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 샘물교회의 아프간 피랍사건이 일어난 뒤, 인터넷에서 사이버테러가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소재삼아 안티기독교와 공격적 기독교의 쌍생아적 습성에 대한 논의를 펼친 글입니다. 이 글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기획한 [무례한 기독교 - 한국 기독교의 선교 그 문제와 대안을 성찰한다] (산책자, 2007)에 게재된 글입니다.
안티기독교의 사이버테러 vs 혹은 and 기독교.pdf
안티기독교의 사이버테러
vs./and
기독교의 공격적 해외 선교
사이버공간의 과도한 공격성과 안티기독교 현상
인터넷이 교회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중에는 사이버폭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공격성이 지나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번 아프간 단기선교팀의 피랍 사건에서도 공격의 강도는 매우 강했고, 심지어 피해자들의 안전에 심각한 위해를 줄 수 있는 데이터 조작까지 있었다.
[표] 사이버폭력 피해자의 두 유형
희생양 |
| 저항 수단을 상실한 무력한 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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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강한’ 주체 |
| 저항 수단이 많으나, 특정한 약점이 드러남으로써 공격의 대상이 된 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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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한국사회의 사이버폭력은 공격성의 질에 있어서나 양에 있어서 그 폐해가 매우 심각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이때 피해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속적이든 일시적이든) 저항할 수단을 상실한 무력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매우 놀랍게도, 상대적으로 강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다. 이 경우 피해자는 매우 막강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어서 비교적 언어폭력에 대한 제약이 잘 제도화된 공적 영역에서는 비난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데, 특정 시점에서 도덕적이든 법적이든 그 대상의 약점이 노출됨에 따라, 사회적 공격의 표적으로 지목된 존재다. 이때 유의할 것은, 비교적 폭력에 대한 안전망이 느슨한 사이버공간이 공격의 주된 장으로 선택된다는 사실이다.
[표] 사이버폭력의 공격성에 대한 사회 제 공론장의 반응의 강도
메이저 공론의 장 |
| 마이너 공론의 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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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정치적인 공론의 장 | < | 공식적인 대중매체의 공론의 장 | < | 비공식적 대중매체의 공론의 장(사이버 공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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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침묵 | 언급의 절제 | 강한 공격 |
여기서 나의 관심을 끄는 하나의 현상은 후자를 향한 인터넷의 무차별 공격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공식적인 대중매체의 공론의 장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다는 점이다. 더욱이 법적, 정치적인 공론의 장에서는 거의 침묵에 가까울 정도로 거론되기조차 않는다. 그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공격의 대상이 너무 강력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어서 폭력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비교적 잘 작동하는 메이저 공론장에서는 공격자에 대한 색출과 처벌이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한 메이저 공론장의 지배자들은 상당수가 바로 그 공격의 대상과 공・사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한국사회에서 (천주교와 개신교를 아우르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사회적 자원을 상대적으로 많이 가진 이들이 가장 폭넓게 포진한 종교다.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학자 등, 특히 고위직으로 갈수록 기독교도의 비율은 전체 인구에서의 기독교도의 비율을 훨씬 상회한다.
최근 사이버폭력의 주요 표적이 된 교회가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없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기선교팀의 아프간 피랍 사태 이후 얼마간 사이버테러는 극도로 심해졌다. 이때 공격의 논거들을 분석해 보면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교회의 해외선교가 국익에 반하는 행위임이 판명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사회의 양해 없이 선교가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사이버공간을 포함한 시민사회의 다양한 공론의 장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주장이었고, 그것들에 대한 찬반토론은 시민사회 일반과 기독교 모두에게 퍽 유용한 성찰의 요소가 될 만한 것임에 분명하다.
