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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예수님을 바로 알고 싶은 그대에게 - 마커스 보그의 [예수 새로 보기]에 관하여

[세계의 신학] 37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1997 겨울), 266~75쪽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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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바로 알고 싶은 그대에게

마커스 보그의 예수 새로 보기에 관하여

 

 

 

 

역사의 예수문제를 탐구하면서 나는 두 가지 상반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주제에 대한 한국의 신학계나 교회의 관심 정도가 기대보다 훨씬 밑돌고 있는 반면,[각주:1] 최근 신약학계, 특히 북아메리카에서의 연구 동향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상당 수준의 성과를 이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최근의 예수 연구가 학제간 연구 경향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각주:2]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선, 적어도 신학 분야에선 학문간 제휴를 막고 있는 장벽이 여전히 너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신학계나 교회가 예수님에 관한 역사적 물음을 괄호친 채 신앙과 신학을 이야기하자는 루돌프 불트만 식의 견해에 결코 공감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훨씬 더 강하게 필요성을 요청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분야의 최근의 연구 동향이나 성과를 소개하는 작업이 명분을 얻게 된다.

다행히도 최근 몇년 사이 이에 관한 중요한 저술이나 논문들이 여럿 번역 출간되었고, 또 이런 연구 성과들을 소개하거나 재해석한 국내 학자들의 글이 여러 편 발표되었다.[각주:3] 그 덕분에 예수 연구사의 최근 경향인 제3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마커스 보그(Marcus Borg)가 유행시킨 예수 르네상스가 이제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어휘는 아니라는 인상이 든다. 비록 그 함의가 충분히 이해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는 점이 있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역사의 예수라는 문제설정은 우리들에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신앙의 핵심적 위상을 갖는다. 그러나 예수의 역사성의 난관을 돌파한 최근의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은 아직 전문가들만의 잔치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역사의 예수는 아직 신앙의 화두 혹은 20세기 말의 문명비평의 화두로서 자리잡지 못한 채, 아카데미즘의 책상머리에 핀 공허한 한송이 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예수 연구사 전체가 대체로 그랬던 것처럼, 예수 르네상스의 진원지인 북아메리카의 예수 학계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 점에서 여기서 논평하고자 하는 보그의 예수 새로보기(Jesus: A New Vision, 1987)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 책에서 신학과 신앙을, 나아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성과 세계라는 탈종교성을 만나게 하는 데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 작업은 감동적이라 할 만큼 성공적이다.

 

지난 1989, 서평을 읽고 나서 나는 이 책을 입수하려 백방으로 애썼다. 그리 구하기 어려운 것은 아닌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만 지체됐다. 다 잊을 즈음인 1993년 봄, 미네아폴리스에 있던 한 선배로부터 소포 하나를 받았다. 그렇게 속썩이던 책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박한 장정을 하고 있었다. 처음 독서를 시작했을 땐 채 절반도 읽지 못한 상태에서 그만 뒀다. 한편으론 다른 일로 바빠서 였지만, 다른 한편으론 내용이 너무 평이한 것이 성에 안 찼던 탓이다. 지난해 예수 역사학강의를 위해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으나 역시 전부를 보는 데는 실패했다.(당시는 김기석 목사에 의해 이 책 번역이 한참 진행 중이던 때다) 최근 이 책에 대해 다소의 시비를 걸기볼 요량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번 만에 겨우 성공했다. 마침 살림세계의 신학에서 서평 요청을 받은 탓에 번역본까지 읽을 수 있었다. 두 번이나. 여러 차례 읽는 과정에서, 이 책에 대한 비판적 입지는 거의 변하지 않았으나, 나는 묘한 매력에 사로잡혔다. 처음에 나를 싫증나게 했던 바로 그것에 말이다. ‘평범함의 미학이랄까!

