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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한 묵시공동체의 비판과 저항, 그 하나의 가능성을 읽는다 - 유은걸의 <요한계시록의 황제제의>에 대한 논평

이 글은 신약학회-구약학회 2008년 춘계학술대회 '성서와 정치'(2008.4.26. 감신대)의 신약학회 분과발표 제1그룹에서 발표된 유은걸 선생의 <요한계시록의 황제제의 - 계시록 13장과 17장을 중심으로>에 대한 지정논평으로 저술된 글입니다.
유은걸 선생의 글은 [신약논단] 15/2(2008)에 수록되었는데, 아래에 첨부해 놓았습니다.

유은걸_요한계시록의 황제제의-계13장과 17장.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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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묵시공동체의 비판과 저항, 그 하나의 가능성을 읽는다

유은걸의 「요한계시록의 황제제의—‘계시록’ 13장과 17장을 중심으로」에 대한 논평

 



‘성서와 정치’라는 테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정치’를, (할당적allocative이든 권위적authoritive이든) 권력의 배분에 관한 사회적 행위라고 정의하고자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이 테마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차원을 갖는다. 첫째 차원은 권력을 둘러싼 각종의 사회적 행위들의 시각에서 성서의 텍스트들을 읽는 것이고, 성서가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 구성에 관한 정치적 과정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가 둘째 차원이다.

먼저 유은걸 선생의 글(이하 「황제제의」)은 후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다소 불명확해보이지만, 아마도 삶의 세계와 격리된 종교성을 강조하는 시선과 세계의 비전과 종교적 비전을 동일시하는 시선, 「황제제의」는 이 양 극단을 동시에 문제제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다만, 이 두 유형의 신앙적 태도가 각각 권력 자원의 배분에 개입하는 정치 행위와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가 다소 모호하다. 필경 저자 자신의 현재적 지평을 텍스트 해석에 연동시키는 것은 성서 주석가다운 일이 아니라는 근대 역사주의적 공리가 그의 생각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는 랑케Leoplod von Ranke 식의 실증주의적 역사인식론에 기초한 역사비평적 태도가 아직도 넘실거리는, 근대주의적인 역사가이자 주석가로서 이 글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나는 나 자신의 자리, 그곳에서 나의 역사적 상상력을 보다 본격적으로 성서 텍스트 읽기에 개입시키고자 한다. 하여 ‘성서의 정치성’을 발견하기 위해 성서를 읽을 때에도 텍스트 밖, 특히 독서자인 나의 컨텍스트를 통해서 텍스트를 읽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실증적 근대주의 역사인식론에 대해 비판적이다. 요컨대 나는 「황제제의」와는 다른 역사학적 시좌에서 비평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성서와 정치’라는 문제설정의 첫 번째 요소인 텍스트 자체, 즉 텍스트 내부의 정치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여기서 「요한계시록」의 텍스트 내적 정치성을 읽어내는 단서로 활용하는 역사적 요소로 선택된 것이 ‘황제제의’다.

