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1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간 열린 PTCA(Pregrame for Theology and Culture in Asia) Consultation(방콕)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이 컨설테이션의 주제는 'Retrospect and Prospect of Doing Theology in Asia'이고, 인도, 대만, 홍콩,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타일랜드, 뉴질랜드 등에서 20여명의 연구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총 13편의 글이 발표되었고, 나와 이숙진 선생이 공동집필한 원고 'A Retrospect and Prospect on the Korean Modernity and Minjung Theology'는 마지막날 끝에서 두번째 순서로 발표되었습니다. 이날 통역은 강남순 교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이 글은 이듬해에 Retrospect and Prospect of Doing Theology in Asiaedited by: Simon S. M. Kwan <
‘한국의 근대’와 민중신학, 회고와 전망_pt.pdf
A Retrospect and Prospect on the Korean Modernity and Minju.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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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와 민중신학, 회고와 전망
도입
민중신학은 한국적 신학의 하나로,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야기된 위기에 비판적으로 개입하여 왔다. 1960,70년대 본격화되기 시작한 한국 근대화는 한국의 대중에게 전례 없는 비약적 발전이라는 실과를 선사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맹독성 체제에 ‘자발적으로’ 순응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회나 신학은 이러한 한국의 심화된 위기구조를 자양분 삼아 비약적인 선교적 성공을 이룩했다. 하지만 근대화로 인한 고통을 외면하거나 타계적 지향으로 대체함으로써 위기에 개입할 지점을 상실했다. 민중신학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출발한 한국적 신학의 하나인 것이다. 즉 민중신학이 제기하는 신학 담론은 한국의 지정학적 상황 속에 노정된 근대성의 위기구조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그런 맥락에서 서구신학에 대해 새로운 한국적 ‘신학하기’의 전범이 되고자 한 것이다.
‘어떤 신학 담론을 제기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신학의 학술사적 맥락 속에 그 주장이 들어갈 위치를 찾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또는 아시아에서 ‘신학을 하는 것’이 갖는 가장 치명적인 난점은 신학 학술사 속에 맥락화(contextualization)하는 일이 곧 자신의 지정학적 상황으로부터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되는 것이라는 점에 있다.
일찍이 민중신학의 제1세대를 대표하는 서남동은 한국에서 신학하는 것의 과제를 ‘반신학’(counter theology)으로 명명한 바 있다. 1 요컨대 반신학의 기획으로 민중신학을 한다는 것은 (서구)신학사로부터 신학을 탈맥락화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사회 역사적 실재 속으로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민중신학을 회고/전망하는 작업은 (위기구조로서의) 한국의 사회-역사적 맥락, 나아가 (위기 담론으로서의) 그것에 대한 담론과 민중신학이 어떻게 연관‘되어 왔는지/될 것인지’를 추적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의 사회-역사적 맥락을 ‘한국의 근대’라는 용어로 개념화할 것이다. 아시아에서 ‘근대’는 ‘탈전통’과 ‘탈서구’라는 이중의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2 여기서 후자의 요소가 아시아에서 근대 담론의 순조로운 진행의 장애요소이기도 했다는 점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왜냐면, 근대는 서양의 역사-사회적, 문화적 산물인데, 그것을 추구하는 아시아는 동시에 ‘탈서구’를 근대 담론 속에 내포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은 이 점에서 훨씬 단순한 근대의 담론화가 가능했다. 왜냐면 한국인에게서 서구는 경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선망의 대상이자 모방(modeling/imitation)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때 대다수 아시아 사회들에서 ‘서구’가 함축하고 있는 근대성 담론의 난점이 한국에서는 ‘일본’에로 전이된다. 즉 한국인에게서 일본은 기본적으로 경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한국의 근대화가 일본을 모방함으로써 서구 모방을 실현해왔다는 점이다. 즉 한국의 근대 담론에서 일본은 경원의 대상일 뿐 아니라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후자의 의미로서의 일본은 조선을 식민화한 제국주의 세력이 아니라 ‘의사서구’(quasi-West)로서 재현된다.
이렇게 서구가 경원의 대상이 아니라 모방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한국에서 그리스도교 담론의 확대가 근대 담론의 확대와 밀접히 연관되는 내적 토양이 되었다. 우리는 민중신학을, ‘한국 근대화’의 위기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탈신학적(atheological/de-theological) 모색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3 이것은 한국 근대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에서 민중신학은 동시대의 구조화된 ‘위기’를 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한국 근대는 ‘고통 구조의 확대재생산 체제’이자 ‘고통의 불균등한 배분 체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교/교회가 이러한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비약적인 양적 팽창에 성공했다는 점은 한국 그리스도교 담론과 근대화 담론의 공조 관계를 시사한다. 따라서 민중신학이 한국 근대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일은 이러한 공조가 담고 있는 ‘고통 구조의 재생산 장치’를 폭로하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한국 근대의 지평에서의 ‘고통의 수사학’(Rhetoric of Sufferings)이자 ‘해방의 수사학’(Rhetoric of Liberation)인 것이다. 이 글에선 이러한 민중신학의 고통과 해방의 수사학이 한국 근대의 전개 과정에 맞물려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두 단계로 나누어 회고할 것이며, 향후 전개 양상에서 어떻게 형성되어야 할 것인지를 전망하고자 한다.
