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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민주화 시대의 ‘미학화된 기독교’와 한국 보수주의

이 글은 개혁을 위한 종교인 네트워크가 주최한 <민주화 20년 종단간 토론회>(2007.6.8)에서 발표된 글로,
[기독교사상](207.6)에 게재되었고,
이를 다듬어 당대비평 편집위원회가 엮은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웅진지식하우스, 2007)에 재수록되었습니다.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획의 말_다시, 권력을 상상력에게로(이상길)

1부
대담: 더 많은 혹은 더 작은 민주주의를 찾아서_87년 6월 이후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성찰(김우창, 최장집)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_87년 헌법 개정 20년의 단상(김두식)
6월 민주화항쟁, 그 이후에 찾은 질문들(권인숙)
더불어 아름다웠던 시절_87년, 그 전과 후(방현석)
87년 체제, 민주주의, 그리고 대통령 선거(김호기)
우리는 왜 '모두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지 못했나(장하준)
만회혁명으로서의 87년을 재고찰한다(김성태)

2부
대담: 외길이 아닌 여러 갈래의 민주주의_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임지현 박노자)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_87년 체제의 역사화를 위하여(김기봉)
민주화 시대의 '미학화된 기독교'와 한국 보수주의(김진호)
지금 대한민국은 법률가들이 통치하고 있다(이국운)
'노동의 힘'을 다시 생각하며(조계환)
자율적인 공론장은 어떻게 가능한가_언론 민주화 20년의 반성(임영호)
민주화 이후의 문화와 진보를 생각하며(서동진)
지금 한국 자본주의는 어디에 있는가(우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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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시대의 미학화된 기독교와 

한국 보수주의

 

 

 


민주화의 스케치

 

1987년이 한국사회의 감수성의 변화를 계기 짓는 기점이라는 것은 이미 폭넓게 합의된 사항이다. 그리고 그것이 민주화와 관련되었다는 것도 이론(異論)의 여지없다. 1987년 이전에 민주주의는 갈망의 대상이었다. “구름 속에 가리운 듯 애당초 없는 듯(<아하 누가 그렇게>)이라는 김민기의 노래처럼 그 시절 그것은 간절히 원하나 보이지 않는 그 무엇’, 철저히 타자적 공간, 바로 그것이었다. 1987년은 그러한 갈망해마지 않던 부재의 공간을 현실 세계 속으로 옮겨왔다는 점에서 혁명의 시점이고 구원의 순간이었다.

혁명이든 구원이든 그 시간은 역사의 시간을 중단시킨다. 군부독재라는 권위주의 체제가 구축해온 역사가 중단된 것이다. 하지만 이 중단은 지속될 수 없다. 권위주의 체제가 구축한 유물들을 하나하나 철거하는 작업을 개시해야 하고, 새로운 역사의 건조물을 세워야 한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철거할 것이며 또 무엇을 어떻게 재건축해야 하는가는 자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하여 민주화는 그 시간을 어떻게 역사화할 것인가?’의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1987년 이후의 민주주의에 관한 의제는 바로 이와 같이 요약된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갈망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역사화의 대상인 것이다. 여기서 어떻게의 문제는 누가역사화의 주역이 될 것인가의 문제와 불가분 연계되어 있다. 누가 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주주의를 구체화할 존재인가? 이것은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시민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시민권을 둘러싼 투쟁은 곧 민주주의를 어떻게 역사화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은 국민의 시민화라는 대중의 재주체화 과정과 맞물린다. 여기서 국민이 국가의 욕망과 자신을 동일시한 집합적 주체를 의미한다면, ‘시민은 국가와 교섭/거래하는 집단적 혹은 개체적 주체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란 시민의 참여를 제도화하는 정치 양식이며, 시민의 주권을 실체화하는 권리 양식이다.

