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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죄론과 그리스도교 교회의 권력 - 바울의 '옷 입음' 수사를 중심으로

이 글은 기독교아시아여성연구원의 심포지엄에서 처음 발표된 글입니다. 안타깝게도 연도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2001년 혹은 그 이전이 아닐까 하는데 ...... 
이 글은 내 책 [반신학의 미소] (삼인, 2001)에 <'죄론'과 교회의 시선의 권력>이라는 제목으로 재수록되었습니다.
또 [시대와 민중신학] 7(2002)에도 재게재되었습니다.

그리고 [리부팅 바울]의 '덧붙이는 글'로 수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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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권력은 강제를 통한 억압보다는 내면화를 통한 자발적 순종의 장치를 통해 통합을 이루어낸다. 이것은 곧 정체성의 형성에 권력이 개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순종을 만드는 그리스도교/교회의 권력에 대한 연구는 그리스도인 정체성 형성의 관한 논의를 수반해야 한다.

여기서 푸코가 근대적 권력의 특징으로 규정하는 ‘시선의 권력’(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해 감시됨으로써 스스로를 규율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이 주목된다. 왜냐면 그리스도교/교회의 권력의 특징은 오래전부터 시선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실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는 신학적 담론은 그리스도인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기재인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죄론’이다. 그것은 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구원 담론’의 필수 불가결한 짝인 동시에, 시선의 문제가 담론 형식에 있어 죄론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신학에서 죄를 다룬 기존의 연구들은 ‘악의 해석’에 관한 논의로 치중해 왔다. 곧 죄론은 인간 세계의 위기 상황을 해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데, 이러한 논의는 ‘죄 담론이 수용자들에게 어떤 담론적 효과를 발현했는가’의 문제를 보는 데는 전혀 유용하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죄론 담론적 효과를 분석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의 정치를 보고자 하는 것이며, 이런 관점에서 순종의 권력 메커니즘을 읽고자 하는 것이다.

 



죄론과 시선의 규율 권력

바울의 옷 입음레토릭을 중심으로

 

 


교회의 규율 권력으로서의 죄론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감시와 처벌에서 근대의 권력이 억압의 장치라기보다는 생산의 장치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검열하고 배제하며 은폐하기보다는 현실의 지식과 그 지식에 규율된 인간 주체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안토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푸코에 대해 논평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권력(에 매여있음)쾌락(pleasure)을 생산하는 도구라고까지 한다. 근대적인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의 에너지는이러한 권력에 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바로 그러한 매여 있음으로 인해 생성되는 쾌락의 생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위의 책에서 이러한 근대적 권력의 기술을 규율(discipline)로서 설명하면서, 그것은 순종하는 신체를 생산하는 담론적 장치라는 보았다. 요컨대 생산적 권력의 메커니즘은 규율을 통해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심지어 거기에서 쾌락을 체감하는 주체를 형성함으로써 사회의 지배 관계를 재생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림3]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판옵티콘. (Source_Wikimedia Commons)


푸코에 의하면 규율 권력은 감시’, ‘규범화’, ‘시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시행된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규율 권력이 시선(gaze)의 효과와 관련이 있음을 보게 된다. 제레미 벰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적 원형감옥 구상인 판옵티콘을 근대적 권력의 예표적 담론으로 읽었던 푸코는 그것의 핵심이 시선과 그 효과로서의 내면화(interiorization)에 있음을 미셸 페로(Michelle Perrot)와의 대담에서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판옵티콘의 시선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감시의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점이다. 이때 보이지 않는 시선을 타자라고 한다면, 타자에 의해 응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주체가 구성되며, 타자에 의해 감시되고 있음을 의식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자발적 순종 행위가 생산된다.

이 글은 지배(domination)에 대한 순종을 낳는 그리스도교/교회의 권력을 다루려는 데 초점이 있다. 특히 강압을 통해 순종을 만들어내는 강제(sanction)의 차원보다는 자발적 순응의 차원에서 그리스도교의 생산적 권력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하여 교회의 생산적 권력 메커니즘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체 구성에 개입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한다.