회고
우리는 민중신학을 회고/전망을 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세대론’(generatology)을 사용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사용하는 ‘세대론’은 각 세대의 민중신학이 당대(contemporary)의 위기를 읽는 시각의 차이와 관련된다. 그런데 ‘당대 상황’이라는 것은 자명한 실체가 아니다. 그것 또한 읽혀진 것이며, 당대 위기담론의 시대 읽기의 소산이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의 각 세대는 동시대 비판담론의 당대 읽기와 대화하면서 신학하기를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중신학의 세대론은 신학자들의 간의 세대별 분류가 아니라 신학하는 경향성에 의한 분류인 것이다.
한국의 위기 담론은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성을 세 시대로 나눈다. 4 세세한 분류의 기점은 다소 다르지만 대략 ‘1960~70년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이후’의 세 시대로 한국 근대화가 변별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와 맥을 같이하여 사회문화적이고 정신사적인 양상의 차별화가 노정되었다고 보는 것은 대체로 합의된 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 근대성의 이러한 세 시대적 전개와 상응하는 민중신학의 세 세대를 논하고자 한다. 여기서 마지막 세 번째 민중신학의 경향은 아직 진행 중이며, 또한 문제인식을 다듬어 가는 중에 있으므로 다음 장인 ‘전망’의 틀에 맞추어 논할 것이다. 5
2.1. 1960,70년대와 제1세대 민중신학
1961년 반혁명적 군부 세력이 정권(이하 ‘제1기 군부정권’)을 장악하였다. ‘제1기 군부정권’은 강력한 국가주의적 기획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근대화 프로그램이 기본적으로 (‘의사서구’로서의) 일본을 모방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6 이러한 근대화는 국가주의적 발전동원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가능했다. 7
이러한 체제가 남한에서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제 식민지의 ‘협력의 제도적 장치’가 독립 이후까지 온존했던 탓이다. 식민지 시대 일본은 한반도에 광역에서 협역에 이르는 ‘잘 짜여진’ 지방행정망을 구축하였다. 이것은 단지 행정적 주민통제의 장치만이 아니다. 도시와 시골의 말단 구역까지 전 주민이 식민지 정책에 ‘협력’(collaboration)하게끔 하는 제도적 장치(institutional apparatus)이기도 했다. 8
일제로부터의 독립 이후 3년간 한반도 남부를 분할 통치했던 미군정 당국은, 식민지 시대의 주민 동원 기구를 온존시켰을 뿐 아니라, 일제의 ‘협력자들’을 그대로 중용하였다. 9 이때 협력자들과 군정 당국 사이에서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중계자 노릇을 하였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조건은 후에 한국에서 근대화를 위한 ‘국가주의적 발전동원체제’를 가능하게 했으며, 이것은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한국의 근대성 형성의 핵심 동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 1960년대 집권한 제1기 군부정권은 바로 이러한 협력의 체계를 바탕으로 해서 국가주의적 발전연합을 구축한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발전주의적 지배연합’(developmental ruling coalition)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군부정권이 구사한 주요 이데올로기 전략은 ‘탈빈곤’, ‘반공주의’, 그리고 ‘민족주의’ 등이다. 첫째로 탈빈곤의 담론은 ‘탈전통화’를 동반하였다. 즉 이것은 대중적 종교전통 뿐 아니라 촌락의 정서적이고 영적인 기반을 잠식하였고, 한국 근대화의 도시화 정책에로 촌락민을 손쉽게 흡수할 수 있었다. 둘째, 반공주의는 한국전쟁(1950~53 또는 1945~53)의 기억을 극도의 ‘분노의 정치’(politics of wrath)로 재현함으로써 국민 총동원 체제는 더욱 견고하게 구축되었다. 마지막으로 민족주의는 종족적 특수성(ethnical peculiarity)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강화시키는 데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였다. 이것은 서구의 전통에 따른 일반 민주주의로의 길 대신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사회 이상을 정당화하는 데 유용했다.
탈빈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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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화 |
| 국가주의적 발전동원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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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주의 |
| 분노의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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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
| 종족적 특수성 |
| 한국적 민주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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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국제정치경제학의 시각에서 이 시기 근대화 정책은 한국을 세계자본주의 변동에 따른 국제분업의 재편과정에 적극적으로 편입되게 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11 물론 그것은 중심에 대한 ‘주변부’로의 편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중심에 대한 ‘주변 의식’(peripheral consciousness)과 상응하면서 새로운 식민주의적 담론구조를 낳으며, ‘무의식의 식민화’(unconsciousness colonialization)를 야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12 아무튼 이러한 한국의 발전 프로젝트는 대만과 더불어 단기간 내에 ‘압축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결과 1980년대에 이르면 국제분업 질서에서 반주변부적 지위(NIEs)로 격상하게 된다.
