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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5.18 기억의 숨겨진 소리 - 이재민 신부의 「5.18을 기억한다」에 대한 논평

이 글은 2010년 5월 27일 광주가톨릭대학 신학연구소와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고 광주평화방송과 광주일보가 후원한 <5.18 민중항쟁 30주년 기념 학술발표회: 기억과 증언>의 제1주제 '5.18을 기억한다'에서 발표된 이재민 신부의 논문 <5.18을 기억한다>에 대한 나의 논평글입니다.
논평자는 저와 한상봉(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간이 맡았습니다.
제2주제는 '계시로서의 역사'이고, 발표자는 김상봉(전남대) 교수가 맡았고, 논평은 이상갑(변호사)와 김양래(전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맡았습니다.
이때 발표된 원고는 [전망]지에 게재될 예정으로 있습니다.
이재민 신부의 글을 첨부합니다.

이재민_5.18을 20기억한다(최종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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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기억의 숨겨진 소리

이재민 신부의 5.18을 기억한다에 대한 논평

 


 

전라도와 그 상징적 중심인 광주는 적어도 두 가지 모순된 기억으로 우리의 정신 속에 터 잡고 있다. 하나는 신뢰할 수 없다는 이미지로서 장소의 속성이 고착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이들은 이렇게 범주화(categorialization)[각주:1]됨으로서 사회적 배제의 대상이 된다. 전라도/광주의 사람들(그 장소성에 귀속된 이들)은 구체적인 행동의 빌미 없이도 이미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규정되며, 그러한 선험적인 범주적 규정에 따라 각종의 사회적 기회를 제약당해 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장소성은 저항의 민족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가령 동학운동이나 광주학생의거 같은 전라도/광주와 보다 긴밀한 연관을 갖는 저항의 서사는 많은 다른 저항적 집합행동 가운데 특별한 공식적 기억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전라도/광주 사람들이 보다 더 저항적이라는 통념을 낳았다. 해서, 이재민 신부가 글 서두에서 언급한 사례처럼, ‘광주에는 폭도들이 들끓고 있다는 신군부의 주장이 보다 손쉽게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것이 가능했고, 1980년대 학생운동권에서 남대협 신화가 널리 회자됐던 것도 이 장소성이 갖는 담론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전라도/광주의 장소성에 관한 기억의 주요 코드인 저항의 민족성도 역시 범주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구체적인 사례는 특화된 기억으로 고착화되었고, 그곳 사람들의 일반화된, 존재론적 속성처럼 이해된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저항적이라는 이 지역성에 얽힌 기억의 요소는 성화(聖化)되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5.18의 기억은 국가의 공식기억의 장에서 가장 특별한 예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례로 지정된 1997년 이후 2009년까지 총 13회 가운데 대통령이 직접 기념사를 낭독한 것이 7회다. 이는 최근 수행되는 국가기념행사(국경일 5, 기념일 40) 가운데 5.18행사가 사실상 가장 큰 비중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국가의례화된 5.18전라도광주라는 지리적 기표가 (국가/민족으로부터의 배제가 아니라) 통합의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전라도/광주라는 저항성의 성화된 요소를 중심으로 전체 사회가 통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규범적 지위를 지닌다.

이렇게 두 가지 기억,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부정적, 배제적 기억과 저항적인 사람이라는 성화된 기억은 서로 이율배반적이다. 특히 이 두 요소의 모순적 이미지는 다른 장소성에 비해 훨씬 극렬하게 마주친다. 한데 또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두 요소는 서로 상보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이다.

배제가 여전히 경험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에 그 배제의 희생자들을 매개로 하는 통합의 메시지는 더욱 효과적이다. 신뢰할 수 없다는 배제의 범주적 요소가 희생으로 재해석되며, 그것은 편견에 의한 사회적, 역사적 희생자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진다. 하여 신뢰할 수 없는 존재는 자기 초월의 상징이 된다. 그리하여 그들을 매개로 하는 사회적 통합은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광주항쟁 기념행사를 국가가 특별히 중요하게 의례화하는 이유겠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기초월과 자기퇴행이라는 이분법을 낳는다. 즉 전라도/광주 담론은 그 장소성에 귀속된 사람에 대해 두 가지 모순된 이미지를 상보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관념을 낳는다. 하여 전자는 퇴행 때문에 더욱 의미있고, 후자는 초월 때문에 더욱 문제적 존재로 해석되는 것이다.