여기서 나의 주된 관심은 교회의 담론에서 시선이 갖는 효과에 있다. 이 점에서 우리의 가설적 입론이 제기될 수 있는데, 그것은 푸코가 근대적 권력의 특성이라고 보았던 시선과 그로 인한 내면화의 문제가 그리스도교 담론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 권력 작동의 결정적인 요소를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죄론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죄 담론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구원의 어법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일종의 시선을 통한 규율 권력 담론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의 장치로서 죄론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죄론의 세 가지 패러다임

 

이제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에 관한 모든 물음은 악의 해석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존재의 위기가 어디로부터 오는가에 관한 물음으로, 이러한 존재론적 비구원의 상태를 신으로부터의 거리혹은 인간간의 거리의 문제로 본다. 그러므로 위기를 극복하는 것 또한 그 거리를 해소하는 관점으로 이해한다. 한편 거리 해소를 가능하게 하는 것, 즉 구원론적 계기를 읽는 신학적 해석 방식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위로부터의 초극, 수평적 초극,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초극이 그것이다. 첫 번째의 것이 정통주의적 전략이고 두 번째의 것은 자유주의적 전략이라면, 마지막의 것은 해방론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1]

이 세 전략은 공히 죄의 근거를 신성(하느님의 형상)으로부터의 이탈(또는 신성의 결핍)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런데 정통주의는 신성이 소거된 인간이 죄로부터 스스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관점을 취한다. 오직 신으로부터의 선물(은혜)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적 전략은 신성의 결핍을 인간성의 결핍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인간성은 보편적 가치에 준해서 해석된다. 그러므로 보편적 인간성의 회복을 통해서 인간은 상실한 신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한다. 이러한 보편적 인간성의 상실에서 죄 문제를 사고하는 관점은 모든 인간의 인간성 상실 상태를 강조한다.

그런데 현실의 위기 구조를 인간성의 상실 상태가 균등하지 않음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해방론적 전략이 강조하는 바가 이것인데, 위기 구조의 불균등성으로 인해 더 많은 고통을 짊어진 이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신이 가슴 아파 한다는 관점을 취한다.


[13] 죄론의 세 가지 패러다임

 

죄의 근원

구원의 계기

담론의

공간적 구조

담론의

시간적 구조

인간주의에 대한 담론의 기조

정통주의 전략

신성으로부터의 이탈/신성의 결핍

신의 선물

수직 구조(위로부터)

미래 중심적

반인간주의

자유주의 전략

보편적 인간성

수평 구조

 

현재 중심적

인간주의(개인 강조)

해방론적 전략

고난당하는 이

수직 구조(아래로부터)

인간주의(구조 강조)


따라서 죄론에 관한 세 패러다임은 담론의 형태에 있어 몇 가지 유사성과 차이를 지닌다. 우선 이 셋은 공히 죄의 현실을 인간 삶의 굴레로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따라서 이러한 굴레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논의가 구원론의 골격을 이루게 된다. 여기서 정통주의 전략은 인간 자체로부터의 내재적 구원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반인간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반면(타율적 구원론), 다른 두 담론은 구원의 인간 내재적 특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담론 기조를 갖는다. 단 자유주의 전략에서는 개별자로서의 인간이 위기의 존재이며, 동시에 구원의 행위 주체로 다루어지는 데 반해, 해방론적 전략은 죄의 현상이 부여되는 구조를 문제시하며 동시에 구원의 행위를 구조 변동의 관점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죄 담론에 관한 자유주의 전략이 보편적 인간성을 강조하는 한, 구원론적 담론의 시공간적 구조는 수평적 성격과 현재 지향성을 지니는 데, 해방론적 전략은 시간적으로 현재 중심적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한 담론 구조를 갖지만 공간적으로 사회 구조적 고난에 기반을 둔 아래로부터의 구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전자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한편 정통주의 전략은 시간적으로 미래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논의와는 구별되지만, 공간적으로 죄-구원의 문제를 수직적 시각에서 보고 있다는 점에서 해방론적 전략과 유사한 담론 구조를 취한다. 다만 전자가 위로부터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담론 전략의 중요한 차이점이 노정된다.

이상과 같이 세 패러다임으로 나누어 정리해본 기존의 담론은 모두 죄론의 내용을 무엇으로 구성할 것인가의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경험되는 위기 상황을 인간의 존재론적 굴레인 와 연관지어 해석함으로써 위기의 존재론적 성격이 규정되고, 그것을 초극하기 위한 신앙적 전략으로 인간, 세계, 우주 그리고 신 등과의 관계 재구성이라는 관점으로 죄론의 내용을 구성하고자 한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이러한 담론 구조의 차이는 인식론적 차이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차이는 현실 사회의 위기에 개입하는 상이한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요컨대 이러한 내용 분석에는 그리스도교 분파 간의 상이한 사회적 실천 양상이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내용 분석의 결정적인 한계는 그러한 논의가 죄론의 수용자, 곧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형성에 어떻게 관여되는지, 그 작동 메커니즘이 어떠한지에 관한 물음으로 자동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죄론이 죄를 굴레로서 이야기하지만, 그것의 담론적 효과는 단순히 굴레 의식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아래에서 더 논하겠지만, 그것은 수용자 공동체에게 하나의 쾌락으로서 체감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죄 의식이 쾌락의 근거일 수 있는 것은 죄 담론이 타인의 시선을 통해 주체의 구성을 조직해내는 효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죄 담론이 시선의 권력과 어떻게 연계되었는지를 조명해볼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교 죄론의 중심 텍스트인 바울서신들에서 이 문제를 살필 것이다.