한데 문제는 인터넷상의 공격은 통상 그러한 논거들보다는 공격행위 자체를 화두에 올려놓게 된다는 점에 있다. 이번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듯이, 공격적 네티즌은 자신들 이외의 어떤 말도 경청하지 않고 자기 식의 잣대로 정보를 마구 오용하면서 각종의 음모론을 만들어냈고, 선정적 비난을 일삼았다. 하여 양상은 거의 폭력적인 사이버테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시민사회에서 소통될 때 충분히 설득력 있는 비판의 논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지지받기 어려운 방식으로 공격이 수행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하나의 설명은 합리주의적 전통에서 제시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이버공간에서의 공격자들은 피공격자보다 자원을 덜 보유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규제와 감시가 덜 조직화된 ‘넷 공간’을 활용하였고, 지배담론은 자원을 많이 보유한 이들과 보다 깊이 결착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공격성을 억제하고자 하지만, 법적 제도적 기준이 미비할뿐더러 기술적으로도 제재(sanction)가 어렵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규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배세력과 저항세력의 합리적 행위 선택의 결과로, 사이버공간이 더 강한 자에 대한 공격의 주무대로 선정되었고, 그것을 시민사회적 지배담론은 법적이기보다는 규범적으로 문제시하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시각은 사이버공격이 권력의 비대칭성이 역전되는 대안적 공간 활용과 관련이 있고, 그러한 후기근대적 저항으로서의 사이버공격을 사이버테러로 과도하게 해석하는 지배담론의 경향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이버공간은 지배적인 정상공간(normal space)의 성찰성 결핍에 대한 반제(안티테제)적 공간이며, 이는 사이버공간이 후기근대의 제도적 성찰성을 공간적으로 담아내고 있다고 보는 견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사이버공격의 테러적 성격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사이버테러의 폐해가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사이버공간 자체가 성찰의 요청 앞에 직면해 있다는 점을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사이버폭력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주목을 끈다. 이러한 연구들 대다수는 미국적 행위이론 전통의 맥락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나는 이 논의들을 위에서 제시한 논점과 관련해서 반합리주의적 전통에서 재해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여기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이버테러의 가해자와 사회적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 사이에는 깊은 인과성이 있다는 점이다. 가령, 청소년 중에서 인테넷 중독 성향을 보이는 가장 중요한 환경적 요인의 하나는 ‘가정폭력’이며, 특히 부모간의 폭력을 목격한 간접폭력보다 부모에 의한 직접폭력에 노출된 경우 인터넷 중독 성향을 보이는 비율이 급속히 높아진다. 그리고 인터넷 중독 현상의 가장 부정적이면서도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는 폭력성이다. 여기서 부모폭력과 인터넷 중독, 특히 사이버테러 사이에 중요한 매개변수가 우울증상이다. 이것은 폭력 체험이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여 정신적인 자기 통제 능력에 심각한 장애가 초래됐을 때 사이버공간에서의 폭력성이 극도로 강화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요컨대, 모든 사이버공격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경우 사이버공격의 수행자들은 사회적 병리 현상의 피해자로서, 그 피해의식이 무의식 속에서 변형되어 타자를 향한 가학성으로 표출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현실 공간에서 스스로를 충분히 방어하는 데 실패한 이들로, 자신의 ‘상처받은 자아’를 보상받으려는 무의식적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고, ‘화풀이’의 대상을 향해 그 욕망을 표출하게 된다는 얘기다. 이때 가장 일반적으로 선택되는 ‘화풀이’의 대상은 자기보다 훨씬 심하게 자아가 훼손된 존재다.
자아의 훼손은 자기 경험을 표현하는 언어의 붕괴를 동반한다. 일종의 ‘사회적 실어증’이다. 언어가 붕괴되었기에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타개하는 합리적 행위전략을 구성하는 데 실패하게 되고, 오히려 더욱 부적절한 행위 패턴을 보이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부적절한 행위를 타인에게 설득하는 데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여 이러한 자아의 훼손이 심각할수록 타인의 폭력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것에 반격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게 된다. ‘희생양’은 이러한 대상화된 존재를 가리키는 사회학적 은유어다. 바로 이런 존재가 화풀이의 대상으로 선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중요한 전제조건은 공격의 수행자들이 자기들의 화풀이의 대상이 무능력한 존재라는 사실, 곧 그들이 자기들의 희생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해야 한다는 점이다. 공격할만한 요소를 갖고 있는 자를 공격하는 것이지, 대응할 수 없는 자를 공격하여 그들을 더욱 파괴하는 것임을 안다면 이 화풀이는 그 효과를 가질 수가 없다.