예수 새로보기는 지나치리만큼 평이함을 시종 견지하고 있다. 도무지 비약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만큼 이 책은 신중하게 독자를 향해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어떤 점에선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처럼 자극적인 달콤함을 건네줄 수 없어 지루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만큼 탄탄한 연구 성과를 기대면서 주장을 펼친다. 그래서 이 책 정도면 최근의 예수 연구자들의 주류적 견해[각주:4]를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안심하고 소개할 만하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이나, 좀처럼 종교에 동화되지는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존재 의의에는 진지하게 질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모두에게 이 책은 예수님을 이야기하려는 취지를 갖고 있고, 그 취지를 어투의 평이함으로 실현하고 있다.

보그가 이러한 조심스러움으로 말하고자 하는 새로운 예수상은 이 책의 부제에서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 문화, 제자됨(spirit, culture, and the life of discipleship). ‘이 종교의 영역(신앙의 영역)이라면, ‘문화는 탈종교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마치 근대서구의 사상사가..통속적으로 이해되는 바에 따르면..영으로부터의 탈출의 역사처럼 해석된다면, 보그는 물질주의 문명에 의해 기각된 영의 복권을 통해서만 바르게 조명될 수 있는 예수상을 말함으로써, 이 이미지 재현(representation)이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에 대해 새로운 비전일 수 있음을 강변한다. 또 교회사로 해석된 근대서구의 신앙사가 반물질주의(신학적으로는 인간 중심주의에 반하는 신학적 사유)영 중심주의로 회귀하고 있다면, 보그는 영의 세계 내적속성, 즉 문화적 속성[각주:5]을 전제하고서야 비로소 바르게 재현되는 예수상은 말함으로써, 인간에게 유의미한 새로운 비전으로서의 예수론을 펼친다. 바로 문화의 차원에서 균형 잡힌 사고, 균형 잡힌 삶, 균형 잡힌 실천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는/모방하는 참된 제자도를 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보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의 이미지를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한다. 즉 예수님은 전통적인/인습적인 지혜를 뒤엎고 대안적 지혜를 가르치는 현자, 자비를 실천하는 카리스마적 치유자(성인), 하느님나라의 자비의 정치를 선포하는 사회적 예언자이자, 그러한 대안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종교적 갱신운동(재활성화 운동)의 창시자였다는 것이다. 이 유형론의 네 차원은 역사적이고 영적인 존재의 대비적 차원을 짜임새 있게 유형화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예수 이미지를 구성하기 위해 현행 학계에서 논의되는 예수관을 조화롭게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여기에서 예수님에 관한 비교적 충분히 입증된 여러 가설에 기초한 책임 있는 견해를 볼 수 있다. 이 책은 이 가운데 현자이자 갱신운동 지도자로서의 예수상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자가 문화적 차원의 영역에 개입하는 예수 이미지 재현의 결론이라면, 후자는 영적 차원과 결부된 예수 이미지 재현의 결론이다.

여기서 보그는 문화’, 거룩의 영역(신앙의 영역)사회역사적 영역(물질주의의 영역)을 매개하는 실천을 정치라 부른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정치(politics),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것과는 달리, 권력 장악을 위한 준법적 게임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탈권력의 실천이라는 함의를 이 용어에 부여한다. 그래서 자비의 정치라는, 얼핏 보면 형용모순인 듯이 보이는 어구가 사용될 수 있었다. 배제와 폭력으로 점철된 사회적 세계의 권력 메커니즘에 개입하고 있음에도 예수님은 이런 세계의 권력 게임에 자신을 용해시켜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는, 아니 권력 욕망 자체를 해체하는 영적 세계의 메커니즘인 자비의 정치를 펼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그에 의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적 삶은 필연적으로 자비를 본질로 하는 신앙의 정치를 근간으로 해서 추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의 신앙적 교훈은 바로 이 신앙의 정치적 차원’, 즉 역사적 개입과 그것의 초월(자비를 통한)이 신앙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왔다는 것이다. ‘신앙의 정치적 속성을 망각했다는 것은 영과 문화, 이 두 영역의 이원성에 기초하여 영적 세계에만 과도하게 관심하는 거룩의 정치에 몰입되어 있거나, 반대로 물질적 세계에만 집착하는 세속의 정치에 치우친 삶을 의미한다. 이 둘은 외형상 다른 모양을 취하고 있으나 사실은 공히 업적과 보상의 신념 체계요, 그렇기에 그것은 배제의 정치요, 특권의 정치다. 반면 역사상의 예수님은, 배제와 특권에 대한 박탈과 업적/보상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습적 지혜를 전복시킨다. 나아가 그 분은 온갖 배제된 자들을 향한 자비의 정치의 토대를 세운다. 그리하여 안이한 일상을 넘는, 삶의 근본적인 변혁를 추구하는 신앙이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예수 새로 보기는 바로 이런 예수의 이미지를 찾아내고, 그에 따른 자비의 삶 속에서 정치를 실천하는 것과 더불어 실현된다.

