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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상상의 과거’의 정치학 - 키스 W. 휘틀럼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침묵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

이 글은 [당배비평] 25 (2004 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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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이라는 상상의 과거의 정치학

 



키스 W. 휘틀럼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침묵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이산, 2003)

Keith W. Whitelam,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The Silencing of Palestinian History (Psychology Press, 1996)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야훼 신앙의 출현에 관한 역사라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인에게 중요하고, 이스라엘 민족사의 기원에 관한 역사라는 점에서 국민국가로서의 현대 이스라엘에게 중요하다. 또한 유럽과 북미의 그리스도교적 제국주의의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위해서 그리고 석유로 인한 국제정치경제학적 전략을 위해서 이스라엘 고대사는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이 분야의 연구를 위해 막대한 연구 기금이 다방면에서 두 세기 이상 지속적으로 투여되어 왔고, 여러 동기를 가진 전문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이 영역 안으로 뛰어들었으며,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연구가 가능한 수많은 학제들이 구축되어 왔다.

그런데 어느 분야의 고대사 연구자들도 누리지 못한 이러한 행복한 형편에 놓인 고대 이스라엘사를 휘틀럼(Keith W. Whitelam)위기라고 판정한다. 개연성 있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학제 배후에 놓인 권력관계 내지는 이해관계가 연구자들의 학문적 신념 속에 무의식적으로 내재화되었다는 판단에 근거한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동시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삶을 영위했던 많은 종족들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만이 유일한 실체적 행위자였다는 인식론적 전제가 이제까지의 모든 가설들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해왔으며, 그것이 바로 고대 이스라엘에 관한 역사학적 위기의 요체라는 얘기다. 여기에는 이스라엘비이스라엘이라는 우리저들의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전제되어 있다. ‘비이스라엘이라는 표현처럼 저들은 이름 없는 존재들이고,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 역사학은 그들의 침묵위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침묵의 역사학이 관철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역사적 자료를 찾아내기 위한 조사 및 연구 자체가 지나치게 한쪽 편에 편중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거주 지역이라고 추정된 동부 고지대의 집중적인 연구와는 달리 비이스라엘계 지역이라는 서부 해안평야 지대는 거의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한편 편중된 조사연구뿐 아니라 수집된 정보의 가치를 판별하고 분류하는 데 있어서도 고대 이스라엘 역사학의 위기가 내포되어 있다. 이때 유사성과 차이에 관한 균형 잡히지 않는 편견이 개입된다. 예컨대 이스라엘 내부의 자료들은 보다 유사성이 강조되고, 그 외부와는 차이가 강조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이스라엘계와 비이스라엘계 사이의 차이를 위한 근거로 활용되며, 또 이스라엘 종족 내의 통일성을 위한 자료로 이해된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역사적 상상력의 정치학의 문제이다. 정보와 정보 사이의 공백을 채워 넣는 작업, 곧 역사적 상상력에 역사가의 동시대적 편견이 교묘하게 개입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저자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학문 언어의 권위는 가설을 (학문 언어 논리의 외부인) 학제적 맥락과 떼어서 사유하도록 강요하며, 특히 그것이 신학적 언어일 때 학문 내적인 논리적 맥락으로부터도 종종 자유롭게한다는 것이다. 신의 섭리는 역사적 논리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 상상력의 정치학은 고대 이스라엘에 관한 상상의 과거발명해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최근의 연구사적 논의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학은 크게 네 단계의 전개 과정으로 설명된다. 1920년대 이후의 알트(A. Alt) 학파와 1950년대 이후의 올브라이트(W.F. Albright) 학파는 이 분야의 고전적 가설을 대표한다. 흔히 이주가설정복가설이라고 각각 불리는 이 주장들은, 서로 대립각을 높이 세웠지만, 팔레스타인 외부에서 들어온 종족적 집단이 사회적 조직에서나 문명 수준에서나 원주민을 압도하는 새로운 사회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공통된 관점을 견지한다. 차이가 있다면 서서히 이주해 들어온 것이냐 갑자기 대대적인 정복을 통해 들어온 것이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이나 신학생들이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지식은 바로 이러한 고전 가설의 기반한 일련의 논의들이다.

한편 1970년대 중반 이후 고전 가설에 대한 수정주의적 견해가 제시되었다. 흔히 혁명가설이라고 불리는 이 논의는, 노먼 갓월드(N.K. Gottwald)의 거의 천 쪽에 달하는 대작이 그 중심에 있다. 실은 그 훨씬 이전(1962)에 올브라이트의 제자인 조지 멘덴홀(G.E. Mendenhall)이 발표한 논문에서 혁명가설이 최초로 제기되었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하다가 갓월드에 의해 연구사적 전환점으로 거론되면서 새삼 중요한 저술로 평가되었다. 이후 멘덴홀이 갓월드의 가설이 사회적 혁명을 강조하는 데 반해 자신은 문화적 혁명이라고, 양자의 차이를 부각시키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혁명가설의 가장 주된 공통점이자 연구사적 공헌은 고대 이스라엘은 외부인이 아니라 바로 팔레스타인의 내부의 기층대중에서 유래했다는 관점을 확고하게 했다는 데 있다. 또한 이들의 연구가 중요한 것은 비교인류학과의 학제간 연구의 성과가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는 데 있다.