여기서 근대일본 사회의 형성을 연구한 가노 마사나오(鹿野政直)가 오키나와 인의 집단적 체험의 왜곡을 논하면서 언급한 상흔(傷痕, 트라우마) 개념[각주:2]이 우리의 광주 기억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됨을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상흔은 배제의 기억이 신체 내에 잔류하여 제도적인 통합의 사회적 해석체계에 순순히 흡인될 수 없게 하는 내면적 요소다.

전라도 혹은 광주 사람들 각자가 겪어온 배제의 체험이 몸속에 기록되어야 하는 곳은 성화된 기억의 틀이다.[각주:3] 다중의 경험들은 그렇게 흡수되고 일원화된다. 배제의 체험들을 그렇게 기억함으로써 그이들은 전 사회적 통합의 중심 요소가 되며, 자기 자신 또한 사회 속에 통합된다. 이때 그 배제의 기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배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웅담이다. 곧 성화된 희생담은 영웅서사의 주인공으로 그이들을 주체화한다.

그런데 가노 씨의 말처럼, 그렇게 성화되고 주체화되는 배제의 기억이 아닌 것, 여전히 해원(解寃)되지 않은 요소가 신체 내에 잔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화된 기억은 그것이 언화화되는 것을 방해한다. 언어를 잃어버린 체험, 아직 해원되지 않은 그것은 안착하지 못하고 몸속을 배회한다. 하여 표현되지 못한 혹은 표현에 실패한 그것은 몸의 통제를 벗어나 부적절하게 몸 밖으로 표출된다. 가노 씨가 말한 상흔은 바로 이런 것이다.[각주:4] 그것은 의식에 의해서는 억압되고 있지만, 그들로 하여금 사회적 통합의 담론적 주역이자 대상으로 자리잡는 데 장애를 낳는 모종의 언어화되지 무엇이다.

가령 영화 밀양신애는 체험 속에 각인된 고통과 분노를 용서나 화해 같은 기독교의 초월적 기표의 규범성에 의해 봉쇄당한다.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빠르게 그 숭고함이 그녀의 내면에서 규범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것은 그녀 자신이 사회 속에 통합되거나 사회적 초월의 한 미담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다. 그녀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가노 씨의 오키나와 인의 집합적 체험인 상흔개념을 인용함으로써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기억의 정치가 끊임없이 실패하고 있다는 데 있다. ‘기억의 정치혹은 (이재민 신부의 표현을 따라) 기억하는 것(doing memory)은 단지 그 사건 5.18’(the event 5.18)에 그치지 않고, 더 이상 그러한 폭력이 없는 세상, 반폭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의미가 확대된 사건 ‘5.18’, 요컨대 반폭력으로 계보화된 사건의 원사건 5.18’을 향한 증언이자 결단이다. 이렇게 원사건의 의미지평이 획득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죽은 기억에 다름 아니다. 즉 그것에 관한 사회적 기억하기는 늘 사건을 현재화(contemporization)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의 보편화는 희생자의 사적 체험을 제거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형태의 배제를 체험하였는지에 관한 사적 기억들은 망각된다. 단지 희생자라는 숭고한 이름으로 호명될 뿐이다. 해서 사건의 보편화는 가해자와 희생자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야기한다. 이러한 단순화를 도미야마 이치로는 사고의 긴축(緊縮)이라고 하는데,[각주:5] 이 말이 함축하는 바는 사건의 희생자가 사건의 담론화 과정에서 망각된다는 것이다.

가령 5.18의 기억하기의 목적이 우리 사회가 힘 있는 자 중심이 아니라 ...... 없는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는 이재민 신부의 말에 아무도 이견이 없겠지만, 5.18 기억하기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참여정부 하에서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는 매우 깊고 견고하게 뿌리내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 번도 예외 없이 5.18 기념사를 직접 낭독했으며, 성화된 5.18의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통합을 강변했다. 이런 방식의 국가발전 전략은 국가의례로 5.18을 기념했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MB정부 모두에서 일관되게 관철되었다.