 

하지만 이 책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움을 남긴다. 여기서는 이 중 가장 문제라고 여겨지는 두 가지를 토로하고자 한다. 우선 그의 필체의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평이함에 관해서다. 신중하게 견해를 펼친다거나 논리 전개에 있어서 비약이 절제되어 있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독자에게 퍽 친절한 글쓰기며 학문적 엄밀함을 견지한 자세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그의 평이함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고 보이는데, 가령 예수 이미지의 네 가지 유형화에서 그의 문제점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미 말했거니와, 예수가 현자요, 카리스마적 치유자요, 예언자요, 종교 갱신 운동의 창시자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잘 균형 잡혀 있지 않은 유형론이다. 이 네 유형간의 차이가 불분명하고, 설명들도 서로 간섭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설명들은 이론적으로 너무 약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이론적 설명들은 주로 비교론적 접근에 의존하고 있는데, 비교방법의 원칙이 견지되기보다는 무원칙적인,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편이적인 선택에 의한 비교자료의 임의적 활용이라는 의혹을 좀처럼 떨칠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미지로 제시된 모델들이 이 네 가지이어야 하는 것은, 즉 인류학에서 고대농경 사회의 사회종교적 운동의 지도자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수많은 비교자료 가운데서 이 네 가지가 특별히 선별되어 사용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운동의 실재(reality)에 관한 역사사회학적인 분석에 의거한 결론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예수 학계의 논의가 숫적으로 이 네 이미지에 수렴하는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보그의 평이한 언술 속에 담겨 있는 문제점은, 기존 연구들의 합의 지점을 평면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의 글쓰기가 낳은 한계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유형론은 그리 이론적이지도 설명적이지도 못한, 다만 기성 학계의 주류적 논의를 절충한 예수론에 그치고 말았다.