한데 시민의 주권화는 비시민의 탈주권화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시민의 주권화와 관련하여 두 가지 위기에 직면한다. 하나는 퇴출 가능성에 대한 시민의 위기이며, 다른 하나는 퇴출되어 비시민화된 이의 존재 파괴의 위기이다. 이에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안보의 장치를 마련했는데, ‘시민적 안보의 장치(퇴출의 억제)비시민적 안보의 장치(복지)가 그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이 두 안보의 장치는 비대칭적으로 발전했다. 비시민적 안보의 장치가 매우 미진한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이에 대한 사회적 각성의 수준이 매우 낮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적 체제로의 급속한 이행이 주된 이유겠다. 성찰을 위한 시간적 여유 없이 전개된 국민의 시민화는 제 목소리 내기에만 몰두하는 인정투쟁이 시민적 실천의 주요 내용이 되게 했다. 타자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고통과 해방의 연계성을 이해하며 그것을 민주적 제도화에 연결시키는 문제로 고민할 준비는 매우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전반적으로 보수주의적 기조 아래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민주화와 거의 동시적으로 내구소비재산업이 급속하게 팽창하였다는 점도 주지해야 한다. 소비재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팽창한 광고산업은 대중을 소비자로 주체화시켰다. 시민은 총천연색의 TV모니터와 잡지 등을 통해 너의 취향을 개발하라라는 자극적인 유혹에 직면한 것이다. 하여 한국에서 민주화와 소비사회의 체험은 동시적이다. 또한 시민적 주체화는 소비자로서의 자아 감각과 얽혀 있다. 한데 이렇게 자기 자신의 취향에 고도로 민감해진 시민의 육체는 타인을 망각하기 쉽다.

이런 경우 시민성이 개인주의적으로 극단화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공동체적 윤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공동체에 대한 존경은 권위주의 체제와 함께 치명적으로 붕괴되었다. 즉 한국적 시민성은 존경의 철회를 통해 구현된 것이다. 결국 1980,90년대 민주화와 더불어 등장한 소비자적 시민(시민의 시장화)타인에 대한 망각을 통해 주체화되었다. 시민의 비시민에 대한 무감각은 소비사회와 더불어 더욱 강화된 것이다.

셋째로,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광폭한 태풍처럼 몰려와 우리 일상을 거칠게 몰아붙인 지구화를 간과할 수 없다. 이제 시장은 결정적으로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었다. 하여 시민성은 야만적 시장에서의 생존, 즉 시민적 안보를 최우선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의 가치에 영향을 받게 된다(시민의 신자유주의적 시장화). 이것이 타인에 대한 망각을 결정적으로 강화하는 요소가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한국사회는 민주화 과정에서 시민적 안보와 비시민적 안보의 비대칭성이 점점 커져 갔다. 물론 이러한 비대칭성은 잘 제도화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시민성이 아직 이 비대칭성을 감내하도록 안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심한 비대칭성, 그것이 내포하는 야만성에도 불구하고 시민성이 비교적 고착화된 탓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한국사회는 만성적인 체제 위기의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이것은 동시에 이 비대칭성을 극복하는 제도화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것은 시민성이 아직도 여전히 잘 정착화되지 않은 탓/덕이다.

최근 한국사회는 체제의 안정화를 지향하는 시민성을 둘러싼 두 경향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시민적 안보를 배타적으로 중시하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적 안보와 비시민적 안보의 연계성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나는 민주화 시대의 보수와 진보를 이 두 경향과 연계시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전자가 보수라면 후자는 진보인 것이다.

이것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보수와 진보가 민주화 시대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그 체제의 유지하려 하느냐 변혁하려 하느냐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갈렸다면, 민주화 시대는 체제의 변혁을 꿈꾸든 재구성을 목표로 하든 비시민적 안보를 제도화의 주된 문제요소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진보와 보수가 갈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의 이른바 개혁세력이 겪는 인식의 혼란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진보였지만, 그리하여 여전히 스스로를 진보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그들의 정책은 과거 어느 세력보다도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를 추동하고 있다.

