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6년도 조직신학자 대회 제4섹션 발제글로 처음 발표되었고,
<고통과 폭력의 신학적 현상학 - 민중신학의 당대성 모색>이라는 제목으로 심원 안병무 선생 기념사업위원회 엮음, [안병무 신학사상의 맥 II](한국신학연구소, 2006)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2007년 일본 관동지부 기독교학회에서 재발표되었는데, 일어로 번역한 이는 가야마 고이치 신부(릿교대학)다. 이 원고는 <苦痛と暴力の神學的現象學 - 民衆神學の現代性の摸索>라는 제목으로 [福音と世界] (2007.6~7)에 게재되었다.
고통과 폭력의 신학적 현상학
민중신학의 지속성과 당대성
민중신학의 지속성
민중신학은 한국사회에서 고통과 폭력의 체계, 그 사회적 오인의 메커니즘을 문제시하면서 전개되어온 신학운동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가해와 피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폭력의 현상학이 단지 가해자를 배제해야 한다는 시민사회적 합의, 그러한 이성적 계산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동시에 시민사회는 가해자를 ‘두려워한다’. 대개의 경우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님에도 말이다. 여성과 노약자를 21명이나 살해한 희대의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경우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많은 경우 저 엽기적 폭력의 화신들은 자신보다 약한, ‘만만한 타자’에게 자신의 폭력성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혐오스런 타자들의 폭력은 주로 또 다른 타자, 보다 주변화된 혹은 보다 유약한 타자를 향한다. 요컨대 가해자에 대한 시민사회의 공포심은 분명 과장된 것이다. 시민사회는 위험사회에서 비교적 안전지대의 거주자인 것이다. ‘공포의 문화’(culture of fear)를 연구한 베리 글래스너(Barry Glassner)에 의하면 공포의 담론과 지배체제는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다. 1 그것은 내부의 낯선 타자를 생산하고 배제함으로써 체제를 더욱 공고화한다.
도미야마 이치로는 시민사회의 과장된 공포심을 (체험된 공포가 아니라) ‘예감된 공포’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2 예감된 공포는, 수행된 폭력에 대한 처벌/배제가 아닌, 예방적 처벌/배제를 실행에 옮기게 하는 공론을 불러일으킨다. 이 예방적 처벌 기재는 엽기적인 폭력범을 가능성의 차원에서 색출하게 한다. 이때 색출된 잠재적 가해자는 ‘범주적’(categorial)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위대한 지성의 한 사람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d Bauman)은 세계적인 반인륜적 범죄들이 ‘범주적 살인’(categorial murder)이었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그러한 야만성은 바로 자신들이 적으로 둘러싸인 채 위협당하고 있다는, 이른바 ‘포위된 요새 신드롬’에 갇혀 상상하게 되는 위기의식의 소산이라고 보았다. 3 국가보안법은 우리 내부에서 ‘적들’이 ‘우리’를 포위하여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을 예방하려는 시민사회적 안보 욕구와 국가의 통제 전략이 맞물린 법제적 현상이다.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상상적 욕구는 가해자 범주를 생산해낸 것이다.
민중신학은 바로 이 ‘상상된 가해자 범주’ 속에서 민중을 발견한다. 민중 현실은 실제로 시민사회 평균보다 더욱 폭력적이지만, 동시에 그 가해성이 시민사회의 상상 속에서 과장되어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범죄’ 담론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데, 죄는 죄인을 규정하는 기능뿐 아니라, 죄인을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죄인의 생산은 종종 범주적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렇게 시민사회가 범주적으로 생산한 죄를 ‘집합적 유죄’(collective guilt)라고 규정했다. 4 그것은 죄가, 실행된 행위를 준거로 이해된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간주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죄 이해는 시민사회의 관점인 동시에, 시민사회에 포섭된 민중 자신의 이해이기도 하다. 즉 민중에게는 죄의식이 넘쳐난다.
한국교회 주체형성의 원사건이라 할 수 있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은 러・일 전쟁 당시 교회로 피신해 들어온 많은 이들에게 도덕적 재활성화(revitalization)를 불러일으킨 사건이기도 한데, 이러한 도덕적 각성 운동은 민중의 사회생태학적 죄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전쟁이라는 극한 위기 상황 속에서 취한 개개인의 생존 전략이 무의식 속에 극도의 죄의식을 낳았고, 교회의 대부흥운동은 그러한 극화된 죄의식을 강한 도덕적 각성 운동으로 전환시킨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 중심의 자폐적인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에 신자 대중이 광적으로 동원되었다(mobilized). 민중의 죄의식을 통한 교회의 이와 같은 동원 양식은 그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 교회의 선교 전략의 중심 원리로 작동되어 왔다.
이렇게 시민사회와 교회는 민중의 집합적 유죄 관념을 규범화하고 일상화하는 데 공모자로 연루돼 있다. 이것은 앞서 시사했듯이 시민사회, 혹은 (구원받은 교인들의 장소인 교회를 의미하는) ‘성도(聖徒)’사회는 민중의 집합적 죄성과는 무관한 존재라는 자의식을 전제한다. 이에 대해 민중신학은 그러한 죄 인식을 해체하고자 한다. 이는 흔히 오해되듯, 민중이 무죄한 존재, 의로운 존재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죄 관념이 민중을 집합적 유죄의 관점에서 해석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문제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병무에 따르면, 죄는 사회의 구성 논리와 구조적으로 얽혀 있으며(죄의 구조성), 보다 폭력적인 민중의 실상에서 시민사회는 결코 무죄하지 않다(죄의 연대성). 5요컨대 죄의 구조성과 죄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민중신학의 관점은 사회적 혹은 신학적 죄론을 그 담론적 효과 및 권력의 욕망 차원에서 비판하는 셈이다.
