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종교인평화회의(KPRC)가 주최하고 대화문화아카데미와 종교문화연구원이 주관한 <2010 종교대화 콜로키움>의 세번째 발표글(2010.5.24)입니다.
이 콜로키움의 일정과 발표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종교의 자리찾기(5.10)
발표_최준식(이화여대)
2. 가톨릭의 자리찾기(5.17)
발표_박영대(우리신학연구소 소장) / 논평_변진홍(김수환추기경연구소 부소장)
3. 개신교의 자리찾기(5.24)
발표_김진호 / 논평_최대광(정동제일교회 부목사)
4. 불교의 자리찾기(5.31)
발표_이병두불교포커스) / 논평_조준호(고려대 연구교수)
5. 원불교의 자리찾기(6.7)
발표_김경일(원불교100주년성업사업회사무총장) / 논평_이찬수(종교문화연구원장)
6. 천도교의 자리찾기
발표_김용휘(고려대 연구교수) / 논평_정혜정(인천대 연구교수)
이 콜로키움의 장소는 대화문화아카데미 3층 다사리마당이고
시간은 오후 4~6시입니다.
이 심포지엄의 원고들이 수정 보완되어 2010년 책 [한국 종교를 컨설팅하다](모시는 사람들 2010)으로 발간되었다.
한국개신교, 자리잡기와 자리찾기_한국 종교를 컨설팅하다(20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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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신교, 자리잡기와 자리찾기
근대성과 배타성을 중심으로
시작_근대성과 식민성, 그리고 배타성
개신교회가 한국사회에 제도화되는(자리잡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서로 얽혀 있는 요소와 연관된다. ‘근대성’과 ‘배타성’이 그것이다. 여기서 근대성이란, 거칠게 말하면, 서구 근대를 의미한다. 그것은 일본에 의해 강제된 근대와는 다른 근대에 대한 열망의 산물이다.
한국 사회에서 근대는 일본에 의한 식민화의 체험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하여 한국사회의 근대성이라는 감각의 제도화, 그 토대부터 식민화와 근대화라는 두 가지 요소가 분리할 수 없이 동시적으로 얽혀 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성’은 이렇게 한국사회의 근대성의 형성적 기조였다.
일본의 근대 체험에 관한 연구에서 가노 마사나오(鹿野政直)는, 오키나와인들은 제국시민 되기를 욕망하면서도 머뭇거리는 심리적 이상행동을 보이게 된다고 하면서, 이를 ‘상흔’(傷痕, 트라우마)이라 불렀다. 1 ‘상흔’은 배제의 기억이 신체 내에 잔류하여 제도적인 통합의 사회적 해석체계에 순순히 흡인될 수 없게 하는 내면적 요소다. 식민지 근대성이 내재화된 사회의 집단적 신체 속에 상흔이, 저 언어를 상실한 기억이 잔류하고 있으며, 그것이 시민으로 통합되는 것에 관한 욕망을 비틀어 놓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대한 통합의 추동력이 와해되는 지점에서 한국사회의 대중은 대안적 근대를 추구하게 된다. 이때 ‘탈식민’은 ‘탈일본’과 동일시된다. 즉 ‘일본적이지 않은 것’은 ‘제국주의적이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대안적 근대의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였다. 여기서 한국의 개신교는 압도적으로 미국화된 개신교였으며, 종종 ‘미국’은 ‘개신교회’와 등가적 요소로서 받아들여지곤 했다. 하여 미국에 대한 예속이 매우 강한 사회임에도 우리는 미국을 제국적 지배세력이 아니라 구원자적 존재로 이해하곤 한다. 교회가 그런 것처럼. 이와 같이 우리사회의 근대성의 역사에서 식민성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잔류하였다.
한데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일본의 식민지근대성이 내포한 (무의식화된) 부정적 심상(negative imaginary)인 상흔이 대안근대적 선택인 개신교회적 신앙을 형성하는 데 끼어든다는 것이다. 반대로 애기하면 신앙은 신체 속에 억류된 상흔, 그 표상 되지 못한 감각(non-representational sense)에 개념 혹은 의미를 부여해 준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에 의하면 식민지적 상흔이 관류(貫流)하는 몸에는 폭력이 일상화된다. 2 언어화되지 않은 상흔은 인과성을 알 수 없는, 통제되지 않는 폭력적 상상, 꿈 그리고 행위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상흔이 표상성을 얻는다(언어화된다). 이것은 일상화된 무의식적 폭력성에 대한 통제가 어느 정도 가능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근대국가와 개신교적 신앙은 이러한 폭력성의 통제를 토대로 하여 제도화되었다는 점에서 ‘쌍생아적’이다. 일상화된 폭력적 상흔은 발전의 동력으로 전환되며, 이러한 발전주의적 담론을 전유한 이들은 영토(territory, 방주로서의 교회와 국경)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얻는다. 이 글에서 보다 상세히 다룰 것이지만, 이 영토성은 대단히 폐쇄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배타성의 제도화를 통해서 실현된다.
