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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폭력의 역사와 희생양

문부식 선생이 자신의 저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삼인, 2002)에 수록된 글 <폭력과 신기루 - 그 날 그 곳에는 죄 지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은 '부산 동의대 사건'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결정하기로 한 것에 대한 유감스러움을 표현한 글입니다.  그 논의 과정에서 사건의 주체나 심의위원회는 폭력에 대한 성찰이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사건을 둘러싼 민주화 담론에는 폭력과 고통, 그리고 인간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다는 얘기인 셈입니다.
그의 도발적인 문제제기 이후 그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고, 또 일각에서는 그를 지지하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이에 한국산업사회학회가 주최한 제5회 비판사회학대회는 이 문제를 한 분과('국가 파시즘과 우리 안의 파시즘' 분과)로 하여 논쟁을 공론화하였는데, 이광일, 김진석,조희연, 조정환, 그리고 내가 발제를 맡았고, 일본의 경제학자인 이정화 선생 등이 논평자로 참여했습니다. 
[황해문화] 37(2002 겨울)은 이를 '문부식 논쟁의 재성찰'이라는 특집으로 묶어냈고, 문학평론가 공임순의 참관기를 실었습니다. 아래에 첨부한 나의 글도 여기에 포함된 것입니다.    

폭력의 역사와 희생양_황해문화(2002겨울)를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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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역사와 희생양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 그리고 예수

 

아우구스투스가 스페인과 갈리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 땅을 유린하고 수많은 토착민을 학살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로마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강요된 복속을 받아들이게 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 평화(Pax Augusta) 재단설립을 명령했다. 이렇게 시작된 로마의 평화(Pax Romana) 개념은 로마 제국이 건장하게 지속되는 한, 로마의 지배이데올로기이자 국제법의 준거며 규범의 원리였다. 그것은 로마 제국 시대를 꿰뚫는, ‘전쟁과 로마의 승리, 그리고 평화를 잇는 로마 중심주의적 사상이었다. 네로 시대의 은화는 바로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네로 자신이 (승리의) 개선문 앞에서 마차를 타고 서 있으며, 그 좌우에는 평화의 여신과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네로와 나란히 서 있다. 그리고 평화의 여신 옆, 개선문의 왼편에는 전쟁의 신(Mars)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로마의 평화는 정복자 및 그들의 협력자들(collaborators)[각주:1]의 시선이었다. 정복당한 이들에게 로마는 결코 평화의 사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희생자에게 무자비하게 가해지는 폭력으로 점철된 평화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금화에 새겨진 그림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의 왼편 어깨에는 승전 메달이 달려 있고, 그 오른손은 묶인 포로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있으며 그의 왼발은 이들을 짓밟고 있다. 로마의 평화는 바로 이와 같은 희생자의 피로 구축된 평화, 자기 중심적인 파괴적 평화였다.

오늘날 미국의 평화’, 곧 미국에 의해 유지되는 세계 질서 체계가 바로 그런 것 아닌가? 그들은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의 존립 방식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논리에 의하면 그것은 미국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지속시키는 첩경이고, 안전한 경제 활동을 위한 최선의 토대라고 한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전 세계인들을 위한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얘기다.

한데 사실은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잘 안다. 이른바 반미라는 정치 구호는 세계를 요동시키고 있다. 왜냐면, 미국은 세계 최고의 무기수출국이며, 동시에 최고의 전쟁 보급 국가임이 이미 만방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세계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불량국가악의 축이니 하며 몇몇 희생양을 규정해놓고 그들을 향한 폭력에 전 세계를 동원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전쟁 행위이자 팍스 아메리카나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지를 이미 웬만한 사람들이면 대체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네 교회들은 그러한 국제정치적 상식을 모르고 있다. 아무튼 팍스 아메리카나는 그 태생부터 로마의 평화처럼 희생양이 없으면 불가능한 평화이며, 자국 중심적인 파괴적 평화에 불과하다.