 

아무튼 민주화 20년을 지난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는 아직 잘 제도화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시민성 개념도 아직 확고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정책에 있어서나 인식에 있어서나 보수와 진보가 모호하게 얽혀 있다. 그러므로 향후 민주화의 전개는 여전히 가변적 성격이, (보다 확고한 체계를 구축한) 다른 사회에 비해 더 강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향후 한국사회의 시민성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더욱 격렬해질 것이고, 서로의 감각적 문제의식을 제도화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이 글은 이러한 사회 변동의 맥락에서 한국기독교(특히 개신교)정치세력화하려는 일련의 행보에 주목한다. 나는 이것이 한국사회의 보수주의적 공고화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최근 기독교의 위기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이해한다. 한데 이에 대한 기존의 여러 해석은 한국기독교의 지체된 민주화양상이 한국사회를 퇴행적으로 견인하고 있다는 데 모아지고 있다. 반면 나는 이 글에서 한국기독교의 지체된 측면이 아니라, 이러한 위기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다른 측면, 즉 민주주의 사회에 보다 잘 적응하고 있는 측면에 주목한다. 바로 여기에서 한국기독교가 한국사회를 보수주의적으로 공고화하는 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거대한 동질성

 

한국기독교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교파간 분열이 매우 심하지만 성서해석, 예전(禮典), 직제(職制), 세계관 혹은 선교관 등에 있어서 놀랍게도 동질적이다. 거대한 공통감각이 한국기독교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통감각에 기반을 둔 삶의 태도는 전반적으로 보수주의적이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 국제정치를 보는 관점, 인종에 대한 이해, 타종교나 신념체계를 보는 자세, 가족성역할낙태동성애를 보는 시각 등에 있어서 한국기독교는 전 세계 기독교의 일반적 경향보다 훨씬 보수적이다. 또 한국사회 내에서도 타영역에 비해서 더 보수주의적인 편향을 드러내고 있.

또한 한국기독교는 대체로 친미적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국제정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언어를 포함한 문화적 차원에서도 미국적인 것에 대한 모방 욕구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 흔치 않으며, 한국 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형편이다. 그리고 세속적 성공을 신앙적 가치와 직결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한국기독교는 거의 대부분 생각을 공유한다.

 

초석적 사건

 

이러한 거대한 동질성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는 이 물음과 관련해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주목한다. 이 사건을 계기 삼아 한국기독교의 기본적인 특성이 형성되었으며, 한국교회는 이러한 특성을 고조시키면서 각 시대별로 위기를 돌파하곤 했다. 이 사건이 명시적으로 기억의 정치의 수단으로 활용되든 아니든 간에, 그 사건으로 말미암은 특성은 끊임없이 반추되면서 한국기독교를 지탱하고 재활성화하는 내적 동력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한국기독교 형성의 초석적 사건(founding event)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올해로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수많은 학회들, 교단 총회들, 그밖의 여러 기관 등이 이 사건을 기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왔고, 오는 78일에는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대규모 연합행사를 벌일 예정이다.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은 전례 없이 과도한 관심으로 이 사건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하는 기억의 정치를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기억의 정치가 담고 있는 우리 시대의 함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사건의 개요와 의의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평양대부흥운동의 한 중요한 특징은, ‘대부흥이라는 이름에서 시사되듯이, 교회의 양적인 팽창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만 보면 이 사건을 계기로 교회가 대부흥을 이룩하였다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대부흥을 그 결과라고 단순하게 규정지울 수 없다는 점이 거의 예외 없이 간과되고 있다. 실은 이 사건이 있기 이전에, 즉 러일 전쟁이 벌어지던 1904,5년부터 이미 교회와 교인 수가 비약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의 배후지로서 일본 군대의 주요 진군루트이자 병참기지였던 평안도 지역에 민간인에 대한 군대 폭력이 집중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전쟁에 관한 기록이 극히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서양인 종군기자들이 남긴 기사, 사진과 삽화, 그리고 선교사를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의 비망록 같은 글 등에 의하면[각주:1] 평안도 지역 조선의 양민들은 일본군의 징발과 징용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직접적인 군대 폭력에 대해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처형되기도 했다. 조선 정부는 자국 민간인의 피해를 억제하기 위한 거의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전쟁 피해, 특히 민간인 희생에 대한 사후조사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생존전략을 스스로 찾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많은 이들이 교회로 피신해 들어온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당시 평안도 지역의 대부분의 교회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에, 일본 군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게다가 선교사들의 물적 지원에 의해 교회는 피신해들어 온 백성에게 식량을 제공해줄 수도 있었다.[각주:2] 이런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교인이 되었다.