 

옷 입음의 레토릭과 율법주의 죄론의 해체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3,27

 

이 구절에서 바울은 세례를 받는다는 것, 그리스도인됨이라는 것을 옷 입음으로 말하고 있다. 로마서에선 구원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으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라고 하면서(13,12)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13,14)라고 강변한다. 고린도전서는 죽음으로 귀결되는 죄의 권력에 매인 이들을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있다고 표현한다(15,53).

한편 바울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골로새서에베소서에서도 비슷한 표현들을 볼 수 있다.

 

여러분은 그 모든 ......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골로새서3,8~10

 

......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에베소서4,22~24

 

여기서 바울과 골로새서-에베소서사이의 차이가 있다면, 바울은 종말이 임박했다는 생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반면, 대략 반세기나 후대의 문서인 골로새서에베소서는 종말이 한정 없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 당파로 전향하기 이전의 생활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옷입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골로새서는 예수 당파만의 규범이 아닌, 일반적 규범에 따른 생활을 공동체에게 강변하기 위해 옷 입음의 소재를 활용하고 있다.

한데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두 부류의 텍스트에서 공유되고 있는 것처럼, 적어도 초기 그리스도교의 상당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옷입다(endyō) 혹은 낡은 옷을 벗고(apekdyomai) 새옷을 입다로 묘사하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된다. 여기서 옷 입음/벗음이라는 표현이 보는 이(타자)의 시선을 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자.

여성주의 영화이론가 로라 멀비(Laura Mulvey)가 남성의 시선에 의한 여성의 성전환적 동일시(transsexual identification)를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의 복장도착증(transvestism) 개념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 복장도착이라는 것은 이성의 옷을 입고 있거나 그렇게 상상할 때 성적 쾌락을 보다 쉽게 느끼는 도착 증상을 말한다. 이것은 그렇게 입지 않았을 땐 성적인 흥분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마치 남자가 여자의 야한 이브닝드레스를 보고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것과 유사한 증상일 뿐이다(‘절시증’, scopophilia). 한데 절시증과 복장도착증이 다른 것은 전자는 타인을 봄으로써 쾌락을 느끼는 행위인 반면, 복장도착자는 타인의 시선을 상상하면서쾌락을 맛본다는 점에 있다. 요컨대 복장도착이라는 개념에서 우리는 보이는 것, 감시당하는 것이 쾌락의 감정과 연결될 수 있다는 시사를 받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또 하나의 사실은 타인이라는 관찰자가 실재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 타인은 복장도착자가 아닌 외부의 누구가 아니라, 그가 상상하는 타인, 즉 그의 내면에 들어와 있는 타인이다. 바울이 묘사하는바 그리스도교 신앙도 바로 그렇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이의 시선에 의해서만 포착될 뿐이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 시선의 주인공은 하느님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느님은 이미 그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의 내부에 있는 존재, 그리스도인 안으로 내면화된 존재인 것이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단지 그의 시선에 의해서만 응시되고 있다는 믿음,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힘겨운 현실에 닥쳐있다 하더라도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바로 이것이 옷 입음의 신앙이다.

그런데 이러한 옷 입음으로 인해 새롭게 구성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는 그의 죄 이해와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에게서 는 그의 의지 이전의 존재 구성요소다. 그가 창세기의 아담 표상을 사용하여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고 한 것(로마서5,12~19. 특히 17)은 인간의 죄성(罪性)이 근원적으로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느냐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죄가 자신의 의지를 넘는 존재의 구성요소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ho esō anthrōpos)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7,21~24

 