지구화 시대를 맞아 우리사회는 매우 빠르게 사회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고, 하위계층에 대한 사회적 배제가 급격히 심화되고 있다. 경제적 배제를 넘어서 사회 전반에 걸친 배제가 빠르게 제도화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 배제는 탈주체화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곧 경제적 배제를 겪고 있는 이들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된다는 맑스-레닌주의적 문제틀은, 사회적 배제의 체계가 제도화된 사회에서는 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한편 이러한 사회적 배제 현상과 맞물려서 하향분해된 최말단 영역에서 하위계급화(under-classification)가 맹렬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하위계급이론은 절대빈곤 지역에서 사람들이 더 범죄적이고 더 폭력적이며, 마약이나 술 등에 대한 의존성이 더 심각하고, 노동의 무능력화가 더 심화되고 있는 계층의 존재 박탈 현상을 다룬다. 여기서 없는 자는 단지 자산이나 기회가 없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부재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기초생활보호대상자가 되기 위해 동사무소의 사회복지사 앞에서 자식이 없고 재산도 없고 노동능력도 없고, ...’ 등등, 반복된 없는 자임을 증명하는 빈곤계층의 자활 행위의 수행적 효과는 그이들을 존재가 부재한 자로 전락시킨다.

민법이 사회적으로 실재하고 있지만 법적 행위 능력이 부재한 자로 취급되는 자를 일컬어 민법상의 행위무능력자로 규정하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존재하지만 사회적 행위 능력을 상실하고 그러한 행위 가능성까지도 박탈된 자, 곧 존재하지만 부재한 자를 사회적 무능력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무능력자의 두드러진 징후는 언어 붕괴 현상이다. 즉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자기조절에 실패한 부적절한 표현이 그이들의 특징이다.[각주:6] 상습적인 (가정)폭력과 방화, 마약과 알콜 중독, 혹은 자해와 자살, 고함치기, 일터에서 도망치기 등 병증적 이상행동의 특성을 보인다.

우리 시대의 없는 자는 이렇게 무능력화되고, 변증적 이상행동을 보이는 존재들로 빠르게 전락하고 있다. 주체가 유실된 존재, 주체의 복원 가능성이 점점 희박한 존재, 이들은 우리 사회의 사회적 시선에서 점점 포착되기 어려운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이들은 자기 표현에 실패하고 있고, 시민들은 비시민으로 전락한 자들이 사회적 모순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부적절한 존재 방식, 그 병증적 행위 탓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사회적 폭력은 은폐되고, 비시민적 존재들은 망각된다.

그러므로 5.18을 기억한다는 것, ‘없는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훌륭한 ‘5.18의 기억하기이지만, 동시에 그 속에 담겨 있는 주체화 전략은 5.18 희생자를 대상화함으로써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대상화는 그이들에 관한 구체적인 기억을 단지 하나의 축, 희생자 코드로만 긴축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

이러한 긴축은 고통의 경험을 제한한다. 19805.18 항쟁 당시 이른바 항쟁파에 가담한 다수의 사람들, 이진경과 조원광이 명명한 비인청적 인물[각주:7] 단수인 거룩함은 훼손되지만 다른 고통을 향한 열린 기억하기를 가능하게 한다.

5.18 기억하기는 이제까지 그 공식적 기억, 단수화된 기억을 형성해 가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신군부에 의한 기억의 훼손에 대한 저항의 역사였다. 199512월에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1995. 12. 21), 199712월에 제정된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17)5.18에 관한 기억의 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하여 광주사태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화됨으로서 5.18에 관한 기억의 정전화는 시작되었고, 계속된 5.18 기억하기는 거의 대부분 신군부에 대항하는 민중운동이자 민주화운동임을 반복적으로 재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1990년대 말부터 문부식이 제기한 새로운 기억하기는 정전화된 단수적 기억에 대한 기억의 다중화 투쟁의 산물이다. 그가 제기한 논점은, ‘5.18 기억하기는 신군부와의 기억투쟁만이 아니라 생산이라는, 증식에 대한 현대적 열광에 몰입하여 그 무자비한 폭력에 철저히 침묵한 것에 대한 제의적 정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각주:8] 지난 2008, 전남대학교 5.18연구소와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가 주최하고 5.18기념재단이 후원한 ‘5.18 학술대회는 이러한 기억의 다중화 투쟁을 수용하여 5.18 기억하기의 새로운 지형을 열어놓는 계기적 사건이었다. 나는 이 심포지엄에서 지식기반사회로 치닫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잊힌 이들에 관한 배제의 정치와 5.18의 삭제된 기억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었다.