이제 고통의 현상학을 살펴보자. 민중신학은 고통이 개체적으로 체감된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그것의 사회적 차원에 주목한다. 《한겨레신문》 2006년 연중기획 제1부인 ‘건강 불평등 사회’(2006.1.16~26)에 연재된 테마들은 거주 지역, 부모, 귀속계층, 직장 안정성 등이 유병률(有病率)을 포함한 건강지수, 나아가 사망률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개체의 자기 선택은 사회생태학적 조건들에 대응하는 생존전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고통은 사회적 맥락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 나아가 고통의 문화적 표상이 삶을 조직하기도 한다. 수잔 손탁(Susan Sontag)에 따르면 질병의 체험은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은유적’이다. 6 즉 그 사회의 문화적 표상(cultural representation)을 함축하는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은 사람이 자신 혹은 타인의 질병을 체감하는 사회적 문법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통이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는 관점은, 고통이 개체적 선택 혹은 운명의 귀결인양 표상/은폐하는 지배적 담론들에 대한 문제제기다.
한데 이러한 민중관은 안팎으로부터의 비판에 직면했다. ‘고통’이라는 지표는 ‘사회적’이지만 ‘사회학적’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고통은 거의 모든 계층을 망라하는 인간 실존의 보편적 양태일 수 있기 때문에, 고통의 담지자를 사회학적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개념화의 어려움은 ‘주체화’에 대한 이론으로 이어질 수 없고, 결국 사회적・정치적 역량으로 전환되는 메커니즘을 이론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민중신학은 민중을 고통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이때 ‘이해’란 근대 논리학적 이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다른 학문 분과의 민중론들과는 달리, 유독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개념화하는 데’에 비판적이었다. 대신 민중신학자들이 민중과 그들의 고통을 포착하기 위해 주목한 것은 ‘민중의 이야기’였다. 이데올로기 같은 공공화된 담론이라기보다는 ‘비공공적 담론’이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그것은 그러한 공공화된 담론들이 종종 민중의 고통을 도구화하여, 민중을 사회적 변혁의 도구로서의 형식적 주체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자들에게서 ‘민중의 이야기’는 민중의 자기 진술을 담아내는 ‘담론 형식’이다. 그런데 이야기 또한 지배적인 담론의 표상 체계의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다. 즉 다른 담론 형식들이 그렇듯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공공적 가치에 상당부분 동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야기라는 담론 형식의 독특성은 다른 형식들보다 더욱 분절적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어빙 고프만(A. Goffman)의 통찰이 보여주듯이, ‘후방지역’(사적 담론의 공간을 뜻하는 고프만의 용어)을 확대하고자 하는 대중적 전략들이 낳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다. 7 이런 맥락에서 안병무가 ‘예수 이야기’를 보다 분절적인 성격이 강한 이야기인 ‘유언비어(루머, 즉 비공식적 소통양식)적’이라고 주장한 것은 ‘예수 이야기’가 예수에 관한 다른 장르의 전승 양식보다 훨씬 반체제적이고 해체적인 급진주의가 강한 이유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된다.
김용복의 ‘민중의 사회전기’ 8는 이야기의 이러한 분절적 속성을 통해 민중 주체화의 가능성을 읽는다. 이것은 ‘민중의 언어’를 지배언어―그것이 ‘국민의 언어’든 ‘시민의 언어’든―와 대립시킴으로써 가능한 문제의식이다. 국민/시민의 언어는 민중을 포섭하되, 민중의 고통을 특정한 사회적, 공적 가치 속에서만 재현한다. 전체주의적이든 민주주의적이든, 그러한 공적 주장들은 예외 없이 민중을 포섭하는 담론을 생산해냈지만, 또한 예외 없이 배제를 제도화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지배언어는 민중의 고통과 갈망을 왜곡한다. 하여 그는 이것을 ‘침묵의 전기’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국민/시민의 합리주의적 언어 메커니즘 속에서 자란 민중론은, 마치 예수 시대 바리사이즘이 그랬던 것처럼, 민중을 얘기하지만 동시에 민중 자신의 목소리를 빼앗아버리는 ‘실어증의 영’이 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민중신학자들의 문제의식인 것이다.