이 글은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개신교적 신앙제도의 배타성이 상호작용하면서 개신교가 한국사회에 자리잡게 되는 과정을 두 가지 계기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이 계기적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한국개신교의 신앙제도는 배타주의적이며 성장주의적인 전형(type)을 갖게 되었다.
한데 최근 이러한 제도화의 전형적 양식이 교란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적 발전주의라는 우리사회의 근대화의 전형적 양식에 대한 비판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는 현상과 맞물린다. 이 글에서 다룰 두 번째 주제는 이러한 변화에 관한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한국교회의 성장주의 모델은 배타주의를 미학화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교회에는 또 다른 방식의 신앙적 제도화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민주화 이후 오래된 한국사회와 교회의 밀월관계가 흔들리게 되면서 교회의 성장주의적 전형의 제도적 기반이 흔들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신앙운동의 탈중심성이 강화되었다. 한데 앞 장에서 다룰 위기에 대한 제도의 개혁으로서 미학화된 기독교가 모색되는 것과는 달리, 배타성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이 신앙 담론화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나는 이 글의 결론부로 개신교회의 새로운 자리찾기에 관한 가능성의 지평을 이야기하겠다.
한국 개신교회의 자리잡기, 전형이 형성되다
여기서는 개신교회의 배타주의와 근대주의가 식민주의와 결합되어 한국사회에 자리잡는 두 계기를 다룬다. 하나는 그러한 신앙의 초석적 사건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헤게모니 세력으로 제도화하는 1945년 이후의 (월남) 반공주의적 기독교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반드시 짚어두어야 함에도, 거의 주목되지 않는 것이 ‘러일 전쟁’(1904~1905)이다. 4 앨런 스튜어트(Allan Stewart), 잭 런던(Jack London), 조르쥬 비고(Georges Ferdinand Bigot) 등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지의 종군지자들의 기사와 그림, 사진 등을 보면, 이동 중인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군대폭력의 양상이 매우 심각했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잭 런던은 일본군이 지나가는 도시와 마을, 논과 들판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포착한다. 5 그의 시선은 저항하지 않는 백성의 식민지적 노예성을 말하는 데 있었지만, 그의 인민주의적 과잉이데올로기의 편견 이면에는 군대폭력의 실상이 놓여 있다. 실제로 앨런 스튜어트가 스케치한 그림들은 일본군이 조선인들을 처형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한편 언론인이자 시사만화가인 조르쥬 비고가 1904년에 그린 만화 6를 보면 넘어진 조선인을 일본군과 청군이 짓밟고 러시아군에게로 진군하고 있다. 여기에는 불과 10년 전에 발발했던 청일전쟁(1894~1895)의 기억이 러시아를 향해 진군하는 일본군의 폭력과 겹쳐있다.
[그림] 조르쥬 비고(1904) [그림] 러일전쟁 당시 처형당한 조선의 민간인
1904년 초, 한겨울에 시작된 전쟁은 매서운 바람을 쏟아내는 산속으로 사람들을 몰아냈다. 하지만 전쟁 기간 내내 숨어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여 많은 이들이 교회로 몸을 위탁하며 들어왔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공간인 교회는 일본군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한 피신처였다. 7 또한 교회는 신자들에게 쌀을 배급해 주기도 했다. 하여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교회의 대부흥은 이년 뒤인 1907년 대부흥운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8
그런데 이때 갑작스런 교인의 증가를 교회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교회 지도자들은 전쟁의 상흔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이들을 어떻게 교리에 순응하는 자로 만들 것인가에 있었다.