한데 로마의 평화미국의 평화는 수많은 종속적 국가들 사이에서 그 엘리트들에 의해 높이 칭송되던 세계 이데올로기이다. 로마 지배하에서, 혹은 미국적 세계 체제 하에서 이룩된 평화로 말미암아 전 세계적으로 안정된 정치와 경제 활동이 가능해졌고, 살육전이 멈췄으며, 점차 사람들에게 더욱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을 표현하는 숱한 공식문서들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종속국 엘리트들이 그 파괴적 본질을 알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공식적 발언은 이와 같은 칭송 일변도였다는 것이다. 물론 로마인들에게, 그리고 미국인들에게 그러한 국제 평화 논리는 메시아 담론으로 이해되었다. 마치 헐리웃 영화에서 미국이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심초사하는 존재로서 묘사되듯이, 로마인이나 미국인은 역사를 더욱 정의롭고 평화롭게 이끌어내리라는 메시아적 구원의 담론이 자기들의 내적인 능력을 통해 실현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물론 로마제국 당시나 오늘날, 반로마 혹은 반미의 구호는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때로 그러한 세계 체제를 위협할 만큼 강력한 도전 연합을 구축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팍스 아메리카나의 논리는 오랜 동안 굳건한 지배사상이었다. 한데 1980년대를 거치면서 그 평화의 허구성과 파괴성이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고, 오늘날에 와서는 퍽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반미와 평화주의는 매우 어울리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의 최후의 종속 사회인 우리에게도 미국 중심의 세계의 폭력성 문화가 비판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데 과연 그런가? 우리 역사에서 이처럼 반미, 평화 구축 구호가 대중화되던 때에, 과연 우리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공격적인 파괴성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반미라는 우리의 정치적 구호는 과연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논리와는 다른 평화주의와 결합되어 있는가? 아니, 그보다 좀더 근원적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제도는 과연 희생양 체제가 아닌가?

예수는 여자에게 음욕 품는 이는 이미 간음한 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자를 향한 성적 폭력으로부터 무죄함을 자부할 만한 남자란 도대체 존재하는가? 제도를 넘어서 우리의 내면에 이미 희생양을 향한 가학성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닌가?

다시 정리해보자. 우리의 반미 인식, 미국적 평화의 파괴적 허구성을 공격하고, 우리의 진정한 독립, 진정한 해방을 주장하는 정치적 문제의식은 과연 진정한 반미주의를 내포하고 있는가? 우리의 반미 구호 속에는 알게 모르게 미국적 평화에 동화된 자기 중심적 평화라는, 그 파괴적 공격성 문화의 잔인한 숨결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사회 속에, 심지어는 우리 내면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평화를 논하려면, 미국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우리의 반미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까지 비판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로마적 평화나 미국적 평화의 공통된 본질은 자기 중심주의라고 본다. 즉 승자 중심적 평화주의에 그 허구성의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희생자의 하소연 소리를 은폐한 평화이며, 그리하여 희생자의 시선에서 평화를 물을 수 없게 하는 평화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의 카인과 그 후예들이 실현하고 싶었던 메시아주의였는지도 모른다. 세계의 패권주의자들의 욕망은 이처럼 성서 속에 나타난 카인의 후예의 역사와 병행을 이룬다. 그런데 성서는 카인의 시선이 아니라 아벨, 곧 희생당한 자의 시선에서 역사를 보고, 역사를 비평한다. 나는 이 글에서 카인과 그 후손의 역사에 관한 성서의 신화를 이러한 관점에서 조망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으로 근대국가체제를 비평하고자 한다. 내 글이 전제하는 것은, 로마적 평화나 미국적 평화는 우리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내부에도 있다는 것이며, 내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우리 안팎을 아우르는 폭력성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폭력의 제도화와 내면화 장치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 카인 그리고 아벨: 폭력의 역사와 신화

 

문헌비평적 연구에 의하면 창세기2~11(아담-하와 이야기에서 바벨탑 이야기까지) 중 설화 부분은 동일한 편자의 작품이라는 데 널리 합의가 이뤄져 있다. 이 연속된 설화의 편자는 필시 유다 왕국 최초의 고대국가 체제를 구축한 솔로몬 왕대, 혹은 (아직 솔로몬 체제의 영향력이 강고히 지속되고 있던) 그 직후에 활동했던 왕실 사가(史家) 혹은 사가 집단으로 보인다. 요컨대 오경(五經) 여기저기에서 추출될 수 있는 이 편자()의 단편들은 필시 솔로몬 왕실에 바쳐졌던 일종의 민족 서사시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연속된 설화 속에는 왕실 헌정문학답지 않게 날카로운 문명 비판의 시선이 도처에서 엿보인다. 표면상으로는 전례 없는 국가의 번영을 높이 칭송하면서도, 냉소적인 문제의식을 은연중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 근대의 문헌비평적 연구에 의해 많은 부분 드러났다. 이것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 글의 주제도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더 많이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창세기2~11장의 골격을 이루는 이 편자의 텍스트의 맥락에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문명 비판의 시선으로 읽고자 한다. 나는 이를 문화의 폭력성에 관한 논의의 준거로 삼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문학비평가이자 문명비평가인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어떤 성서학자들보다 명쾌한 해석의 시각을 보여주었다. 그는 성서가 말하는 최초의 형제 살해라는 연대기적 진술을 인류 문화에 널리 퍼져 있는 동료 살해 욕망에 대한 전형으로 읽는다. 이것은 이 텍스트를 폭력과 희생의 문명사적 시선에서 보는 안목을 제공해 준다. 나는 여기서 지라르의 착상을 민중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카인-아벨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문화의 폭력성에 관한 민중신학적 비평을 제안하는 성서적 준거로 삼고자 한다.