이러한 국제정치학적 조건과 국내적 이데올로기의 작동에 힘입어 근대화를 위한 전 국민의 총동원 체제가 가능했고,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돌진적 성장’(rush-to growth)을 이룩했다. 13 근대화의 성공은 대중을 근대적 주체로 전화시키기 마련이다. 특히 그것은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시민사회의 성장을 수반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의 근대는 대중을 근대화의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탈주체화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대중이 국가의 기획에 따라 동원되는 것이 용이한 것이다. 결국 이것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파행적인 민주화’(독제 체제)를 야기시켰고, 사람들의 행복 추구의 권리 자체를 발전주의적 동원 아래 귀속시키는 ‘파행적인 근대성’(limping modernity)의 구조를 초래하였다.(성공의 위기) 14
이 기간 동안 한국의 교회 또한 유래 없는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것은 이농자들이 대대적으로 교회로 희수된 결과다. 이는 탈빈곤의 담론 속에 은닉된 서양에 대한 선망이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투사된 것이다. 전통으로부터 근절된 광범위한 이농자들에게 새로운 귀속의 공간으로 상징화하기에 교회는 다른 종교들에 비해 훨씬 유리한 입지를 지녔던 탓이다.
한데, 우리가 유념할 것은 교회의 성장 전략이 이 시기 한국의 성장 전략과 잘 조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승리주의’(triumphalism)와 ‘탈속주의’가 그것이다. 얼핏 모순적인 듯 보이는 이 두 명제가, 실은 군부 독재정권에 의해 구사된 한국의 성장 전략과 연계시켜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즉 교회는 한국의 돌진적 성장의 대가를 나누어 가질 경우에는 승리주의 전략을, 그리고 비용을 지불해야할 경우에는 탈속주의 전략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신장과 한국 근대성의 성찰적 재구성에 교회가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해 왔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분신은, 한국 사회에서 비판 담론이 부활하게 된 신호탄이되었다. 민중신학을 필두로, 다양한 지식 영역에서 이른바 ‘민중론’이 대두하였다. 15 이들 민중론을 제기한 학자들은, 한국 근대성의 확장이 이토록 파괴적인 양상을 띠고 있음에도 ‘왜 이제까지의 한국의 지식들은 그것을 말하지 못해왔는가?’라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문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공히 발견했던 것은, 이제까지 주류의 지식체계들이 바로 이 점에 대해서 철저히 무능했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민중신학은―한국의 다른 민중론들을 선도했던―대체로 지성적 전통에 대해서 부정적 태도를 취한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자신들의 지적 토양이던 서양 근대의 신학 자체에 관해 발본적으로(radically)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것은 서구의 신학이 한국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볼 시선을 제공해주지 않았다는 데 기인한다. 오히려 ‘한국의 신학'은 서양의 신학 담론의 맥락 속에서 우리를 머물게 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신앙을 우리의 상황으로부터 탈맥락화하게 하는 서양의 신학을 해체하고, 구체적인 한국의 사회문화적 상황과 접속되게 하는 재맥락화의 시선을 제시한다. 서남동이 제기한 이른바 ‘두 전통(한국의 민중 전통과 성서의 민중 전통)의 합류’ 개념은 그것을 보여준다. 16 이러한 합류에서 안병무의 성서 해석학적 (나아가 인식론적인) 준거 개념인 ‘민중의 눈’이 도출된다. 17
이때 ‘민중의 시선’은 한국의 발전주의에 의해서 주변화된 장소의 고통을 돌아보게 한다. 그곳은 특히 빈곤의 장소(place)며, 성장주의적 지배담론에 의해 구성된 주체의 공간(space)이다. 그것은 민족국가가 선진국으로 발돋음할 ‘훗날’에 보상되어질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담론을 통해 구성된 왜곡된 주체다. 그러나 ‘민중의 시선’은 고통을 국가나 민족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으로 직시하게 된 인간의 등장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몸에 체현되고 있는 고통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깨달으며, 그것을 서로 분담하게 되는 이야기를 증언한다. 나아가 그러한 고통의 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해방의 프락시스가 벌어지는 민중의 장소를 보게 한다. 이러한 고통과 해방의 미학이 살아있는 공간을 민중신학은 ‘민중 현장’이라고 부른다. 18
이런 관점에서 민중신학은, 승리주의와 탈속주의의 공간인 교회를 해체한다. 그것은 한국 근대성의 공모자로서의 교회를 민중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 즉 민중 현장으로서의 교회로 재설정하려는, 급진적 문제설정으로 이어진다. 19
한데 민중신학을 포함한 이 시기 민중론들은 서양의 지식 전통 자체에 대해 대체로 소홀이 하였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자신들이 습득해온 서양의 지식 체계가 한국 근대성의 위기 요소를 제대로 볼 수 없게 하였다는 문제인식에서 기인한 태도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이 구사한 비판적 담론은 대체로 반지성적 경향을 갖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합리주의적 지식 전통에 자신의 인식론적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것은 이 시기 한국의 비판담론의 특수성이자 한계에 속한다. 그것은 한국적 민주주의의 파행성을 비판할 때조차도 합리주의적 사유의 모체인 서양 근대성의 시선이 사유의 준거가 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한국적 민주주의의 위기는 ‘서양적 민주주의의 결핍’에서 생긴다고 보았다. 그 결과 민중신학/론의 비판담론은 서양 근대성 자체의 위기를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한계에 대한 반성이 이후 비판담론 형성의 주된 요소가 된다.