여기서 그는 분열된 주체다. 그의 존재 안에는, 바울이 속사람이라고 표현하는, 하느님의 법을 추구하는 자아와 더불어 죄의 법 안에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도사리고 있다. 속사람은 이성의 법(nomos tou noos)을 지향하는 주체다. ‘이성이 의식적 행위를 함축하는 개념이므로, 내적 자아의 반대편에는 의식 이면에서 그를 충동질하는 다른 자아가 상정되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그는 여기서 죄의 원인에 관한 지식을 펼치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선 어찌할 수 없는 실존적 번뇌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또한 분열된 주체간의, ‘예수의 법을 추구하는 의지로서의 의식과 태어나면서부터 언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규정해왔던 유대인의 법안에서 형성된 무의식적 욕망간의 내면의 전쟁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주의적 이스라엘 신앙의 담론 체계를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결코 자유로운 수 없었다. 그는 갈라디아서처럼 율법 담론이 담고 있는 유대주의의 권력 메커니즘을 비판하면서도(의인론을 통해), 그 체제의 죄인-의인 논법에 자신도 모르게 순종하고 있다. 그는 의식의 영역 내에서는 그리스도(의 노선으)로 전향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유대주의적 자의식에 무의식적으로 동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구원을 그리스도로 옷 입음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구원은 존재 자체의 변형은 아직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3,12

 

당장은 옷 입음에 불과하다. 다만 하느님에 의해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것에는 종말의 때에 대한 비전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는 자아는 종말의 때에 온전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빌립보서3,21

 

하지만 아직 아닌현재의 상태에서도 그는 존재의 변형을 체험한다. 그것은 정체성의 전환을 통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로마서8,9

 

자신의 몸은 아직 분열되어 있지만, 자신이 영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는 믿음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확신이요 신앙이다. 동시에 그 믿음은 자신이 율법의 시선, 곧 사람의 법의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그의 정체성 전환은 그의 시선을 자신의 옷 입음을 응시하는 이(타자)의 시선으로 동일화함으로써 실현된다.

이와 같이 바울은 유대주의의 율법관과 대결하면서 죄-의인 논법의 해체의 언술로서 옷 입음의 레토릭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의 선교활동의 주요 무대의 하나였던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체제의 권력에 대한 대항담론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회당체제의 지배를 재생산하는 권력 장치의 핵심에 배타적 규율체계로서의 율법주의가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 율법을 통한 죄-의인 논법에서 그는 순종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문제시하였고, 이에 율법주의적 신앙에 전면적 비판을 가함으로써 그러한 순종의 기재를 해체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에 의해서만 그는 자신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는 유대주의적 이스라엘 신앙과 결별할 수 있었고, 대안적 신앙 담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유대주의의 율법관에 대한 보다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시선에 의한 권력의 장치를 중심으로 유대주의적 계율종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계율종교율법주의의 메트릭스

 

이스라엘 역사에서 식민지 시대 이전까지는 하느님의 법은 적어도 사회 통합(social integration)의 원리가 아니었다. 법제적으로 볼 때 지파동맹 시대는 주로 관습법이나 힘에 의한 협상의 원칙(분쟁지원 세력 규합힘에 의한 협상) 아래 대중의 일상생활이 조직되던 시기였다. 요컨대 대중은 하느님의 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삶을 영위하였고, 그것은 단지 지파동맹이라는 느슨한 사회적 결속체의 추상적인 체제 통합(system integration)의 원리로서 제한적으로만 매우 낮은 정도의 효력을 나타냈을 뿐이다.