이 연속된 설화의 맥락에서 카인(그리고 카인의 후예들은)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그에 대한 욕망을 혼돈하고 있다. 인간의 죄성이 하느님을 향한 모방 욕망에 원형을 두고 있다는 것은, 이 편자의 창세기2~11장의 연속된 설화에서 일관된 주제다.[각주:2] 그런데 모방자는 항상 딜레마에 봉착하는데, 그것은 신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가시성 내에 있는 중개물/중개자가 필요했다. 아담에게서 에덴 동산 중앙의 나무들과, 바벨탑을 쌓은 이들에게서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치솟은 탑이 그랬던 것처럼, 카인에게서는 동생 아벨이 중개자였다.

그의 아버지 아담은 동산 중앙의 금단의 열매 중 하나를 따먹는다. 그는 이 금단의 열매를, 생명을 주는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로 이해한다. 결국 생명과 선악 분별지는 아담의 시선에서 가시화된 신성(神性)이었다. 아담은 이것을 먹어치움으로써 신의 생명력과 지혜를 전유하려 한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이 설화에 (적인 것)의 독점 욕망이라고 하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가한 바 있다. 즉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전취하려는 데서 인간 죄의 원형을 읽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 동산의 모든 것들과의 긴장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그가 놓이게 되었다. 과거에 그는 모든 것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은 그와 대상물 사이에서 형성된 의미를 상징한다. 모든 것은 그의 경험 안에 존재하며, 그의 몸의 일부였다. 아픔도, 기쁨도, 슬픔도, ...,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자신의 몸 자체였다. 김수영이 내 몸이 아프다// ...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먼곳에서부터)고 노래할 때 주위의 모든 것을 몸의 일부로서 간직하려는 시인의 이 애틋한 감수성 속에는 바로 아담의 몸의 상실해버린 기억이 되새겨지고 있다. 그런데 그가 욕망했던 선악 분별지는, 그것을 자신이 독점하게 되자마자, 주변의 모든 것 하나하나를 대상화하고 차등화하는 언어가 되어버렸다. 더 선한 것, 선한 것, 덜 선한 것, 덜 악한 것, 악한 , 더 악한 것 등. 이렇게 해서 아담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차등적으로 대상화되었으며 또 타자화되었.

아담에게서 파괴된 관계, 고립된 자아는 그의 헛된 욕망의 결과였지만, 카인에게서 그것은 존재의 생득적 조건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아담 이야기는 카인의 존재 조건의 기원을 말해주는 신화다. 그런데 카인도 신을 욕망한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고립된 자아로서 주변과 관계를 맺는다. 흥미롭게도 카인이 맞이한 주변은 아벨’, 곧 그의 혈육이었다. 짓궂게도 이 텍스트는 파괴된 존재, 고립된 존재가 느끼는 경쟁 대상을 동생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신에게 드리는 제사에서 신이 동생을 편애하고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의식, 그것은 경쟁에서의 승리에 몰두한 자의 불가피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승부에 집착하면 할수록 동생은 항상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의 욕망은 좌절하고 그는 실패자로 남는다.

경쟁에서 실패한 존재, 그는 자신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택한다. 바로 그것이 형제 살해로 귀결되는 폭력이었음은 잘 알려진 대로다. 라캉(J. Lacan)은 인간이 타자에 대한 공격성을 지니게 되는 것은 자기가 자신을 소외시킨 결과라고 말한다.[각주:3] 창세기의 이 텍스트는 외형상 마치 하느님에 의해 소외당한 카인의 시기심이 폭력의 원인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떤 토호나 이방의 제왕보다도 더욱 웅대한 제의의 주관자가 되려는 데 몰두한 나머지 예전(禮典)의 의미보다는 외형에만 치중하는 솔로몬 왕실의 종교 관행에 대한 편자()의 문제의식이 신화 속의 인물 카인에게 투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외형주의는 결국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고 경쟁자에 대한 공격성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뜻이겠다.

