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썸네일형 리스트형 내 영혼을 울리는 이 책 -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한국일보]의 '내 영혼을 울리는 이 책' 코너(2002.6.23)에 실림 ---------------------------------------- 내 영혼을 울리는 이 책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동화적 상상을 즐기는 독서 취향을 배려한 어떤 이가 이 책을 선물했다. ‘자작’이 뭔지도 모르고 저자 또한 생소한 이름이었다. 낯섦 탓인가, 첫 인상으론 그리 호기심이 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분량이 적은 덕분에 선물한 이의 성의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쉽게 발동했던 모양이다. 이후 나는 칼비노의 팬이 됐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 대가의 반열에 들 만한 위대한 작가의 한 사람이다.17세기 말, 터키와의 전쟁에 참전했던 아질울포라는 자작이 적의 포탄에 몸이 둘로 갈라진 채 귀향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얘기.. 더보기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위한 예수 - [예수에게 솔직히](로버트 펑크 지음․김준우 옮김; 1999)에 대한 논평 [세계의 신학] 44(1999 가을)에 게재되었고, 나의 책 [예수 역사학 - 예수로 예수를 넘기 위하여](다산글방, 2000)에 재수록됨 -------------------------------------------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위한 예수《예수에게 솔직히》(로버트 펑크 지음, 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刊, 1999)에 대한 논평 1 아마 1988년쯤일 거다. 대학원 시절 ‘예수 비유 세미나’라는 과목을 수강할 때 로버트 펑크의 《언어, 해석학, 하느님 말씀》이라는 책을 읽게 된 것이 저자와의 첫 대면이다. 이 책에 수차례 반복되는 ‘은유’라는 말을 접하면서, 예수의 비유가 직유면 어떻고 은유면 어떤가, 참 서양 학자들은 할 일도 없다, 라고 무식한 불평을 털어놓던 낯 뜨거운 기억이 아직도.. 더보기 민중신학의 문화정치학적 지평 확대를 위하여 - 〈‘베드로전서’의 집 없는 나그네들과 가부장주의적인 ‘하나님의 집’〉(박경미)에 대한 논평 이 글은 박경미(이화여대 교수/신약학)의 에 대한 논평글로, 한국민중신학회 연구기획위원회 3차 연구발표회(1995.9.14) 때에 제출된 것입니다. 박경미 교수의 글은 [신학사상] 90(1995 가을)에 게재되었고, 나의 논평글은 [시대와 민중신학] 3(1996)에 게재되었습니다. 박경미 교수의 글과 나의 글을 올립니다. ------------------------------------------------------------------------------- 민중신학의 문화정치학적 지평 확대를 위하여〈‘베드로전서’의 집 없는 나그네들과 가부장주의적인 ‘하나님의 집’〉(박경미)에 대한 논평 1 종교공동체라는 공간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공통된 종교적 담론을 갖는다. 그러나 이 포괄적 담론이 종교공동체 성원.. 더보기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상상의 과거’의 정치학 - 키스 W. 휘틀럼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침묵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 이 글은 [당배비평] 25 (2004 봄)에 실린 글입니다. ---------------------------------------------------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상상의 과거’의 정치학 키스 W. 휘틀럼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침묵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이산, 2003)Keith W. Whitelam,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The Silencing of Palestinian History (Psychology Press, 1996)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야훼 신앙의 출현에 관한 역사라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인에게 중요하고, 이스라엘 민족사의 기원에 관한 역사라는 점에서 국민국가로서의 현대 이스라엘에게 중요하다. 또한 유럽과 북미의 그리스도교적 제국주의.. 더보기 그의 비평에는 ‘저자’만 보인다 - 정용섭의 《설교의 절망과 희망》를 읽고 [창작과 비평] (2008 가을)에 실린 글 --------------------------------------- 그의 비평에는 ‘저자’만 보인다정용섭의 《설교의 절망과 희망》(대한기독교서회, 2008)를 읽고 기독교신자가 자신의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얘기하는 것은 필경 담임목사의 ‘설교’일 것이다. 또 어떤 이가 교회를 새로 선택할 때 가장 관심을 갖는 것 역시 설교겠다. 한편 개신교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한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 거의 전부가 설교를 가장 중요한 목회의 요소라고 대답했다.(《목회와 신학》 2007년 4월. 98.3%) 개신교 신앙에서 설교는 목회자와 신자 모두에게 교회 활동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교인들은 거의 매주일 같은.. 