5.18에 관한 대안적인 기억의 정치는 이 정전화된(canonized) 담론을 해체하고, 그곳에서 다양한 차이를, 특히 은폐되고 배제된 차이의 요소를 복원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 사회의 잊어버림의 존재를 발견하려는, 그들의 유실된 언어를 찾는 작업을 동반해야 할 것이다.[각주:9]

 

여기서 나는 이재민 신부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관하여 제기한 두 가지에 주목한다.[각주:10] 하나는 침묵을 배운다이고 다른 하나는 소통을 배운다이다. 침묵에 대하여 이재민 신부는 우리의 오염된 언어를 침묵시키는 법을 먼저 익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오염된 언어에 정전화된 기억을 포함시키고 있을까. 알 수 없지만, 나의 논리대로라면, 정전화된 기억, 그 기억의 보편화, 성화 과정은 희생자에 관한 사고의 긴축을 수반한다. 즉 희생자의 고통의 구체성은 망각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정전화된 기억까지도 우리는 말하기를 그치고, 그것에 의해 침묵이 강요된 것에 몸을 여는 의식을 수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한다. /우리의 자발적 침묵은 비자발적인 침묵에게 나/우리의 영혼의 자리를 비워주는 상징적 행위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의 두 번째 배움이 의의를 갖는다. 그는 소통을 말하면서, ‘무관심에 대한 저항이라고 부기한다. 소통의 장애는 비자발적인 침묵, 강요된 침묵에 있다. 혹은 가노 마사나오가 말한 상흔으로 인해 부적절하게 나의 몸 밖으로 드러난 언어, 그 비언어적 언어에 대한 우리의 편견에 대한 저항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겠다. 고통을, 왜곡된 언어로 표현되는 한, 그 울증을 읽는 시선이 필요한 것이다.[각주:11]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이재민 신부의 5.18 미사에 관해서다. 글 전체가 멋진 하나의 미사론이기도 하지만, 그는 마지막 단락에서 5.18 미사론에 관한 감동적인 논의를 펼친다.

이것은, 5.18 기억하기의 다중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규범화된 그리스도교의 예수 기억하기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담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대신 죽음을 기리면서 그의 죽음과 그것을 기리는 나의 상징적 죽음을 대응시킴으로써 구원의 신학을 펼친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대신 죽음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유일회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재민 신부는 주의 대신 죽음은 유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대신 죽음들에 대한 원사건이라고 주장한다. 하여 그는 5.18 희생자에게서 우리의 죽음을 본다고 말한다. 요컨대 5.18 희생자의 죽음은 예수의 죽음의 재현인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우리의 죽음으로, 아니면 적어도 배려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글 마지막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5.18 영령이여, 감사합니다.” 이 말은 5.18 미사에서 주를 기리는 감사의 기도를 대체한다. 모든 것을 한 사람의 죽음으로 환원시키는 예배가 아니라 많은 죽음들에 대해 감사하고, 그 죽음들의 감추어진 소리를 경청할 때, 5.18 미사는 언제나 우리 당대의 것으로 육화될 수 있을 것이다.