한데 10년 사이에 두 번이나 다른 나라가 벌인 전쟁의 틈새에 끼어 재앙을 겪은 사람들이 전쟁 후유증을 드러내는 것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전쟁이 계속되건 아니건, 폭력의 시간은 여전히 그네들의 영혼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고스란히 남았다. 군대로부터 겪은 폭력에 대한 고통과 증오는 상처 입은 사람들 자신을 폐허로 만들었고, 서로서로를 할퀴어 댔다.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들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교회 안으로 몰려들어온 이들이 도덕적 아노미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동체는 바닥까지 무너진 인생들로 가득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술에 절어 있었고, 가족에 대한 폭력, 형제간 폭력, 이웃공동체의 파괴 등, 뒤틀린 영혼들의 얽히고설킨 상호폭력적 관계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상처들을 치료하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상처들의 뒤틀림으로 인해 야기되는 숱한 갈등과 다층적인 욕구들을 소화하지 못하는 교회를 통합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관심거리였다. 해서 그들이 한 것은, 사회적 상흔들, 그 원인을 찾아 보듬기보다는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회를 갖는 것이었다. 걱정이 큰 만큼 그들의 기도는 절절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기도의 현장에서 갑자기 불이 일듯 마음이 뜨거워지고, 회개운동이 일어난다. 이른바 ‘성령 체험’이 기도회 참석자들을 휩싸 안아 버린다. 하나둘, 그리고 점점 많은 이들이 이 열광적 분위기에 얽혀든다. 곧 공동체 전체를 아우르는 회개와 도덕 각성 운동이 벌어졌다. 바로 이것이 평양대부흥운동이다.
뜨거운 집회의 열기는 사람들의 다양한 상처와 갈망들을 봉합하기에 충분했다. 종교적 엑스타시 상태에 이른 대중에게 교회 지도자들이 요구했던 것은 윤리였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했고, 또 교회의 외부자에 대한 구별짓기를 뜻했다. 구체적인 갈등과 폭력이 죄, 곧 일반적 의미의 악의 형상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자신의 죄는 몸에 대한 자기비하로 이어진다. 이러한 집단적인 자기비하는 동시적으로 조선인의 삶이라는 존재의 문화적 터에 대한 증오로 연결된다. 이제 조선인의 삶은 신앙적 분리 실천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및 자기 문화에 대한 배타성을 신앙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엔 새로운 몸으로서의 기독교적 존재 및 미국적 근대성이 있다.
그럼으로써 죄의 각성운동은 하나의 욕망으로 변환된다. 선교사들은 그러한 욕망이 투사되는 욕망의 대상이다. 무디 부흥운동에 영향받은 이들 맥코믹신학교 출신자들 9의 신앙은 보수주의신앙 중에서도 다분히 반지성주의적이며 체험을 중시하는 경향을 띠었다. 그리고 이들의 복음은 ‘야만적 사회인 조선’과 ‘불신앙’을, ‘선진적 사회인 미국’과 ‘신앙’을 대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철저희 미국중심주의적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이러한 평양식 기독교는 전국화되었다. 그리고 장대현 교회를 축으로 하는 평양의 선교사들은 조선 기독교들 사이에서 전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특히 신학교육과 엘리트 양성에 관한 전권도 이들의 수중으로 들어온다.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추방당할 때까지.
한데 더욱 중요한 것은 평양대부흥운동이 전국화되면서, 그것이 하나의 담론적 실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그 사건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위기에 대한 신앙적 실천의 범례가 되었다. 성령 사건은 물리적인 성공주의를 동반하는 체험적 사건이며, 그것은 다양한 이질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배타적 사건이다. 그 하나의 내용은 선교사들에 대한 모방을 통해 재확인되었고, 담론적 현상이 된 이후에는 미국(의 기독교)에 대한 선망으로 이해된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자기 비하와 타자 곧 미국에 대한 선망을 내재화하는 원형적 사건으로 한국 기독교 신앙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반추해야 하는 초석적 사건(foundational event)이다.