둘째로, 보그는 예수 연구의 르네상스기인 현재의 예수 학계가 양적으로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전환을 이룩했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려 함에도..아마도 그의 사고의 한계 탓에..여전히 과거에 함몰되어 있는 평가에 그치고 마는 경향이 있다. 가령, 예수 메시지에서 종말론을 이차적인 것이라고 보는 현행 학계의 합의를 단순히 수용하는 그의 견해가 그렇다. 종말론적 요소는 이차적이고, 반면 지혜적 요소가 일차적이라는 문제설정은 그의 예수론의 근간을 이룬다. 이런 가정 위에서 예수님은 전통적/인습적 지혜를 넘어서는 전복적 지혜를 강조한 분이라는 결론이 보그의 평가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추론 배후에는 종말론적 언술과 지혜적 언술이 상호 대립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이 책이나 다른 글들에서 종말론이나 지혜 등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내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대체로 언술의 목표 지점이 현재를 지향하고 있는가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가라는 기준에 의거해서 이 둘을 가르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그는 금세기 초에 이미 불트만에 의해 성서 해석 방법론으로 도입된 실존주의적 시각조차 넘어서지 못한 사고의 한계를 드러낸다. 불트만에 의하면, 인간의 언술은 표면적으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적 다층위성을 포괄하고 있으며, 이 다층적 시간성은 분절적 형태로 언술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의미를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이것은 발화자의 언술 시점이 발화의 존재의 시점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발화자가 미래적 표현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 미래 시점에 발화의 존재 자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가령, 어떤 사형수가 형 집행 전날, 신을 향해 이 세상천지가 무너져 내리기를 간구했다고 하자. 이때 그 발화자는 일어날 미래를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발화가 (마치 예고의 말처럼) 그 미래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발화자인 사형수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절규하는 언술의 형태가 바로 미래적 발화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발화자의 현재의 실존(Existenz)의 자리에서 과거적 혹은 미래적 언술 형태가 작동하고 있음을 본다. 요컨대 현재뿐 아니라 과거나 미래적 언표는 서로 결합되어 의미를 주고받음으로써 발화자의 현재의 실존을 풍부하게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종말론적 언술을 말하면, 이것은 미래 지향적 혹은 과거 회고적 언표를 통해 극적인 의미 효과를 자아내는 언술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미래와 과거적 언술을 통해 현재의 지배적 언술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파괴함으로써 현재의 가치를 전복시킨다. 이에 반해 지혜적 언술은, 현재의 전통을 단절시키는 시간적 언표가 억제된 언술 형태다. 그래서 지혜적 언술은 일상적이며, 현재의 지배적 가치를 전복시킬 때조차 전통에 의존한다. 즉 전통의 본질에 호소함으로써 현실의 왜곡된 의미화를 교정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언술과 지혜적 언술은 서로 배반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종말론적 언술을 쓰는 동시에 지혜적 언술을 사용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언어의 특징이다. 우리는 삶의 많은 영역에서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전통적 가치에 따라 현실에 순응하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종말론적 언술을 통해 현재를 넘어서는 현실을 바라보기도 한다. 가령 시험 준비를 전혀 못한 학생이, 교실에서 불이라도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 것도 일종의 종말론적 사고인 것이다.[각주:6] 요컨대 종말론적 언술과 지혜적 언술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신불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요소들은 우리의 사고와 정서를 더욱 풍부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보그가 종말론을 굳이 예수님과 분리하고자 했던 이유는 있다. 그것은 예수 연구사의 주류가 종말론적 예수론을 펼쳐왔고, 바로 이런 접근 결과는 역사적 탐구의 위기를 노정해주었던 것이다. 반면 최근의 예수 르네상스의 큰 흐름은, 역사적 돌파구를 종말론적 요소가 아닌 지혜적 요소에서 발견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그는 지혜적 예수상을 종말론적 예수상과 분리한 뒤, 전자에서 역사적 진정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견해를 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런 시각은 사람의 언술이 종말론적이면 지혜적일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전제 위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역사적 위기는 바로 이런 이원론 때문에 발생한다.

보그의 책이 안고 있는 두 번째 문제를 지적하면서, 종말론에 관해 이렇게 길게 얘기한 취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시공간적으로 현세와 탈세를 분절시키는 사고를 무의식 중에 전제하고 있다. 이런 가정의 연장선상에서 영과 문화의 이원화도 자리 잡는다. 요컨대 그는 실제로는 그 경계를 설정할 수도 없고, 서로 무관하게 존재할 수도 없는 상호적 대상을 가설적으로 이원화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만의 한계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 사상사의 지배적 흐름이 안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원론적이고 실체론적인 인식론은 그 설 자리를 상실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예수 역사학에 있어서도 이원론적 사유로부터의 엑소더스를 통해서만 진정한 예수 르네상스의 계기는 마련될 수 있다.

 

이상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보그의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것은, 한국 그리스도교에 있어 퍽 행운스런 일이다. 그것은, 이미 말했듯이, 이 책이 최근의 역사의 예수연구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평범한 독자가..그가 교회의 성원이든 아니든 간에..특별한 전지식 없이도 그 내용과 취지를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드문 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의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문 못지않게 평이한 문체로 되어 있다. 만약 교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건강한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러한 신앙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어떤 가치관으로 표현되어야 하는가등을 진지하게 묻고자 하는 독자라면, 이 책은 그에게 줄 것이 매우 많을 것이다.