이에 대해 ‘민중의 이야기’는 시민사회의 공론화의 장치로는 충분히 여과시킬 수 없는 담론 형식이다. 국민/시민의 언어의 망에 포섭되지 않는 분절의 담론 공간에서 소통되는 이야기 속에서 민중의 여과되지 않은 고통과 갈망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 고통스런 상황이 닥쳤을 때, 비명을 지르든 울든 하소연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표현한다. 다른 사람은 그 소리에서 그(녀)의 고통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언어적’이다. 한데 문제는 어느 순간 고통이 당사자에게 말을 앗아가기도 한다는 데 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로 이름 지어진 고통에 대한 특정한 반응은 이 점에서 상징적인 시사를 준다. 9 치명적인 고통의 상황을 겪은 이가, 지워지지 않는 그 사건의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지우는 내적 사투의 과정에서 고통의 원인이 됐던 기억은 사라지지만, 그것이 다른 증상으로 표출되어 그(녀)를 괴롭힌다.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한데 증후는 엉뚱한 데서 드러난다. 신체의 일부에 마비현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몸이나 정신의 질환이 그를 괴롭힌다. 이렇게 되면 소통의 교란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고통을 그(녀) 자신이 겪었던 사건과 관련지어 이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해서 고통은 타인에게서 사회적인 것으로 감지되기보다는 개체적 선택 혹은 운명의 결과로서 읽혀지게 된다. 이렇게 고통을 묘사하는 언어의 유실은 고통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을 왜곡하게 하고, 타인으로 하여금 망각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을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언어화가 가능한 고통(언표적 고통)과 언어화를 상실한 고통(비언표적 고통)이 그것이다. 서남동의 ‘한(恨)’이라는 지시어는 이렇게 분류한 범주 속에서 중요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10 그는 이것을 ‘고통’에 대한 민중 자신의 소리라고 하는데, 그 반대편에는 지배언어가 규정한 고통의 개념화인 ‘죄와 회개’가 있다. 지배언어의 규정력은 민중 자신의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럼으로써 민중은 자신이 체감하는 고통을 타인의 언어로만 표상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민중 자신의 고통에 관한 ‘표상의 몰락’ 현상의 종교적 지시어가 바로 ‘한’인 것이다.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소리, 표상을 상실한 소리다. 하여 그는 이것을 “하늘에 호소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 무고(無告)의 소리”라고 표현한다.
한편 언표적 고통은 인간 존재의 보편적 경험으로서의 고통 바로 그것이다. 이때 고통을 발설한다는 것은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 방어 전략이다. 그런데 고통의 직접적인 반응인 발설만으로 해소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상흔’(트라우마)이 남는 고통이다. 이 경우 사람들이 취하는 무의식적 전략을 나는 의료인류학자인 마가렛 로크(Margaret Lock)의 표현을 빌어서 ‘고통의 치환’(substitution of suffreing)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11 고통을 다른 정서로 대체함으로써 해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가장 효과적인 고통의 대체물이 바로 ‘증오’라는 점이다. 한국전쟁 이후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앓았던 그 극도의 고통은 ‘빨갱이’에 대한 증오를 통해 생산적 동력으로 전화되었으며, 또 당시 교회는 전쟁이라는 삶과 신앙의 해체적 위기에 직면해서 무수한 ‘이단’들을 생산함으로써 자존의 근거를 발견했다.
‘증오의 정치’는 원론적으론 외부의 적을 향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내부의 적’을 발명해 냄으로써 실행된다. 강상중이 피히테로부터 빌어온 개념인 ‘내적 국경’(innere Grenze)은 이러한 증오의 정치의 공간적 해석인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회적 발전과 민주주의의 자양분으로 소비된다는 것이다. 12
한편 또 다른 고통의 유효한 치환물은 ‘긍휼’이다. 이것은 증오에 비해 매우 아름다운 품성이지만, 종종 부정적인 효과를 낳기도 한다. 궁휼의 기재는 그 대상을 극한의 고통 담지자를 이미지화함으로써 작동하며, 그것은 그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민사회로 하여금 원거리의 대상에게 추상적인 자비를 베푸는 한편, 근거리에 있는 고통의 담지자를 망각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웃의 고통을 타자화하는 감각의 마비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민사회의 병리성을 망각하게 하면서도, 스스로가 호혜적 사회를 이루고 있다는 자긍심을 품게 한다.
아서 클라인만과 조안 클라인만(Arthur & Joan Kleinman)이 날카롭게 분석했듯이 13 ‘고통을 소비하는 시장’이 존재한다. 사회는 고통을 특정한 방식으로 소비함으로써 거기서 발생하는 이윤으로 사회를 건설한다.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이 증오의 대상이든 긍휼의 대상이든 이 시장의 이윤 창출을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하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가 잘 이야기했듯이, 14 사회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인식하지 못해야만 이 시장은 작동된다. 물론 조작된 고통의 문화적 표상은 희생양으로 지목된 존재 자신에게도 그 메커니즘을 은폐한다. 결국 ‘말할 수 없는 고통’, 언어 박탈의 고통은 사회적 생산물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김용복은 시민사회적 긍휼의 영역(가령 복지제도 같은 효혜성의 장치)이나 민중주의적 이데올로기(가령 사회주의)보다 ‘민중의 이야기’에서 민중 주체화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15 민중 이야기에 담긴 ‘한’은 비언표적 고통의 병증적 발현이 아니라 ‘신앙적 발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신앙이란 지배언어가 제도화한 ‘죄와 회개의 장치’와는 다르다. 안병무는 이것을 ‘민중의 자기 초월’이라고 부른다. 16 비언표화된 것은 손쉽게 언표화되지 않는다. 그것이 언표화되는 체험은 종말적 체험이다. 그러나 종말성은 ‘아직 아니’를 수반한다. 즉 아직은 비언표적이다. 하지만 초월적이다.