1945, 헤게모니 세력으로 제도화한 월남 개신교 10
신사 참배 문제로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1938년 근본주의의 아성인 평양신학교가 무기휴교에 들어가며 그 이론적 지주인 박형룡 등이 만주로 망명하게 되자, 형식상 서북 중심적 개신교는 무너진 듯이 보였다. 이 틈에 1939년 서울에서 건립된 조선신학교는 근본주의 신학과 선교사들에게서 벗어나 현대적이고 자주적인 신학과 교회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월남한 서북계 개신교도들이 남한 사회의 지배층으로 부상하면서 평양대부흥운동의 의미론적 계보는 지배적 위상을 보다 확장된 차원에서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드는 의문은, 어떻게 월남자들, 특히 서북출신 개신교도들이 1945년 서울에서까지 종교적, 사회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우선 숫자에 있어서 서북지방의 개신교는 다른 지역을 압도하고 있었다. 1945년 당시 전체 개신교 신자의 60%가 북한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중 35~40%인 7~10만 명이 1945~1953년 기간 동안 월남하였다. 11 이것은 거의 남한 개신교 인구 총수에 육박하는 숫자다. 한데 이들 월남자의 90%가 서북출신이었고, 85%는 장로교 신자였다. 즉 이들 월남자들은 신앙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동질적인 언어 감각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황해도 출신 개신교도를 뺀다고 해도, 평안도 출신 개신교 월남자들이 양적으로 해방 이후 남한 개신교의 교회정치에서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게다가 평양대부흥운동이 확산되어 전국이 ‘평양식 개신교’에 친화적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물리적 거리는 대체로 유사성의 정도를 높이는 주요 변수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근대적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초기단계에 있는 사회에서 물리적 거리는 대중의 네트워킹 가능성에서 매우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평안도는 평양식 개신교와 가장 유사한 신앙 양식을 띠었음은 물론이고, 황해도 역시 매우 강한 영향권 아래 있었다. 더욱이 네비우스 정책에 따라 순회설교자에 의한 사경회 운동이 매우 활발한 터여서 평양대부흥운동의 광역화를 가능하게 할 만한 중위동원(meso-mobilization) 12적 연결망이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었다. 13
하지만 거리의 변수가 중요하지 않은 곳은 관서지역이다. 이 지역은 교통과 통신망이 원할하지 않은 데다, 선교분할 정책에 의해서 주로, ‘자유주의적 성향이 더 강한’ 캐나다 장로교회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에, 무디식 ‘반지성적 보수주의에 경도된’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제도화된 서북지역 개신교와는 큰 괴리가 있었다.
아무튼 월남 개신교도들은 대거 남한의 도시로 몰려왔고, 주로 출신지별로 교회를 만들었다. 이들의 다수가 평양식 개신교와 종교문화적 유사성을 더 많이 띠었다는 점과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성향 간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들은 소련을 경험하기도 전에 이미 ‘악의 상징’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평양의 한 목사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접하자 미군의 국내 진주를 기다렸고 그들을 ‘구원의 천사 미군’이라고 불렀다. 반면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항전의 마음을 불태운다. 이것은 경험하기 전에 이미 미국과 소련, 이 두 나라에 대한 선망과 적대가 신앙관으로 고착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4 이렇게 반공, 친미적인 선험적 적대는 북한에서 벌어진 토지개혁과 반그리스도교 정책으로 인한 경험적 적대와 어우어지면서 월남자 개신교도 전체의 공통감각이 빠르게 형성되었다.
이렇게 반공주의적으로 ‘잘 결속되어’ 있는 월남자 중심의 개신교는 일찍부터 군정당국 그리고 곧 건국하게 되는 제1공화국과 깊이 유착되었다. 하층과 청년층의 개신교도는 보다 전투적인 행동주의로, 중상위의 개신교도는 반공 보수주의적 권력연합의 매개자로 해방기 정치에 개입하였다. 각종 반공청년단들의 주요 구성원은 월남자 개신교도였다. 또 군정청의 조선인 참모와 통역관 중 다수가 개신교도였고, 제1공화국 건국 이후 대통령과 부통령이 장로였으며, 장관의 절반, 국회의원의 20% 이상이 개신교도였다.
당시 남한인구 대비 개신교도의 숫자는, 월남자를 포함한다 해도, 전체의 5%를 넘지 않았다. 김상태는 이렇게 권력에 깊이 연루된 해방기 개신교에서 평안도 출신 월남자들의 역할과 친미엘리트로 형성되는 과정과 인맥에 대해 이야기한다. 15 강인철은 이러한 통계와 각종 특혜조치들을 통해서, 당시 군정청과 남한 정부는 ‘그리스도교국가’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고 한다. 16
한데 여기서도 월남자 개신교도, 특히 서북적 개신교도들의 ‘상흔’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그들의 배타주의와 식민성을 설명하는 데 이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1920,30년대에 미국의 보수주의가 분화되면서, 17 명료하지 않던 신학적 신앙적 요소들이 정리되어 더욱 보수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요소를 강조한 근본주의 신앙이 맹렬히 제도화되기 시작한다. 한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 선교사들은 이러한 본국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 대다수는 본국의 근본주의보다 더욱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신학교육 일체를 장악하고 있었으니, 이들에 의해 양성된 개신교 지도자들의 성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일본의 식민지 당국과 큰 마찰 없이 지냈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이 전시동원체제로 변화되기까지는 말이다. 이 시기 일본제국의 반미 성향이 강화된 데다, 제국신민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자 정결주의적 근본주의자들과의 갈등이 표출된 것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불복종을 견지했으나, 근본주의자들의 경우 일본제국에 순응한 이들은 행위와 신앙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심한 내적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식민지 시기 근본주의적 개신교도들의 특수한 체험에 속했고, 신민으로서 제국이 주는 기회비용을 적극 활용하는 친일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대국민의 일부로 편입하지 못하는 내적인 분열적 요소가 그들을 심한 죄의식으로 사로잡았다.