한데 문제는 교회가 이러한 의도하지 않은 급속한 양적 팽창을 수용할 만한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여 교회는 잘 통합되지 못했고, 특히 새신자들이 심각한 갈등을 야기한 직접적인 장본인이었던 듯하다. 아마도 전쟁의 트라우마(傷痕)가 이들의 정신적인 왜곡을 심화시켰을 것이고, 전쟁 과정에서 마을공동체가 상당히 붕괴되어, 정신적 붕괴 상황을 조절할만한 전통의 가치 또한 심하게 훼손된 상황이었던 듯하다. 게다가 교회는 사람들의 도덕적 준거문화(reference culture)이던 조상숭배나 민간신앙들을 극도로 폄하하였기에, 교회 안으로 들어온 이들에게 그러한 훼손은 더욱 심각하게 체험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로 피신해 들어온 많은 사람들은 필경 정신적 공황 상태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교회는 극도로 혼란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에 직면하여 선교사들을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은 원산의 예를 따라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회를 열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상처받은 이들의 고통이 아니라, 분열되고 갈등에 휩싸인 교회의 통합이었다. 극도의 혼란만큼 그들의 기도회는 열정적이었고, 얼마 후 그들은 엑스타시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은 열광적인 신앙적 동력을 촉발시켰고,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그들은 이것을 성령사건이라고 외쳐댔고, 이러한 신비한 종교적 체험은 마음에 깊은 상흔을 입은 이들에게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음이 분명하다.

이 성령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의 상처는 일시적으로 봉합되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은 이들 대중에게 도덕재무장 운동을 벌였고,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그들의 지도에 따랐다. 또한 대중의 상처는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전환되어 전도운동으로 동력화되었다. 고통이 열정적인 선교의 욕망으로 치환된 것이다. 마치 한국전쟁의 상흔이 박정희 체제에 의해 광적인 산업화의 동력으로 치환된 것처럼. 즉 성령체험은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트라우마와 대면할 내적 능력을 선사한 게 아니라, 고통스런 기억을 다른 것으로의 열정으로 전이시킴으로써 정신적 상처를 봉합시킨 것이다(고통의 치환, substitution of pains). 이때 강력한 신앙적 실천을 낳은 도덕주의나 선교관은 삶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매우 획일적인 편집증적 감성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이로써 교회는 다양성이 배제된 잘 통합된 공동체로 재탄생했다. 바로 이것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적 개요이자 의미이다.

한데 이 사건의 결과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해야 한다. 이 사건을 계기삼아 선교사들의 헤게모니가 결정적으로 확고해진 것이다. 교회의 주도권은 물론이고, 신학교육에 관한 세세한 부분까지 장악하여 엘리트 양성에 관한 막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들과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 연계된 조선인 엘리트들은 선교사들보다 더욱 선교사스럽게 처신했다. 과도한 선망은 과도한 모방을 낳았고, 그 모방은 원본보다 더욱 원본적이고자 했다. 이른바 미국에 대한 원본주의(originalism)가 한국기독교의 내적 식민성을 구성했다.

한편 이 사건은 얼마 안가서 평안도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북지역의 독특한 체험이 전국화된 것이다. 곧 범서북신앙이 한국기독교의 공통감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각주:3]

요약하자면, 평양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선교사의 헤게모니와 함께 그들에 대한 존경심이 전국의 기독교도들에게 내면화되어, 그들에 대한 선망과 모방이 신앙의 내용이 되었다. 다양성이 억압되었고, 획일적인 신앙관이 선교사들에 대한 존경심과 결합되었다. 이는 미국에 대한 선망과 겹쳐서 체감되었다. 하여 신앙은 이유 없이 미국과 미국적인 것에 대한 친근감을 동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모방은 미국식 근본주의 신앙과 감성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즉 백인 중심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감성이 신앙적 요소로 내재화된 것이다. 이러한 모방은 안전 나아가 성공을 낳는다는 기억과 결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 지향적 행위를 동력화하는 것은 성령이라는 믿음이 형성되었다. 세속적 실패는 성령과 이율배반적이라는 신앙적 심성이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고착화된 것이다. 요컨대 성령-성공-친미성(근본주의적 미국주의)[각주:4]-획일주의등으로 신앙은 코드화되었던 것이다.