한데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은 민중의 비언표적 한계 상황을 ‘낭만화’하는 지적 자유주의를 경계한다. 17 민중의 종말적 자기 초월의 체험은 존중해야 하지만, 그것은 지식인이 손쉽게 미화하여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고통은 치열한 현상이다. 하여 그녀는 ‘말할 수 없는’(can not speak) 민중의 절박한 한계 상황을 회피해서는 안 되는 치열한 지식인론을 편다. 그녀에 의하면 그것은 ‘말걸기’와 ‘대언’을 통해 실천되어야 한다. 실어증 걸린 민중에게 말걸기를 함으로써 그들이 말하게 하고, 그것을 체제의 배제 메커니즘을 해체하는 비판의 담론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다. 마치 돌로 자해를 하고 무덤 사이를 뛰어다닌다는, 손발에 쇠사슬을 채워놓아도 소용이 없다는 식의 괴담으로만 표상된 인물, 한 번도 그 자신의 고통으로 표상되어 본 적인 없던 인물, 곧 ‘게라사 지방의 광인’을 만나 예수가 ‘당신 이름이 무엇이요?’라고 물은 것처럼, 누구도 묻지 않았던 그 자신의 존재를 예수가 말하게 한 것처럼, 말걸기와 대언은 그들로 하여금 비언표적 상황을 가로지르는 자기표현에 이르도록 자극하고, 그들의 실어증을 제도화한 체제의 작동 양식을 폭로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병무가 말하는 ‘증언’이 담고 있어야 할 민중신학자의 자기 윤리론은 바로 이런 함의를 수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민중신학의 지속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하나 더 첨언할 것은, 안병무의 ‘증언론’은 동시에 구원론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는 지식인을 포함한 시민이 민중을 증언함으로써 자기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로고스가 살덩이(싸릌스, σαρξ)가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단언에서 안병무는 고통의 비언표적 상황에 놓인 민중, 그래서 사회적 경험에서 은폐된 그들의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예수의 고통을 체험하게 되는 구원 과정을 상상한다. 그것은 예수를 본받는(Imitatio Christi) 삶을 조직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민중신학의 윤리와 구원론은 하나가 된다. 신앙과 실천은 이원적 과정이 아닌 것이다.
이상에서 나는 고통과 폭력이 동시적으로 발현하는 지점에서 그 현상학을 주목하면서 민중신학적 문제의식이 발전했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했다. 그런 양상 이면에 도사린 체제의 메커니즘과 국민/시민의 안보 욕망을 읽어냄으로써 민중신학적 증언은 구체화되었다. 지배담론이 말하고 있는 데서 ‘은폐된 민중의 현실’을 읽어내고, 말이 부재한 곳에서 ‘민중의 소리’를 듣는 일, 바로 그것이 민중신학의 신학적 탐색의 주요 내용인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문제의식과 이에 기반을 둔 신학적 탐색은 1970년대 이래 줄곧 민중신학이 견지해온 ‘지속성의 요소’였다. 하지만 고통과 폭력의 현상학은 시공간적 맥락과 불가분 연계된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은 시공간적 변화를 담론의 내용으로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민중신학은 항상 ‘당대적 신학담론’(contemporary theological discourses)으로 재탄생해야 하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당대성 모색―1990년대 이후
민중신학은 한국사회의 시공간적 변화를, 비판담론의 변화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시대의 집합적 고통의 구조를 상징하는 ‘1970년 전태일’의 기억이나 ‘1980년 광주’의 기억은 한국사회에서 ‘비판담론 형성적 사건’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민중신학적 담론의 전환점은 이 사건들에 대한 한국사회의 비판적 기억의 계보와 맞물려 있다.
1970년대가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이농, 이주노동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집합적 ‘고통의 발견’의 시기였다면, 1980년대는 고통을 넘어서는 소비에트적 마르크스주의와 연관된 ‘대안적 지평의 발견’에 몰입해 있던 시기였다. 하여 1970년대 민중신학은 고통을 생산하고 또 은폐를 구조화하는 죽임의 체계에 승복한 이들을 향한 일종의 ‘각성적 예언’을 담론화했고, 1980년대는 고통 너머의 지평을 향한 ‘운동 혹은 변혁’이 신학의 화두로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1990년대 이후의 민중신학의 당대성은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바로 이것이 이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다.
민중신학의 1990년대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실패’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좌절된 하느님나라’의 체험이었다. 18 이는 흔히 오해되듯 하느님나라와 역사적 제도를 단순 동일시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나라를 향한 도정이 단선적이고 목적론적이라고 확신했던 신학적 신념이 흔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선적인 목적론적 이해는 미래적인 완전의 지평을 선취한 ‘선한 우리’라는 자의식으로 무장한 주체들에 의해 수호된다. 문제는 이러한 자의식은 타자를 전제해야만 존립한다는 데 있다. ‘타자’란 관계망 외부의 존재,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외부에 있다고 공동체에 의해 간주되는 존재를 말한다. 동물해방철학(animal liberation philosophy)의 주창자인 톰 레건(Tom Regan)은 자신의 ‘도덕공동체’ 개념 속에서 타자를 ‘그(녀/것)의 고통이 (공동체에 의해) 감정이입되지 않는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그 외부적 존재가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무감각하게 지각되고 있는지를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 세계 아래서 역사 속의 타자가 제거되면 그 대체물을 발견하려는 사회적 욕구가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의 작동 공간은 일상 공간 곳곳으로 스며든다. 이러한 일상화된 무의식적인 가학성은 비판담론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목적론적이고 단선적인 이해의 유보된 성찰은 자기조정능력의 잠식을 초래한다.