2.2. 1980년대와 제2세대 민중신학
제1기 군부정권은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의 피살과 더불어 갑자기 종식되었다. 지배권력 공백의 상태에서 가장 기민하게 움직인 것은 바로 (제1기 군부정권의 복제판인) ‘신군부’ 세력이었다. 이들은 빠르게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민중연합은 이들의 지배권력 장악 기도를 분쇄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이러한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광주 민중봉기’는 ‘시위⇒신군부의 과잉진압⇒대중의 폭력적 시위⇒신군부에 의한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일종의 ‘집합적 폭동’(collective riot)에 해당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과잉 행동에 대한 저항이 다른 도시로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저항의 전국적 연결망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 저항담론을 큰 틀에서 결속시켜주는 이념적 프레임이 결여되어 있었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20 그리하여 ‘제2기 군부정권’이 등장하게 된다.
이 새로운 군부정권은 국가주의적 발전동원 체제를 지속시키고자 하였다. 외형적으로 이러한 체제는 적어도 1987년까지는 어느 정도 가능한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구조조정의 일시적인 효과 21와 이른바 ‘3저 현상’(낮은 석유가, 낮은 달러 환율, 국제금융시장의 낮은 이자율)과 같은 국제적 여건에 따른 경제 호황에 힘입은 것이었다. 실제로는, 1980년대 전반기의 경제적 성공에 가려진 탓에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점차로 1960,70년대식 체제통합 방식은 한계를 맞게 되었다. 이 한계는 탈빈곤과 반공주의가 그 호소력을 잃게 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먼저, 체제 재생산의 주요 동력이던 ‘탈빈곤’의 이데올로기는,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 때문에 더 이상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발전 지상주의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커다란 혜택을 주고 있다는 불만이 대중 사이에서 팽배해졌던 것이다.
또한 반공주의의 약화는 반미감정과 더불어 생기게 되었다. 당시 한국인은 미국이 광주에서의 유혈진압 사태를 방조 내지 지지했다는 의혹을 품게 되었다. 이는 ‘절대우방국 미국’의 신화가 깨어지고 동시에 맑스(-레닌)주의적 세계관이 대안 이념적 프레임으로 폭넓게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점차 사람들은 반공주의가 국가에 의한 대 국민 통제 전략의 일환이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중화학공업으로의 산업 재구조화로 인해, 대규모의 조직된 노동자 집단이 대두하게 되었다. 22 이러한 대규모로 조직된 노동자 집단이 1980년대 후반기에 이르면 빠른 속도로 맑스주의적인 노동자 ‘계급’으로 주체화되어 가게 된다. 23 요컨대 군부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최고의 이데올로기적 수단이던 반공주의가 ‘1980년 광주’를 경유하면서 그 효력을 상당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는 ‘노동의 주체화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과 아울러 다음 두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첫째로 국가-자본간의 관계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이제까지 국가주의적 발전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인 자본이 정부의 단순 하위파트너에서 어느 정도의 자율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경제사회/시장의 등장) 둘째로, 발전주의적 국가체제가 추동한 근대화는 불가피하게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의 영역을 확대시켰고, 이는 각종 사회 집단의 자기 이해를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시민사회의 대두) 그리하여 이러한 이유로 1980년대의 제2기 군부정권이 발전동원 체제에 의한 성장주의 정책을 고수하는 한, 체제의 위기는 불가피했다.
1970년대 |
| 1980년대 | |||||||||||
지배연합 |
| 도전연합 | 지배연합 |
| 도전연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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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급적 민중연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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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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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제2기 군부정권은 여러 사회집단간의 이해조정의 새로운 기재를 도입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24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자본간의 발전주의적 지배연합(ruling coalition)의 성격이 수직적 위계 관계에서 사선적 관계로 재조정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자원(권위적 자원authoritative resource과 물질적 자원material resource)에 대한 정부의 독점적 통제 전략이 수정되었음을 의미한다.(국가-자본간의 과점적 지배 관계) 하지만 이러한 지배연합은 노동사회를 포함한 시민사회에 대하여는 여전히 강력한 억압적 성격을 유지하고자 했다. 따라서 자원 배분 구조의 왜곡 현상은 결코 완화되지 않았으며, 파행적 민주화와 파행적 근대성의 구조는 온존하였다.