 

2007, ‘Again 1907’

 

그렇다면 왜 어게인 1907’이 소리 높여 유포되고 있는가? 100주년이라는 단순 주기적인 요소가 그때의 기억을 반추하도록 강제한 면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기억의 정치를 효과의 측면에서 역추론해 볼 때 ‘100’이라는 숫자보다 훨씬 의미심장한 요소가 여기에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한국 개신교가 최근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는, 의심할 수 없는 현실이 그 배후임은 말할 것도 없다. 2005년의 인구센서스의 처참한 결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측되어 온 것을 확인한 데 지나지 않는다. 몇몇 대형교회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교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교인 수의 정체 혹은 감소를 겪고 있었다. 각 교단별로 기획되었던 성장 전략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러한 성장전략에 발맞추어 배출된 신학생들 중 많은 이들이 목회지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게 된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망이 급속도로 무너졌다는 점이다. 권위주의 체제 시절 교회는, 신자든 아니든, 다수의 사람들에게 비교적 호감이 가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사회적 혐오가 전반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공중파 방송들, 신문들, 시민사회운동 기구들 등이 앞 다투어 교회의 부조리를 파헤쳐 사회적으로 의제화시켰고, 각종 기독교기관에서 조사한 설문들의 결과는 그러한 사회적 존경의 붕괴를 여실히 보고하고 있다.

더욱이 권위주의 체제를 이른바 민주정부가 대체하게 된 이후,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일부 기독교 인사들과 기관들이 권력 자원의 일부를 불하받게 되면서, 양적인 비율상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보수적인 기독교 영역은 상대적인 상실감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것은 식민지 시절부터[각주:5] 군정기를 거쳐, 권위주의 정권 시절까지, 즉 민주화 이전 시기까지 지배적인 교회와 정치권력은 줄곧, 음성적이든 양성적이든, 우호적인 공조관계를 맺어왔던 상황이 역전됨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군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했던 소수의 진보파 기독교 세력이 민주화 이후 권력 자원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높아진 데 비해,[각주:6] 반민주적인 이미지로 퇴락해버린 주류 기독교회들은 일련의 민주화 양상에서 신앙의 위기를 체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장의 위기, 존경의 위기, 권력자원에 대한 접근성의 위기, 이 세 가지 요소는 오늘 한국교회가 체험하고 있는 위기의 주된 양상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의 주된 대응을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위기와 관련해서 각각 이야기하면, 첫 번째와 관련해서는 이른바 문화목화’, 즉 소비사회적인 대중문화의 일부 감각적 측면을 도입하여 신앙의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강화하는 목회(또는 선교) 전략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설득에 의한 이해의 동일화보다는 욕망의 부추김을 통한 감각의 동일화를 통해 신앙이 구성되는 양상을 자극했다. 이러한 위기 돌파 전략은 상당한 성공을 이룩함으로써, 교회뿐 아니라 신학교에서까지 매우 열광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한데 이러한 신앙의 감각화 현상은 성찰의 후퇴를 동반하였다. 성찰의 주된 장이어야 할 신학교에서 인문학으로서의 신학이 실종되고 성장주의의 기술을 연구하는 기능학으로서의 신학이 대세를 이룬 현상은 그 주된 이유겠다. 그것은 신학교가 학문적 견제능력을 상실하고 교회에 철저히 종속되어 버린 현실과 맞물려 있다. 아무튼 이러한 목회 전략의 활성화는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에 대한 신앙적인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신앙의 자본주의화를 낳았다.

둘째로, 존경의 위기는 한국교회의 성장주의가 권위주의체제의 성장주의와 쌍생아적이라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의 권위주의체제가 반공주의적인 증오의 동력화를 통해 발전을 이룩한 것처럼, 한국교회 또한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를 신앙화함으로써 선교의 동력을 강화시켰던 것이다.[각주:7] 이러한 증오의 동력화는 국가와 교회를 각각 발전과 선교의 총동원체제로 구축하였다.