  1. ‘범주적 사유’에 대해서는 지그문트 바우만 임지현, 〈세계지성과의 대화: ‘악의 평범성’에서 ‘악의 합리성’으로: 홀로코스트의 신성화를 경계하며〉, 《당대비평》 21(2003 봄) 참조. [본문으로]
  2. 가노 마사나오, 〈오키나와, 주변으로부터의 발신〉,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문학과 지성사, 2004). [본문으로]
  3. 반대로 신군부는 ‘빨갱이’ 담론을 통해 광주 사람과 전라도 사람의 체험을 일원화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4. 언어화에 실패하고 몸속을 배회하는, 하여 표현의 실패로 드러나는 것을 나는 민중신학자들의 ‘한’의 개념으로 설명한바 있다. 이것은 가노 마나사오처럼 숭고한 기억의 억압에 의한 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지만, 고통이 언어화하는 데 실패함으로서 나타나는 부적절한 몸의 언어인 것이다. 나의 글 〈고통과 폭력의 신학적 현상학―민중신학의 당대성 모색〉(2006년도 조직신학자대회 발제글) 참조. http://theology.co.kr/wwwb/CrazyWWWBoard.cgi?db=jharticle&mode=read&num=1620&page=2&ftype=6&fval=&backdepth=1 [본문으로]
  5. 도미야마 이치로, 〈폭력의 서술: 프란스 파농〉, 《전장의 기억》(이산, 2002) 참조. [본문으로]
  6. 나의 글 〈'카인 콤플렉스'와 무능력자 담론〉, 《당대비평》 23(2003 가을) 참조. [본문으로]
  7. [/footnote]의 다수는 평상시에는 시민의 일원도 될 수 없고, 시민층의 결혼 상대도 친구도 이웃도 될 수 없는 탈주체화된 존재였다. 그들의 상흔5.18과 같은 혁명적 시기가 되어야 역사의 주체로, 대상화된 주체가 아닌, 실제의 주체로 부상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의 상흔의 흔적들은 5.18 기억하기에서 삭제되어야 하며, 그 항쟁의 결과로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하는 등의 희생자의 면모로만 주체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5.18의 현재화도 하나로만 관점이 긴축된 채 민중은 주체화될 수 있고, 그것은, 앞서 보았듯이, 민중의 대상화, 대상이 된 주체화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5.18 기억하기의 딜레마다. 이 얘기는 5.18 기억의 보편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재민 신부가 말하지 않은 것 하나를 첨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5.18 기억하기의 다중화(pluralization).

    원래 기억은 다중적이다. 다중적 기억이 단수의 기억으로 전환되는 것은 그 단수적 기억의 성화 과정(process of sacrization)과 맞물린다. 그 적절한 예가 성서다. 성서 문헌의 형성 과정은 야훼 기억의 다중성을 제한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먼저 정전(canon)이 구축됨으로써, 그 외부의 진정성을 제한하였다. 그럼에도 성서 속에는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다중적 기억들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책이 된 이후 성서는 해석의 제한을 가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교회가 기억하는 하느님은 자폐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웃과 다투고, 기어이는 이웃을 지배해야 하는, 그리고 그것을 위해 폭력을 감수해야 하는 종교가 되었다. 단수의 기억 외에는 허용하지 않는 기억의 성화 과정은 이렇게 지배와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를 수반했다.

    그런 점에서 성서에 대한 다르게 읽기는 성서적 기억의 자폐성을 가로지른다. 예컨대, 요한복음의 주가 사랑한(아가페) 제자주가 사랑한(에로스) 남자로 해석한다면,[footnote]Theodore Jennings, The Man Jesus Loved: Homoerotic Narratives from the New Testament (Cleveland: Pilgrim Press, 2003) 참조. [본문으로]

  8. 문부식, 〈‘광주 20년 후―역사의 기억과 인간의 기억. 끼엔, 나디야, 그리고 윤상원을 위하여〉,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삼인, 2002) 제2장. [본문으로]
  9. 나의 글 〈5.18 기억의 정치화와 민족―지구화 시대 민주화와 선진화 담론의 망각 체계〉, 《5.18 민중항쟁에 대한 새로운 성찰적 시선》(한울, 2009). [본문으로]
  10. 그는 세 가지 배우기를 제기하였다. 그중 첫 번째는 독일과 이스라엘에게서 기억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억은 대표적인 지양할 사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한데 그가 보낸 2차 수정본에서 그는 에필로그에 이스라엘의 기억하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본론에 담긴 배우기에 대해 스스로 부인하는 셈이어서 여기서는 더 논의를 하지 않겠다. 이에 대하여는 나의 글 〈홀로코스트 이후의 신학은 가능한가〉, 《시대와 민중신학》 11(2009) 참조. 한편 독일의 홀로코스트 기억하기에 대해서는 〈성화된 양심은 없다―우리 시대 양심의 도구화에 대한 하나의 문제제기〉, 《황해문화》(2006 여름) 참조. [본문으로]
  11. 〈왜 교회는 그녀의 고통을 읽지 못 할까―영화 <밀양>에 대하여〉, 《필름2.0》(http://owal.tistory.com/28)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