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논평

그의 비평에는 ‘저자’만 보인다 - 정용섭의 《설교의 절망과 희망》를 읽고

[창작과 비평] (2008 가을)에 실린 글


---------------------------------------



그의 비평에는 저자만 보인다

정용섭의 설교의 절망과 희망(대한기독교서회, 2008)를 읽고

 

 

 

기독교신자가 자신의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얘기하는 것은 필경 담임목사의 설교일 것이다. 또 어떤 이가 교회를 새로 선택할 때 가장 관심을 갖는 것 역시 설교겠다. 한편 개신교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한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 거의 전부가 설교를 가장 중요한 목회의 요소라고 대답했다.(목회와 신학20074. 98.3%) 개신교 신앙에서 설교는 목회자와 신자 모두에게 교회 활동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교인들은 거의 매주일 같은 목사의 설교를 접한다. 또 주중에는 수많은 다른 예배들이 있다. 많은 교인들이 한 주에 둘 이상의 예배에 참석한다. 그럼에도 그이 설교를 변함없이 경청하는 교인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설교 내용을 예배 밖, 삶의 공간에서까지 기억하는 경우는 아주 제한적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는 수련과정에서부터 수없이 많은 설교를, 심지어 한 주에 10회 이상의 설교를 하면서 성장한다. 요컨대 대개의 목회자들은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설교를 수행하는 게 일찍부터 몸에 밴다.

그런데도 설교가 그렇게 압도적으로 목회활동의 중심이라는 게 사실일까. 또 교인들에게 설교는 신앙생활에서 정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일까. 실제로는 아무리 봐도 그럴법하지 않음에도, 목회자나 평신도나 생각 속에선 그렇다고 믿는 것, 이게 바로 설교다.

최근 들어 이른바 설교비평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이 표현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기독교 신자 대중 사이에서 폭넓게 회자된 것은 예리한 논객이자 잡지 기획자인 한종호(월간 기독교사상편집부장)의 공이 크다. 이제까지의 설교비평들과는 달리 그는 비평하고자 하는 텍스트 속에 담긴 신앙적 요소를 사회적 공공성의 차원과 대면시키며 논평을 가했으며, 이를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닌 대중을 향해 타전했다는 점에서 보다 진정한 의미의 비평의 영역을 개척하였다고 평할 수 있다.

저서 전병욱 비판적 읽기(2001)에서 시작하여, 기독교사상에서 심포지엄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를 기획하여(2004) 같은 제목의 좀 더 본격적인 설교비판서를 출간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고(2006), 이 심포지엄의 발표자의 하나인 정용섭에게 200310월호부터 200712월호까지 무려 38편의 설교비평을 연재하도록 지면을 내주었다. 정용섭의 저 유명한 세 권의 설교비평서(1: 속 빈 설교 꽉 찬 설교(2006)/ 2: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2006)/ 3: 설교의 절망과 희망(2007))는 거의 이 연재물들을 묶어 놓은 책이다. 이 세 권의 책 속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개신교 목사와 몇 명의 서양 설교자들을 포함한 39명의 설교비평이 수록되어 있으며(1권과 2권은 각 14, 3권은 11), 3권에서는 그의 비평에 대한 반론 혹은 답글 형식의 글 6편도 수록되어 있다. 그가 다룬 설교자들의 대부분은 한국의 초대형교회 목사들이며, 그는 이들을 논평하기 위해 수백에서 수십 편에 이르는 설교를 검토하였다.

그의 글은 대단한 파장을 일으켜, 2007년 설교학회가 주관하는 심포지엄 한국교회를 위한 설교비평은 바로 정용섭을 논평하기 위한 설교학자들의 학술마당이었다. 그러나 그의 글을 더욱 열광적으로 수용한 것은 신학전문가가 아니라 기독교 안팎의 대중이었다.

대개의 목사들에게 설교는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작금의 설교비평은 그러한 설교자들의 자기 이해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불신을 반영한다. 나아가 그들이 주도하는 교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것은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설교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음에도 실제로 통용되는 설교가 그다지 완성도 높은 텍스트로서 유통되지 못하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요컨대 설교는 목사들과 교회들의 약한 고리인 셈이다.

정용섭의 설교비평은 다른 사람으로서는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열정을 함축하고 있어 독자를 잡아끄는 파토스가 넘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보다 더욱 주목할 것은 격한 비판의 문체에 있다. 그의 설교비평이 설교자들과 교회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불만의 정서와 만나 시장에서 소비되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비평이 예외 없이 인물비평인 것은 이런 소비상황에 안성마춤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설교들의 텍스트성에 주목하기보다는, 하여 수용자에게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여부보다는, 그것의 저자성(authorship)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그가 말하는 저자성은 특정 설교자의 모든 설교 텍스트를 꿰뚫고 있는 불변의 주체인 저자를 가리키고 있다.

비평을 생산자의 관점에서 수행하는 정용섭은, 그런 점에서 늘 계몽적 포지션을 지킨다. 특히 생산자가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에게서 바른 성서 해석의 출발점은 언제나 역사비평학이다. 물론 그는 성서학자가 아니며 역사학에도 정통하지 못하다. 해서 그가 말하는 역사비평학적 기준이란 늘 불안정하다. 어떤 때는 실증주의적이고 어떤 때는 포스트주의적으로 편의적으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그는, 어떤 역사관을 통해 비판을 수행하든, 결론은 계몽주의적으로 돌아가고, 비판의 대상인 설교자들의 전근대적이거나 몰근대적인 단순이분법적 성서관, 신앙관, 세계관의 발견에 이른다.

그의 설교비평은 대중의 열광적인 소비를 낳았고, 설교와 신앙을 그가 생각하는 사회적 공공성의 차원과 대면할 수 있도록 하는 신앙적 인식의 준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점은 그의 약점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설교의 생산자에게만 비판적 시선을 집중시킬 뿐, 독자인 대중의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저자가 의도하지 못했던 의미가 수용자인 청중 혹은 독자에게 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그의 비평에서는 도무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 하려면 하나하나의 텍스트가 위치한 사회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컨텍스트에 대한 정교한 분석이 필요한데, 설교자 한 사람 전체를 통째로 읽어내는 방식에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목회자는 어린 시절부터 설교 한 편을 정교하게 구성하는 능력을 학습하기보다는 다양한 목회 기술을 체득하는 훈련을 통해 성장한다. 그것은 설교 텍스트들 간을 꿰뚫는 깊은 사상적 일관성보다는 한 편 한 편의 임의적인 목적의식이 보다 강하여, 설교는 다른 작가들의 텍스트보다 임의성이 더 강한 텍스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정용섭의 설교비평은 설교라는 장르에 대한 보다 적절한 비평으로서의 가능성을 갖기에는 치명적인 한계를 갖는다. 하지만 그의 인물비평적 설교비평은,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현재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아래로부터의 개혁의지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