「요한계시록」의 연구자들은 전통적으로 이 문서의 저술 배경을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그리스도교 박해와 관련시켜 왔다. 그러나 암살당한 이 통치자에 대한 원로원의 조직적인 기억말살 작업으로 그에 관한 공식적이고 신뢰할만한 직접적인 사료의 거의 대부분이 유실된 탓에 그가 과연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정책을 편 적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그리스도교 박해의 이유로 이해되었던 ‘황제제의’에 대해 그가 과연 그것을 이유로 누군가를 제거하는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정책을 폈는지에 대해서도 오늘날의 역사학계는 의심한다. 오히려 그의 아버지나 형인 베스파시아누스나 티투스처럼, 그 자신도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지중해 동방식 신앙에 대해 소극적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더욱 우세하다. 물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이후 지중해 동방 지역에서 널리 확산된 통치자 제의는 로마제국 시대에도 계속되었고, 여러 황제들처럼 도미티아누스 역시 「요한계시록」이 저술되고 유통된 주요 공간인 소아시아 서부 지역의 도시들에서 제의의 주요 숭배대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그러나 이것은 황제 자신이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동방지역의 정치・외교적 관례였다. 요컨대 지중해 동방 지역의 지배계급이 제국적 통치자를 예우하는 정치적 관행의 소산으로 황제제의가 이 지역들에서 일상화된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의 누구도 적극적으로 이를 권장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역사학적 기조의 변화는 일단의 「요한계시록」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이 문서의 저술시기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문서 공동체가 겪은 지배적인 사회적 갈등 요소에 대한 논의에까지 다양한 새로운 해석들을 낳았다. 한데 이러한 최근 연구 기조의 변화에 대해 「황제제의」에서 저자는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하면서 논의를 편다. 요컨대 그에 의하면 이 문서 속에 전제된 주적主敵은 ‘로마제국’이며, 바로 이 점이 제국에 의해 이 문서 공동체가 ‘박해’를 받는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위해 그가 주로 주목하는 텍스트는 13장 1~11절의 파괴적 짐승에 관한 묘사이다. 복잡한 논설을 통해 그가 주장하는 것은 이 짐승이 로마 황제를 암시하고 있고, 텍스트가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이 문서의 저자와 공동체는 그 무시무시한 괴물로 인해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황과 가장 적절하게 맞물리는 로마의 황제는 다름 아닌 도미티아누스라고 추측한다.

여기서 도미티아누스라고 단정하는 것은 좀 지나쳐 보이지만, 13장에서 황제숭배의 현실을 읽어낸 것은 적절한 해석으로 보인다. 그런데 「황제제의」에서 황제숭배의 장본인이 도미티아누스라는 주장의 배경에는 황제숭배를 거절한 것이 황제 자신에게 문제가 되었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황제제의가 로마제국의 주요 이데올로기였고, 도미티아누스가 그러한 제국 이데올로기를 매우 적극적으로 펼친 통치자였다는, 신약학계의 지배적인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제의를 중요시했다는 근거는 그의 논적들이 제시한, 신뢰도를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 밖에는 없으며, 그의 시기에 황제제의를 둘러싼 동방지역의 갈등이 시사되는 사료는 문헌적이든 고고학적이든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통치자제의를 가장 중요시한 로마의 수권자는 도미티아누스가 아니라 가이사르였다. 아무튼 이런 통상적 가정의 가장 문제는, 위에서 시사했듯이, 황제제의를 로마제국이 제국 이데올로기로 간절히 필요로 했다는 가정에 있다. 동방의 제국인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나 안티오쿠스 4세의 셀류커스 등에게는 이런 가정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지만, 서방 제국인 로마에게는, 통치자들 자신이 그러한 제의에 대해 스스로 멋쩍어 하는 상황에서 그것이 이데올로기로 발전할 가능성은 매우 제한적이다. 또한 도미티아누스의 논적들의 비난에서 보이듯이, 동방에서 유행하는 그러한 영웅제의에 대한 다소간의 적극적인 태도는 오히려 통치자의 약점으로 작용했다. 요컨대 로마의 황제들에게 황제제의는 그리 중요한 통치의 기술로 활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동방에서는 황제제의가 분명히 있었으며, 그로 인한 박해가 있었다. 다만 그것이 황제 자신에게 상처를 주어 분노에 찬 박해가 있었다는 논리의 비약이 문제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논하겠다.

한편 11~18절의 두 번째 짐승에 대해 그는 황제제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유대사회에 유포시키는 데 적극적이었던 ‘일단의 유대인 집단’의 존재를 상상해낸다. 이 논문은 이들의 정체에 대해 좀더 친절한 정보를 제시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 않지만, ‘거짓예언자’로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은 유대사회에서 이들의 위치를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읽어내려는 시도로 보인다. 황제제의를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본다는 전제하에서, 지역사회의 한 종족공동체 내에서 있었다는 이데올로그들의 활동은 정치적으로 문제시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요한계시록」의 정치학에 대한 논의는 일관성이 있다.

한데 만약 나의 생각대로, 황제제의가 로마제국 당국자에게 유용한 지배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없다면 이러한 황제제의의 이데올로그들에 대한 논의는 좀더 보완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왜 정치적으로 문제적인가, 그들의 활동은 권위적이든 할당적이든 어떤 권력자원의 배분에 연관될 수 있는가 등등.