군주제하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중앙과 지방의 요새도시에 왕의 법정이 세워졌고, 대중의 삶은 여전히 씨족적 질서에 따라 운위되었으며, 따라서 관습법과 힘에 의한 협상의 원칙은 여전히 유효했다. 하느님의 법은 주로 왕의 통치를 위한 교훈 혹은 왕실 사제단의 (생활) 규율로서만 통용되었던 것 같다. 당시의 대중이 왕의 지배가 하느님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것은 하느님의 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제들에 의해 시각청각후각 등을 통해 실연(performance)되는 제의 의식을 통해서였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필요한 규율은 하느님에 의해 포착되고 있다는 믿음 아래서 이루어지는 일상생활에서의 규율이라기보다는, 절기 마다, 그리고 매일 마다 드리는 제의의 비일상성과 일상성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즉 제의 행위를 ()일상적 생활에 깊이 연루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 와서 야훼신앙이 계율종교로서 재탄생함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의 법이 이스라엘인의 사회적 통합의 주요 기재로서 등장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식민지 시대라는 변화된 상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우선 이 시기에 씨족적 결속력이 급속히 와해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군주제 시대 말기와 식민지 종주국들인 아시리아, 바벨로니아, 페르시아 시대를 거치면서, 오랜 전쟁으로 인해 인구의 이동이 격심해져, 본토민보다 이산(離散, 디아스포라) 이스라엘인의 수가 거의 열배 이상이나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비교적 안정기인 헬레니즘 제국 시대에 이르면 국제적 활황기를 맞아 용병으로, 상인으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았다. 한편 전쟁이나 급속한 경제적 활황이라는 조건 속에서 계급분화가 심화됨으로써 인구의 사회적 구성 상태도 크게 변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사회적 조직이 크게 훼손되었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에 우리가 주목할 상황은 회당의 등장과 소자산가적 지식인층의 대두라는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씨족의 질서가 사회적 결속을 이끌어왔다면, 이 시기엔 회당이 그것을 대신해서 점차로 지역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인을 결속시키는 중심 기구의 역할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회당의 중심부엔 새로 대두한 소자산가 계급의 지식엘리트가 점차로 씨족과 문중의 어른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문자의 전문가인 서기관(scribes)이 군주제 시기의 성서 텍스트에선 거의 전적으로 왕실이나 성전에서 일하는 상위 엘리트 층의 일원으로만 언급되다가(열왕가하22; 예레미야서36,10; 36,32; 에스라서7,6; 느헤미야서12,12~13), 요세푸스의 책들이나 마카베오서, 그밖의 묵시문서들 등, 식민지 시대의 텍스트에선, 이른바 고귀한 계층이 아닌, 보다 평민에 가까운 계층의 사람들이 적지 아니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하시딤(hasidim), 마스킬림(maskilim, 민중의 지도자─〈다니엘서11,33), 바리새(pharisaioi), 에세네(Essēnoi) , 율법에 충실한 소자산가적 지식인이 이 시기에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나, 이들이 대중의 정치적 동원의 중심부에 있었다는 점은 이들 소자산가적 지식인이 대중의 압도적인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렇게 계율종교의 탄생에는 대중적 서기관의 등장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이 현상은 아마도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 팔레스티나를 병합하고 있던 시절에 지중해 전역에서 벌어진 문서 혁명의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 수도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근대사회 이전까지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초대형 도서관을 건축하였다. 장서가 무려 70만 권이나 되는데, 이것은 니느웨(아카디아어로 Ninwe)에 세워졌다는 또 다른 초대형 도서관보다 두 배 이상 큰 규모다. 이것은 다른 사회에도 영향을 미쳐서 많은 지역에서 크고 작은 도서관이 속속 건립되었다.

제국은 문서 수집관을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두루 보내 책들을 대대적으로 수집했다. 이로 인해 광범위한 출판시장이 형성되었고, 이 과정에서 필사자의 수요가 급증했다. 이것은 대중적 서기관의 등장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들은 책을 필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각종 민원 편지를 대신 써 주고, 소송 대리인의 역할까지 수행한다. 또한 이들은 문자를 가르치는 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대중에게 지혜를 설파하는 현자(sage)가 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격변기인 동시에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격변기인 기원전 3세기에 문자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문자가 대중사회에 폭넓게 확산되던 그 무렵, 글자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을 넘어 마술적인 힘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서기관은 학문적 성과를 점술에 활용하기도 했고, 과거의 예언자와는 달리 이 시기는 서기관 예언자도 출현했다. 글이 다양한 용도로 대중에게 다가간 것이다.

팔레스티나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데, 전도서의 저자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용어였던 코헬렛(qohelet)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정전화가 시작된 성서 텍스트들을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각종 문헌들을 필사했을 뿐 아니라, 일부 평신도 출신의 코헬렛은 욥기전도서같은, 인습적인 지혜와는 다른, 깊이 있고 반시대적인 철학적 사변을 담은 문헌의 저자가 되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원전 2~1세기 경, 오랜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자주적 독립국가의 건국전쟁인 마카베오 항전의 시기에 마스킬림이나 하시딤 같은, 현자 계층으로 보이는 이들이 주도한 사회정치적 운동이 있었고, 또 쿰란 공동체 운동의 시조로 보이는 의의 사제역시 사제 출신 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카베오 항전의 결과 건국한 하스몬 왕국 시기 대중적 사회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한 바리새인들 역시 그런 사람들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촌락과 도시의 이스라엘인 대중의 공간 한 가운데에 쉬나귀궤(synagygue)가 세워진다. 이스라엘인들의 회당이 그것인데, 이것은 팔레스티나 내부와 외부에 두루 나타났다. 바로 이 공간에서 계율종교가 발전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리새 같은 대중적 서기관 계층의 엘리트가 있었다.