한국에서 갓월드의 기념비적 저작은 민중신학적 지향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읽혀지기 시작했고, 적어도 일각에서는 한때 열렬한 탐독의 대상이었으며, 그의 학문적 명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오늘날에는 적지 아니 회자되고 인용되는 주요 저작에 속한다. 하지만 방대한 학제간 연구의 소산으로 제기된 이 책의 풍부한 이론적 함의들은 거의 제대로 독해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더욱이 목회 현장에서는 이 책의 이론적 함의는 고사하고 문제의식의 일부라도 거의 참조되기조차 않는 상태에 있다.

마지막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연구들이 쏟아졌는데, 이 논의들은 2의 수정주의적 연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고전가설들과 혁명가설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식론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 연구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내부에서 출현한 것이라는 합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갓월드를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혁명가설을 따르지 않는다. 이주가설이나 정복가설, 혁명가설이 공유하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잘 조직된결속체는 왕국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 최근의 추세는 왕국 출현기인 기원전 10세기보다 훨씬 후대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사회문화적 결속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이데올로기적이고 사회적인 통합의 수준을 매우 낮게 평가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다른 팔레스타인 족속들과 이스라엘이 잘 구별된사회적 실체였다는 전제가 고대 이스라엘 역사학에서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도 최근 이들의 저작이나 논문이 조금씩 번역 출간되고 있어 약간의 인지도가 생기기도 했지만, 성서학자들조차 대부분 제2의 수정주의적 견해를 거의 알지 못한 형편이다.

이상에서 약술한 연구사적 궤적은 한국의 신학계에선 여전히 먼, 낯선 현상이다. 말한 것처럼 고전 가설들이 대부분의 논의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성서 역사학에 대한 저급한 관심은 수정주의적 논의를 따라가기조차 어려운 여건을 조성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성서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수정주의적 견해들은 고전가설에 비해 성서를 훨씬 비판적으로 대면하고 있다.

교회나 교회의 신학은 통상 성서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는 관점을 공공연히 혹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근대 이후 성서학은 이러한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어느 정도 균형 잡힌시각을 가진 것처럼 행세해왔지만, 그러한 균형은 성서 역사학이 교회의 성서 이해의 경계를 월장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실행되는 균형이었을 뿐이다. 뒤에서 좀더 얘기하겠지만 휘틀램은 이 책을 통해서 교회주의적 전제가 얼마나 성서 이해의 암초가 되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이때 교회주의적 전제는, 휘틀럼이 보기에는, 교회와 서구 중심주의, 이스라엘 민족주의의 교묘한 절충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수정주의적 견해들이 성서를 더욱 비판적으로 보려한다는 것은 성서가 역사적 사실 자체 혹은 기준점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하나의 해석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다른 이해도 있었다는 당연한 인식을 연구에서 참조하겠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다른 이해의 주체들에 관한 선입견 없는 조사 및 연구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적 연구에서 이와 같이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한 인식을 수정주의적 태도라고 할 만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성서 역사학이 돌파해야 하는 교회주의적 전제라는 벽이 그만큼 두텁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교회주의적 성서관의 전제에 구속된 가설들을 통해 고대 이스라엘 성서학, 나아가 성서 역사학은 하나의 상상의 과거를 구축해왔는데, 그것은 성서에 내포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전체라고 오인해온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이해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한국 신학의 학문 제도 속에서 이러한 수정주의적 연구가 소개된다는 것은 아웃사이더적인 테러 행위의 일환이거나 아니면 서구를 선망하고 서구의 새로운 것에 대한 환상 속에 사는 자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제도로서의 그리스도교에 반감을 가진 이른바 냉담신자층과 반그리스도교적 외부자를 독자로 겨냥한 듯한 몇몇 출판물들 가운데 뜻밖에도 고대 이스라엘사에 관한 중요한 저술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연구사에 대한 친절한 소개는 없지만 수정주의적 논의를 담은 몇 편의 책 혹은 논문이 번역됨으로써 낯선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독특하고 세심한 감수성을 가진 일단의 독자들에게는 미묘한 호기심을 자아냈다. 이 책들이 출간된 이후 나는 몇 사람으로부터 그러한 문의를 받은 바 있다. 다행히도, 고대 이스라엘사가 나의 주된 연구 분야가 아님에도, 1990년대 중반 이후 적어도 3~4년간 그 동향에 탐닉한 적이 있었던 덕에, 그 직전에 수행했던 어떤 성서교재 작업에서 가졌던 나의 편견과 새로운 연구의 문제제기 사이에서 심하게 격동을 겪었던 경험 덕분에, ‘침묵의 미덕을 절대시하지만은 않을 수 있었다.