나는 이 둘째 짐승이 황제제의를 지지한 유대 공동체의 이데올로그를 함의하고 있다는 해석에 공감한다. 하지만 황제제의가 황제 자신의 이데올로기라는 가정은 역사적으로 무리한 해석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재해석의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황제제의에 관한 나의 논점을 펴면서 좀더 논하겠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의 정치적 정황을 추론한 후에, 이에 대한 이 문서 공동체의 태도를 이데올로기 투쟁의 관점에서 정리한다. 즉 그가 세 개의 소단락(‘영원한 신’과 ‘일시적 거짓 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 ‘어린 양’ 기독론)으로 나누어 해설하는 이 문서 공동체의 대응전략은 황제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하느님나라의 세계관이 본원적임을 주장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역시 같은 논점으로 나는 그의 논의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즉 황제이데올로기를 중요시하는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한, 나는 황제숭배에 대한 비판처럼 제시된 언술의 표상적 논리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황제제의를 비판하는 언술 표층적 내용이 곧 바로 황제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보다는,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강요와 폭력에 대한 저항의 수사일 수 있음을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저항을 저항담론의 형식 논리를 통해서만 접근하는 이성중심주의의 한계를 「황제제의」 또한 공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텍스트 속에 담긴 논리는 그것이 문제제기하고 있는 반대편의 논리에 대한 반박논리로서 구성된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논리적인 구성을 하고 있더라도 거기에는 언술 표상적 논리로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상대편의 주장의 모든 것에 일일이 이견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반박논리를 펴는 이는 상대의 주장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려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더욱이 거기에 폭력 같은 감정적 요소가 고조될 수 있는 체험이 게재될 경우 텍스트 표층에 있는 형식 논리로만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많아진다.

그렇다면 다음에서는 「요한계시록」 공동체가 겪었을 법한 황제제의의 역사적 상황과 이에 대한 공동체의 대응에 관한 나의 간략한 논조를 요약해보겠다.

이미 얘기했듯이 이 문서 동시대로 추정되는 주후 1세기 말경의 로마제국은, 그 시대를 도미티아누스 시대로 한정하든 아니든, 제국이데올로기로서 황제제의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유포하지 않았다. 그 시기에 황제제의는 지중해 동서방을 통합하는 제국 로마에 있어서, 그리고 서방 지역의 문화적 배경을 두고 발원한 제국 로마에 있어서 황제제의는 제국을 통합하는 효과적인 통치수단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황제제의는 특히 동방지역에서 분명 존재했으며, 그 지역들의 통치자들은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통합에 매우 중요한 수단으로 선택하곤 했다. 로마제국 당국은 이러한 선택에 다소 소극적으로 공조했고, 때로 제국의 안정을 위해 활용하곤 했으나, 신념화된 통치이데올로기로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즉 비록 로마황제가 숭배 대상의 하나로서 지역에서 제의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로마 제국에 예속된 동방의 국가들의 지배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고, 반면 제국은 지배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지배의 수단으로 도구적으로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암시된 박해의 흔적은 제국 차원의 박해라기보다는 지역 차원의 국지적 박해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여기에 하나 더 유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황제제의는 대개 독자적인 숭배의례라기보다는 지역의 전통적 종교 축제의 일부로서 편입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즉 황제제의와 지역축제는 분리할 수 없이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각 지역의 대중적 축제의 일상적 메커니즘과 황제제의가 문화적으로 제의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제의들은 단순히 종교적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올림픽 같은 스포츠와 종교가 서로 얽히기도 했고, 가장행렬 같은 도시의 공간정치가 대중에 의해 공유되고 소비되는 예전이기도 했다. 또한 성적이거나 신분적인 해방이 가상체험되는 카니발적 축제의 일부로 황제제의가 들어옴으로써, 범계층적 축제로 열광적으로 소비되기도 했고,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사적이든 원한과 앙갚음의 악순환이 해소되거나 억울한 일을 탄원할 수 있는 일상적 위기 탈출의 장치로서 작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비가 활성화되고 세금이 면제되며, 호혜적 기부금이 넘쳐나 부가 재분배되는 축제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역축전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체제적 통합System Integration의 일부 요소로서 유용했지만, 지역의 지배집단에게는 체제적 통합뿐 아니라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의 주요한 장치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축전에 황제제의가 끼어드는 것에 대해 지중해 서방의 많은 엘리트들은 어리석은 관습처럼 생각했고, 심지어는 동방의 엘리트 계층의 일부는 천박한 것으로 비판하곤 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익명의 저자처럼 일부 소종파적 반체제공동체들은 그러한 반대로 인해 정치적인 박해를 당하기도 했던 것 같고, 이 문서에 대해 여러 주석가들이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지역 주민들의 사회적인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으리라는 주장도 개연성이 높다.