그런데 신앙은 다른 신념들보다 더 강한 내구성과 지속성을 지닌다. 즉 권위주의체제가 붕괴된 이후까지도 한국기독교가 발전시킨 증오의 신앙은 여전히 교회를 통해서 강하게 보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신앙은 냉전주의적 감수성의 보고(寶庫)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데 민주화는 이러한 증오의 동력화를 지향하는 냉전주의적 요소를 시민사회가 낯설어하는 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하여 시민사회는 냉전적인 증오의 정치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태적 공간으로 여겨졌고,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지체된 근대성은 미래에 관한 전망이 부재한 영역이라는 사회적 이미지를 낳았다. 이렇게 교회는 오늘날 존경할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교회의 대응전략은 축복의 신앙화로서 설명된다. 이때 축복은 개체적인 측면이 강화된다. 과거 증오의 신앙은 증오의 대상을 집단적이고 범주적으로 해석하였고, 마찬가지로 증오의 주체 또한 집단적이었다(신앙공동체 혹은 교회 등). 이런 맥락에서 증오를 동력화함으로써 선사될 성공의 결실 또한 집단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축복을 개체화된 요소로서 신앙화함으로써 시장적 민주화 시대의 감수성과 보다 잘 부합하는 신앙담론을 유통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나는 앞서 민주화를 국민의 시민화로서 이야기한 바 있다. 즉 국가의 하위주체로서 집합적 성격을 띤 국민이 국가와 거래/교섭하는 개별적 혹은 집단적 주체로서의 시민으로 대체되는 과정이 민주적 제도화의 특징적인 양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축복의 신앙은 바로 이러한 시민성과 잘 부합한다. 특히 지구화된 사회에서 국가가 시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보루라는 믿음이 붕괴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신자 대중에게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개별적 안보의 선물은 강한 동시대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증오의 신앙을 대체하는 축복의 신앙은 상생(相生)을 신앙화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러한 신앙은 계급적 양극화를 강화하는 데 더욱 기여하고 있다. 실패한 사람들을 교회는 신앙에서도 실패한 자로 폄하한다. 이는 실패자로 하여금 내적 자존감을 회복할 기회를 앗아간다. 이는 오늘 우리사회에서 이른바 신앙적 성공의 가장 두드러진 주역들이 강남에 집중되어 있는 것과 상응한다.

마지막으로 지배적인 기독교 영역에서 체감되는 권력자원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은 신앙의 정치화를 공공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요컨대 한국교회는 정치세력화를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 한다. 이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정치세력화는 민주화 자체를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고 권위주의 체제를 향수하는 정치적 태도로 나타난다. 몇 년 전의 이른바 기독교 시청집회는 그러한 퇴행적인 감수성의 신앙이 정치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난무하던 반공주의적인 증오의 언술들은 시민사회로 하여금 한국교회를 시대착오적인 공간으로 인식하게 하는 혐오적 반응들을 촉발하였다.

또한 최근 사학법 파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교회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로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빗겨가지 못했다. 시민사회적 감시를 통해 권력배분의 불공정성을 축소해야 한다는 민주화 시대의 감수성에서 너무 멀리 퇴행화된 신앙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퇴행적 공간은 청산의 대상이지 존경의 대상은 결코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을 교회의 정치세력화를 통한 위기 돌파 시도가 오히려 확산시킨 것이.