권인숙의 《대한민국은 군대다》는 1980년대 학생운동권이 가부장적 권위구조의 폭력성을 성찰하지 못한 채 성(性)을 도구화하는 태도를 지배체제와 공유함으로써, 자기 준거성의 부재를 드러냈다고 비판한다. 19 ‘부분운동은 전체운동에 복무해야 한다’는 당시의 상투적 언표 속에 함축된, 김원의 표현에 따르면, 저항세력에게까지 드리워진 ‘가부장적인 국가주의의 자장(磁場)’은 1980년대적 민주화 운동의 한계적 특징이었다. 20 이는, 임지현이 ‘적대적 공범’이라고 문제제기 한 것처럼, 타도하고자 했던 ‘악’과의 인식론적 동거를 보여준다. 21 민중신학도 포함된 1980년대 비판이론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배려하는 소수성(minority)의 인식론인 예수의 하느님나라와 다수성(majority)의 미학을 추구하는 맘몬의 체계 사이에 가로놓인 심대한 긴장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다수성의 미학이 추구하는 공공성, 그것이 함축하는 민중성과의 길항적 요소에 대한 자각은 곧 민중신학의 새로운 당대의식의 지평을 열었던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민중신학의 새로운 당대 의식에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주요 변수는 ‘민주화’와 ‘지구화’다. 이 두 요소는 얼핏 모순적인 함의를 갖는 듯이 보이지만, 한국사회의 형성과정에서 이 둘은 서로 맞물리며 전개된다. 나는 그 맞물리는 지점을 ‘일상의 대두’와 ‘개인의 탄생’이라고 요약하고자 하는데, 22 이 두 고리를 중심으로 배제와 박탈이 발생하고, 고통이 구성되며, 동시에 그것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은폐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구성적 변화와 그에 맞물리는 고통의 메커니즘은 ‘우리’와 ‘적’으로 단순 이분화되는, 익숙한 신학적인 인식의 프레임(담론틀)을 해체 및 재구성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한국사회의 전체주의적인 개발독재 시대에는 ‘슈퍼개인’과 ‘국민’으로 구성된 국가가 있었다. 이때 국민이란 전체주의적 국가주의에 위탁된 신체들의 집합적 표상에 다름 아니다. 담론으로서의 국가 영역 외부에는 물론 시민사회가 있지만, 그것은 국가에 의해 식민화된 반(半)자율적 행위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여성단체, 노총, 반공단체 그리고 교회 등이 대표적인 국민적 집합체로서의 시민사회였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는 슈퍼개인의 퇴출과 더불어 시작했다. 그것은 국민의 해체를 수반한다. 이제 그 자리엔 국가와 교섭하는 사회적 존재인 ‘시민’이 대체하였다. 한데 한국사회의 민주화에서 특기할 점은 슈퍼개인이 독점했던 공공성이라는 가치가 시민이 공유하는 공공적 가치에 의해 대체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존경이 철회된 그 자리에, 시민을 결속시킬 공공적 가치는 부재했다. 아니 사실은 시민으로 등장한 행위자들이 갖고 있는 권위에 대한 탈신비화 정서는 엘리트 계층의 무분별한 지대추구 행위 23와 맞물리면서 관성을 지니게 되었고, 가치의 아노미 상태 속에서 점차 주체화되는 시민은 그간 국가에 의해 억제됐던 욕망을 분출하는 데 목말라있던 탐욕스런 욕망의 소유자들에 다름 아니었다.
한데 이러한 양상은 지구화 과정을 통해서 더욱 철저하게 구현된다. 1988년 올림픽을 전환점으로 소비재산업의 구성비가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내수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대중의 삶에 대한 소비의 규정력이 다른 요소들을 압도하는 이른바 ‘소비사회’가 대두하였다. 절약의 윤리보다는 소비에 대한 욕구가 대중의 일상을 추동했고, 수출입국의 정신보다는 소비재 상품에의 유혹이 국경 안과 밖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구성해갔다. 이제 대중은 자기 자신의 욕구에 민감하라는 자본의 유혹과 맞물려 주체화되어 갔다. 강상중이 일본사회의 지구화 양상의 분석에서 주장한 것 24과 거의 병행적으로, 컴퓨터, 휴대폰, 디엠비(DMB), 엠피쓰리(MP3) 등이 상용화되면서 개인 간의 전 지구적인 소통의 네트워크가 확장되고, 가족이나 국민이 공유하는 공통의 시공간 감각은 개개인에로 미분화되었으며, 일상의 주체인 개인의 신체는 지구적 시공간 감각에 훨씬 더 익숙해졌다. 바야흐로 한국의 민주화와 지구화는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 데 여념이 없는 ‘개인’의 탄생을 부추겼고, 그러한 개인의 욕구가 활동하는 시공간으로서의 일상이 대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구화된 시공간 감각은 ‘소비의 즐거움’(consuming amusement)에 단순 연관시킬 수는 없다. 그 달콤한 상상작용은 소비 능력 상실에 대한 공포와 맞물린다. 그것은 실행된 공포가 아니라 ‘예감’된 공포다. 1997년 외환위기와 그 이후의 폭력적인 사회 재구조화는 이 무능력화에 대한 예감된 공포를 극도로 증폭시켰다. 25
근대국가의 무능력 담론의 메커니즘은 민법상의 행위무능력자 규정에서 은유적으로 표상되어 있다. 이 규정에 의하면 금치산자(禁治産者)나 한정치산자(限定治産者) 같은 민법상의 행위무능력자는 그 행위의 법률적 효력을 제한받으며, 단 법률상 대리인에 의해 유효한 행위로 인정받을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 법은 행위무능력자의 행위 자체를 제한하여 그들을 감금한다거나 추방하는 게 아니라 그 법적 효력만 제한한다. 이것은 민주주의적 근대국가의 무능력화된 타자에 대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능력자와 같은 타자는 단순히 부재한 자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만 제한적으로 존재가 인정되는 자이다. 공동체의 적절한 구성원인 대리인이 그(녀)를 대리할 때에만 그 행위는 법률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민에 의해 대리된 타자는 포용의 대상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한데 이것을 좀 더 확대해석하면 간접적 대리행위라 할 수 있는 ‘규율’(discipline)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곧 규율된 타자는 배제되지 않고 포섭된다.