반면 무능력한 대상이 아니라 자기보다 강한 대상을 공격한다는 것은, 위험부담의 비용이 매우 높지만 가능하기만 하다면, 단순한 화풀이보다 훨씬 큰 효과를 발생시킨다. 강한 자, 그러나 사회적 정의의 관점에서 문제가 많은 자를 공격함으로써 사회적 부조리를 개조하는 것이라는 자기 믿음이 형성될 수 있다. 사회개혁가로서의 자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상처받은 자아’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정의의 투사로서의 자아’로 변환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의 변환은 공격 행위가 더욱 격렬할수록 더욱 극적인 효력을 발생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공격의 과정은 공격 대상과의 대화와 타협, 조정 등의 절차를 배제한 채 수행되게 한다.
말했듯이 모든 사이버공격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연구들이 시사하고 있듯이 사이버테러라고 할 만한 넷 공간에서의 격한 공격성과 반대화적 행위 성향은 그 가해자의 사회적 상처와 밀접한 인과성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 직장폭력 같은 일상화된 귀속집단에서의 폭력체험이 그러한 폭력과는 무관한 타자에게 와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자아가 무의식적 과정에서 다른 대상에게 분노를 폭발시킴으로써 자기 치유를 퇴행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반합리주의적 해석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이버공간처럼 폭력행위에 대한 법적 통제가 약한 익명의 공간은 그러한 퇴행적 자기 치유를 위한 안성마춤의 장인 것이다. 요컨대 인터넷공간에서 ‘잘못한 타자’를 꾸짖음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하여 상처 입은 자아는 숨겨지고 올바른 일에 투신하는 자아가 부상하는 장치, 바로 그것이 사이버테러의 동학 속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해외’라는 타자적 공간에서의 과도한 공격적 선교와 한국기독교의 위기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사이버테러의 메커니즘과 그 공격의 대상인 한국기독교의 해외선교, 그 메커니즘이 놀랍게도 유사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한다. 한국교회의 해외선교의 동학도 일종의 ‘상처 받은 자아의 무의식적인 보상 행위’로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번 아프간 피랍 사태 이후 한국사회가 교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궁금증의 하나는, ‘한국교회가 최근 들어(1990년대 이후) 왜 그렇게 해외선교에 목을 매고 있느냐’는 것이다. 나의 해석에 따르면, 한국사회가 권위주의적 제도화의 시대에서 민주적 제도화의 시대로 이행하는 시기와 맞물려서 한국교회가 지난 시절에 누렸던 두 가지 요소를 상실하게 된 것과 해외 선교 열풍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두 가지 요소란, 하나가 ‘성장’이고 다른 하나가 ‘존경’이다. 곧 민주화 이후 한국교회는 ‘성장의 위기’를 체험하고 있고, 더 이상 ‘사회적인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권위주의 시대에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성장만큼이나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당시의 한국 근대성을 선도하는 공간으로, 서구적 근대성을 선망하던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성장의 쇠퇴 상황보다 더욱 심각한 성장의 위기, 아니 마이너스 성장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또한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사람들이 선망하는 공간이 아니다. 매우 많은 이들이 교회에 대한 존경을 철회하고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이탈하는 신도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남아 있는 신도들의 충성도의 이완 또한 심각하다. 한편 이러한 상황은 많은 기독교도로 하여금 자신이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에 대한 자긍심에 상처를 주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일상 속에서 기독교 신자임이 드러나는 사실을 부담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대외적으로 성장의 위기와 존경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을 모색하고, 대내적으로는 신자들의 상처받은 신앙적 심성을 치유하고 새로운 자긍심을 심어주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이에 대한 무수한 논의들이 있었고, 또한 많은 시도가 있었다. 특히 최근의 기독교가 정치세력화하려는 시도는 이에 대한 두드러진 하나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말했듯이 한국기독교는 한국사회에서 매우 강력한 권위자원을 가진 세력이다. 그리고 국가나 시민사회와 불화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호황을 누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정교분리 신앙은 국가나 시민사회와의 권력 점유를 향한 갈등의 소지를 최소화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인식의 장치였다. 그러나 민주적 제도화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교회 안팎의 다중의 행위자들이 민주적 제도화 과정에 개입하였고, 교회와 국가와 시민사회가 과점해온 부적절한 권위자원에 대한 문제제기가 노출되었다. 사학법을 둘러싼 파동은 교회의 부적절한 권력 분점이 사회적 문제로 노출됨으로써 나타난 논란이었고, 이러한 문제는 더 이상 정교분리 신앙이 교회의 안보에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회의 정치세력화의 배후에는 이러한 민주적 제도화 과정이 초래한 교회의 안보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문제가 교회의 사회적 지위를 실추시키고 기독교도로 하여금 신앙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데 장애요인이 된다. 반면 교회의 정치세력화는 교회를 결속시키고 민주적 제도화 과정에 개입하여 사회제도를 구성하는 능력을 강화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비판의 공간을 제약하는 제도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데 유용한 장치임이 분명하다. 사학법 파동의 결과는 그것을 여실히 입증해 주었다.