그런데 박해의 가해자가 이렇게 지역의 지배집단이거나 혹은 지역의 대중사회였다면, 왜 이 문서에는 주된 가해자가 아닌 로마의 황제숭배를 향해 비판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탈구조주의적 사회이론가인 마아르텐 헤이저Maarten Hajer의 스토리라인Story-line 가설은 유용한 통찰력을 제시해준다. 즉 대중은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을 구성할 때, 정확한 정보를 발견하여 그것에 준해서 대응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폭넓게 형성된 스토리라인에 의거한다는 것이다. 이때 스토리라인은 기승전결이 있는 일종의 허구로서의 담론틀이다. 요컨대 「요한계시록」의 저자와 그것을 수용한 공동체들은 자기들 식의 스토리라인에 의거해서 황제제의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반박논리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황제제의는 지역 축전에서 가장 약한 고리였다. 많은 지식인들이 유독 황제제의를 비판하고 있는 점은 그것을 시사한다. 한편 「요한계시록」이 묵시적 텍스트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회는 그 구성원끼리의 일정한 소통의 양식을 갖고 있고 일정한 의미망을 공유한다. 매체연구자들은 이를 ‘푸블리지스티크’Publizistik(이는 종종 ‘공시’公示라고 번역된다. 나 역시 이 번역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라고 부른다. 그런데 소수자 공동체나 특히 묵시공동체는 더 강하고 더 폐쇄적인 공시를 제도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내부집단은 그 공시의 내용에 강한 신뢰를 보이고, 외부 집단은 불신하거나 무지한 반응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의 논리구조나 표현 양식은 묵시공동체의 공시적 언어의 산물이고, 그 외부의 집단에게는 비밀스러운 감춰진 암호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일반적인 논리의 틀로서 해석하려는 것은 타당성이 낮다.