더보기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보는 교회적 성서 읽기의 가능성 - 김경호의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시리즈 김경호 목사의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시리즈 1권 [야훼 신앙의 맥]과 2권 [새 역사를 향한 순례]에 대한 서평으로 [기장회보] 487(2007 9)에 게재된 것 -------------------------------------------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보는 교회적 성서 읽기의 가능성김경호의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시리즈1권: 《야훼 신앙의 맥》와 2권: 《새 역사를 향한 순례》의 출간을 축하하며 1989년, 네 명의 소장연구자가 만나 성서 교재를 위한 공동작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작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두 번이나 실패하고, 세 번째 팀이 결성되고서야 작업은 완료될 수 있었다. 매월 2회씩 모여 꼬박 하룻밤을 지새우며 제법 치열한 토론을 벌이기가 만2년, 두 권짜리 ‘.. 더보기 예수님을 바로 알고 싶은 그대에게 - 마커스 보그의 [예수 새로 보기]에 관하여 [세계의 신학] 37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1997 겨울), 266~75쪽에 게재됨 ----------------------------------- 예수님을 바로 알고 싶은 그대에게마커스 보그의 《예수 새로 보기》에 관하여 ‘역사의 예수’ 문제를 탐구하면서 나는 두 가지 상반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주제에 대한 한국의 신학계나 교회의 관심 정도가 기대보다 훨씬 밑돌고 있는 반면, 최근 신약학계, 특히 북아메리카에서의 연구 동향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상당 수준의 성과를 이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최근의 ‘예수 연구’가 학제간 연구 경향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선, 적어도 신학 분야에선 학문간 제휴를 막고 있는 장벽이 여.. 더보기 안이한 일상을 넘는, 삶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하여 - 마커스 보그의 이 글의 출처는 확인할 수 없다. 1997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 안이한 일상을 넘는, 삶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하여마커스 보그의 《예수 새로 보기》(한국신학연구소, 1997)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탐구’라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논제에 대해 의아할 것이다. 실제로 교회나 수많은 책들은 대체로 예수님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이 호들갑스럽게 떠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질문의 학문사를 조금이라도 검토해 본 사람이라면,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여 전전긍긍하고 있는 학계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예수세미나’라는 저명한 예수연구 학회에서 125명의 북미의 대표적인 예수연.. 더보기 ‘예수의 대안공동체’라는 물음은 타당한가 - 박태식의 「이들이 나의 가족입니다―예수의 공동체」에 대한 논평 이 글은 지난 2008년 3월 25일 우리신학연구소에서 행한 포럼에서 박태식 신부의 글 에 대한 논평글입니다. ------------------------------------- ‘예수의 대안공동체’라는 물음은 타당한가 박태식의 「이들이 나의 가족입니다―예수의 공동체」에 대한 논평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을까?” 저자가 글을 시작하면서 던진 질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글에서 ‘그(박태식)는 왜 공동체에 관한 글을 쓰고자 했을까?’를 묻는다. 그의 대답은 “한국교회 안팎으로 공동체 의식을 부르짖는 때”라는 ‘시의성’이 그 이유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공동체 논의가 최근 우리사회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공화제’(Republicanism)에 관한 논의다. 이것은 ‘민주.. 더보기 내면의 식민지, 그 근대적 우상을 초극하는 조르바의 춤 이 글은 [동아일보](2003.1.) 책읽기 세상보기 코너에 게재된 것입니다. -------------------------------------------------------------- 내면의 식민지, 그 근대적 우상을 초극하는 조르바의 춤 한 독서 모임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자는 제안이 있었다. 20년만의 두 번째 독서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 사이 나는―조르바가 소설 속의 ‘나’, 곧 저자 카잔차키스 자신을 향해 비아냥대는 호칭인―‘책벌레’까지는 아니지만, 책 읽는 것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골방지기’가 되었다. 문자의 유폐된 공간 속에서 그 지식의 묘사가 마치 세상 자체인 듯 착각하는 허식(虛飾)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러니 이제는 “살아 있는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람 조르바.. 더보기 이전 1 2 3 4 5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