한편 이 글의 주제인 ‘해외 선교’ 또한 위에서 언급한 위기에 대한 효과적인 수단이었음이 입증되었다. 해외 선교를 선도했던 교회들은 마이너스 성장 시대에 비교적 안정된 성장을 구가했다. 또한 사회적 신망도를 회복하는 데 유용하지는 않았지만, 교인들의 충성도를 강화하는 데에서도 매우 유용했다. 한편 기독교의 해외 선교의 일반적 양상과는 조금 다르지만, ‘구호 개발’을 모토로 하는 기독교적 NGO를 통한 우회적인 선교 방식은 사회적 신망도에서도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이렇게 한국교회의 해외 선교는 위기에 놓인 한국교회를 재활성화하는 주요 추진력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표] 민주화 이후 한국교회의 위기와 해외 선교
외적 위기 |
| 성장의 위기 |
| 해외 선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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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경의 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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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위기 |
| 신앙적 자긍심의 상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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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화의 체험: 해외 여행의 자유화 해외 감각의 유연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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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해외 선교가 모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작동 메커니즘에 의한 구조변동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즉 지구화 과정에 한국사회가 보다 긴밀하게 결착되는 과정의 초기단계에서 ‘해외여행’이 활성화되면서 한국인의 공간감각의 변화가 수반되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의 선교가 ‘해외’라는 감각에 훨씬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결합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해외 선교는 더 이상 국경을 ‘월장’하는 일탈적 도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로 피선교지로 선정된 곳은 사회주의권, 중앙아프리카의 극빈상황의 국가들, 그리고 분쟁상황에 있는 이슬람권 등이다. 이들 지역에 대한 한국 선교 주체들의 공통된 인식은 ‘가난’이었다. 그 지역들의 사회와 역사의 다양성이나 빈곤 배후의 다양성에 관한 문제의식은 거의 없었고 단지 우리사회와 비교되는 의미에서의 ‘가난’ 바로 그것이었다. 그건 아마도 고도성장을 이룩하여 선진국 진입에의 열망을 최고의 자긍심으로 갖고 있는 한국인의 일반적 인식과 병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 선교는 이렇게 한국인의 문화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모색된 것이었고, 그것을 지양하려는 시도는, 적어도 선교기구 상위층에서는 전무했다. 결국 한국교회의 해외 선교는 이들 지역에 ‘금권’을 주요 무기로 하여 시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교회의 해외 선교 열풍의 배후에는 민주화 이후 기독교 신자들의 상처 입은 자긍심과 교회 지도자들의 조각난 자존심이 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그리 진보적인 가치를 통해 제도화된 것이 아님에도 교회에겐 민주화 자체가 하나의 폭력 체험이었다. 이러한 위기의식, 정체성의 훼손을 보상받으려는 욕망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변동에 따른 공간감각 변화와 맞물려서 해외 선교라는 대안적인 수단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가난한 자들’이라는 대상화된 피선교민에 대한 단순화된 사유 방식은 그 현장에 대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대해 몰이해한 공격적 선교, 그러한 대화 없는 선교를 수행할 수 있는 인식론적 배후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공격적 선교의 근원적 배후에는 무례함으로 주체화된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신앙감각이 전제되어 있지만, 해외 선교는 이러한 무례함을 보다 강화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내적 알리바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를 넘어 ‘예수의 선교’로
위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안티기독교의 사이버테러의 메커니즘과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의 메커니즘 사이의 유사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몰대화적인 행위의 공격성에서 유사성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경우 그러한 동기가 상처 입은 자아를 보상받으려는 의도하지 않은 행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합리적 행위라기보다는 자신이 입은 상처에 대한 비성찰적인 퇴행적 반응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몰대화적인 공격성은 또한 ‘상처 입은 자아’를 보상해줄 뿐 아니라 강한 신념에 따른 행위로 변형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남’을 공격함으로써 자기를 세우려는 태도다. 하여 행위자로 하여금 ‘지나치게 강한 신념적 주체’로 자기를 인식하게 한다. 그렇기에 공격하는 타자에 대해 그토록 비타협적인 공격성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양자는 서로 적대적이지만, 동시에 쌍둥이처럼 유사한 행위 양식과 인식의 틀을 갖고 있다.