이주노동자 문제는 이러한 민주적 배타성이 지구화 현상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대표적인 배제의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1992년 시행된 산업연수생제도나 2004년 시행된 고용허가제는, 전자가 공간을 통한 사회적 규율의 장치라면, 후자는 시간을 매개로 했을 뿐, 규율에 순응하는 조건 아래에서 국가가 그(녀)의 존재를 보증하는 법 규정이라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박배균과 정건화는 이를 ‘잊어버림의 정치학’(politics of forgetting)이라고 설명하는데, 26 이는 타자를 추방하거나 감금하는 ‘제거의 정치학’(politics of elimination)과 같은 ‘야만’이 지양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인간적이지만, 저들이 탈주체화될 때에만 존재로 포용된다는 점에서 위선적 인간성을 보여준다. 장-피에르 르 고프(Jean-Pierre Le Goff)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그것은 일종의 시민사회의 환각제로서의 ‘부드러운 야만’(la barbarie douce)에 지나지 않는다. 27
여기서 소비자본주의적 지구화가 무능력화에 대한 예감된 공포감을 극적으로 증폭시켰다는 위의 논의에로 돌아가 보자. 시민층의 ‘존재 붕괴’에 대한 두려움은 정신 질환이나 육체의 질환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앞서 말한 개인화와는 반대 방향으로의 경향인) 민족주의나 가족주의, 혹은 기타 연줄주의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낳았다. 신부족주의(neo-tribalism)는 유사부족으로까지 확대되어 배타적 집단주의를 강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체험은 배타성이 명시적인 가학성으로 드러나는 것을 억제하는 집단 심성으로 작용하며, 그러한 제도화가 어느 정도 구축되어 있기에 ‘적나라한 야만’은 범죄시되었다.
지구자본이 구동하는 국제적인 스포츠 스펙터클은 전 지구적인 배타적 집단주의의 공격적 욕구를 광적인 소비 욕구로 전화시키는 민족 마케팅 전략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출되게 함으로써 체제에 대한 불만이나 도전을 순화시키면서, 동시에 자본 축적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2002년 월드컵이나 2006년의 WBC 대회가 그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한편 공격성의 또 다른 표출의 예를 우리는 집단 따돌림(mobbing)이나 사이버 테러 같은 배제의 미시정치(micro-politics of exclusion)에서 볼 수 있다. 28 이러한 미시정치적 배제는 피해자의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차단하여 긍정적인 자존감을 상실케 함으로써 자기 파괴의 상태로 몰아붙인다. 한데 일상 속에 만연한 배제의 이면에는 지구화된 폭력적 위기 상황에서 시민계층의 ‘예감된 상실감’이 주요 원인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신분석학자인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은 ‘파편화된 자기 상태’(fragmented self state)에 직면한 사람들이 자존감을 지키려는 몸부림에서 타자에 대한 공격성이 전이된 형태로 분출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는데, 29 이것은 최근 한국사회의 사회심리학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다만 이러한 공격성이 야만적으로 표출되지 않은 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민주화의 체험이 적나라한 폭력성을 우회적으로 표출하게 하는 사회적 강제로 작동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민중신학의 개입은 어떠한가? 우선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 내부의 민중적 운동에 대한 개입의 지점을 상실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신학의 탈신학적(de-theological) 탐색에 대한 그리스도교 민중운동의 거리두기가 그 주된 이유다. 아무튼 민중신학은 운동의 부재 상황에 직면하여, ‘운동의 신학’ 혹은 ‘변혁의 신학’이라는 1980년대적 실천 패러다임의 철회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여기에 성찰적인(reflexive) 1990년대적 당대의식이 형성되면서 민중신학은 ‘비평’이라는 새로운 실천적 개입의 담론 양식을 발견해나가고 있다. 운동/변혁적 이론이 진리 형성적 담론의 차원을 지닌다면, 비평은 진리 해체적 지향을 갖는다. 1990년대 이후의 민중신학은 보다 견고하고 보다 정교하게 악의 평범화(banalization of evil)를 실현해 가는 사탄의 체계를 문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극복하려던 저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또한 그런 체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이분법적인 진리 게임의 수행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담론 작업, 바로 그것이다.
성소수자, 존속살해, 이주노동자, 지구화 시대 아버지 담론, 무능력, 신용불량, 성도, 성령, 성서 등등의 문제에서 고통의 은폐된 부분을 발견해내고, 시민 혹은 성도의 배제주의적 욕망을 읽어냈으며, 체제의 미학 속에서 ‘폭력의 고고학’을 탐색했다.