해방정국에서 강한 반공주의와 신앙이 그렇게 빠르게 결합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상흔과 관련이 있다. 앞서 이야기한 선험적 반공주의와 체험적 반공주의가 신앙을 해석하게 하는 인지적 근거가 되었지만, 그렇게 해석한다고 그것이 곧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지적 프레임(cognitive frame) 외에도 감정적 프레임, 특히 수치와 증오의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는 심적 작용이 중요하다. 감정에 관한 연구에서 수치와 증오는 생각의 행동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18
범서북 개신교 신자들은 근본주의자들이었기에 더욱 심한 수치심에 빠져야 했다. 한데 해방 직후 북한에 의한 탄압의 체험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선험적 적대감과 어우러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증오에 사로잡히게 된다. 고통스러우면서도 말할 수 없었던 기억을 다른 이들에 대한 증오라는 강력한 체면 효과를 지닌 기억으로 치환함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전이시키는 무의식적인 기억의 치환 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신사 참배자라는 자학적 오명을 벗기 위해선 ‘악마’의 등장이 필요하다. 자신들의 배신이 얼치기 악마의 모습이라면, 그것과는 비할 수 없는 진정한 악마, ‘악의 축’이 필요했다. 그 무시무시한 괴물을 향해 모든 ‘성도’들이 단결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악마 말이다. 19 이 시기에 김재준 탄핵 등 숱한 이단 심판들이 재개된 것은 악마에 대한 시대적 열망과 부합한다. 그러나 진정한 악마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서북 출신 개신교도들의 체험을 자기 체험으로 내재화함으로써 비로소 출현한다. ‘반공’은 이 시기 근본주의 적 개신교의 상흔에 대한 자가 치료의 필요에서 요청된 무의식적 기억의 치환 현상의 결과였다. 20
교파간의 반목과 갈등 그리고 분열이 가속화되던 시절, 반공과 친미라는 두 개의 고리는 개신교 각 교파간의 거대한 심성적 연결망이었다. 1949년 당시 최대 교파이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연합하여 ‘합동찬송가’를 만든 것은 그러한 차이 속의 공감이라는 또 다른 예이다. 여기에는 미국 개신교인들이 자기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기는, 백인 우월주의가 들어있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포함하여, 미국 대부흥운동기의 수많은 복음성가들이 대대적으로 수록된다. 21이것은 한국 개신교를 결속시키는 신앙적 정체성이 어떤 양상을 지녔는지를 읽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정전(Canon)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을 가진 근본주의적 신자들에게 22 ‘정통 찬송’이라는 집착은 정전 못지않은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대적 비평을 둘러싼 종교재판들처럼 찬송가의 채택 문제도 식민지 시대부터 지속적인 배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이것은 개신교가 당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미국적인 감성의 공간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약해보자. 1945년 이후의 정국에서 개신교는 근대적인 자주적 독립국가인 대한민국 건국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념적으로 보면, 사회주의가 동구, 특히 소련을 상징적 고향으로 하는 근대화 프로젝트였다면, 그리스도교도는 서구, 특히 미국을 상상적 근대의 표상으로 삼는 근대화 프로젝트였다. 교회는 그렇게 자부했고, 그런 이미지는 이후 오랫동안 남한사회에서 근대의 상징적 장소로서의 교회라는 의미로 되새김질 되었다.
한데 이러한 개신교회의 근대주의는 미국에 대한 선망, 그 무의식적 식민성을, 그 예속의식을 지불함으로써 얻은 값비싼 대가였다. 동시에 교회는 북한과 공산주의자를 악마화하고 그들에게 적대감을 쏟아 붓는다. 또한 공산주의 만큼은 아니지만 이단에 대한 적대감, 배제를 매우 공격적으로 신앙적 실천의 내용으로 구성한다. 이때 이단들은 대체로 토착적 성격을 띠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개신교의 배타성은 매우 극렬하게 공격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제 식민지 시대의 신사참배의 죄의식, 그 수치심에서 벗어나려는 근본주의적 신앙인들의 기억의 치환 현상 때문이다. 하여 상흔은 개신교 제도화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고, 개신교는 이 시기에 사회적 자원을 과점하는 중요한 세력으로 제도화된다.