한편 한국의 교회, 특히 대형화에 성공한 몇몇 교회는 지배연합의 보다 적극적인 행위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서울의 공간분할이 계층화와 맞물리는 현상이 한층 심화되면서, 이른바 서울의 중산층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중산층 대형교회’(middle-class mega-church)가 대두하였다. 25 이것은 이농자 집단에게 박탈당한 사회적 비전 대신에 반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신화적 비전을 제공해주는 줌으로써 지배연합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지난 시기의 교회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이 새로운 교회 유형은 보다 더 친자본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의 수호자이자 포교자로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공고하게 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성공은 그리스도교 전체의 선교 양상과 신앙적 정체성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한국 근대성의 비성찰적 성격을 보다 심화시키는 데 한국 교회는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탈빈곤이나 반공주의 같은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의 장치가 약화되자, ‘발전주의적 지배연합’의 권위주의적 성격은 더 이상 효과적으로 은폐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0년대 민중운동은 특성화되었다. 이제까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는 부정적 이미지로 재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의 광주 이후 ‘미국신화’가 깨지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호감도가 낮아지게 되는 것과 아울러 ‘서구 근대성’은 더 이상 대안으로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 한국의 파행적인 민주화나 근대성을, 서양 민주주의 혹은 근대성의 결핍 때문이라고 보았던 1970년대적 비판담론이 반지배 집단(counter-ruling groups) 사이에서 반성적으로 비판되었다. 또한 1945년 독립 이후 줄곧 지배연합에 의해 일관되게 조직적으로 억압되었던 맑스주의가 맹렬한 기세로 확산되어, 민중연합 형성의 핵심적인 이념적 프레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요컨대 이 시기 한국 근대성에 대한 반성은 서구 근대성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졌고, 그 대안으로 ‘동유럽 근대성’의 논리가 대두하였다. 따라서 1980년대 민중연합 진영에서는, ‘서구 모방의 철저화’를 부르짖었던 1970년대의 비판적 지식인들과는 달리, ‘동유럽 (꼬뮈니즘) 모방의 철저화’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1980년대적 ‘당대 읽기’ 양상은 민중신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학생・청년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민중신학자들은 과감하게 교회의 신학이나 선교 논리로부터 벗어나, 유물론적 신앙으로 맑스주의적(동유럽의 관점에서 본) 근대성을 신앙과 접맥시키려는 이론적 모험을 시도하였다. 이들 중 다수는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맑스(-레닌)주의자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된 관심은 그리스도인이면서 맑스주의자가 되는 것의 가능성의 탐색에로 모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탐색은 가장 근원적인 상충점인 인식론의 갈등, 즉 유신론과 유물론의 갈등을 어떻게 넘어서느냐의 문제에로 이어졌다. 당시 맑스주의적 운동 진영과 더불어 사회운동의 두 축을 형성하던 그리스도교 운동 진영으로선 이러한 물음은 절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26
제2세대 민중신학의 포문을 열었던 박성준은 ‘전통적 교회’가 아닌 ‘새로운 (정체성의) 교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27 이때 새로운 정체성이란 ‘유물론적 신앙’을 의미하였다. 서남동은 “역사적 계시의 하부구조”를 강조함으로써 유물론과 신학의 합류에 대한 단초를 제시했고, 28 안병무는 “물과 계급에 대한 인식의 혁명”이라고 함으로써 유물론적 신앙을 제안하였다. 29 나아가 강원돈은 ‘물의 신학’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30
이러한 인식론적 기반 위에서 민중은 계급연합으로 규정되었고, 민중연합의 정치경제학적 지향 목표는 민중 주권의 세계를 만드는 데 있다. 안병무는 창세기의 타락설화를 알레고리적으로 읽으면서 ‘공(적인 것)의 사유화’ 31에서 ‘죄’의 원형을 읽는다. 이런 신학적 해석 위에서 민중신학의 정치경제 윤리가 모색된다. 이것은 생산자 계급에 의해 주도되는 생산관계 변혁의 실천 규범에 관한 탐색이다. 32
한편, 이 시기 민중신학 운동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른바 ‘공동학습교재’ 운동이다. 그것은 대중이라는 순진한(naive) 존재를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비판적 존재로 전화시키는, 이른바 ‘의식화’의 중요성이 민중신학의 과제로서 부각된 결과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 민중신학은 조직적이며 지속적인 학습이라는 방식을 ‘효율적’으로 운용함으로써 통해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신학으로 무장한 새로운 주체의 형성에 관여하고자 했다.