한편 지구화와 민주화라는 시대적 변화의 물결에 맞물려 국가는 빠르게 변모하고 있는 데 비해, 오늘날 교회는 ‘지체된 민주화’의 공간을 대표하는 듯이 보인다. 여전히 일방향적인 권위 모델이 건재하고, 타자에 대한 배타적 담론을 생산하는 공장으로서의 보수적 규율체계의 위상 또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최근,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급성장한 선발대형교회 모델을 지양하고, 덜 공세적이고 보다 포용적인 선교적 태도를 취하는 후발대형교회들이 빠르게 부상하고 있지만, 선발대형교회든 후발대형교회든, 두 유형의 발전 모델은 공히 배타적이고 초월적 개체로서의 ‘절대 자율적 존재’인 신과 ‘타율적 자율’의 주체로서의 성도, 그리고 ‘절대 타율적 존재’로서의 타자라는 삼분 권위 모델을 고수하고 있다.
권위에 대한 존경이 급속하게 철회되고 있는 민주화-지구화 시대의 조류 속에서 그 반대 방향을 향해 굳건히 버티고 있는 교회 체제는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우호적으로 비추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제국주의의 온상인 미국의 횡포에 대한 적개심이 어느 때보다도 강화된 시기에 선교 초기 역사부터 줄곧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권 아래 있는 친미적 담론 공간으로서의 교회의 위상은 현저히 부정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는 추세다. 또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시대착오적 행보들은 혐오감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형편에 있다. 최근 한국의 시민사회는 교회에 대한 정서적 친근감을 속속 철회하고 있고, 청년층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이들이 이미 그리스도교적 신앙 제도로부터의 철수를 시작하였다.
이미 선교론이나 토착화론을 중심으로 이러한 일방향적 권위모델에 대한 성찰적 문제제기가 있었다. 주로 ‘성부’ 대신 ‘성령’을 강조하는 관계의 수정모델은 소통의 쌍방향성을 강조함으로써, 탈권위적인 민주화-시장화 사회 혹은 탈식민화 사회와의 화해를 추구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사회가 이러한 행보를 본격화하는 1990년대 이후에 오히려 신앙제도와 학문시장에서 이러한 주장에 대한 숙청을 본격화했다.
여기에는 ‘1907년 대부흥운동’의 기억이 자리잡고 있다. 이 대부흥운동의 지배적인 ‘기억의 장’(field of the memory)은 성령에 대한 교권주의적 도구주의, 규모 중심주의, 정교분리적인 권력 친화성 등, 한국 그리스도교의 토대가 되는 인식론과 연계된다. 즉 이것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체제 형성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30 그런 점에서 지금의 한국 교회는 ‘1907년 체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의 성령에 대한 지배적 이해는 교권적 도구주의의 기조를 지닌다. 하여 한국교회에서 성령은 결코 쌍방향적 소통의 관점으로 체험되지 않는다. 요컨대 선교론과 토착화론의 대화적 수정 모델이 교권에 의해 기각된 것은 한국 교회의 비정상적 행위의 소산이 아니라, 신앙 논리상 지극히 합리적 행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신앙 내적 합리성이 한국 사회의 일반적 합리성의 시각에서 볼 때 ‘지체된 민주화’의 유산처럼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다. 즉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보수주의를 반영한다.
그런데 민중신학은 대화적 신성으로서의 성령 개념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은 신의 세 가지 가면(페르소나)을 상징하는 삼위일체 모델이 인식론적으로 본질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화적 성령’ 모델이 얼마나 가능한지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불변하는 주체 간의 대화란 항상 권력관계를 수반한다. 왜냐면 대화는 그 수행적 결과에 의해 타자에 의해 영향을 주든 받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변하는 주체 중 하나는 자신의 주체를 양도해야 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 편의 양도 행위를 ‘회개’라는 말로 표현함으로써 그 양도가 일방향적임을 명시했다. 신은 결코 자신의 주체를 해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화성이라는 성령의 존재 의의와 본질주의적 신의 가면으로서의 성령은 상호 모순적이다. 그렇다면 대화적 성령론은 과연 삼위일체론을 포기할 수 있는가?
민중신학은 〈사도행전〉 2장, 이른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성령을 받은 이들이 자신의 언어로 말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언어로 말하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타자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신이 사릌스(σαρξ, 살덩이)가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주장과 병행적이다. 여기서 성령과 성령을 입은 자는 자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채운다. 즉 타자로 인해 자아가 변모함으로써 다시 그 타자가 변모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호성이 (상호주관적이 아니라) 탈주관적으로 연계된다. 바로 이러한 탈주관적 상호성에서 민중신학은 권력 해체적인 대화성을 발견하려 하는 것이다.
맺음말―‘탈영자들의 기념비’로서의 신학을 위하여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저술한 《제국》에서 인용된 한 반파시스트 파르티잔은 이렇게 말한다. “‘조국을 위해 죽은 자들에게 바친’ 우스꽝스러운 기념비들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탈영자들의 기념비들’을 세우기를 원한다”라고. 나는 위에서 민중신학의 1990년대 이후의 당대성의 특징을 당대의 역사적 승자들이 세운 기념비가 아닌, 그 시대의 시선에서 삭제된, 은폐된 이들의 기념비를 세우려는 있다는 주장을 폈다.