한국 개신교회의 자리잡기, 그 전형이 절정을 지나 위기에 놓이다
미친 성장주의
군정기 이후 사회적 자원을 과점한 교회는 급속도의 양적 성장을 해왔다. 하지만 1970,80년대에 오면 그 성장 가속도는 최고도에 이르게 된다. 23 이때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초대형교회들이 탄생한다. 2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한국교회에서 가장 우월적 지위에 있던 월남자 교회들의 주도권이 상대적으로 감퇴하고, 새로운 유형의 대형교회들이 교회의 주요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 한국교회의 성공은 광범위한 이농민을 흡수한 도시교회의 성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5 국가의 이농정책은 발전동원체제로 사회를 재편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는데, 이농에 따른 사회적 보호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도시빈민의 삶의 조건은 대단히 열악했다. 토지와 경작자의 마음의 연대가 필요한 상호성의 노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토지를 떠나 도시로 이주한다는 것은, 땅과의 연대성을 해체한다는 것은 존재론적 위기(ontological crisis)의 내재적 뿌리가 된다. 개발과 도시화로 특성화할 수 있는 근대는 이렇게 존재론적 위기의 원인이 된다. 게다가 도시에서 빈민으로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시공간적인 마음의 연대를 해체하고 파괴의 공간인 저개발 빈민지역을 전전하는 삶은 일종의 정신적 외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이들이 교회를 찾았다. 교회가 근대성의 공간으로 상징화되었기에, 도시로 이주하는 것 속에 들어 있는 잘 살고 싶다는 꿈으로의 이동은 교회로의 신앙적 전향과 맥을 같이 한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이들을 유입하기 위해 성공주의를 고도로 활성화한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했고, 이농민 출신 교인들도 도시에서 빠르게 정착해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이에 개신교회의 신앙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주의 상흔을, 도시에서의 폭력적인 삶과 마음의 연대가 해체된 공허함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을 교회는 ‘성장주의’로 언어화한 것이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성장하면 된다는 적극적인 자기 합리화, 그 ‘미친 성공주의’는 폭력적인 시대를 폭력적으로 견디어 내게 했으며, 나아가 그 시대의 가장 큰 수혜자의 하나로 정착하게 한 것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가져다준 성공주의와 성령의 결합은 이 시기 교회성장의 영적인 자원이었다. 즉 성령은 성장주의를 위해 도구화되었지만, 1907년 사건은 그것을 한국적 성령주의로서 안착하게 하는 계기였기에, 무리 없이 이 시기 교회는 지난 시기의 ‘영적 자원’을 게걸스럽게 흡수했다. 또한 1945년 이후 개신교의 물적 제도화는 성장주의를 가동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적 근대성과 배타주의적 신앙의 제도화는 성장주의의 토양이었다.
민주화 시대, 위기, 그리고 미학화된 그리스도교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성장은 현저히 둔화된다. 하지만 교회의 신앙적 제도는 성장주의에 맞추어져 있었다. 성장은 지체되었는데, 성장주의는 지속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 시기 교회의 위기의 요체였다.
한편 이 시기는 민주화가 바람의 대상이 아니라 제도화의 대상이 된 시기다. 군부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의 발전연합의 가장 공고한 동맹세력이었고, 그 미친 성장주의에 영혼을 도난당한 교회는 민주화 시대에 이르게 되면서 새로운 담론적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교회를 근대성의 공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지체된 근대의 공간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더욱이 반미담론의 확산과 더불어, 교회의 친미성은 식민주의적이라는 사실이 새삼 문제제기되었다. 게다가 교회와 그리스도교도들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사람들이 공공연히 실증내기 시작했다. 근대성과 식민성, 배타성이 모두 문제적인 것으로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위기 상황에서 교회들은 당황했고 흥분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교회의 사회적 신망도는 추락했다.