민중신학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1980년대 민중신학의 경향을 통칭하기 위한 수사어로 ‘변혁의 신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1970년대 민중신학을 ‘증언의 신학’이라고 부른 것과 대응한다. 증언이라는 용어가 개체적 존재로서의 민중신학자의 ‘신학하는 일’(doing theology)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변혁이라는 용어는 전체 운동에서 부분 운동으로 복무하는 민중신학자의 신학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3
한편 우리는 이 시기 민중신학의 신학하는 일의 특징을 ‘정체성의 정치’로서 규정할 수 있다고 본다. 앞서 약술한 것처럼, 1980년대 민중신학의 과제가 ‘유물론적 신앙’의 구축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준다. 정체성의 문제는 이미 1970년대 말부터, 그리고 1980년대 내내 그리스도교 사회운동 기관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던 주제였다. 그것은 크게 상호 연관된 두 가지 논점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는 맑스주의에 대한 태도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관한 태도의 문제였다. 이 두 논점이 서로 연결되었던 것은,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이 연대해야할 우선적 대상이 교회인가, 맑스주의적 사회운동체인가에 관한 전략적 행위 선택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민중신학은 후자의 입장에서 신학하는 일을 탐색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신학 안팎으로부터 이러한 민중신학의 경향은 ‘맑스주의로의 투항’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전체와 부분(전체로서의 변혁적 사회운동 vs 부분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의 시각에서 민중신학을 논했다는 점은, 이 시기 민중신학이 이런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민중신학은 전통적 교회에 대한 ‘차이’의 문제의식 만큼이나 맑스주의적 사회운동에 대한 ‘차이’ 34를 논함으로써 유물론적 신앙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에 개입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전망
1987년을 기점으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도약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노동운동 뿐 아니라, ‘새로운 사회운동들’이 불 일듯 일어나게 된 것이다. 35 전자가 1980년대 민중연합의 기조를 승계하는 측면이 강했다면, 후자는 그러한 기조의 지양을 통해서 주체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회운동 유형은 인적으로나 지향 목표에 있어서나 서로 긴밀히 얽혀 있었으며, 실제로 많은 경우에 서로 연대하였다. 그런 점에서 서양의 신구사회운동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36 그럼에도 이 시기에 일어난 ‘민중운동이냐 시민운동이냐’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은, 민중연합을 계급연합으로 규정했던 1980년대 비판담론의 특수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37 이러한 상황 전개 및 논쟁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된 새로운 인식은, 우리의 세계는 하나의 선명한 바리케이드로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경계들(boundaries)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또한 하나의 바리케이드를 따라 나뉜 두 개의 주체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적 주체(성, 세대, 지역, 직능 등)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1980년대 말은 한국에서 소비자본주의가 급속하게 전개된 시기이기도 하다. 38 멀티미디어의 급속한 확산, 교통과 통신 설비의 급속한 발전과 보급 등으로 사람들의 ‘일상지리’(daily empirical geography)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공통감각’(common sense) 39의 무대는 이제 더 이상 민족국가라는 단일한 단위에 따라 조직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지구적으로, 또 때에 따라서는 국부적으로locally, 나아가 ‘신체’로 미분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요컨대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다중적 경계화(multi-boundarization)에 대한 사람들의 공통감각과 동시대의 기술사회학적인 일상지리의 맥락은 서로 조응한다.
그런데 기술사회학적 맥락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정치경제학적 메커니즘과 접속되어 당파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지구・지방화(glocalization)라는 현상의 가장 주요한 행위자는 초국적인 지구적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1997년 말 한국과 아시아 여러 나라를 무차별 폭격한 금융자본의 공습은 지구적인 자본의 운동이 얼마나 심각하게 고통 구조를 확대재생산하고 있으며, 또 얼마나 불균등한 고통의 배분 체계를 낳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요컨대 지구・지방화 현상에 내포된 무한한 차이의 공간은 또한 자본에 의해 추동된 다중적인 차등화의 공간으로 재영역화되고 있는 것이다.
민중신학 제3세대의 과제는 바로 이러한 시대의 위기와 관련되어 있다. 배제와 박탈의 사회적 장치에 대해 민중신학이 비판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지점은 더 이상 국가권력(과 그 하위의 권력)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 영역 전체’에로 확장되었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담론 전략을 ‘문화정치학’으로 개념화하였다. 40 여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일상성과 권력’의 문제다. 41 이것은 체제의 심미성이 민중신학의 비판 담론의 주요 텍스트임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권력은 일상 속에서―억압으로써가 아니라―심미적 차원으로 작동함으로써, 대중의 자발적인 순종을 낳는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42 민중신학은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사회적 통합의 장치로서의 사회 제도를 비판적으로 다루게 되었고, 신앙 장치로서의 그리스도교 제도를 규율 권력의 관점에서 문제제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향후 민중신학의 주된 과제의 하나는 사회 및 교회 제도의 규율 권력을 해부하고 그것의 해체를 위한 담론을 보다 적절히 구성해내는 데 있다. 이것은 차이들의 위계화에 저항하는, 탈중심적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민중 형성의 정치를 수반한다.(차이의 정치; 정체성의 정치) 43