요컨대 정치세력화를 향한 교회의 원초적인 돌파 전략은 사회적 혐오감을 더욱 강화하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교회의 정치세력화 전략이 퇴행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청집회 이후, 의사표현의 민주적 메커니즘에 어느 정도 학습된 새로운 형태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는 시도들이 있다. 권위주의 체제의 합리성을 지양하고, 민주적 합리성을 지향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세력화가 조심스레 모색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요소는 최근 사학법 재개정을 둘러싼 교회의 발작적인 비성찰적 반응 속에 다시 묻혀버린 듯이 보이지만, 민주화 시대의 합리성으로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는 시도가 가시화될 날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왜냐면 한국교회를 과대대표하고 있는 대형교회에서 새로운 흐름이 빠른 속도로 구태적인 흐름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형교회는 크게 두 흐름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1970,80년대에 급성장한 선발대형교회, 1980,90년대에 급성장한 후발대형교회가 그것이다. 전자가 군부 권위주의 시대의 성장주의적 합리성에 보다 잘 부합하는 신앙제도를 발전시켰다면, 후자는 민주화 시대의 합리성을 보다 잘 체현함으로써 민주화 시대의 우생학적 논리를 신앙화한 주역이다. 여기서 선발대형교회는 오늘날 시대착오적 기독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반면 후발대형교회는 기독교에 대한 존경이 철회된 시대에 여전히 높은 사회적 신망을 견지하고 있다. 또한 시대착오적이지 않은 신앙문화를 보다 잘 구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후발대형교회 또한 정치세력화의 흐름 속에, 선발대형교회보다는 다소 느린듯하지만,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보수적인 기독교 NGO들이 조금씩 활동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다. 사회의 공론의 장에 참여하여 민주주의적 제도화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민주화의 내용을 구성하는 데 영향력을 미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얘기한 문화목회나 개인주의적 축복의 신앙화를 가장 세련되게 구현하고 있는 주체 또한 후발대형교회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새로운 합리성의 신앙은 한국교회 전반을 학습시킬 것이 예측된다.

이상에서 이야기한 한국교회의 위기 돌파를 향한 세 가지 차원의 전략은 올해, 2007년을 중요한 계기로 하여 가시화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민주화 20년을 맞아, 보다 개혁적인 정부의 실패가 시민사회 대다수의 확신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정치세력화의 국면적 결실을 가장 명료하게 가시화하는 요소인 대통령 선거가 벌어지는 해이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한국의 민주적 제도화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전망에 의해 수행된 것은 결코 아님에도, 개혁적이고 진보적 비전이 한국사회를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적 제도화를 추동하는 동력을 보수주의에서 찾으려는 주장이 보다 폭넓게 사회적 합의를 주도할 것이 예측된다. 하여 민주주의적 체제 하의 보수주의를 구성하려는 시도는 아마도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모색될 것이다. 시민적 주권과 안보에 관한 다양한 제도화의 시도는 비시민화된 존재를 망각하게 하는 다양한 잊어버림의 정치를 동반할 것이라는 얘기다. 한데 한국의 교회는 이러한 보수주의 형성의 가장 중요한 매트릭스로서 기능하고 있고, 또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교회의 거대한 동질성이 보수주의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러한 보수주의적인 신앙이 타자(비시민적 존재)의 배제를 효과적으로 망각하게 함으로써 배타적인 시민적 자존성을, 그 망각의 야만성을 세탁해주는, 이른바 죄의식 없는 시민성을 형성하는 데 유용한 담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각주:8]

그런 점에서 어게인 1907’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시민성의 결핍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진, 아니 혼란을 조절할 능력을 상실한 한국사회의 구원론적 주체로서 각성되도록 하는 예언자적 호출신호로서 다가오고 있다. 적어도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호출신호를 예언자적 신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게인 1907’ 신탁, 예언자의 메시지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앞서 말한 것처럼, 친미주의적이고 획일주의적이며 성공주의적인 공통감각을 형성한 한국교회의 초석적 사건이다. 그 사건이 다시 오늘의 역사 속으로 호출되고 있다. 여전히 퇴행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얼굴로 오늘의 역사 속으로 메시아처럼 재림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굽은 땅이 펴질 것을 예고하는 예언자의 소리로만 실재하지만 말이다.

이 메시아는 민주화를 향하는 한국사회를 보수주의적으로 제도화하는 역사의 신을 대행할 것이다. 적어도 신탁은 그것을 얘기하는 듯이 보인다. 아마도, 현재 퇴행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처럼 시민사회와 대립하는 모습보다는, 시민사회를 포섭하는 모습으로 그 메시아는 활동을 본격화할 것이다. 즉 그 신은 시민적 안보를 제도화하는 신이다.