한데 이 시기에 급부상한 교회들이 있다. 우리가 ‘후발대형교회’라고 부르는 이념형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함축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이 새로운 이념형의 특징은 배타성, 즉 무례함의 태도를 숨기는 것, 그리고 친미주의를 견지하되 맹목적 친미보다는 세련된 친미를 추구하는 것, 하여 근대성을 성장주의적으로 체현하기보다는 성숙주의적으로 체현하고자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른바 전통을 계승하되, 그것을 미학화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깨끗한 성장’ 혹은 ‘깨끗한 성숙’(가령 풍요의 신학 등)을 강조하는 신앙을 통해 교회의 새로운 모델이 모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모델은 계층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즉 깨끗한 성장/성숙 담론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실패에 대한 담론의 결여되어 있다. 기도원 같은 고도성장주의 시기에 합리주의적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들을 위한 도피성 같은 공간은 이제 낡은 교회와 더불어 담론적 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회는 풍요를 공유하는 공간이고, 풍요를 나누는 공간이다. ‘풍요의 신학’이니 ‘청부론’이나 하는 것들은 그 예시다. 이때 그 나눔은 대개 타자를 향한 것, 추상화된 대상과 관련이 있다. 자신들과 경험이 얽히고 생각이 설킨 대상, 이웃이 아니다. 추상적이기에, 대면할 수 없기에, 후원과 수혜로만 엮인 일방향적 관계이기에, 즉 상상적 수혜자이기에 저들은 상상 속에서 고분고분한 타자이다. 교회는 이들을 먼 곳에서 발견했다. 가령, 빈곤국에 대한 호혜성이 압도적으로 풍요로운 신앙의 나눔을 대체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사회의 빈곤계층은 하위계급화(under-classification)가 급속도로 진행하고 있다. 즉 빈곤은 단지 경제적 박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욕의 박탈, 나아가 영혼의 박탈로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존재의 무능력화가 빈곤계층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무능력자’는 민법상의 ‘행위무능력자’ 개념에서 유래한 것으로, 민법에서 이들은 법률적 효력을 제한당한다. 존재는 인정하되 법적 존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의미를 사회학적으로 옮겨놓은 것이 사회적 무능력 개념인데, 이런 이들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간주된다. 사회과학자인 정건화와 박배균은 이러한 현상은 ‘잊어버림의 체계’라고 명명하였다. 오늘 우리 사회는 빈곤계층을 빠르게 망각하고 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알콜중독자이고 상습적 가정폭력배이며, 종종 사이코페스, 혹은 무능력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악한 이들이기에 격리나 처벌, 아니면 교화가 필요한 대상이지 사회의 공공성을 함께 논의할 대화 상대자가 아닌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염두에 둘 때, 최근의 후발대형교회적 개혁 모델은 야만적 가학성에서 잊어버림/은폐된 가학성으로 배타주의적 폭력성을 전화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문제제기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글에서 또 다른 형식의 교회의 자리잡기 가능성에 관한 애기를 결론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맺음_ 작은 교회들의 수평적 네트워크의 가능성
한국의 개신교회는 1907년 이후 양적인 성공을 체현한 교회가 중심을 이루는 모델에 의해 그 성격이 규명되어 왔다. 작은 교회들은 규모가 작았을 뿐이었지 욕망의 차원에서는 대형교회들의 성공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 ‘거대한 동질성’이 교파를 아우르고 공동체의 규모를 아우른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작은 교회들의 존재는 사뭇 다르다.
1907년 이후 구축된 ‘거대한 동질성’ 담론이 실체로는 교회를 독립적이지만 담론상으로는 통합체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에, 작은 교회의 실체가 제도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작은 교회들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이제까지 작은 교회들은 작기 때문에 규모가 필요하다는 담론에 지배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작은 교회들 간의 네트워크, 나아가 작은 기구들 간의 네트워크 등, 교회 안팎을 잇는 연결망이 작은 교회들의 새로운 존재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더욱이 넷공간의 활성화로 소통의 쌍방향성이 활성화됨으로서 작은 자들의 네트워크는 조직운영의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하여 작은 교회들은 사회를 횡단하는 수평적 연대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수평적 연대는 배타성을 지양하는 새로운 존재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수직적 네트워크가 낳은 식민주의도 청산할 수 있는 신앙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새로운 근대는 작은 교회에서 다르게 태동하고 있는 것이다. □
- 도미야마 이치로, 〈폭력의 서술: 프란스 파농〉, 《전장의 기억》(이산, 2002), 148쪽. 그리고 가노 마사나오, 〈오키나와, 주변으로부터의 발신〉,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문학과 지성사, 2004), 141~146쪽 참조. [본문으로]
- 프란츠 파농,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 2004) [본문으로]