신을, 그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는 존재를 독점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이제 형제, 즉 가장 가까운 존재를 경쟁자로 여기는 신경증적 증세에 빠진 나머지 폭력과 살해를 저지르게 된다. 그런데 성서 텍스트는 이 범죄의 대가로 카인이 떠돌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이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 앞에 노출되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생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여 살해하자, ‘자기이외의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공격할 것이라는 강박증은, 라캉에 의하면, 근원적으로 나르시시즘적이다. 자아와 타자를 구별하고, 모든 것을 자기와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냐에 따라 친근감과 적개심을 단적으로 차별화하는 자기애적 의식이다. 이것은 동일성에 대한 병적인 집착으로 이어진다.

카인은 이제 생존을 위한 일상적인 위험 상태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폭력적이어야 하고, 폭력적이기에 더욱 일상적인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폭력의 악순환, 이것은 카인의 세계가 구조적인 위험을 내포하는 사회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카인은 동일성에 집착하는 존재의 전형이다.

흥미롭게도 이어지는 성서 텍스트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추방당한 카인의 후예에게서 목축이 시작되었고, 금속 문명이 발전했으며, 또 악기에 의한 음악 문화가 펼쳐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육식 문화, 전쟁과 장신구, 예술 등. 이것은 국가의 등장을 상징한다. 즉 카인의 후예의 역사는 국가의 역사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이 성서 본문은 국가가 형제 살해의 비극적 폭력을 통해 발원했다는 것이다. 지라르는 로마 도시국가의 탄생 신화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의 갈등 및 형제 살해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성서도 형제 살해의 이야기에서 국가 창건의 이미지를 투사하고 있다고 한다. 살인 폭력은 사회 창건의 특성을 갖는다는 주장이다. 이 텍스트의 편자가 솔로몬 왕정의 사관()이었다면, 이때 창건되는 국가는 다윗-솔로몬의 왕국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폭력의 승자에 의해 문명이 발전하고 역사가 기술되었음은 역설적이게도 인류가 역사를 통해 얻게 된 교훈이다. 그것은 죽임을 통해 시작된 문화이고, 시신을 양분 삼아 건설되었으며,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상호적인 구조화된 폭력에 의해 형성된 위기의 체계이고, 그리하여 계속된 폭력과 살해에 의해 재생산되는 역사다. 다름 아닌 카인의 후예들이 만들어내는 세계인 것이다. 이와 같이 폭력과 살해로 점철된 역사, 민중신학은 카인의 후예에 의해 구축되는 이러한 역사에서 죽임의 문화를 보았다. 죽임의 문화로 구축된 국가는 형제 살해 신화가 담지하는 승리자의 시선으로 역사를 보고자 한다. 그 살해는 불가피한 폭력이었다고, 살해자는 정당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그런데 적어도 창세기의 이 텍스트 편자는 결코 카인의 시선에서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신은 오히려 카인을 정죄한다. 죽임당해 광야 속에 묻혀 버린 아벨의 죽은 몸뚱어리가 절규하는 소리, 그 강제된 침묵의 소리를,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그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편자는 폭력의 가해자가 주변의 온갖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왕실에서 생생하게 목격하였을 것이다. 적과 우리의 이분법, 적에 대한 끝없는 공격성, 그리고 우리의 점점 심화되는 가학성의 히스테리 등. 거기에서 그()는 카인의 후예들의 국가 창건 신화의 초점을 역사의 승자인 카인이 아닌, 희생자 아벨의 시선에서 기술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성서 텍스트는 희생자의 시선을 입론 삼아 세계를 읽고 있다는 것이다.

 

아담-카인 신화의 현재화, 폭력의 제도화와 내재화

 

위에서 나는 아담과 카인을 잇는 창세기의 신화는 공적인 것의 독점 욕망과 구조화된 폭력의 상호성을 희생자의 시선에서 국가 체제의 위기로 읽는 문명비판의 언어임을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가해자의 시선으로 볼 때는 국가 발전을 위한 필요악으로서의 희생일 뿐이고, ‘대를 위한 소의 희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편자의 위기 시각은 역설적이고 문명비판적이다.

한편 아담에서 시작해서 카인을 거쳐, 그들의 후손들로 이어지는 창세기2~11장의 일련의 신화적 이야기는 아담-카인 계보를 잇는 인류의 신 모방 욕망의 정도가 점점 증대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아담에게서 나타난 신성 혹은 진리의 독점을 향한 욕망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앞 절에서 우리는 이러한 독점 욕망이,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어떻게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로 이어졌는지를 보았다. 이것은 두 차원을 갖는다. 나는 이를 편의상 폭력의 제도화폭력의 내재화로 명명하고자 한다.[각주:4] 나는 폭력의 역사가 내포하는 이 두 차원을 근대 사회속에서 살펴봄으로써, 아담-카인 신화를 현재화하고자 한다.