한국사회의 병리성에 대한 퇴행적 반응이 하나의 대안처럼 자리잡은 이러한 공격적 행위성향은 예수와 그를 추종한 초기의 예수운동가들의 선교를 떠오르게 한다. 아직 교회가 태동하기 이전 혹은 아직 교회의 선교가 제도화되기 이전의 이들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선교를, (오늘날의 ‘교회의 선교’와 대칭적 개념으로) ‘예수의 선교’라고 한다면, ‘예수의 선교’가 극복하고자 했던 사회역사적 징후와 위에서 길게 얘기했던 기독교와 안티기독교의 퇴행적 폭력성은 대략 엇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선교’의 전제이자 토대인 ‘예수 자신의 선교’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자.
예수께서는 ... 두루 다니시면서 ... 백성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다.
―「마태복음」 4장 23절
이 구절은 예수의 선교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는 선교 대상의 겪는 ‘모든 질병과 아픔’을 대면하며 대중에게 다가갔다. 아니 그러한 대상을 ‘두루 찾아다녔다.’ 대상을 찾는 열정이라는 점에서는 교회의 선교와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이러한 고통을 발견하고자 하고 그것에 다가가고자 한 것은 예수 자신이 그러한 고통의 담지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복음서 텍스트들을 살펴보면, 그는 나자렛이라는 이름도 낯선 작은 마을 출신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의 탄생의 역사는 단순한 ‘무명의 동네’의 한 ‘촌뜨기’ 출신이라는 것 이상을 암시한다. 「마태복음」이 묘사하는 탄생의 시간인 주전 4년은 불과 수킬로미터 떨어진 요새인 세포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또 처참히 진압된 바로 그 때다. 또 「누가복음」이 기억하는 주후 6년 또한 불타 잿더미가 된 요새를 왕이 국가의 수도로 재건하기 위해 대규모 사업을 벌이던 바로 그 때다. 그러한 시기에 예수는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쟁으로 무수한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그 상흔으로 오래도록 몹시 아팠으며, 또 대규모 건축 현장에 강제동원되어 뼈를 깍는 노동에 시달려 죽거나 다쳤고 또 여간해선 회복되지 않을 저 살인적인 노동의 사후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바로 그 현장 한 가운데가 예수를 기억하는 초기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예수 탄생의 배경인 것이다. 곧 그도 질병과 아픔의 한 가운데서 태어났고 자랐다.
복음서들은 그러한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곧 신이 보낸 신의 분신 나아가 신 자신이 그라는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다가가고 고쳐주기 위해 그 아픔과 질병의 공간 한 가운데로 들어왔다고 한다. 바로 이 점에서 교회의 선교와 신의 선교, 곧 예수의 선교는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신은 그 현장에 힘 있는 타자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가난한 곳에 금권을 가지고 가거나, 무력한 곳에 제국의 힘과 더불어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자신 무력한 존재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들어왔다.