이렇게 계율종교는 대중사회에 문자가 침입해 들어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여전히 제의종교는 중요한 종교적 통합의 장치였지만 계율종교적 성격이 여기에 가미된 것이다. 한데 계율종교가 성립하는 데 있어 은 매우 중요하다. 그 법은 문자의 형식으로 사람들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 시기에 이스라엘에는 악마가 인간 존재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상상력이 폭넓게 대두하였다. 성서의 지혜문서들, 욥기, 잠언, 전도서등은 그런 흔적을 보여주며, 이 시기에 저작된 여러 외경 지혜문서들 또한 내면화된 악의 문제를 다루곤 한다.

이것은 문자의 효과인데, 문자가 대중에게 다가가면서 내면의 영역을 새롭게 발굴했던 덕이다. 하여 법이 작동되는 공간은 시장에 세워진 법정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이기도 하다. 하여 존재의 내면은 몸 안으로 들어간 악과 하느님의 법의 쟁투의 장이 된다. 이런 전통 위에서, 앞에서 인용한 로마서7,21~24에서 바울이 이야기한 것과 같은 내면의 전쟁 담론이 회자되는 것이다.

이런 계율종교가 발전하게 되면서 율법의 문제는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적 요소가 된다. 하여 이 시기에 토라는 율법의 책으로 해석되었고, 그것에 기초하여 율법의 해석을 둘러싼 여러 분파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 해석은 대단히 순혈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요소를 강하게 드러났다.

아무튼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티나에는 유대주의자들과 사마리아주의자들이 경합을 했다. 이들 분파들 내부에는 다시 다양한 소분파들이 할거했다. 여기에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처럼 아웃사이더적인 대중적 예언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팔레스티나 외부에도 이스라엘 신앙의 다양한 분파들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유대주의자나 사마리아주의자들이 다수를 대변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적 선교 행태는 많은 회당에서 굉장한 반향과 논쟁의 핵이 되었는데, 이 책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대주의자의 일원이었으나 강력한 반유대주의자가 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주의자들과 격론을 벌였다.

1세기 말, 반로마전쟁의 참패로 성전이 불타 사라진 뒤, 전후 이스라엘의 재건을 주도한 이들은 로마황제의 재가로 얌니아에서 시작된 유대주의적 이스라엘 신앙 운동이다. 흔히 학계에서 랍비적 바리사이즘이라고 부를 만큼 이 운동은 다분히 유대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율법이 이제 문서로 편찬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주제별 엮음집인 미슈나(Mishnah)와 성서 본문별 해석 총서인 미드라쉬(Midrashim) 등이 대표적이다. 또 미슈나에서 제외된 해석 총서로 토세푸타(Tosefta), 그리고 미슈나와 미슈나의 주석인 게마라(Gemara)를 묶어놓은 탈무드(Talmud) 등이 추가적으로 유다주의 율법 총서로 엮였다. 여기에는 다양한 해석 전통이 집성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해석전통에 따른 이본(異本)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렇게 1~2세기에 시작되어 탈무드가 집성되는 6~7세기까지의 이스라엘 신앙을 학계에선 흔히 형성기의 유대교(formative Judaism)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이렇게 집대성된 이스라엘 신앙을 유대교라는 편파적 명칭으로 지칭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나는 의심하고 있지만,[각주:2] 아무튼 이렇게 2세기 이후에는 점차 유대주의적 성향이 강한 종교로 형성되고 있었다.

아무튼 기원전 3세기 이후 이스라엘 신앙이 계율종교적 성격을 띠기 시작하면서 율법의 해석이 중요하게 다뤄지기 시작했고, 다양한 율법주의적 해석들이 대두한 것이다. 그리고 율법이 내면으로 들어가서 내면의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인간 내면을 훤히 꿰뚫어 보는 이로서 신이 인식되게 되었고, 위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신학이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임을 고발하고 있다. 특히 그 죄인 메커니즘이 유대주의에 의해 순혈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인 관점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문제제기한 것이다.

 

옷 입음의 레토릭’, 또 다른 그리스도교 율법주의?