 

(1) 폭력의 제도화

우리가 근대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권력의 수위권자(sovereign power)가 이전 시대에 비해 더 많은, 그리고 더 강한 사회적 통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근대 권력의 수위권자는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근대의 다양한 국가적 기획 혹은 기타 여러 결속체적 기획들 가운데 국민국가는 이러한 기제를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최적화하는 형태의 제도화에 성공함으로써,[각주:5] 폭력의 제도화의 흐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가 되었다. 국가는 폭력을 표출하거나 은폐하는 다양한 수단을 독점 내지는 과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내적이거나 국제적인 근대 사회의 평화 정착은 이러한 폭력의 제도화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국내적이든 국제적이든 평화 정착은 폭력 수단을 성공적으로 독점한 세력, 특히 근대 국민국가의 성공과 맞물려 있다. 마치 혼돈과 무질서, 전쟁과 파괴로 점철된 지중해 세계에 평화가 도래하게 된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제국과 그 위성국에 의한 폭력 수단의 독점/과점에서의 성공[각주:6]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평화 정착의 담론은 국가 안보의 개념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것이 국민국가의 국민 만들기프로젝트의 주된 수단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체주의적인 강압적 감시에서부터 오늘날 스포츠 산업에 이르기까지 국민 동원의 다양한 장치들이 이를 위해 활용된다. 또한 주권, 시민권, 민족주의 등도 개인을 국민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의 일원으로서 호명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국민개병제 또한 국민 총동원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주요 수단의 하나다.

이러한 담론은 우리와 적이라는 이항 대립적 존재론을 전제한다. ‘은 물론 평화를 해치는 자, 곧 안보에 위협이 되는 자를 뜻한다. 이때 안보 개념을 통한 감시는 억압적 통제만이 아니라, 안전을 열망하는 국민의 자발적인 순응을 통해서도 수행된다. 역사적으로 파시즘체제는 국민의 이러한 자발성을 통해 탄생했다. 파시즘 체제는 대중의 배타적인 공격성을 집중시킬 표적을 제공함으로써 국민적 총동원에 성공한다. 그리하여 희생양이 만들어진다. 국가는 대중에게 희생양을 향해 폭력을 한껏 휘두를 무대를 제공해 줌으로써, 사회적 통합을 실현하며 국민 총동원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물리적 폭력이 보다 이완된 사회에서도 희생양은 시민권 내지는 주권의 공백지대에 배치됨으로써, 사회적 분노를 투사시키는 표적으로 이용된다. 요컨대 전이된 폭력의 표적인 희생양은 국민국가의 감시 장치의 유용한 수단인 것이다.

한편, 희생양은 국제적 평화 정착의 담론에도 등장한다. 최근 미국이 규정한 악의 축은 팍스-아메리카나 이데올로기와 지구적 군수자본을 위한 희생양 만들기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들 희생양을 향한 응징을 정당화하는 거룩한 전쟁이데올로기는 지구적 패권주의 세력의 안보 담론이다.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지구화 추세는 이러한 폭력의 제도화를 통한 전지구적 통합을 강화하고 있다.

 

(2) 폭력의 내재화

지라르는 인류 사회의 주체할 수 없는 구조화된 상호 폭력성을, 한 대상을 향해 대리 표출함으로써 순화시키는 사회적 장치인 희생 제의가 동서고금을 통해 보편적으로 작동하여 왔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희생양을 향한 폭력만이 정상적이고 성스러운 폭력이라는 담론을 유포시킴으로써, 현존 체제를 유지재생산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논점의 하나는 희생제의는 상호폭력의 위험을 감소시키기는 했을지언정, 폭력성 자체를 감소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히려 폭력성을 내재화하는 기재였다는 것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설계한 원형투시감옥 파놉티콘(πανοπτικον)을 통해 그러한 폭력의 제도적 장치가 인간 존재에게 어떻게 폭력성의 문화를 내재화시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파놉티콘에서 간수와 죄수는 감시자와 피감시자의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간수의 감시의 시선은 죄수에게는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이는 절대타자의 보이지 않는 눈에 의해 감시당한다는 생각에 죄수가 간수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이제 체벌이 없어도 죄수는 스스로를 간수의 시각에서 규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푸코가 읽은 파놉티콘 개념은 라삐적 유대교의 율법론이나 이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번안 개념인 죄론과 유사하다. 즉 감시자 대 피감시자의 관계는 신 대 인간의 관계와 등가적이다. 그러나 근대 사회는 이성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즉 근대인은 근대라는 파놉티콘에 갇힌 죄수로서, 절대타자인 이성적 감시자의 시선에서 스스로를 규율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감시에 의한 규율은 단지 피동적 현상만은 아니다. 푸코의 후기 작업에서 나타나는 통치성(govermentality) 개념은 이러한 감시 장치에 의해 개인이 자발적으로 사회 체제에 순응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문제틀이다. 즉 근대의 이성적 감시자의 시선이 일상 속에서 개개인의 몸에 각인된다는 것이다.