물론 그것은 민중신학의 지속성을 언급하는 장에서 말했듯이 이미 민중신학적 특징에 속한 것이다. 1990년대 이후의 민중신학의 당대성은 단지 그 요소를 좀 더 특화시켜 집중적으로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군의문사 위원회’의 한 조사관은 군대 내의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들 중 드러나는 이가 아닌, 은폐된 이를 찾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주검에 얽힌 사건은 여러 관련자들에게 좀처럼 씻어지지 않는 깊은 상처가 됐을 터인데도, 대부분은 그 사건의 기억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한데 만약 그의 말대로 그 상처가 정말 깊어서 이후의 삶이 파편화되는 체험을 해야 했던 이들이라면, 그는 실제로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했을 수 있다. 왜냐면 그 기억을 무의식 속에서 다른 것으로 전이시키지 않는다면 그 트라우마는 더욱 그의 삶을 파괴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그 사건에도 불구하고 꽤 성공적인 삶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면, 필시 그에겐 그 사건이 자신의 성공담 속에 한 계기로 재해석되었을 것이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표현대로 그 고통의 사건을 생산적 기억으로 전화시킨 덕이다. 영화 〈JSA〉의 대사처럼 ‘진실을 은폐함으로써 평화가 유지되는 곳’은 ‘공동경비구역’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 전체인 것이다.
민중신학은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하고자 한다. 진실을 은폐함으로써 진실이 보장되는 사회의 안보담론 속으로 말이다. 그 속에서 ‘팍스 크리스티’가 아닌 ‘팍스 로마나’의 현실을 드러내려 한다. 진정한 예수의 평화는 죽임당한 이들, 말을 빼앗기고 기억을 도난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증언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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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상중, 〈보론: 내적 국경과 래디컬 데모크라시 ‘재일’(在日)의 시점에서〉, 이경덕 임성모 옮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산, 1997) 참조. [본문으로]
- 아서 클라인만 & 조안 클라인만, 〈경험의 호소력, 영상의 당혹감―우리 시대의 고통에 대한 문화적 전유〉, 안종설 옮김, 《사회적 고통―인간의 고통에 대한 사회학적, 의학적, 문화인류학적 접근》 (그린비, 2002). [본문으로]
- 르네 지라르, 김진식 박무호 옮김, 《폭력과 성스러움》 대우학술총서(번역) 59 (민음사, 1993), 28쪽. [본문으로]
- 김용복, 〈민중의 사회전기와 신학〉, 371쪽 이하 참조. [본문으로]
- 안병무, 〈민중해방과 성령사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88), 220~227쪽 참조. [본문으로]
- 가야트리 스피박, 태혜숙 옮김, 〈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가?―다원주의의 문제들〉, 《세계사상》 4 (1998.9) 참조. [본문으로]
- 여기서 ‘좌절된 하느님나라의 체험’이라고 표현한 것 이면에는 적어도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동시에 포괄되어 있다. 1980년대적 패러다임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탈근대주의적 경향’과, 그 기획이 불완전하게 수행된 탓이라고 보는 ‘재근대주의적 경향’이 그것이다. [본문으로]
- 권인숙, 《대한민국은 군대다―여성학적 시각에서 본 평화. 군사주의. 남성성》 (청년사 2005) 참조. [본문으로]
- 김원,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는 후퇴했나〉, 《정치비평》 10 (2003) 참조. [본문으로]
- 임지현, 《적대적 공범자들》 (소나무, 2005) 참조. [본문으로]
- 나의 글 〈낯설음에 대한 은폐된 폭력〉, 《우리 안의 이분법》 (생각의 나무, 2004). [본문으로]
- 사회적 행위자들이 국가 부문의 공공적 자원을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용어다. [본문으로]
- 강상중 & 요시미 슌야, 임성모 김경원 옮김, 《세계화의 원근법―새로운 공공공간을 찾아서》 (이산, 2004) 4장 참조. [본문으로]
- 이하의 내용은 나의 글 〈‘카인 콤플렉스’와 무능력자 담론〉, 《당대비평》 23 (2003 가을)의 내용 일부를 재정리한 것이다. [본문으로]
- 박배균 정건화, 〈세계화와 ‘잊어버림’의 정치―안산시 원곡동의 외국인 노동자 거주지역에 대한 연구〉, 《한국지역지리학회지》 10/4(2004) 참조. [본문으로]
- 이영자, 〈프랑스의 ‘좌익 근대화’와 배제의 사회〉, 《현상과 인식》 26 (2002 겨울), 31~32쪽. [본문으로]
- 특정 개인이나 소수자 집단에 대해 집단적으로 가학・고립・배제하는 행위로, 그(녀)(들)의 커뮤니케이션을 왜곡・제한・차단하여 사회적 상호행위의 장에서 추방하는 현상을 가리키는데, 유사한 개념으로 불링(bullying)이 있다. 1990년대 이후 조직・노동심리학, 정신의학, 아동・청소년학 등의 분야에서 다수의 연구성과물이 쏟아져 나왔고, UN, ILO, EU, 등에서도 체계적인 조사 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으며, 최근 한국에서는 주로 아동・청소년학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많은 연구 보고서들이 제출되고 있다. 신진욱, 〈일상의 사회적 배제와 커뮤니케이션의 미시정치―모빙・불링・사이코테러의 집단 다이내믹, 권력기술, 권력관계〉, 《사회이론》 26 (2004) 참조. [본문으로]
- 김병훈, 〈인간의 공격성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진단 및 해결방안 연구〉, 《목회와 상담》 4 (2003), 189~93쪽 참조. [본문으로]
- 김진호, 〈한국 개신교의 미국주의, 그 식민지적 무의식에 대하여〉, 《역사비평》 70 (2005 봄)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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