- 이 장은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미국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그 역사와 정치적 욕망》(최형묵 백찬홍 김진호 공저, 평사리. 2006)에 수록된 나의 글 〈성령의 도구화―‘평양대부흥운동의 영’ 대 ‘성서의 영’〉의 235~241에 의존한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초석적 사건’이라는 용어는 하나의 범례로서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기억의 재현을 통해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원사건을 말한다. 이것은 해방신학자 끄로아또가 출애굽사건을 두고 ‘의미의 저장소로서의 초석적 사건’이라고 말한 것에 의존한 것이다. 호세 세베리노 끄로아또, 《엑소더스―해방의 해석학》 (한국신학연구소, 1995), 15~35쪽 참조. [본문으로]
- 로이 쉬어러가 예외적으로 러일전쟁과 평양대부흥을 연계시키고 있다. Roy E. Shearer, Wildfire: Church Gorwth in Korea (Grand Rapids, 1966). [본문으로]
- 잭 런던, 《잭 런던의 조선 사람 엿보기》 (한울, 1995) 참조. [본문으로]
- http://blog.daum.net/eastory/17161433 [본문으로]
- 이덕주, 〈한국 초대교회사에 나타난 오류와 한계〉, 《기독교사상》 564(2005.12), 220쪽. [본문으로]
- 1905년 미국인 선교사이자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인 찰스 번하이셀(C.F. Bernheisel)은 1905년경에 뚜렷한 양적 변화를 수차례 언급하고 있다. [본문으로]
- 대부흥운동의 진원지인 평양의 장대현교회를 포함해서 거기에서 분립하여 설립된 평양의 주요 교회들은 매코믹신학교 출신자들이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과 산정현교회(1901~1910)〉, 《신학지남》 293(2007 겨울). [본문으로]
- 이 장은 나의 글 〈한국개신교의 친미성 그 식민지적 무의식에 대하여〉, 《역사비평》 70(2005 봄)의 3장 ‘해방 후 한국기독교의 미국주의―부적절한 모방이라는 식민지적 무의식’에 의존한 것이다. [본문으로]
- 강인철, 〈남한의 월남 개신교인들―반공주의와 민주주의에 미친 차별적 영향〉, 《종교문화비평》 13(2008). [본문으로]
- 사회운동에서 중위동원의 개념과 그 의의에 관하여는 Jurgen Gerhards & Dieter Rucht, “Mesomobilization”,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98(1992) 참조. [본문으로]
-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평양대부흥운동의 상관성에 관하여는, 김성태,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평양 대부흥운동의 상관성 연구〉, 《신학지남》 288(2006 가을) 참조. [본문으로]
- 김상태,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 《역사비평》 45 (1998 겨울)의 195쪽에 인용된 황은규, 〈8.15 해방과 평양의 교계〉, 《기독교계》 창간호 (1957.8)의 글 참조. [본문으로]
- 김상태,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 《역사비평》 45(1998 겨울) 참조. [본문으로]
- 강인철, 앞의 논문 참조. [본문으로]
- 미국 근본주의 운동의 역사에 대해서는 홍철, 〈20세기 미국 근본주의 운동의 역사적 고찰-미국 장로교를 중심으로〉, 《역사신학논총》 13 (2007) 참조. [본문으로]
- Thomas T. Scheff, Microsociology: Discourse, Emotion, and Social Structur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0) 참조. [본문으로]
-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에서 ‘이스카리옷 유다’의 출현이나 영국 빅토리아조 시대의 드라큘라의 출현 등 역사 속에서 나타난 ‘절대 악마’ 담론은 바로 악마를 요구했던 그 시대의 고통에 대한 기억의 치환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본문으로]
- 해방정국에서 많은 전투적 반공단체들의 면면을 보면 개신교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두드러진다. 또 기독청년 면려회, 서북연합회, 영락교회 청년회 및 대학생회, 서북학생총연맹 등 전투적 반공주의적인 성향의 개신교 단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많은 경우 당시의 반공적 테러리즘에 적극적으로 관여되어있었다. [본문으로]
- 전체 수록곡의 60%가 미국 복음성가에서 유래하였다. [본문으로]
- 근본주의적 신앙운동의 가장 핵심적 주장은 ‘성경의 무오설’에 대한 확신이었으며, 그것은 근대 신학의 역사비평적 성서 해석에 대한 저항의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다. 그것은 ‘성서(Scriptura)’를 단일 배타적 ‘정경(Canon)’으로 받아들인 고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편집증의 근대적 버전에 속한다. ‘정경’의 신앙사와 근대성에 관하여는 김진호, 〈탈정전적 성서 읽기의 모색〉, 《반신학의 미소》 (삼인, 2001) 참조. [본문으로]
- 통계청의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1960년 개신교의 성장률은 28%였는데, 1970년에는 41.%, 80년에는 57.3%, 그리고 1985년에는 무려 65.4%나 되었다. 홍영기, 〈한국사회의 근대성과 교회성장—리더십을 중심으로〉, 《기독교사회연구》 2(2004), 90쪽. [본문으로]
- 2003년 통계를 보면 규모에 있어 세계 10대 교회에 한국의 교회들이 1위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포함 5개가 순위에 들어가 있고, 50대 교회 순위에는 23개 교회가 올라 있다. [본문으로]
- 염기석은 1960~1985년 사이의 급속한 교회 성장을 한국사회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대적 박탈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염기석, 〈한국교회 성장에 대한 경험적 연구〉(감신대 목회학 박사논문, 1991)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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