제도적 폭력이 개개인의 몸에 각인됨으로써 사람들은 폭력성을 존재의 속성으로 담지하게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P. Bourdieu)상징 폭력(symbolic violence)은 바로 이러한 폭력의 내면화 메커니즘을 가리킨다. 상징 폭력에 의해 사회의 지배-예속 관계의 폭력성은 은폐되고 체제는 재생산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그 폭력 관계, 그 불평등성을 인지하지 못해야 한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처럼, 제도적인 폭력의 육체화를 설명하는 상징 폭력론도 오인 과정을 통해 효과적으로 작동되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주체는 지배 체제의 불평등성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로 인한 공허와 좌절감, 나아가 적대감을 다른 누군가에게 투사함으로써 폭력적인 존재가 된다. 이마무라 히토시(今村仁司)는 그러한 근대적 이성주의의 잔인한 폭력성을 비이성 또는 비인간에 대한 식인주의'(cannibalism)로서 묘사한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의 야만성은 국가 같은 신체 외부의 제도의 속성만은 아니다. 사실은 근대인의 몸에 체현된 속성이기도 하다. 요컨대 근대적 희생제의는 일상 속에서 날마다 매 순간마다 벌어진다. 또한 폭력은 바리케이드 저편에서만 자행되는, 자기 자신은 연루되지 않은 추잡한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몸속에 이미 각인된, 그리고 이러저러하게 자기 자신이 연루된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최근 이근은 9.11 테러에 대한 미국의 희생양 전략이 지구화의 흐름 속에서 미국 정부와 시민사회가 처한 불확실성의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이 견해의 주된 강조점의 하나는 시민사회가 국가의 권력 독점을 견제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데 공조하였고, 이로써 선-악 이분법에 기초한 강한 국가 기획이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에 의해 주도되는 폭력적인 희생양 전략은 국제적으로 반테러 전쟁으로 표현되었고, 국내적으로는 일명 패이트리어트 법이라는 반테러 법에 의한 반인권적 감시 통제의 정치로 드러났다.

더 나아가 푸코와 이마무라는 시민사회를 권력이 생산되는 장이라고 봄으로써, 국가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는 민주주의적 무대라기보다는 오히려 국가와 더불어 희생양을 향한 폭력성이 조장되는 무대라고 보았다. 시민사회와 국가는 종범-주범의 관계가 아니라 공범관계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희생양의 침묵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무의식적 공모와 무관하지 않다. 푸코의 파놉티콘을 다른 말로 하면, 희생양의 하소연하는 언어를 사회가 비언어로만 기억하는 방법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체득하게 함으로써 실현된 사회적 규율 장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희생양에게 사회적 언어를 앗아감으로써 희생양의 침묵은 실현된 것이라는 얘기다. 페미니스트 이론가 캐서린 벨시(Catherine Belsey)는 사람들이 희생양의 언어를 비언어로 느끼면서 체득하는 현실 인식을 일컬어 인상적 사실주의라고 명명한다. 그것은 결코 사실 인식이 아닌, 인상주의적 순간 포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허구적 인식을 사실로 여기게 하는 장치로서 법뿐 아니라 관습이나 습관 등에도 주목한다.