한데 이러한 과제는 성찰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44 즉 권력의 영향망 안에 우리 자신도 규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중신학 담론 자체도 민중신학의 비판적 개입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두 번째 과제가 놓여 있다. 45
하지만 문화정치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을 구상하는 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민중신학의 비판적 개입의 지점을 무한히 확장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민족국가라는 전통적인 경계화가 해체되고 무수히 많은 미분화된 경계들로 삶의 경험 공간이 재영역화되었다고 해서, 저항의 지점을 단순히 무수하게 분산시킬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미분적 경계화(differential boundarization)의 역학은 지구적 자본의 운동과 깊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에 대한 저항이라는 맥락에서 다양한 실천들 간의 ‘연대의 정치’를 구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46 그것은 물론 수직적 형태의 민중연합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민중연합은 ‘대화적 근대성’(dialogic modernity)을 제도화하기 위해 투쟁해야 할 뿐 아니라, 대화적 품성(dialogic character)으로 연합이 구성되도록 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신학의 제3세대가 짊어져야 하는 세 번째 과제는 (‘차이의 정치’ 뿐 아니라) ‘대화적인 연대의 품성’을 제도화하는 새로운 신앙적 정체성 형성을 탐색하는 데 있다. □
- Cf. 朴聖焌, 《民衆神學の形成と展開》 (新敎出版社, 1997), 270~80. [본문으로]
- Naoki Sakai, 〈서문〉, 《흔적》 1 (2001) 참조. [본문으로]
- 서남동의 반신학(counter theology) 개념은 ‘서양’에 의해 주변화된 한국 민중의 눈으로 신학을 ‘다시 한다’는 데 초점이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상이한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서양’에 의해 배제된 주변부 한국 민중의 시각을 사유의 새로운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 대 동양/한국’이라는 이분법의 해체, 즉 탈중심화 테제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룰 민중신학의 세대론은 이러한 해석의 상이한 요소에 따른 전개의 두 차원을 보여준다. 이른바 ‘제2세대 민중신학’이 전자를 강조한 승계의 방식이라면, 제3세대 민중신학은 후자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본문으로]
- 최근 한국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바, 일본 식민지 시대가 한국의 근대성의 결정적인 기원이라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에 따라 20세기 초의 약 40년간의 시기로부터 한국 근대성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민중신학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이후로 논의를 제한할 것이다. [본문으로]
- The interpretations of Minjung have been changed in each generation. In the 1st generation Minjung generally meant the 'deprived people', but in the 2nd generation 'class soliderity'. These conceptualizations interpreted Minjung as a realistic/essentialistic being. But in the 3rd generation, Minjung is subjestivating existence(nomalisitc being). Therefore in the 1st & 2nd, theory of Minjung was related to the quest of "who are Minjung?", but in the 3rd, it is important 'how Minjung as historical subjests are being made up.' For more detailed discussion, see Kim Jin-ho "Minjung as the Subject of History ― Reappraisal on 'Minjung' of Minjung Theology", The Theologial Thought 80 (spring 1993).[In Korean] [본문으로]
- Ch. Johnson, "Political Institutions and Economic Performance: The Goverment-Business Relationship in Japan, South Korea, and Taiwan", Deyo, ed.,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New Asian Industrialism (Cornell University, 1987). [본문으로]
- 조희연,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 변동》 (서울: 당대, 1998), 62. [본문으로]
- 최근 수행되고 있는 일련의 탈식민주의적 연구들에 따르면 ‘협력자’ 없이 식민 종주국에 의한 지속적인 제국주의적 지배는 불가능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따라서 물리적 통제에 의존하는 경찰주의적 지배를 넘어서 다양한 협력의 사회적 장치를 창출해내는 제도화를 탐색하지 않으면 제국주의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협력이론’the theory of the collaboration에 대하여는 see Jügen Osterhammel, Colonialism (Markus Wiener, 1997). 한편 한국 식민지 시대를 협력 이론으로 조명한 연구로 김동명,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의 정치운동 연구 ― 일제의 지배에 대한 저항과 협력의 변증법〉, 《한국정치학회보》 32 (1998 가을). [본문으로]
- 이 시기 미군정 당국은 국가 창설을 위한 인적 자원의 75% 가량을 일제 식민지 시절의 관료 출신자들로 수혈하였다. [본문으로]
- Cf. Bruce Cumings,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the South East Asian Political Economy: Industrial Sectors, Product Cycles, and Political Consequencys", in Frederic Deyo, ed.,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New Asian Industrialism (cornell University Press, 1987). [본문으로]
- A. Lipietz, Mirage and Miracles: the Crises of Grobal Fordism (Verso, 1987). [본문으로]
- 미국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의 식민화’에 대하여는 최정무, 〈미국, 무의식의 식민화, 그리고 자기 분열〉, 《당대비평》 14 (2001 봄) 참조. [본문으로]
- 돌진적 성장, 돌진적 산업화rush-to industrialization 또는 돌진적 근대화rush-to modernization라는 용어는 한국사회의 발전전략을 분석하기 위해 제출된 개념으로, 국가가 오직 성장만을 위해 모든 가용 자원을 일사분란하게 조직・통제하는 발전동원체제를 말한다. Han Sang-jin, "Rush-to Industrialization and Its Pathological Consequences: The Theme of 'Risk Society' in the Asian Context", Paper prepared for presentation at the 6th International Conference at Asian sociology (Beijing. 2~5 November, 1995). [본문으로]