휘틀럼은 이 최근의 제2의 수정주의적 견해를 대표하는 연구자의 하나다. 그런데 이 책의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저술은 고대 이스라엘사에 관한 대안적인 역사를 저술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기획된 것이다. 실은 고대 이스라엘사라기보다는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를 그는 쓰려 했다. ‘대안적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문제설정을 함축한다. 그는 이 대안적인 역사 저술 작업에서 심각한 장벽을 경험했다.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연구사 자체가 동시대를 함께 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왜곡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휘틀럼이 평가하기에는 이러한 편견과 왜곡은 최근의 수정주의적 연구들도 그다지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 편견과 왜곡으로 점철된 연구사적 과오를 통렬하게 문제제기하는 이 책을 저술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이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은 그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지역의 기억을 대표하게 되었다. 1의 수정주의적 견해까지 모든 연구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형성기를 기원전 12세기에서 10세기 사이로 본다. 그것은 전() 국가사회로서의 부족동맹체 이스라엘의 형성기이거나 이스라엘 족속의 국가 형성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그 정체성이란 다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기억의 주체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이다.

한편 제2의 수정주의적 연구는 기원전 12~10세기에 이스라엘은 다른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전적으로 변별된 주체가 아니었다는 개연성 있는 정보들을 찾아낸다. 요컨대 양자간의 범주적 구별을 찾아내는 것은 적어도 이 시기에는 불가능하다. 범주적 차이는 몇 세기 이후에나 가능했다. 이 사실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는 상상의 과거는 바로 이 범주적 차이를 이스라엘이 역사상 처음 대두하던 시기와 직결시킴으로써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이 한갓 이스라엘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부패한팔레스타인 족속들의 역사를 대체하는 신적 역사라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데 있어 기원전 12~10세기의 상상의 과거를 고수하는 것은 이제까지의 교회주의적 그리스도교의 신앙/신학에서는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휘틀럼이 보기에 제2의 수정주의를 대표하는 연구들조차 이러한 상상의 과거를 해체하는 데 어물거리고 있다. 새로운 발굴물이나 새로운 해석조차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교정해 놓은 해석이 여전히 역사적 연구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바로 이 점이 휘틀럼이 가장 힘주어 말하는 부분이다. 그는 거의 모든 연구자들의 역사적 상상력에 영향을 미치는 학문적 무의식의 이면에는 서구 중심주의적 인종주의, 진보사관, 민족주의가명시적이든 비명시적이든 간에깔려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학자들이 명시적인 인종주의자이거나 진보주의자,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학문적 엘리트 형성을 야기하는 학문 시장이 연구자들을 규율한 결과일 것이다.

아무튼 그것은 땅에 대한 소유권이라는 현대 이스라엘 국민국가의 이해관계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정치적 현실에 책임이 있는 서양의 제국주의적 사유의 자기 정당화에 고대사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해석의 유용성이 있다. 나아가 석유 자원 등을 둘러싼 메소포타미아 지역 일반에 대한 서구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태도와 연관되어 원주민에게 진보라는 선물을 선사했다는 인식의 연장선상에 고대 이스라엘 역사가 배치되어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은 고대사회에서 부패한 팔레스타인 족속들에게 진보를 선사한 요체로서 해석되어 왔다. 이것은 현대 이스라엘 시온주의에 대한 유대주의와 서구주의의 공모의 논리이기도 하다. 현대의 국민국가 이스라엘은 원주민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진보의 선물을 주는 존재로서 자기를 정당화했고, 서구의 제국주의는 아랍 지역에 대한 자기들의 지배력의 타당성의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이라고 정당화한 것이다.

휘틀럼의 저술은 비약이 거의 없다. 오히려 치밀하고 냉철하게 이제까지의 연구를 자기비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모든 지배적인 연구는 그의 날카로운 지적 앞에 도피할 공간을 찾을 수 없을 듯하다. 물론 어설픈 지식으로 민중신학적 성서 배경사를 다뤄왔던 나의 편견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날조된 역사에 대한 고발 자체라기보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망각의 역사를 되살리려는 초혼가일 것이다.

이 책이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망각을 조작하고 체계화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이 구축되었다는 그의 문제제기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신랄한 도전이다. 그의 성찰대로라면 타자의 배제뿐만 아니라, 그 배제된 것의 수용 방식도 문제시된다. 자기 중심주의적 영향력이 타자들에게 선물일 수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제까지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 선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침묵시킨 타자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타자화된 그()를 실어증에 빠지게 했던 수많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장치들의 해체를 수반해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이제껏 이러한 침묵의 정치를 제도화해온 공모자인 이상, 신앙은 이러한 공모에 기반한 정체성을 해체하는 데서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반신학적이고 탈교회적이며 자기 해체적인 기반에서 모색되어야 한다는 성찰에로의 초청이 이 책의 핵심적인 미덕이다.