그런데 이성이라는 내면화된 감시자의 시선은, 그것이 비록 인상적 사실주의를 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이고 일관된 것처럼 행세한다. 객관적 진리가 있다는 가정을 기정사실화하는 발견의 존재론이 바로 감시자의 자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이미지의 즉흥성을 주요 자원으로 발전시킨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자원 관리 방식과 충돌을 일으킨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감시자의 시선이라는 타율적 통제의 기재보다는 유혹당하는 욕망이라는 자율적 통제의 기재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게 된다. 그것은 보편적 개인, 집단적 개인이라는 주체보다는, 분열적 주체, 순간의 틈에서 욕망하는 주체가 강화되기 때문이다.[각주:7]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순간의 틈에서 욕망하는 주체란, 자율적인 주체이지만, 동시에 후기 자본주의적 구성 문법 아래서 구성된, 또 하나의 피동적 주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푸코는 파시즘을 국가 체제에 대한 규정에서 내면의 규정으로까지 확대해서 읽는다. 내면의 파시즘은 일상 속에서 작동하는 배제와 차별의 메커니즘으로, 자신의 존재 안팎에서 비이성에 대해 폭력적인 공격의 태도를 야기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당하는 예수 설화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악마는 예수를 유혹하면서 세상의 권력과 부를 주겠다고 한다. 한데 악마의 유혹이 통렬한 것은 이 권력과 부가 로마와 헤로데의 나라에 대한 대안적 지평인 하느님 나라 운동을 위해 예수에게 유용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권력과 재화, 그리고 모든 것을 살릴 수 있다는 자부심을 선사하겠다는 얘기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오늘날의 폭력의 미학화[각주:8]에 대해 날카로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유혹은 욕망하는 개체적 주체의 즐거움의 체험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구원론과 결착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내면의 파시즘 주장은 지배적이든 대항적이든, ‘행복의 사도들에 의한 모든 메시아주의를 문제시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폭력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전가된 폭력의 대상으로 희생양이 생산되는 폭력의 제도화 과정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전가된 폭력이 시민사회 속에 심지어는 개체의 몸속에 내면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은 국가나 자본 혹은 지구화된 제국 등 권력의 수위권자 중심의 제도에서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몸에도 카인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으며, 아벨의 강요된 침묵의 소리를 복원해야할 공간이 이 중 어느 하나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희생양의 고통을 이야기하기’,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나는 위에서 최근 문부식에 의해 제기된 폭력에 관한 논의,[각주:9] 그가 별로 선호하지 않는 방식인 이론적 배경을 채워넣음으로써 보충하고자 했다. 그것은 그의 문제제기가 너무 시사토론에만 그친 감이 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왜냐면 시사적 토론은 우리를 종종 너무 흥분하게 하기도 하고, 또 감추어진 것을 읽어낼 시간적 여유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그의 글의 가장 큰 미덕은, 우리가 폭력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조차 간과하곤 하는 아벨의 목소리를 되살리려 한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몸에 각인된 폭력의 내면화를 고발한다. 시대의 위기를 읽고 진단하는 데서 희생자의 고통을 생략하는 것은 우리와 체제의 공모지점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흔히 오해되듯이 그가 폭력의 내면화를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폭력의 제도화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논란이 된 자신의 책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대부분에서 폭력의 제도화를 추동하는 중심 권력인 국가가 자행한 폭력에 지나치리만큼 과민 반응하고 있다. 그리고 앞의 논의에서 시사되었듯이 폭력의 내면화는 제도화 과정과 분리할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다.

그의 기억 창고는 우리 역사의 폭력의 광풍에 산산이 부서진 잔해 더미로 채워져 있다. 물론 우리 모두가 그렇지만, 그는 더욱 심각하게 폐허가 된 기억의 날카로운 편린들로 인한 고통에 시달려온 사람의 하나인 게다. 바로 그렇기에 그의 글은 희생양의 고통과 더욱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의 내면 깊숙이 박혀 있는 고통과의 만남이며, 동시에 그러한 기억을 통한 희생양과의 동일시 과정인 것이다.