여기서 이 묵시적 문서 공동체의 대응논리를 해석하는 하나의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문서를 통해서 적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보편타당한 해체의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집단의 공시적 언술을 통해 반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반대의 논리 속에는 지배체제의 성격이 아니라 자집단의 성격에 관한 단서가 들어 있다. 비록 문서가 형식상 지배체제에 대한 수많은 요소들을, 명시적이든 비명시적이든, 함축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요컨대 그들은 체제에 의해 박해당하고 있는 자들이며, 매매 같은 경제활동의 제약에 관한 13장 17절의 내용에 대한 「황제제의」의 해설처럼 체제의 조직적인 박해라기보다는 대중사회의 자발적인 배제와 처벌의 대상이 된 집단이다. 이들은 제국의 지배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공정한 판단을 내릴 만큼 체계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는 이들은 아니지만, 제국의 지배 메커니즘에 의해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진 영역에서 배제당한 존재들로서, 자집단의 정체성Collective Identity을 구성하기 위해 이러한 공시적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탈리아의 사회운동연구자인 알베르또 멜루치Alberto Melluci의 집합적 정체성에 관한 다음과 같은 말은 매우 유효한 통찰력을 제시한다. “행위자는 집합적 정체성을 통해 사회운동을 구성한다.” 즉 「요한계시록」을 로마의 황제제의에 대한 객관적 해체논리로서 해석하기보다는 박해당하는 자집단의 정체성에 관한 문서로서 이해하면, 이 묵시적 문서를 통해 텍스트의 소비공동체는 특정한 사회적 실천으로 조직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집단정체성의 언어에서 ‘우리 집단’In-Group 의식이 ‘저들 집단’Out-Group 의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한계시록」 내에는 ‘우리 집단’과 ‘저들 집단’을 시사하는 다양한 표현들이 끊임없이 격한 갈등 관계에 있다는 점이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이것은 공동체의 사회적 고통 그리고 그와 연관된 불만이 ‘정치화’Politicalization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이 공동체가 비록 문서 내에서는 어떠한 사회운동적 행위와 연관되어 있는지를 밝혀낼 수는 없더라도, 단지 이데올로기적 저항을 하는 반면 정치적 행동주의와는 무관한 집단이라는 해석보다는, 잘은 모르지만 어떤 형태든 사회운동적 저항연대를 구성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사회운동이론가 윌리엄 갬슨William A. Gamson이 주장한 바, 집합적 정체성은 ‘조직적 집단’, ‘운동 집단’, 그리고 ‘유대 집단’(bond-group)으로 유형화될 수 있다면, 적어도 7개 도시의 묵시공동체에 회람된 「요한계시록」의 담화공동체는 유대 집단에 가깝다고 할 수 있고, 이는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광범위한 정체성의 담론으로 결속이 형성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이 공동체가 비판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인 반면, 비참여적이라는 점에서 ‘탈정치적’이라고 해석했던 「황제제의」의 숨겨진 의미가 추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 집단은 유대 집단으로 집단 정체성이 형성되는 문서로서 자기의식을 구성하고자 하기 때문에, 최소강령적인 참여의 논리, 즉 소극적 참여의 논리가 도처에서 엿보였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 전 이정희가 「요한계시록」 저작의 상황을 미하엘 바흐친Mikhail Bakhtine의 ‘초수신자’超受信者 개념을 빌어서 논의한 것은 유대 집단적 집단정체성을 통한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유용한 전거가 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민중의 반도시적 저항연합의 관점으로 「요한계시록」에 전제된 민중운동의 가능성을 추론한다. 이때 반도시적이라는 것은, 이정희 자신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지만, 이들 초수신자(또는 잠재적 수신자)들이 농촌에 기반을 두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농촌출신으로서 (자의든 타의든) 도시로 이주하여 도시의 하층민으로 편입된 자들을 시사하는 정보로 활용될 수 있다. 그들의 공통된 반도시적인 집단정체성은 도시 속에서의 고통스런 체험의 반대급부를 반영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은걸의 글은 황제제의를 둘러싼 일련의 갈등을 주목하면서 「요한계시록」의 텍스트 내적 정치성을 밝히려 하였다. 나는 그의 정교한 서술 방식을 접하면서 논평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허튼 비평으로 훌륭한 글이 훼손되지 않게 하려고 나름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논지에 동의할 수 없는 요소들이 적지 않았고, 특히 텍스트의 내적 정치성에 관한 핵심적 줄거리에 있어 전혀 다른 역사적 가능성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텍스트 내적 정치성에 관한 이러한 의견 차이의 배후에는, 「요한계시록」을 오늘 우리의 신앙과 체제비판, 그리고 사회운동적 실천으로서의 저항에 준거가 될 만한 성서적 전거를 찾고자 전전긍긍하는 나의 문제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하여 나는 외부의 먼 곳에 있는 적을 주적으로 삼는 비판과 저항의 상투적인 문제설정과는 다른 방식의 논점을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적이 오늘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성찰의 요소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외부의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적의 내적 반영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렇기엔 그것은 너무 우리 몸의 깊숙한 일부가 되어, 우리 몸의 질서를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들어와 어느새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황제제의를 둘러싼 위기와 저항이 로마가 아닌 묵시공동체가 입지한 지역의 일상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배제와 차별의 메커니즘의 산물이듯이, 아메리카주의는 미국을 극복하는 반제국주의적 실천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이미 우리 몸의 일부로 독자적인 작동양식이 되어 운용되는 ‘우리 내면의 아메리카주의’ 또한 우리의 비판과 저항의 주요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동시대적 문제의식은 「요한계시록」을 읽는 나의 정치적 시좌이다. 바로 이 시좌와 위에서 논한 나의 주장은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나는 글 서두에서 제시한 두 번째 정치성의 대한 나의 주장에로 돌아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