- Kim, Dae-hwan, "Korean Economic Development: Miracle or Mirage?" Paper presented at the Special Workshop on 'The Economies of Rapid Growth: Implications for Social Development', '95 NGO Forum, World Summit for Social Development (Copenhagen, 7 March, 1995). [본문으로]
- 전태일 사건과 민중론의 대두에 관하여는, 박성준, 앞의 책, 제1장을 보라. [본문으로]
- Seo Nam-dong, "Zwei Traditionen fließen ineinander", Theologie des Volkes Gottes in Südkorea. Herausgegeben von Jürgen Moltmann (Neukirchener, 1984). [본문으로]
- 안병무,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신학사상》 52 (1986). [본문으로]
- 박성준의 다음 말은 민중신학의 현장 개념에 대한 명쾌한 요약이다. "나는 ... 민중신학이 1970년대 한국사회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현장에서 창출된 신학이라는 것을 민중신학의 기본성격으로 정식화하였다."(op. cit., 85). [본문으로]
-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173~78. [본문으로]
- 정철희,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사회운동론적 접근과 비교연구〉, 《사회연구》 1 (2000), 153. [본문으로]
- 한편 제2기 군사정권은 집권 초기에 1970년대의 중공업에 대한 과잉중복 투자를 전면적으로 재조정하는 경제정책을 편다. 이것은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본문으로]
- 중화학공업화율은 1975년에 41% 정도였으나, 1980년에는 51.7%, 1985년에는 56.6%로 높아졌다. 또한 중화학공업 노동자의 비율은 1980년대 전반기에 이미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게 된다. 임영일, 〈한국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성장〉, 《신학사상》 64 (1989 봄)을 보라. [본문으로]
- Cho Hee-yeon, "The Democratic Transtition and the Change of Social Movements in South Korea" Prepared for the Panel, 'The Aftermath of Democratization in South Korea' at the Annual Meeting of the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Honolulu, 1996.4.11~14). [본문으로]
- 송호근, 〈‘대변혁기’의 한국사회〉 in 《열린 시장, 닫힌 정치―한국의 민주화와 노동체제》 (서울: 나남, 1994), 83~4. [본문으로]
- 서우석, 〈중산층 대형교회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 《한국사회학》 28 (1994 여름). [본문으로]
- 최형묵, 《사회변혁운동과 기독교 신학》 (서울: 나단, 1992), 제3장을 보라. [본문으로]
- 박성준, 〈한국 기독교의 변혁과 기독교 운동의 과제〉, 《전환》 (서울: 사계절, 198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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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을 보라. [본문으로]
- 강원돈, 〈물의 신학. 물질적 세계관과 신앙의 한 종합〉, 《신학사상》 62 (1988 가을). [본문으로]
- 안병무, 〈하늘도 땅도 공이다〉, 《신학사상》 53 (1986 여름). 여기서 안병무가 주장한 바, 아담의 죄를 ‘공적인 것을 사유화하려는 욕구need’라고 본다면, 公은 경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비경쟁성noncompetitiveness),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야(비배제성nonexclusiveness)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병무의 ‘공’은 사회학의 ‘공공성’과 연관성이 있다. 이에 대하여는 김진호, 〈단(斷)과 공(公)의 변증법〉, 《현대사상》 7 (1999-1) 참조. [본문으로]
- 최형묵, 〈‘계시의 하부구조’와 민중신학적 정치경제 윤리의 모색〉, 《민중신학과 정치경제》 (서울: 다산글방, 1999). [본문으로]
- 최형묵, 《사회변혁운동과 기독교 신학》, 78~99. [본문으로]
- 1980년대 민중신학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편성’에 대해 ‘특수성’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하고자 했다. [본문으로]
- 김호기, 〈민주주의, 시민사회, 시민운동〉, 최장집・임현진 엮음, 《한국사회와 민주주의》 (서울: 나남, 1997)을 보라. [본문으로]
- 임현진, 〈사회운동의 정치세력화의 가능성과 한계〉, in 《21세기 한국사회의 안과 밖》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286. [본문으로]
- 김진호, 〈민중신학 위기론은 실천이론의 빈곤을 반영한다!〉, 《이론》 8 (1994 봄) 참조. [본문으로]
- 최홍준, 〈1980년대 후반 이후 문화과정의 정치경제적 조건과 도시적 경험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석사학위 논문(1993.8) 참조. [본문으로]
- ‘공통감각’에 대하여는 Deluze, 《칸트의 비판 철학. 이성 능력들에 관한 이론》 (서울: 민음사, 1995), 44~50 참조. [본문으로]
- 김진호,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 《시대와 민중신학》 4 (1997) 참조. [본문으로]
-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그리스도교 사회운동, 특히 기독교 청년운동은 1990년대 이후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민중신학은 ‘사회운동 없는 비판담론’으로서의 신학doing Theology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권력의 일상성과 심미성이 새로운 주제로 부상하였다. [본문으로]
- 최형묵, 〈욕망과 배제의 구조로서의 기독교적 가치〉, 《당대비평》 14 (2001 봄); 김진호, 〈승리주의를 넘어서, 예수의 복원을 향해〉, 《당대비평》 9 (1993 가을); ―, 〈‘죄론’과 교회의 시선의 권력〉, in 김진호, 《반신학의 미소》 (삼인, 2001). [본문으로]
- 황용연, 〈‘정체성의 정치’와 민중신학〉, 《시대와 민중신학》 5 (1998) 참조. [본문으로]
- ‘성찰성’에 대하여는, U. Beck, A. Giddens, & S. Lash, 《성찰적 근대화》 (서울: 한울: 1998) 참조. [본문으로]
- 김진호, 〈낯설음을 향한 욕망으로서의 신앙〉, in 김진호, 《반신학의 미소》 참조. 한편, 벡 등의 성찰적 근대성의 관점에서 임현진・정일준은 〈한국의 발전경험과 ‘성찰적 근대화’―근대화의 방식과 성격〉, 《경제와 사회》 41 (1999 봄)에서 한국 근대화 과정을 비판적으로 조명하였다. [본문으로]
- 김진호, 심포지엄 ‘일상적 파시즘 논의의 진일보를 위하여’의 패널 토론 원고(2000.12.23), 《당대비평》 14 (2000 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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