  1. 지난해(1996)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에서 개설한 신학 아카데미의 첫 강좌로 나는 ‘예수 역사학’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였다. 수강생 대부분이 신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이었고, 또 학습능력이 평균이상 수준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 연구사에 관한 이들의 지식이 상식 수준 혹은 그 이하였다는 점이다. 후에 알고 보니 각 신학교에서 ‘역사의 예수’를 다루는 학습 과정이 거의 없거나 혹은 전무했다. [본문으로]
  2. 사회과학, 특히 인류학이나 고고학과 접맥된 사회과학 이론들, 현대의 해석학적 혹은 비평학적 이론들, 유다교에 대한 비평학적 연구의 성과 및 페르시아 제국에서부터 로마제국에 이르는 시대의 문헌 고증학이나 고고학적 연구를 포함하는 역사학적 연구 성과 등이 역사의 예수 연구에 많은 빛을 던져 주고 있다. [본문으로]
  3. 번역 출간된 주요 저술들로는, G. Theissen, 조성호 옮김, 《예수운동의 사회학》(종로서적, 1981; 독일어원본은 1978); E.P. Sanders, 이정희 옮김, 《예수운동과 하느님나라》(한국신학연구소, 1997; 영어원본은 1985); R.A. Horsley, 이준모 옮김, 《예수운동. 사회학적 연구》(한국신학연구소, 1989); E.S. Fiolenza, 김애영 옮김,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신학적 재건》(태초, 1993; 영어원본은 1983) 등이 있고, 《최근의 예수 연구》(최갑종 엮음; 기독교문서선교회, 1996)에는 J.P. Meier, E.P. Sanders, J.H. Charlesworth, J.D.G. Dunn 등의 저술이 발췌 번역되어 있다. 그밖에 연구 동향을 소개하고 있는, 김진호 엮음, 《예수 르네상스》(한국신학연구소, 1996); 최갑종의 《나자렛 예수》(기독교문서선교회, 1996)의 서론 〈예수 연구의 파라다임〉; 《세계의 신학》 35~36호(1997 여름‧가을)에 연재된 P. Fredriksen의 논문 〈역사적 예수 연구의 최근 동향〉 등 참조. 한편 이러한 성과를 반영한 국내 연구자의 글로는 조태연, 《그리스도교 기원의 탐구. 예수운동》(대한기독교서회, 1996)과 김명수의 어록에 관한 다수의 연구논문들이 주목할만하며, 그밖에 김창락, 김진호, 최갑종, 김덕기 등의 글을 보라. 그러나 여기서 소개한 저술들의 가치가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은 못한 형편이며, 또한 아직 국내에 소개조차 되지 않은, 혹은 이름으로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나 아직 글로는 익명 상태인 중요한 저술들이 무수히 많다. [본문으로]
  4. 아직도 ‘주류적’이라는 말이 타당할까 하는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면서 감히 이 말을 쓴다. 나는 여기서 최소한 ‘다수의’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는 의미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다. [본문으로]
  5. 이것은 Martin Heidegger나 Rudolf Bultmann의 용어로, ‘인간 존재 내면에서 재현하는 역사성’이라는 실존주의적 관점을 함축하는 용어다. 내가 보기에 M. Borg의 ‘문화적’이라는 어휘는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다만 그는 전기하이데거나 불트만에서 후퇴되거나 생략된 인간 외부의 역사성이 인간 존재를 구속하는 차원(존재구속성)을 ‘문화적’이라는 어휘 속에 또한 함축하고 있다. 이때 Borg는 인간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 사회적 실재를 ‘사회적 세계’(social world)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6. 물론 종말론적 공동체는 일상적인 경우보다 더욱 현저하게 종말론적으로 사유하는 집단이다. 이들은 종말론적 언표의 효과를 통해 집단적으로 강렬한 에너지를 충전하게 되며, 이 공동체의 지도자로 말미암아 충전된 에너지를 발산하는 통로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시대 팔레스틴의 대중과 예수님의 관계가 그렇고, 조선후기 사회에서 농민들과 동학운동 지도층의 관계가 그렇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