을 가진 이들의 비율을 말한다. 건강불평등에 관한 실증적 연구로는 이창곤, 󰡔추적 한국 건강불평등󰡕 (밈 2007) 참조. [본문으로]
  54. 나의 글 「고통과 폭력의 신학적 현상학」. [본문으로]
  55. 기어츠의 thick description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클리포드 기어츠, 󰡔문화의 해석󰡕 (까치 2008)의 서론 참조. [본문으로]
  56. 게르트 타이쎈은 복음서와 요세푸스의 저작들을 통해서 이 지역에 유대 유민이 사회적 하층민을 구성하고 있음을 추론해낸다. 그의 글 「시로페니키아 여인 이야기에 나타난 지역적 사회적 특성」, 󰡔신학사상󰡕 51 (1985 겨울) 참조. [본문으로]
  57. 나의 글 「무능력과 신용불량 담론―그 시민적 욕망과 악의 진부화에 대하여」. [본문으로]
  58. 한정치산자는 심신이 박약하거나 재산의 낭비로 자기나 가족의 생활을 궁박하게 할 염려가 있다고 판단돼 법원이 그의 법률행위를 제한하는 사람으로, 법적 대리인을 통해서만 그의 행위는 유효하다. 요컨대 그는 존재하지만, 법적으로는 부재한 자인 것이다. [본문으로]
  59. 나의 글 「고통의 치환, 그 가학성의 근거에 대하여」, 당대비평 편집위원회 엮음,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당대비평 2005년 신년 특별호 (생각의 나무, 2005) 참조. [본문으로]
  60. 랑시에르⋅진태원 (대담), 「자크 랑시에르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새 정치의 희망”」(󰡔한겨레신문󰡕 2008.12.2). [본문으로]
  61. 내가 기획하고 필자로 참여한 기획서인 󰡔탈영자들의 기념비―한국사회의 성과 속, 주류라는 신화󰡕 (생각의 나무, 2003)에서 내가 쓴 ‘머리글’ 참조. [본문으로]
  62. 나의 책 󰡔반신학의 미소󰡕 동시대인 총서 11 (삼인, 2001)와 최형묵의 글 「민중신학 세대론과 다양한 민중신학들」, 󰡔교수신문󰡕 (2002.4.19) [본문으로]
  63. 나의 책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 (삼인, 2010)은 성서의 정전성에 대한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