신이 인간이 됐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수없이 살해된 아벨의 신음소리를 마주하면서 생겨난 신의 고통의 표현이며 동시에 그 아벨과의 만남을 갈구하는 낮아짐의 동일시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문부식의 글은 어떤 비판자들이 비아냥대면서 언급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신학적이다. 동시에 고통이 희석화된 추상적 존재에 관한 논변으로 일관해 온 그리스도교 신학, 나아가 아픔의 기억을 대상화시켜버린, 그리하여 희생자에 대한 기억을 경유하지 않고도 역사의 고난을 기술해온 근대적 학문의 차가움에 대한 근원적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지성사 전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던진 의제가 시사적 논의를 넘어서 우리에게 좀더 깊이 성찰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논의는 보완되어야 한다. 봉쇄되어온 고통을 말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또한 그것이 자신의 기억에 함몰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봉쇄된 말을 터뜨리는 것이 독백이 아니라 대화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수자간의 만남, 대화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민중신학의 어법인 민중의 두 차원에 관해 이야기함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민중신학은 민중에 대해서 고난의 담지자의 차원, 즉 희생자의 차원과, 그리고 역사/변혁 주체의 차원을 두고 깊은 고민을 해 왔다. 그것은 양자 사이의 긴장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텍스트들은 후자를 보다 강조하면서, 과제 중심적 공동체로서의 에클레시아(교회)를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교회를 예수의 몸이라고 규정한다.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제도를 구축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한데 조금 후대에 형성발전한, 요한복음에 반영된 예수 운동 집단은 이러한 제도화 운동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오히려 반제도주의적, 탈교회적 공동체로서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강조한다. 이 텍스트는 그러한 해체적 지향을 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바울의 몸의 정치와 요한의 영의 정치는 초기 예수 운동의 두 모순적 운동을 대변한다. 양자는 결코 화합할 수 없다. 전자의 시선에서 후자를 통합하려 했던 주류 교회는 급속히 지배체제로 전락해버렸고, 희생자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신학을 구축했다. 하지만 요한의 텍스트는 바울의 텍스트가 없으면 공허하다. 즉 영의 정치, 해체의 정치, 차이의 정치는 몸의 정치, 제도의 정치, 연대의 정치를 전제하면서 그것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자는 서로를 배제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필요로 한다. 󰡖

  1. ‘협력 이론’은 제국주의의 팽창과 주변부 국가의 종속을 설명하기 위해 최근에 제출된 개념이다. 요약의 위험성을 고려하더라도 간략히 말하면, 어떠한 제국주의적 지배도 종속국 협력자들의 자발성이 없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아가 일상 속에서 작동하는 ‘협력의 문화’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대되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에 의하면 종속국 대중은 대부분 제국주의의 협력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신을 모방하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신과 같아지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대국가 군주들의 신관이며, 또한 다윗-솔로몬 왕조가 추구하는 신 이해인 것이다. [본문으로]
  3. 이러한 공격성의 원인이 근대적인 성의 억압 탓이라는 그의 연결되는 논의와 분리시켜 이해한다면 말이다. [본문으로]
  4. 이는 엄밀한 개념화가 아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이렇게 명명하겠다. [본문으로]
  5. 여기에는 의사소통 수단이나 감시 기제의 발전이 기반이 되었다. [본문으로]
  6. 이것을, 고대로마의 이데올로그들은 ‘팍스-로마나’Pax-Romana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7. 근대 국민국가에 의한 ‘감시’ 장치의 발전은 강압적인 것에서 자발적 것으로의 대중 동원 방식의 이행을 야기했다. 하지만 지구화 시대에 이르면서, 감성적 자원의 상품적 가치가 급상승함에 따라 일관된 기준에 따른 규율을 강조하는 감시의 장치보다는 순간적 취향을 강조하는 ‘유혹’의 장치가 더욱 동원의 유용한 수단이 되고 있다. 월드컵은 전지구적으로 대중을 각개 국민국가의 국민이자 자본의 충실한 소비자로서 유혹하는 가장 성공적인 국제적 이벤트의 하나다. 이때 동원된 국민은 국가적 상징에 호명되지만, 온몸 곳곳에, 심지어는 국가주의나 종교 같은 정신적 취향까지도 갖가지 상품화된 것들로 치장하고 있다. 감시가 진지한 자기 통제의 메커니즘이라면, 유혹은 가벼운 웃음을 통해 통제를 실현하는 장치이다. 그 웃음 속에서 대중은 희생양을 만들어내며, 나아가 그들의 하소연 소리를 망각하게 된다. 결국 이제 제도화된 폭력성은 유혹당하는 욕망에 의해 은폐되고 정당화된다. [본문으로]
  8. 그것이 국가든 자본이든, 혹은 미시적이거나 거시적인 다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본문으로]
  9. 문부식,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생각함󰡕 (삼인, 2002). 이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우리 지식사회에는 적지 않은 파장이 있었다. 이른바 ‘문부식 논쟁’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논쟁과는 별개로, 이 책은, 내가 보기엔, 그 자체로 신학적이다. 인간 사회의 본원적 폭력성과 그것을 의식․무의식적으로 묵인하면서 그러한 체제의 논리 속에 기생해온 우리 역사와 일상에 대한 한 권의 예언자적 고발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것을 ‘신학자가 쓰지 않은 신학 서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폭력성 문화에 의한 희생양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민중신학자가가 쓰지 않은 민중신학 저술’이라고 나는 본다. 그러므로 이 글은 문부식의 논의를 받아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완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