 

이렇게 바울은 계율종교의 메트릭스 위에서 이스라엘 신앙, 특히 유대주의적 신앙과 일전을 벌였다. 그것은 유대주의의 죄인-선민 메커니즘이 단순히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는 신앙 체제라기보다는, 더욱 정결한 사람과 더욱 부정한 사람을 가르는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예수운동의 문제의식을 그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 주변인이 하느님 앞에서도 주변인이 되게 하는 종교적 장치로서 유대주의적 이스라엘 신앙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내에서 벌어지는 주변인(이방인, 노예, 여자─〈갈라디아서3,28)에 대한 차별을 특별히 문제시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그리하여 앞의 단락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논조로 그는 유대주의 율법관을 해체하기 위해 투쟁했다. 다시 말하면, 율법종교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주변화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부과된 저주스런 운명에 순응하게끔 하는 장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유대주의적 죄인-선민 메커니즘에 대한 바울의 해체적 문제제기는 두 가지 방향을 갖는다. 하나는 죄인 메커니즘의 해체의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유대주의적 선민 메커니즘에 대한 해체의 관점이다. 이것은 주변화된 존재를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의 논법, 특히 그 안에서 활개치는 유대주의 분파의 논법을 전제한 것이며, 바울은 그 대신에 이스라엘인(또는 유대인)-이방인, 자유인-노예, 남자-여자를 아우르는 의인-죄인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옷 입다라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에 관한 그의 표현에는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차등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동질적 존재로 드러나야 한다는 신념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쟁 어법이 순종의 장치를 예수 신앙사 속에 재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옷 입다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그의 묘사는, 앞서 말했듯이, 자신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는 유대주의 율법관을 넘어서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지만, 여전히 시선의 권력 아래 있는 신앙인의 정체성을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실재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골로새서에베소서는 기성의 가부장제적 사회 질서 속에 순응하는 주체로서 그리스도인을 이야기하면서, 바울의 옷 입음의 신학을 수용하고 있다. 즉 유대주의의 순응의 메커니즘을 바울 버전으로 재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대 유대주의 전선을 반대의 방향으로 역전시켜, 바울이 문제시한 유대주의적 얼굴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채색한 결과이지만, 그러한 역전이 다름 아닌 바울의 논리를 통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바울 식의 옷 입음론은 보는 이보이는 이라는 이분법을 가정해야만 하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야만 시선적 권력의 담론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보는 이의 관점에서 규율하려는 욕망의 존재로서,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는 유대주의적 율법관에 대항할 신앙의 동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보이는 이라면, 보는 이는 자신의 내면에 있을지언정 결코 자신과 대면할 수 없는 존재다. 그이는 실재로는 무한정의 거리에 있다. 그이는 실재로는 우리와는 결단코 유사해질 수 없는 전지전능의 존재다. 적어도 바울의 관점에서는 그러했다. 물론 그 점에선 바울이 문제시한 유대주의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그런 이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단지 그이의 은총(charis)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이 바울에게서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순종(hypakoē)를 의미했다는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바울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았지만, 바울의 신학은 전능한 보는 이앞에서의 삶의 수동성을 내포한다.

이런 이분법이 특히 위험스런 것은 신성화된 권력이 단지 추상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역사 속에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유대주의의 율법이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법은 반드시 해석을 필요로 하고, 그것은 해석자의 시선에 의해 보는 이의 시선이 조율되는 과정을 수반한다. 요컨대 해석자의 시선 아래서, 현실의 권력이 신앙의 보는 이의 시선과 동일해질 때 그 위험성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파시즘은 바로 이런 신성화된 권력의 순종 메커니즘을 가리키는 사회학적 개념이다. 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체제가 이런 점에서 바로 파시즘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권력이 자신을 보는 자와 동일시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관을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또한 종종 그리스도교는 지배권력과 이런 점에서 제휴를 거듭해왔다. 바로 여기서 역사의 폭력성에, 그 테러리즘에 그리스도교가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바울의 옷 입음의 해석이 있다. 물론 바울 자신이 그것을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예수로 바울 다시 읽기

 

바울은 예수를 승계한 유력한 예수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다른 시각에선 오늘날의 교회가 예수를 오독하게 하는 하나의 빌미가 되었다. 물론 바울이 지향하고자 했던 실천의 진의가 생략된 채 교회가 바울을 승계한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예수의 실천을 시선의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논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할 듯싶다.

당시의 다른 민중운동가와 비교할 때 예수의 두드러진 점은, 이미 많은 연구자들에게서 지적된 바, 그에게선 혁명이 정치적 지배의 전복을 넘어서 사회적 문화적 지배에 대한 전복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있다. 특히 일상을 지배하는 권력과의 쟁투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를 우리는 그의 기적 사건들에서 발견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추론 가능한 예수의 기적 사건은 주로 질병에 걸리거나 악령에 들린 이들 치유하는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각주:3] 한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의 치유(treat/healing)가 현대 의학에서처럼 기능적 치료(cure)로 국한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어느 사회나 질병(이나 악령 들림) 현상은 동시대의 건강관리체계(health care system)를 전제한다. 예수 시대 팔레스티나에서 건강관리 체계는 이스라엘 신앙의 정결-부정의 체계와 깊이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자. 그것은 계율종교의 지배적 가치들과 건강 담론들이 엮이면서 형성된 담론의 계열화에서 질병 걸린 자나 악령 들린 자가 죄인으로 지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건강관리체계는 사회 구성원의 보건예방 체계이자 질병관리 체계인 동시에 배제-박탈의 체계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질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혹은 악령에 들렸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주변화된 존재를 그 존재의 감옥에서 해방시킨 예수의 기적은 치료인 동시에 이러한 지배적 의미의 계열화를 낳는 코드를 교란시키는 사건이기도 했다.