「마태복음」이 들려주는 예수의 선교가 시작되기 직전의 광야의 시험 이야기에서 악령은 그에게 세상의 권세를 주겠다고 했고 돌이 빵이 되게 할 능력으로 유혹했다. 권세가 있다면 세계의 부패하고 비정한 체제를 개혁할 수도 있을 것이고 돌로 빵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기아는 단숨에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러한 능력을 단지 ‘시험’으로만 보았다. 실제로 신의 선교, 예수의 선교는 능력을 통해 사람들의 아픔에 다가간 것이 아니라 고통 속으로의 신 자신의 감정이입으로 이해된 것이다. 여기엔 신념에 불탄 존재의 자기의 주장만 앞세우고 대상을 탈주체화하는 공격적 선교가 자리잡을 곳이 없다. 그것은 곧 신의 죽음, 말 건네는 존재의 ‘자기 비움’이다. 신의 선교, 예수의 선교, 그이의 대화법은 바로 이러했다. 이것이 초기의 예수운동가들이 이해하는 예수의 선교다.
대중의 질병과 아픔은 여러 형태의 병리성을 낳았을 것이다. 예수 당시의 시대에 관한 조사를 통해서 추정할 수 있는 당시의 사회상은 우리 시대 못지않게 폭력적이었다. 특히 위에서 인용한 「마태복음」을 생산 유통한 공동체는 더욱 그러했다. 반로마 유대전쟁(주후 66~72년) 이후, 유대 국경 바로 이북의 어느 지점에서 활동했던 예수파 유대인들이었던 그들은 전쟁의 광폭성이 여전히 파행적으로 작동하고 있던 시대에 모든 폭력이 집중하는 바로 그 위치에 있었다. 특히 유대전쟁으로 엉뚱한 피해를 입은 그 지역 원주민들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전후 복구과정에서 고강도의 원리주의적 체제로 재편되고 있던 유대체제(성전 중심의 체제에서 회당 중심의 체제로의 재편)의 ‘이방인’에 대한 증오가 바로 마태공동체를 향한 폭력으로 표출되었다. 원주민에겐 가장 만만한 유대인이었기에 그랬다. 또 재편된 유대체제는 ‘적’이 필요했고, 이때 응징할 수 있는 만만한 적으로 나자렛 당파(회당 내의 예수의 추종자들)를 ‘발명’해낸다. 그들을 ‘내부의 이방인’으로 낙인찍어 린치를 가함으로써 체제는 생산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유대교의 이러한 반예수주의는 계산된 합리적 행위가 아니다. 사후적으로 자기들의 증오를 변증하는 논거를 만들어냈지만, 그보다는 자기들의 상처를 봉합하고 재주체화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퇴행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폭력 속에 죽음 같은 질병과 아픔을 체감했던 이들은 자기들의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 예수의 선교를 떠올렸다. 아니 실은, 그 공동체 내에도 또 다른 퇴행적 폭력들이 엿보인다. 오늘날 숱한 가정폭력이 밖에서 상처 입은 남자들이 아내와 자식, 혹은 여동생을 행해 가하는 전가된 폭력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마태공동체도 어쩌면 그러한 퇴행적인 ‘와전된 폭력’의 징후들을 드러냈는지도 모른다. 해서 저자는 그토록 강조해서 내부의 증오들을 해소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유대인보다 더 철저히 율법에 충실해야 한다느니, 예수는 율법의 완성자라느니, 원한의 대상을 사랑하라느니 하는 말은 바로 내부의 누군가를 향해 증오를 전가시키는 행위들을 감안한 「마태복음」 특유의 예수 해석이다. 요컨대 예수의 선교를 이 공동체는 자기의 한(恨)을 해소하기 위해 제3자에게 가하는 공격적 행위, 그 메커니즘과의 단절을 전제로 하는 신의 대화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빗나간 교회의 선교는 예수의 선교를 오인했을 뿐 아니라, 예수와 그의 초기 추종자들이 넘어서고자 했던 바로 그 행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교회 밖에서 흔히 발견되는 와전된 폭력의 메커니즘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은 타자를 탈주체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이며, 하여 그네들을 대화의 상대로 보지 않고 공격하여 정복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격적 행위의 배후에는, 말했듯이, 자기 자신의 상처를 봉합하려는 무의식적인 무성찰성, 그 퇴행적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반면 예수의 선교는 바로 이러한 퇴행적 욕구 자체를 향한다. 그러한 퇴행성의 원인인 숱한 질병과 고통을 찾아 나서며,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신의 자기 비움, 그러한 신적 대화법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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