나는 그것이 필경 정치의 도덕화를 통해 구체화될 것으로 추측한다. 다른 말로 하면 도그마적 정치의 일상화를 확산시킬 것이라는 얘기다. 정치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구체화되기보다는 당위를 통해 제도화되어 일상 속에 침투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행위보다 당위를 강조하는 정치행위는 비판에 대해 보다 닫혀있다. 이것은 동질성에 대해 포용적인 반면, 이질성에 대해 폭력적 배제를 실행하는 제도를 더욱 강화할 것이며, 그것을 견제하는 담론을 무장해제하는 장치로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메시아가 구현할 보수주의적 민주제 사회는, 앞서 말한 동질성의 영역인 시민사회적 안보의 장치를 발전시킬 수는 있지만, 이질성의 영역인 비시민적 안보의 장치는 보다 간과되는 체제일 것이다. 실제로 문화목회나 개체적 축복의 신앙은 시민사회의 안보와 친화적인 반면, 비시민적 안보를 배제하는 신앙제도적 장치로서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민주화 시대 한국 보수주의의 태동 가능성을 후발대형교회 중심의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을 통해 살펴보려 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뿌리 깊은 공통감각이 미학적 실체로서 현재화함으로써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적, 인적인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또한 상징적인 차원에서도 대단히 높은 가치로서 평가를 받고 있는 기독교적 주체가 바로 저들이라는 점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문제는 퇴행적 기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위기를 민주적 보수주의를 실현함으로써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민주화 시대의 미학화된 기독교일 것이다. 비시민에 대한 망각을 체계화하고, 시민성을, 그 야만적 배타주의를 은폐 세탁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효과적인 미학적 기독교 말이다. 하여 우리가 보다 주목해야 하는 한국교회의 불온함은 기독교의 실패, 그 지체된 민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넘어서는 성공적인 전략의 불온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1. 이들은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려는 데는 특별한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기자들의 취재 내용이나 교회 지도자들의 회고담 속에는 조선의 민간인들이 겪었던 전쟁의 고통이 시사되고 있다. [본문으로]
  2. ‘쌀신자’라는 선교사들의 비아냥은 신앙적 동기와 생존의 동기를 좀처럼 연관시킬 수 없었던 선교사들의 현장성 없는 신앙적 편견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 [본문으로]
  3. 나는 다른 글에서 이러한 공통감각을 전국화하고 더욱 강화하게 된 역사적 과정을 식민지 시대의 신사참배의 트라우마를 해방 후 반공주의로 치환시키는 무의식적 전화 과정으로 해석한 바 있다. [본문으로]
  4. 이때 친미성은 노골적인 미국에 대한 지지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또한 적지 않은 경우에 민족성, 자주성을 강조하면서도 미국적 가치에 대한 지지로 드러나기도 한다. 가령, 최근의 소위 ‘뉴라이트 연합’이나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진보 계열에 속했던 많은 이들은 이와 같은 우회적인 친미성, 즉 미국적 가치에 대한 친화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친미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본문으로]
  5. 신사참배 문제로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당하고 근본주의적 기독교 지도자들이 망명을 선택하게 된 식민지 시대 말기는 기독교와 정부의 공조관계가 깨진 예외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본문으로]
  6. 최근 한 민중신학 연구자는 권력화된, 이른바 진보파 기독교 엘리트들이 최근 이념적 지평을 확장해가고 있는 신우익(뉴라이트)과 인식의 차원에서 어느 기독교 분파보다 유사하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본문으로]
  7. 한국전쟁 전후 교회의 반공주의와 전쟁 직후 수많은 이단 논쟁들은 광적인 선교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는 한국교회가 증오를 자원화함으로써 성장을 이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선교적 성공의 사례는 권위주의 정부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를 자원삼아 성장의 과속질주를 추동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본문으로]
  8. 한・미 FTA에 대한 한국사회의 보수주의자들, 특히 주류 교회의 태도는 비시민화된/될 존재에 대한 망각의 정치가 사회 발전논리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