예수의 기적을 다루는 많은 연구들의 가장 치명적인 한계는, 그가 질병에 걸리거나 악령에 들린 이를 고쳐주었다는 것이 왜 당시의 문화적 담론을 주도하던 바리새파에게서 미움을 사는 이유가 되는지에 관해 적절한 해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예수의 기적이 동시대의 의미의 지배적 코드를 교란시킨 행위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주지할 때만 그러한 의문은 해명될 수 있다. 즉 예수는 당시의 건강관리체계의 인식론적 기반을 근원에서부터 뒤흔들어놓음으로서, 계율종교의 정당성 자체를 와해시킬 위험을 가져왔던 존재였다. 더구나 기적 행위는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는 일상화된 이스라엘적, 특히 유대주의적 규율체계에 대해 사람들이 의문을 품도록 하는 데 더 없이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는 점을 유의하자.

이상에서 본 것처럼 예수의 기적 사건에서 우리는 예수운동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 권력, 지배를 정당화하고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권력, 심지어는 그러한 코드화가 허용하는 욕망의 선을 따라 쾌락을 느끼고 결국 그 권력에 순응하게끔 하는 권력을 근원적으로 의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전능자 하느님이 타자로서 온갖 것을 감시한다는 계율종교적 율법관을 문제시하였다. 나아가 최초의 예수운동가들은 오히려 그가 인간이 된 하느님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이른바 육화/성육신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담론은 전능자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유한자가 되었다는 것을 강변한다. 그는 세상의 사건 속에 참여하고, 그 속에서 지배 권력의 폭력 앞에 죽임당한 존재였다. 이 모든 것은 지배 권력에 의해 배제당하고 박탈당한 자 위에 군림하기보다는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존재로서, 감시자가 아니라 친구이자 대화 파트너로서 신의 정체성 재구성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름의 신앙은 (신에 대한, 아니 권력에 대한 순종의 삶에로 부르는 게 아니라) 순종 메커니즘의 권력에 대한 저항의 삶에로 우리를 초대한다.

바울은 예수와 많은 것을 공유한다. 그 점에서 바울은 예수를 계승했다. 한데 바울은 예수보다 더 구체적으로 내면의 메커니즘을 들추어냈다. 그는 예수를 넘어섰고 예수의 문제의식을 더 심오하게 신학화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의 신학화는 예수로부터의 후퇴를 수반했다. 그것은 예수의 급진주의를 철회하고 타협시킨 결과다. 그는 예수가 했던 계율종교에 대한 전면적 비판으로 나아가기보다는 계율종교의 매트릭스 안에서 논쟁했다.

오늘 우리는 훨씬 더 세밀해진 규율체제의 망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규율체계는 심각성이 한계에 달한 사회적 격차를 정당화하는 지배의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을 문제제기하는 신앙을 상상하기 위해 우리는 바울을 다시 읽는다. 그러나 교회가 해석해온 바울은 오히려 그런 문제를 공유하고 있고, 더 지체된 방식으로 관철시키고 있다. 그것은 교회에 의한 바울의 오독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 오독의 실마리를 바울 자신이 제공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여 우리는 바울을 다시 읽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다. 나는 이 책에서 그것을 교회와 주류 신학들이 보여준 바울과는 다른 낯선 바울이라고 말했고, 그것을 민중신학적 바울 읽기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 낯선 읽기의 준거는 예수의 급진주의이다. 하여 바울 다시 읽기는 바울에게서 예수의 급진주의를 찾아보는 데 있다


  1. 이렇게 세 가지 패러다임으로 나눈 것은 독일의 신학자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의 유형화에 따른 것이다. 도로테 죌레,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한국신학연구소, 1993) 참조. [본문으로]
  2. 여기에는 현대의 시오니즘이 역투영된 역사 만들기가 개입되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본문으로]
  3. 자연기적이나 소생기적은 실제로 일어났던 기적 사건에 초점이 있기보다는 주로 예수의 위대성을 후술하는 맥락에 강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